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1 19:00:32

개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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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실하게 부자관계가 아님이 증명됨
백제 국왕 }}}}}}}}}

백제 제21대 국왕
개로왕 | 蓋鹵王
파일:송산리 적석유구.jpg
개로왕의 가묘로 추정되는 송산리 적석유구 전경.
<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 출생
(음력)
연대 미상
백제 위례성
(現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일대)
사망
(음력)
475년 9월
백제 아단성
(現 서울특별시 광진구 일대)
능묘 송산리 적석유구 (가묘) (추정)
재위기간
(음력)
백제 제21대 국왕
455년 9월 ~ 475년 9월[1] (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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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慶司) / 경(慶)[2] / 개로(蓋鹵)[3] · 개로(盖盧)[4] / 개루(蓋婁) / 가수리(加須利)[5] / 개도(蓋圖)[6]
부모 부왕 비유왕
모후 미상
형제자매 동생 부여문주, 부여곤지
왕후 대후[7], 부인(?)[8]
자녀 왕자[9], 공주[10], 부여문주[11], 부여곤지[12], 부여사마(?)[13]
종교 불교
왕호 개로왕(蓋鹵王)
별호 근개루왕(近蓋婁王)
근개로왕(近蓋鹵王)[14]
가수리군(加須利君)[15] }}}}}}}}}

1. 개요2. 생애
2.1. 재위 초기2.2. 북위에 고구려 침공을 요청하다2.3. 고구려 장수왕의 분노2.4.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 그리고 개로왕의 죽음2.5. 뒤늦은 구원
3. 평가4. 《삼국사기》 기록5. 기타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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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予愚而不明 信用姦人之言 以至於此. 民殘而兵弱 雖有危事 誰肯爲我力戰. 吾當死於社稷 汝在此俱死 無益也 盍避難以續國系焉.
내가 어리석고 현명하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었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백성들은 쇠잔하고 병사는 약하니, 비록 위급한 일이 있다 하여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겠는가? 나는 마땅히 사직을 위하여 죽어야겠지만 네가 여기서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할 것이 없으니, 난리를 피하여 있다가 나라의 왕통을 잇도록 하라.
고구려가 백제를 함락하자 아들(혹은 동생) 문주왕에게 남긴 한탄의 말. 사실상 유언이나 다름없다.
백제의 제21대 군주이자 건길지. 백제에서 의자왕 다음으로 기구한 군주이며, 책계왕, 성왕과 함께 전쟁터에서 죽은 백제의 군주들 중 한 명이다. 왕호는 백제 초기의 개루왕과 구분하여 '근개루왕(近蓋婁王)'이라고도 했다. 대체적으로 중국역사서에서는 '경사(慶司)' 또는 축약 표기인 '경(慶)', 《일본서기》에서는 '개로(蓋鹵)' 또는 '가수리(加須利)'로 나온다. 한자 의 후기 상고한어 재구음이 *kˤajs(가이스)라는 점을 고려하면 개로왕의 실제 이름은 '가수로' 정도로 발음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6]

2. 생애

2.1. 재위 초기

백제 역대 군주들이 기록이 부실하듯 개로왕도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즉위 원년 이후 무려 14년 동안 아무런 기록이 없다. 급작스럽게 사망한 아버지 비유왕의 유해를 임금이 된 지 무려 21년 만에 수습해 장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그동안 피치 못할 사정으로 발견 혹은[17] 수습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에서는 백제의 당대 기록인 《백제신찬》을 인용하여 개로왕의 즉위 년도를 429년으로 기록하고 비유왕의 재위기를 누락시켰다. 이러한 기록은 당시 백제가 비유왕을 정식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한편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개로왕 집권 초기의 상황을 대략 유추해볼 수 있다. 즉위한지 한 달 만인 455년 10월 고구려장수왕이 백제를 공격했다. 고구려가 백제의 정세 불안을 즉시 포착하고 절호의 기회라 생각해 공격한 듯하다. 그러나 전왕 비유왕 때 맺어 두었던 나제동맹 덕분에 신라의 지원군과 함께 물리쳤다고 한다. 동맹을 맺은 두 나라가 고구려의 침입 시 지원군을 주고 받으면서 상부상조한 첫 번째 사례다.
대명(大明) 2년(458년), 여경(餘慶: 개로왕)이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말했다.
"신의 나라는 대대로 특별한 은혜를 입고, 문무의 훌륭한 신하들이 대대로 조정의 관작을 받았습니다. 행관군장군(行冠軍將軍) 우현왕(右賢王) 여기(餘紀) 등 11명은 충성스럽고 부지런하여 높은 지위에 나아감이 마땅하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가엾게 여기시어 모두 관직을 내려 주십시오."

이에 행관군장군 우현왕 여기를 관군장군으로 삼았다. 행정로장군(行征虜將軍) 좌현왕(左賢王) 여곤(餘昆)과 행정로장군 여훈(餘暈)을 모두 정로장군으로 삼았다. 행보국장군(行輔國將軍) 여도(餘都)와 여예(餘乂)를 모두 보국장군으로 삼았다. 행용양장군(行龍驤將軍) 목금(沐衿)과 여작(餘爵)을 모두 용양장군으로 삼았다. 행영삭장군(行寧朔將軍) 여류(餘流)와 미귀(麋貴)를 모두 영삭장군으로 삼았다. 행건무장군(行建武將軍) 우서(于西)와 여루(餘婁)를 모두 건무장군으로 삼았다.
송서》 〈백제전〉 #
기록이 부족한 개로왕 초기 상황이 중국 역사서 《송서(宋書)》에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송서》에 의하면 개로왕은 457년 유송에 사신을 보내서 진동대장군 관작을 제수받았다. 이듬해인 458년에는 개로왕의 신하 11명에게 관작을 제수해 달라고 요청해 유송이 이들에게 장군직을 수여한 기록이 남아있다. 11명의 관리들 중 8명이 왕족부여씨였으며, 3명만 성씨가 다른 귀족이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백제의 유력 가문인 진씨[18]나 해씨가 없는데, 아버지 비유왕 대에는 해씨가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던 것과 비교해보면 상당히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개로왕 초기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비유왕의 유해가 자그만치 20여 년 동안이나 방치된 것을 보면 이 시기에 해씨 등 유력 귀족과 개로왕의 갈등이 극단적으로 표출되었고, 개로왕은 권력 구조를 재편하면서 부여씨 왕족들을 자신의 측근 세력으로 내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정로장군 좌현왕에 임명된 부여곤지는 개로왕의 태자[19]로 간주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보국장군에 임명된 부여문주상좌평에 올라 국정 전반을 총괄했던 것으로 보인다.[20] 부여씨 왕족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사가제(私假制)적 질서를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기존 귀족 세력들과의 갈등이 증폭되었을 개연성이 높은 것이다.

일본 측 기록인 《일본서기》 〈유랴쿠기〉에서 인용한 《백제신찬》에 따르면, 개로왕이 즉위한 뒤 야마토에서 아레나코(阿禮奴跪)를 사신으로 보내 궁녀로 쓸 여자를 물색했다. 백제는 모니부인(慕尼夫人)[21]의 딸 적계여랑(適稽女郞)[22]을 단장하여 일본에 보냈는데, 458년 7월 적계가 이시카와노 타테(石川楯)라는 남자와 불륜을 저질러 둘이 함께 화형에 처해졌다. 3년 뒤인 461년 4월, 개로왕은 아우인 부여곤지와 대화한 뒤 왜국에 여성 왕족을 보내는 정책을 폐기하고 남성 왕족을 보내는 정책으로 선회했으며 이후에 왜국과의 관계도 개선된 것으로 보인다. #

이때 개로왕은 곤지를 왜국에 사신으로 보내기로 결정하는데, 곤지는 그 대가로 만삭이었던 개로왕의 부인을 같이 데려갔다. 그해 6월 1일, 개로왕의 부인은 왜국으로 가는 도중 산기를 느껴 지금의 후쿠오카현 북쪽에 있는 카카라 섬에 정박해 무령왕을 낳았다. 무령왕이 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섬'의 백제어 형태였던 사마(斯麻)[23]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훗날 백제 사람들은 카카라 섬을 "임금이 태어난 섬"이라는 뜻의 니리무세마(主嶋; ニリムセマ)[24]라 불렀다고 전한다.

2.2. 북위에 고구려 침공을 요청하다

개로왕은 고구려와의 전쟁이 다시 크게 벌어질 것을 예감하여 대비하고 있었다. 469년 8월에는 고구려의 남부 지역을 침공하는데, 이는 아신왕 이후 백제가 처음으로 고구려를 선제 공격한 사건이었다. 그러면서 고구려의 반격을 바로 대비해 10월에는 쌍현성을 수리하는 한편, 국경 지대의 요충지인 청목령(현 개성시 부근)에 큰 목책을 설치하고 북한산성의 군사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여 방어 태세를 보강했다.

472년 북위(北魏)에 구원병 파견을 요청하는 국서를 보내서 북위가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협공할 필요성과 성공 가능성을 설득하려고 했다. 이는 북위의 세력을 이용하여 고구려의 남침 세력을 분산해 약화시키려는 개로왕의 외교적인 시도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이것이 바로 개로왕 국서 사건으로 《북위서》 〈열전〉에 국서 전문이 실려있으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도 거의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다.
신이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으나 이리와 승냥이에게 길이 막히니, 비록 대대로 영험한 교화를 받았으나 번국으로서의 예를 받들 수 없었습니다. 멀리 천자의 궁궐을 바라보면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은 끝이 없었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미약하나마 응하니, 엎드려 생각건대 황제 폐하께서는 하늘의 아름다운 도리에 잘 조화하시는지라 우러러 뵙고 싶은 심정을 억누를 길이 없었습니다.

삼가 사사로이 임명한 관군장군(冠軍將軍) 부마도위(駙馬都尉) 불사후(弗斯侯) 장사(長史) 여례(餘禮)와 용양장군(龍驤將軍) 대방태수(帶方太守) 사마(司馬) 장무(張茂) 등을 보내어 험한 파도에 배를 띄워 아득한 나루로 가는 길을 찾아 헤매며, 목숨을 자연의 운수에 맡겨서 만분의 일의 정성이라도 바치고자 하옵니다. 바라옵건대 하늘의 신과 땅의 신이 감응을 드리우고 황제의 영험이 크게 덮어주셔서 천자의 조정에 도달하여 신의 뜻을 펼쳐 드러낼 수 있다면, 비록 그 소식을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는다고 해도 영원토록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신은 고구려와 더불어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습니다. 선대에는 옛 우의를 두텁게 하였는데, 그들의 선조인 (釗)가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가벼이 저버리고 친히 군사를 거느려 신의 국경을 함부로 짓밟았습니다. 신의 선조 (須)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처럼 달려가 기회를 타서 잽싸게 공격하니, 화살과 돌로 잠시 싸운 끝에 쇠의 머리를 베어 높이 매달았습니다. 이로부터 고구려는 감히 남쪽을 돌아다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풍씨(馮氏)의 국운이 다하여 그 유민이 고구려로 도망하여 온 후로부터[25] 추악한 무리가 점점 강성해졌습니다. 끝내 침략과 위협을 당하여 원한이 얽히고 전화(戰禍)가 이어진 지 30여 년이 되었으니, 물자도 다 되고 힘도 떨어져서 나라가 점점 쇠잔해지고 있습니다. 만일 천자의 인자함과 간절한 긍휼이 멀리라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면, 급히 장수 한 사람을 보내어 신의 나라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마땅히 저의 딸을 보내어 후궁에서 청소를 하게 하고, 아울러 자제들을 보내어 마구간에서 말을 먹이게 하겠으며 한 치의 땅이나 한 사람의 필부라도 감히 저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璉)은 죄를 지어 나라가 스스로 남에게 잡아 먹히게 되었고, 대신과 호족들을 살육하기를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의 죄악은 넘쳐나서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그들이 멸망할 시기로써 폐하의 힘을 빌릴 때입니다. 또한 풍족(馮族)의 군사와 군마에게는 보금자리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고 낙랑여러 군(郡)은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니, 황제의 위엄이 한번 움직여 토벌을 행한다면 전투가 벌어질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제가 비록 어리석고 둔하지만 힘을 다하여 우리 병사를 거느리고 위풍을 받들어 호응할 것입니다.

또한 고구려는 의롭지 못하여 반역하고 간계를 꾸미는 일이 많습니다. 겉으로는 외효(隗囂)[26]처럼 변방의 나라를 자칭하며 겸손하게 굴면서도, 속으로는 흉악한 짐승의 저돌적인 행위를 품고 있습니다. 남쪽으로는 유씨(劉氏)와 내통하기도 하고, 북쪽으로는 연연(蠕蠕)과 맹약하기도 하여 서로 강하게 결탁하면서 폐하의 정책을 배반하려 하고 있습니다.

옛날 요 임금은 지극한 성인이었으나 단수(丹水)에서 전투를 하여 묘만(苗蠻)에 벌을 주었으며, 맹상군(孟嘗君)은 어질다고 소문이 났으나 길가에서 남을 꾸짖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한 방울씩 새어나오는 물이라도 일찍 막아야 하는 것이니, 지금 만약 고구려를 치지 않는다면 앞으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 경진년(440년) 이후 우리 나라 서쪽 경계의 소석산(小石山) 북쪽 바다에서 10여 구의 시체를 보았고, 동시에 옷과 기물, 안장, 굴레 등을 얻었는데, 이를 살펴보니 고구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후에 들으니 이는 바로 황제의 사신이 우리 나라로 오다가 뱀처럼 흉악한 것들이 길을 막았기에 바다에 빠진 것이라 합니다. 비록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매우 분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춘추시대송나라에서 신주(申舟)를 살해하자 초나라장왕은 맨발로 뛰쳐나갔고, 매가 놓아준 비둘기를 덮치자 신릉군(信陵君)은 끼니를 굶었습니다.

적을 이겨 명예를 세우는 것은 대단히 아름답고 훌륭한 일입니다. 작은 변방에서도 오히려 만대의 신의를 생각하는데, 하물며 폐하께서는 천지의 기를 모으셨고 형세는 산과 바다를 기울일 만한데, 어찌하여 조그마한 어린 아이가 폐하께 가는 길을 걸터앉아 막게 하십니까? 이제 북쪽 바다에서 얻었던 안장을 바쳐 증거로 삼고자 합니다.
북위서》 〈열전〉 中
개로왕은 북위사신들이 탄 배가 백제로 오는 도중 폭풍에 난파당해 전원 사망했는데 이를 고구려가 한 짓이라고 주장하며, 잔해물 중에서 말 안장 하나를 건져 증거로서 북위에 보냈다. 그런데 북위 측에서 확인해 보니 그 안장은 북위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설령 북위 것이 맞더라도 북위가 고구려와 전쟁할 마음이 없는 이상 "이거 우리 꺼 아닌데?" 하고 입 싹 닦고 치우면 그만이었다.

어쨌든 개로왕이 보낸 국서는 북위 조정에 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당시 북위는 이런 국서를 받고 일단 생각은 해 본 듯하다. 국서가 처음 도착했을 때는 고구려와의 관계가 비교적 나쁘지 않았지만 그 이듬해부터 고구려와의 관계가 냉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서 도착 이듬해에 북위의 헌문제 탁발홍은 다음과 같이 회답했다.
글을 받고 아무 일 없이 지낸다는 말을 들으니 매우 기쁘다. 경은 동쪽 한 모퉁이의 5복(五服)의 밖에 있으면서 산과 바다를 멀리 여기지 않고 위나라 조정에 정성을 바치니, 그 지극한 뜻을 가상히 여겨 가슴 속에 기억해 두리라. 짐은 만대에 누릴 위업을 계승하여 사해에 군림하면서 뭇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다. 이제 천하는 한결같이 평온해졌고, 8방에서 귀순하기 위해 포대기로 아이를 업고 이 땅에 이르는 자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평화로운 풍속과 성대한 군사는 여례(餘禮)[27] 등이 직접 보고 들은 바이다.

그대의 나라는 고구려와 불화하여 여러 번 침범을 당하였으나, 만일 정의를 따르고 어진 마음으로 방어할 수 있다면 어찌 원수를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 이전에 사신을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 국경 밖의 먼 나라를 위무하게 하였으나, 그 후 여러 해가 되도록 돌아오지 않으니 생사와 도착 여부를 자세히 알지 못하였다. 그대가 보낸 안장을 예전 것과 비교하여 보니 중국의 산물이 아니었다. 의심되는 일을 사실로 단정하는 과오를 범할 수는 없는 일이다. 고구려를 침공할 계획은 별지에 상세히 밝힐 것이다.
고구려는 국토의 지세가 험하다는 사실을 믿고 경의 국토를 침범하였으니, 이는 자기 선대 임금의 옛 원수를 갚는다면서 백성들을 편안케 하는 큰 덕을 저버린 것이다. 전쟁이 여러 해에 걸쳐 이어지니 변경을 단속하기 어려움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사신은 신포서의 정성을 겸하게 되고 나라는 초나라, 월나라와 같이 위급하게 되었구나. 이제 마땅히 정의를 펴고 약자를 구하기 위하여 기회를 보아 번개처럼 공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선대로부터 번방의 신하를 자처하며 조공하여 온 지 오래인지라, 그대들과는 오래 전부터 틈이 있었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아직 명령을 어긴 허물이 없다.

경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와 그들을 곧장 정벌하여 달라 요구하기에[28] 얼마 동안 일의 시비를 따져 보았으나 사리에 역시 맞지 않았다. 그래서 지난해에 여례 등을 평양성에 파견하여 고구려의 상황을 조사하려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빈번한 주청(奏請)이 사리에 합당하였기에 사신이 그들의 요청을 막을 수 없었고, 법관은 그들에게 죄명을 줄 만하지 못했던 바, 그들이 말하는 바를 들어 주고 여례 등을 돌아오게 하였다. 만약 고구려가 이제 다시 명령을 어긴다면, 그들의 과오가 더욱 드러날 것이므로 뒷날 아무리 변명을 하더라도 죄를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니, 그렇게 된 연후에는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토벌하더라도 이치에 합당할 것이다.
구이(九夷)의 여러 나라들은 대대로 바다 밖에 살면서 왕도가 창성하면 번방 신하로서의 예절을 다하고, 은혜가 중단되면 자기의 영토를 지켜 왔다. 때문에 중국과의 예속 관계는 역사책에도 기록되어 있으나, 호시(楛矢)의 공물을 바치는 일은 빠뜨린 해가 많았다. 그대는 강약에 대한 형세를 갖추어 진술하고 지난 시대의 사실들을 모두 열거하였지만, 풍속도 다르고 사정도 변하여 무엇을 주려 하여도 나의 생각과 맞지 않는다.

우리의 너그러운 규범과 관대한 정책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이제 중국은 평정 통일되어 나라 안에 근심이 없다. 이에 따라 늘 동쪽 지방에 위엄을 떨치고 국경 밖에 깃발을 휘날려 먼 나라의 굶주리는 백성을 구원하며, 먼 지방까지 황제의 위풍을 보이고자 한다. 그러나 사실은 고구려가 그때마다 진정을 토로하였기 때문에 아직 정벌을 계획하는 데는 미치지 못하겠다.

이제 그들이 나의 조칙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경이 보내온 계책이 짐의 뜻에 합치하니 군대를 출동하는 일은 앞으로 멀지 않을 것이다. 군사를 미리 준비하여 함께 일어나도록 시기를 기다리면서, 때때로 사신을 보내어 저들의 정황을 속히 알려줘야 할 것이다. 우리 군사가 출동하는 날, 그대가 향도의 선두가 된다면 승리한 후에는 역시 가장 큰 공로로 상을 받게 될 것이니,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대가 바친 포백과 해산물은 비록 모두 도착하지는 않았으나, 그대의 지극한 성의는 잘 알겠도다. 이제 별지와 같이 여러 가지 물품을 보내노라.
북위서》 〈열전〉 中
북위의 답서는 이같이 매우 애매한 스탠스를 취하고 있고 그러면서도 백제에게 정보를 보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위의 표현도 상당히 백제에게 좋게 해석한 것이고 현실적으로는 단순한 외교적 수사였을 가능성도 꽤 크다. 장수왕 시기에 고구려의 위상은 엄청나게 높아서 북위유송은 경쟁적으로 장수왕의 직위를 올려주고 백제보다 높이 대우했다. 심지어 이 시기에 북위와 고구려는 정략결혼까지 맺게 되는데 처음 제안한 쪽은 북위였다. 오히려 고구려는 혼인 적령기에 이른 공주가 없으니 기다려 달라고 주장하며 차일피일 미뤘다. 이런 저런 사정을 고려하면 북위의 입장에서는 백제를 돕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고구려를 적대시 할 의도가 생길 수가 없다.

게다가 이때가 고구려의 최전성기인 장수왕의 치세였던 만큼, 북위 입장에서는 위험 부담이 지나치게 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고구려가 북쪽과 서쪽 이민족들의 침입 및 남쪽에 있었던 유송의 존재로 인해 비교적 불안정한 상태였던 북위의 침략을 받고 패배했을 확률은 상당히 희박했다. 답서의 의도는 혹시나 고구려가 약해졌다는 소식을 백제를 통해서 듣거나, 고구려와 만에 하나 싸우게 되면 백제를 조공(助攻)으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정도를 고려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즉, 북위를 통해서 안전을 보장받으려고 했던 개로왕의 의도는 시도해 보기도 전에 틀어졌다는 이야기다.

이때 개로왕이 보낸 국서 자체는 조선 초기의 《동문선》에도 실리는 등 상당한 명문으로 꼽혔으며, 국서에 인용된 유교 경전이나 중국사 인식, 논리 전개 등에서 당대 백제인들의 학문적 소양을 알 수 있다.

북위의 이 답장은 육로를 통해 백제로 전달될 예정이었지만, 고구려 측이 북위 사신들이 백제로 가지 못하게 길을 막아버려 전달되지 못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답장이 오지 않자 백제에서는 북위에 더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개로왕이 북위를 원망하여 조공을 끊어버렸다"고 적었다.

2.3. 고구려 장수왕의 분노

이 국서 사건은 장수왕의 심기를 크게 건드리고 말았다. 내용만 봐도 장수왕이 화낼 만한 내용인데, 장수왕의 증조부인 고국원왕 전사 사건도 오롯이 적혀 있고, 장수왕도 죄인이라고 비방하고 있다. 더군다나 고국원왕은 화살을 맞고 병상에서 죽었지 목 베여 죽지는 않았다.[29]삼국사기》에서조차 이를 과한 표현이라고 지적했을 정도. 게다가 북위가 답신을 보내는 방법도 처음에 백제로 사신을 보낼 때 육로로, 그러니까 고구려를 통과해서 보내려고 시도했기에 장수왕은 더 열 받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화가 폭발한 장수왕은 북위의 사신 일행을 통과시키기를 대놓고 거부했다. 장수왕이 바보가 아닌 이상, 북위와 백제가 손을 잡는 걸 눈뜨고 지켜보고만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북위는 해로로 사신을 보내려고 했는데, 바다가 험해서 그것도 실패. 그러니까 북위는 답신을 결국 못 보냈다.

어쨌든 《북위서》의 이 기사 덕분에, 장수왕 시절 고구려는 내부적으로 왕권 강화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고[30] 그 힘을 바탕으로 굉장히 오랜 기간 동안[31] 백제를 위협하고 있었으며, 백제 또한 앉아서 당하지 않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다는[32]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 장수왕이 몰래 백제 침공을 도모하려고 백제에서 첩자 노릇을 할 만한 사람을 구하였다. 이때 승려 도림(道琳)이 응하여 말하기를, "어리석은 소승이 아직 도(道)는 알지 못하지만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생각은 있습니다. 바라건대 대왕께서 신을 어리석다 여기지 않으시고 지목하여 시키신다면,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몰래 보내 백제를 속이게 하였다. 이에 도림은 거짓으로 죄를 짓고 도망가 백제로 들어갔다.

당시 백제왕 근개루(近蓋婁: 개로왕)는 장기와 바둑을 좋아하였다. 도림이 대궐 문에 이르러 아뢰기를, "신이 어려서부터 바둑을 배워 자못 신묘한 경지에 들었으니, 바라건대 대왕의 곁에서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불러들여 바둑을 두어보니 과연 국수(國手)였다. 마침내 그를 높여 상객(上客)으로 삼고 매우 친하게 지내면서, 서로 늦게 만난 것을 아쉬워하였다.

도림이 하루는 왕을 모시고 앉아서 조용히 말하기를, "신은 다른 나라 사람인데 왕께서 저를 멀리하지 않으시고 은혜를 매우 두텁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오직 한 가지 기술만 바쳤을 뿐 아직 털끝만한 이익도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바라건대 한 말씀 올리려 하오나 왕의 뜻이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말해 보시오. 만일 나라에 이롭다면 이는 선생에게서 바라는 바입니다."라고 하였다.

도림이 말하기를,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과 언덕, 강과 바다입니다. 이는 하늘이 베풀어주신 험한 요새이지 사람이 만든 형국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방의 이웃 나라들이 감히 엿볼 마음을 갖지 못하고 단지 받들어 섬기기를 원할 뿐이며 다른 겨를이 없습니다. 따라서 왕께서는 마땅히 숭고한 위세와 많은 업적으로써 남의 이목을 두렵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곽이 수리되지 않고 궁실도 고치지 않았으며, 선왕의 해골이 맨땅에 임시로 묻혀있고 백성의 집들은 강물에 자주 허물어지니 신은 대왕께서 취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맞소! 내가 장차 그리 하겠소."라고 하였다. 이에 나라 사람들을 모두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 그 안에 궁궐과 누각, 전망대와 건물을 지었는데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욱리하(郁里河)에서 큰 돌을 가져다 덧널을 만들어 아버지의 뼈를 묻고, 강을 따라 둑을 쌓았는데 사성(蛇城)의 동쪽에서부터 숭산(崇山)의 북쪽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창고가 텅 비고 백성들이 곤궁해지니 나라의 위태로움이 알을 포개놓은 것보다 심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장수왕은 백제를 공격하기 몇 해 전 도림이라는 승려를 첩자로 파견하여 백제의 국력을 미리 소모시키는 힘 빼기 작전을 시도한다. 도림은 바둑으로 개로왕과 친해진 다음 전쟁 대비보다는 대규모 토목공사에 집중하라고 건의한다. 그럴듯한 건의라 개로왕은 이를 받아들이는데, 이로 인해 백제의 재정이 파탄날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 《삼국사기》 기사의 논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림은 다시 고구려로 달아난 뒤 장수왕에게 백제의 상황을 아뢰었고, 장수왕은 크게 기뻐하며 장수들에게 병력을 분배하는 등 본격적으로 정벌 준비에 돌입했다.

2.4.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 그리고 개로왕의 죽음

결국 475년 9월, 고구려 장수왕은 3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전격적인 백제 침공을 단행했다.[33]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는 불과 7일 만에[34] 방어 전선이 죄다 무너지고 도성인 위례성마저 위협을 받게 되었다. 한성 방어전은 가히 필사적이었다. 대로 제우(齊于)를 필두로 한 고구려군은 군사를 네 방면으로 나누어 총공격을 퍼부었고, 이마저도 실패하자 화공을 가해 성문을 불태웠다. 이때 성 내부의 민심은 매우 위태로웠으며, 두려운 나머지 나가서 항복하려는 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개로왕은 도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당시의 태자 혹은 동생인 부여문주를 불러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
내가 어리석고 현명하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었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백성들은 쇠잔하고 병사는 약하니, 비록 위급한 일이 있다 하여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겠는가? 나는 마땅히 나라를 위하여 죽어야겠지만 네가 여기서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할 것이 없으니, 난리를 피하여 있다가 나라의 왕통을 잇도록 하라.
부여문주는 형 혹은 아버지[35]인 개로왕의 명을 거절하지 못하고, 목협만치(木劦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를 데리고 남쪽으로 도주했다.[36]
20년(476년) 겨울에 고구려 왕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쳐서 없앴다. 그런데 몇몇의 남은 무리들이 창고 아래에 모여 있었다. 무기와 양식이 이미 다 떨어지고 근심하여 우는 소리가 매우 심하였다. 이 때 고구려의 여러 장수들이 왕에게 "백제의 마음가짐이 범상치 않습니다. 신들이 볼 때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제 정신을 잃습니다. 다시 덩굴이 뻗어 자라듯 되살아날까 두렵습니다. 뒤쫓아 가서 제거해야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왕이 "그럴 수 없다. 과인이 듣기에 백제는 왜의 관가(官家)가 된 것이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또한 그 왕이 들어가서 천황을 섬긴 것은 사방에서 모두 다 안다."라고 말하니, 그만두었다.【《백제기》에 따르면 개로왕 을묘년(475년) 겨울, 고구려(狛)의 대군이 와서 대성(大城)을 7일 낮 7일 밤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왕성이 함락되고 마침내 위례(尉禮)를 잃었다. 국왕과 대후(大后), 왕자 등이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
일본서기》 〈웅략기〉 20년 #[37]

끝내 위례성이 함락당하자, 개로왕은 왕비와 왕족들을 데리고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린 채 서쪽으로 탈출하려다가 고구려군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개로왕을 사로잡은 백제의 배신자 재증걸루고이만년[38]은 일단 말에서 내려 옛 임금인 개로왕에게 절을 하고, 왕의 낯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서 죄목을 따진 다음 아단성 아래로 끌고 가 일족 모두와 함께 참수해 버렸다. 이후 고구려군은 남녀 8,000명을 포로로 삼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정말 비참한 것은 아무리 그래도 일국의 왕인데 묘비도 없이 매장됐다는 점. 그 때문에 개로왕이 기록대로라면 아차산성 어딘가에 유해가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인데, 정확히 어디에 묻혔는지는 현재까지도 알 수 없다. 위에 언급했듯이 《일본서기》에서는 아예 이때 백제가 멸망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수도가 함락되고 일국의 국왕이 비참하게 살해당한데다가 왕실의 기원이자 국가의 중심지(한강 유역)를 송두리째 빼앗겼으니 충분히 가능한 표현이다. 현대 역사학에서도 '한성백제의 멸망'이란 표현을 매우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그 정도로 심각한 결과였다.

고구려 입장에서는 미천왕에서 광개토대왕까지 조상들의 원수를 갚은 전투였다. 고국원왕의 전사때부터 사이가 안 좋았던 고구려와 백제는 이후로도 서로의 왕을 죽이고 죽인 원수지간으로서 끊임없이 싸우게 되었다. 이는 신라의 진흥왕이 급부상해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을 신라의 영토로 갈라놓기 전까지 계속되었다.[39] 그 이후 고구려와 백제는 왜국하고도 교류하고 말갈을 이용해서 신라를 공격한다. 대표적인 사건이 고구려ㆍ백제ㆍ말갈의 당항성 점령이며, 더 나아가 655년에 신라 북쪽 33개의 성을 빼앗은 전투이다.

2.5. 뒤늦은 구원

한편 앞서 탈출했던 부여문주는 나제동맹에 따라 신라로 도망가 자비 마립간에게 증원군을 요청하여, 신라 구원병 10,000명을 이끌고 왔지만 이미 상황이 끝난 뒤였다. 한강 유역이 통째로 고구려의 손에 떨어진 것이다.[40]신라로부터 온 지원군이 백제의 귀족 지원군보다 더 빨리 도착했다. 다만 이에 대해 당시 귀족들과의 사이가 나빠서 그랬다고 추정하기는 무리다. 이 당시 신라는 백제가 아신왕 때 고구려한테 빼앗겨버린 충북 지역 일부를 손에 넣어 거의 왕실 직할지에 가깝게 육성했었는데, 당시 한성으로 올려보낸 병력은 바로 이 지역 병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41]

근초고왕 때 영산강 유역 세력 등 전남 전체와 전북 일부를 직접 지배 세력으로 편재하지 못했음에도 일단 전부 간접 지배 지역으로 편성하긴 했었고, 그 이후에도 딱히 적대적인 정황은 문헌적으로든 고고학적으로든 발견되지 않는다. 게다가 오히려 개로왕 통치기에는 흔히 백제의 부흥기로 알려진 근초고왕 통치기보다 전북의 직접 지배 지역이 늘어나 있었고, 개로왕 자체가 워낙에 중앙 귀족들 원성을 사가면서 지방 세력들 위무에 전력 투구했기에 이 반독립적인 전남 호족 세력들이 그 당시 대놓고 백제를 배신했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 다만 아무래도 위급한 상황에서 충청도에서만 병력을 모아갈 순 없었던데다 전남의 반독립적인 호족 세력으로부터 병력을 빨리 징발해 올리긴 어려워서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42][43]

3. 평가

고구려도림과 관련된 설화적 기록 때문에 암군의 이미지가 있다.[44] 그러나 백제의 왕권을 강화하는데 성공하기도 했고, 북위와 연계하여 고구려를 포위하기 위해 외교적으로도 안간힘을 쓴 점도 있다. 개로왕은 당시 왕권을 과시하고자 큰 궁을 짓고, 지방 호족들도 위무하는 등 별 짓을 다했으나 당시 대성팔족을 비롯한 귀족 세력의 반발이 거셌고, 결정적으로 장수왕의 전격적인 백제 침공이 이뤄지면서 망하게 된 것이다.

개로왕 시기에 공주 지방 세력들이 위례성은 고구려와 가까우니 수도를 안전한 웅진성(현 충청남도 공주시 공산성)으로 천도하자고 여러 차례 건의를 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장수왕의 공격으로 위례성이 넘어가자 문주왕이 공주로 옮긴 것인데 이에 대한 증거는 수촌리 고분군을 통해 알 수 있다. 고구려가 쳐들어왔을 때 부여문주를 피신시키면서 "나는 마땅히 사직을 위해서 죽겠지만 너는 살아서 나라의 계통을 이어야 한다"며 한성에 끝까지 남았던 점이나 개로왕이 피신시킨 부여문주가 백제의 다음 왕으로 즉위하면서 수도 한성을 잃은 백제가 아주 멸망하는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마냥 암군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사실 공주로 천도하기도 쉬이 내릴 만한 선택이 아니었다. 후세 사람인 우리야 결과를 아니까 어차피 함락될 것이라면 미리 공주로 천도했으면 좋지 않았겠느냐고 하지만, 공주 같은 충남 내륙 지역은 직접 지배지로 편입된 역사만 따지면 오히려 김제시 같은 전북 서해안보다도 약간 늦었다. 그리고 직접 지배지로 편성되었더라도 일단 천도하면 토착 호족들에게 기득권을 양보해야 하는데, 안 그래도 너무 지방 호족들만 챙긴다며 중앙 귀족들에게 눈흘김 받던 개로왕이 적어도 그 시점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은 아니었다. 문주왕마저도 이미 결과가 다 정해진 시점에서조차, 폐허가 된 위례성에서 무려 한 달 동안 공주로 천도를 결단내리지 못하고 고민했을 정도. 무엇보다 공주는 과거나 현대나 심각한 용지 부족에 서쪽으로는 첩첩산중으로 교통로 개설도 어렵고 금강 수운의 활용에도 제약이 상당해 도시로서 입지는 꽝에 가깝다.[45] 결국 백제는 웅진 천도 63년 만에 사비성(현 충청남도 부여군)으로 수도를 옮겨야 했다.

훗날 의자왕 이후 백제부흥운동 과정과 비교하면 부여문주가 개로왕의 명으로 도망칠 수 있었음은 큰 행운이었다. 백제부흥운동의 구심점으로 추대된 풍왕왜국에서 오래 인질 생활을 했는데 장남도 아니고, 의자왕에게서 합법적인 루트로 정통성을 인정받지 않은 상태였기에 정통성 측면에서 다소 취약했다. 이런 이유로 풍왕이 거국적인 백제부흥운동의 구심점으로 다소 부족했던 것과 달리 부여문주는 왕이 되기 전에는 상좌평으로서 개로왕을 보좌해 실제 국정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다. 부여문주는 개로왕이 직접 "너는 부디 살아남아서 나라의 계통을 이으라."하고 부여문주의 왕위 계승을 명시했다는 점에서 풍왕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정통성이 있었다.

삼국사기》기록에 의하면 바둑에 빠져서 국사를 돌보지 않다가 나라를 말아먹었다고 한다.[46] 하지만 《삼국사기》의 기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과연 바둑 때문에 나라를 말아먹었는지 의문이 든다. 도림은 "…성곽과 궁실은 수리되지 않아 방치되어 있고 선왕의 해골은 빈 들판에 가매장 되어 있으며 백성의 가옥은 자주 범람하는 강물에 무너지니…"라고 말했다. 궁과 선왕의 능을 축조한 것 외에 성곽을 축조하고 한강변을 따라 둑을 건설하게 한 것 등은 백성의 생활에 필요한 것이었고,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 가능성에 대비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으며, 궁과 능을 증건한 것 역시 단순한 사치라기보다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역사학자 임용한의 경우에도 후자의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사실 (도림이) 고구려 사람인 것을 속일 수 없잖아요. 사투리 때문에, 지금보다 사투리가 10배는 심했을 거에요. "제가 백제 사람입니다." 라고 하지는 못하고, "고구려에서 지금 죄를 짓고 도망왔다." (라고 했을 거에요.) 굉장히 높은 지위여야 (백제)왕하고 놀 수 있겠죠? 다만 반역죄 정도로 튀었다고 이야기 했을 것이고, 그 전에 고구려장수왕대에 내전이 났으니까 "도림이 아마 장수왕의 반대편에 있었나보다." 하고 판단했을 거에요. (…) 그럼 백제에서는 뒷조사를 했을 거 아니에요. 그 결과 개로왕이 도림을 믿게 되었겠죠. (그렇기 때문에) 아마 개로왕은 고구려의 정세를 듣기 위해서 도림과 함께 했을 수도 있어요. 사실 뭐 바둑을 좋아했겠어요? 서로가 서로의 정세를 보기 위해서 그랬겠죠.
임용한, <토크멘터리 전쟁史> 45부 삼국시대1 - 한강을 점령하라 中

허나 노중국 교수의 견해처럼 위의 지적대로 개로왕이 실시했던 토목공사가 국가의 기강과 안보에 필요했음은 동의하지만 무리한 토목공사로 백성들의 원성을 샀음은 사실로 보인다고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47][48]

개로왕은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 장수왕이 귀족 세력을 숙청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개로왕이 고구려의 정세를 꿰뚫고 있었다는 증거로 작용한다. 결국 개로왕은 힘에 부쳐서 고구려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지 도림의 꼬임에 빠져서 나라를 말아먹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고구려는 선대부터 워낙 명군이 즉위해서 국력을 대폭 증강시켰던 것이 있으며 국경을 지키던 장수인 재증걸루고이만년이 고구려로 투항한 것도 컸다. 투항 후 급하게 국경으로 다른 장수들을 보냈지만 야전 사령관이 둘이나 이탈해서 투항했으니 군의 사기야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장수왕이 침공했을 때 부여문주가 구원군을 요청하러 간 곳이 백제의 지방이 아니라 신라로 갔다고, 그 당시 백제가 지방에서 지원군을 전혀 얻지 못했을거란 결론은 근거가 없다. 그보다는 가장 빨리 정예병을 지원받을 수 있었던 곳이 당시 신라가 고구려를 몰아내고 차지했던 충북 일대 군사기지였던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여문주가 신라군만 데리고 와서 싸웠던 게 아니라, 적어도 한 달 동안 고구려와 한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고 있었는데 그 동안에는 백제군도 주력의 일부였다. 이렇게 된 건 지방 호족들이 협조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개로왕이 개성 일대의 예성강 방어선에서 먼저 고구려를 막는 것보다 한강 방어선과 같은 왕성 수비를 더욱 중시하는 잘못된 군사 전략을 수립한 것이 주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49] 그리고 이렇게 잘못된 군사전략이 도림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또한 지적된다. 아신왕이 생각이 모자라서 강원도 영서와 충북 일대는 고구려한테 남겨두고[50] 어떻게든 모든 수를 다해 개성까지만 확보했던 건 아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큰 시사점은 장수왕고구려가 아주 독하게 전력을 퍼부어서 위례성을 함락시켰다는 것. 바로 강 건너에서 신라-백제 연합군과 함께 있는 부여문주를 고구려군이 무려 한 달 동안이나 그냥 지켜볼 수밖엔 없었던 걸 보면[51], 고구려가 비록 위례성을 함락시키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전력 소모가 만만찮았던 듯하다.

동국통감》은[52] 사치스럽고, 적국의 술책에 빠진 무능한 왕으로 평가했다.
"(후략)비유는 개로(蓋鹵)에게 전하였는데, 개로는 교만하고 사치하며 혼미하여 상국(上國, 북위(北魏))에 청해 강성한 이웃 나라를 치려고 하였으며, 적(敵)의 간첩을 믿고 가까이하여 바둑두고 즐기다가 크게 공역(工役)을 일으켜서 오직 궁실(宮室)과 대사(臺榭)를 높게 짓고 화려하게 장식하였습니다. 심지어 흙을 쪄[烝]서 성을 쌓고 하수(河水) 연안에 제방을 쌓으며 돌을 캐어 곽(槨)을 만들어서, 인력(人力)이 모두 피곤하고 창고가 텅 비었다고 고하였으나 오히려 적국의 술책에 빠진 것을 알지 못하였고, 나라의 형편이 부패되어 적병(敵兵)이 문득 이르렀으니 후회한들 미칠 수 없는 일이며, 자신이 남의 손에 죽게 되었으니 오히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전(傳)에 이르기를, ‘나라는 반드시 그 자체에서 친 뒤에 남이 그 나라를 친다.’ 하였으니, 개로를 두고 이른 것입니다."

4.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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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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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열전(列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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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개로왕 본기〉
一年秋九月 개로왕이 즉위하다
十四年秋十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十五年秋八月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하다
十五年秋十月 쌍현성을 수축하고 청목령에 큰 목책을 설치하다
十八年 북위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고 표문을 전하다
二十一年秋九月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살해되다

20년간 재위했음에도 기록이 거의 없다. 475년 한성 함락으로 백제 측 기록이 소실된 점과 일부 기록이 개루왕 시기로 올려졌다는 설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5. 기타

  • '개루(蓋婁)'라는 이름을 가진 왕이 엄연히 따로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삼국사기》 〈도미 열전〉에 나오는 개루왕을 이 사람으로 지목하기도 하는데, 이는 도미 부부 설화에 묘사된 시대상이 백제 초기 시기인 개루왕 대와 거리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앞에서 말했듯이 개로왕의 별칭이 근개루(近蓋婁)이기도 하다.
    사관이 논평한다. 초나라 소왕(昭王)이 운(鄖) 땅으로 도망갔을 때, 운공 신(辛)의 아우 회(懷)가 소왕을 죽이려 하면서 말하였다.

    "평왕(초나라 소왕의 아버지)이 나의 아버지를 죽였으니 내가 그 아들을 죽이는 것이 또한 옳지 않은가?"

    형 신이 말하였다.

    "임금이 신하를 죽이는데 누가 감히 원수로 삼겠는가? 임금의 명령은 하늘의 명령이니, 만약 하늘의 명령으로 죽었다면 장차 누구를 원수로 삼겠는가?"

    걸루 등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나라에서 용서되지 않았는데, 도리어 적병을 인도하여 예전의 임금을 포박하여 죽였으니 의롭지 못한 정도가 심했다. 혹 어떤 사람은 "그렇다면 오자서(伍子胥)가 초나라 서울 영(郢) 땅에 들어가 평왕의 시체에 매질을 한 것은 어떠한가?" 라고 말할 것이다. 양자(楊子)의 『법언(法言)』에 이를 평하기를 '오자서의 행위는 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였다. 이른바 덕이란 인과 의가 있을 뿐이니, 오자서의 잔인함이 운공의 어진 행위만 못하다. 이로써 논평한다면 걸루 등이 옳지 않다는 것이 명백하다.


    論曰 楚昭王之亡也 鄖公辛之弟懷 將弑王曰 平王殺吾父 我殺其子 不亦可乎 辛曰 君討臣 誰敢讎之 君命 天也 若死天命 將誰讎 桀婁等 自以罪不見容於國 而導敵兵 縛前君而害之 其不義也 甚矣 曰 然則伍子胥之入郢鞭尸 何也 曰 楊子法言 評此以爲不由德 所謂德者 仁與義而已矣 則子胥之狠 不如鄖公之仁 以此論之 桀婁等之爲不義也 明矣



    삼국사기》 〈개로왕 본기〉, 김부식
  •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도 개로왕의 최후 부분에서 '오자서의 고사'를 인용하여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을 꾸짖는다.
  • 2019년 2월 17일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의 코너에 도림과 함께 등장했다.
  • 곽재식 작가가 쓴 소설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신라 왕이 "우리 땅도 넓혔는데 간지나는 궁 하나 지어야 되지 않겠냐? 너네가 보거나 들은 건물 중에 좀 멋진 거 있으면 이야기 해 봐라."라고 하자 신하들이 고구려의 수정성과 더불어 '개로왕의 바둑 두는 정원'을 거론했다고 한다. 이 소설에서는 진사왕 대에 왕궁에 큰 못을 파 바다처럼 꾸미고, 바다 가운데 산을 쌓아서 신선부처가 노는 신선 봉오리로 꾸며놨고, 진사왕이 온갖 동식물과 신기하게 생긴 바위들을 옮겨놔 모습이 장관이었는데 개로왕이 그곳에 누각을 쌓고 더욱 화려하게 꾸며 안에서 바둑을 두고 놀았다고 한다. 거기다 몸에 글자와 그림을 그린 미녀들이 돌아다니며 바둑을 두는 사내들이 그녀들을 차지하기 위해 바둑 내기를 하는 등의 일들이 일어났는데 한성이 불타면서 그곳이 사라졌다고 되어 있다.[53]
  • 근초고왕과 싸우다 전사한 고구려의 고국원왕과 함께, 한국사를 공부할 때 고구려의 전성기가 나오면서 장수왕의 공격으로 사망한 행적이 빠지지 않아 백제 쪽의 사망전대로 여겨진다. 역사 교사나 강사중에서는 고구려에 사로잡힌 후 개(괴)로워하며 처형당했다는 식의 암기법을 가르치기도 한다.
  • 구이신왕의 봉사손이라는 추측이 있다. 비유왕은 사후 들판에 가매장되어 21년이 지나서야 시신을 수습해 제대로 장례를 치렀는데, 《일본서기》에서는 비유왕의 재위기간 자체를 삭제하는 등 백제에서 제대로 된 대우를 못받은 것이 확인된다. 《신찬성씨록》을 비롯한 일본 기록에서 개로왕의 동생 문주왕사케노키미과 함께 제사를 지내며, 둘째 동생 부여곤지는 유독 비유왕의 아들임이 강조된다. 거기다 '문주'는 '맏이', 곤지는 '큰'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때문에 개로왕은 백부인 구이신왕의 봉사손 자격으로 즉위했고, 21년이 지나 비유왕의 장례를 치른 뒤에도 개로왕과 문주왕은 그대로 구이신왕과 사케노키미의 봉사손으로 남았으며, 비유왕의 봉사손은 곤지가 그대로 이어서 했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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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삼국사기》. 《일본서기》 기준으로 429년 ~ 475년. 비유왕의 연대를 그대로 흡수하였다.[2]송서》, 《위서》.[3]일본서기》에서도 개로라고 적혀 있다.[4] 충주 고구려비. 다만 동일인인지는 불명이다.[5]일본서기》. 훈은 '카스리'.[6] 오우치씨 족보.[7] 이름 미상. 475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한성이 함락되면서 사망했다.[8] 부여곤지와 공유. 기록상 무령왕의 어머니로 대후와 동일인인지 아닌지는 불명.[9]일본서기》 〈유랴쿠조〉의 주석에 실린 《백제기》(百濟記)에서 "을묘년(475년) 겨울 코마(狛)의 대군(大軍)이 와서 대성(大城)을 7일 밤낮 동안 공격했다. 왕성(王城)이 항복하여 함락되니 위례(尉禮)를 잃었다. 국왕과 태후, 왕자 등이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라고 했는데, 이를 고려하면 475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10] 이름 미상. 472년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 언급되었다. 한편 그녀와 동행한 불사후 부여례의 관직명 중 부마도위(駙馬都尉)가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와 부부 관계였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는 백제사에서 유일하게 나타나는 근친혼 기록이다.[11] 《삼국사기》에서는 개로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일본서기》에서는 개로왕의 첫째 동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개로왕으로부터 '보국장군' 및 '상좌평' 직위를 받았다.[12] 《삼국사기》에서는 개로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일본서기》에서는 개로왕의 둘째 동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개로왕으로부터 '정로장군' 및 '좌현왕' 직위를 받았다.[13] 《삼국사기》에서는 동성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부여곤지의 손자에 해당하나 《일본서기》에 의하면 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사촌이거나 부여곤지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이복형에 해당한다. 일단 《일본서기》 기록을 그대로 신뢰하면 개로왕의 서자가 되지만 당대에는 부여곤지의 정당한 후사로 인정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즉 어머니의 본남편인 개로왕은 적부, 부여곤지는 서부인 것이다.[14]삼국유사기록.[15]일본서기》의 기록.[16]일본서기》의 가수리(加須利)와는 마지막 음절의 모음이 다른데, 같은 문헌에서 연개소문을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라고 음차했다는 점을 통해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한국계 인명을 전사할 때 어말 모음 'ㅗ/ㅜ'를 'ㅣ'로 수정하는 경향이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경사(慶司)는 '가수' 부분을 한문식 이름처럼 보이게끔 그럴듯하게 음차한 표기로 보인다.[17] 고구려의 간첩인 도림은 그가 들판에 가매장되었다고 했다.[18] 다만 위에서 나오는 '미귀'에서 '미'를 세로쓰기 과정 중 축약한 것으로 간주하고, '추미(麁米)'로 파자해서 보면 진씨로 볼 수도 있다. '진'을 음차한 것으로 추정되는 '조미(祖彌)'와 자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19] 좌·우현왕 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한 흉노 제국에서는 '좌현왕'이 태자를 뜻했다.[20] 이 좌·우현왕이 백제 초기에 있던 좌·우보와 동일한 것일 수도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21] '무니하시카시'라는 훈이 달려 있다. 의자왕의 대부인(大夫人)에게도 '하시카시'라는 훈이 달렸는데, 고대 일본어에서는 '파시카시'라 발음되었다. 이는 고대 한국어로 부인을 가리키던 말로 추정되며, 중세 한국어로 아내를 뜻하는 '가시' 및 현대 한국어로 부부를 뜻하는 '가시버시'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22] '챠쿠케이에하시토'라는 훈이 달려있는데, '챠쿠케이'는 '적계'를 그냥 그대로 음독한 것이고 '에하시토'의 고대 일본어 독음 '에파시토'는 일본어가 아닌 고대 한국어 훈이다. 즉 이는 '적계 에파시토'가 되는데 현대어로 바꾸면 '적계(適稽) 아가씨'란 뜻이 된다. 여기서 '에파시토'야 당연히 존칭이고 '적계'는 본명이거나 별명 혹은 존칭을 나타낸 것이 된다. 부여적계에게는 일본 측에 의해 '이케츠히메'(池津媛)라는 별명이 주어졌는데, '못의 여인' 혹은 '못의 공주'라는 뜻이었다.[23] 당시 음가는 '세마'에 가까웠다.[24] '니리무'와 '세마'는 각각 현대 한국어의 ''과 ''으로 이어지는 단어다. 두음법칙까지 적용하여 현대식으로 치환하면 '임섬' 정도가 될 것이다.[25] 북연이 북위에게 멸망당했을 때 황제 풍홍(馮弘)을 비롯한 지도층이 고구려로 망명한 사건을 언급하는 것이다.[26] -후한 교체기의 참칭자이다.[27] 북위에 도착한 백제 사신.[28] 풀이하면 "백제 너희는 이제 막 우리한테 사신 보내면서 가장 먼저 꺼낸다는 소리가 전쟁 좀 벌여달라는 요구냐?"라는 의미가 된다.[29]삼국사기》에서도 전투 중 날아온 유시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30] 지금 연(璉, 장수왕)의 죄로 나라는 어육(魚肉)이 되었고, 대신들과 호족(豪族)들의 살육(殺戮)됨이 끝이 없어 죄악이 가득히 쌓였으며, 백성들은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습니다.[31] 개로왕이 위에서 언급했듯이 30여 년 동안.[32] 원래 백제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남조와 손을 잡아왔었다. 개로왕 국서 사건은 백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북조에 정식 사절단을 보낸 사례다.[33] 얼마나 화가 났는지 당시 82세의 노령이었던 장수왕이 직접 친정을 감행했을 정도. 다만 다른 면으로 생각해보면 이러한 백제의 움직임에 고구려가 얼마나 경계를 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34] 먼저 북성을 공격하여 7일 만에 함락시킨 뒤 남성을 공략했다고 전한다.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기》에서 "대성을 7일 밤낮으로 공격해 무너뜨린 뒤 왕성이 함락됐다"고 한 기록과 거의 완벽하게 교차검증된다.[35] 부여문주는 《삼국사기》에서 개로왕의 아들로 나오지만, 《일본서기》에서는 동생으로 나온다. 후대의 기록과 취합비교해볼 때 대체로 동생 쪽이 맞다고 본다.[36] 참고로 다산 정약용은 직산 위례성설이 《삼국유사》에 언급된 이유로 당시 부여문주가 도망가면서 잠시 머물렀던 곳이 직산이어서 이런 오해가 생겼을 것이라 주장했고, 이는 현재 사학·고고학자들도 동의하는 바이다.[37] 뜬금없이 백제가 왜국의 신하국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당연히 편찬자들에 의해 윤색된 부분이다. 실제로 왜국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해도 그동안 백제의 지원군으로 활동됐던 왜군에 대한 경계 같은 군사전략적인 이야기가 오갔을 가능성이 높다.[38] 이 둘은 원래 백제 사람이었으나,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가서 장수왕의 앞잡이가 되어 다시 나타났다.[39] 심지어 광개토대왕비에서 고구려는 백제를 '백잔'이라고 기록해두었다. 오늘날로 치면 국가 공식 문서에 일본과 중국을 쪽바리와 짱깨로 적어둔 셈이다.[40] 허나 문헌에 따르면 이후 무령왕 대에 백제가 한강 유역을 일시적으로 회복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돌궐의 발흥 등 국제 정세의 변화와 백제의 중흥이 맞물린 결과였다. 아차산 일대와 자양동 한양 아파트 부지에 고구려가 세운 보루 유적이 많으며, 가장 처음 발견된 구의동 유적이 자양동 한양 아파트 부지에 있었다. 고고학 자료에서도 고구려는 서울 몽촌토성, 성남 창곡동 및 판교동, 화성 청계리, 안성 도기동, 대전 월평동 등 유적이 드문드문 확인되고 있어 제대로 된 행정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약 30년 만에 다시 이루어진 서울 조사에서는 고구려가 몽촌토성을 남진 기지로 활용한 모습이 확인되었다. 몽촌토성은 1980년대 단편적인 조사에서 고구려 건물지와 토기가 확인되었고, 2014년부터 조사된 바에 따르면 고구려가 대규모 토목공사를 통해 도로를 구축한 후 다수의 건물을 지었던 것과 다량의 고구려 토기가 확인되었다.[41] 한성백제박물관 발간 《백제사》 시리즈 11~13권 참조[42] 참고로, 전남에 마지막으로 남은 옛 마한 계열 소국들이 전부 백제의 직접 지배지로 병합되는 건 동성왕 대에 백제가 탐라국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동성왕~무령왕 통치기로 추정되며, 고고학적으로도 그렇게 해석되는 견해가 주류다.[43] 한편 백제 부여씨 왕실과 지방 세력 간의 충돌이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되었던 건 과거의 학설이다. 의외로 가장 나중에 편입된 옛 침미다례 일대, 즉 전남 서남부 영산강 유역에서 백제계 유물이 더욱 많이 발굴되었다. 또 이 지역이 웅진백제 초기에는 왜(백제와 긴밀했던 왜국-야마토가 아닌 주로 큐슈 일대 등을 근거지로 삼았던 호족 세력들) 및 가야 세력까지 끌어들이면서까지 상당히 비협조적으로 나와 백제 왕실을 크게 당황하게 만들긴 했지만 그건 동성왕~무령왕 시기 일단락되었다. 무령왕 통치기의 백제가 개로왕 때보다 줄어든 영토를 가진데다가 신라의 도움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경기도와 황해도까지 거침없이 치고 올라갈 수 있었던 이유로는 무령왕 당시 백제가 전남 전체의 직접 지배화에 성공하여 해당 지역의 인력과 물자를 그때보다 더욱 수월하게 징발하여 효율적으로 편성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거론된다.[44]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이 설화적인 기록을 가지고 도림을 프로파일링했다. 백제에 잠입하기 위해 여러해 동안 준비한 정황들로 봐서는 도림이 개로왕을 가스라이팅했다는 의견을 내비치기도 했다.[45] 실제로 전근대까지 서해-금강 간에 수운이 가능했던 최고점은 現 논산시 강경읍이었다.[46] 알까기를 하다가 군대를 말아먹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강조와 함께 잡기를 경계하는 이야기로 손꼽힌다.[47] 출처: 노중국, 《백제정치사》 (일조각, 2018)[48] 개로왕의 왕권강화와 국정운영의 변화에 대하여[49] 충청남도문화연구원 백제사 시리즈 참조[50] 물론 때문에 하마터면 웅진백제가 나중에 개로왕 시즌2를 찍을 뻔 했지만 그건 나중 일.[51] 이 군세까지 고구려가 대파하였다면 이후 나제 동맹의 우주방어는 불가능했다.[52]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890408&cid=62135&categoryId=62280[53] 한때 이 일화가 당나라의 설화집인 《양사공기》에 실린 것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는데, 해당 서적에 고구려의 수정성에 대한 기록이 있다는 사실이 와전된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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