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11 00:28:49

저거목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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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량 北凉
초대 제2대 제3대
문왕 무선왕 애왕
고창북량 高昌北凉
제4대 제5대
척왕 무척왕
}}}}}}}}}

<colbgcolor=#39A78E><colcolor=#ece5b6>
북량 제3대 국왕
저거목건 | 沮渠牧犍
출생 연대 미상
후량 량주 임송군 노수호
(現 간쑤성 장예시)
사망 447년 (향년 미상)
북위 유주 대군 평성현
(現 산시성 다퉁시)
능묘 원릉(元陵)
재위기간 북량 왕세자
433년 4월 ~ 433년 4월
제3대 군주 | 하서왕
433년 4월 ~ 439년
북위 하서왕
439년 ~ 44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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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9A78E><colcolor=#ece5b6> 성씨 저거(沮渠)
목건(牧犍), 무건(茂虔)
부모 부왕 태조 무선왕
형제자매 10남 1녀 중 3남
배우자 폐후 이경애, 황후 탁발씨, 이씨
자녀 1남 2녀
작호 왕세자(王世子)
→ 하서왕(河西王)
시호 애왕(哀王)
연호 승화(承和, 433년 ~ 439년)
}}}}}}}}} ||
1. 개요2. 생애3. 북량의 멸망 이후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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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오호십육국시대의 16국 중 하나인 북량의 제3대 군주이자 마지막 군주.

2. 생애

저거목건은 북량의 창업군주인 저거몽손의 3남으로 태어났다. 저거목건이 즉위하기 이전에 저거몽손의 태자였던 저거정덕(沮渠政德)과 저거흥국(沮渠興國)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1] 형들의 죽음으로 사실상 장남이 되어버린 저거목건은 신하들의
주대에 의해 저거몽손의 태자로 책봉되었고, 433년에 저거몽손이 세상을 떠난 뒤에 북량의 제3대 군주로 즉위했다.

저거목건은 즉위한 후 연호를 승화(承和)로 바꾸었다. 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북위 및 남조 유송과의 외교관계를 중시했다. 저거목건은 북위와 유송에 즉위 사실을 알렸으며, 북위와 유송은 각각 그를 하서왕으로 봉하고, 여러 직위를 주었다.

저거목건은 부왕의 유명으로 누이 흥평공주(興平公主) 저거씨를 북위 제3대 세조 태무제 탁발도의 후궁으로 보냈고, 그녀는 우소의(右昭儀)로 봉해졌다. 저거목건은 선비들을 예우하며 정사를 잘 이끌었다. 그러자 태무제 탁발도는 북량과의 수교를 튼튼히 할 생각으로 437년 자신의 여동생인 무위공주(武威公主) 탁발씨를 저거목건에게 시집보냈다. 저거목건은 왕후 이씨[2]를 폐출시키고, 무위공주 탁발씨를 왕후로 삼았다. 하지만 당시 저거목건은 형수인 이씨(李氏)와 통간하며 그녀를 총애하고 있었기 때문에 탁발왕후를 냉대했다. 흉노는 전통으로 인해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함께 사는 걸 당연시했다. 저거목건은 부인인 무위공주 탁발씨를 보살처럼 모시면서 매일 형수 이씨와 통간했다. 이씨는 탁발왕후를 독살하려고 음식물에 독약을 풀었으며, 이 사실을 안 태무제 탁발도가 어용 전거에 태의를 태워 급송함으로써 무위공주를 간신히 살려냈다. 그러나 무위공주는 중독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대로한 태무제 탁발도가 매제인 저거목건에게 압력을 가해 형수 이씨를 쫓아내게 하자 저거목건은 이씨를 주천(酒泉)에 은닉했다.

이를 계기로 태무제 탁발도는 북량을 멸할 생각을 품게 되었다. 탁발도는 북량이 유연과 손을 잡으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439년 북량으로 쳐들어갔다. 저거목건은 유연에 원병을 요청하고, 동생 저거동래(沮渠董來)로 하여금 북위의 군대에 맞서 싸우게 했다. 하지만 저거동래의 군대는 북위의 군대에 패배했고 도성인 고장(姑臧)이 포위되었다. 저거목건은 유연이 북위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북위가 군대를 철수시키기를 기다리며 성을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카인 저거조(沮渠祖)가 북위군에 투항해 이 사실을 알렸고, 태무제 탁발도는 병력을 나누어 고장을 계속 포위하도록 했다. 결국 저거목건은 5,000여 명의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항복했으며, 이로써 북량은 멸망했다. 저거목건은 항복한 뒤 북위의 도성인 평성(平城)으로 끌려갔으나, 태무제 탁발도의 매제라는 신분 때문에 하서왕과 정서대장군 등의 지위는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나 447년 저거목건은 과거 고장성이 함락될 때 막대한 재물을 빼돌렸으며, 무고한 사람들을 함부로 죽였다는 고발을 받았다. 또한 그의 누이 흥평공주 저거씨도 황궁내에서 금지된 술법을 일삼는다고 고발되었다. 이를 전해들은 태무제 탁발도는 저거목건 부자와 흥평공주 등 저거목건의 일족을 저거조만 빼고 모두 죽였다.

북량의 멸망으로 중국 북방에 난립했던 5호 16국시대가 막을 내렸다. 100여 년 만에 북중국이 북위로 통일된 셈이었다. 이후 북쪽의 통일 왕조인 북위와 남쪽의 통일 왕조인 유송이 남북으로 대립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중국 역사가들이 흔히 말하는 이른바 남북조시대이다.

3. 북량의 멸망 이후

한편 북량이 멸망한 이후 저거목건의 아우인 저거무휘(沮渠無諱)가 북위에서 도망쳐 주천에서 반란을 일으키면서 북량의 계승을 선언하고 고창에 할거했지만, 2대 만에 유연에게 멸망당했다.(460)

4. 둘러보기

북량의 역대 군주
2대 태조 무선왕 저거몽손 제3대 애왕 저거목건 북위 3대 황제 세조 태무황제 탁발도
제4대 척왕 저거무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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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량 北凉
초대 제2대 제3대
문왕 무선왕 애왕
고창북량 高昌北凉
제4대 제5대
척왕 무척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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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거몽손의 장남인 저거정덕은 423년 유연의 공격을 막다가 전사했고, 차남인 저거흥국은 431년 북하가 멸망할 때 살해되었다.[2] 이경애(李敬爱)는 북량의 제3대 애왕 저거목건의 첫 번째 왕후였다. 그녀는 원래 서량의 공주로, 부친 이고(李暠)는 서량의 태조 무소왕이었고, 모친은 윤씨 부인(尹氏夫人)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