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11 07:32:04

요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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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진 제2대 황제
요흥 | 姚興
묘호 고조(高祖)
시호 문환황제(文桓皇帝)
연호 황초(永和, 394년 ~ 399년)
홍시(弘始, 399년 ~ 416년)
요(姚)
흥(興)
자략(子略)
생몰 기간 366년 ~ 416년
재위 기간 요진의 황제
394년 ~ 416년
부친 요장(姚萇)

1. 개요2. 생애
2.1. 전진(前秦)을 멸망시키다.2.2. 대외팽창2.3. 불교를 받아들이다.2.4. 쇠퇴2.5. 후계자 문제와 붕어
3. 평가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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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오호십육국시대의 16국 중 하나인 후진의 제2대 황제.

2. 생애

2.1. 전진(前秦)을 멸망시키다.

366년에 후진의 제1대 황제인 태조 무소제 요장(姚萇)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384년에 요장이 만년진왕(萬年秦王)이라 칭하며 후진을 건국하자 장안을 탈출하여 요장에게 왔고, 요장은 그를 태자로 책봉했다. 요장이 전진의 제5대 황제인 태종 고황제 부등(苻登)과 싸울 때, 장안의 방어를 맡았으며, 양희(梁喜)와 범욱(范勖)에게서 경서를 배웠다.

393년, 요장이 붕어하자 그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스스로 대장군에 올라 전진을 공격했다. 394년에 부등은 총력을 기울여 후진을 공격했으나 패배했는데, 요흥은 그제서야 요장의 죽음을 발표하고 제위에 올랐다. 이후, 부등을 추적하여 그를 마모산에서 죽인 요흥은 전진을 멸망시키고 관중의 패권을 장악했다.

2.2. 대외팽창

부등을 죽인 요흥은 숙부 요서요석덕의 의견을 따라 내치를 안정시키고, 선비 탁발부북위(北魏) 및 선비 모용부후연(後燕)과 화친하며 외치를 다졌다. 그리고나서 본격적으로 정복전쟁을 시작했는데 396년에는 전진 세력의 근거지였던 상규(上邽)를 점령했으며, 397년에는 한족의 동진(東晉)이 차지하고 있었던 호성(湖城)을 점령했고, 399년에는 고도 낙양(洛陽)을 점령해 한수(漢水)와 회하(淮河) 이북 지역을 석권했다. 400년에는 농서를 공격하여 선비 걸복부서진(西秦)을 멸망시켰으며 401년에는 저족 여씨의 후량(後涼)을 공격하여 복속시켰다. 하지만, 북위와 외교마찰이 생기면서 공격받았으며 그 결과 402년에 북위를 공격했으나, 시벽(柴壁)에서 패배했다. 403년에는 다시 후량을 공격하여 멸망시켰으며 한족 이씨의 서량(西凉), 노수호족 저거씨의 북량(北凉), 선비 독발부남량(南凉)을 모두 속국으로 만들었다. 405년에는 저족이 세운 후구지(後仇池)도 복속시켰고, 407년에는 북위와 화의를 맺었다. 또한 남연(南燕)의 황제 모용초(慕容超)의 모친 단씨와 부인 호연씨를 송환하는 조건으로 남연도 속국으로 만들었다.

2.3. 불교를 받아들이다.

고조 문환제 요흥은 불교에 심취하여 401년 후량에 머물고 있었던 구마라습의 신병을 확보하여 장안으로 데려왔다. 요흥은 구마라습을 국사로 삼고 각지에 사원을 건설했다. 또한 불경을 번역하게 하고 대승정(大僧正)을 임명하기도 했다.

2.4. 쇠퇴

405년 말, 동진(東晉)의 실권을 장악한 유유(劉裕)가 한수 일대의 12개 군을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요흥은 쓸데없는 대결을 피하기 위해 이를 승낙했는데, 이후 복속했던 세력들이 점차 이탈하기 시작했다. 406년에는 남량에게 양주(凉州)의 수도 고장(姑臧)을 빼앗겼고, 407년에는 남흉노(南匈奴) 철불부(鐵弗部)의 혁련발발(赫連勃勃)이 북하(北夏)를 세웠으며, 남량(南涼)의 독발녹단(禿髮傉檀)이 양왕(涼王)을 칭하면서 남량, 북량, 서량에 대한 후진의 영향력을 다시 상실했다. 409년에는 멸망시켰던 걸복부의 서진(西秦)이 독립했고 구지도 자립했다. 410년에는 후촉(後蜀)과 연합하여 동진을 공격했으나 패배했다. 412년에는 혁련발발이 진주를 공격해 후진군을 무찌르고 진주자사 요숭과 후장군 요평을 죽였다. 한계를 느낀 요흥은 북위와 인척 관계를 맺어 이를 수습하려고 했다.

2.5. 후계자 문제와 붕어

414년, 요흥이 병으로 쇠약해지자 그의 아들들이 제위 계승을 둘러싸고 대립했다. 요흥은 태자인 요홍(姚泓) 대신, 요필(姚弼)을 총애했는데, 요필은 부황 요흥의 병세가 심해지자 장안에서 정변을 일으키려 했고, 다른 형제들이 이에 맞섰다. 문제는 병에서 호전된 요흥이 요필을 죽이지 않고, 직위를 빼앗는 것으로 처벌을 대신했다는 점이다. 기세등등해진 요필은 415년에 다시 정변을 일으켰다가 용서받았고, 416년에는 요흥이 순시를 간 틈을 타 세 번째 정변을 일으켰는데, 이번엔 요흥도 요필을 용서하지 않고, 병든 몸을 이끌고 나서서 손수 반란을 진압한 후 요필을 처형했다. 요흥은 반란을 진압한 다음날 51세의 나이로 붕어했으며, 우릉(偶陵)에 매장되었다.

3. 평가

후진의 전성기를 연 군주였으나, 일을 벌여 놓기만 할 뿐, 지키는 데는 미흡하여 자신이 이룩한 성과가 자신의 대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게다가 후계자 문제 또한 말끔히 처리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한족 사마씨의 서진, 남흉노 유씨의 전조, 갈족 석씨의 후조, 한족 사마씨의 동진, 저족 부씨의 전진까지 3대 100여 년에 걸친 핍박을 견뎌내고 세워진 강족의 국가 후진은 요흥의 사후 1년 만에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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