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23 16:37:15

모용인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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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둘러보기

1. 개요

慕容仁
(? ~ 344)

전연의 인물. 자는 부개(符愷). 아명은 천년(千年). 평주(平州) 창려군(昌黎郡) 극성현(棘城縣) 출신. 고조 무선황제 모용외의 3남으로 부인 단씨 소생. 태조 문명황제 모용황의 동복동생이자 모용한의 이복동생.

2. 생애

대흥 2년(319년) 12월, 모용인은 용맹과 지략을 겸비하고 있어 여러 전투에서 누차 공을 세웠고, 모용외가 서진의 평주자사 최비(崔毖)를 몰아낸 후 요동군을 장악하자 정로장군에 임명되어 요동을 지켰다. 요동에 부임한 모용인은 지역을 위무하고 이전부터 존재하던 관부와 시장에 손을 대지 않아 백성들의 생활이 다시금 안정을 되찾았다.

대흥 3년(320년) 3월, 고구려미천왕이 자주 요동을 쳐들어오자, 모용외는 모용한과 모용인을 보내 그들을 정벌하게 하였는데, 미천왕이 맹약을 청하여 이를 받아들이고 군대를 거두어 복귀하였다.

대흥 3년(320년) 12월, 고구려가 맹약을 깨고 다시 요동을 침범하자, 모용인은 고구려군을 반격하여 대파하였고, 이후로 고구려는 함부로 요동을 넘보지 못하였다.

대흥 4년(321년) 12월, 동진에서 요동으로 알자를 보내 모용외에게 인수(印綬)를 하사하고, 거기장군, 평주목, 요동공(遼東公)으로 삼아 휘하에 관속을 두는 것을 허하였다. 이때 모용한이 요동군의 양평(襄平)을 지켰고, 모용인이 평곽(平郭)을 지켰는데, 두 형제 모두 백성을 안무하니, 그 위엄과 은혜가 모용한이 제일이었고 모용인은 그에 버금갔다.

태녕 3년(325년) 2월, 후조의 왕 석륵우문부의 대인 우문걸득귀(宇文乞得龜)에게 관직과 작위를 하사하고, 모용부를 습격케 하였다. 모용외는 이를 영격하러 나서면서 세자 모용황에게 단부탁발부 군사를 배속시킨 뒤, 요동상 배억을 우익으로 삼고, 모용인을 좌익으로 삼았다. 우문걸득귀는 요수(澆水)를 낀 채로 모용황의 진격을 가로막으면서 조카 우문실발웅(宇文悉拔雄)을 따로 파견해 모용인을 막게 하였다. 모용인이 우문실발웅 참수하여 그의 군대를 격파하였고, 그대로 요수에서 우문걸득귀와 싸우던 모용황과 합류해 우문걸득귀마저 대파하였다. 우문걸득귀는 전장에서 이탈해 도망침으로써 자신의 군사들을 버렸고, 모용황과 모용인은 우문부의 국성(國城) 점거한 후 경기병을 추격대로 보내 우문걸득귀의 뒤를 쫓게 하였다. 그러나 우문걸득귀는 이미 멀리 도망간 상태라, 추격대는 300리 가량 달리다가 우문부의 보물들과 가축 백만 마리를 노획하였다. 이때 수만 명의 우문부 백성들도 모용부로 귀부하였다고 한다.

함화 8년(333년) 5월, 모용외가 사망하고 그 요동공 작위를 이은 모용황은 초기에 법률을 엄하고 각박하게 집행하여 무리의 인심을 얻지 못하였다. 평소 시기심이 많던 모용황은 부친 생전에도 모용한, 모용인, 모용소 3형제를 미워하였는데, 무리의 마음을 얻지 못하자 자연스럽게 당시 병사와 백성들이 잘 따르던 모용한과 모용인을 경계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 압박을 견디다 못한 모용한은 아들들을 데리고 모용부를 빠져나와 단부로 망명하였다.

함화 8년(333년) 10월, 아버지의 상사를 듣고 급히 평곽에서 극성으로 달려온 모용인은 볼일을 마치고, 동생 모용소를 만나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우리들은 평소 사군(嗣君: 모용황)께 교만하게 행동하여 많은 무례를 범하였다. 사군께서는 강직하고 엄하여 죄가 없는 사람조차 두려워하거늘, 하물며 죄가 많은 우리는 어찌 하면 좋으냐!"
이에 모용소가 답했다.
"우리는 모두 본처의 자식이므로, 우리에게도 국토를 나누어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형님께서는 전부터 병사들의 마음을 얻으셨고, 저는 극성 내에서 의심을 받지 않았으니, 그 틈을 이용해 제거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겁니다. 형님께서 거병하여 소식을 전할 때, 그 날 제가 성 안에서 내응하겠습니다. 우리의 거사가 성사되는 날에 제게도 요동을 나누어 주십시오. 남자로 태어나 한번 일을 벌였다가 실패하면 오로지 죽음만 있을 뿐, 차마 건위(建威: 모용한의 직책)처럼 타국에서 조용히 목숨을 지키는 일 따위는 할 수 없습니다."
모용인은 기꺼이 모용인의 말에 동의하고, 거병을 준비하기 위해 다시 평곽으로 돌아갔다.

함화 8년(333년) 11월, 모용인이 모용황에게 들키지 않게 몰래 서쪽으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일이 누설되어 어떤 자가 모용인과 모용소의 모반을 모용황에게 고변하였다. 모용황은 처음에 이를 믿을 수 없다 여겨 모용인에게 사자를 파견해 그 동향을 살피게 하였는데, 황수(黃水)를 건너고 있던 모용인은 일이 탄로났음을 깨닫고 모용황의 사자를 죽인 뒤, 재빨리 평곽으로 돌아가 작정하고 거병하였다.

이를 보고받은 모용황은 모용소를 사사함과 동시에 군사좨주 봉혁을 파견해 요동을 위무케 하였다. 그리고 현도(玄菟)태수 고후를 광무장군으로 삼아 5,000여 군사를 주고, 건무장군 모용유(慕容幼), 모용치(慕容稚), 광위장군 모용군(慕容軍), 영원장군 모용한(慕容汗), 사마 동수(冬壽)와 함께 평곽을 치게 하였다. 모용인은 평곽 북쪽 문성(汶城)에서 토벌군을 대파하여 모용유, 모용치, 모용군을 모두 사로잡았고, 과거 모용인을 섬겼던 적이 있던 동수는 그에게 투항하였다.

문성 전투의 승리로 요동군은 크게 동요하였고, 전(前) 대사농 손기(孫機)와 양평현령 왕영(王永)이 요동성을 들어 모용인에게 호응하니, 봉혁은 도저히 요동으로 갈 수 없어 다시 돌아왔다. 이에 동이교위 봉추(封抽), 호군 을일, 요동상 한교(韓矯) 등도 모두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로써 모용인은 요동군 전부를 장악하게 되었고, 단부를 비롯한 선비족의 여러 부들도 서로 모용인을 지지하였다.

함화 9년(334년) 2월, 사마 적해(翟楷)를 영 동이교위로 삼고, 전(前) 평주별감 방감(龐鑒)을 영 요동상으로 삼아 요동의 통치를 위임하였다.

함화 9년(334년) 4월, 표기장군, 평주자사, 요동공을 자칭하였다.

함화 9년(334년) 8월, 동진에 모용외의 사망 보고를 마치고 돌아오던 장사 왕제(王濟)는 모용인의 반란을 꿈에도 모른 채, 동진의 시어사 왕제(王齊), 알자 서맹(徐孟)과 함께 모용황을 진군대장군, 대선우, 평주자사, 요동공으로 삼는다는 조서를 들고 요동의 마석진(馬石津)에 배를 정박했다가 모두 사이좋게 모용인에게 붙잡혀 억류당했다.

함화 9년(334년) 11월, 모용황이 요동 정벌을 선포하고 친히 양평에 도착하자, 요동성 내에서 왕급(王岌)이 밀서를 보내 투항을 청하였다. 모용황은 투항을 받아들인 후 진격하여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요동성을 탈환하였고, 동이교위 적해와 요동상 방감은 제각기 홀로 말에 올라 도망치면서 거취(居就), 신창(新昌) 등 여러 현들도 아울러 항복하였다.

함화 9년(334년) 12월, 모용인은 군대를 보내 신창을 빼앗으려 했지만, 모용황의 독호 왕우(王寓)가 그들을 무찌르고 신창의 백성들을 양평으로 이주시켰다.

함강 원년(335년) 10월, 억류했던 동진의 사신 왕제 등을 풀어주면서 다시 건강(建康)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러나 왕제 등은 동진으로 가지 않고, 곧바로 극성으로 가서 모용황에게 조서를 전했다.

함강 원년(335년) 12월, 단부와 우문부에서 각기 사자를 파견해 평곽성 밖에서 머물렀다.이때 모용황의 장하독 장영(張英)이 100여 기병을 이끌고 지름길을 통해 이들을 습격하여 우문부의 사자 10여 명을 살해하고, 단부의 사자를 사로잡아 돌아갔다.

함강 2년(336년) 정월, 모용황이 사마 고후의 계책을 채택해 동생인 군사장군 모용평 등을 거느리고, 창려(昌黎) 동쪽에서 얼어있는 바다를 건너 약 300여 리 이동한 끝에 역림구(歷林口)에 이르렀다. 모용황은 진군 속도를 높이기 위해 치중을 버리고, 병사들을 경무장 시킨 상태로 달려가 마침내 평곽성 7리 밖에 도착하니, 모용인의 척후 기병이 이를 보고 모용인에게 보고하였다. 일찍이 장영이 우문부와 단부의 사자들을 잡아갈 때 그 뒤를 끝까지 추격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던 모용인은 또 장영이 쳐들어온 것이라 착각하고, 측근들을 향해
"오늘 이곳에 온 이상 말 한 마리조차 무사히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라 소리치며, 모든 군사들을 내몰아 평곽성 서북쪽에 포진시켰다. 그때 일전에 모용인에게 사로잡혔던 광위장군 모용군이 휘하 부대를 이끌고 모용황에게 투항하자, 이를 눈앞에서 본 모용인의 병사들은 크게 동요하였다.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던 모용황은 군사들을 휘몰아 모용인의 군대를 공격해 궤멸시켰다.

어이없게 패배한 모용인은 도주를 시도했지만 부하들의 배반으로 붙잡혀 모용황에게 바쳐졌다. 이에 모용황은 모용인을 배반한 무리를 모두 끌어내 주살하고, 모용인에게는 자결을 명하였다. 모용인이 신임하던 부하 정형(丁衡), 유의(游毅), 손기 등도 참수당했고, 모용인의 참모인 왕영 또한 자결하였으며, 모용유, 모용수, 동수, 곽충(郭充), 적해, 방감 등은 동쪽으로 달아났다. 동수와 곽충은 성공적으로 고구려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으나, 적해와 방감은 모용황의 추격병에게 살해당했고, 모용유는 도망치다 말고 돌아와 용서받았다. 모용인의 측근을 대충 정리한 모용황은 이전에 펼치던 혹독한 정치를 반성하고 있었으므로, 모용인에게 동조했던 나머지 관리와 백성들은 사면하였다.

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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