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1-16 11:53:36

금강산

1. 북한 태백산맥 북부에 있는 산
1.1. 지명적 개념1.2. 역사1.3. 금강산이 남한의 땅이었다면?1.4. 관광1.5. 환경 정책1.6. 군사 시설1.7. 문학1.8. 동요1.9. 기타 금강산을 소재로 한 작품1.10. 사찰
2. 전라남도 해남군의 산3. 경상북도 경주시의 소금강산4. 경상남도 창원시 소재 천주산의 별칭

1. 북한 태백산맥 북부에 있는 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17px-The_Imperial_Seal_of_Korea_03.png 대한제국의 오악(五岳)
북악 백두산
서악 묘향산 중악 북한산 동악 금강산
남악 지리산
금강산
金剛山 | Geumgang Mountain

위치 파일:북한 국기.png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강원도 금강군·고성군·통천군 (사실상)
[[파일:대한민국 국기.png|width=30] 대한민국 강원도 고성군(남한), 통천군, 회양군 (이북5도, 명목상)
높이 1,638m (비로봉)
산맥 태백산맥(백두대간)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할 때, 하루는 금강산을 만드는 데에 썼을 것이다."[1]
- 1926년, 당시 스웨덴 황태자 구스타프 6세 아돌프[2]

북한강원도에 있는 산으로 역사적으로 한반도에서 가장 유명하고 아름다운 산으로 평가되며 신라부터 일제강점기까지 많은 문학과 예술의 배경이자 인기있는 관광지였다.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한민족의 명산으로도 유명하다. 영어로 의역한 '다이아몬드 마운틴'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남북분단으로 북한령에 편입되면서 찾아가기 힘들게 되었고,[3] 햇볕정책의 일환으로 1999년~2008년 사이에는 남한 사람들도 일부 구역을 갈 수 있었지만 박왕자 씨 피살사건을 계기로 남북관계 경색으로 관광이 중단되었다.[4]

금강산 관광 중단 직전인 2009년엔 방문객 누적계수가 10만명을 돌파하기도 했다.

1.1. 지명적 개념

높이 1,638m에 태백산맥 북부에 있으며, 북한의 행정구역상으로 강원도 금강군·고성군·통천군에 걸쳐 있는 산이다.[5] 하지만 실질적으로 보면 금강산과 그 일대의 모든 산줄기들을 금강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금강산하면 떠올리는 것은 역시 금강산과 그 일대 산을 모조리 묶어 관용적 표현으로 굳은 '1만 2천 봉우리'고[6] 그 중에서 최고봉인 비로봉이 가장 눈에 띈다. 금강산을 주제로 한 동요와 가곡이 있을 정도다.

흔히 안쪽 내금강과 바깥쪽 외금강으로 나뉜다. 기준은 남북으로 이어지는 오봉산, 상등봉, 옥녀봉, 비로봉, 월출봉, 차일봉 줄기를 경계선으로 해서 내륙을 향한 서쪽이 내금강, 동해 바다를 향한 동쪽이 외금강이다. 대체로 내금강은 상대적으로 완만하고 외금강은 경사가 가파르다.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는 금강산 여행 하면 주로 내금강 쪽을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지만, 남북분단 이후 금강산 관광 때는 전방 군사지역이 많은 내금강은 별로 공개되지 않았고 주로 외금강 코스에서 진행됐다. 이 외에도 외금강의 남쪽 부분을 신금강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금강산에 속하지는 않지만, 강원도 고성 바닷가에 위치한 여러 기암괴석군들을 해금강이라고 부른다.

계절별로 이름을 따로 가지기로 유명한데, 이는 각 계절마다 금강산이 보여주는 풍경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에는 금강산(金剛山), 여름에는 봉래산(蓬萊山), 가을에는 풍악산(楓嶽山), 겨울에는 개골산(皆骨山), 그리고 눈이 내렸을 땐 설봉산(雪峰山), 묏부리가 서릿발 같다고 상악산(霜嶽山), 신선이 살고 있다 하여 선산(仙山) 등으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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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단풍의 풍악산. 그리고 금강산 경치를 링크에서 볼 수 있다.# 산림청이 제공하는 금강산 사진

이처럼 뛰어난 경관으로 매우 유명한 명승지의 대명사로도 손꼽히기 때문에, 다른 지역의 명승지 중에서도 금강산의 이름을 딴 지역도 있다. 경주시소금강산(작은 금강산)이나[7] 거제시해금강(바다의 금강산), 해남군의 금강산이 대표적인 예시다. 이외에도 전국 각지의 아름다운 산들은 고래로부터 '**의 금강산'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함경북도의 금강산이라고 불리는 칠보산, 황해도의 금강산이라고 불리었던 장수산[8], 의주군의 금강산이라는 석승산(일명 석숭산, 금강산, 525m) 등이 있다.

경복궁 재건 때 사용된 질이 좋은 소나무 목재로 유명한 '금강송'도 금강산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1.2. 역사

고대 중국의 역사서에도 자주 등장할 정도로 뛰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삼국시대부터 신라화랑들이 금강산을 유람해왔으며 지금도 영랑봉 봉우리와 같이 이름에 남아있다. 영험한 산으로 신라 중심지에서 거리가 먼데도 불구하고 백수십곳의 사찰이 창건되었고, 고려 시대에도 그 명성은 계속돼 중국 북송 대의 시인 소동파도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 번 보는 것이 소원이다.(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고 한다.[9][10]

다만, 이 말을 소동파가 직접 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는데 일단 조선왕조실록 태종 4년 9월 21일 己未 1번째기사에서 '중국의 사신이 오면 꼭 금강산을 보고 싶어 하며, 고려에서 태어나 친히 금강산을 보는 것이 소원이다(願生高麗國, 親見金剛山)라는 말이 중국에 있을 정도다'고 하므로 꼭 소동파가 아니라도 금강산에 대한 소문과 명성이 중국에 퍼져 있었다는 것 자체는 분명하다.

조선시대 수많은 문인들이 금강산을 읊은 작품들이 수없이 많은 점에서도 그렇다. 그저 유람하기 위해서가 아닌 목적에서 금강산 정상에 처음 오른 인물은 신정왕후 조씨의 조카인 조성하였는데, 이가 1865년에 있었던 일이다.

일찍이 금강산의 경치는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조선 시대에는 태종이 명나라 사신이 올 때마다 자꾸 금강산 타령을 해서 귀찮아한 이야기도 있다. 대동여지도에서도 백두산과 함께 다른 산과 달리 화려하게 그려놓았고,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한반도 최초의 전기철도[11]금강산선을 직접 건설하고, 일본 본토에 있는 일본인들이 일부러 서울까지 찾아와서 관광열차를 타고 금강산을 여행했을 정도로 금강산 관광 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한 사례까지 있었다.

영국의 여행가이자 작가로서 아시아 각국을 여행하고 조선에 대해서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을 쓴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세계 어느 명산의 아름다움도 초월한다며 금강산을 극찬했으며,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6세 아돌프는 왕세자 시절에 한국에 방문해 1926년에 금강산을 방문하여 금강산의 경치에 감탄한 적이 있었다.

그때 활용했던 금강산 전철은 하필이면 노선 대다수가 민통선비무장지대와 일치하는 바람에 지금도 복구하지 못 하고 있다. 거기다 일부 구간은 금강산댐 건설로 수몰된 상태다. 자세한 것은 금강산선 문서를 참조하자.

일제강점기 그 시절인데도 금강산 관광객의 출입관문격이었던 장전항은 관광도시가 되어 읍으로 승격하였으며, 여관이 가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장전항은 전쟁과, 통행의 자유가 없는 북한 치하에서 쇠퇴하게 된다.

1.3. 금강산이 남한의 땅이었다면?

휴전선과 약 20km 떨어져 있으며, 삼일포 등의 권역까지 합하면 고작 7km밖에 안 된다. 그래서 1951년 4월 ~ 5월 조금만 더 북진을 했으면 금강산을 점령할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올드 밀리터리 계에서는 1970년대부터 있었던 꽤 오래 먹은 이야기이다. #(백선엽의 회고) 통천군 이남은 모두 금강산 권역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지역을 다 점령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므로 아쉽지 아니할 수 없다. 다만 지금의 동해안 방면 휴전선은 거의 자연 계곡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고, 이 지역을 먹었다면 군사적으로 원산시까지 바라볼 수 있다는 의미라 휴전 때까지도 혈전이 거듭된 곳이었다. 금성 전투 문서 참조.[12][13]

만약 대한민국의 (실효지배) 영토였다면, 금강산은 한라산(1,950m), 지리산(1,915m, 2봉 반야봉 1,732m), 설악산(1,708m)에 이은 대한민국의 4대 명산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그래도 남한 쪽에도 양구군의 가칠봉, 고성군의 향로봉 등 7개 정도의 봉우리가 산줄기 끄트머리로 나 있다. 단지 휴전선 부근이라 못들어갈 뿐이다.

1.4. 관광

제6조(잠입, 탈출) ①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점을 알면서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부터 잠입하거나 그 지역으로 탈출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개정 1991·5·31>
②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의 지령을 받거나 받기 위하여 또는 그 목적수행을 협의하거나 협의하기 위하여 잠입하거나 탈출한 자는 사형·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③삭제<1991·5·31>
④제1항 및 제2항의 미수범은 처벌한다.<개정 1991·5·31>
⑤제1항의 죄를 범할 목적으로 예비 또는 음모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⑥제2항의 죄를 범할 목적으로 예비 또는 음모한 자는 2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개정 1991·5·31>

지금도 그 수려한 경관은 여전해서 금강산을 한 번 다녀온 사람들은 그야말로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다. 다만 경치가 근사한 바위마다 붉은 글씨로 수령님 찬양을 빙자한 환경파괴를 싸질러 놓아서 거슬리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다.

파일:attachment/d0082905_4c39fa4fe7687.jpg


대표적인 경우 중 하나. 그나마 붉은 글씨가 아니라서 다행일 정도다. 문제는 이거 한 개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상 그저 넙죽하다 싶은 바위에는 이렇게 김씨 일가를 찬양하는 글귀를 새겨넣은게 태반사다. 그렇다고 없애자니 바위 자체를 파쇄하면 또 자연파괴이므로 비석에 새긴 문구 바꾸듯 사포질을 열씨미하거나 콘크리트로 바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면 자연스럽게 저 부분만 떼어내거나. 아니면 그대로 보전해 독재권력의 악독함을 교육시킬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수도 있겠지만 워낙 글씨가 흉물(...)이라 실제로 본 사람들은 차라리 없애 버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금강산 관광이 이루어지던 시절 금강산에서 해당 만행을 본 유홍준 교수가 정말 이래버리고 싶냐고 자신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적나라하게 써놓고 분개한 적이 있다. 아마 통일이 된다면 유 교수의 심정에 동의하는 국민들이 많을듯.

사실 북한의 저런 짓거리에 나름의 근거는 북한 이전에 신라 최치원의 '천장백련 만곡진주(千丈白練 萬斛眞珠)' 글씨부터 시작해서 고려~조선시대에도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금강산의 바위를 파서 자기들의 문장을 써넣었다는 것이다. 금강산은 전국에 흔한 등산목적지가 아니라 최소 신라 때부터 1천년 이상을 성지순례 대상에 가까울 정도로 모두가 가보고 싶어하는 장소였다. 제주도 사람 김만덕도 왕이 소원 하나 들어주겠다니 금강산을 가보고 싶다고 소원을 빌었을 정도였으니. 이 결과 실제로 금강산을 가보면 김일성의 낙서뿐 아니라 북한 이전 시대 수백년간 한문으로 바위에 새겨놓은 글씨도 금강산에는 엄청나게 많으며, 문구의 퀄리티는 제각각이라 문학을 한 사람도 많고 그냥 옛날 낙서인 것도 많다. 김일성의 흉물들은 거기에 꼽사리를 낀 것이다.[14] 심지어는 같은 바위에 왼쪽에는 옛날 문장과 그 오른쪽에 나란히 새겨놓은 것도 많아서 나중에 처리할 때 상당히 고생할 것으로 보인다.

1998년 11월 18일부터 현대아산을 통해 한국에서도 직접 금강산 관광이 가능하으나, 너무나 안타깝게도 2008년도에 발생한 금강산 피격 사건 이후 단 1명의 대한민국 관광객도 금강산 관광지구에 들어가지 못 하고 있다.

다만 금강산의 진면목이 모든 관광객에게 개방된 건 아니었다. 초창기에는 북한의 군사지역이 많은[15] 내금강이 개방이 안 되었는데, 문제는 조선시대, 일제강점기까지 금강산 여행 하면 내금강을 말하는 것일 정도로 비중이 높은 곳이었다. 내금강은 2007년 5월부터 제한적으로 열렸다. 그러나 정상 비로봉 코스는 결국 금강산 관광이 폐지되는 날까지 일반 관광객에게는 개방되지 않았다. 즉 2000년대에 금강산을 가본 사람이라고 해도 금강산의 핵심을 제대로 봤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금강산 관광의 시초는 1988년에도 정주영 회장이 추진하였으나 남북고위당국자 예비1차회담에서 북한이 팀 스피리트 훈련의 무조건적인 중단을 주장하는 어거지를 써서 실패하였다. 지금이야 이야기거리지만 북한이 군사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본격적인 금강산 관광을 시작하지 않을 거라는 우려는 1999년에도 있긴 했다. 그러나 결론은 그나마 10년간 관광. #[삭제됨]

당시 금강산 관광의 대상자는 한국 내국인에게 국한되어 있었으며, 외국인은 내국인의 관광상품을 이용하는 것으로 한정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금강산을 관광하는 도중에 외국인을 만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다. 홍보가 덜 되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홍보를 제대로 하고 외국인 관광코스도 마련한다면 아마 외국에서도 반할 것이다. 그 정도로 경관이 빼어나다.

문제는 가격이었다. 2007년을 기준으로 1박 2일, 즉 호텔 1박은 최성수기 + 주말에 인당 금강산 호텔 34만원, 해금강 호텔 29만원이었다. 물론 비수기 평일로 하면 이 가격은 28만원, 23만원까지 낮아지지만 결코 싼 가격은 아닌 것은 분명했다. (2박은 초기에 인당 80만원 정도였다고 한다. 그나마 육로 관광으로 낮아진 가격이 인당 35만원. #) 덤으로 점심, 저녁식대(각각 10달러)와 온천욕(12달러), 교예공연관람(25달러), 삼일포관람(1만원)이 옵션이었다. 게다가 새벽 6시까지 강원도 고성에 알아서 도착해야 한다는 문제도 있었다. 그래서 금강산 관광 인원의 상당수는 정부 보조를 받아야 했다. 이는 현대아산이 50년 동안 독점을 위해 6년 3개월 동안 9억 4,200만달러, 실제로는 4억 9,000만달러(5,000억원 상당, 현금 1억 4,000만원)의 어마어마한 비용을 내야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만약 5,000억 원을 50년으로 나누어 계산하면 10년에 천억 원 꼴인데, 이건 실제 관광객 10만 명에 비해 매우 큰 액수였다(인당 100만원 꼴).

다만 당시 현대아산 임직원 및 가족은 사원복지 차원에서 금강산 관광을 갈 수 있었고, 전국 사회(역사 포함) 교사들을 차례로 선발하여 금강산 관광을 보내 주기도 했다. 이 사람들은 대체로 편히, 그나마 덜 비싸게 갈 수 있었다.

대북경색 이후에는 중국에게 관광사업이 넘어가기도 했다. 30여 명이 한 팀이 되어 북․중 접경 도시 룡정시 삼합에서 회령을 거쳐 어랑군으로 들어가 전세기로 평양 순안공항, 다시 버스로 금강산을 가는 복잡한 코스다. 4박 5일 8,500위안(157만원 상당)으로 북한의 아리랑 공연[16]을 보는 것까지 고려하면 저렴한 편이지만 (기사에 따르면 2배로 뛴 가격으로 추정) 그럼에도 여전히 비싼 편이다. #

금강산 관광 재개 가능성은 2013년 남북회담에서 점쳐졌으나 실현되지 못 했다. 2015년 12월 정부 당국자는 UN의 대북제재를 무시하고 금강산 관광을 재개할 수 없다고 밝혔다. 관광 재개 수익금이 WMD(대량살상무기)와 무관하다는 보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

박근혜 탄핵 이후 정국이 조금씩 해빙되면서 다시금 남북간 금강산 관광 재개가 점쳐졌으나 동일한 이유로 국제사회의 눈치가 보여 지지부진한 상황이고, 김정은은 초조해진 것인지 2019년 10월 22일에는 남측과 합의 하에 관리가 안 된 시설들을 철거하라고 지시하였다.[17] '너절하고'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진다'는 디스도 덤.

1.5. 환경 정책

제한적인 금강산 관광이 실시되던 시절, 월경하면 가장 먼저 놀라게 되는 것이 말로만 듣던 북한의 민둥산이 사실이었구나 하는 점(...) 같은 한반도, 같은 강원도땅이었음에도 70년을 넘게 분단체제 아래 다른 여건 아래 놓이면서 매우 달라져버린 풍경에 상당한 충격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동시에 또 하나 놀라는 점은 그 와중에도 금강산만큼은 한국의 국립공원 못지 않게 삼림이 울창하고 온전하게 자연환경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금강산 관광 기간에는 그 많은 사람들이 방문했음에도 깨끗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이는 쓰레기를 버리면 벌금을 물고, 화장실을 이용하는 것도 요금을 무는 등,[18] 북한의 환경정책이 딱히 우월해서라기보단, 접경지역+산지라 인간의 손이 잘 닿지 않아서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환경보존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현대아산이 서로 상통한 결과다. 그렇다 보니 깨끗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

이런 깨끗한 모습들로 하여금 진귀한 생명체들이 많이 서식을 하고 있으며, 그것도 모자라서 금강산 계곡물을 직접 떠다 마셔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깨끗한 수질을 자랑한다. 금강산 관광 중 물 담은 비닐이 나무가지에 매달려 놓은 모습도 있는데, 이것의 정체가 바로 식수다. 북한 주민들의 경우에는 이 금강산 물을 그대로 마시는 모양이며, 실제로 마셔보면 시원함을 느낄 수가 있다. 단, 관광객이 직접 물을 뜨는 것은 역시 불법행위이며, 벌금이 물리나 눈치껏 하면 마셔볼 수도 있다. 깨끗하다고 해서 담그는 행위나 생명체에 해를 끼치는 등의 행위는 역시나 벌금이 상당하다. 하지만 중국자본이 도입되어 개발된다면 이런 과하게 엄격한 보호정책은 크게 후퇴할 듯.

2006년도까지는 금강산 계곡에서 아무나 물을 뜨는 것이 가능했다.

하도 관광객이 많이 다녀서인지, 종종 보이는 다람쥐도 사람을 보고 겁을 먹지 않는다고 한다. 보통은 가까이 다가가면 후다닥 도망치는데, 금강산 다람쥐는 사람이 손을 뻗치건 말건 신경 안쓰고 자기 할 일 한다(...). 설악산도 잘 안 도망가던데...

현재 묘향산과 함께 북한의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올라와 있다. 군사지역 근처라 환경이 보존되어 있고 아름다운 기암괴석과 비경을 가지고 있으니 북한이 의지를 갖고 등재를 추진한다면 충분히 정식으로 등재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1.6. 군사 시설

볼 거리가 상당히 많은 금강산 지역이지만 정작 금강산 지역이 군사지역이 많아서 사진 촬영은 지정된 장소에서 찍어야 하며 그로 인하여 제한 구역이 많다(...). 군사분계선 인근에 위치해 있고, 분단선 쪽에 엄청난 군 병력들이 산재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광하러 들어갈 경우 금강산 관광특구로 들어가기 전까진 엄청난 군사 시설물들을 구경할 수가 있다. 물론, 이것들은 촬영 자체가 금지된 것들이며, 촬영시 카메라를 몰수당하고 남한으로 추방된다.

만약 제22보병사단을 간다면 남한 쪽 봉우리 중 하나인 향로봉 덕분에 21개월 동안 금강산 끄트머리 정도는 볼 수 있다. 또한 백두산 부대에서도 가칠봉을 관할해서 이쪽 GOP로 근무 서러 가면 금강산 최남단에 이르게 된다. 12사단 향로봉대대 선점중대에 배치되면지옥이다 향로봉 꼭대기에서 근무도 가능하다.

다만 그러한 위협을 무릅쓰면서 북한이 관광을 했다는 건 돈벌이가 되었다는 것이고 군사지구이긴 하지만 핵심까진 아닌 그냥 군사지역이었다는 거다. 그렇지 않고서는 관광자체가 불가능하다.

1.7. 문학

금강산의 인지도로 인해 그와 관련한 노래와 문학작품도 무척 많은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동요 금강산부터, 가곡 그리운 금강산도 금강산을 배경으로 한 노래이기도 하다. 고등학생들을 괴롭히는 고전 시가의 최종보스인 관동별곡도 적지 않은 부분에 걸쳐서 금강산의 풍경을 노래하고 있다. 정비석의 산정무한 역시 마찬가지.

유홍준 교수가 저서 <나의 북한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이를 두고 "금강산을 소재로 한 글을 모으면 도서관이 되고, 금강산을 소재로 그린 그림을 모으면 미술관이 된다"라고 하였다. 그만큼 금강산이 소재로 쓰인 예술 작품이 많다는 뜻.

금강산을 예찬한 글 중 가장 유명한 말로는 중국 송나라의 문장가인 소동파의 문장이 있다.
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 (원생고려국 일견금강산)
원하건대 고려국에 태어나서 한번만 이라도 금강산을 보았으면 한다.

1.8. 동요


강소천 작사, 나운영 작곡의 동요이다. 가사는 아래와 같다.
금강산 찾아가자 1만 2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철따라 고운 옷 갈아입는 산
이름도 아름다워 금강이라네
금강이라네

금강산 보고싶다 다시 또 한 번
맑은 물 굽이쳐 폭포 이루고
갖가지 옛 이야기 가득 지닌 산
이름도 찬란하여 금강이라네
금강이라네

2000년도의 통신회사 퍼스넷 광고의 CM송이 이 동요에서 나왔다. 앞 사람이 "퍼스넷 따라가자"라고 부르면 뒷사람이 "앞선 인터넷"이라고 부르는 식이다.


해피투게더 쟁반노래방 2002년 5월 23일 방영분에서[19] 이효리가 첫 소절 담당을 최초로 했는데 첫번째 시도에서는 평소보다 짧은 전주에 첫 박자를 놓치고, 일곱번째 시도에서는 옥주현과 남자얘기했던 걸 생각하다가 또 첫 박자를 놓쳤다. 그래서 도전 내내 헷갈렸던 한은정의 소절은 8번째 시도까지 가서야 확인할 수 있었는데, 하필 그 다음 찬스에서 자리 바꾸기가 나오는 바람에(...) 완전히 헛수고로 돌아갔다. 9번째 시도 후 뽑은 마지막 찬스에서 전곡 다시듣기가 나와서 극적인 성공의 가능성을 내비치기는 했으나, 결국 한은정이 바뀐 자리에서 마지막 시도에서 '이름도 금강이라(...) 금강이라네(?)'라고 부르는 바람에 허무하게 실패하고 말았다.[20] 이후 한은정의 역사적인 3연패의 시발점이 된 것은 덤.

2016~18 롯데 자이언츠 감독을 맡은 적이 있는 조원우한화 이글스 선수 시절의 응원가로 쓰이기도 했다.

1.9. 기타 금강산을 소재로 한 작품

1.10. 사찰

금강산에도 유명한 절이 많이 있었다. 다만 6.25 전쟁 때문에 소실된 곳이 많아서(...) 금강산 4대 사찰이라는 장안사, 석왕사, 유점사 등이 그렇게 사라졌다.

남아있는 사찰

2. 전라남도 해남군의 산

금강산
金剛山 | Geumgang Mountain

위치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대한민국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구교리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대한민국 전라남도 해남군 마산면 장촌리
높이 488m

남한에도 금강산이 있다. 1만 2천봉은 아니지만...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구교리와 마산면 장촌리 사이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488m다. 넓게 말하면, 해남읍 해리와 옥천면 신계리, 영신리에도 걸쳐 있다.
해남읍의 주산으로, 읍내를 북쪽에서 감싸는 모양새이다. 현재 해남군청 위치를 기준으로 하면 북쪽에 금강산, 남쪽에 해남천이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수. 정상 부근에는 피난을 위해 고려시대에 축조한 금강산성이 남아있다.

이름의 한자까지 1과 똑같지만 인지도는 1에 가려서 아득히 떨어진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산으로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는 백두산이 있다. 여기도 이름의 한자까지 북한의 그 산과 똑같지만 인지도로 보나 뭐로 보나 아예 비교가 안 된다.



3. 경상북도 경주시의 소금강산

소금강산
小金剛山 | Geumgang Mountain

위치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용강동·북군동·동천동
높이 280m
지금은 1번 금강산과 구분하기 위해 작은 금강산이라고 소금강산이라고 하지만 삼국유사 등 옛 기록에는 주로 그냥 금강산으로 표기했다. 참고로 '금강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건 위의 금강산보다 오히려 더 먼저고 한반도에서 금강산이란 이름의 원조는 이 쪽에 가깝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서 이 산을 이미 금강산이라고 하는데, 위 1번의 금강산을 말할 때는 풍악(楓岳), 개골산(皆骨山), 상악산 등으로 쓴 경우가 많고 위의 산을 금강산이라 부른 가장 오래된 문헌기록은 14세기 초 최해가 금강산을 유랑하러 떠나는 한 스님에게 준 글에서 "세상에는 풍악이라고 부르는 이 산을 중의 무리들은 금강산이라고 한다"고 말한 구절이 처음이다.

소금강산은 경주시 북쪽에 있는 높이 280m의 산으로 별로 높지 않은 산이지만 신라 때는 수도 시가지의 북쪽 뒷산으로 왕이 자주 찾았던 백률사, 지금도 불교 신자들이 많이 찾는 굴불사지 사면석불(보물 121호) 등 삼국유사의 전설과 문화재가 다수 남아있다. 화백회의가 열리던 장소 중 하나기도 하다. 경주국립공원 소금강지구가 이 산 주변이다.

4. 경상남도 창원시 소재 천주산의 별칭

경상남도 창원시에 있는 '천주산'의 별칭. 일명 '제2금강산'으로, 사실 지역에서도 나이가 꽤 먹은 그 동네 어르신 정도나 아는 마이너한 지명이다. 창원역 뒤에 보이는 커다란 산이 바로 이것.

물이 맑고[21] 도시화가 되기 전에는 꽤 풍경이 뛰어났던 곳이다. 특히 진달래가 우거지는 봄 풍경이 뛰어나다고 알려졌으며, 바로 이원수 선생이 '고향의 봄'을 써내려간 배경이 된 산이다.[22]

[1] '관동별곡'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다. "天 삼기실 제 自ᄌᆞ이 되연마ᄂᆞᆫ / 이제 와 보게 되니 有도 有ᄒᆞᆯ샤(세상이 생길 때 자연스럽게 만들어졌겠지만 / 이제 (직접) 와서 (금강산을) 보게 되니 (조물주의) 뜻이 있기도 있구나)" 동서양의 시각을 막론하고, 금강산은 마치 초월적 존재가 일부러 만든 것처럼 아름답게 보였던 듯.[2] 서봉총 발굴에도 참가했다.[3] 더구나 금강산은 북한 측 기준으로도 휴전선에서 멀지 않아 군사지역이 많아 내외 민간 관광객에게 공개되지 않는 지역이 많다.[4] 물론 지금도 방문증명서를 받으면 누구든 갈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놈의 비용과 신변 안전이 문제다.[5] 대한민국 미수복 행정구역 기준으로는 인제군 서화면, 고성군, 회양군, 통천군에 걸쳐 있다.[6] 남한에는 약 1만 2천 개의 봉우리 중 딱 7개가 있다. 인제군 서화면에 위치한 최남단 봉우리 7개를 가진 산인 가칠봉(높이 1,242m)(실제 이름의 유래 또한 그렇다)으로, 그나마도 비무장지대 안에 있다.[7] 사실 금강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쪽은 경주의 금강산이 기록상 명백히 먼저다. 고려말기 이전에는 경주의 것이 금강산이고 이 산은 풍악, 개골산 등 다른 이름으로 불렸기 때문. 아래 소금강산 단락 참조. 다만 현재 경주의 산을 '소'금강산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 금강산과 구분하기 위해서 바꿔 부른 것이다.[8] 재령군에 있으며 높이 747m[9] ##[10] 그런데 정작 소동파 개인의 성향은 고려라는 나라를 싫어하는 쪽에 가까웠다. 정확히는 고려가 일방적으로 송나라를 뜯어 먹고 송의 약점을 잡아 행패를 부려서(...) 국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 고려에 돌아가는 혜택을 줄이자고 얘기한 것. 그러나 송나라도 코가 석자여서 유학온 고려왕자 출신 승려 의천의 가이드로 소동파를 붙여주는 등 환심을 사려고 애를 썼다. 다만 소동파가 저 말을 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있다.[11] 왜 전기 철도로 부설되었냐면, 지형이 굉장히 험하다 보니 급구배와 급커브 등으로 무거운 증기 또는 디젤기관차가 운행하기는 위험한 구간이 많았고, 가감속할 일이 많았다. 따라서 가볍고 견인 능력도 탁월하고, 가감속도가 끝내주는 전기 열차, 그 중에서도 전동차가 운행했다. 다만, 초기에는 일본에서 관동 대지진으로 발주된 발전기가 파손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증기 기관차 견인으로 운행되었다.[12] 특히 1953년 연간은 동부 전선의 전략적 요충지인 이 일대를 두고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였다. 이 시절의 전투 이야기들은 1980년대 정부나 관변단체에서 간행하는 반공물 교재 시리즈의 단골 소재이기도 했다.[13] 그런데 진짜 군사적으로 원산까지 바라볼 수 있었을 정도면 서부전선도 훨씬 북상해서 대동강 이남까지 진출해서 대동강 근처에서 휴전선이 그어졌을 수도 있다. 이 대체역사에 대해서는 항목 참조.[14] 차이가 있다면 옛 글귀들은 개별로 각자 쓴 것이지만, 북한 치하에 새겨진 글씨들은 에서 조직적으로 시켰다는 것.[15] 엄연히 휴전선 근처이므로 북한 기준으로도 여기는 전방이다.[16] 실제 가격 일반석 80유로 - 11만원, VIP 300유로 - 47만원. 이 경비에서는 800위안(26만원)이라고 한다.[17] 남측과 합의 운운했지만 11월 15일 "금강산에 남조선은 낄 자리가 없다"며 일방적으로 철거하겠다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 애초에 이놈들을 믿는 건 바보 인증[18] 산 어귀에 있는 화장실은 무료지만 정상에 있는 화장실은 유료다.[19] 정준호, 한은정, 정윤돈 출연[20] 사실 전곡 다시듣기를 뽑은 사람은 한은정이었다. 굉장히 좋은 역할을 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말아먹었다. 사실 한은정이 마지막 시도 실패의 임팩트가 워낙 컸지만 평균적으로는 전원이 골고루 거의 다 말아먹은 셈이다.[21] 이 때문에 하이트맥주 공장이 이 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아직 조선맥주주식회사이던 당시인 1990년 당시 '페놀사태'로 OB의 점유율이 흔들리자 '깨끗한 물' 마케팅으로 시장점유율을 역전시켰다.[22] 단, 양산시에서는 이원수의 출생지와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이라면서 고향의 봄은 양산을 묘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