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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구수왕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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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제14대 국왕 근구수왕 | 近仇首王 | |||
근구수왕릉으로 추정되는 석촌동 3호분 전경. | |||
<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 출생 (음력) | 320년대~330년대 추정[1] | ||
백제 | |||
사망 (음력) | 384년 5월 (향년 50~60대) | ||
백제 | |||
능묘 | 석촌동 3호분 (추정) | ||
재위기간 (음력) | 백제 왕태자 | ||
369년 이전 ~ 375년 11월 | |||
백제 제14대 국왕 | |||
375년 11월 ~ 384년 4월 (8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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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구수(仇首) · 수(須)[2] / 귀류(貴流) · 구소(久素)[3] / 귀수(貴首) · 귀수(貴須)[4] | ||
부왕 | 근초고왕 | ||
왕후 | 아이부인 | ||
자녀 | 부여침류, 부여진사 | ||
왕호 | 근구수왕(近仇首王)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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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제의 제14대 군주이자 건길지.아버지 근초고왕 재위기 때부터 전장을 누비며 활약했고, 즉위 이후 전성기를 유지시키는데 성공하여 백제의 양대 전성기를 구축해낸 군주로 평가받는다.
이름은 기록에 따라서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이름을 그대로 딴 왕호에는 '구수(仇首)'라는 휘가 멀쩡히 잘 적혀있는 반면 휘를 따로 나타낼 때는 '수(須)'로 되어 있는데 당연히 이는 아버지 근초고왕의 휘인 초고-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양서》(梁書)에서 나온 것과 완전히 같은 중국식 축약표기이다.[6] 《백제삼서》를 참고하거나 유민들의 말을 옮겨적은《신찬성씨록》에는 '귀수(貴首)' 또는 '근귀수(近貴首)', 《속일본기》(續日本紀)에는 '귀류(貴流)' 또는 '구소(久素)'로 되어 있다. 고대인의 인명은 화자의 방언 등의 차이로 인해 모음은 전이가 자주 일어나는 반면 자음은 그대로인 경우가 많은데 이를 통해 대체로 삼국사기에서 나온 휘인 구수와 같은 부류의 말을 전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7]
2. 생애
치양과 평양성의 위치 |
369년 반걸양 전투에서 본래 백제 사람이었던 사기(斯紀)가 백제로 다시 돌아와[9] 부여구수에게 고구려의 군사기밀을 제공했다. 고구려군은 숫자는 많으나 붉은색 깃발을 들고 있는 군대만 정예군이고 나머지는 오합지졸이니 붉은색 깃발을 들고 있는 군대만 격파하면 나머지는 알아서 무너질 것이라는 게 내용의 요지. 그 결과 부여구수는 고구려군을 관광보냈고 전체 병력 1/4인 5,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주하는 고구려군을 뒤쫓아 수곡성[10]까지 진출했다. 부여구수는 더욱 진격하려고 했지만 장군 막고해가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노자의 《도덕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말렸다. 부여구수는 이를 옳다고 여기고는 더 이상 고구려군을 추격하지 않았고 대신에 돌을 쌓아 올려 표시를 남겨 놓고는 그 위에 올라 "오늘 이후로 누가 어려움을 극복하여 다시 이곳에 올 수 있겠는가?"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11] 실제로 백제는 근구수왕 이후로 다시는 평양성 근처까지 올라가지 못한다.
고구려의 고국원왕은 2년 뒤인 371년 다시 보복전을 걸어오지만 이 때는 아버지 근초고왕과 함께 나서서 그들을 물리친다.
375년에 근초고왕이 승하하자 왕위에 오른다. 참고로 당시 백제의 상황은 좋지 않았는데, 이미 근초고왕 말년에 소수림왕의 침공으로 수곡성을 빼앗기는 등 백제의 위상에 흠집이 났기 때문이다.
재위 1년째인 376년 장인어른인 진고도(眞高道)를 내신 좌평으로 삼았다. 여담으로 근초고왕의 처가가 진씨인데 근구수왕의 아내 역시 진씨다. 4세기 백제에서 외척 진씨 가문의 강대한 위세를 알 수 있는 부분.
376년 11월 고구려가 침공하여 다음해까지 치열하게 싸웠다.
三年 冬十月 王將兵三萬 侵高句麗平壤城
3년(서기 377) 겨울 10월, 임금이 병사 30,000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을 침범하였다.
十一月 高句麗來侵
11월, 고구려가 침범해왔다.
《삼국사기》<백제본기> -근구수왕-
377년 10월 근구수왕은 병사 30,000명을 이끌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했지만 377년 11월에 고구려가 또다시 남침을 개시해 왔다.3년(서기 377) 겨울 10월, 임금이 병사 30,000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을 침범하였다.
十一月 高句麗來侵
11월, 고구려가 침범해왔다.
《삼국사기》<백제본기> -근구수왕-
379년 3월 중국의 동진(東晉)에 사신을 보냈는데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사신단이 동진에 도착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 한편 중국 기록 《양서》(梁書) <백제전>에서는 '동진 태원(太元)년간(376년~396년)에 백제왕 수(須)가 …중략… 생구(生口, 노예)를 헌상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나중에 언젠가 다시 사신을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378년 전진의 행당공 부락이 유주(幽州)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주변 국가들(선비, 오환, 고구려, 백제, 신라, 휴인)에게 병력을 파병하라며 요구했으나 다른 국가들과 함께 무시하였다고 한다.[12]
이렇게 중국은 물론 한편으로는 일본과도 국교를 맺어 중국의 제반 문물을 일본에 전하기도 했다. 특히 일본에서 백제에 사람을 보내어 학자를 구하므로 본인의 손자 진손왕(辰孫王)과 함께 왕인(王仁)을 일본에 보내면서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가게 하였으며 왕인은 일본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382년에는 가뭄이 들었다고 한다. 한편 《일본서기》에 따르면 382년[13] 왜인 카츠라기노 소츠히코가 가라국(비정 미상)을 공격해 가라국 왕이 백제로 귀부하자 망명을 받아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자료 해석의 문제 때문에 확실치는 않다.
재위 9년만인 384년 4월 승하했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해 11월에 라이벌인 고구려의 소수림왕 역시 승하했다. 재위 기간이 10년도 채 안된 이유는 상당히 늦은 노년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
3. 평가
백제사 최고의 명장 중 하나이자 아버지 근초고왕과 함께 백제의 최전성기를 이끈 임금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근초고왕과 더불어 백제의 군주들 중 평양성을 직접 본 유이한 왕이다.[14]하지만 라이벌인 소수림왕이 개혁에 성공해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 고구려가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기반을 마련한 것과 달리 근구수왕은 이미 근초고왕 말년부터 시작된 백제의 쇠퇴를 자신의 치세에 최대한 늦추는 것에 그쳤는데, 결국 근구수왕 사후 백제의 쇠락이 가속화되었다.[15]
하지만 이는 근구수왕의 잘못이 아닌게 사실 백제의 최전성기였던 아버지 근초고왕 시절에도 백제의 국력이 고구려를 압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대 국가로서의 출발 시기와 체제 정비가 훨씬 빨랐던 고구려가 무능한 암군 고국원왕 치하 잃어버린 40년을 겪으며 무기력하게 헤매는 사이 뛰어난 군주였던 근초고왕이 불리함을 극복하고 백제의 전성기를 먼저 열어제친 것이었다. 어쩌면 원래의 잠재력상 고구려에 밀리는 건 필연적이었던 것이다.
물론 고구려에서 고국원왕 같이 한심한 군주들이 연이어 등장했다면 얘기는 달라졌겠지만 알다시피 소수림왕 이후 고구려 군주 라인업은 6세기 초반 안장왕까지 역대급 황금계보를 이어간다.
신라 역시 이 시기에는 경북 일대의 진한 패권을 움켜쥐고 소백산맥 이동의 강자로 부상하며 백제를 동남쪽에서 압박하기 시작했던 것도 컸다.
4. 기타
- 380년 전진의 황족 부락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주변 국가들과 민족(선비, 오환, 고구려, 백제, 신라, 휴인)으로부터 지원받으려고 시도했다가 전부 거절당했는데 이때가 근구수왕의 재위기와 겹친다.
5.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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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열전(列傳) ]
}}} ||《삼국사기》 <근구수왕 본기>
一年冬十一月 근구수왕이 즉위하다
二年 장인 진고도를 내신 좌평으로 임명하다
二年冬十一月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입하다
三年冬十月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다
三年冬十一月 고구려가 침입하다
五年春三月 사절을 진나라에 보내 조공하다
五年夏四月 흙비가 종일 내리다
六年 전염병이 크게 돌다
六年夏五月 땅이 갈라졌다가 다시 붙다
八年 비가 내리지 않아 굶주린 사람이 많이 발생하다
十年春二月 대궐 뜰의 큰 나무가 저절로 뽑히다
十年夏四月 근구수왕이 죽다
6. 대중매체에서
- 게임 <천년의 신화>에서는 백제 진영의 궁수 기병 영웅으로 등장하며, 부친 근초고왕이 재임하던 시절인지 태자라고 나오며, 시나리오에서는 타국의 태자들과는 달리 군주가 된 모습으로는 등장하지 않는다. 참고로 마법은 독무술.
드라마 근초고왕에서의 근구수왕 |
- 2010년 KBS 드라마 <근초고왕>에서는 후반부부터 등장하는데 아이돌 초신성의 멤버 건일이 연기했다. 기록에 맞게 진씨 부인의 소생이 아니라 가상 인물 부여화의 소생이다. 부여화의 전 남편이었던 고국원왕이 친부라는 소문과 참요 때문에 궁궐 밖에서 지냈고 어릴 때 죽을 뻔해서 역사 왜곡과 사극 막장화의 중심이었다.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위홍란이 진씨가 양녀로 들어가서 진홍란으로 개명하고 왕후 진씨가 된다는 것부터 왜곡이긴 하다. 왕후 진씨 또한 역사적으로 진족 출신이라 명시되어 있기 때문.[16]제작진은 이러한 왜곡들을 결국 부여구수가 마지막에 진홍란의 양자로 들어가는 것으로 수습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위홍란이 진씨가 양녀가 되어 왕후 진씨가 됐는데 상관없지 않느냐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따지면 구수가 아무리 부여화의 소생이라 할지라도 진홍란의 양자로 들어갔으니 상관없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부여근이 사기를 추격하던 중 고구려군에게 잡힐 위기에 처하자 부여근의 갑옷을 입고 고구려군을 상대로 무쌍을 찍는다. 이후 홍란의 양자가 되어 왕자가 되고 구수로 개명하며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맹활약하고 고국원왕을 전사시킨다. 이후 부여근이 태자 자리를 포기하고 진구를 따라 야마토로 떠나게 되면서 백제의 태자가 되는데 고구려 정벌을 앞두고 아버지 근초고왕이 승하하자 오열한다.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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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성왕 | ─ | ─ | 동명왕(?) | 구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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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좌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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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 13대 근초고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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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 근구수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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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구이신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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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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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타태자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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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법사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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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좌태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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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교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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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선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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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문사 | 부여문선 | 부여덕장 | 부여사 | 부여창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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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례] 실재 혈통 기준 세로선(│) 부자, 부녀, 사위관계 가로선(─) 형제, 자매관계 | }}}}}}}}} |
[1] 손자인 아신왕(阿莘王)이 370년대생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러면 나이 추측이 가능하다.[2] 근초고왕의 휘가 초고왕과 같은 것과 마찬가지로 구수왕과 휘가 같다.《양서》에서는 '수'라고 써있는데 축약표기이다.[3] 《속일본기》.[4] 《신찬성씨록》.[5] 수곡성 인근 지역으로 현재의 황해남도 신계군.[6] 애초에 이 두 명의 휘는 마찬가지로 부자 관계인 초고왕-구수왕의 것을 아예 그대로 따라한 걸로 보인다.[7] 사실 고대까지 갈게 아니라 현대에도 외국인의 이름이나 외국의 회사 이름들의 표기법이 언론마다 사람마다 제각각인것을 생각하면 편하다. 특히나 한자로 외국어를 음차하여 표기하는건 더욱 난이도가 높으니.[8] 때문에 《삼국사기》 원문에서도 대부분의 국왕 본기가 즉위년부터 기록이 시작되는데 <근구수왕 본기>는 근초고왕 재위 기간에 있었던 태자 시절 기록부터 상세히 나오는 편이다.[9]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주했었는데 이 때 다시 백제로 귀순했다.[10] 지금의 황해도 신계 부근으로 추정.[11] 근구수왕의 말발굽 자국은 《삼국사기》가 쓰여진 고려 시대까지도 남아 있었다고 한다.[12] 결국 부락은 다른 국가들의 도움은 전혀 받지 못하고 전진군에게 진압당하면서 실패했다.[13] 《일본서기》 상으로는 262년. 이는 '120년 갑자설' 때문에 시기가 앞으로 당겨진 것이다.[14] 성왕의 경우에는 논란이 있다.[15] 장남인 침류왕은 불교 공인 외에는 업적이 없이 죽었고, 침류왕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아신왕이 나이가 어려 자신의 차남이자 침류왕의 동생인 진사왕이 즉위한 후, 백제는 이 때부터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이끈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콤보를 얻어 맞으며 수도인 한성까지 함락당하는 상황이 되었다.[16] 삼국사기 제24권 백제본기 제2에 2년(서기 376) 임금의 외삼촌 진고도(眞高道)를 내신좌평으로 삼아 정사를 맡겼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 근구수왕의 어머니는 분명히 진족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