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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000,#000><colcolor=#c5b356> 고구려 제4대 국왕 민중왕 | 閔中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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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왕릉으로 추정되는 마선구 고분군(맨 왼쪽) 전경. | |||
| 출생 (음력) | <colbgcolor=#fff,#1c1d1f>5년~18년 사이[1] | ||
| 고구려 | |||
| 사망 (음력) | 48년 (향년 30~40대) | ||
| 고구려 | |||
| 능묘 | 민중원 석굴(閔中原 石窟)[2] | ||
| 재위기간 (음력) | 고구려 제4대 국왕 | ||
| 44년 10월 ~ 48년 (4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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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씨 | 고(高) / 해(解)? | ||
| 휘 | 해색주(解色朱) / 해읍주(解邑朱)[3] | ||
| 부모 | 부왕 유리명왕[4] 모후 왕후 송씨 | ||
| 형제자매 | 형 고도절, 고해명, 고무휼 동생 고재사, 고여진 누이 1명 | ||
| 종교 | 무속 | ||
| 왕후 | 왕후[5] | ||
| 시호 | 민중왕(閔中王) | }}}}}}}}} | |
1. 개요
고구려의 제4대 국왕.제3대 대무신왕이 승하한 뒤, 태자(뒷날의 모본왕)의 나이가 어리다 하여 즉위했다. 《삼국사기》는 대무신왕의 동생이자 유리명왕의 아들이라고 했고, 《삼국유사》는 대무신왕의 아들이자 모본왕의 동생으로 적었다. 하지만 후자가 맞다면 태자가 어려서 즉위했다는 말과 상충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맞다고 본다.
2. 성씨 논란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성이 해씨라고 한다. 이름이 '해색주'(解色朱)라 실제로는 고씨가 아니라 해씨라는 설이 있다.3. 내정
5년 동안 재위했는데 좋은 일은 하나도 없었다. 자연재해 때문에 민심도 흉흉했고, 잠우락부(蠶友落部)의 10,000여 가가 후한의 낙랑군에 귀부했다.[7]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석굴에 매장된 것이다. 민중원에서 사냥을 하다가 스스로 석굴에 장지를 정했다고 한다. 민중원에 능을 썼다고 해서 왕호도 '민중왕'이 되었다.[8] 그런데 재위 4년차에 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그해 7월, 자기가 죽으면 동굴에 묻어달라고 하더니 바로 다음 해에 승하했다. 지병이나 노환이 있어 이미 오늘내일 하고 있었다면 사냥을 나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니 아마 사냥을 나갔다가 부상을 입어 얼마 안 돼 죽은 것이 아닌가 싶다.
4. 《삼국사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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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 〈민중왕 본기〉
一年冬十月 민중왕이 즉위하다.
一年冬十一月 민중왕이 대사면을 실시하다.
二年春三月 민중왕이 잔치를 베풀다.
二年夏五月 홍수로 백성이 굶주려 창고를 열어 구제하다.
三年秋七月 왕이 노루를 잡다.
三年冬十一月 남쪽 하늘에 혜성이 나타나다.
三年冬十二月 겨울의 국내성에 눈이 오지 않다.
四年夏四月 민중원에서 사냥을 하다.
四年秋七月 왕이 석굴에 장사지내달라고 하다.
四年秋九月 동해사람이 고래 눈을 바치다.
四年冬十月 10,000여가가 낙랑군으로 가서 후한에 투항하다.
五年 민중왕이 승하하다.
5. 대중 매체에서
만화 바람의 나라에서 등장한다. 여기서는 왕이 되기 전이라 주로 해색주란 이름으로 나온다. 유리왕과 후궁 자화녀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대무신왕 무휼의 이복동생이고 재사라는 동복동생도 있다.생모를 닮아 온화한 성품을 지녔으며 학문을 좋아하는 지적인 면모를 보인다. 원래는 수도 국내성에서 멀리 떨어진 자화궁에서 생모와 같이 살고 있었는데, 여진이 죽고 유리왕의 병환이 더 심해지자 무휼을 보좌하기 위해 입궁한다. 해색주와 무휼은 이복형제인데다가 어려서 떨어져 자란 사이지만 사이는 좋다. 무휼이 왕이 된 후 정치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으며 무휼이 직접 전장에 나갈 때마다 무휼을 대신하여 섭정을 맡아 궁을 지킨다.
무휼은 처음엔 호동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이었으나, 부자의 운명이 상극이었던 탓에 호동이 자라면서 호동과 갈등이 발생한 데다가 해색주의 정치적인 자질을 보고 해색주에게 왕위를 물려 주려는 생각을 품게 된다. 무휼의 저런 생각 때문에 조카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정적이 된 셈이지만 사실 조카를 지극히 아끼는 숙부이다. 호동이 아기였을 때 호동을 죽이러 온 사구의 존재를 제일 먼저 눈치채고 호동을 구하기 위해 태자비 연의 궁으로 군사를 이끌고 간 것이 해색주였다. 후에 무휼이 직접 부여 원정에 나섰을 때 흑귀사조가 호동을 죽이러 오자, 해색주는 역시 이를 제일 먼저 감지하고 직접 검을 들고 가서 자신을 저지하는 구미호를 죽이고 호동을 구해내기도 했다. 해색주가 평소에 보여주던 문약한 모습을 감안하면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무휼이 호동을 질책할 때 부자 사이를 중재하기도 하고, 호동이 자기의 입지를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자 호동에게 힘이 되어주겠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또한 무휼이 호동을 견제할 의도로 해색주의 동복동생 재사[9]를 입궁시키려 하자, 무휼의 의도를 눈치채고 불편히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휼이 재사를 들일 생각을 거두지 않자, 무휼에게 호동 대신 재사를 낙랑공주와 정략결혼시킬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나중에 무휼의 왕비 이지가 겉보기와는 다르다는 것을 눈치채고 자기 시녀를 보내 이지의 처소를 염탐하게 했다. 이를 감지한 이지는 해색주를 자신이 장차 낳을 아들이 왕이 될 것을 막을 인물로 경계하고, 무휼의 생모이자 대비인 서화에게 해색주를 모함하기도 했다. 한편 이지의 처소를 염탐하던 시녀는 발각되는 바람에 위기에 처하는데, 이때 해색주는 그녀를 구해주기 위해 그녀와 혼인하기로 결정했다. 평소 해색주가 혼인에 뜻이 전혀 없었던데다가, 명색이 왕의 동생인 그가 명문가의 딸이 아닌 일개 시녀와 혼인한다고 하니 당연히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보통은 왕실 사람들이 수하들을(특히 시녀처럼 신분이 높지 않은 수하들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다가 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해색주가 자기 주변 사람을 아끼고 인간의 도리를 중시하는 성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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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형인 대무신왕이 4년에 태어났고, 아버지 유리명왕이 18년에 승하했으므로 민중왕의 출생년도는 대략 5년에서 18년 사이로 추정되며, 승하했을 때의 나이는 많아봐야 40대 초중반이었을 것이다.[2] 마선구석묘자석굴 추정[3] 《동국통감》 기록.[4] 《삼국유사》에는 대무신왕.[5]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민중왕조-에 '왕후와 여러 신하들이 임금의 유언을 어기기 어려워 석굴에 장사지내고'라는 기록이 있어서 왕후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지만 더 이상의 기록이 없다. 한편 고구려의 형사취수제 관습을 생각하면 그녀가 대무신왕의 왕비들과 동일인이 아닐까 추정되기도 한다.[6] 옛날에는 왕릉을 만든다고 하면 강제징용, 강제이주 등으로 인해 그 일대가 아주 쑥대밭으로 변했다. 그래서 민심이 매우 안 좋을 수밖에 없었다. 대무신왕의 능을 만들 때 백성과 지방 유력층들의 반발을 느낀 민중왕이 자신의 능은 동굴에 작게 만들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7] 후한서에 의하면 잠지락부(蠶支落部)의 대가 대승이 만여구(萬餘口: 약 1만명)을 이끌고 낙랑군에 투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8] 민중왕뿐만 아니라 고구려 역대 왕들 중에는 장지의 이름을 따서 왕호가 기록된 이들이 많다. 예를 들어 모본왕, 고국천왕, 중천왕, 서천왕, 미천왕, 고국원왕, 소수림왕, 고국양왕 등이 모두 장지가 왕호가 된 경우이다. 또한 유리명왕과 보장왕은 이름을 그대로 써붙인 경우이고(휘호), 태조대왕·차대왕·신대왕은 처음 왕·다음 왕·새로운 왕이라는 뜻이었다. 특이하게 장수왕은 오래 살았다(長壽) 하여 장수왕이었다.[9] 해색주의 어머니 자화녀가 마지막으로 국내성에 가 유리왕을 만난 일로 임신해서 유리왕이 승하한 후에 낳은 왕자다. 즉, 유리왕의 유복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