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6 09:57:17

해명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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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왕태자(王太子)
성씨 해(解)(?) / 고(高)
명(明)(?) / 해명(解明)
부왕 유리명왕
형제 도절, 무휼, 색주, 재사, 여진
묘지 동원(東原) / 창원(槍原)
생몰년도 기원전 12년 ~ 기원후 9년
(향년 21세)

1. 개요2. 활을 부러뜨리다3. 아비가 아들을 죽이다4. 대중 매체에서5. 둘러보기

1. 개요

유리명왕의 둘째 아들로, 이 사람의 행적을 놓고 보면 고구려소현세자사도세자라고 할 수 있다[1]. 장남이자 태자였던 도절이 죽은 뒤, 서기 4년(유리명왕 23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이 해에 고구려가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할 때 부왕을 따라가지 않고 졸본(卒本)에 남았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바로는 힘이 세고 용맹하였다고 한다.

2. 활을 부러뜨리다

유리명왕 27년 봄, 옛 도읍인 졸본성에 머물고 있었는데, 어느 날은 고구려 주변에 있던 나라인 황룡국의 왕이 해명의 무용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는 사신을 보내 강한 활을 보내주었다. 그런데 해명은 그 활을 당겨 부러뜨리고는 "내 힘이 강해서가 아니라 활이 약해서 그렇다."고 말했다. 사실상 황룡국에 시비를 걸었던 것이라 봐도 무방한데, 아마 "함부로 고구려를 넘보지 말라"는 뜻을 품고 있는 경고 행위인 듯하다. 어쨌든 지금의 시각으로 봐도 상당한 외교적 결례다.[2]

황룡국 왕이 이를 전해 듣고는 부끄럽게 여기자 유리명왕은 "해명이 자식으로서 불효하다"면서 화를 내고 황룡국 왕에게 해명을 보내며 그를 죽여줄 것을 부탁했다. 3월에 황룡국 왕이 사신을 보내서 해명을 만나려 하자 주변에서 말렸지만, 해명은 "하늘이 나를 죽이려 하지 않는데 황룡국 왕인들 나를 어떻게 죽이겠느냐?"라면서 태연하게 황룡국으로 갔다. 황룡국 왕은 처음에는 해명태자를 죽일 계획을 세웠지만, 직접 보자 기상이 늠름해서 죽이기는 아까운 인물이라는 생각에 예를 다해 대접하고 고이 돌려보냈다.

3. 아비가 아들을 죽이다

다음해 28년 봄, 유리명왕은 "내가 천도한 뜻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튼튼하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해명이 힘이 센 것만 믿고 이웃 나라와 원한을 맺었으니 불효하다."면서 자살하라고 명령하며 칼을 내려줬다.

해명이 곧 자살하려 하자 어느 사람이 말렸지만, 해명은 "지난번에 활을 부러뜨린 것은 황룡국이 고구려를 가볍게 본 것이라 생각하여 보복한 것이었는데, 아버지가 뜻밖에 화를 내고 자살하라 하니 죽지 않을 수 없다."면서 여진(礪津)의 동쪽 벌판으로 가서 창을 땅에 꽂고 말을 타고 달리다 창에 몸을 던져 스스로 창에 찔려 죽었다.[3]

사망 당시 고작 21세였으며, 사후 태자의 예로써 동쪽 들(東原)에 장사지내고 사당을 세우고 그 곳을 불러 창원(槍原)이라고 하였다. 이후 그의 바로 아래 동생이자 유리명왕의 삼남인 무휼이 태자가 되었다.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 "해명의 행동이 너무 과격하다"고 비판적인 코멘트를 달았다. 그는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했고, 아들이 아들답지 못했다."며 유리와 해명을 모두 비판했다. "해명은 왜 아버지 옆에 안 붙어 있고 구도에 남아 있으면서 무용 즐긴다는 소문이 퍼지게 해서 유리명왕의 심기를 건드렸고, 유리명왕은 아들이 그러고 노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죽일 거였으면 처음부터 그러지 말라고 훈계하고 가르칠 일이지 왜 내버려 두고 감정만 키우다가 폭발하자마자 한 마디로 죽였느냐?!"는 것이다. 한 마디로 아들은 행동을 잘못했고 아버지는 교육을 잘못시켰다는 것.

성호 이익도 "나라가 막 세워졌고 주변 국가들을 막 병합해 나라를 불려가는 참인데 용맹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 "구도에 남은 게 마음에 안 들었으면 애초에 태자로 삼기는 왜 삼았냐", "다른 나라와 척지는 것이 걱정이었으면 나중에 부여 사신한테 개긴 무휼은 또 왜 안 죽이고 놔뒀냐"[4] 며 유리명왕의 행동을 비판했다.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왕자도 비슷하게 목숨을 끊었는데, 이런 걸 보면 고구려 초기의 왕실 문화는 꽤나 거칠었던 것 같다.

조선 시대 성호 이익이나 순암 안정복은 모두, 해명의 죽음에 무휼이 배후에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다만 해명태자가 유리명왕국내성으로 천도한 이후에도 졸본성에 남아있던 점과 대무신왕의 어머니가 비류국 송양의 딸임을 감안하면, 둘은 동복형제일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해명태자가 자결할 당시 무휼은 아직 6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로, 해명의 죽음에 배후라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정말 무휼과 관련이 있다고 쳐도 그건 어디가지나 무휼의 외가에 있을 것이다.

묘하게 뒷날 조선소현세자사도세자와 겹치는 면이 있다. 사도세자의 경우 둘 다 형(고구려 도절태자, 조선 효장세자)이 죽은 뒤, 왕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되었고, 힘이 세고 무예에 재능이 있었다는 점, 소현세자의 경우는 심기를 거슬러서 부왕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는 의혹과 죽음을 맞았다는 점, 그리고 대신 다른 가 부왕의 뒤를 이었다는 점, 부왕의 왕위계승에 논란이 있었던 점(동부여에서 굴러들어온 돌이었던 유리명왕, 반정으로 왕위를 찬탈한 인조, 무수리의 아들 영조)이 있다. 그리고 인조를 제외한 두 군주 모두 어린 시절부터 비범함을 발휘한 기록이 남아 있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하지만 수없이 환관과 궁녀를 죽이고 그도 부족해서 본인의 후궁중 한 명인 경빈박씨를 때려 죽인 상습살인범 사도세자와 달리 해명태자는 그런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묘하게 소현세자와 겹치는 인물이다.

4. 대중 매체에서

만화 바람의 나라에서 비중 있게 등장한다. 자결을 앞두고 주변 사람들에게 고구려와 주변국의 앞날을 예견하면서 동생 무휼을 도와 부여를 치고 한나라를 극복할 것을 부탁하였으며, 죽기 전날 밤에 자신을 오래도록 흠모하던 혜압과 사랑을 나누어 인연을 맺는다. 죽은 뒤에도 혼령으로서 고구려의 앞날을 지키고자 한다. 조카인 호동왕자를 지키기 위해 나타나기도 한다.

참고로 여기서는 화희의 아들로 설정되어 있어서 유리명왕의 적자가 아닌 서자로 나온다. 도절태자의 생모이자 유리왕의 첫번째 왕비인 송씨가 도절태자를 낳고 산후병으로 숨지고 이후 화희가 해명태자를 낳았으나 화희는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화희 왕비로 승격되지 못한다. 대신 첫번째 왕비의 친동생인 서화[5]가 계비로 들어와 임신했으나 점을 쳤을 때부터 이 아이는 왕녀로 나왔고 실제로도 서화는 딸[6]을 출산했다. 이후 서화가 둘째를 임신하고 점술사가 이번에는 아들[7]이라고 예언하자 유리명왕은 태어날 새로운 적자를 기다리는 대신 대뜸 장성해 있던 해명을 태자로 덜컥 책봉한다. 외척으로 자리잡은 비류부 송씨 가문을 철저히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행보였다. 이에 딸 둘을 모두 유리왕에게 시집 보낸 송양이 몹시 원통해한다[8]. 그러나 그렇게 태자가 된 해명이 유리왕의 명으로 자결하자 화희가 서화에게 "내가 젊을 적에 치희를 내쫓은 것 때문에 (유리)왕이 나를 미워하더니, 이제 내 아들까지 미워해 죽게 했다."며 울며 하소연하는 장면이 있다. 남편에게 소박맞았어도 하나뿐인 아들을 보고 견딘 듯하나 그 아들마자 숨지자 화희는 목을 매 자결했다고 나온다. 여담이지만 나중에 해명의 혼령이 생모를 회상하는 장면에도 화희가 잠깐 나온다. 치희를 내쫓은 일로 유리명왕에게 소박을 맞은 뒤, 처소에서 부질없이 입어줄 이 없는 옷감만 짰다고.

드라마 바람의 나라에서는 배우 이종원이 연기했다. 재밌게도 이종원은 드라마 근초고왕에서는 고국원왕을 연기하며 고구려의 태자와 고구려의 왕을 연속으로 연기했다. 그런데 두 작품 모두에서 영 좋지 않은 최후를 맞았다.. 만화 원작이나 정사와는 달리 고구려를 침략한 대소왕에게 "나의 목숨을 내놓을 테니, 그 대신 고구려를 공격하지 말라"는 약조를 내건다. 이에 아버지 유리명왕은 "아무리 그래도 자식을 죽일 수는 없다"며 오히려 해명을 막았지만, 결국 해명은 대소왕에게 죽음을 당하는 길을 선택하고 뒤늦게 달려온 아버지의 품안에서 죽는다. 해명에 대해 알려진 이야기와는 상당히 다른 전개이지만, 창작물에서 보다 더 극적인 전개를 위한 장치임을 명심하자.

소설 《항몽전쟁, 그 상세한 기록》에서는 최우가 강화 천도에 반대한 김세충을 처형할 때 해명 왕자의 사례를 언급하기도 했다.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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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후술하겠지만, 사도세자죽음과는 달리, 해명태자의 죽음은 아버지 유리명왕에게도 어쩔 수 없었던 측면이 있었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2] 무기를 준다는 건 공격할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즉, 좋게 대해주는 상대방을 굳이 자극한 것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3] 이건 상식적으로 너무 거추장스러운 자살 방법이라, 그냥 유리명왕이 보낸 암살자가 던진 창에 맞아죽고 자살로 공표된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4] 해명태자는 고작 황룡국 왕의 사신에게 깝쳤을 뿐이지만 무휼은 무려 부여왕인 대소의 사신에게 깝쳤다! 부여는 그 시기에는 강력한 나라였고(기원 후 3세기에서야 쇠퇴해서 도성이 짓밟혔다. 반면 고구려는 초기 시절 수도가 몇번씩 털렸다. 심지어 고구려는 부여보다 나중에 건국되었는데도 그랬다.) 유리명왕 초기에는 5만의 대군을 끌고 고구려를 침공하기도 했다. 역사에서는 무휼의 지혜 덕분에 이후 분개해서 쳐들어온 대소왕의 침공을 막을 수 있었다지만 해명태자의 사례를 생각해보면 미리 무휼을 어떻게든 손봐주었어야 정상이다.[5] 무휼의 생모로 송양의 둘째 딸이자 유리명왕의 둘째 왕비.[6] 작중 유리명왕의 고명딸인 세류[7] 고구려 3대 왕 대무신왕 무휼[8] 다스리던 영토가 고구려에 편입되자 송양은 자신의 피가 섞인 외손자가 고구려 왕위를 계승하길 간절히 바랐다. 자신의 핏줄이 고구려 왕위를 이어야 한다는 집념이 어찌나 강했는지 서화는 입궁하기 전부터 친정아버지가 여기는 비류부의 땅이니 마땅히 내 외손자가 고구려 왕위에 올라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는 얘기를 들었다고. 그래서 주몽과 사돈관계를 맺은 것인데 유리명왕의 뒤를 이을 줄 알았던 큰외손자 도절태자가 숨지고 새로운 외손자가 태어나려 할 무렵에 태자 자리가 해명에게 돌아가며 자신의 핏줄이 고구려 왕위계승권에서 이탈당한 것이다. 이에 원작소설에선 송양이 버선발로 유리명왕을 만나러 궁까지 쳐들어갔으나 해명의 태자 책봉을 끝내 막지 못하자 배신감에 치를 떨다 눈물까지 보였다고 묘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