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22:39:27

고국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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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c5b356> 고구려 제16대 국왕
고국원왕 | 故國原王
파일:우산하 992호.png
고국원왕릉으로 추정되는 우산하 992호 전경.
출생
(음력)
<colbgcolor=#fff,#1f2023>300년대 추정[1]
고구려 국내성
사망 371년 11월 17일[A] (향년 60~70대 추정)
고구려 평양성 전투지
능묘 고국원(故國原)[3][4]
재위기간 고구려 왕태자
314년 음력 1월 ~ 331년 음력 2월 (17년 1개월)
고구려 제16대 국왕
331년 음력 2월 ~ 371년 11월 17일[A] (40년 9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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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c5b356> 본관 <colbgcolor=#fff,#1f2023>횡성 고씨
성씨 고(高)
사유(斯由) / 쇠(釗)
부모 부왕 미천왕
모후 왕후 주씨
형제자매 동생 고무
왕후 고구부, 고이련의 모후
자녀 태자 고구부
왕자 고이련
시호 고국원왕(故國原王)
국원왕(國原王)
강상왕(岡上王)
국강상왕(國岡上王)
국강상성태왕(國罡上聖太王)[6]
작위 정동대장군 영주자사 낙랑공, 전연[7] }}}}}}}}}
고국원왕(故國原王)【국강상왕(國罡上王)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사유(斯由)이다. 【쇠(釗)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원왕조에 나오는 첫 문구. #

1. 개요2. 시호3. 굴욕으로 점철된 재위 기간
3.1. 전연의 침입3.2. 국내성 축조3.3. 반역 모의3.4. 평양성에서 맞은 비극적인 최후
4. 북한이 보는 고국원왕5. 평가6. 《삼국사기》 기록7. 대중매체에서8.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고구려의 제16대 태왕.

아버지인 미천왕이 크게 확장한 영토와 강화한 왕권을 대부분 상실한 왕이다. 다소 답답하고 아쉬운 업적만큼 고국원왕 역시 수난과 역경으로 점철된 재위기를 보내다 끝내 전쟁터에서 전사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된다. 그나마 고구려 입장에선 불행 중 다행으로 아들 둘(소수림왕, 고국양왕)은 고국원왕의 실책과 폐해를 빠르게 시정하여 전성기의 토대를 열었고, 손자인 광개토대왕과 증손자인 장수왕이 이끌어 가는 고구려 전성기를 여는데 성공한다.

2. 시호

시호가 여러 가지가 전해지는데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 강상왕(岡上王): 《삼국유사》
  • 국원왕(國原王): 《삼국유사》
  • 고국원왕(故國原王): 《삼국사기》
  • 국강상왕(國岡上王): 《삼국사기》
  • 국강상성태왕(國罡上聖太王): 〈모두루 묘지명〉[8]

'강상(岡上)'과 '원()'은 같은 뜻으로 여겨진다.[9] '고()'의 경우 장수왕 대에 수도평양성으로 바꾸면서 '국강상(국원)'의 앞에 '고'를 붙인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고국천왕이나 고국양왕의 경우도 같은 추측이다. 국강상/국원 등의 지명은 왕릉이 위치한 곳을 가리킨다.

따라서 고구려 당대에 사용되었던 정식 왕호는 본래 국강상성태왕(國罡上聖太王) 또는 국원성태왕(國原聖太王)이었다가, 427년 장수왕이 평양성으로 천도한 이후에는 고국강상성태왕(故國岡上聖太王)/고국원성태왕(故國原聖太王) 정도로 자리잡았을 듯하다. 여기서 고국강상/고국원과 성태왕 사이에 업적이나 칭호가 더 들어갔을 수도 있다. 《삼국사기》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태왕(太王)호가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으나, 태왕호의 여러 이표기 중 몇몇이 미천왕과 고국원왕 대의 기록부터 드러나기 시작한다.

한편 《수서》 〈동이열전〉에는 "위궁현손의 아들을 소열제라고 하는데 모용씨에게 격파당했다(位宮玄孫之子曰昭列帝, 爲慕容氏所破)"는 기록이 전한다. 이를 근거로 훗날 고국원왕에게 소열제라는 황제식 시호가 내려졌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수서》의 편찬자가 《북위서》 〈열전〉의 구절인 "그(위궁)의 현손은 을불리요 을불리의 아들은 쇠인데, 열제 때 모용씨와 더불어 서로 공격하였다(其玄孫乙弗利, 利子釗, 烈帝時與慕容氏相攻擊)"를 옮겨적는 과정에서 '釗烈帝' 부분을 유비의 시호인 소열제와 혼동하여 잘못 해석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3. 굴욕으로 점철된 재위 기간

3.1. 전연의 침입

후한이 무너진 후 삼국통일한 사마씨의 서진(西晉)이 여러 반란으로 불타오르는 대혼란기를 틈타 미천왕은 옛 고조선 영토를 지배하고 있었던 중국 군현인 낙랑군대방군을 몰아내는 한편, 국력을 서서히 키우면서 주변에 대한 통제력을 늘려나가고 있었다. 이 때 요동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모용선비를 공략하여 중원을 향한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한 노력 역시 지속적으로 기울이고 있었던 시점이었다. 전연은 모용황 재위 초기 엄혹한 정치로 모용황의 서형인 모용한의 이탈과 모용인, 모용소의 반란으로 불안한 정국을 보였으나, 2 ~ 3년만에 반대 세력을 모조리 소탕하고, 단부까지 꺾으면서 순식간에 강대국 반열에 오름에 따라 본격적으로 고구려에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339년 고국원왕은 전연과 직접 싸우기보다는 일단은 동맹을 요청하고, 340년 태자를 전연에 보내 조회하는 방식으로 온건책을 폈다. 여기서 말하는 태자가 소수림왕인지 고국양왕인지는 불분명하다. 어쨌든 이러한 고구려의 친선 의도에 전연은 도리어 창칼로 응답하니 342년, 55,000명의 대군을 조직하여 고구려로 쳐들어온 것이다. 이 침공의 의도는 건위장군(建威將軍) 모용한이 전연 황제 모용황에게 올린 발언에서 잘 알 수 있는데 고구려와 우문부를 먼저 멸망시켜야 중원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훗날 후금이 일단 조선부터 정리(병자호란)하고 중원에 집중한 것처럼 전연 입장에서는 후방의 고구려가 거슬렸던 것이다.

당시 전연에서 고구려로 가는 길은 북쪽의 평탄한 길과 남쪽의 험한 길, 둘이 있었는데 고국원왕은 정예병 50,000명을 북쪽, 약한 병사들을 남쪽으로 보내 대비하도록 하였으나 모용황은 허를 제대로 찔러 주력 부대 40,000명을 남쪽, 그 외 15,000명을 북쪽으로 보내 양동 작전을 펴 고구려의 수도 환도성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한다.

다행히 북쪽 길에서 방어하고 있던 고국원왕의 동생 고무(高武)의 50,000명은 건재해 모용황이 이걸 걱정하고 함부로 움직이지 않아 고국원왕 본인까지 사로잡히지는 않았으나, 미천왕의 왕릉이 도굴당하고, 살아있던 태후왕후 주씨와 왕비를 비롯한 50,000명의 포로가 전연으로 끌려가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 동천왕 이후 최대의 치욕이었는데, 고구려를 직접 통치하기보다는 재기 불능의 상태로 만들어 신하국으로 삼아 후환을 없애려 했던[10] 전연의 정책에 따라 수도는 철저하게 파괴당했다.

졸지에 아버지 미천왕의 시신과 어머니를 볼모로 내놓게 된 고국원왕은 결국 343년 2월, 1,000여 가지의 보물을 바치면서 스스로를 신하라고 칭하는 등 눈물겨운 노력을 계속하여 미천왕의 시신을 겨우 돌려받게 되었으며, 345년에는 남소성을 전연이 빼앗아 갔지만 조치하지 않았고, 모후 주씨 또한 10여 년이 흐른 모용준 때 공물을 바치면서 고구려로 송환한다. 당시 태자였던 소수림왕이 대신 인질로 끌려갔다가 전연이 전진에게 망하면서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사실이 아니며, 고국원왕의 태자가 잠시 사신으로 전연에 다녀온 적은 있는데 이 태자도 소수림왕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전연은 고구려의 성을 침공하는 등 이후에도 고구려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하지만 부정부패와 지배층의 분열로 370년 전연은 부견전진에 의해 처참하게 멸망당했는데, 당시 전연의 모용씨 황족 일부[11]가 망명해오자 그대로 묶어 전진에 갖다 바치며 수십년 묵은 복수를 조금이나마 하게 된다.

3.2. 국내성 축조

전연이 침공하기 8개월 전인 342년 2월에 환도성을 수리하고 국내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유리왕 때인 3년(유리왕 22년)에 천도했던 위나암성을 증축했다는 것이 통설이긴 하나, 노태돈은 국내성으로 비정되는 통구성의 초축 시기가 3세기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는 점, 대무신왕 11년(28년) 7월 기사에서 을두지의 발언을 통해 묘사된 위나암성의 지형에 대한 묘사[12]가 통구성이나 환도산성으로 비정되는 산성자산성의 지형보다는 오녀산성과 더 비슷하다는 점, 국내의 내(內)가 땅을 의미하는 단어인 나(那), 천(川) 등과 의미가 통한다는 점을 보아 국내(國內)가 도읍의 땅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로 추정된다는 점을 지적하며 고국원왕대의 해당 기사는 국내성의 축조에 관련되는 기사가 증축이 아닌 초축 기사일 가능성이 높아보인다고 추정한 바 있다.[13]

3.3. 반역 모의

삼국사기》에는 언급되지 않으나, 〈모두루 묘지명〉에는 반역 사건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정확하게는 14행에 '반역(叛逆)'이라는 글자가 기록되어 있으며, 15행에 염모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 이 염모라는 인물이 반역을 제압했다는 기록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기록들을 보건대 외부의 침입과 더불어 내부의 혼란도 가속화된 듯 보여진다.

자세한 사료가 없어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부왕 미천왕이 봉상왕을 몰아낸 쿠데타의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 이 때까지도 미천왕의 혈통인 고국원왕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는 세력들이 상당히 존재하고 있었다는 방증으로 보인다.

3.4. 평양성에서 맞은 비극적인 최후

파일:근초고왕과 고구려의 충돌 지역.png
치양평양성의 위치. 출처-동북아역사넷

그러나 고국원왕에게는 애석하게도 고구려의 불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바로 한반도 중부 지방에서 세력을 키우던 백제근초고왕의 지휘 아래 한반도 남부를 손에 넣고, 큰 세력으로 성장한 것이었다. 이미 미천왕 대에 대방군낙랑군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고구려는 대방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던 백제와 마찰을 겪은 바 있었다.

그런 외교적 문제가 아니더라도, 고구려는 원래 눈독들이던 요동 지역을 중원을 휘어잡은 티베트계 저족의 전진이 장악하게 되면서 당장은 넘보기 힘들어 부득이하게 방향을 바꿔 남쪽으로 확장을 꾀해야 했으며, 한성백제 역시 근초고왕 대에 이르러 남쪽의 마한 세력을 어느 정도 자신의 세력권으로 만든 상황이었기에 북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더욱이 한사군이라는 두 세력 사이의 완충 지대가 사라진 시점에서 지금의 황해도 ~ 경기도의 넓은 평야 지대를 차지하기 위한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고국원왕은 선수를 쳐 369년 9월, 노구를 이끌고 20,000명의 병력으로 백제 북방의 치양성을 공격하다가 백제의 태자 부여수에게 제대로 역관광당했다. 결국 근초고왕이 태자 부여구수를 선봉장으로 삼아 371년 10월, 30,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 남쪽의 평양성을 공격했을 때 고국원왕은 친히 나가서 장수들과 병사들을 거느리고 근초고왕과 전투를 벌이다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에 맞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상처가 심해져 10월 23일에 죽고 말았다.

이 사건 이후 고구려는 백제를 동명성왕이라는 같은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 거짓말로 느껴질 정도로 혐오하여 '백제'라는 말 대신 남을 잔()[14] 자를 써 '백잔(百殘)'이라는 멸칭을 사용했으며, 후대의 기록이 아닌 고구려인이 직접 새긴 광개토대왕릉비에도 해당 표현이 남아 있다. 이걸 현대에 빗대자면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문서에서 일본중국쪽발이짱깨라고 표현한 격이다.[15]

결국 백제 역시 100여 년 뒤인 475년 9월 고구려 장수왕에게 수도인 위례성을 함락당하고, 당시 왕이었던 개로왕까지 처형당하는 그야말로 처절한 수모를 겪게 되었다. 장수왕의 입장에선 그의 조상들인 미천왕, 고국원왕, 소수림왕, 고국양왕, 광개토대왕의 원한을 갚았던 대사업이다. [16] 위례성 함락 3년 전,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 과거 백제가 고국원왕을 죽인 일을 "쇠의 머리를 베어서 매달았다"며 모욕적으로 묘사했다는 사실은 고구려와 백제 모두 고국원왕의 전사를 갈등의 시발점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후로도 신라가 제24대 진흥왕 때 급부상하기 이전까지,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 죽고 죽이는 불구대천으로서 끊임없이 싸우게 되었다.
百濟王率兵三萬, 來攻平壤城. 王出師拒之, 爲流矢所中, 是月二十三日薨. 葬于故國之原. 【百濟蓋鹵王表魏曰, "梟斬釗首." 過辭也.】
백제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 왕은 군대를 출정시켜 막다가 눈먼 화살[17]에 맞아 이 달 23일에 세상을 떠났다. 고국(故國)의 들[18]에 장사지냈다. 【백제 개로왕위나라에 표(表)를 보내기를 "쇠(釗)의 머리를 베어서 매달았다"고 하였으나 지나친 말이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고국원왕 41년(371년) 10월조
근초고왕의 공격을 받아 전사한 것 때문에 한국사에서는 4세기 백제의 전성기를 드러내는 하나의 예로서 많이 등장한다. 한국사를 배울 때마다 그의 업적으로 전사가 빠지지 않는 등 사망전대 취급이라 안타깝게 여기는 학생도 있다. 물론 한자 뜻은 다르지만 선생 중에는
  • 근초고왕을 '원'망하면서 죽어서 고국'원'왕이라는
  • 구려통하게 죽은 이라는
암기법을 제시하는 사람도 있다. 한 글자 차이인 고국과 헷갈리기 쉬워서 만들어진 암기법으로 보이지만, 원망의 '원'은 원망할 원()자로 고국원왕의 근원 원()자와 다르다는 점은 알아두자.

후대의 일이지만 고려의 제24대 원종백승현의 주청대로 왕 자신의 휘를 고대 서주의 성군 강왕(康王)의 이름 자랑와 같게 바꾸려다 하필 그 이름이 '제 명에 못 죽은(不得其死)' 고국원왕의 휘와 같다는 걸 알고 기겁해서 그냥 옛날 이름 그대로 썼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이다. '不得其死'라는 표현은 《고려사절요》에 실제로 사용된 표현이다. 주나라 강왕과 고구려 고국원왕은 모두 이름이 '쇠(釗)'였다.

안악 3호분을 고국원왕의 왕릉으로 추정하기도 하나, 중국계 귀화인 동수의 무덤이라는 설이 더욱 유력하다. 자세한 사항은 문서 참조.

4. 북한이 보는 고국원왕

북한의 교과서에서는 고국원왕의 재위기를 부정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342년에 연나라(전연 - 모용 선비가 세운 나라) 침략군이 모용황의 지휘 밑에 고구려의 환도성을 공격하여 고구려 태후를 잡아갔으며 미천왕의 시체를 가져갔다.
조선력사
전연이 고구려를 침공해 미천왕의 무덤을 도굴하는 부분이다. 여기까지는 별 차이가 없다.
고구려는 그후 연나라에서 큰 혼란이 조성된 기회를 리용하여 370년 10월 전연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10여일만에 만리장성을 넘어 유주 지역까지 진출하여 악질 관료들을 처단하고 그 지역의 13개군을 차지하고 진을 유주 자사로 임명하였다. 고구려는 376년 초까지 유주 지역에 주둔해있으면서 전연 침략 세력의 잔여 분자들을 철저히 진압 소탕하였다.
조선력사
유주자사 진의 유물을 통해 고국원왕 대에 유주에 일시적으로 진출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백제와의 교전을 살펴보면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첫 충돌은 369년에 치양(배천)에서 벌어졌다. 이때 고구려는 2만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백제의 치양을 공격하였으나 백제군의 반격을 받아 성공하지 못하였다. 고구려는 371년 10월 3만명의 백제군의 평양성(남평양) 공격을 물리치고
조선력사
첫 전투에서는 격퇴되었다고 적혔으나 고국원왕이 전사한 전투에서 고국원왕이 백제를 격퇴한 듯한 뉘앙스로 적고 있다.

5. 평가

사실 고국원왕은 하필 아버지 아들, 손자, 증손자 등 조상과 후손들이 한국사에서도 손꼽히는 명군들이고, 당대의 숙적인 모용선비백제가 강성한 시기였기에 다소 운이 안 좋다는 평도 있다.

그러나 아버지 미천왕이 만든 유리한 상황을 무력하게 날려먹은 건 충분히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전대의 미천왕은 당시 한반도 최고의 문명 지역인 현 평남 일대의 한사군을 무너뜨리고 수중에 넣음으로써 고구려는 중원의 발달한 문명과 그에 부속된 고급 인력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고 거기에 더해 기존 영토보다 훨씬 생산력 좋은 농토까지 확보하여 체급 증강도 실현되었다.[19]

게다가 이 시기의 백제신라는 이미 도시 국가 수준은 벗어났으나 아직 고대 국가 체제 정비가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은 삼한 소국들 중 가장 유력한 세력 정도에 불과했고, 남한 지역인 삼한의 문명 수준 역시 중원 왕조의 400년 직할령이었던 서북한의 한사군에 미치지 못했기에 고국원왕이 아버지나 후손들만큼 명군주였다면 비교적 편하게 한반도 중남부 진출, 혹은 병합까지도 가능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고국원왕 치하는 고구려의 잃어버린 40년이었다. 특히 이 40년 사이에 백제와 신라가 빠른 성장을 일구어 삼한 내 유력한 소국에서 한반도 패권을 다툴 유력한 고대 국가로 급부상했고, 특히 백제는 근초고왕 치하에서 삼한의 2/3인 마한 전역에 대한 반복속을 완료하였기에 고구려로서는 고국원왕 치하에서 한반도 중남부 진출 골든 타임을 날려먹은 게 된다. 아버지 미천왕이 애써 수복한 황해도 일대의 대방군이 털렸음은 덤.[20]

이후 소수림왕부터 장수왕에 이르기까지 명군 후손들의 치정 중에도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결국 한반도 병합은 좌절되었기에, 고국원왕이 날려먹은 재위 기간은 고구려로서도 뼈아픈 시간이었다.[21] 즉 고국원왕은 백제와 신라가 성장할 시간을 벌어다 주고 고구려 팽창에 한계를 설정한 암군인 것이다. 다만 자식부터 증손자까지 명군이었기 때문에, 후계 농사를 잘 지었다는 정도로는 평가해줄 만하다.

6.삼국사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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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요 · 박경휘 · 박승영 · 박위응 · 김부 고주몽 · 고유리 고무휼 · 고색주 · 고해우
15권 「고구려 3권 (高句麗 三)」 16권 「고구려 4권 (高句麗 四)」 17권 「고구려 5권 (高句麗 五)」
고궁 · 고수성 고백고 · 고남무 · 고연우 고우위거 · 고연불 · 고약로 · 고상부 · 고을불
18권 「고구려 6권 (高句麗 六)」 19권 「고구려 7권 (高句麗 七)」 20권 「고구려 8권 (高句麗 八)」
고사유 · 고구부 · 고이련 · 고담덕 · 고거련 고나운 · 고흥안 · 고보연 · 고평성 · 고양성 고원 · 고건무
21-22권 「고구려 9-10권 (高句麗 九-十)」 23권 「백제 1권 (百濟 一)」
고장 부여온조 · 부여다루 · 부여기루 · 부여개루 · 부여초고
24권 「백제 2권 (百濟 二)」
부여구수 · 부여사반 · 부여고이 · 부여책계 · 부여분서 · 부여비류 · 부여계 · 부여구 · 부여수 · 부여침류
25권 「백제 3권 (百濟 三)」
부여진사 · 부여아신 · 부여전지 · 부여구이신 · 부여비유 · 부여경사
26권 「백제 4권 (百濟 四)」 27권 「백제 5권 (百濟 五)」 28권 「백제 6권 (百濟 六)」
부여문주 · 부여삼근 · 부여모대 · 부여사마 · 부여명농 부여창 · 부여계 · 부여선 · 부여장 부여의자
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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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고국원왕 본기〉
一年春二月 고국원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二月 시조 사당에 제사를 지내다
二年春三月 왕이 졸본에서 돌아오다
四年秋八月 평양성을 증축하다
四年冬十二月 겨울에 눈이 오지 않다
五年春一月 신성을 쌓다
五年秋七月 곡식이 서리의 피해를 입다
六年春三月 동진에 사신을 보내다
九年 전연의 모용황이 신성까지 침략해오다
十年 왕세자를 전연에 사신으로 보내다
十二年春二月 환도성을 수리하고 국내성을 쌓다
十二年秋八月 왕이 거처를 환도성으로 옮기다
十二年冬十月 전연의 모용황이 고구려를 침략할 전략을 논의하다
十二年冬十一月 전연의 모용황이 남도로 침략하다
十三年春二月 전연의 모용황이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주다
十三年秋七月 평양 동황성으로 천도하고[22] 동진에 사신을 보내다
十三年冬十一月 눈이 많이 내리다
十五年冬十月 전연이 침략해 와서 남소성을 빼앗다
十九年 송황을 전연으로 돌려보내다
二十五年春一月 왕자 구부를 왕태자로 삼다
二十五年冬十二月 전연이 왕모 주씨를 돌려보내다
三十九年秋九月 치양에서 백제와 싸워 패하다
四十年 전연이 망하다
四十一年冬十月二十三日 고국원왕이 죽다

7. 대중매체에서

7.1. 드라마 〈근초고왕〉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고국원왕(근초고왕)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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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소설 《고구려》

김진명 작가의 소설 《고구려》에서는 드라마 〈근초고왕〉의 고국원왕과는 전혀 다른 성격으로 등장한다. 미천왕의 큰 아들이며 동생으로 고무가 있다. 싸움을 싫어하는 성격이기 때문에 보통 고구려의 왕족들은 무예를 우선해 배우는데도 불구하고 무예를 배우지 않았다. 미천왕이 양우의 고향으로 가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 때 고사유, 고무와 같이 가 두 사람의 행동을 보는데 고무는 건장한 장정들과 어울리며 술을 마시며 무예에 관해 이야기하는 반면, 고사유는 팔다리가 없는 병사들을 어루만져 주며 전쟁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을 위로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걸 본 미천왕 고을불은 고사유를 태자로 책봉하게 된다.

모용선비부와의 싸움에 임할 때 을불에게 전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모든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며 자신이 사신으로 모용부로 가겠다고 말한다. 모용부로 사신으로 가서 모용외와 만나 그에게 화친을 함으로써 모용부에게 이로운 점을 설파하였다. 하지만 모용황이 수하를 시켜 죽이려고 했지만 원목중걸 덕분에 살았으나 자신과 같이 온 나머지 사신 일행들이 죽어버리고 만다. 원목중걸로부터 모용황에 대해 듣게 된다. 을불이 죽은 후 왕위에 올랐고 아들이 태어나자 동생인 무에 의해 아들 이름을 구부로 짓는다. 무와 어머니인 아영이 독단으로 모용부를 멸망시키려 한 것에 분노해 화공으로 거의 죽을 뻔한 모용황을 구해준다. 모용황이 연나라 군사들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절대 싸우지 말라고 지시를 하여 신하들에 의해 어딘가로 감금되어 버린다. 감금되어 이제 자신의 뜻이 완전 틀렸다고 절망했을 때 아불정효가 자신을 찾아와 구부가 말했던 "상대방이 빰을 때리면 빰을 맞고 그냥 있는다"라고 말한 것을 이야기해주자 다시 한번 자신의 뜻을 굽히기로 하고 모용황에게 직접 찾아가 항복의 뜻을 전한다.

이후 신하들이 자기들 맘대로 백제에서 고구려로 망명한 사기와 그 일가족들을 백제쪽으로 보냈다는 말에 크게 분노해 처음으로 전쟁을 하겠다고 선언한다. 이후 구부한테 갑옷 입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말하며 구부에게 앞으로 5년간 전쟁을 하지 말아달라고 말한다.

백제군과의 싸움에서 직접 갑옷을 입고 전쟁터에 단신으로 나가 화살에 맞고 전사하고 만다. 사유의 죽음에 고구려 군사들도 분노해 백제군을 죽여버리려고 살기를 띄웠으며, 백제군이 수곡성에 들어오자 백성들도 사유의 죽음에 분노해 부여구에게 돌팔매질을 한다.

7.3. 웹툰 《삼국전투기》

《삼국전투기》에서는 비류 전투 후 약 100년간 고구려의 행보가 순탄치 않았다고 언급될 때 잠깐 등장한다. 검은 머리에 이마가 훤한 어딘지 유약해 보이는 인물로 등장. 어떤 군주라고 언급되지는 않지만 연에게 수도를 털리고 백제에게 군주가 전사했다는 걸 보아 고국원왕이 거의 확실하다.

비류 전투 편 막바지에 고구려의 행보를 보여 줄 때 살짝 등장. 선비족과 요동을 두고 끊임없이 대립했으며[23], 연에게 수도를 털리고, 화풀이로 백제를 공격했다가 군주가 전사하는 등 바닥을 쳤다고 묘사된다.

8. 둘러보기

파일:고구려 군기.svg
고구려 왕실의 계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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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제 하백
 
 
해모수
 
유화
 
 
 
부여 왕실 1대
동명성왕
 
 
 
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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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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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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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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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돌고
 
15대
미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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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 고림
 
 
17대
소수림왕
18대
고국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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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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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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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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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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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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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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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복남 고임무 고덕남 고덕무 공주
 
부흥
보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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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구려태자가 된 해가 314년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고국원왕은 300년대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사망 당시 60세 이후에 죽은 것이 된다.#[A] 음력 10월 23일, 율리우스력 11월 16일[3] 우산하 992호로 추정된다.[4] 일각에서는 안악 3호분을 고국원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고국원' 자체가 국강상과 마찬가지로 국내성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여겨진다는 점과 안악 3호분의 묘제 및 벽화에 중국식 문화의 영향이 짙게 남아있음을 고려하면 중국계 귀족 동수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A] [6] 당대 기록이라 할 수 있는 〈모두루 묘지명〉의 표기. #[7] 미천왕 시신과 납치된 모후를 돌려받기 위해 전연에 신하의 예를 취하면서 책봉받았다.[8] 염모의 손자 모두루광개토대왕 시기에 활동했으므로 염모 본인은 4세기 초중반에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시기에 국강상(國罡上)이라는 문구가 들어간 왕호를 사용했던 고구려 국왕은 고국원왕밖에 없다는 사실에 기반한 해석이다.[9]일본서기》에는 "누타(香岡) 스(上) 오리코케(王)" 등 고구려식 훈독을 음차한 표기가 일부 남아있다. 고구려어에서 '둑' 또는 '언덕'을 가리켰던 어휘는 '토(吐)'로 추정되므로, '강상(岡上)'과 '원(原)'이 같다고 볼 수 있다.[10] 고구려를 공격한 목적 자체가 훗날의 병자호란처럼 중원으로 가기 전에 후방을 밟아놓으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청 태종 홍타이지도 조선을 굴복시켰지만 멸망시키지는 않았다.[11] 그냥 황족도 아니고 섭정격인 태부(태재) 모용평이었다. 태재 모용평은 정치가로서의 능력이 빵점이어서 전연의 막장신세를 부추기는 역할을 했다.[12] 암석지대에 있고 물이 나오는 샘이 있다[13] 출처: 노태돈, 〈고구려 초기의 천도에 관한 약간의 논의〉 (한국고대사학회, 2012)[14] 여기서 사용한 '잔'은 먹고 남은 을 의미하는 '잔반(殘飯)'의 '잔' 자와 같다. 고구려인들이 백제를 비하해 '백제 떨거지 놈들'이라는 의미로 비방한 멸칭이다.[15] 북한이 허구헌날 '남조선 괴뢰'같은 표현을 쓰는것과 비교할 수도 있다.[16] 개로왕의 죽음이 고국원왕보다 더 비참한 것은 일국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어디에 매장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개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를 처형한 이들은 재증걸루고이만년이라는 이들로, 백제에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친 이들이었다.[17] 유시(流矢). 유탄과 똑같은 의미로, 노리고 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우연히 맞은 것이라는 뜻이다.[18] 고국원왕의 "고국원"이 이 뜻이다.[19] 물론 이 당시에는 남한 지역의 호남 평야, 김해 평야 등과 마찬가지로 북한의 대표적인 평야인 평양 평야, 재령 평야의 간척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현재의 해안선을 놓고 판단할 수는 없다.[20] 고국원왕이 근초고왕보다 즉위가 15년이나 빠른 데다 즉위 시점의 고구려가 다방면에서 백제를 압도하는 강대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근초고왕에게 압도당한건 다름 아닌 고국원왕의 자질 부족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다. 고국원왕 사망 직후인 소수림왕부터 황해도와 개성 지역에서 백제에 대한 공세를 시작하여 어느 정도 성과를 보았다는 점에서도 체급의 이점을 살리지 못한 고국원왕의 무능함이 드러난다.[21] 다만 고구려 입장에서 정말 신라와 백제를 온전히 병합하려 했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긴 하다.[22] 〈고국원왕 본기〉 및 《삼국사기》 〈잡지〉 중 고구려의 지리에 관한 기록에서는 고국원왕이 재위 13년 차에 평양동황성(平壤東黃城)에 옮겨 거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 이 성은 고려 서경 목멱산에 있었다고 하는데, 저자 김부식은 이 사실이 믿을 만한지 모르겠다고 기록했다.[23] 이 와중에 조선시대 선비마냥 복식을 갖춘 선비족이 냅다 갓 커터를 날리는 걸 보고 당황하는 개그씬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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