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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000><colcolor=#c5b356> 성씨 | <colbgcolor=white,#2d2f34>고(高) | |
| 이름 | 막근(莫勤) | |
| 부왕 | 태조대왕(太祖大王) | |
| 생몰연도 | ? ~ 148년 4월 | |
1. 개요
고구려 제6대 태조대왕의 장남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 조에는 적자(嫡子)로, 차대왕 조에는 원자(元子)로 기록되어 있다. 동생으로 막덕(莫德)이 있었다.태조대왕이 121년에 동생 수성에게 정사를 맡기면서 수성이 실권자가 되었고, 25년 후인 146년에 수성이 끝내 태조대왕으로부터 왕위를 넘겨받는다. 막근은 태조대왕의 정비(正妃)의 맏아들이었으므로 종법상 정통성이 확보된 상태였지만, 숙부 수성의 찬탈로 보이는 행보로 인해 왕위에 오르지 못하였다. 차대왕은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는 움직임을 보였는데, 재위 2년(147) 3월 우보 고복장(高福章)을 주살하고 이듬해(148) 4월에 막근의 목숨을 빼앗았다. 형의 죽음을 접한 막덕은 자신도 처형당할 것을 염려해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했다. 막근과 막덕을 끝으로 태조대왕의 대는 끊겼다.[1]
2. 기타
최근 학계에서는 태조대왕-차대왕-신대왕을 친형제가 아니라 친척 형제간으로 보는데,[2] 신대왕 이전까지만 해도 고구려 왕위계승이 가능한 혈족 범위가 꽤 넓었던 것으로 유력시되기 때문에 막근과 막덕도 꼭 태조대왕의 친아들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당시 고구려는 6세기 이전 신라 6부 체제가 그랬듯이 5부를 중심으로 한 각 부들간의 연합이었으며, 부 안에서도 각각의 소집단을 이끄는 소족장들이 복합적으로 존재했다. 이런 원시적인 부족 사회 내지는 부족연합 형태의 원시적인 국가 체제는 일반적인 군주정 하면 떠올리는 부자계승이나 형제계승보다는 특정 혈족을 이끄는 소족장들의 대표인 중족장(부장部長)과 부장들의 대표인 대족장(왕)의 형태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추대될 수 있는 혈족 범위가 매우 넓었다. 다만 막근과 막덕은 이름의 유사성을 보아 친형제가 맞았을 가능성이 높고, 후대 사서 편찬 과정에서 '태조대왕의 아들들'로 엮인 것을 보아 태조대왕이 속한 직속 족단의 대표를 물려받은 인물인 건 맞아 보인다.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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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측 사서에 따르면 차대왕과 신대왕이 태조대왕의 형제가 아니라 아들로 나오는데, 이것은 백제의 경우와 관련지어보면 의문이 풀릴 수 있다. 한성백제박물관 발간 웅진기 왕위계승 편에서는 중국측이 형제 관계가 아닌 백제왕들을 자꾸 부자 관계로 오해한 건 왕위 계승이 부자간 계승이 아닐 경우 중국 조정에게서 깔보이거나 책봉 받지 못할까봐 일부러 백제측에서 얼버무려 보냈던 걸로 나름대로 결론을 냈다. 고구려측도 마찬가지로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중국측에 통보할 때 부자 관계로 얼버무렸을 개연성이 크다.[2] 4~8촌으로 대강 짐작된다. 건국왕 주몽의 즉위년이 이들의 생존 시기와 백수십 년밖에 차이나지 않으며 셋 모두 주몽계임이 유력하기에, 8촌보다 넘어갈 가능성은 대단히 적다. 신대왕은 당연히 태조대왕이나 차대왕의 친형제가 될 수 없으나, 동모제라는 언급이 있는 태조대왕과 차대왕은 정말로 친형제였을 가능성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