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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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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三崔
신라삼최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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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영정. 좀더 사실적으로 묘사한 현대에 그린 영정.
시호 문창후(文昌侯)[1]
직위 시독(侍讀) 한림학사(翰林學士) 지서서감(知瑞書監)
대산군 태수(大山郡 太守)
부성군 태수(富城郡 太守)
내사령(內史令)[2]
수직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당 직위 율수 현위(溧水 縣尉)
승무랑시어사내공봉(承務郞侍御史內供奉)
골품 육두품
관등 아찬(阿飡)
부족 사량부(沙梁部)
이름 최치원(崔致遠)
고운(孤雲)
해운(海雲)[3]
생몰년 857년 ~ ?(음력)
1. 개요2. 그의 생애
2.1. 신라에서 온 유학생2.2. 당나라로 건너간 뒤
2.2.1. 짧은 미관말직 시기2.2.2. 신라출신 백수의 구직활동기2.2.3. 황소의 난과 고병과의 인연
2.3. 신라 귀국 이후
2.3.1. 하지만 받아들여진 건 없었다.2.3.2. 신라 정계에서 은퇴한 말년
3. 저서
3.1. 문헌3.2. 금석문
4. 기타
4.1. 최치원이 왕건을 지지했다?4.2. 유학자 성인 최치원?4.3. 야사4.4. 문학적 업적4.5. 이중잣대?

1. 개요

통일신라시대 6두품 출신의 문인으로 최승우, 최언위와 함께 '신라삼최' 중 하나로, 한국 유학과 문학에 큰 족적을 남겨 후대에 숭앙되었다. <난랑비서>를 저술하여 유-불-도가의 정신이 이미 한국의 고유신앙인 화랑도-풍류도에 존재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경주 최씨(慶州 崔氏)의 중시조.[4] 다른 최씨의 시조도 경주 최씨에 비롯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대한민국의 대부분 최씨의 중시조라 할 수 있다.[5]
뛰어난 천재로서 신분의 벽을 넘기 위해 해외 유학을 가 개천에서 용난다는 속담을 실현한 후 나라를 살리기 위해 돌아왔지만 다시 한 번 신분의 벽에 막혀 좌절한 사람의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다. 드라마틱한 인생때문인지 그를 신격화하여 주인공으로 한 《최고운전》이라는 고전소설이 있다.

2. 그의 생애

2.1. 신라에서 온 유학생

문성왕 19년(857년) 신라의 사량부(沙梁部)에서 최견일(崔肩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최견일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원성왕의 원찰 숭복사(崇福寺) 창건에 참여했다는 행적이 전한다.[6]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다 12살 때 나라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당시 신라에서는 837년 한 해에만 216명이 당나라에 유학생으로 떠났을 만큼 당나라 유학 열풍이 불고 있었고, 당나라 유학 경력이 있으면 신라에 돌아와서도 출세길이 보장된 엘리트 코스였기 때문이다. 떠나는 배 위에서 아버지에게 "10년 안에 과거급제 못하면 어디가서 내 아들이라고 하지도 마라. 나도 아들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겠다" 라는 말을 듣게 된다.[7] 최치원은 "남이 백의 노력을 하는 동안 나는 천의 노력을 했다"라는 기록을 남길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던 듯하다. 당초 10년 기약을 4년 단축하여 6년[8]만에 18세 나이[9]로 당나라 빈공과에 급제했다.[10]

종종 최치원이 합격한 것이 중국인들과 함께 경쟁하는 진사과였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의 진사는 과거시험의 최종합격자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중앙관서로 올라가지, 장원급제자를 2년 후에야 현위에 임명하지는 않는다. 등과기고에도 언급되는 것처럼 이전의 경쟁상대를 발해인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최치원이 합격한 것은 외국인 대상시험으로 치러지는 빈공과가 맞다.

2.2. 당나라로 건너간 뒤

최치원은 고려 사람으로 빈공과에 급제하여 고병의 종사관이 되었다.
《신당서》 예문지의 주석

2.2.1. 짧은 미관말직 시기

최치원은 빈공과에 급제한 후 2년간 관직이 나오지 않아서 허송세월을 하면서 동도(東都) 낙양에서 유람하면서 서류대필과 저술활동으로 끼니를 때웠으며 이 때 금체부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 100수 1권, 잡시부 39수 1권 등의 시를 썼다. 2년만에 겨우 지금의 강소성 난징 지방인 선주 율수현의 현위[11]에 임명이 되었으나 임기를 마친 3년 뒤 다시 대기발령 상태가 된다.[12]

당나라에서 율수현의 현위로 있던 시절의 일화로 쌍녀분 전설이 전한다. 짧게 요약하면 율수현 남쪽에 쌍녀분이라는 오래된 무덤이 있었는데 옛날부터 많은 명현들이 유람하던 곳이었다. 최치원이 무덤 앞 바위에 시를 써 놓고 천천히 거니는데 쌍녀분의 두 주인 원혼이 나타났고, 그들과 시를 주고받고 술도 마시며 친해지고 세 사람이 한 이불 속에 누워(...) 하룻밤을 보내고 두 여인은 천년의 한을 풀고 성불했다는 내용이다.

2.2.2. 신라출신 백수의 구직활동기

이렇게 백수(...)가 되버린 최치원은 산에 들어가 박학굉사과(博學宏辭科)라는 중국 내국인 대상 시험을 준비하는데, 이는 현직 관리를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승진시험으로 조선시대 과거의 중시(重試)에 해당한다. 그러나 관직에 있던 시절 나오던 녹봉이 떨어져 배를 곯을 상황이 되어버린다. 이후 양양의 이위라는 사람의 문객(門客)으로 들어가서 시험 준비를 하던 중, 황소의 난이 일어나며 당해 시험은 물론 앞으로의 시험 일정마저 불투명해지는 상황이 벌어진다. 결국 최치원은 2년만에 시험을 포기하고, 23세 나이인 879년에 대신 구직활동에 나섰다. 당시 절도사 중 1인으로 이름을 떨치던 회남절도사 고병의 문객으로 들어가려 한 것이다. 이 시기 최치원은 동년배인 고운을 통해서 고병에게 자신의 소개와 관직청원인 자천서를 2회에 걸쳐서 올려서 결국 고병의 문객이 되었고, 고병의 추천으로 관역순관(館驛巡官)이라는 비교적 높은 벼슬을 얻었다.

2.2.3. 황소의 난과 고병과의 인연

24세 나이인 880년, 당시 당나라를 어지럽히던 황소의 난 토벌을 고병이 맡게 되자 최치원도 함께 참전하였다. 이러한 고병의 덕으로 최치원은 도통순관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의 직책을 받아 4년간 종군했으며, 황소가 읽다가 너무 놀라 침상에서 굴러 떨어졌다는 것으로 유명한 토황소격문(혹은 격황소서)을 쓴 것도 881년의 일이다. 그러나 토황소격문을 썼고 그걸 황소가 장악한 지역에 퍼뜨린 것은 사실이나, 그 효과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다소 부풀려진 이야기라고 파악되고 있다. 포상으로 882년 비은어대를 받고 이어서 다시 자금어대를 하사받았다.

최치원이 임명된 도통순관은 토벌군이 편성되는 과정에서 군 내부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 내렸던 명예직으로 이런저런 글을 열심히 썼다지만 실권은 전혀 없었다. 실제로 이 시기의 최치원은 당나라의 기록에 고병의 문객으로만 기록에 남아있을 뿐이다.[13] 다만 〈신당서 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치원 찬(致遠 撰)’이라고 하여 〈사륙집 四六集〉·〈계원필경〉이 소개되었다.

최치원이 문객으로 의탁한 고병은 도교에 심취해서 나중에 그 때문에 군무마저 내팽겨쳤다가 내부 반발로 살해당한 인물이었다. 최치원은 한국 도교사에서 비조로 꼽히는데, 이 고병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라는 추정도 존재한다.[14]

최치원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토황소격문(혹은 격황소서)이 이 시기에 고병의 이름으로 나왔지만, 그 역할은 미미했다. 그리고 당 내부에서 최치원의 유명세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간단히 말해서 현대 유명 정치인들의 연설문이나 자서전의 상당수에 대필작가가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를 통해서 알려지는 것은 이름을 걸은 유명인이지 고스트 라이터가 아니다. 최치원이 바로 그 고스트 라이터였던 것이다.

오히려 고병이 황소의 난을 토벌하는데 관할지인 양주에 머무르기만 하고 정작 수도 장안을 점령한 황소군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이유로 반란의 의심을 받아서 882년 파직당했을 뿐이다. 최치원과 관련해서 고병이 황소의 난을 토벌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황소의 난을 제압한 것은 사타족이극용 등의 활약이 지대했지 고병은 사실상의 활약이 별로 없었다. 이후에도 고병은 양주에 머무르면서 거의 반 독립군벌처럼 움직였으며, 최치원이 나중에 신라로 귀국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고병은 내부 반발로 살해당했다. 고병이 파직된 882년과 최치원이 귀국하는 885년 간의 3년간의 행적은 전혀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이 882년에 자금어대를 받았으며 이후 당나라 황제의 서신을 가지고 귀국하였기 때문에 이 때 할거한 고병을 이탈한 것이 아닌가 추정되기도 하지만 분명하지 않다.

어찌됐건 당시 당은 이미 말기의 전란기로 접어들고 있었고, 최치원이 의탁하고 있던 고병은 실권하고 도교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 결국 자신도 자신을 알아주는 이 없는 이런곳에서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최치원은 신라로 귀국해버렸다. 당시 신라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라는 자체 관리등용 시험은 있었지만 그보단 당나라 유학 경력을 상당히 우대해주는 편이었던 덕분에[15] 빈공과 합격 후 나름대로 공직 경력도 있는 최치원 정도면 신라에서 출세는 거의 보장된 상태였다.

2.3. 신라 귀국 이후

만 28살인 885년 당희종이 신라왕에게 내리는 국서를 가지고 신라로 귀환했고,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지은 책 20권을 헌강왕에게 바치고, 헌강왕과 정강왕, 진성여왕 시대까지 서라벌 중앙에서 시독(侍讀) 겸 한림학사(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郎), 지서서감사(知瑞書監事) 등의 벼슬을 지냈다.

알려진 것과는 달리 신라로 귀국한 최치원이 귀국해서 아주 홀대받은 것은 아니었는데, 당시 신라의 헌강왕은 당나라 유학생 출신들을 중용하였고, 최치원 역시 한림학사에 임명되어서 외교문서 작성을 담당하게 되었으며,[16] 헌강왕이 사망한 이후 최치원은 자청하여 외직으로 나가게 되는데, 이 때도 웅주의 태산군(太山郡, 전북 정읍시 칠보면)과 부성군(富城郡, 충남 서산시) 태수를 지냈다. 이 지역들은 해안지방의 곡창지역으로 중요도가 높은 지역이었다. 진성여왕에게 시무 10조(時務十條)를 바치고 6두품의 한계인 아찬(阿飡)까지 임명되는 등 최치원에 대한 신라왕실의 신임은 상당했다.

단적으로 진성여왕이 물러나고 효공왕이 즉위하는 과정에서도 진성여왕의 '양위표(讓位表)'와 효공왕의 즉위에 대한 '사사위표(謝嗣位表)'를 당나라 황실에 보내는 등, 효공왕 초기까지 대당 외교에서 활동했다. 이 시기에 작성된 대표적인 외교문서가 발해의 출자문제와 엮이는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로 효공왕 원년에 효공왕의 이름으로 최치원이 작성하여 당에 보낸 국서였다. 한번 대필가는 영원한 대필가[17]

당나라 유학파 중에서는 가장 유명해서 신라에 머물면서 문장을 한문으로 써달라는 요청을 여럿 받았던 모양으로,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대한민국의 국보 315호) 등 전국에 여러 비석에 최치원의 문장이 지금도 남아있다. 최치원이 쓴 비문은 이밖에도 보령 성주사 낭혜화상비,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비, 경주 초월산 대숭복사비가 있는데 이 네 개의 비석을 묶어서 사산비명(四山碑銘)이라고 부른다.

893년에는 사신으로 발탁되어 당나라에 파견갈 예정이었지만, 사실상 후삼국시대의 실질적인 시작으로 보는 892년 이후에는 전국에서 도적떼가 늘어난 상황이라 서해 바다로 이르는 길이 막혀서 가지 못했다.

2.3.1. 하지만 받아들여진 건 없었다.

894년 2월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조라는 개혁정책을 건의했고 진성여왕은 기쁘게 받아들였다고 하지만 이미 쇠약해진 신라 사회에서는 그의 주장이 수용될 수 없었다. 사실 시무십여조가 혁신적인 정책이었는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내용이 전혀 남아있지 않기 때문. 최치원이 육두품이므로 아마도 육두품을 포함한 신귀족정을 주장한 것이 아닐까라고 추측만 할 뿐이다. 진성여왕은 그의 시무책을 받아들여, 최치원을 6두품 신분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아찬에 제수하고 그의 제안대로 개혁을 펼치려 했다. 실제 진성여왕은 막장 암군이라는 이미지와 달랐으리라는 시각이 있다. 암군의 대표적 근거라는 게 근친 하렘과 그들에게 정치적 권력을 줘서 기강이 문란해졌다는 것인데 전자는 사실 따지고보면 시대상을 감안해야 하는 문제기도 하고, 조선시대는 몰라도 현대인이 보기에는 개인사가 도덕적으로는 몰라도 통치력과 직결되는 문제는 아니다. 물론 후자는 전형적인 암군의 그것이 맞다.

그러나 당시 신라는 망해가는 상황이었다. 최치원이 실질적으로 정치에 손을 댈 수 있게 된 시기는 이미 지방 호족들이 궐기해서 신라 조정은 중앙정부로서의 힘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었다. 진성여왕 시기에 이미 양길, 기훤, 궁예, 견훤 같이 굵직굵직한 인물들이 궐기해서 신라 땅 털어먹기를 시작한 상황이었다. 정강왕 때까지만 해도 서라벌은 번창하는 태평성대였다고 하는데 몇 년 지나지 않은 진성여왕 즉위 초기에 이미 지방에서 세수가 안 올라와서 곤궁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해져서 최치원이 정계에서 은퇴한 효공왕 초기 정도 되면 궁예양길이 대립하고, 후삼국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다. 효공왕 즉위 4년만에 신라의 영역은 경주를 중심으로 영남 지역 호족들만이 떠받드는 불안한 정권으로 전락한 상황. 그나마 신라 귀국 초기에 나라에 힘이 있을 때는 골품제와 실적의 문제로 왕의 신임을 받으면서도 할 수 있는게 없었고, 그나마 뭐 좀 할 수 있는 위치가 되니까 신라가 바로 젊은 시절에 경험했던 당나라 꼴이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현실은 시궁창, 완벽한 평행이론이다. 헬신라[18]

삼국사기에는 최치원이 태산군[19] 천령군[20], 부성군[21] 등의 태수직을 전전했다고 나오는데, 시무 10여 조를 올린 것은 천령군 태수로 있었을 때의 일이라고 하며, 천령군태수를 마지막으로 최치원은 관직을 내놓았다고 한다. 이들 지역에는 최치원이 왔다 갔다는 흔적이 남아 있는데, 함양의 경우 홍수를 막기 위해 조성했다는 함양상림이나 최치원이 자주 올랐다는 학사루[22]가 그것. 정읍의 무성서원도 원래는 고을 주민들이 최치원을 기리기 위해서 지은 태산사라는 사당을 조선 시대에 서원으로 고친 것에서 시작된다고.

2.3.2. 신라 정계에서 은퇴한 말년

결국 신라와 당나라 모두에서 맞이한 난세에 자신 같은 인재가 쓰일 곳이 없다는 데 절망한 최치원은 898년 2월 은퇴한다.[23] 그보다 전인 897년 1월에는 하정사 김영과 함께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오는데, 이미 견훤이 왕을 자칭한 게 892년이므로 897년경이면 서라벌에서 당나라까지 가는 길에서 그 혼란상을 제대로 둘러봤을 것이고 정계 은퇴에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조선 말에 편찬된 동사강목에서는 최치원이 스스로 신라 정계에서 은퇴한 게 아니라, 신라 입장에선 지방 반란군인 왕건을 지지했다가 파직당해서 가야산 해인사로 갔다고 하는데 이 기록은 신빙성에 의문이 있다. 아래 왕건을 지지했는가 단락 참조.

삼국사기》에 의하면 898년 은퇴하여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 지리산 등지를 돌아다니다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다고 했으며, 고려 이인로의 <파한집>에 의하면 그가 머물던 집에 신발 등이 그대로 남아있는 채 그의 흔적만 사라졌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후대에는 최치원이 가야산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광범위하게 생겨났다. 은퇴 후 전국을 유람해서 남산(경주), 합천의 빙산과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부산 해운대, 마산 합포의 월영대 등에 그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해운대의 경우는 자신의 호인 해운(海雲)을 동백섬 바위에 새겨 그것이 지금까지 지명으로 이어진다. 금강산에도 외금강 구룡폭포가 올려다보이는 바위에 '천장백련 만곡진주(千丈白練 萬斛眞珠, 천 길 흰 비단 드리웠는가, 만 섬 진주알을 흩뿌렸는가)'라는 최치원의 글씨가 새겨져있다.[24]

일단 900년 가야산 해인사 선안주원벽기, 901년 석순응전과 석이정전, 904년 해인사 화엄선원에 은거하면서 법장화상전, 부석존자전 등을 집필한다.

최치원이 쓴 글 가운데 연대가 밝혀진 것 중 가장 마지막으로 지어진 것이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君護國城八角燈樓記)로, 908년에 지어졌으며 수창군[25]의 호족 이재가 부처의 힘으로 국가의 위기를 타개해 줄 것을 빌며 지은 팔각등루의 연원을 적은 기록이다. 857년생이므로 50대에 들어선 나이인데, 물론 더 오래 살 수도 있었겠지만 의학이 미비한 전근대시대라 얼마나 살았을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신라 말에 태어나 고려 초에 활약한 최승로는 그의 친척이다. 누가 친척 아니랄까봐 개혁정책도 조상의 것과 똑같은 이름으로 하는 센스남 최승로

고려 현종 11년(1020년) 8월 내사령에 추증되고, 고려 문묘에 종사되었다. 이후 조선시대까지 문묘에서 배향된다.

1023년에는 현종에 의해 문창후 작위에 추봉되었다. 훗날 이규보이색도 명문장가로 최치원을 꼽았다.

조선시대에도 신라인으로서는 설총과 함께 문묘에 배향된 2명 중 한 명이며, 태인 무성서원, 함양 백연서원, 경주 서악서원, 안동 용강서원, 서산의 부성사, 포천의 청성사, 영평의 고운영당 등에 배향되었다. 김종직, 남효온, 이황, 김창협, 최북 등이 최치원의 행적이 닿은 곳을 찾아 추억하고 기리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최고운전이라는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쓰여지기도 했다.[26] 현대에는 그가 당나라에 있을 때 근무했던 양저우시에 최치원 기념관이 건립되기도 했다.

3. 저서

3.1. 문헌

  • 계원필경
  • 법장화상전
  • 부석존자전
  • 사륙집
  • 사시금체부
  • 상대사시중장
  • 석순응전
  • 석이성전
  • 쌍녀분전기
  • 오언칠언금체시
  • 잡시부
  • 제왕연대력
  • 중산복궤집
  • 수이전 - 조선시대 몇몇 서적에서 지은이가 최치원이라고 쓰고 있으나 이설이 있다.
  • 천부경 - 최치원이 석벽에 새겼다고 환빠들이 주장.

3.2. 금석문

4. 기타

  • 마산(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일대에는 말년의 최치원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 많다. 마산합포구에서 가장 큰 동 중의 하나가 '월영동'으로, 이는 최치원이 노닐었다는 '월영대'에서 비롯했다. 월영대 옆의 오거리는 정식 공문서에서는 월영광장이라고 불린다. 댓거리가 아니고? 또한 마산지역 옛 산복도로의 이름은 고운로(孤雲路)이다. 하지만 다들 산복도로라고 부르지 마산 앞바다에 있는 '돝섬' 또한 암돼지 요괴(...)와 최치원의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다. 마산문서 참조.
  • 부산광역시에 있는 해운대 지명도 최치원에게서 유래되었다. 지금도 최치원이 새겨놓았다고 알려진 비문이 동백섬 측에 남아있다.[27] 해운대구, 해운대해수욕장 문서 참조. 참고로 최치원과 관련이 있다는 점 덕분에 최치원이 중국에 있을 때 머물렀던 장쑤 성 양저우시 웨이양구와 해운대구가 자매결연을 맺었다. 웨이양구에는 최치원 기념관도 있는데, 중국에서 첫 번째로 세워진 외국인 기념관(第一外國人紀念館)이라고 입구에 써 있다.
  • 역사스페셜 113회 '중국은 왜 최치원을 기억하는가'
    2012년 9월 6일 방영되었다. 제목 그대로 중국에 남은 최치원의 흔적을 다루고 있으며 국내에는 비교적 덜 알려진 젊은 시절 중국에서 지낼 당시 최치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각종 한국사 시험에 자주 출제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매년 몇 문제씩은 시험종류를 가리지 않고 꾸준히 출제된다. 특히 수 많은 저서를 남겨 지엽적인 문제를 선호하는 공무원시험에 더욱 많이 출제되며 2016년 국가직 7급에서 그의 저서가 만점방지용 문제로 출제되어 많은 공시생들을 공공의 적으로 만든 인물이다.
  • 2018년 5월에 지리산 폭포 옆에 완폭대 석각이 발견되었다.#

4.1. 최치원이 왕건을 지지했다?

고려 후기의 문인 최자의 보한집(補閑集)에는 최치원이 왕건에게 "계림(=신라)은 누런 잎이요, 곡령(=고려)은 푸른 소나무다"라는 참서를 주었고, 이 때문에 신라 조정에서 파직당해 가야산에 들어갔다는 기록이 있는데[28] 조선 후기에 편찬된 동사강목에도 같은 말이 있다.

하지만 898년에 왕건은 궁예의 일개 부하에 불과했다 . 왕건 본인을 포함해 누구도 왕건이 500년 '고려' 왕조의 창시자가 될 거라고는 알 수 없는 시점이다.

최치원의 마지막 행적이 확인되는 것이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를 지은 908년이고 857년생인 최치원의 나이가 51세인데 십여 년 뒤인 왕건의 거병 시점에는 61세로 그때까지 살아있었는지도 불분명하다.[29]더구나 최치원은 신라에 돌아온 뒤 신라 왕실의 덕을 많이 보았고, 스스로도 신라 왕실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기 때문에 다른 6두품들과는 달리 쉽게 호족들과 결탁하지도 못하는 입장이어서 좌절한 경우였다. 때문에 명망이 매우 높았던 인물 최치원을 고려시대에 높이는 과정에서 후대에 가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최치원의 후배격인 최언위, 최승로 등의 문인들이 훗날 고려에서 활발히 활동한다는 점에서, 스승을 신격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도선대사'에게 신라의 앞길을 물을 때와 정치를 포기한 채 황음에 빠진 진성여왕에게 직언을 하는 장면에서 등장했으며, 이후로는 직접 출연하지는 않고 주변 사람들의 입을 빌어 그 존재가 간혹 언급될 뿐이다. "계림은 황엽, 송악은 청송"이라는 말은 도선대사가 한 말로 각색되었다. 고려가 공산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163화에서 견훤은 왕건의 심사를 긁는 국서(평양성 누각에 활을 걸고 대동강 물을 말에게 마시게 하겠다.)를 보내는데, 열받은 왕건이 후백제를 규탄하는 답서를 백제편 사신으로 보낸다. 국서를 보낼 때 이 글을 최치원이 썼다고 알려줘 백제를 역으로 도발(....)하기도 했다. '토황소격문'에 빗대어 후백제를 한낱 반란군으로 조롱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같은 3최의 일원인 최승우는 "최치원은 가야산 깊숙히 들어가 몸을 숨기며 살고 있습니다. 글을 잘 짓기는 했으나, 문장으로 보아 '고운'의 글은 아닙니다."[30]라 평했다.

4.2. 유학자 성인 최치원?

최치원의 업적은 신흥국가 고려에서 일한 최언위, 최승로 등의 후배들에게 이어지면서 한국 유학사상의 도통으로 모셔지고 있다. 고려 현종 시기에 최치원은 내사령[31]으로 추증되고, 시호로 문창후를 받아 홍유후 설총과 함께 문묘에 배향된다. 그런데 최치원의 사상은 난랑비서라는 글에서 화랑의 사상을 설명하는 부분이나 진감선사비문에서도 드러나듯 유학에 기반을 두고 있으면서도 유교, 불교, 도교의 가르침을 하나로 통합해서 이해하려고 했고, 그는 세 종교가 궁극적으로 하나의 도로 통하므로 구별이 무의미하다고 했다. 그는 유불도의 가르침을 모두 깊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남긴 여러 고승비에서도 불교만이 아닌 유교와 도교의 경전이 폭넓게 인용되고 있다. 여기에 영향을 받아 고려시대에서 상당히 유교 정치이념을 상대적으로 강조한 최승로와 같은 유학자조차도 "불교는 수신의 근원이고 유교는 치국의 근원"이라고 말할 정도였고, 숭유억불이 더 강화된 후대 조선시대와는 기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그의 인생 행적도 유학자의 이미지보다는 주로 문인 예술가의 이미지가 강해 이후 퇴계 이황은 그 부분에서 최치원을 조선 문묘에 배향하는 것을 비판하기도 했다. 최치원의 비문학적 활동이라는 것이 결국 시무십조인데, 이것은 유학자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관료로서의 모습이라고 봐야하기 때문이다. 최치원이 유학의 선구자로 존중받았다는 이야기는 문묘에 배향되었다는 결과론 외에는 근거를 찾기 어렵다. 오히려 한국 도교의 비조로 꼽히고 3교 융합의 이미지도 강해서 유학자 최치원의 이미지는 과거에도 지금에도 약하다.

최치원이 왕건을 지지했다는 표현은 문묘배향 과정에서 그 이유로 등장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신라계가 점점 세력을 강화하는 과정 또는 거란족의 침략 등 혼란한 상황에서 현종이 충신으로서 최치원과 설총을 강조하였다는 등의 평을 받는다.

4.3. 야사

  • 서산 태수 시절에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어느날 인근 마을의 최고 부자 노인이 최치원을 찾아와서 염라대왕고발할 테니 상소문을 올려 달라는 요청을 했다. 황당한 최치원이 그 이유를 물으니 노인은 자신의 아들 둘이 한꺼번에 죽었다며 제 아무리 염라대왕이더라도 어찌 이럴 수 있느냐고 하였다. 이에 최치원은 3일 후 염라대왕을 이곳에 모실 터이니 그때 직접 따지라며 노인을 돌려보냈고, 이어 고을에서 제일 빨리 달리는 말과 말을 잘 타는 군졸을 불러 사흘 후 그믐날 밤네 운산 쪽으로 말을 타고 달려가면 염라대왕이 이리로 오고 있을 터이니 모시고 오라고 명을 내렸다. 군졸은 반신반의하며 그곳엘 갔더니 진짜 불빛과 함께 매우 화려한 의관을 하였으나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말을 타고 있어 그를 데리고 왔다.
    관청에는 염라대왕을 고발한 노인이 와 있었는데 노인이 염라대왕에게 왜 자기 아들을 둘 다 한꺼번에 데려갔냐고 묻자 염라대왕은 호통을 치며 "네놈은 어째 네놈 아들들의 죽음만 억울하다 하고 다른 이의 아들들의 죽음은 아무렇지 않냐? 네놈이 13년 전 원북땅에서 주막을 할 때 한 보부상 형제를 독살하여 시신을 매장하고 돈을 가로채서 그 돈으로 지금의 재산을 모은 게 아니냐? 네놈의 명줄은 길지만 네놈의 아들들은 애비의 업보를 받아 단명할 운세였다. 그리고 네놈의 죄는 여기 계신 군수께서 다스릴 것이다." 라고 일갈하고 사라졌다.
    사람들이 황망해 있는 가운데 최치원은 노인의 죄를 물어 감옥에 가두었고, 최치원이 염라대왕을 소환한 소문은 진성여왕의 귀에까지 들려 여왕이 이 이야기를 따로 책으로 만들게 해서 최치원의 시문집인 계원필경 [桂苑筆耕]에 이야기를 적었다고 한다.
  • <신라수이전>이라는 책에 '쌍녀분'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최치원이 밤길을 가다 두 개의 무덤이 나란히 솟은 근처에서 잠들었는데, 두 아리따운 처녀귀신이 나타났다. 실은 두 자매의 아버지가 장사치에게 시집보내려 하자 반항으로 함께 자살한(...) 언니와 여동생이었던 것이다. 무시무시한 것은 최치원이 이 두 여자(귀신)과 함께 술을 마시며 시를 지어서 꼬슬렸고, 결국 자매덮밥을 해 버렸다는 사실이다

4.4. 문학적 업적

추야우중(秋夜雨中, 가을 비오는 밤 중에)
秋風唯苦吟 (추풍유고음) 가을 바람에 괴로이 읊조리나,
世路少知音 (세로소지음)[32] 세상에 알아 주는 이 없네.
窓外三更雨 (창외삼경우) 창 밖엔 밤 깊도록 비만 내리는데
燈前萬里心 (등전만리심) 등불 앞에 마음은 만리 밖을 내닫네

그가 남긴 시문은 현전하는 '계원필경'(20책), '사산비명'을 포함하여 '삼국사기'에만도 문집 30권이 전한다고 기록할 정도로 방대하다. 지금은 계원필경만 전해지는데, 계원필경 외의 작품은 조선 초의 동문선에도 많이 실려 있다. 여기에 실린 《추야우중(秋夜雨中)》, 《산양여향우화별(山陽與鄕友話別)》도 유명하다.

이 중 당나라 유학시절인 25세(881년) 때 지은 온 천하 사람들이 너를 드러내놓고 죽이려 할 뿐 아니라, 지하의 귀신들까지 너를 죽이려 이미 의논했을 것이다라는 내용의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적장 황소가 혼이 빠져 평상에 내려앉았다는 일화가 전해올 정도로 오늘날까지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다만 현시창이어서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이 글의 발표자는 당연히 고병이었고, 고병이건 토황소격문이건 황소의 난 해결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황소가 주저 앉았다느니 놀라서 죽었다느니 하지만, 이건 우리나라 고려-조선 유학자들 사이에서 유명하긴 했어도 신빙성이 부족한 이야기이다.[33][34][35] 이전에는 자금어대를 받은 것을 황제가 최치원의 능력을 인정했다로 적혀 있었지만, 역시 상단에 적힌 것처럼 자금어대와 (저자가 고병으로 되어 있는)'토황소격문'은 아무 상관없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이미 망조에 접어들었던 당나라는 어대나 명예직을 마구 남발하고 있었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렇다면 왜 중국에서 오랫동안 최치원을 기억하고 있고, 또 현대 중국에서 최치원의 기념관까지 만들어 주었는지 논리적으로 납득할만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4.5. 이중잣대?

흔히 신분차별이나 6두품의 한계로 인해 꿈이 좌절된 불운한 천재로 여겨지지만 정작 최치원도 이런 차별적 인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는 시선도 있다. 자신을 비롯한 6두품들을 자신의 저서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문(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文)'에서 '득난(得難)'[36]이라고 표현하며 나름의 자부심과 진골들에게 차별당하는 울분을 표했기 때문. 6두품이 역사 창작물이나 간단한 역사교양서, 학습만화 등에서는 진골 귀족들에게 차별받는 능력 있는 비주류처럼 묘사되는 경향이 있지만, 6두품은 사실상 넓은 의미의 왕족인 성골과 진골을 제외하면 왕족이 아닌 골품 중에서는 가장 높은 골품인지라 신라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엄연한 기득권층에 속하는 계층이다.

다만 최치원이 이중잣대를 부렸다고 단정짓기엔 무리다. 사실 득난(得難)자체가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문(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文)'밖에 없는 말인데 학자들 사이에서도 아직 제대로 정립된 것 없이 의견만 나돌고 있는 상태다. 원본을 제시하자면, '나라에 5품이 있어 성이(聖而)요, 진골이요, 득난이니, (득난)은 귀성(貴姓)의 얻기 어려움을 말한다. 문부(文賦)에 ‘혹 구하기는 쉬우나 얻기는 어렵다’(或求易而得難)고 했는데, 따라서 육두품을 말하는 것이다. 수가 많은 것을 귀히 여기는 것은 마치 일명(一命)에서 구명(九命)에 이르는 것과 같다. 그 4·5품은 족히 말할 바가 못된다.'인데, 이는 득난을 육두품 그 자체로 볼 것이냐, 아니면 진골과 육두품 사이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계급층으로 봐야하냐에 따라 해석이 갈릴 수 있다. 최근 새롭게 제시되고 있는 해석은 후자인데, 이마저도 다른 논란에 쌓여 제대로 된 것이 없다.

즉, 제대로 지식화 되지 않은 정보를 믿지 말라는 것이다. 해석에 따라 육두품이 귀성이 되기도 가장 낮은 관등에서 가장 높은 관등에 이르는 것과 같이 어려운데 그 아래인 4,5품은 오죽할까?로 될 수 있는 것이다.


[1] 고려 현종 14년(1023년) 때 추증.[2] 고려 현종 때 추증.[3] 지금의 부산광역시 해운대구의 지명이 그에게서 유래한 것이다. 최치원이 이 일대를 지나가다 해운대해수욕장 근처 경치가 너무 좋아서 거기서 좀 머무르다가 자신의 호를 따서 '해운대'라고 바위에 글씨를 새겼던 것. 그 글씨는 지금도 있는데 가운데 雲 자가 풍화가 심해 많이 지워진 상태다. 사실 이 글씨가 최치원이 직접 파서 남긴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고려시대 인물인 정포가 이 글씨를 언급한 기록이 남아있으므로 적어도 고려시대나 그 이전부터 해운대라는 이름이 바위에 새겨져 있었던 것은 맞다.[4] 일단 시조는 신라 건국기의 인물 소벌도리지만, 사실상의 시조는 최치원으로 여긴다.[5] 정확히는 모든 최씨가 최치원 계통인 것은 아니다. 소벌도리에서 나와 최치원 이전에 분가된 최씨 가문들이 있다. 하지만 많은 최씨가 경주 최씨에서 분가된 것은 사실이고, 경주 최씨만 따져도 최씨 성을 가진 인구의 과반을 넘는다.[6]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 고군산도에는 최치원이 금돼지의 자손이라는(金豚始窟) 전승이 전해져 온다.[7] 12살은 현재에도 미성년자 취급을 받지만 최치원이 살았던 신라 당대에도 관례(성인식)도 치르지 못한 어리다 못해 핏덩어리였다(관례는 보통 14, 15세 정도에 치른다). 이런 어린 나이의 아들을 아버지가 유학보내야겠다는 결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신라의 출셋길이나 관로(官路)는 철저하게 진골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로써는 냉혹하지만 또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8] 868년 출발, 874년 9월 급제.[9] 당시 빈공과에 합격한 가장 이른 나이가 50세였다.[10] 이걸 두고 빈공과발해 출신이 많이 붙었는데 신라에서 뛰어난 인재가 왔다라고 표현했다. 역대 과거 합격자의 명단을 모은 '등과기고(登科記考)'에 최치원은 '지난해 신라가 발해인에게 장원급제를 빼앗긴 수치를 씻었다'라고 적었다. 신라인과 발해인이 라이벌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대목. 다만 남북국시대 당시 양국이 서로를 남국,북국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과도한 확대해석이다. 신라에서 발해를 북국으로 부르기는 했지만 이는 단순히 북쪽나라라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신라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을 발해에 대응되는 남국으로 인식했다는 근거는 없다.[11] 지방 현령 밑에서 잡무를 보던 하위 관직.[12] 이황진, '최치원의 재당생애 재고찰'[13] 고려의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에서 〈당서〉 열전에 최치원전이 없다는 것에 "당나라인들이 질투한 것"이라며 분노한 마음을 글로 남긴적 있다. 열폭 하지만 막상 당의 역사서를 정리하는 입장에서는 듣보잡 외국인 유학생의 열전까지 일일히 남겨줄 필요가 없었던 것.[14] 일단 공식적으로는 역시 신라 유학생 출신으로 도교에 최치원보다 더욱 심취한 김가기의 영향이 크고, 난랑비서의 경우는 고유의 풍류도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런 가능성은 낮게 평가된다. 역으로 고병이 도교에 심취하게 되는 영향을 최치원이 제공했을 수도 있다.[15] 원성왕 시대의 자옥이라는 인물은 당나라에서 10년 동안 공부만 하다 과거에 합격도 못 한 장수생이었는데 유학 경력만 보고 관리로 임명한 사례도 있다. 단 자옥의 사례는 자질이 의심스럽다고 관리 임용에 반대한 기록도 있다.[16] 역시 6두품 출신으로 이름을 떨친 강수와 마찬가지 포지션이다.[17] 물론 당시에도 그리고 그 이전과 이후에도 글 잘 짓는 관료가 황제 및 조정의 국서를 대신 쓰는 일은 많았고 그게 당연한 것이었으므로 대필가라고 비아냥거리고 낮춰 볼 일은 아니다. 당장 현대에도 국서급 문서를 대통령 혼자서 마음대로 작성하지는 않는다전 항목에서는 여기서 최순실을 들이대고 있었는데 최순실의 존재는 최치원에게 있어서도 거의 흑역사 내지 집안의 수치에 가까운 인물이다. 애초에 글재주 없으면 대필가도 못하고, 국서 작성 정도면 나라 최고의 문장가 반열이라고 할 수 있다.[18] 최치원이 해인사에 있을 때인 895년 인근 지역 농민들이 봉기해 초적이 되어 해인사를 공격하다가 해인사에서 승려와 신자들을 모아 자체적으로 조직한 자경단과 충돌해 사상자가 났는데, 최치원은 이때 죽은 승병 59명들을 위령하면서 쓴 해인사묘길상탑기에서 "당에서 소종 황제가 중흥을 이루고 있을 때 두 가지 재앙(전쟁흉년)이 서쪽에서 멈추고 동쪽으로 오니, 흉하다 하는 것들 중에서도 이보다 더 흉한 것이 없었고, 굶어 죽은 시체와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한데 엉켜 하늘의 별처럼 들에 널브러져 있다."고 처참했던 당시의 모습을 묘사하였다.물론 당소종도 결국 시해되고 당이 멸망하고 만다는 것이 함정이지만[19]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20]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21] 지금의 충청남도 서산시.[22] 이 학사루에 유자광이 써 붙인 글을 김종직이 보기 싫다고 떼어내 태워버리게 해서 유자광이 앙심을 품은 것이 무오사화의 발단이 되었다. 지금의 학사루는 1979년에 이전한 것.[23]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을 읽어보면 당시 신라 사회의 혼란과 모순, 신분적 한계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절망했던 최치원의 착잡한 심정을 느낄 수 있다.[24] 이 글씨가 의미가 있는 것은 이후 고려조선시대까지 문인들의 금강산 순례 붐이 일었고 산 바위에 자기들의 문장을 새기는 것이 유행했는데, 실제로 가장 오래된 글씨가 이 최치원의 것이기 때문이다.[25] 지금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일대. 조선 시대까지 수성구는 대구와는 독립된 고을이었다.[26] 그런데 웹상에서는 최고운전의 내용을 실제 최치원의 행적으로 뒤섞여 서술하는 경우가 있다. 마치 삼국지연의와 실제 중국 삼국시대를 헷갈리는 것과 같다. 최고운전은 최치원을 도사, 신선 같은 인물로 묘사하기 때문에 당연히 실제 역사인물 최치원과는 구별해야 한다.[27] 오래되다 보니 이 비문은 가운데 雲 자가 풍화가 심해 많이 지워진 상태다.[28] 그리고 이 참서를 올린 곳이 지금의 경주 남산 밑에 있는 상서장(上書莊)이라고 한다.[29] 최치원이 해인사에 은거하던 시절, 왕건을 지지하던 승려 '희랑'의 견해를 존중하여 시를 써주었다 해서 이의 가능성 자체는 긍정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 쪽도 '당시 신흥 궐기하던 송악 세력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정도로 평가한다 .예시[30] 그 다음 견훤의 대답이 "그럼 그렇지. '고운'이 고려에 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온 천하 민심을 흔들 일이니까"라고 한다.[31] 고려 3성 중 하나인 내사성의 장관. 문종 15년에 내사령은 중서령으로 개칭되었다. 품질은 종1품, 정원은 1인이다.[32] 擧世少知音(거세소지음)이라고 쓴 것도 있으며 중학교 한문 교과서에서도 이렇게 쓰고 있다.[33] 관련 작성글에서 고전소설 최고운전에나 나오는 이야기라고 자꾸 들먹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최고운전의 창작연대는 높게 잡아도 1700년대를 넘어가지 않고, 이 이야기 자체는 이 작품이 나오기 이전인 고려말-조선초부터 당시의 유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졌던 일화이다. 학자들의 문집 등을 보면 심심찮게 볼 수 있다.[34] 소금 밀매상인 황소가 글자를 읽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이야기가 많지만, 실제 황소가 지었다는 한시가 존재한다. 부제후부국(不第後賦菊), 즉 '과거에 떨어진 뒤에 국화를 보고 지음'(황소 본인은 국화를 몹시 좋아했던지 얼마 안 남은 그의 한시 작품은 모두 국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이라는 이 한시의 제목은 황소가 한때 과거 시험에 응시했다가 낙방한 적이 있음을 시사하는데, 한시를 짓고 과거 시험에 응시한 경험도 있다면 글을 자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 상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글을 모른다고 보는 것도 편견인데, 당장 중국 소설이나 영화들만 봐도 상인의 아들로서 공부한다던가 공부하다가 때려치우고 상인이 된다던가 하는 내용이 숱하게 나온다. 부를 축적하는 만큼 오히려 글을 접할 기회가 늘어나는 것.[35] 해당 한시는 다음과 같다. "가을이 되어 9월 8일을 기다리니/내 꽃이 피고 나면 다른 꽃은 질 테지/충천하는 향기는 마침내 장안을 채우고/온 성이 황금 갑옷 두르리(待到秋來九月八/我花開後百花殺/衝天香陣透長安/滿城盡帶黃金鉀)" 이 한시의 마지막 구절인 '만성진대황금갑(滿城盡帶黃金鉀)'은 2007년 중국에서 개봉한 장예모 감독의 영화 '황후화'의 중국 원제목이기도 하다.[36] 말 그대로 얻기 어렵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