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1-20 08:01:01

영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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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영류왕(榮留王)[1]
무양왕(武陽王)[2]
별호 건무태왕(建武太王)[3]
성씨 고(高)
건무(建武) / 성(成)
왕태자 고환권(高桓權)
생몰연도 음력? ~ 642년 10월
재위기간 음력 618년 9월 ~ 642년 10월 (24년 1개월)

1. 개요2. 생애
2.1. 고구려-수 전쟁에서의 맹활약2.2. 친당 정책
2.2.1. 비판2.2.2. 옹호론2.2.3. 재비판
2.3. 재비판에 대한 반론2.4. 비극적인 최후
3. 트리비아4. 삼국사기 기록5.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1. 개요

고구려의 제27대 . 수나라의 침략을 이겨낸 전쟁 영웅이었으나, 재위기간 내내 당나라와의 친교 노선을 걸었고 이에 반발한 초강경 매파 연개소문이 일으킨 쿠데타로 인해 시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2. 생애

등극한 평원왕의 아들
26대 27대
영양왕(嬰陽王) 영류왕(榮留王)

2.1. 고구려-수 전쟁에서의 맹활약

영양왕의 이복 동생. 수양제가 대대적으로 일으킨 2차 침공에서는 직접 일선에서 군사들을 지휘하고 적들과 맞서 싸우면서 어마어마한 활약을 보인 인물이다. 그것도 보통 활약을 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사서인 수서에 을지문덕과 함께 고구려군 장수로는 유이하게 당당히 그 이름을 올린 사람이다. 평양성 전투에서 결사대 500명을 이끌고 선봉에서 돌격해 내호아가 이끄는 별동대인 수나라 수군[4] 40,000명을 패퇴시켰다.

살아돌아간 이들은 겨우 수천에 불과했으며 이마저도 부관이었던 주법상이 대오를 갖춘 뒤 처절하게 막아내서였다. 총 해군은 10만 명, 그중 정예로 훈련받았던 4만 명 거의 전부가 몰살당했으니....단단히 혼쭐 난 셈이다.

기록에 의하면, 평양성 밖에서 싸워봤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뒤 평양성 외성의 성문을 열고 외성을 무인지경으로 비워두어 그냥 수나라 군대를 안으로 맞아들였다고 한다. 내호아의 군사들은 아무도 자신들을 막지 않자 고구려인들이 모조리 도망갔다고 여기고 신나게 약탈에 몰두했고, 고건무가 지휘하는 500기는 이 때를 기다렸다가 일거에 치고나가 당황하는 수나라 군대를 섬멸시켰다고 한다.

평양성 전투에서 수나라 수군이 격파되지 않았더라면 살수대첩도 없었을 것[5]임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을지문덕과 함께 고구려-수 전쟁이 낳은 최고의 전쟁 영웅이자 명장 중 한 명이다. 살수대첩에 묻혀서 잘 알려지지 않은 탓이지 한국사 대첩 중에 손에 꼽는다고 충분히 볼 수 있는 셈.

그러나 이때 통일된 대륙의 엄청난 물량을 상대하면서 영류왕은 전쟁에 대한 염증과 평화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것으로 보인다. 통일국가 수나라를 상대로 대승한 고구려의 업적은 역사에 길이 남을 승리지만, 문제는 전쟁이 고구려 땅 그것도 수도 한 복판에서 벌어졌다는 것이다. 고구려 영토 깊숙한 곳에서 전쟁을 벌인 만큼 고구려 입장에서는 이기더라도 그 피해를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2.2. 친당 정책

결국 고건무는 즉위하고 난 다음 태도를 바꿔, 수를 멸망시킨 과의 화친 정책을 폈지만 당나라의 지나친 요구를 들어주면서 전승기념비에 해당하는 경관[6][7]을 허무는가 하면 이전 시대에 비해 당나라 사신의 간첩 행위를 방조했으며[8]그럼에도 주변 세력 단속에는 무의지를 보여줌으로써 이전에 비해 끌려가는 듯한 외교를 하게 된다.

2.2.1. 비판

영류왕의 정책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불러 일으켰다.
  • 당 쪽 사절의 직방낭중급에게 대대로가 쩔쩔맴, 우리 임금에게 인사도 안 함.
  • 우리 쪽 사절은 태자.
  • 승전기념물인 경관 철거.
  • 당나라 사신에게 군사기밀 유출.
  • 고구려에 소속된 거란, 말갈 부족 이탈시킴 .
  • 인접국 백제, 신라는 적대.
  • 당이 고구려가 본래 한사군 땅이라고 노골적인 도발.

결론적으로 영류왕의 친당 정책은 당나라에 필요 이상으로 지나치게 굽신대다가 연개소문 등 강경파의 반발을 불러와 쿠데타로 정권이 붕괴되고, 급기야 영류왕 본인이 비참하게 시해되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여수전쟁에서 국력을 많이 소모했을 고구려로서는 무조건적인 강경책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안정책을 통해 다시 국력을 추스를 필요가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문제는 그런 와중에서 내치를 안정시키거나, 나름의 대비를 하거나, 이외의 것들을 안정시키려는 노력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초기 당에 포로 교환이나 포로 반환은 성의 표시이거나 어차피 쓸모가 없는, 나이 든 포로들과의 교환이었을 가능성이 큰 편이고, 책봉이나 봉역 문제도 국제적 상호 인정과 양국간 국경을 명확히 하자는 입장이 담겨져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의 상호 교류와 평화 목적의 전개로서 해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 내부 체제를 어떻게 개혁하고 국력을 신장하고 주변을 안정시킬 것인지는 전혀 방안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는 고구려의 국가적 위상 즉 주변 말갈 - 거란 - 실위의 이민족들에 대한 영향력 행사와 한반도 역시 언제든지 영향력 행사와 팽창을 할 수 있는 입장의 강대국으로서의 위상을 뿌리째 흔드는 일이었다. 강대국이라는 입장에서 또 다른 강대국이라는 당과의 외교 문제를 볼때 지나친 소극주의로 일관했고 결과적으로 주변 이민족들의 이탈과 분열 그리고 갈등이 이어진 끝에 고구려는 결국 멸망당하고 말았다. 이민족 분열의 대표적 사례는 바로 1차 대당(對唐) 전쟁 때에는 퇴각하는 상황에서도 요서에서 거란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던 당 태종의 사례나 2차 고구려-당 전쟁 대에 이르기까지 발견되는 거란의 이탈은 고구려로서 방어 영역의 축소를 가져옴으로서 수세에 몰리는 원동력이 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게다가 내부적으로도 결국 국가 안보라는 측면과 자존감의 문제를 두고 갈등이 나옴으로서 결국 한쪽이 일방주의가 전개되었을때 감당할수 없는 내부 이탈의 불씨까지 제공하게 된다. 이 불씨가 터져서 가장 극대화된 시점이 바로 연개소문 사후의 고구려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한반도 남부의 백제 - 신라 등에 대한 강경책은 강력한 당이라는 적을 앞두고 우선 후방을 안정시키겠다는 의도가 있었을지 모르나 여느 시대에 의례적으로 있는 교전을 제외하고는 딱히 적극적인 움직임이 보이지 않고, 오히려 영양왕, 영류왕 시대까지 신라에게 야금야금 영토를 빼앗기거나 약간의 수복 등으로 사실상 무의미한 소모전 형태를 치루는 상황이었던 것을 백제를 끌어들이고 남방 전선에서 적극적인 정책을 펼쳐 그것을 되찾아나간 것은 연개소문이었다.

영류왕 당시 칠중성 전투 정도가 남방 전선에서의 전투로 이것만으로 영류왕이 남방 정책에 적극적었다고 보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신라가 전쟁에서 중앙 인사를 내보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또한 고구려 역시 단순한 국지전으로 남방 정리가 안된다는 것은 이미 고구려 최전성기 이래 증명된 일이다. 연개소문처럼 백제, 왜, 말갈을 활용한 포위 공격도 아니고, 장수왕처럼 내정 간섭을 통한 점진 병합이나 전면전으로 나간 것도 아닌 오히려 국지적인 전쟁을 통한 현상 유지에 가까운 정책. 게다가 이 소모전에 가까운 국지전은 엄밀하게 말해서 신라가 고구려를 적대하는 입장이 더 명확하게 하는 밑바탕까지 되었다.

또한 영류왕의 친당 정책이 전쟁을 막은 것도 아니다. 당시 당 태종은 쿠데타로(현무문의 변) 황제가 되었고, 후계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특히 당 태종의 최측근이자 재상인 위징이 전쟁을 반대하였고 수나라가 어떻게 망했는지에 대한 기억도 남아있는 등 복합적인 요인이 섞여 있었을 것이다. 영류왕은 이런 분위기를 읽고 전쟁에 반대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고구려에 우호적으로 나온 당 고조와는 달리 당 태종은 전쟁을 억제할 장애물들을 하나둘씩 치워나갔고 주변 국가들도 정리함으로서 고구려로 원정갈 준비를 꾸준하게 하고 있었다. 애초에 당 태종은 고구려를 정복해서 수나라 때의 뼈아픈 상처를 씻으려고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영류왕의 친당 정책 그것도 당 태종이 침공을 위한 명분 쌓기용의 무리한 요구 조건들을 수용해왔던 것은 결국 무의미했다.

이런 상황에서 고구려의 안보는 당나라의 첩자가 횡행해도 제어하지 못할만큼 구멍이 나있었던 만큼 전쟁 당시 고구려가 입었던 피해에 대해 영류왕의 책임은 결코 작다 하기 힘들다.

2.2.2. 옹호론

영류왕의 초기 노선이 소극적 입장을 취한 것은 기본적으로 다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있다.[9] 우선 여수전쟁이 대규모로 4차에 걸쳐 무려 16년동안 지속되었다. 특히 최대 격전이었던 2차 여수 전쟁에서는 그야말로 고대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규모 군대를 맞아 국운을 걸고 싸웠다. 비록 고구려가 승리했다고는 하나 고구려의 기본 전략인 청야전술의 가장 큰 치명적 단점이 바로 전후 기반을 닦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침공군이 운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작전이었기 때문에 쉽게 말해 제살 깎아서 적들을 말려죽이는 전략, 고구려로서는 막아내도 국력 손실이 클 수 밖에 없었던 게 사실이다. 특히 고구려의 주요 인구 + 생산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곳 중 하나인 요동과 평양 일대에서의 격전은 분명히 고구려의 경제에 타격을 줄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고구려로서도 국력 차이가 5배 이상은 차이가 나는 중국의 통일 왕조를 상대로 힘든 전투를 치를 수 밖에 없었기에 국력적 한계 역시 충분히 절감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10]

따라서 영류왕이 초기에 당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취한 조치는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자 동시에 꽤 현명한 판단이었다. 더욱이 은 내부적으로 반란의 연속과 돌궐의 침략으로 혼란한 상황이었다. 그런 입장에서 영류왕이 당나라와 화친 입장을 보인건 결국 상대적으로 여수전쟁에 대한 상호 적대심이 강한 상황에서 대등한 입장에서의 외교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이었다. 더욱이 떨어진 국력에 대비하여 돌궐 세력의 성장은 위협으로 고구려에게도 비추어졌기 때문에 을 이용하여 돌궐을 견제하면서 고구려의 힘은 들이지 않는 전략도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11] 게다가 당 고조역시 국내 사정과 국외적 입장에서 새로운 적을 만들고 싶어하지 않았던 점이 결국 각자의 이익에 서로 부합하여 충분히 상호 온건 노선이 먹힐 수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로서는 당을 적대하여 다시 자국 영토와 간접 지배 지역을 포함한 영향력 지역에서 일전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영류왕의 초기 온건 외교 노선은 고구려 스스로가 자국의 생존과 국력 회복을 위해서 필요한 조치였다. 물론 당 고조와 다르게 당 태종이 집권하고 나서는 상황이 달라지기는 했다. 당 태종 치세에 당도 내부적으로 안정되고 국력을 신장할 때였고 고구려 역시 웬만한 전후 복구를 다하고 국력을 회복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당 태종의 봉역도 요구를 순순히 들어준 것은 당 태종의 집권 이후 고구려에 대한 당의 외교 노선이 변화한 것에 대해 고구려 역시 대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평화를 존중한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결국 영토를 분명히 하여 당으로 하여금 특정선 이상은 쳐들어 오지 말 것의 입장이 고구려에게 강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명분상 고구려가 당에게 자국의 영토를 바치는 모양새일지는 모르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화주의에 빠져있는 중국 왕조들의 전형적인 자기 변호에 지나지 않다.

더욱이 당 태종의 이러한 문제는 고구려에서도 천리장성을 수축하는 형태로 작용하여 나름의 고구려로서는 서부 전선인 당과의 전선을 정비하는 노력을 하였다. 이는 나중에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고구려의 서부 방벽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게 되는 기반으로 작용했다. 천리장성의 수축 형태로 여수 전쟁 때와 다르게 당은 요동 방어선에서 지상군이 번번히 돌파를 하지 못하고 묶여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결국 당이 선택한 전략은 요동 방어선은 우회하는 선택을 하였고 그 전략이 통용된게 바로 3차 여당 전쟁 때이다. 따라서 영류왕의 방어 전선 구축은 당 태종의 이러한 호전적 성격과 고구려 내부의 방어 전략을 구축하는 일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당 태종과의 전쟁을 치루던 동돌궐의 힐리가한의 요청을 거부한 것 역시 고구려로서는 돌궐 자체를 믿지 않았다. 고구려와 돌궐의 만남만 하더라도 전쟁으로 고구려가 돌궐을 격퇴하는 입장이었다. 특히 평원왕 시절인 555년, 돌궐이 유연을 복속시키며 고구려로 쳐들어왔고, 이에 장수 고흘(高紇)을 보내어 격퇴하고 일부 세력을 복속시켰다. 게다가 여수전쟁 때에는 돌궐이 고구려의 집단 예민(集團隷民)이었던 거란을 치며 수나라의 공격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런 전례가 있는 돌궐을 과연 고구려가 쉽게 신뢰하여 함께 연합 전선을 구축한다는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세력이 고구려의 북방까지 넓히고 있는 돌궐을 당시 영류왕이 긍정적으로 보고 있을리도 없었다. 더욱이 고구려로서도 당시에는 천리장성에 국력을 쏟아붓고 있었고 남방인 신라와의 전선에서의 국지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중원의 통일왕조인 과의 전면전은 최대한 피하는 것이 이익이었다. 하지만 그와 별도로 북방 이민족들과의 균형 외교는 하지를 못했다. 이는 동돌궐이 멸망하는 것을 무조건 방조한 결과로 북방 이민족들의 친고구려 성향의 이탈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신라와의 국지전 소모에 대한 입장도 고구려로서는 신라에게 빼앗긴 옛 땅의 수복도 중요하지만 어느 정도 방어 전선의 안정화를 할 필요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중국 왕조들이 있는 요동과 요서에 해당하는 서부 전선의 방어를 중시하는 편이었다. 서부 전선이 외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안전하다 싶으면 그때서야 남부 전선인 한반도 전선에 전력을 집중하여 성과를 냈었고, 이는 장수왕 - 문자명왕 때 극명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영류왕 시기의 서부 전선은 천리장성 수축이 필요했고, 동시에 외교로서 최대한 교란이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중국은 사분 오열된 것이 아니라 통일왕조인 이 들어서면서 안정을 찾고 국력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고구려가 쉽게 남부 전선에 투자할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이는 천리장성의 구축만 16년이라는 대규모 공사를 오랜 시간 지속했던 점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더욱이 한반도 전선의 신라의 방어선을 나름 구축하고 교두보 발판으로 칠중성 공격과 같은 노력을 한 것은 결국 내려는 가겠지만 때를 기다린 것이라고 봐야한다.

이러한 외치 문제를 제외하고도 내부적으로 고구려평원왕의 중흥 이후로 영양왕과 영류왕에 이르기까지 나름의 강력한 왕권을 다시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왕권의 강화와 귀족 세력들의 균형을 맞추는 일도 중요했다. 특히 장수왕의 천도 이후 평양에서 부흥한 신진 귀족 세력과 국내성을 중심으로 한 전통 귀족 세력 및 북방 귀족 세력 등의 여러가지로 얽혀있는 귀족 세력들의 권력 균형을 맞추어야 하는 일을 영류왕도 한 것이다. 그런 정치술에서 연개소문의 가문이 활용되는 과정이었다고 봐야한다. 흔히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뉘어져 있었다고 하지만 정치라는게 그렇게 쉽게 편가름을 하기 어려운 점과 상호 이익에 움직이는 점을 본다면 왕이 균형을 맞추고자 한 것이고 영류왕은 그것을 24년동안 집권하면서 나름 수행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물론 영류왕은 집권 중반 이후부터는 어느 왕도 마찬가지지만 한쪽으로 편승한 입장의 정치 노선을 보이는 과정을 택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것으로 인하여 친위 쿠데타이든지 아니면 정변이든지 어떤 방식으로의 무장 봉기와 충돌을 발생시킨 것임에는 틀림없다. 결국 그것은 영류왕의 균형 정치가 실패한 것이자 다시 고구려의 정치 체제가 왕권 중심이 아닌 귀족 연합체 성격으로 다시 전환됨과 동시에 독재 체제를 확립하게 한 것임에는 틀림은 없다.

추가적인 영류왕의 옹호론적인 재평가 문제는 이곳에서 확인해볼수 있다.

2.2.3. 재비판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류왕의 외교 노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실패였다. 물론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고구려가 승리하긴 했지만 출혈이 상당히 컸기 때문에 전후 복구를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전쟁보다는 평화 노선으로 가야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영류왕의 외교 정책은 그 어떤 쪽으로든 다 실패로 끝났다. 우선 백제 - 신라 방면 전선에 대해서 먼저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위의 옹호론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또한 신라와의 국지전 소모에 대한 입장도 고구려로서는 신라에게 빼앗긴 옛 땅의 수복도 중요하지만 어느 정도 방어 전선의 안정화를 할 필요가 있었다. 고구려는 기본적으로 중국 왕조들이 있는 요동과 요서에 해당하는 고구려에게는 서부 전선의 방어를 중시하는 편이었다. 서부 전선의 외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안전하다 싶으면 그때서야 남부 전선인 한반도 전선에 전력을 집중하여 성과를 냈었고 이는 장수왕 - 문자명왕 때 극명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영류왕 시기의 서부 전선은 천리 장성 수축이 필요하고 동시에 외교로서 최대한 교란이나 균형을 유지할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중국은 사분 오열된 것이 아니라 통일왕조인 당이 들어서면서 안정을 찾고 국력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고구려가 쉽게 남부 전선에 투자할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이는 천리장성의 구축만 16년이라는 대규모 공사를 오랜 시간 지속했던 점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더욱이 한반도 전선의 신라의 방어선을 나름 구축하고 교두보 발판으로 칠죽성 공격과 같은 노력을 한 것은 결국 내려는 가겠지만 때를 기다린 것이라고 봐야한다.

남부 전선에 투자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면 백제나 신라 둘 중 하나와 수교를 해서 우방으로 만들어두고 백제, 신라 자기네들끼리 싸우도록 유도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러나 영류왕은 오히려 백제, 신라를 둘 다 들쑤셔 놓아서 적대관계로 만들어버렸고, 결국 이는 백제, 신라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당나라에 고구려 침공을 종용하도록 했다. 그리고 당나라는 고구려에 이 문제로 개입하여 감 놔라 배 놔라 간섭을 했고 결국 굴욕적인 사죄 사절단을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연개소문이 645년에 당나라와 전쟁할 때 전선에 집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백제를 동맹국으로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645년 당시 이세민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 후방 지원을 하도록 했고 신라는 3만 대군을 보내 고구려의 후방을 급습했다. 그런데 그때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여 7개 성을 탈취해 가면서 신라는 다시 백제와 싸우러 내려올 수밖에 없게 되었다. 즉, 백제를 시켜서 신라를 견제하도록 하고 고구려는 당나라와의 전쟁에 집중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영류왕은 백제도 적대관계로 만들어버렸고 신라도 적대관계로 만들어버리면서 고구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켰다.

628년에 돌궐의 힐리가한이 사로잡힌 것을 축하하는 사절을 보낸 것도 그렇다. 물론 고구려와 돌궐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못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순망치한이란 말이 있다. 돌궐은 지리적으로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에 끼어 있었기 때문에 완충 작용을 해주고 있었다. 입술이 없어지면 이빨이 시리다고 돌궐이란 입술이 없어진 이상 고구려란 이빨도 시린 법이다. 즉, 돌궐이 망한 것은 전혀 기뻐할 일이 아니었다. 이는 곧 다음 타깃은 고구려라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영류왕은 대책을 세우기는커녕 당나라에 축하 사절을 보내기 바빴고 이는 결국 북방 민족들이 고구려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돌궐이 망한 것을 축하하는 고구려의 태도는 북방 민족들 입장에선 "고구려는 우리 편이 아니다."는 마음을 생기게 만들었고 결국 친고구려적인 북방 민족들도 다 등을 돌려버리게 만들었다. 즉, 영류왕의 대당 저자세 외교는 안으로는 고구려인들의 자긍심을 실추시켰고 밖으로는 고구려를 국제적으로 고립시켜버린 실책이다. 그 결과 645년 당시 군사 연대를 할 만한 북방 민족들은 죄다 당나라에 복속되어버렸고 남은 건 고작 설연타 하나 뿐이었다. 당나라를 비롯한 중원 왕조들이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자신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번병을 동원하는데 마찬가지로 이들은 고구려도 요긴하게 번병으로 쓸만한 세력들이었다. 그런데 영류왕이 멍청한 외교적 행보로 알아서 없애버린 것이다.

또 640년에 있었던 태자 입조 사건도 그렇다. 태자를 중국에 입조시킨다는 건 예사 일로 넘길 사안이 아니다. 이것은 곧 고구려를 중국의 속국으로 낮추겠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고구려는 예부터 자국을 '천하의 중심 국가'라고 여기며 그것에 높은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는 걸 광개토대왕릉비모두루 묘비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중국이 중화사상을 통해 자국이 천하의 중심이고 변방 민족들은 전부 오랑캐로 간주했듯이 고구려 또한 자국이 천하의 중심이고 주변의 백제, 신라, 왜, 흑수말갈, 거란 등을 모두 복속되어야 할 오랑캐로 간주했다.[12] 그런데 태자를 입조시킨다는 것은 곧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 아닌 중국의 변방으로 낮춘다는 것 즉, 오랫동안 이어진 이 자국 중심의 세계관을 버리겠다는 뜻이다. 동시에 고구려가 변방의 오랑캐로 간주했던 흑수말갈, 거란, 돌궐 나부랭이들과 동급이라고 격을 낮추는 짓이다. 자국의 국격을 스스로 떨어뜨린 임금을 긍정적으로 봐야 할까? 외교는 외교고 국격은 국격이다. 이것이 저자세 굴욕 외교가 아니면 뭐가 저자세 굴욕 외교인가? 이런데도 '실리 외교'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서 영류왕을 미화해야 하는지 의문스럽다. 이건 실리가 아니라 굴종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후 영류왕의 행보를 보면 정말로 그가 당나라의 침략에 대해 대비를 하긴 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641년에 고구려를 방문한 당나라 사신 진대덕이란 인물은 직책이 직방낭중(職方郎中)인데 이것은 지도를 그리는 업무를 담당하는 직책이다. 왜 당나라에서 고구려에 '지도 그리는 사람'을 사신으로 보냈겠는가? 다른 게 아니다. 사전에 고구려의 지형지물을 탐사해 침략 루트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한마디로 노골적으로 고구려로 쳐들어갈 것이란 뜻이 담겨 있는 사절단이었다. 이전 영양왕의 경우는 수문제가 대놓고 이렇게 항의할 정도로 수나라 사신들을 철저하게 감시했다.
"그때 사자(使者)를 보내어 그대 번국(藩國)을 위무한 것은 본래 그대들의 인정(人情)을 살펴보고, 정치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자 함이었소. 그런데 왕은 사자를 빈 객관(客館)에 앉혀 놓고 삼엄한 경계를 펴며, 눈과 귀를 막아 영영 듣고 보지도 못하게 하였소. 무슨 음흉한 계획이 있기에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 관원을 금제(禁制)하면서까지 방찰(訪察)을 두려워하오? 또 종종 기마병(騎馬兵)을 보내어 변경 사람을 살해하고, 여러 차례 간계를 부려 사설(邪說)을 지어 내었으니, 신하로서의 마음가짐이 아니었소."
- <수서> [동이열전] 고구려

이렇게 영양왕은 수나라에서 보낸 사신이 통상적인 외교 사신이 아니라 스파이라는 걸 알아채고 미리 객관으로 행동 반경을 제한하며 철저하게 감시하여 감히 고구려의 허실을 염탐하지 못하도록 삼엄하게 통제했기에 수나라 사신들이 고구려에 대한 정보를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영류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진대덕이 고구려의 오만 곳을 싸돌아다녀도 그냥 방치했다. 거기다 진대덕은 "내가 원래 산수 구경을 좋아하므로, 여기에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 있으면 보고 싶다."며 성읍마다 그곳을 지키는 관리들에게 비단뇌물로 주어 매수했고 그 뇌물을 받아먹은 지방관들은 기꺼이 가이드를 자처하며 고구려의 허허실실을 벌거숭이처럼 다 보여주었다. 과연 진대덕이 정말로 고구려의 아름다운 풍경들을 눈에 담으려고 그런 짓을 했겠는가? 절대 아니다. 고구려의 침략 루트를 파악하기 위한 짓거리였다. 그런데도 이 한심한 고구려 관리들은 진대덕에게 뇌물을 받아먹고 이런 짓을 한 것이다. 즉, 대당 굴욕 외교로 인해 고구려는 무사안일주의에 빠져 나라 기강이 해이해질대로 해이해져 있었고 부패할대로 부패해 있었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4년 후 당나라가 쳐들어왔을 때 당나라는 이전 수나라와는 달리 요수가 아니라 늪지대인 요택을 거쳐서 고구려로 침공했는데 이게 다 누구 덕이겠는가? 진대덕의 공로라고 볼 수밖에 없다. 진대덕이 구석구석 고구려를 염탐하고 다니면서 "고구려는 요수만 철저하게 방비하고 요택은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늪지대라서 방비를 거의 안 하고 있다."고 이세민에게 보고했으니까 이세민이 옳다구나 싶어서 요택으로 진군한 것이다. <삼국사기>엔 " 대덕은 사신으로 온 기회에 우리나라의 국력을 살폈으나,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하였다."고 했으나 그 앞에 "진대덕이 중국인으로서 수나라의 말기에 군대를 따라 왔다가 귀국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을 만나 친척들의 안부를 전하여 주었을 때, 모두 눈물을 흘렸다. 이 때문에 도로 양편에서는 남녀들이 이를 구경삼아 보았다."고 했다. 고구려 백성들도 진대덕이 어딜 가는지 다 보고 있었는데도 알지 못했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답은 하나 뿐이다. 영류왕이 진대덕의 첩보 행위를 알고도 묵인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런데도 영류왕의 친당 외교 정책에 대해 재평가 운운하는 소리가 나오는가?

거기다 영류왕이 당나라에 알아서 기었든 큰소리 치며 개겼든 이세민은 이미 고구려로 쳐들어가서 멸망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진대덕이 당나라로 돌아가서 “고구려는, 고창국이 멸망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우리 사신들의 숙소에서 접대하는 범절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고 보고하자 이세민은 "고구려는 본래 중국의 4군이었던 곳이다. 내가 수만 명의 병사를 출동시켜 요동을 공격하면, 그들은 반드시 온 국력을 기울여 요동을 구원하러 나올 것이다. 이때 별도로 수군을 동래(東萊)에서 출발시켜 바다로부터 평양을 향하게 하여 수륙군이 합세하면 고구려를 점령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다만 산동(山東)의 여러 고을에 전쟁의 상처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으므로, 내가 그들을 수고롭게 하기를 원하지 않을 뿐이다."고 말했다. 즉, 이세민은 고구려가 어떻게 나오든 내부 여건만 갖춰지면 이미 고구려로 쳐들어갈 계획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이란 게 내가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안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영류왕은 무사안일에 빠져 진대덕의 첩보 행위를 알고도 묵인하고 별 다른 방비를 하지도 않았다. 영류왕이 이런 인간인데 무슨 재평가를 한다고 떠드는가?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지만 만일 영류왕이 642년에 연개소문의 손에 죽지 않았고 645년에 당나라와 전쟁할 때까지 살아 있었다고 치자. 그럼 고구려가 버텨낼 수 있었을까? 이미 적에게 나의 허실이 다 노출된 이상 이기기는 힘들다. 아마 그 때 고구려가 벌써 멸망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645년 전쟁 당시에도 고구려가 초반에 고전했던 이유는 진대덕의 첩보 행위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보는 게 옳다. 영류왕이 최소한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진대덕이 첩보 행위를 마음놓고 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감시하고 통제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진대덕이 뭔 짓을 하든 말든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하는 마음이 과거엔 있었을지 몰라도 적어도 이때는 이미 없어진 뒤였다고 봐야 한다.

만약 영류왕이 당나라와 친선을 유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당나라를 견제하려는 움직임을 함께 보였다면 정말 그는 재평가 받아 마땅하다. 전쟁이란 건 가급적 피하는 게 좋은 법이며 예부터 병법에서도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최상의 승리라고 하지 않던가? 그러나 그는 당나라에 고개를 숙이면서 고구려인들의 자부심과 긍지를 실추시켰을 뿐 아니라 당나라가 안 쳐들어올 것이라 굳게 믿고 당나라에 대한 경계를 풀어버렸다. 이런 무사안일주의에 빠진 외교정책을 긍정할 이유는 전혀 없다. 천만다행으로 영류왕이 연개소문의 손에 죽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고구려는 벌써 그 때 망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았다.

631년에 있었던 경관[13] 철거 사건도 마찬가지다. 당나라는 고구려에 양국의 우호 증진이란 핑계로 경관 철거를 종용했다. 이에 영류왕은 경관 철거 요구를 들어주었을 뿐 아니라 수나라 병사들 위령제까지 지내주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는 수나라와 전쟁이 끝난지 20년도 채 안 된 시점이었고 당연히 그 시절 참전용사들이 두 눈 뜨고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이같은 영류왕의 태도는 그 참전용사들을 모욕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현대로 치면 중국 정부가 우리 대한민국 정부에 한-중 양국의 우호 증진을 위해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중공군의 위령제를 지내달라고 요청한 것과 마찬가지인데 그걸 어느 미친 놈이 그딴 요구를 받아주겠는가? 중공군 위령제를 지내주면 참전용사 노인들이 가만히 보고만 있을까? 그런데도 영류왕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한지는 심히 의문스럽다.

거기다 영류왕은 애민군주였다고 보기도 어렵다. 천리장성 문제를 보면 알 수 있다. 사실 장성이란 건 그다지 효율적인 국방 정책이 아니다. 만리장성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장성이란 단지 적의 침략을 지연시켜줄 뿐 완벽하게 막아내는 장벽은 아니다. 차라리 장성 쌓을 돈으로 신무기를 개발하는 게 더 이득이다. 더군다나 나라 돈이란 게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땅에서 샘솟는 것도 아니며 화수분처럼 새끼치는 것도 아니다. 당연히 백성들이 낸 세금에서 나오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 당시엔 장성을 쌓으려면 속된 말로 백성들이 직접 노가다를 뛰어야 한다. 천리장성이란 대규모 공사를 하려면 당연히 세금도 더 무겁게 물려야 하고 노동력 확보를 위해 백성들도 징발해야 한다. 이런 사람이 애민군주라고 할 수 있나? 광해군이 비판받는 이유 중 하나가 뭔가? 그 역시 무리한 토목공사를 일으켜 백성들의 부담을 가중시켰기 때문에 비판을 받고 있다.

본인이 친당 외교 정책을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이 고구려의 국력을 충실히 회복하기 위해서라면 천리장성보다는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시켜주는 방법을 찾았어야 했다. 그런 무리한 토목공사보다는 그래도 백성들에게 부담이 덜 가는 신무기 개발에 집중하거나 혹은 당나라와 친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당나라의 성장을 억제하는 외교술을 선보이는 것 등이 더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영류왕은 가장 돈과 노동력이 많이 깨지는 천리장성 축조를 택했다. 20여 년에 걸친 수나라와의 전쟁으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졌는데 무거운 세금을 물리고 노동력을 징발하는 영류왕이 애민군주라고 볼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리장성 축조를 강행한 이유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나도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하고자 한다."는 걸 보여주는 정치적 쇼이고 아울러 대당 굴욕 외교로 인해 쌓인 불만을 노역을 통해 해소하고자 함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노역에 동원시키면 일단 몸이 힘들어서라도 나라에 대한 불만이 줄어들 것이고 또 일단은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한다."는 그럴 듯한 구실도 있으니 백성들 입장에선 불만이 쌓여도 "나라를 위한 일이니 참자." 하고 넘길 수 있을 테니까.

거듭 말하지만 영류왕은 결코 재평가를 받을 만한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친당 외교는 고구려를 하마터면 멸망으로 이끌 뻔한 위험천만한 외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평가론이 솔솔 나온 것은 연개소문의 대당 강경책이 고구려를 멸망으로 이끌었다는 잘못된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연개소문 역시 비판받을 만한 점이 많은 사람이지만 적어도 영류왕보다는 100배 나았다. 연개소문이 고당전쟁에서 이세민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세민이 결국 유언으로 "다시는 고구려를 침공하지 마라."는 말을 남겼던 것이다. 신라의 김춘추가 당나라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물고 늘어지지만 않았어도 다시 고구려를 침공할 가능성은 최소 수십 년은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영류왕은 무사안일에 빠져 당나라 사신의 첩보 행위를 묵인하고 방관하며 국가 안보에 심각한 위해를 끼쳤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영류왕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다. 나라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왕을 재평가해야 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영류왕 때 고구려가 멸망했으면 그 때는 뭐 알아서 기어서 망했다고 할 것인가?

게다가 애초부터 영류왕은 이세민의 침략 야욕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같은 실책을 한 것이다. 본인 생각엔 자존심을 조금만 굽히고 실리를 취하자는 생각에서 저런 외교 방식을 취했을지 모르지만 전쟁이란 건 내가 안 하고 싶다고 해서 안 일어나는 게 아니다. 이세민은 처음부터 고구려로 쳐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돌궐, 고창국 등 고구려의 인접국들을 하나하나씩 정복한 건 고구려를 치기 전 사전 준비작업이었던 것이다. 적어도 이때부터 영류왕은 당나라의 침략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당나라의 비위만 맞춰주면 전쟁이 안 일어날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당나라의 비위만 살살 맞추는데 급급했을뿐 당나라의 침략 야욕을 분쇄할 준비는 전혀 안 했다. 그러니 진대덕의 첩보 행위를 수수방관하는 희대의 막장 짓거리가 나온 것이다.

현대로 치면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특사를 보냈는데 알고 봤더니 이 특사 일행들이 국내에서 간첩 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그런데도 중국과 전쟁이 일어날 것이 두려워서 그들의 첩보 행위를 덮어두고 넘어가야 하나? 현대에도 외국의 특사들에게 삼엄한 경호가 따라붙는 것은 그 사절단 일행들을 보호하는 것에 목적이 있지만 또 다른 이유로는 그들이 허튼 짓을 못하도록 통제하기 위함이다. 이건 기본 중 기본이다. 아무리 앞에서 동맹이라고 서로 어깨동무하고 등 두들기고 악수해도 뒤에서는 서로 조금이라도 이득을 더 챙기려고 악다구니 쓰는 게 국제 관계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영류왕이란 인물은 국제 관계를 살피는 통찰력도 심히 부족한 사람이었고 매우 순진한 사람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저 당나라가 원하는 걸 조금 들어주기만 하면 전쟁이 안 일어날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순진한 바보였다. 하지만 이런 순진한 바보 같은 생각이 나라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이끌었다. 한마디로 영류왕은 그냥 암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2.3. 재비판에 대한 반론

위에 언급된 재비판 항목은 지나치게 안좋은 부분들을 부풀린 것에 가깝다[14] 우선, 일단은 영류왕이 다른 군주들에 비해 지나치게 당나라한테 굽신거린 것은 사실이며, 진대덕의 정탐을 허용해준 것은 대표적인 실책이 맞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외의 여러 주장에서 보면 헛점이 꽤나 있다.

천리장성 축조의 경우, 애초에 장성의 의미와 효과를 모르고 하는말에 가깝다. 장성은 예로부터 "경계"역할을 하는 존재였으며, 장성 자체가 적군의 대규모 침공을 저지한다기보단 적군의 발목을 묶어 지연전을 강요하면서 그틈에 아군에게 적군의 침공 소식과 위치를 알리는 "경보" 역할을 해줄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게다가 장성은 중국은 물론 페르시아 제국이나 로마 제국도 건설했었다. 만리장성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장성이 "경계"로써의 역할은 충실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15].

고구려의 방어선을 보면, 수백개의 성채와 각종 시설들을 연계한 거대한 기동 방어 시스템이었다[16]. 이러한 기동 방어 체제를 운용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적군의 침공 경로와 같은 정보이다. 적군의 방향을 알아야 제대로 요격하는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장성이 없던 2차 고수전쟁 시절에 보면 요하에서 한차례 회전이 일어났는데, 수나라군의 우회 기동으로 고구려군이 허를 찔려 패배한 사례가 있다. 만약 장성이 있었다면 이러한 우회 기동을 사전에 파악하고 지연시키는 것이 더욱 용이했다는 것.

즉, 천리장성은 역사적으로 거론되는 장성들처럼 "경계"의 역할에 주력하며, 이미 구성된 요동지방의 요새망 네트워크와 연계한다면 적군의 침입 경로를 파악하고 그들을 지연시키는 동안 아군이 병력을 모으며 대비할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줄 수 있다. 비록 건설 비용과 인력 소모가 적지않지만, 장성을 쌓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은 확실히 있으며, 정치적 쇼도 아니었다.

게다가, 막상 영류왕을 죽이고 권력자가 된 연개소문조차 장성 공사를 취소하지 않고 마저 진행시켰다는 점에서 장성 건설은 영류왕을 깔 이유가 되지 못한다.

신무기 개발의 경우 그냥 웃자고 하는 소리나 다름없다. 애초에 신무기 개발의 중요성은 현대에 와서야 제대로 인식되었으며, 고구려 말기에는 화약조차 없던 시대에 더이상 개발할만한 신무기도 없었고, 이미 고구려는 최고의 무기와 방어선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그리고 신무기 개발이야말로 장성 건설보다 많은 재정을 소비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 하다. 그리고 막대한 비용을 투자한다 해도 그것을 상용화하고 생산 체제를 확보하는 시간까지 합친다면 수백년은 족히 잡아야한다. 당장 화약무기인 총과 대포만 봐도 16세기는 되어야 주요 무기로 자리잡게 된다[17]. 당장 열기구나 잠수함을 봐도 그것의 원형을 개발한지 100여년은 지나야 상용화되었다. 이렇듯, 신무기 개발은 말처럼 쉬운게 아니며, 특히 기술력과 경제력이 떨어지는 고대시대면 더욱 그렇다[18]. 차라리 "경계"의 역할을 소화함으로써 적군의 우회기동을 파악하고 대비할수 있는 장성 건설이 망상적인 신무기 개발보다 더 낫다. 신무기 개발은 오히려 돈낭비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영류왕이 당에게 지나치게 굽신거린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애초에 고구려의 영양왕, 연개소문도 수/당에 굽신거린 적이 있었다.
영양왕 9년, 왕이 말갈 군사 만여 명을 거느리고 수의 요서를 침범하니 영주총관 위충이 쳐서 물리쳤다. 수문제가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한왕 양과 왕세적으로 원수를 삼아 수륙군 30만명을 거느리고 와서 토벌케 하였다. 여름 6월, 수제(수문제)는 조서를 내려 왕의 관직을 삭제하였다. 한왕 양의 군사가 임유관에 당도하자 장맛비를 만나 수송이 제대로 되지 못하여 진중에 양식이 떨어지고 또 유행병이 돌았는데, 주라후는 동래로부터 배를 타고 평양성으로 향하다가 역시 폭풍을 만나 배가 많이 침몰되었다. 가을 9월, 수의 군사가 돌아가는데 죽은자가 10에 8, 9였다. 왕(영양왕)도 또한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고 표를 올리어 "요동 분토의 신하 아무개"라고 일컬으니 수문제는 이에 군사를 철회하고 처음과 같이 대우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8 영양왕

여기서 분토(糞土)란? 똥땅이라는 뜻이다. 즉, 영양왕은 자국을 낮춰가면서 수문제에게 형식적으로 굽신거린 것이다. 이는 욕할게 아니라 화전양면전술의 일환인데, 겉으로 굽신거리면서 내부적으로 준비를 갖추거나 위기를 넘기는 방식이다. 그 외에도 보면
영양왕 25년 봄 2월, 수 양제가 백관에게 조사를 내려 또다시 고구려 정벌을 의논하였으나 며칠이 지나도록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양제는 다시 조서를 내려 천하의 군사를 징발하여 여러 길로 나누어 나아가게 하였다. 가을 7월, 수제의 거가가 회원진에 머물렀다. 이때 천하가 소란하여 징발한 군사가 대부분 기일을 어기고 당도하지 아니하였으며, 우리나라도 역시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수의 내호아가 비사성에 당도하자 우리 군사가 맞아 싸웠으나 내호아는 이를 쳐서 이기고 평양으로 육박할 태세를 보였다. 영양왕이 두려워하여 사신을 수양제에게 보내어 항복을 청하고 이어 앞서 망명해온 곡사정을 보내어 주니 수양제는 크게 기뻐하여 사지절을 보내어 내호아를 소환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8 영양왕

당장 수나라에 맞서 용맹히 항전했다는 영양왕부터 이미 항복과 굽신거림을 남발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다시피 이는 형식적인 제스처이며 화전양면전술에 가까운 방식이었다. 그렇다면 반당의 상징인 연개소문 또한 과연 당나라에게 강경하기만 했을까?
(보장왕) 3년 9월, 개소문이 당에 백금을 바치자 당나라 신하 저수량이 아뢰기를 "개소문은 그 임금을 죽였으니 구이에게도 용납되지 못하는 바입니다. 지금 그를 토벌하려 하면서 그의 금을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고정과 같은 종류가 되므로 신은 받을수 없다고 생각합니다."하였다. 당제는 그 말을 좇았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9 보장왕(상)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였다는게 당 태종에게 고구려 침공의 빌미를 준 것은 넘어가줄 수 있다[19]. 그러나, 연개소문 또한 당나라와의 전쟁을 막거나 지연하고자 한 흔적이 없지는 않다. 보시다시피 당태종의 침공이 거의 임박하자 백금을 바친 것이다. 이 또한 영양왕이 쓰던 화전양면전술의 사례라 할수있다.
6년(647년), 이세적의 군사가 요수를 건너 남소성 등 두어 성을 경유하는데 모두 성을 등지고 항거하여 싸웠다. 이세적이 이를 쳐부수고 그 성곽을 불태우고 돌아갔다. 가을 7월, 우진달과 이해안이 우리 경계에 들어와 100여번을 싸워서 석성을 빼앗고 진군하여 적리성 아래 이르렀다. 아군 1만명이 출전하였으나 이해안이 공격하므로 우리 군사가 3천명이나 죽었다. 당태종이 송주자사 왕파리 등에게 명령하여 강남 열두 고을의 목공을 징발하여 큰 배 수백척을 만들어 우리나라를 치려고 하였다. 겨울 12월, 이 둘째아들 막리지 임무를 당에 들여보내 사죄케 하니 당제가 허락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9 보장왕(하)

여기서도 보다시피 먼저 침공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보장왕이 형식적으로 사죄를 청했다. 물론 연개소문이 직접 그런것은 아니지만, 당시 실권자였던 연개소문의 반대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 최소 묵인했거나 동의했을 가능성이 높다.

백제, 신라와의 외교적 문제의 경우, 연개소문 시절과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무왕) 8년 봄 3월, 한솔 연문진을 보내 수에 조공하고 또 좌평 왕효린을 보내 조공하였으며, 겸하여 고구려를 토벌해줄 것을 청하니 양제가 허락하고 고구려의 동정을 엿보라고 하였다. 여름 5월, 고구려가 와서 송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군사를 옮기어 석두성을 습격하였다. 남녀 3,000명을 사로잡아 갔다[20].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6 무왕
(무왕) 25년 봄 정월, 대신을 당에 보내어 조공하니 당 고조는 그 정성을 아름답게 여겨 사신을 보내어 왕을 책봉하고 대방군공 백제왕을 삼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6 무왕
(무왕) 27년, 사신을 당에 보내어 명광개를 바치고, 고구려가 길을 막고 상국에 내조할 것을 용허하지 않는다고 설명하였다. 고조는 산기상시 주자사를 보내와 조서를 전하고 우리 및 고구려를 효유하여 그 원망을 풀게 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6 무왕

여기서 보면 알수 있듯이, 영양왕-영류왕 재위기간과 겹치는 백제 무왕 시절의 백제고구려와 동맹 관계를 맺기보다는 수/당에게 친하게 굴면서 이득 챙기고 신라와 충성경쟁을 하기 바빴다. 이는 영류왕 시절뿐만 아니라 영양왕 시절때도 마찬가지였으며, 고구려와 백제가 본격적으로 손잡게 된 것은 의자왕 중기에 백제가 친고구려로 돌아서면서였다.

물론, 고구려가 신라와 백제 사이에서 파트너를 고른다면 신라보다는 백제가 더 낫다. 백제를 고른다면 직접 국경을 맞댄 신라를 견제하기 수월하며, 신라가 백제를 집어삼키는 것을 방지하는 것도 가능하다[21]. 그래서 연개소문김춘추의 도움 요청을 매몰차게 거절한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한 움직임이 확실히 나타난 시기는 태종 무열왕 시기부터다. 그 전에는 백제가 과연 고구려와 제대로 연합했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1차 고당전쟁 당시 백제가 신라를 친 것은 오히려 기회주의적 행보에 가까우며, 이를 기점으로 당나라는 백제에게 회의적으로 돌아서기 시작한다[22]


영류왕의 대표적인 실책들을 나열해보면

1, 진대덕의 정탐을 허용했다.
2, 당나라에게 "지나치게" 굽신거렸다.
3, 확고한 외교 라인을 구성하지 않았다.
4, 세력 균형 조절 실패.

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여기서 진대덕 건은 가장 큰 실책으로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당나라에게 "지나치게" 굽신거린 것은 문제지만 당나라에게 다소 굽히고 들어간 것을 문제삼아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선대왕인 영양왕과 반당으로 유명한 연개소문조차 수/당에게 굽신거렸었다. 그리고 외교 라인의 경우, 신라와의 적대는 반쯤 운명이라 쳐도 백제와의 연계가 수월한 것도 아니었다. 백제와의 연계가 가능해지는 것은 언제까지나 의자왕 중기부터다. 그 전 시대에 백제는 고구려와 적극적으로 연계하기보단 수/당에게 좋게 보이며 신라와 충성경쟁하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후기에 들어서면서 귀족연립정권의 성격을 띄었다[23]. 중흥군주 평원왕 시절과 영양왕 시절에는 그나마 귀족들의 지나친 힘이 어느정도 균형을 맞추는 모습을 보였으나, 영류왕 시대에는 연개소문의 세력이 지나치게 확대되는 것을 막지 못했고, 결국 영류왕이 연개소문을 먼저 치려다가 연개소문이 선수를 쳐서 살해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연개소문은 유능한 정치인이었으며, 왕을 시해했다는 오명을 제외하면 고구려를 위해 열심히 고군분투했던 인물이었음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연개소문이 영류왕의 지나친 친당 정책을 명분삼아 그를 살해하였고, 영류왕에 비하면 당나라에게 비교적 거만하게 나오긴 했다. 그러나, 연개소문 또한 선선대 왕인 영양왕처럼 필요에 의해 굽신거리거나 한 수 접기도 했다. 한마디로 영류왕의 지나친 친당은 진심보다는 명분에 좀 더 가까웠으며, 오히려 영류왕과 연개소문간의 세력 다툼이 진짜 이유에 가깝다. 한마디로 영류왕은 연개소문의 세력 확대를 막지못해 지나친 친당 왕으로 몰려 살해당한 것이다[24].

영류왕은 분명히 실책을 저지른 왕이다. 그러나, 진대덕 건을 제외한다면 다소 감안해야할 부분이 많으며, 고구려의 회복을 위해 당과의 전면전을 최대한 지연시키려 했다는 것은 분명했다. 실책으로 인해 비판받는 것은 정당하나, 악의적으로 왜곡당해 암군으로까지 폄하당할 정도로 막장 인물인가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이다.

2.4. 비극적인 최후

왕위에 오른지 24년이 흐른 642년 10월, 영류왕은 연개소문을 제거하려다 오히려 이를 알게 되어 분노한 연개소문이 일으킨 쿠데타로 인해 역으로 시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 때 연개소문이 영류왕의 시신을 다섯 갈래로 나눠 구덩이에 넣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하지만 연개소문의 정변 및 집권시의 행적은 중국 측 기록에 전적으로 의존하는데 당 태종이 직접 출전한 여당 전쟁에 대한 기록은 몰라도 고구려 내부의 일에 대한 중국 측의 기록은 정확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고 특히 연개소문에 대한 기록은 대놓고 비난하기 위해 부정적인 면모만 골라 서술한 만큼 걸러서 볼 필요가 있다.

3. 트리비아

아들로 태자 고환권(高桓權)이 있었는데, 영류왕 23년(640년) 2월의 기록 외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어서 행적을 알 수가 없다. 그 외에 신찬성씨록에서 고복덕이 영류왕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상반된 기록도 가지고 있어서 확실하지 않다.

4.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영류왕 본기
一年秋九月 영류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二月 당에 조공하다
二年夏四月 시조 사당에 제사지내다
二年夏五月 졸본에서 돌아오다
四年秋七月 당에 조공하다
五年 고구려 내에 흩어져 있던 중국인들을 모아 돌려보내다
六年冬十二月 당에 조공하다
七年春二月 당에서 도교가 전래되다
七年冬十二月 당에 조공하다
八年 당에 가서 불교와 도교의 교법을 배우기 시작하다
九年 신라와 백제가 당에 가서 고구려의 침략 행위를 호소하다
十一年秋九月 당에 봉역도를 바치다
十二年秋八月 신라 김유신이 낭비성을 쳐부수다
十二年秋九月 당에 조공하다
十四年 당이 고구려가 세운 경관을 허물어버리다
十四年春二月 천리장성이 완성되다
二十一年冬十月 신라 칠중성 공격에 실패하다
二十三年春二月 세자 환권을 당에 보내 조공하다
二十三年春二月 당에 자제의 국학 입학을 청하다
二十三年秋九月 태양이 3일간 빛을 잃다
二十四年 당 사신 진대덕이 고구려의 허실을 탐지하고 돌아가다
二十五年春一月 당에 조공하다
二十五年春一月 연개소문에게 장성 축조를 감독하게 하다
二十五年冬十月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다
二十五年冬十一月 당 태종이 사신을 보내 조문하다

5.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연개소문에서의 연기자는 최종환. 고수전쟁을 총지휘하고 수나라 수군을 모조리 섬멸하는 큰 공을 세운 명장 출신의 왕으로, 당시 고구려의 국력에 한계를 느껴 수나라에게 상대적으로 유화적으로 나왔고, 당과 화친 정책을 펴는 건 드라마에서도 동일하게 나오지만 당과 맞서야 한다는 연개소문과는 달리 당과는 화친하면서 가장 큰 위험을 신라로 지목하고 신라를 멸망시키려는 걸로 나온다. 결국 당에게 굽실거린다고 태학 박사 이문진과 고구려의 장수들(강이식, 온사문)의 불만을 샀고, 나중에는 연개소문의 쿠데타 후 독주를 마시고 자결한다.[25] 그래도 실제론 처참하게 살해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제작진이 영류왕을 꽤 배려해 준 장면. 사실 이건 연개소문의 미화로 봐야 되지 않을까 죽으면서 한 마지막 말인 "우리는 가는 길은 달랐으나 똑같은 마음으로 고구려를 사랑했다"는 명대사라고 부를만 하다. 작중 연개소문도 이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드라마에서도 사서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그러나 후대에 연개소문을 깎아내리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일 수 있으므로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유현종의 소설 연개소문[26]에서는 당과의 평화 정책을 펼치는 것 외에도 가화[27]라는 첩에게 홀려 암군으로 전락하고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끔살 당한다. 이 소설에서는 연개소문이 고건무의 부하로 여수전쟁에 종군했었고, 연개소문이 고건무를 굉장히 존경했었다는 설정.[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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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KBS 사극 칼과 꽃에서는 김영철이 연기. 당에 대해서 화친 정책을 취하는등 고구려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으로 나왔다. 당에 대해 화친 정책을 펼치는 것은 같으나, 만만한 신라를 공격하는 드라마 연개소문의 영류왕과는 달리 고구려의 평화 그 자체가 목적인 모습으로 나온다. 중반부에 이르러 연개소문에게 직접 칼에 찔려 죽게 된다. 칼과 꽃 자체가 근래에 나온 사극 중에 보기 드물게 연개소문을 악역으로 그리고 있는만큼 그 대척점에 서있는 영류왕을 선역으로 그리면서 생겨난 캐릭터인 듯하다.

매한작 장편소설 '홍익대제 고건무'에서도 등장한다. 현대의 고건무가 죽어서 과거의 영류왕으로 환생하게 되는데, 비록 비현실적인 요소도 있지만 나름 실존인물들과 허구의 인물들을 잘 섞은 대체역사소설로서 호평받고 있다. 고수대전, 고당대전, 삼국통일, 왜 정복 등 고구려를 강국으로 탈바꿈시킨다.


[1] 삼국사기.[2] 삼국유사.[3] 당으로 건너간 고구려 유민 고을덕의 묘지명 기록[4] 바다를 통해 산동반도에서 황해를 건너 평양성을 직접 쳤다.[5] 함대가 싣고 온 양식이 있으면 우중문의 군사들도 당장 철수할 필요가 없다. 당시 수나라 육군은 양제의 명에 의해 보급품을 각 병사들이 자기 몫을 지고 이동했는데, 워낙 무거워 버리게 되었고 그 탓에 고생했었다.[6] 현대 한국으로 치면 전쟁기념관국립현충원을 없앤 거랑 똑같다.[7] 경관이 승전 기념물이기는 한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기념비 형태가 아닌 적군의 유골을 쌓아 만든 흠좀무한 해골탑이다. 물론 역사만화책에서는 아이들의 정서를 고려하여 단순한 기념비로 묘사하지만...[8] 봉역도封域圖 고구려에서 제작한 지도. 현재 전하지는 않는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628년(고구려 영류왕 11, 당 정관 2) 가을 9월 고구려에서 당에 사신을 보내어 당 태종이 돌궐突厥의 힐리가한?利可汗을 사로잡은 것을 치하致賀하고 고구려의 봉역도封域圖를 올렸다는 기록이 보인다.[9] 혹자는 태자 당시 전쟁에서 활약한 모습과 너무 달라진 모습이라며 소극적인 모습을 보인 것에 대해 의아해 하기도 하는데 세계사로 봤을때 전쟁에 참여했던 이들이 온건파가 되는 경우는 수두룩 하다. 고려의 여진 정벌 당시 인간 병기로 활약했던 척준경도 훗날 여진이 금나라를 세우자 친금 사대주의를 주장했으며, 치킨 호크 항목에서도 나오듯이 전쟁 참여자들은 전쟁의 참혹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평화를 선호하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아무 이유없이 영류왕은 당나라에게 저자세로 나온 것이 아니다.[10] 113만 대군을 동원하고 여기에 추가로 대군을 동원해 2차, 3차 전쟁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일어난 반란군만 해도 10만이 넘었다고 한다. 여기에다 운하 건설을 위해 동원된 인구가 수백만이 되었다고 하니 중국의 국력은 단순 인구가 많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런 인구를 운영하고 먹여 살릴 만큼에 경제력과 행정력을 구축하고 있었다는 소리다.[11] 돌궐은 고구려와도 대립 관계가 아니라고 볼 수 없다. 어느 한 순간 적이 될 지 아군이 될 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12] 다만 중화사상과 같은 듯 다른 부분이 있다. 중화사상은 '절대적 세계관'이어서 중국에서 말하는 '천하'란 말 그대로 하늘 아래 모든 세상이다. 반면, 고구려식 세계관은 '상대적 세계관'이어서 천하가 몇 개의 지역권으로 구성되었다고 인식했다. 즉, 고구려 중심의 천하가 있고 중국 중심의 천하가 따로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고구려 중심의 천하는 곧 고구려의 지배력, 세력이 미치고 있다고 여겨지는 범위(한반도, 만주, 연해주, 동몽골)를 말한다. 이는 고구려의 인구가 중국보다 턱없이 적었던 것과도 연관이 있을 듯하다. 때문에 고구려는 중국 중심의 천하를 인정해 중국에까지 자국 중심 세계관을 강요하진 않았지만 중국은 고구려에 중화사상을 강요한 것이다.[13] 적군의 수급으로 쌓은 탑이다. 적군에게 "또 쳐들어 오면 이렇게 될 줄 알아라!"는 경고 메시지를 줄 목적으로 쌓은 것이다.[14] 다만 진대덕의 정탐 문제는 확실히 까일 요소가 맞으며, 연개소문이 유능한 인물이라는 것도 맞다고 본다.[15] 천리장성에서 반론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몽골군 침입 당시 금나라는 만리장성의 경보 덕분에 몽골군의 침입 소식을 파악하고 대규모 군대를 모집할 시간을 얻었다. 만약 장성이 없었으면 화북 허허벌판 지대에 몽골군이 순식간에 휘몰아쳐 대비할 시간조차 못벌었다.[16] 고구려-수 전쟁고구려-당 전쟁의 양상을 보면, 수나라/당나라군이 일부 성채를 공성하는 동안 후방의 여러 성에서 병력을 모아 요격하거나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양상이 흔했다. 이는 파발과 봉화를 통한 통신 체계를 기반으로 하여 정보를 빠르게 전달한 뒤 구원군을 보내는 방식으로 여겨진다.[17] 화약은 당나라 말기에 개발되었고, 송나라때 대포의 원형인 대나무 관으로 만든 포가 나왔으나, 몽골의 침입때만 해도 보조무기 정도에 불과했으며, 철포가 자리잡은 명나라 초기에도 핵심 무기는 아니었다.[18] 혹여나 그런 비싼 무기가 아니라고 하면 애초에 필요없다. 고구려는 이미 우수한 철제 무기들과 쇠뇌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19] 어차피 영류왕 시절때 당태종은 이미 고구려 침공에 대한 자신감과 의욕을 보이고 있었다.[20] 다만, 이렇게 가이드라인과 지원을 제안했으나 막상 병력만 고구려쪽에 배치하고 처들어가는 시늉만 했다.[21] 국력상 신라가 백제보다 앞서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시점부터 신라는 백제를 상대로 1대1 맞불이 가능해진 건 사실이다.[22] 백제의 조공 기록은 652년을 마지막으로 끊기는데, 몇년후 태종 무열왕이 막 즉위한 신라가 여제동맹과 말갈의 공격을 받았던 것을 감안하면 여제동맹이 확실히 성사된 것은 650년대로 보는게 타당하다.[23] 특히 안장왕 피살 이후일 가능성이 높다.[24] 물론 어느정도 맞는 말이며, 그렇다고 연개소문이 고구려의 암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연개소문도 한계는 있었으나, 충분히 유능한 인물이었다.[25] 고건무는 연개소문의 재능을 높이 사며 연개소문과 함께 가기 위해 끝까지 연개소문을 설득하였다. 그러나 연개소문을 설득하는데 실패하였고, 결국 연개소문을 북쪽으로 내보냈고, 연개소문은 쿠데타를 일으켰다.[26] 드라마의 원작이라고는 하지만 드라마는 원작의 내용과는 안드로메다로 가는 전개를 보인다.[27] 연개소문의 첫사랑이었으나 연개소문과 이뤄지지 못하고 고건무의 첩이 되고 이후 흑화하여 고구려판 달기, 장녹수가 되고 만다. 연개소문의 쿠데타 후 연개소문의 자비로 목숨을 부지하였으나 이후 김춘추의 첩이 되어 김춘추를 도피시킨다.[28] 쿠데타 후 고건무를 죽일 때 그가 살려달라고 빌자 "내가 존경했던 고건무 장군은 어디갔소?" 라고 절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