최근 수정 시각 : 2024-03-05 23:17:16

정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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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3. 가람4. 고양이 설화



正陽寺

1. 개요

북한 강원도 금강군 금강산에 내금강에 있는 사찰. 대사찰은 아니라 금강산 4대 사찰에 들어갈 정도는 아니지만 빼어난 경치로 이름이 높았다.[1] 6.25 전쟁 때 어떻게 절이 사라졌는지 사진으로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절이다.

2. 역사

정양사는 백제 무왕 1년(600)에 백제의 고승 관륵(觀勒)과 강운(降雲)이 창건한 이라는 전설이 전한다. 그런데 알다시피 금강산은 백제나 그가 주로 활동한 왜국과 거리가 먼 한반도 동북부, 적국인 고구려신라의 영역에 있었고 절의 역사를 더 오랜 과거로 뻥튀기하는 사례가 흔했기 때문에[2] 이 전설이 역사적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입장도 있는 모양. ## 유홍준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도 부정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절의 역사가 긴 것은 확실한 것이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구조물인 정양사 3층석탑이 전형적인 신라식 3층석탑이기 때문에 늦어도 신라시대에는 창건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 세가 기울었는지 661년(신라 문무왕 1년)에 원효(元曉)가 중창하였고, 다시 고려 태조 대에 또 중창하면서 규모가 커졌다. 고려태조 왕건이 금강산을 을 지나가는중 담무갈보살(법기)보살이 갑자기 석상에 현신하여 수많은 보살에게 설법하는 모습을 보고 이곳 정양사를 크게 중창하여 유명해졌다.

일제강점기 때까지는 남아 있었지만 한국전쟁 당시 큰 피해를 입었으며, 지금 남아있는 건 신라 때 만든 삼층석탑과 석등, 그리고 목조건물은 반야전과 약사전만이 남아있는데 조선 초기에 다시 세워진 것을 조선 후기에 각기 부분적으로 고쳐 지은 건물이다.

2.1.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파일:강원진양 금강산 정양사 약사전과 석등과 석탑.jpg
일제강점기 정양사 - 출처:국립중앙박물관[3]]

파일:attachment/JYtemple01.jpg
파일:attachment/JYtemple02.jpg
일제강점기의 정양사와 현재의 모습.

한국전쟁 때 헐성루, 나한전, 영산전 등 많은 건물이 불타버리고, 반야보전과 약사전(藥師殿), 약사전 앞의 삼층 석탑과 석등(북한 보물 제53호)만 남아있다. 금강산 지역의 절들 대부분은 미군폭격에 의해 사라졌다. 그나마 살아남은 약사전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처마 밑 기둥들이 없어지고, 문틀이 바뀌고 코끼리벽화가 사라지는 등 원형 훼손이 심해졌다.

사실 주변의 지형들을 보면 일제강점기의 정양사 역시 완전한 모습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지금의 정양사를 보고는 과거의 모습을 상상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다행히 이 사진이 있어 과거를 알 수 있으며, 정양사는 한국의 문화재가 어떻게 사라지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가 되었다.

3. 가람

정양사는 내금강의 절 가운데서도 가장 경치가 좋은 곳이어서 예로부터 금강산 탑승을 하는 이들에게 필수적인 탐방처였다.

정양사의 중심인 반야보전은 정면 3칸(11.13m), 측면 3칸(8.7m)정도의 크지 않은 건물이지만,[4] 건물 전면에 걸쳐 화려한 금단청을 장식한 조선 후기 건축양식의 전형이다.

반야보전 앞에는 약사전[5]이 있다. 약사전은 못을 하나도 쓰지 않았으며, 기둥 위 안팎으로 연꽃과 연잎모양의 제공을 붙인 포식 두공만을 여러 겹으로 짜올려 들보 없이 천장을 대신한 특이한 구조다. 그리고 6각형 평면에 6모 지붕을 얹은 전각형식의 건물이다. 한국에서는 유일한 것이다. 다각형 전각 자체가 한국에서는 흔하지 않지만, 보통은 일본호류지 몽전처럼 8각형의 형태를 취한다.

약사전 앞에는 3층 석탑과 석등이 있는데, 이 석등은 신계사, 장연사의 탑돌과 모습이 같다.

4. 고양이 설화

연산군 때 박상이란 젊은이가 있었다. 연산군 7년(1501년) 때 무려 과거(식년시 을과)에 붙었고 막 임관하려던 참이었다. 연산군에게 전국에서 한다하는 처녀들을 바치던 채홍사전라남도 나주에서 황쇠부리(黃牛夫里,혹은 우부리)라는 자의 딸을 뽑아갔다. 딸이 연산군의 총애를 받으면서 불과 백정이던 쇠부리가 막대한 권세를 부렸고, 뇌물을 받아챙기는가 하면 부녀자를 겁탈하고 남의 논밭을 빼았는 등 행패를 부렸다. 호남 관찰사도 꼼짝 못하는 판에 1506년 32살의 박상이 도사직을 자청해 나주 관아로 내려갔다. 도착하자마자 일부러 쇠부리에게 부임인사를 보내고는 와보지 않는다는 구실로 남자 일가붙이들을 잡아 금성관 마당에서 다 때려 죽였다.

옳은 일이었지만 박상은 임금의 장인을 때려죽인 것이다. 보고를 받은 연산군은 금부도사에게 사약을 들려 보냈다. 자수하러 서울로 떠나던 그는 정읍 입암산 갈재를 넘게 되었는데, 그 때 웬 고양이가 길을 막아서 금부도사와 길이 엇갈리는 바람에 박상이 목숨을 건졌다. 박상은 서울로 가던 길을 틀어 금강산에 숨었고, 그가 신세를 졌던 절이 바로 정양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종반정이 일어나 더 이상의 후환이 없게 되었고, 박상은 무려 사헌부의 정헌, 즉 대간이 됐다. 박상은 이에 감사하면서 강원도 화천군의 하남면에 있는 수십두락의 땅을 사서 정양사에 고양이를 위한 제사를 맡겼는데, 이를 묘전(猫田)이라 했다. 정양사 묘전은 조선시대 내내 여러 사람 손을 거쳤는데, 그 때마다 밭에서 작물이 자라지 않아 다시 절의 품으로 돌아왔다고.

그러다 일제강점기가 되자 소유주가 모호하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에 뺏겼다고 한다. 해방 이후에는 38도선 이북 지역에서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주도로 토지개혁이 이뤄졌으므로[6] 이때 정양사 소속의 묘전도 모두 몰수되어 해당 지역 농민들에게 분배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로 묘전이 딸린 절은 세조(조선)를 자객에게서 구한 고양이 전설이 내려오는 상원사도 있다. 오대산에 있어 지금도 가볼 수 있다.


[1] 표훈사와 가깝다.[2] 이건 한국만 그런 것도 아니고 중국이나 일본 등 웬만한 나라에서는 늘 있는 일이었다.[3] 이 링크에서 다운로드 가[4] 두공은 바깥 5포, 안 7포이다. 공포문서를 참고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흘림식 기둥에, 천장은 작은 널조각을 井자형으로 잇대어 짜서 평평한 딴 천장인 소란반자를 만들고 합각지붕을 씌웠다.[5] 약사여래를 모시는 건물.[6] 묘전이 위치한 화천군은 해방 직후 38도선 이북에 위치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