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8 20:46:40

모용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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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33067><colcolor=#ece5b6>
전연 말대 황제
헌무제 | 獻武帝
출생 350년
모용부 창려군 극성현
(現 랴오닝성 진저우시 이현)
사망 384년 12월 (향년 34세)
전연 업성
(現 허베이성 한단시)
능묘 미상
재위기간 전연 왕세자
341년 ~ 348년 9월
제3대 황제
360년 2월 23일 ~ 37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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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33067><colcolor=#ece5b6> 성씨 모용(慕容)
위(暐)
부모 부황 열조
모후 경소황후
형제자매 8남 1녀 중 3남
배우자 가족혼씨
경무(景茂)
작호 중산왕(中山王) → 신흥후(新興侯)
시호 남연: 헌무황제(獻武皇帝)[1]
서연: 유황제(幽皇帝)[2]
연호 건희(建熙, 360년 ~ 37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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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일생3. 둘러보기(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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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연의 제3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

휘는 위(暐), 자는 경무(景茂)로 시호는 유황제(幽皇帝)였다.

전연의 제2대 열조 경소제 모용준의 3남으로, 어려서 제위에 올랐으나 숙부인 모용각의 섭정을 받아 전연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하지만 모용각이 죽고 뒤이어 집권한 숙조부 모용평의 부패와 전횡으로 전연은 점점 쇠약해졌고, 마침내 저족 왕조인 전진의 제3대 황제인 세조 선소제 부견이 한족 출신의 명재상이자 명장인 왕맹을 앞세워 전연을 대침공하자 모용위는 전진에 항복하여 전연은 멸망했다. 전진에서 신흥후로 책봉된 모용위는 이후 비수대전(383. 11)의 패배로 전진이 몰락하자 내부에서 복국을 도모했으나 발각되어 그 일족과 함께 몰살되었다.

2. 일생

처음에는 중산왕(中山王)에 봉해졌다가, 이내 형들이 요절하여 황태자가 되었다. 부황 모용준이 붕어하자 360년에 고작 11세의 나이로 제위에 올랐다. 모용준은 죽으면서 동생 모용각(慕容恪), 숙부 모용평(慕容評), 그리고 원로 공신 모여근(慕輿根)에게 유언을 내려 후사를 부탁했는데, 따라서 이 셋이 각기 3공의 자리를 나누어 맡고, 어린 황제인 모용위를 보좌하게 되었다.

파일:전량-전진-전연-동진.jpg

그 중에서도 숙부 모용각이 태재(太宰)로 섭정을 맡아 전권을 대리하게 되자, 여기에 불만을 품은 모여근이 모용각과 유제 모용위 사이를 이간질하고, 종국에는 둘 다 죽인 후 자신이 신왕조의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품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황제 모용위는 오히려 모여근의 음모를 간파하고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진작부터 모여근의 역심을 알고 있었던 모용각이 자초지종을 까발리면서 모여근은 온 가족이 떼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이 일로 전연의 조정에는 한동한 공포 정국이 조성되었지만, 모용각이 앞장서서 태연자약한 모습을 보이자 이것도 해소되었다.

이후 모용각의 섭정하에 전연은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모용각이 죽고, 모용부 제4대 대인이었던 모용외의 아들이자 태조 문명제 모용황의 동생이며, 제2대 열조 경소제 모용준의 숙부이고, 제3대 황제 모용위의 숙조부인 모용평이 태재(태부)가 되었는데, 그는 무능한데다가 부패하기까지 해서 전연은 점점 쇠퇴해졌다. 결국 전진(前秦)의 부견왕맹을 앞세워 전연을 침공하자, 전연은 멸망하고 모용위는 부견에게 항복했다. 나라를 망친 간신 모용평은 고구려로 달아났으나 복수의 그날만을 위해 이를 뿌드득 갈고 있었던 고국원왕에게 그대로 묶여 전진에 진상되었다.
파일:전진-동진.png
전진(분홍색)의 최대 영역(376)
모용위는 부견의 휘하에서 신흥후에 임명되었다. 383년 11월에 일어난 비수대전에서는 후방에 있었으나 이후 태조 문명제 모용황의 5남인 숙부 모용수가 거병하여 전연을 재건한 후연을 세우자 전진의 수도 장안에서 감시를 받는 처지에 놓였다. 그후 같은 모용선비족인 서연모용충(慕容沖)이 장안을 공격할 때 선비족 1,000여 명과 함께 모의해 성 안에서 부견을 공격하려다가 들켜, 부견에 의해 목숨을 잃고 모용씨 일족은 학살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750px-Map_of_Sixteen_Kingdoms_6.png
비수대전 이후 중국의 형세[3]
부견이 모용수에게는 마치 영웅이 영웅을 알아보듯 관대했다는 걸 생각하면 의외의 장면이다. 하지만 사실 부견도
"내가 그대를 대우한 것이 어떠했기에 이런 뜻을 품었는가?"
라고 모용위에게 말했다. 그때 모용위의 가신인 모용숙이
"가문과 나라의 일이 중한데 어찌 의기(意氣: 은혜)를 논하겠소!"
라고 대꾸하자 격분한 부견에게 끔살되었다.#

이때의 모용씨 학살극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것은 모용수의 서손인 모용성 밖에는 없었다. 모용위의 동생 모용홍이 세운 서연에선 모용위를 유황제로 추증했고, 약 14년 뒤 숙부인 모용덕이 세운 남연에선 헌무황제로 추증했다.

3. 둘러보기(계보)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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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제기(帝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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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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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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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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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덕 모용초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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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연의 초대 황제인 세종 헌무제 모용덕이 추증한 시호이다.[2] 서연의 초대 황제인 숙종 열문제 모용홍이 추증한 시호이다.[3] 파란색은 선비 걸복부의 서진, 분홍색은 저족 여씨의 후량, 후량 남쪽의 무색인 곳은 선비 모용부토욕혼, 녹색은 강족 요씨의 후진, 후진 동쪽은 선비 모용부의 서연, 서연 동쪽은 선비 모용부의 후연, 후연 북쪽은 선비 탁발부북위, 북위 북쪽은 튀르크계 고차(퇼레스), 남쪽의 노란색은 한족 사마씨의 동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