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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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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이 1751년에 그린 인왕제색도.
성명 정선(鄭歚)
본관 광주 정씨(光州 鄭氏)[1]
원백(元伯)
겸재(謙齋)·겸초(兼艸)·난곡(蘭谷)
출생 1676년(숙종 2) 1월 3일
한성부 북부 순화방 유란동[2]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사망 1759년(영조 35) (향년 83세)
한성부 북부 준수방 인왕동 인곡정사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3]
부모 부친 - 정시익(鄭時翊)
모친 - 밀양 박씨(密陽 朴氏)

1. 개요2. 생애3. 작품 목록4. 여담

[clearfix]

1. 개요



조선 후기의 화가.

2. 생애

1676년(숙종 2) 1월 3일 한성부 북부 순화방 유란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에서 아버지 정시익(鄭時翊, 1638. 8. 13 ~ 1689. 1. 3)과 어머니 밀양 박씨(1644. 10. 11 ~ 1735. 5. 16)[4]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정선의 선조들은 본래 고려 말부터 전라도 광주목나주목에 세거하던 사족(士族) 집안이었는데 그 뒤 경기도 광주부를 거쳐 정선의 고조부 정연(鄭演, 1541. 11. 21 ~ 1621. 4. 19) 대에 이르러 상경하여 한성부 북부 순화방에 정착하면서 여러 명문가와 교류하고 혼맥을 맺어 노론계 경화사족(京華士族)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증조부 대부터 한미해져 정선이 태어났을 때에는 집안이 이미 몰락해 있었고 정선이 14세 되던 1689년에는 아버지 또한 사망했으며 그 해 일어난 기사환국으로 노론이 실각하고 남인이 집권하면서 집안이 완전히 몰락하여 홀어머니와 어린 동생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처지에 놓였다. 외가인 밀양 박씨 집안의 도움으로 서울에 머무를 수 있었지만 하루하루 먹고 살기에 급급하던 형편에 학업에 전념하기 어려웠던 정선은 일찍이 화가로서의 삶을 모색하였다.

그래도 양반 집안이어서 어릴 적 김창흡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동네에서 만난 것이 먼저인지, 김창흡 문하에서 만난 것인지는 후대에 알 수는 없으나 평생지기 이병연[5]도 함께 김창흡의 제자였다. 이 둘의 브로맨스도 유명하며 '시의 사천', '그림의 겸재'라고 일컬어졌다. 평생 우정을 나누었으며 노년에 이병연의 쾌유를 빌며 그린 그림이 바로 인왕제색도이다. 한국 고유의 진경 산수화[6] 화풍을 창시했고 뛰어난 진경 산수화가로서 명성을 날렸는데 물론 이전 세대에 한반도를 소재로 한 그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정선의 그림처럼 주류로 내세워지지 못했으며 정선은 하나의 화단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정선의 진경 산수화는 '우리 강산, 우리 것도 충분히 그 이상으로 아름답다.'라는 자긍심을 심어주기 충분했다. 특징으로 실제와 똑같이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보다 풍경을 실감나게 과장시킨다는 점에서 감각적으로 그려냈다.

그 뒤 김창집[7]의 도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위수(衛率: 왕세자를 따라 호위하는 직책)라는 벼슬을 비롯하여, 1729년에 한성부주부, 1734년 청하현감을 지냈다. 또 자인현감, 하양현감을 거쳐 1740년경에는 훈련도감낭청(訓練都監郎廳), 1740년 12월부터 1745년 1월까지는 양천현령을 지냈다.

그 뒤 약 10년 동안은 활동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1754년에 사도시첨정(司䆃寺僉正), 1755년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그리고 1756년에는 화가로서는 파격적인 가선대부 지중추부사(嘉善大夫知中樞府事)라는 종2품에 제수되기까지 하였다.

3. 작품 목록

4. 여담

  • 정선의 작품 중 해외로 나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작품도 있다. 산수화 13점, 인물화 8점이 들어 있는 제목 없는 화첩인데, 노르베르트 베버(Norbert Weber, 1870~1956) 신부가 1925년 한국을 방문해서 이 화첩을 구입하여 자신이 있던 독일 쾰른의 상트 오틸리엔 베네딕토회 수도원으로 가져갔다. 베버 신부가 사망한 후에는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오랫동안 소장하고 있다가 1975년, 당시 독일에 유학 중이었던 유준영 전 이화여대 교수가 이 화첩을 발견, 한국에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1980년대에는 보존 처리를 위하여 뮌헨의 바이마르 고서연구소로 잠시 옮겨졌다가 다시 오틸리엔 수도원으로 돌아갔고, 1999년에 이 화첩을 다룬 논문이 발표되면서 해외에도 그 존재가 알려졌다. 이후 오틸리엔 수도원과 관계가 있는[8] 한국의 베네딕토회 왜관 수도원에서 이 화첩의 한국 반환을 추진했다. 왜관 수도원의 선지훈 신부가 지속적으로 접촉했고, 오틸리엔 수도원의 예레마이스 슈뢰더 원장도 반환이 될 수 있도록 지지해 준 결과 2005년 10월에 영구대여 형식으로 한국에 반환되었다. 반환 이후 왜관 수도원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2007년에 왜관 수도원에 화재가 나는 바람에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수사들이 이 화첩부터 빼내왔기 때문에 무사했고, 2010년 10월부터 국립중앙박물관에 위탁 보관하고 있다.
  • 영조왕자 시절 그림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 덕으로 만년에 명예직이기는 하지만 종2품까지 승진하게 되는데 이는 조선왕조 역사를 통틀어서도 거의 전례가 없는 파격적인 대우였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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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완백공종(完伯公宗)-응교공파(應敎公派) 14세 攵변 항렬.[2] #[3] #[4] 박자진(朴自振)의 딸이다. 박자진은 1652년 증광시 생원시진사시에 각각 2등 19위, 2등 20위로 입격하였다. 정선에게는 큰 외삼촌이 되는 장남 박현성(朴見聖)도 1675년 증광시 진사시에 2등 14위로 입격하고 현감(縣監:종6품)에 올랐다.[5] 영조 시기 유명한 시인이었다.[6] 실제 경치를 화폭에 옮기는 화풍이다. 이전의 산수화는 전통적으로 중국과 사대 관계 영향으로 대개 중국적 도상, 중국 고사에 나오는 인물, 장소, 실제 중국 명승지 등을 상상해서 그렸는데 상상해서 그린 이유는 단순히 가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과거 시험이나 장사 등의 이유로 이동하려고 해도 당시 조선은 공권력이 미약했기에 맹수도적들을 쉽사리 볼 수 있었던 데다가 당시에는 비행기, 자동차, 철도 등 고속 교통 수단이 당연히 없던 때였고 말과 마차를 타면 그나마 빨리 이동을 할 수 있기는 했지만 말 값이 싸지 않았기 때문에 대다수가 이용하기에는 비용 부담이 컸다. 이렇게 국내 여행도 만만한 일이 아니었는데 하물며 외국으로 나갔다 오면 아무리 필담을 할 수 있다해도 문맹률이 높던 시절인지라 아무나 필담으로 소통하지는 못했던 데다가 비용은 비용대로 시간은 시간대로 들었으니 위험성은 훨씬 컸다.[7] 스승 김창흡의 큰 형[8] 그것도 그냥 관계가 있는 정도가 아니고,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한국으로 파견한 베네딕토회 수사들이 세운 수도원의 후신이 바로 왜관수도원이다.[9] 정선은 관직 생활을 음직으로 시작했기 때문인데, 음직으로 관직에 올라온 자는 과거 시험을 통과한 자들에 비해 올라갈 수 있는 품계에 제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세한 사항은 음서과거 제도 항목을 참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