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3 08:22:02

모용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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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33067><colcolor=#ece5b6>
전연 제3대 황제
모용위 | 慕容暐
출생 350년
모용부 창려군 극성현
(現 랴오닝성 진저우시 이현)
사망 384년 12월 (향년 34세)
전연 업성
(現 허베이성 한단시)
능묘 미상
재위기간 전연 황태자
341년 ~ 348년 9월
제3대 황제
360년 2월 27일 ~ 37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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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33067><colcolor=#ece5b6> 성씨 모용(慕容)
위(暐)
부모 부황 열조
모후 경소황후
형제자매 8남 1녀 중 3남
배우자 가족혼씨
경무(景茂)
작호 중산왕(中山王) → 신흥후(新興侯)
시호 남연: 헌무황제(獻武皇帝)[1]
서연: 유황제(幽皇帝)[2]
연호 건희(建熙, 360년 ~ 37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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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태자 시절2.2. 재위기
2.2.1. 모용각의 보정2.2.2. 모용평의 득세2.2.3. 환온의 제3차 북벌2.2.4. 모용수의 망명2.2.5. 전연의 멸망
2.3. 최후
3. 둘러보기(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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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연의 제3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

휘는 위(暐), 자는 경무(景茂)로 시호는 유황제(幽皇帝)였다.

전연의 제2대 열조 경소제 모용준의 3남으로, 어려서 제위에 올랐으나 숙부인 모용각의 섭정을 받아 전연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하지만 모용각이 죽고 뒤이어 집권한 숙조부 모용평의 부패와 전횡으로 전연은 점점 쇠약해졌고, 마침내 저족 왕조인 전진의 제3대 황제인 세조 선소제 부견이 한족 출신의 명재상이자 명장인 왕맹을 앞세워 전연을 대침공하자 모용위는 전진에 항복하여 전연은 멸망했다. 전진에서 신흥후로 책봉된 모용위는 이후 비수대전(383. 11)의 패배로 전진이 몰락하자 내부에서 복국을 도모했으나 발각되어 그 일족과 함께 몰살되었다.

2. 생애

2.1. 태자 시절

원새 3년(354년) 4월, 경소제 모용준이 여러 황족들에게 작위를 수여하면서 모용위도 중산왕(中山王)에 봉해졌다.

광수 원년(357년) 2월 23일[3], 경소제가 차남인 중산왕 모용위를 태자로 삼아, 요절한 태자 모용엽(慕容曄)의 자리를 대신하였다.

광수 3년(359년) 3월, 경소제가 포지(蒲池)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분위기가 무르익자 시를 읊으며 경전과 역사에 대해 담론하였다. 그러다 주나라 영왕의 태자 진(晋)에 관한 화제가 나오자, 경소제는 여러 신하들을 돌아보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과거 위무제가 창서(倉舒)를 추모하며 애통해 하고, 손권손등을 애도함이 끝이 없었는데, 짐은 늘 이 두 임금이 빼어난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해 대아(大雅)의 체통을 잃었다고 여겼었다. 하나, 경선(景先, 모용엽의 字)을 잃은 이래로 짐의 수염과 머리카락이 중백(中白)이 되고서야 비로소 두 임금이 족히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경들은 경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짐이 그를 위해 애도하는 것이 장래에 괴이한 일로 남지 않겠는가?"
그때 사도 좌장사 이적이 대답하며 말했다.
"헌회태자께서 동궁에 계실 적에 신은 중서자(中庻子)로서 황송하옵게도 가까이에서 모셨기에, 태자의 성질(聖質)과 지업(志業)을 신은 실로 감히 모르지 않습니다. 신이 듣기로 '도(道)가 갖추어지고 허물이 없는 것은 오직 성인(聖人)뿐이다.'라 하였는데, 돌아가신 태자께서는 여덟 가지 큰 덕(德)이 있었으며, 결점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모용준이 말했다.
"경의 말은 지나치나, 시험삼아 말해보아라."
이적이 다시 말했다.
"지극한 효도는 본래의 성품에서 비롯되어 도(道)와 하나가 된다 하였으니, 이것이 첫번째 덕입니다. 총명하고 민첩하며, 지혜롭게 깨닫고, 기민한 생각이 물 흐르는 듯하니, 이것이 두번째 덕입니다. 침착하고 굳건하며, 이치를 잘 판단하고 깊은 곳까지 이르니, 이것이 세번째 덕입니다. 아첨을 미워하고 사물에 밝으며, 우아하고 기쁜 마음으로 직언을 받아들이니, 이것이 네번째 덕입니다. 배우기를 좋아하고, 현자를 사랑하며,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이것이 다섯번째 덕입니다. 영명한 자질이 옛 사람보다 낫고, 재주와 업적이 시대를 초월하였으니, 이것이 여섯번째 덕입니다. 겸손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스승을 존경하며, 도(道)를 중시하니, 이것이 일곱번째 덕입니다.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베풀기를 좋아하며, 열심히 백성의 고통을 돌보니, 이것이 여덟번째 덕입니다."
이를 들은 모용준이 말했다.
"비록 경이 기리며 칭찬하기 위해 한 말이기는 하나, 이 아이가 살아 있었다면 짐이 죽어도 걱정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짐은 당(唐), 우(虞)처럼 덕있는 자에게 양보해 천하를 다스리게 할 수는 없으나, 삼왕(三王)과 가깝도록 그들을 본받아 대대로 전수할 것이다. 경무(景茂, 모용위의 字)는 아직 어려서 기예(器藝)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는데, 경은 이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적이 말했다.
"태자의 천부적인 자질은 어린 나이임에도 총명하여 나날이 성경(聖敬)이 높아지고 있으나, 앞서 언급한 팔덕(八德)을 지니지 않았고, 두 가지의 결점을 아직 고치지 않으셨습니다. 두 가지의 결점이란 평소에 밖에 나가셔서 사냥하는 것을 좋아하시고, 음악을 지나치게 좋아하신다는 점인데, 이것들은 모두 해로운 행실입니다."
이에 모용준이 모용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백양(伯陽, 이적의 字)의 말은 약석(藥石)과도 같이 은혜로운 말이다. 너는 마땅히 그것들을 경계하거라."
그러나 모용위는 이를 무척 못마땅하게 여겼다.

2.2. 재위기

2.2.1. 모용각의 보정

광수 4년(360년) 정월 25일[4], 부황 경소제 모용준이 병으로 붕어하고, 그로부터 4일 후에 고작 11세의 나이로 제위에 올랐다. 모용준은 죽으면서 동생 모용각, 숙부 모용평, 그리고 원로 공신 모여근에게 유언을 내려 후사를 부탁했는데, 따라서 이 셋이 각기 3공의 자리를 나누어 맡고, 어린 황제인 모용위를 보좌하게 되었다. 이때 모용위는 경내에 대사면을 내려 사형을 면하게 하였으며, 연호를 '건희(建熙)'로 바꾸었다.

건희 원년(360년) 2월, 모용위는 어머니 가족혼씨(可足渾氏)를 황태후로 존봉하고, 태원왕 모용각을 태재(太宰)•녹상서사(録尚書事)로 삼아 주공(周公)의 일을 행하게 하고, 모든 정사를 전담하게 하였다. 상용왕 모용평을 태부(太傅)로, 양무를 태보(太保)로, 모여근을 태사(太師)로 임명하여 조정을 보좌하게 하였다. 나머지 문무(文武)의 여러 신하들은 각각 차등 있게 관직에 임명되었다.

모용위는 성격이 나약하여 나라의 모든 정사를 모용각에게 맡겼는데, 모여근은 선조들을 섬길 때의 공훈을 자랑하며 모용각에게 마음속으로 복종하지 않았고, 몰래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다. 이에 모용각은 모용평과 은밀히 협의하여 모여근의 죄상을 상소하고, 우위장군 부안(傅顏)에게 명령하여 궁궐 내에서 모여근을 체포해 처형하고, 그의 아내와 자식 및 동조자들을 함께 처단하였다. 이후 경내에 다시 대사면을 내려 사형을 면하게 하였다.(모여근의 난)

건희 원년(360년) 3월 6일[5], 경소제 모용준을 용릉(龍陵)에서 장사 지냈다. 당시 경소제가 전쟁을 위해 징발한 여러 군국의 병사들은 연나라 조정에서 일어나는 잦은 혼란으로 인해 서로 놀라고 불안해하며 자발적으로 흩어져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로 인해 업성(鄴城)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길은 차단되고 막혀버렸고, 민심이 안팎으로 흉흉해졌다. 그러나 모용각은 평소와 다름없이 태연하게 정무에 힘쓰면서, 오왕 모용수를 사지절•정남장군•도독하남제군사(都督河南諸軍事)•연주목(兗州牧)•형주자사(荊州刺史)로 임명하고, 양국(梁國)의 여대(蠡臺)에 주둔하게 하였다. 또, 손희영(孫希泳)의 아들 손단(孫單)은 병주자사(并州刺史)로 삼고, 부안은 호군장군으로 삼아 기병 20,000기로 하남(河南) 지역을 순시하게 하였다. 이들이 기병대를 이끌고 임회(臨淮)까지 순시한 후에 돌아오니, 경내는 다시 안정되었다.

건희 원년(360년) 4월, 태재 모용각이 손단을 안문(雁門) 태수로 삼았다.

건희 원년(360년) 11월, 태재 모용각이 이적을 상서우복야로 삼으려 하였으나, 모용위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모용각이 거듭 청하자, 모용위가 말했다.
"국가의 모든 중요한 정무는 모두 백양(伯陽) 숙부 한 사람에게 맡겨져 있으나, 이번 일만큼은 나 모용위가 독단적으로 결정하고자 하오."
그리고는 이적을 장무(章武) 태수로 내보냈다. 이적은 결국 근심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건희 2년(361년) 정월 28일[6], 진시[7]에 달이 위수(危宿)에 이르렀다. 점성가 태백(太白)이 이를 보고 예언하였다.
"천하가 흩어질 징조로다."

건희 2년(361년) 2월, 평양(平陽)의 사람들이 군(郡)을 들어 연나라에 항복해 왔다. 모용위는 단강(段剛)을 평양태수로 임명하고, 독호 한포(韓苞)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평양을 수비하게 하였다.

당시 방사(方士) 정진(丁進)은 모용위의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그는 태재 모용각에게도 아첨하여 총애를 얻고자 하였다. 그가 모용각에게 접근해 태부 모용평을 죽이라 부추기자, 모용각은 크게 분노하여 정진을 체포해 처형할 것을 상주하고, 끝내 그를 죽였다.

건희 2년(361년) 3월, 경소제가 임명한 녕남장군 겸 하남태수 여호(呂護)가 야왕(野王)을 점거하고 몰래 동진 측과 내통하였다. 동진에서는 여호를 전장군•기주자사(冀州刺史)로 임명하였고, 여호는 몰래 거병하여 연나라의 수도 업(鄴)을 습격하려 했으나, 그 일이 사전에 발각되었다. 이에 태재 모용각은 50,000 군사를 이끌고 여호를 토벌하기 위해 출병하였고, 관군장군 황보진에게 10,000 군사를 주어 나란히 진격하게 하였다. 군대가 야왕에 이르렀을 때, 호군장군 부안이 모용각에게 말했다.
"여호는 궁지에 몰린 도적이며, 그 군세는 임시로 모인 것입니다. 왕의 군대가 이미 이곳에 도착하니, 적의 상하 모두 사기가 꺾여 감히 병력을 이끌고 중로(中路)에 나와서 대적하지 못하고, 그저 사마귀처럼 무모하게 나서려는 마음만 품고 있습니다. 이는 곧 병사들의 혼을 위축시켜 패망으로 이끄는 길입니다. 전에 광고(廣固)는 지형이 험준하여 방어는 쉽고 공격은 어려웠기에, 전하께서 장기적으로 포위하는 것이 이치에 맞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적의 형세는 그때와 다르니, 속히 공격하여 많은 비용을 절감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모용각은 이에 대해 답하였다.
"여호는 노련한 도적으로, 이미 많은 변란을 겪어왔소. 그의 방어 태세를 보면 쉽게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소. 얼마 전 우리가 여양(黎陽)을 공격할 때, 정예 병사를 많이 잃었으나 성을 함락하지 못해 스스로 수모를 당하고 말았소. 지금은 그들을 포위하여 성 밖의 나무를 채취하는 길을 차단한다면, 성 안에는 식량이 고갈될 것이며, 그들은 외부에서 구원도 받지 못할 것이오. 우리는 깊은 도랑과 높은 보루를 쌓고 앉아서 지키며 병사들을 쉬게 하고, 높은 관직과 귀중한 보물로 적의 내부를 이간시킨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세력은 저절로 약해질 것이오. 이리하여 그들의 허점이 드러나면 우리는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쉽게 그들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오. 굳이 많은 병사를 희생시키면서 하루아침의 성과를 추구할 필요가 없소."
그리하여 모용각은 긴 포위망을 구축하고 성을 지켰다.

건희 2년(361년) 4월, 동진의 환온이 동생인 건위장군 환활을 파견해 허창(許昌)을 점령하게 하였다. 연나라의 진남장군•청주자사(靑州刺史) 모용진(慕容塵)이 맞섰으나, 환활이 이끄는 동진군에게 패배하였다.(허창 전투)

건희 2년(361년) 7월, 모용각이 야왕을 포위한지 수개월이 지났을 무렵, 여호는 그의 장수 장흥(張興)으로 하여금 정예 병사 7,000명을 이끌고 출전하게 하였으나, 부안이 장흥을 격파해 참수하였다. 이로써 성 안이 점점 더 압박을 받게 되니, 황보진은 부장들에게 경고하며 말했다.
"여호는 궁지에 몰렸으니, 반드시 빈틈을 노려 탈출을 시도할 것이다. 우리 군사들은 대부분 피로하고 무기와 갑옷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으니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이후 황보진은 방패를 많이 만들게 하고, 밤에 순찰을 강화하였다. 과연 여호는 결국 성 안의 식량이 다 떨어지자, 밤중에 정예 병사들을 이끌고 황보진의 부대로 돌격해 포위망을 뚫으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이때 모용각이 병력을 이끌고 여호의 군대를 공격하여, 대부분의 적을 죽이거나 부상시켰으며, 여호는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형양(滎陽)으로 도망쳤다. 여호가 도망치고 성 안의 사람들이 모용각에게 항복하자, 모용각은 항복한 백성들을 위로하며 그들에게 식량을 공급하였고, 여호의 장수들을 업(鄴)으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그 외의 나머지 사람들은 각자의 뜻에 따라 생활하도록 하였다. 여호의 참군이었던 광평(廣平) 사람 양침(梁琛)은 연나라에 투항하여 중서저작랑(中書著作郎)에 임명되었다.(야왕 전투)

건희 2년(361년) 9월, 이전에 경소제에게 투항했던 병주의 군벌 장평이 평양을 습격하여 연나라의 평양태수 단강과 호군 한포를 살해하였다. 이후 장평이 다시 전진의 공격을 받자, 그는 연나라로 돌아가 사죄하며 구원을 요청했으나, 모용각은 그의 요청을 허락하지 않았다.(장평 멸망)

건희 2년(361년) 10월, 여호가 형양에서 동진을 배반하고 다시 연나라로 귀순하였다. 모용위는 그를 용서하고 광주자사(廣州刺史)로 임명하였으며, 계속해서 녕남장군 직책도 겸하게 하였다.(여호의 난)

건희 2년(361년) 12월, 모용위가 대사면령을 내렸다.

건희 3년(362년) 정월, 연나라의 예주자사(豫州刺史) 손흥(孫興)이 상소를 올려 낙양(洛陽)을 공격할 것을 청하며 말했다.
"진나라(晉) 장수 진우(陳祐)는 피폐한 병사 1,000여 명으로 고립된 성을 지키고 있으니, 빼앗는 데 부족함이 없습니다."
모용위는 그의 말을 따랐고, 호군장군 부안과 녕남장군 여호를 파견해 군사를 이끌고 하음(河陰)에 주둔하게 하였다.

건희 3년(362년) 3월, 부안이 북쪽으로 칙륵(敕勒)을 기습하여 크게 승리하고 돌아왔다. 한편, 여호는 낙양 주변의 작은 진지들을 함락시키고 낙양을 위협하였다.

건희 3년(362년) 3월 18일[8], 동진의 보국장군•하남태수 대시(戴施)가 여호의 공세를 피해 완(宛)으로 도망가자, 낙양을 수비하는 동진의 관군장군 진우는 본국에 급박한 상황을 고하고 지원을 요청하였다.

건희 3년(362년) 5월 27일[9], 동진의 대사마 환온이 북중랑장 유희(庾希)와 경릉(竟陵) 태수 등하를 보내어, 3,000명의 수군을 이끌고 진우를 도와 낙양을 방어하게 하였다.

건희 3년(362년) 6월, 여호는 후퇴하여 소평진(小平津)으로 물러났으나, 전투 중에 유시에 맞아 사망하였다. 등하는 진격하여 신성(新城)에 주둔하였고, 유희의 부장 하겸(何謙)은 연나라의 장수 유칙(劉則)과 단구(檀邱)에서 교전하였다. 이때 유칙의 군대는 패배하고 철수하였다.

건희 3년(362년) 7월, 정동장군 참군 유발(劉拔)이 그의 상관인 정동장군•기주자사•범양왕 모용우(慕容友)를 암살하였다.

건희 3년(362년) 8월, 여호의 부장 단숭(段崇)이 군사를 거두어 북쪽으로 황하를 건너가 야왕(野王)에 주둔하였고, 동진의 북중랑장 유희도 하비(下邳)에서 물러나 산양(山陽)으로 돌아갔다.(제1차 낙양 공격)

건희 3년(362년) 11월, 대왕(代王) 탁발십익건이 자신의 딸을 모용위에게 시집보냈고, 모용위 또한 자신의 딸을 탁발십익건에게 보내어 후궁에 들이게 하였다.

건희 4년(363년) 4월, 모용위가 아우인 녕동장군 모용충을 파견해 형양을 공격하게 하자, 동진의 형양태수 유원(劉逺)은 노양(魯陽)으로 도망갔다.

건희 4년(363년) 5월 19일[10], 모용충이 계속 진격하여 밀성(密城)을 함락시키니, 유원은 다시 강릉(江陵)으로 도주하였다.

건희 4년(363년) 10월, 모용위가 진남장군 모용진을 보내, 동진의 진류(陳留) 태수 원피(袁披)를 장평(長平)에서 공격하게 하였다. 이때 동진의 여남(汝南) 태수 주빈(朱斌)이 허창의 방어가 허술한 틈을 타 공격하여 이를 점령하였다.

건희 5년(364년) 정월 6일[11], 모용위가 남교(南郊)에서 제사를 지내고 대사면령을 내렸다.

건희 5년(364년) 2월, 모용위가 다시 태부 모용평과 용양장군 이홍을 보내 하남 일대를 공략하게 하였다. 모용평과 이홍은 영천(潁川)을 공격하여 동진의 영천태수 이복(李福)을 전사시킨 다음, 이어서 여남(汝南)을 침략하였다. 동진의 여남태수 주빈이 성을 버리고 수춘(壽春)으로 도망가자, 연나라 군대는 진격하여 진군(陳郡)을 포위하였다. 동진의 진군태수 주보(朱輔)는 성을 지키며 굳게 방어하였다. 이때 대사마 환온이 강하상 유호(劉岵)를 보내 주보를 지원하게 하니, 모용평 등은 군사를 이끌고 철수하였다.

건희 5년(364년) 4월 25일[12], 모용위는 다시 이홍을 보내 허창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홍이 진격하여 현호(懸瓠)에서 동진군을 격파하자, 주빈은 회남(淮南)으로 도망하였고, 주보는 물러나 팽성(彭城)을 지켰다. 얼마 뒤, 이홍은 마침내 허창, 여남, 진군을 함락시켰고, 모용위는 이곳의 10,000여 호를 유주(幽州)와 기주(冀州) 두 주로 이주시켰다. 허창 탈환에 성공한 후, 모용위는 진남장군 모용진을 보내 허창에 주둔하게 하였다.

건희 5년(364년) 7월, 모용위가 태위 봉혁과 시중 모여룡(慕輿龍)을 구 도읍 용성(龍城)으로 보내어 종묘와 남은 백관들을 업도(鄴都)로 옮기게 하였다.

건희 5년(364년) 8월, 태재 모용각이 낙양을 탈취할 계획을 세우고, 먼저 사람을 보내 먼 곳의 무리까지 불러들여 귀순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사마 열희(悅希)를 맹진(盟津)에 주둔시켜 낙양을 압박하게 하고, 예주자사 손흥을 성고(成皋)로 보내 이를 지원하게 하였다.

건희 5년(364년) 9월, 사마 열희가 군대를 이끌고 하남 지역의 여러 성들을 공격하여 모두 점령하였다.

건희 5년(364년) 10월, 봉혁과 그 일행은 화룡(和龍)에서 신주(神主)를 모셔왔다.

처음에 모용위가 정무를 태재 모용각에게 맡겼을 때, 모용각은 박사 왕환에게 경전을 배우며 도움을 받았다. 또, 그는 조교(助教) 상봉(尚鋒), 비서감 두전(杜詮)과 함께 경전에 능통하게 논의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들은 모든 경전을 통달하게 되었으며, 동당(東堂)에서 공자에게 제사를 지냈다. 모용각은 왕환을 국자좨주로, 상봉은 국자박사로, 두전은 산기시랑으로 임명하였고, 경전을 들고 강론하던 자들 역시 모두 관직을 하사받았다.

건희 6년(365년) 2월, 태재 모용각과 오왕 모용수가 낙양성을 공격하여 포위하였다. 모용각이 여러 장수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항상 내가 공격하지 않는 것을 문제 삼았다. 지금 낙양성은 높지만, 적의 병력은 약하여 쉽게 함락시킬 수 있으니,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나태함에 빠지지 말고 용기를 내어 공격하라."
그리하여 연나라 군대는 대대적인 공성을 감행하였다.

건희 6년(365년) 3월, 연나라 군대가 낙양의 금용성(金墉城)을 함락시키면서 모용각은 낙양을 마침내 점령하였다. 동진의 녕삭장군 축요(竺瑤)는 양양(襄陽)으로 도망갔고, 매우 적은 군사로 낙양을 수비하던 양무장군 심경은 연나라 군의 포로가 되었다.(제2차 낙양 공격) 심경은 모용각에게 잡혔으나, 기세가 당당하였고 침착함을 유지하였다. 모용각은 그를 신기하게 여겨 살려주려고 했으나, 중군장군 모여건(慕輿虔)이 말하기를,
"심경은 비범한 인물이지만, 그의 의지와 기개를 보건대 결국 우리에게 복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를 살려두면 반드시 후환이 될 것입니다."
라 하여 결국 그를 처형하였다.

이후 모용각은 계속해서 영토를 정복하여 그의 군대는 효민(崤澠) 일대에 이르렀고, 전진의 영역인 관중(關中) 지역이 크게 동요하였다. 이에 전진의 천왕 부견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섬성(陜城)에 주둔하여 연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모용각은 좌중랑장 모용축(慕容築)을 가절•정로장군•낙주자사(洛州刺史)로 임명하여 금용성을 지키게 하였고, 오왕 모용수를 도독형양낙서연예옹익양진등10주제군사(都督荊揚洛徐兗豫雍益涼秦等十州諸軍事)•정남대장군•형주목(荊州牧)으로 임명하여 그에게 10,000 병력을 배속시키고 노양(魯陽)을 지키게 하였다. 모용각은 이후 업(鄴)으로 돌아가며, 부하들에게 말했다.
"이전에 내가 광고(廣固)를 평정할 때 큰 성과를 내지 못했고, 벽려울(辟閭蔚)을 구원하지 못하였소. 지금 낙양을 정복하고 심경을 처형하였으나, 이것은 모두 내 본심이 아니었소. 내가 원수로서 군을 이끌고 있으니 사해(四海)에 부끄러움을 느끼오."

건희 6년(365년) 4월 9일[13], 태위•무평광공 봉혁이 사망하였다. 이에 모용위는 사공 양무를 태위로 삼아 봉혁을 대신하고, 시중•광록대부 황보진을 사공•중서감으로 삼았다.

건희 7년(366년) 2월, 당시 경내에 많은 수해와 가뭄이 발생하였다. 이에 태재•대사마 모용각과 태부•사도 모용평이 머리를 조아리고 정무를 황제에게 돌려드릴 것을 요청하며, 관직을 사임하고 자택으로 돌아가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들은 상소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신(臣)은 어리석고 무능한 자로, 나라를 경영할 그릇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선제의 은혜로 발탁되었고, 또한 폐하의 각별한 총애를 입어 감히 재능 없는 몸으로 요직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은 위로는 음양을 조화롭게 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정사를 바로잡지 못하여, 수해와 가뭄이 끊이지 않고 도덕과 윤리가 무너지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신은 나약한 자로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밤낮으로 근심하고 있습니다.

신이 듣건대, 왕자(王者)는 하늘의 뜻을 따라 나라를 세우고, 재상은 그 인재를 평가하여 그에 맞는 관직을 배정한다고 하였습니다. 재상의 중요한 역할은 국가의 근본을 바로잡는 것이며, 만약 그 자리에 맞지 않는 인재가 임명된다면, 그로 인해 재앙이 닥칠 것이며, 이는 전통적인 교훈입니다. 신은 이전에 희단(姬旦, 주공 단)의 공로를 보았을 때, 가까이서는 그가 중책을 맡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으며, 멀리서는 간언하는 이들이 생겼습니다. 신은 왕실과 가까운 혈족으로서 재능 없는 몸으로 높은 자리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신은 여러 차례 상소하여 사직하고자 하였으나, 중년이 되도록 권세를 누리는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신은 근 7년 동안 재상의 직책을 맡아왔으나, 스스로 돌이켜보니 정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여 나라가 어지럽게 되었고, 결국 두 곳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한나라의 성대한 평화를 노래하던 것과는 거리가 멀고, 선제께서 신에게 맡기신 뜻을 저버리는 일이 되었습니다. 신은 이치에 밝지 못하나, 듣건대 군자는 자신의 위치를 알고 물러날 때를 안다고 하였으니, 두 차례 상소하며 사직을 청합니다. 이에 따라 태재와 대사마, 태부와 사도 등의 관직을 반환하고자 하오니, 부디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모용위가 이에 답하여 말했다.
짐은 덕이 부족하여 일찍이 하늘의 징벌을 받았고, 선제께서 맡기신 대업이 두 공(公)에게 달려있소. 두 공(公)은 덕망과 공로가 높고, 노나라위나라주나라 왕실을 보좌했듯이 짐을 이끌고 보필하였소. 두 공(公)이 베푼 은혜와 자비로움은 덕스럽고 화합을 이뤘으며, 앉아서 새벽을 기다리며 근심하고, 밤낮으로 성실하게 보좌하여 그 아름다움이 지극하였소. 이는 두 공(公)이 힘써준 덕분이니, 아직 그 책임을 내려놓아서는 아니 되오.

지금 관중 지역에는 반란이 완전히 평정되지 않았고, 강오(江吳)에는 진(晉)의 잔당이 남아있소.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한 계책이 여전히 필요하니, 두 공(公)이 책임을 다하지 않고 사임하는 것은 마땅치 않소. 그러니 자신을 낮추고 사양하는 마음을 버리고, 주공(周公)처럼 대업을 완수하는 데 힘써 주시오."
그러나 모용각과 모용평이 거듭 사직을 청하자, 모용위는 다시 답하며 말했다.
"무릇 덕(德)을 세우는 자는 반드시 끝까지 선(善)을 이루어야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으며, 지위와 명예를 받은 자는 공(功)을 완수해야 그 직위를 다한 것으로 평가될 것이오. 두 공(公)은 선제와 함께 큰 기초를 마련하고, 하늘의 명을 받들어 흉악한 적들을 소탕하며, 주나라의 번영을 계승하고 부흥시키려 하였소. 그러나 지금 재앙이 퍼지고, 하늘의 빛이 사라진 가운데, 짐은 보잘것없는 몸으로 대업을 맡았으나, 선제의 유지를 완수하지 못했소. 이로 인해 두 오랑캐가 떠도는 영혼처럼 날뛰고 있으니, 아직 공을 다 이루지 못한 것이오.

이러한 상황에서 어찌 물러날 수 있겠소? 고대의 왕들은 천하를 영광으로 여기지 않고, 사해(四海)를 짐짝처럼 여겼소. 그런 후에야 인덕으로 양보하는 기풍이 퍼지고, 온 집안이 봉토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오. 지금 도덕과 교화가 아직 완전히 퍼지지 않았고, 고래 같이 거대한 적들이 아직 제거되지 않았소. 종묘의 중대한 책임은 짐만의 일이 아니며, 두 공도 함께 걱정해야 할 문제요.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재난을 평정하며, 도덕을 돈독히 하고 아름다운 덕을 후세에 남겨야 하오. 그리해야 주나라와 한나라의 성대한 발자취에 비견되는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이오. 지금의 상황에서 물러나는 것은 마땅치 않소. 두 공은 흔한 절의를 중시하여 대의를 어기지 마시오."
이처럼 모용위가 단호하게 모용각과 모용평의 사직을 거부하자, 결국 그들은 사직을 철회하였다.

건희 7년(366년) 5월, 모용위가 조서를 내려 말했다.
"짐은 덕이 부족하여 정치를 맡아 많은 잘못을 범하였고, 긴 가뭄이 이어져 세 달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 결국, 농사철이 되었으나 비가 내리지 않아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다. 이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음악과 제사를 줄이고, 제사에서 채소로만 음식을 준비하게 하라."
그 후에 비가 내려 가뭄이 해소되었다.

건희 7년(366년) 9월, 진율랑(鎮律郎) 곽흠(郭欽)이 모용위에게 상주하여 아뢰었다.
"연나라는 석호의 수덕(水德)을 이어받았으므로 목덕(木德)을 따라야 합니다."
모용위는 이에 따라 목덕을 받들었다.

건희 7년(366년) 10월, 모용위가 무군장군•하비왕 모용려(慕容厲)를 보내 동진의 영역인 연주(兗州)를 공격하게 하였다. 모용려는 동진의 태산(太山) 태수 제갈유(諸葛攸)를 공격하였고, 제갈유는 회남(淮南)으로 도망갔다. 이후 모용려는 연주의 노군(魯郡), 고평(高平) 등의 여러 군을 점령하고, 각 군마다 태수를 배치한 뒤에 돌아왔다.(연주 공략)

건희 7년(366년) 12월, 동진의 남양도호(南陽督護) 조억(趙億)이 반란을 일으켜 완성(宛城)을 점거하고, 그 군(郡)을 들어 연나라로 귀순하였다. 모용위는 노양(魯陽)에 있던 남중랑장 조반(趙槃)에게 명해, 완성을 접수하고 그곳에 주둔하게 하였다.

건희 8년(367년) 2월, 무군장군•하비왕 모용려와 진북장군•의도왕 모용환(慕容桓)이 칙륵을 습격하였다.

건희 8년(367년) 4월, 진남장군 모용진이 경릉(竟陵)을 공격하여 동진의 경릉태수 나숭(羅崇)을 격파하였다. 이 당시 병이 들게 된 태재 모용각이 모용위에게 말했다.
"오왕 모용수는 장수로서의 재능이 신(臣)보다 열 배는 뛰어납니다. 선제께서는 장유(長幼)의 순서를 따르셨기에, 신이 그보다 먼저 이 자리에 오른 것일 뿐입니다. 신이 죽은 후에는 폐하께서 나라의 대권을 오왕에게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건희 8년(367년) 5월 임진일, 모용각의 병이 위중해지자, 모용위가 친히 그를 찾아가 후일의 일을 물었다. 이에 모용각이 답했다.
"신이 듣기에 은혜를 갚는 가장 큰 방법은 현명한 인재를 추천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현자는 비록 낮은 곳에 있더라도 재상으로 삼을 수 있음을, 은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을 판축(板築)에서 발탁하여 재상으로 삼은 사례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한데, 하물며 가까운 친척인 오왕 모용수는 문무를 겸비하여 관중(管仲)소하에 견줄 만한 인재입니다. 폐하께서 그에게 국정을 맡기신다면 나라가 평안할 것이나, 그렇지 않다면 진(秦)과 진(晉)이 반드시 틈을 노리고 침략할 계획을 세울 것입니다."
이 말을 마치고 모용각은 세상을 떠났다.(모용각 사망)

2.2.2. 모용평의 득세

건희 8년(367년) 6월, 동진의 우장군•형주자사 환활과 경릉태수 나숭이 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조억은 이미 도망쳤고, 조반은 물러나 노양(魯陽)으로 귀환하려 하였는데, 환활이 경기병을 보내 조반을 추격하여 양군은 치성(雉城)에서 크게 전투를 벌였다. 동진군은 여기서 조반을 크게 격파하여 그를 포로로 잡았고, 연나라는 완성을 상실하였다.

건희 8년(367년) 7월, 하비왕 모용려가 다시 칙륵을 정벌하여 격파하고, 말과 소 수만 마리를 노획하였다. 이후 모용려가 병사를 이끌고 대나라를 지나면서 대나라의 제전(祭田)을 침범하자, 대왕 탁발십익건은 군대를 거느리고 모용려를 공격하였다. 이때 모용위는 내친 김에 대나라도 정벌하기 위해 평북장군•무강공 모여니(慕輿埿)를 보내어, 유주(幽州)의 병력을 이끌고 대나라의 수도인 성락(盛樂) 인근인 운중(雲中)에 주둔하게 하였다.

건희 8년(367년) 8월, 탁발십익건이 운중을 공격하자, 모여니는 성을 버리고 도망쳤고, 진위장군 모여하(慕輿賀)는 싸우다 전사하였다.

건희 8년(367년) 12월 7일[14], 태위 양무가 사망하였다. 이에 모용위는 사공 황보진을 태위로 임명하였고, 시중•광록대부 이홍을 사공으로 임명하였다.

건희 9년(368년) 2월, 모용위가 아우인 거기장군•중산왕 모용충을 대사마로, 형주자사•오왕 모용수를 시중•거기대장군•의동삼사로 임명하였다. 이때 전진에서는 천왕 부견에게 대항하여 5공(五公)의 난이 일어났는데, 반란 일으킨 공들 중 위공(魏公) 부수(苻廋)가 섬성(陜城)을 점거하고 연나라로 투항하면서 구원을 요청하였다. 당시 "연나라 말이 반드시 위수(渭水)를 마실 것이다"라는 예언이 나돌았기에, 부견은 모용위가 이 틈을 타 관중(關中)으로 진입할까 두려워하여 정예병을 모두 화음(華陰)에 배치해 방어하였다.

한편, 부수의 구원 요청을 받은 모용위는 신하들에게 부수를 구원하고 관중을 공략할 것을 논의하게 하였다. 그러나 태부 모용평은 전략에 능하지 않았고, 부견에게서 받은 뇌물을 받고 있었으므로 반대하며 말했다.
"진나라(秦)는 강대국이니, 비록 어려움에 처해 있다고 하나 쉽게 공략할 수 없습니다. 지금 조정이 비록 밝다고는 하나, 선제만큼은 아니며, 우리의 지략 또한 태재(太宰, 모용각)만큼은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국경을 지키고 병사를 쉬게 하며, 나라의 안정만을 도모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진나라를 평정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그때 위윤(魏尹)•정남장군•범양왕 모용덕이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제께서는 하늘의 명을 받아 시대의 흐름을 따르시며 왕위를 계승하여 대업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천하를 통일하지 못한 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주나라 문왕이 세상을 떠난 후 무왕이 그 뒤를 이은 것처럼, 폐하께서도 하늘의 뜻을 따라 선제의 뜻을 완성하셔야 합니다. 지금 관중의 적들은 왕을 참칭하며 오랫동안 죄를 쌓고 있었는데, 내분으로 나라가 네 부분으로 분열되었습니다. 이들이 자주 투항하고 구원을 요청하고 있으니, 이는 그들의 운이 다했음을 뜻합니다.

지금 진나라가 분열되었으니 이는 하늘이 우리에게 준 기회입니다. 하늘이 주는 기회를 놓치면 화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오월(吳越)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마땅히 하늘의 뜻을 따르고, 모목(牧野)의 깃발을 세워야 합니다. 황보진(皇甫真)에게 병주(并州)와 기주(冀州)의 군대를 이끌고 곧바로 포판(蒲阪)으로 진격하게 하고, 오왕(吳王) 모용수에게 허창(許昌)과 낙양(洛陽)의 병력을 이끌고 부유의 포위를 풀게 하십시오. 태부 모용평은 수도의 호군(虎旅) 군대를 이끌고 두 군을 후방에서 지원하도록 하십시오. 그런 다음 삼보(三輔)에 포고문을 내려 그들에게 화복을 알리고, 성을 함락하면 공을 세운 자들을 후하게 포상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뜻을 펼치지 못했던 영웅들이 대거 모여들 것이며, 적들은 도망치거나 항복할 것이고, 이는 천하 통일의 기초가 될 것입니다. 부디 폐하께서 스스로 결단을 내리셔서 두 공(모용평과 모용각)의 의견에 더이상 의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용위는 상소를 보고 크게 기뻐하여 이를 따르려 하였으나, 모용평이 거듭 반대하여 구원군을 보내는 계획은 중단되었다. 한편, 부수는 모용위와 모용평이 원대한 계획을 세우지 못하여 구원군이 보내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오왕 모용수와 태위 황보진에게 편지를 보내 경고하였다.
"부견과 왕맹은 걸출한 인물들이며, 그들은 연나라를 오랫동안 위협해 왔습니다.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후일 연나라의 임금과 신하들은 동쪽으로 도망가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모용수는 이 편지를 받고 황보진에게 사사로이 말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큰 위협은 진나라(秦)입니다. 폐하께서는 나이가 어리셔서 정사에 신경을 쓰지 않으시고, 태부(모용평)의 식견과 지략으로는 부견과 왕맹을 상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에 황보진이 답하였다.
"나도 그것을 알고 있으나,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어쩌겠소?"

건희 9년(368년) 8월, 당시 연나라의 왕공과 귀족들은 많은 백성들을 사적으로 점유하고, 고의로 많은 가구들을 호적에서 누락시켜 음호(廕戶)로 삼았다. 국가의 인구는 사가(私家)보다 적었으며, 조세는 제대로 거두어지지 않아 창고는 비어 있었고 재정은 부족하였다. 이때 상서좌복야•광신공 열관이 모용위에게 아뢰어 말했다.
"태부(모용평)는 정치를 지나치게 관대하고 온화하게 다스리니, 백성들이 많은 경우 숨거나 의탁하고 있습니다. 전해지기를 '덕이 있는 자만이 관대함으로 백성을 다스릴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엄격함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지금 여러 군영의 백성들이 세 개로 나뉘어 풍속이 문란해지고, 위엄과 규율이 바로 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군영을 모두 해산하고, 그들을 국가의 재정으로 돌려 나라의 창고를 채우고 법령을 엄숙하게 하여 사해(四海)를 청명하게 해야 합니다."
모용위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열관은 조정의 제도를 바로잡았고, 조야(朝野)는 크게 두려워하였다. 그 결과 200,000여 호가 다시 국가의 호적으로 편입되어 조세를 납부하게 되었다.

건희 9년(368년) 11월, 음호를 모두 잃게 된 연나라의 귀족들은 열관을 무척 미워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정의 여론을 신경 쓰지 않고 호적 조사에 온 힘을 다하던 열관은 결국 이전부터 앓고 있던 지병이 악화되어 병사하였다.

건희 9년(368년) 12월, 신령이 업(鄴)에 내려와 스스로를 '상녀(相汝 또는 湘女)'라 칭하였다. 그 목소리는 사람들과 교감하며 며칠 동안 머물다가 떠났다.

건희 10년(369년) 4월, 모용위가 귀비(貴妃) 가족혼씨를 황후로 세웠다. 가족혼 황후는 모용위의 생모인 가족혼 태후의 사촌동생 상서령•예장공 가족혼익(可足渾翼)의 딸이었다.

2.2.3. 환온의 제3차 북벌

건희 10년(369년) 6월, 동진의 대사마 환온이 서연2주자사(徐兗二州刺史) 치음, 강주자사(江州刺史)•남중랑장 환충, 예주자사•서중랑장 원진(袁真), 강하상 유호 등과 함께 보병과 기병 50,000명을 거느리고 연나라를 공격해왔다. 환온은 또 건위장군 담현(檀玄)을 보내 호륙(胡陸)을 공격하게 하여 이를 함락시키고, 녕동장군 모용충을 사로잡았으며, 이어서 금향(金鄉)으로 진군하였다. 당시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수로가 막혀 있었기 때문에, 환온은 의양도(儀陽道)를 뚫어 배로 물자를 운송하게 하였으며, 자신은 군을 이끌고 합비(合肥)에 진을 쳤다.

모용위는 무군장군•하비왕 모용려를 정토대도독(征討大都督)으로 임명하여 보병과 기병 80,000명을 주고, 황허(黃墟)에서 환온의 군대를 맞서 싸우게 하였다. 그러나 모용려의 군대는 크게 패배하였고, 그는 홀로 말을 타고 도망쳐 돌아왔다. 이에 연나라의 고평(高平) 태수 서번(徐翻)은 군을 들어 환온에게 항복하였다. 또, 북벌군의 선봉장 주서와 등하는 임저(林渚)에서 연나라의 호군장군 부안을 격파하여, 환온의 군대가 크게 사기를 올렸다. 모용위는 다시 낙안왕 모용장(慕容臧)을 보내 여러 군대를 통솔하여 환온에 맞섰으나, 모용장은 환온을 막아내지 못하였다. 이에 모용위는 하는 수 없이 산기상시 이봉(李鳳)을 전진으로 보내 천왕 부견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건희 10년(369년) 7월, 환온의 군대가 황하를 도하하여 무양(武陽)에 주둔하였다. 이때 연나라의 전(前) 연주자사 손원(孫元)은 그의 일족과 함께 병력을 일으켜 환온에게 호응하였다. 그리고 며칠 뒤에 환온의 군대가 방두(枋頭)에 이르니, 모용위와 태부 모용평은 크게 두려워하며 화룡으로 도망갈 계획을 세웠다. 그때 오왕 모용수가 나아가 말했다.
"그리 하지 마십시오. 신에게 병력을 맡겨 공격하게 하소서. 만약 실패한다면 그때 도망쳐도 늦지 않습니다."
이에 모용위는 모용수를 사지절•남도대도독(南討大都督)으로 삼아 모용장을 대신하게 하였고, 정남장군•범양왕 모용덕 등 50,000 병력을 모용수의 휘하로 배속시켜 환온을 막게 하였다. 이때 모용수는 사도 좌장사 신윤(申胤), 황문시랑 봉부(封孚), 상서랑 실라등 등을 참군으로 임명하여 자신과 종군하게 하였다. 하지만 모용위는 모용수가 못 미더웠는지, 다시 산기상시 악숭(樂嵩)을 전진으로 보내 구원군을 청하면서 환온이 물러가면 호뢰(虎牢) 이서(以西)의 땅을 바치겠다고 약속하였다.

건희 10년(369년) 8월, 천왕 부견도 마침내 장군 구지(茍池)와 등강을 파견해 기병 20,000기를 거느리고 연나라를 구원하게 하였고, 이들은 낙양에서 출발해 영천에 도착하였다. 또한, 부견은 산기시랑 강무(姜撫)를 모용위에게 보내어 표면상 구원군을 보내는 것처럼 보였으나, 내심으로는 틈을 엿보며 연나라를 병합할 의도를 품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봉부가 신윤에게 물었다.
"환온의 군대는 강력하고 병사들이 정돈되어 있으며, 강을 따라 곧장 진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대군은 머뭇거리며 높은 곳에 머물러 있고, 병사들이 아직 적과 맞붙지 못하였으니 승리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보십니까?"
신윤이 답했다.
"오늘날 환온의 기세가 강해 보이긴 하나, 성공할 가능성은 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나라(晉)는 쇠약해졌고, 환온이 나라를 전횡하고 있지만, 진나라 조정의 대신들이 그와 한마음이 아닙니다. 환온의 성공은 모두가 바라는 바가 아니기에, 내부에서 분열이 생겨 그의 계획이 실패할 것입니다. 또한, 환온은 교만하고 병력을 믿고 있으며, 변화에 대응하는 능력이 부족합니다. 큰 군대가 깊이 진입하여 적절한 기회를 맞이했으나, 오히려 망설이며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빠른 승리를 원하지만, 오래 머물며 전면 승리를 기대하는 것은 불리합니다. 식량이 부족해지면 그의 사기는 꺾일 것이고, 전투 없이 스스로 패배할 것이니, 이는 자연의 이치입니다."

당시 환온은 연나라의 항장 단사(段思)를 길 안내자로 삼았는데, 실라등이 환온의 군대와 싸워 단사를 생포하였다. 또, 환온은 장수 이술(李述)을 보내 조(趙)와 위(魏) 일대를 순찰하게 하였으나, 실라등이 호분중랑장 염간진(染干津)과 함께 싸워 이술을 죽이니, 이로 인해 환온의 군대는 사기를 잃었다. 이 무렵에 환온의 계획은 다시 한번 어긋나고 마는데, 당초 초양(譙梁)을 공격하고 석문(石門)을 열어 수로 운송을 원활하게 하는 임무를 맡은 예주자사 원진이 초양을 함락시켰으나, 석문을 열지 못해 수로 운송이 막히고 만 것이다.

건희 10년(369년) 9월, 범양왕 모용덕이 이끄는 기병 10,000기와 난대시어사(蘭臺侍御史) 유당(劉當)이 이끄는 기병 5,000기가 석문에 주둔하여 원진의 공세를 굳게 방어하였고, 이로 인해 환온군의 식량과 물자 운송이 차단되었다. 여기에 더해서 연나라의 예주자사 이규(李邽)도 5,000 병력으로 환온의 보급로를 차단하였다. 이처럼 상황이 유리해지자, 모용덕은 장군 모용주(慕容宙)에게 군사 1,000명을 주어 선봉으로 삼고, 진격하여 동진군과 싸우려 하였다. 이때 모용주가 모용덕에게 말했다.
"진나라(晉) 병사들은 가벼운 기동과 약탈에는 능하지만, 진지를 깊이 돌파하는 데는 약하고, 후퇴하는 적을 추격하는 데는 용맹합니다. 그러므로 미끼를 두어 그들을 유인해야 합니다."
이에 모용덕은 200명의 기병을 보내 도발하게 하고, 나머지 병력을 세 군데에 매복시켰다. 도발한 병력은 교전하지 않고 이내 도망갔고, 동진군이 이를 추격하자 모용주는 매복한 군사들을 이끌고 공격하여 많은 적을 죽였다.

이후로 환온은 여러 번 싸웠으나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식량마저 다 떨어졌다. 또한, 전진의 군대가 곧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배에 불을 질러 태우고, 군량과 무기를 버린 뒤에 육로로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환온이 동연(東燕)에 이르렀을 때, 모목지를 동연태수로 삼아 동연의 네 군(郡)을 감독하게 하였다. 그리고 환온은 동연을 떠나 창원(倉垣)을 거쳐 진류(陳留)에 이르러,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며 700여 리를 행군하였다.

연나라의 여러 장수들이 환온을 추격하자고 하자, 오왕 모용수가 그들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환온이 처음 후퇴할 때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을 것이니, 분명 경계를 철저히 하고 정예병을 남겨 후방을 방어할 것이다. 따라서 지금 공격해봤자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것으로, 당장은 기다리는 것이 좋다. 우리가 아직 추격하지 않는 것을 알고 나면, 환온은 마음을 놓고 밤낮으로 서둘러 퇴각할 것이고, 그들이 지쳐 힘이 다하고 사기가 떨어졌을 때 공격하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이후 모용수는 8,000 기병을 이끌고 천천히 환온의 뒤를 추격하였다. 과연 환온은 퇴각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고, 며칠 뒤 모용수는 장수들에게 말했다.
"이제 환온을 공격할 수 있다."
그리고는 즉시 급히 추격하였다. 이윽고 모용수는 양읍(襄邑)에 도착하여 환온의 군대를 금세 따라잡았고, 범양왕 모용덕은 정예병 4,000명을 이끌고 작은 길로 먼저 양읍 동쪽에 도착하여 계곡에 매복하였다. 이후 모용수와 모용덕이 앞뒤에서 협공하여 환온의 군대를 크게 무찔렀고, 동진군 30,0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한편, 전진의 장군 구지는 환온이 패전하고 돌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비로소 진격하여 초(譙)에서 환온을 기습해 대패시켰으며, 환온은 또다시 병력 10,000여 명을 잃었다.

환온에게 호응한 예주자사 손원은 무양(武陽)을 점거하고 모용위에 맞서 싸웠으나, 모용위는 좌위장군 맹고(孟髙)를 보내 손원을 토벌하여 그를 생포하였다. 이로써 환온의 제3차 북벌은 처참히 실패하고 말았다.

2.2.4. 모용수의 망명

건희 10년(369년) 10월, 환온은 패잔병을 수습하여 산양(山陽)에 주둔하였고, 패배를 크게 수치스럽게 여겨 모든 책임을 석문 점거에 실패한 원진에게 전가하였다. 이에 원진은 환온이 자신을 모함했다고 분노하여 수춘(壽春)에서 거병하고, 연나라에 항복하면서 구원군을 요청하였다. 모용위는 대홍려 온통(溫統)을 보내 원진을 사지절•산기상시•도독회남제군사(都督淮南諸軍事)•정남대장군•호남만교위•양주자사(揚州刺史)로 임명하고, 선성공(宣城公)에 봉하였다.

건희 10년(369년) 11월, 당시 연나라와 진나라(秦)는 이미 화친을 맺어, 사절들이 서로 왕래하였다. 모용위는 산기시랑 학규(郝晷)와 황문시랑 양침을 차례로 진나라로 보냈다. 한편, 환온을 격퇴한 모용수가 양읍(襄邑)에서 돌아와 업(鄴)으로 개선하자, 그의 위엄과 명성이 더욱 드높아졌다. 태부 모용평은 원래부터 모용수를 탐탁지 않게 여겼는데, 이를 계기로 모용수에 대한 시기심이 더욱 커졌다. 모용수에 의해 발탁된 장수들 중 손개(孫葢) 등이 뛰어난 전공을 세웠기에, 마땅히 특별한 상을 주어야 했으나, 모용평은 이들을 억누르고 보상을 시행하지 않았다. 모용수는 이에 대해 여러 차례 항의하며 모용평과 조정에서 논쟁하였고, 그들 사이의 갈등과 원한은 점점 깊어졌다.

더구나 가족혼 태후는 평소부터 모용수를 싫어하여 그의 전공을 헐뜯었고, 더 나아가 모용평과 은밀히 모의하여 모용수를 죽이려 하였다. 이에 모용수는 두려움을 느끼고 결국 전진으로 도망갔고, 평소 모용수와 친밀하게 지내던 범양왕 모용덕과 거기장군 종사중랑 고태(髙泰) 등은 모두 관직에서 파면되었다. 이때 상서우승 신소(申紹)가 모용평에게 아뢰었다.
"지금 오왕(吳王)이 도망가 외부에서 소문이 퍼지고 있으니, 왕의 신하들 중 현명한 자들을 등용하여 명예롭게 진급시키면 비난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모용평이 물었다.
"누가 적합한가?"
신소가 답하였다.
"고태(髙泰)가 제일 적합합니다."
이에 모용평은 고태를 상서랑으로 복직시켰다.

이전에 모용위는 황문시랑 양침을 전진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전진의 천왕 부견은 양침을 한 달 남짓 억류하였다가 보내주었다. 양침이 급히 달려 업에 도착했을 때, 이미 모용수는 전진으로 도망친 후였다. 이에 양침이 모용평에게 말했다.
"진나라(秦)는 매일 군사를 점검하고, 곡식을 섬성(陜城) 동쪽으로 운반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화친이 오래가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오왕 모용수까지 진나라로 갔으니, 그들이 틈을 엿보고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조속히 대비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모용평이 답하였다.
"그렇지 않소. 진나라(秦)가 어찌 배신한 신하를 받아들여 화친을 깨뜨리겠소?"
양침이 다시 말했다.
"이웃 나라가 서로 병탄하는 일은 예로부터 있어 왔습니다. 지금 두 나라가 중원을 나누어 차지하고 있으며, 둘 다 천자의 명호를 칭하고 있으니, 이 상황에서 두 나라가 모두 존속할 수는 없습니다. 환온이 침략해왔을 때, 진나라(秦)가 우리를 구원한 것은 연나라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기 이익을 고려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연나라에 틈이 생긴다면, 그들은 본래의 야망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모용평이 물었다.
"진나라(秦) 왕은 어떤 인물인가?"
양침이 대답하였다.
"부견은 총명하고 결단력이 있으며, 좋은 간언을 잘 받아들이는 인물입니다."
모용평이 다시 왕맹에 대해 묻자, 양침이 대답하였다.
"그는 이름에 걸맞은 인재로, 왕을 보좌할 재능을 지닌 인물입니다. 진취적인 성격으로 부견과 군신 관계가 매우 잘 맞아, 그들은 자신들이 천년에 한 번 나올 기회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환온은 그들에 비하면 큰 걱정거리조차 되지 않으며, 연나라를 위협할 존재는 오직 왕맹뿐입니다."
하지만 모용평이 양침의 말을 듣고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양침은 이를 다시 모용위에게 보고하였으나, 모용위 역시 양침의 말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이 내용을 황보진에게 알렸다. 황보진은 이를 매우 걱정하며 상소를 올려 말했다.
"비록 부견이 자주 사절을 보내면서 마치 도와줄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사실 그들은 이웃 나라를 적으로 삼아, 전쟁 상태에 있는 나라들과 다름없는 세력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나라를 엿보고 있을 뿐, 덕과 의를 존중하여 신의를 지키며 화목을 도모하여 오랫동안 우호를 유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최근 진나라(秦) 사신이 끊임없이 다녀가고, 군사들 또한 낙천(洛川)으로 출병하여 험준한 지형과 중요한 요충지를 모두 점령하며, 우리의 실정을 탐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외부의 소식을 듣고 나라의 틈을 엿보며 침략을 준비하는 전형적인 적의 행동입니다.

지금 오왕 모용수가 그들에게 가서 그들의 계책을 주도하고 있으니, 오자서의 재앙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낙양(洛陽), 태원(太原), 병주(并州), 호관(壺關) 등의 모든 성에 장수를 배치하고 병력을 증강시켜, 아직 드러나지 않은 위협을 방비해야 합니다."
그러자 모용위는 모용평을 불러 이 문제에 대해 상의하였다. 모용평이 말했다.
"진나라(秦)는 국력이 약소하여 오히려 우리를 의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또한, 부견은 선함을 추구하는 자이므로, 끝내 배신자의 말을 받아들여 두 나라의 우호를 끊지는 않을 것입니다. 경솔하게 스스로 놀라 진나라의 마음을 자극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모용위는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다.

이때 마침 전진에서 사신으로 황문랑 석월을 보냈다. 모용평은 석월에게 연나라의 부유함을 자랑하기 위해 사치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에 상서랑 고태와 태부 참군 유정(劉靖)이 모용평에게 말했다.
"석월의 말은 허황되고 그 시선은 먼 곳을 보고 있으니, 이는 우호를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틈을 엿보려는 것입니다. 무력을 과시하여 그들의 계략을 꺾는 것이 상책이나, 지금 사치로움을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그들이 우리를 가볍게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모용평은 이들의 말을 따르지 않았고, 고태는 병을 핑계로 집으로 돌아갔다.

2.2.5. 전연의 멸망

당시 외부에서는 전진과 동진의 군대가 끊임없이 국경을 어지럽혀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내부에서는 가족혼 태후가 국정을 어지럽혔다. 또, 위에서는 태부 모용평 등은 탐욕에 빠져 끝없이 재물을 취하고, 관직을 매매하였으며, 관료들은 재능에 따라 임명되지 않았고, 아래에서는 백성들이 이에 대해 원망과 분노를 품고 있었다. 이에 상서좌승 신소가 상소를 올려 아뢰었다.
"신이 듣기에, 한나라 선제(漢宣)가 말하기를 '나와 함께 천하를 다스릴 자는 곧 훌륭한 이천석(良二千石)이 아니겠는가?'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관료 선발에 특별히 신중을 기하며, 반드시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지방에서 공을 세우고 내외를 두루 경험한 자들로, 그들의 능력으로 인하여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맹수들조차 감복하게 하였고, 모든 길흉화복이 고르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수령들은 대부분 그 자리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무장은 하급 군인 출신이거나, 귀족들은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자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고향에서도 명망이 없고, 조정에서도 직책을 맡아본 적이 없습니다. 더구나 인사에서 법도가 없으니, 탐욕스럽고 태만한 자들은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청렴한 자들은 상을 받을 희망이 없습니다. 백성들은 피폐해지고, 뇌물이 끊이지 않으며, 병사들은 도망가고, 도둑들이 날뛰어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또한, 관리가 많으면 정사는 복잡해지기 마련인데, 지금의 인구는 한나라의 한 대군(大郡)에도 미치지 못하면서도 관리는 과도하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더군다나 군사 직책들이 새로 생겨나면서도 과거보다 중요시되니, 이는 농업과 양잠을 저해하고, 백성들의 삶을 더욱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관직을 합치고, 업무를 간소화하며, 농업과 양잠을 장려해야 합니다.

지금 진(秦)과 오(吳)의 두 적들은 한때 혼란스러웠나, 스스로의 욕망을 억제하고 정사를 바로잡아 나라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대연(大燕)은 성스럽고 위중한 빛을 이어받아 사해(四海)를 다스리고 있으니, 어찌 이 아름다운 정치를 훼손하고 도적의 침입을 초래할 수 있겠습니까? 이웃 나라의 좋은 점은 백성들이 바라는 바이므로, 우리가 스스로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들의 소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두 적들은 교활하며,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들은 단지 국경을 지키는 것만이 아니라, 연나라를 삼키려는 야망을 품고 있습니다. 중주(中州)은 풍요로워 두 적들이 탐내는 대상이며, 연나라의 병사들이 강력한 활과 말을 갖추었기에 적들은 이를 두려워합니다. 연나라의 군대는 구름처럼 빠르게 움직이지만, 최근 적을 상대할 때 병력이 늦게 도착하여 원활히 지원하지 못한 이유는, 과도한 세금 부과와 불합리한 징발 제도로 인해 발생한 것입니다. 각 군현의 수령들은 부자나 강한 사람들을 피하고, 가난하고 약한 자들만 징발하여, 백성들은 곤궁에 빠져 자주 도망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군대를 모집해도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중요한 시기도 놓치고 있습니다.

더구나 병력은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명령을 잘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군사 제도를 엄격히 정비하고, 수령을 신중히 선발해야 합니다. 군사 훈련과 전투 준비를 철저히 하여, 병사들이 농사와 전투를 병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병사들이 전장에 나가도, 부모들은 그들을 기다리며 평화롭게 지낼 수 있게 해야 하며, 자식들은 다시 돌아올 날을 바라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어떤 위기라도 그들을 따르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검소함을 실천하고, 낭비를 줄여야 합니다. 선왕들은 항상 사치를 멀리하고, 실질을 추구하였습니다. 주공(周公)은 성왕(成王)에게 재정을 튼튼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경고하였고, 한문제(漢文帝)는 간소한 생활을 통해 백성을 안정시켰으며, 위무제(魏武帝)는 검소한 은혜를 베풀어 백성의 힘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후궁의 여인들은 4,000명이 넘고, 하인들의 수는 열 배나 많습니다. 하루에 소비되는 비용은 만금(萬金)을 넘고, 사치스러운 옷과 장신구는 해마다 늘어나지만, 군사 장비는 제대로 준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창고는 비어 있고, 군사들은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대신들과 왕후들은 사치와 허영을 추구하며, 이로 인해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이제 불필요한 관직을 없애고, 사치스러운 결혼과 장례를 금지해야 합니다. 후궁의 여인들을 줄이고, 농업과 상업에 할당된 인력을 균등하게 배치하여야 하며, 공신들에게는 상을 주고, 죄를 지은 자는 반드시 벌을 내려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국가의 기강이 서고, 공과 사가 모두 안정될 것이며, 두 적들은 자연히 굴복할 것입니다. 이는 단지 국경을 지키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만약 한나라의 간소한 덕행을 본받지 않으신다면, 이 나쁜 풍속과 사치는 점점 더 퍼질 것이고, 그것을 바로잡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또한, 지금 선비족의 수령 십익건(什翼犍)은 병에 걸려 미약하고 어리석습니다. 그들은 공물조차 제대로 바치지 못하고 있으니, 큰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군사를 보내 멀리 주둔시키는 것은 이롭지 않으니, 이를 멈추고 국력을 키워야 하며, 군사력을 준비해 그들이 틈을 보일 때 한 번에 소탕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는 두 나라를 제압할 수 있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모용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초 모용위는 진나라에 호로(虎牢) 이서(以西)의 땅을 양보하겠다고 약속하였으나, 동진과의 전투가 끝난 후에 모용위는 그 약속을 후회하며 사신을 보내 부견에게 말했다.
"사신이 말을 실수하였소. 나라와 집을 가진 자는 재난을 함께하고 어려움을 구제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오."
이에 부견은 크게 분노하여 연나라를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건희 10년(369년) 12월, 천왕 부견이 보국장군 왕맹, 건위장군 양성, 낙주자사(洛州刺史) 등강을 보내 보병과 기병 30,000명을 이끌고 낙양을 공격하게 하였다.

건희 11년(370년) 정월, 왕맹이 연나라의 형주자사•무위왕 모용축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지금 우리 군대는 이미 성고(成皋)의 험준한 길을 차단하였고, 맹진(盟津)의 길도 막았다. 호기(虎旅) 백만이 대거 출동하여, 지관(軹關)에서 출발해 업도(鄴都)와 금용성(金墉城)을 향해 진격하고 있다. 지금 외부에서 지원군이 없는데, 장군은 과연 3,000명의 피폐한 병사로 이 군대를 막아낼 수 있겠는가?"
이에 모용축은 구원군이 오지 않음을 크게 두려워하며, 금용성을 들어 왕맹에게 항복하였다. 왕맹은 군대를 주둔시키고 낙양을 장악하였다.

이때 모용위는 위대장군•낙안왕 모용장을 신성(新樂)으로 보내어 전진군의 진군을 막게 하였다. 모용장은 석문(石門)에서 전진군을 격파하고, 장수 양맹(楊猛)을 사로잡은 뒤에 형양으로 진격하였다. 이에 왕맹은 양성과 등강을 보내 석문에서 모용장과 전투를 벌였고, 모용장의 군대는 패배하여 10,000여 명이 전사하였다. 이후 양측은 석문에서 대치하였다.

얼마 뒤, 양성은 다시 모용장의 군대를 공격하여 연나라 군사 3,000여 명을 참수하고, 장군 양구(楊璩)를 사로잡았다. 왕맹은 등강을 금융성에 남겨 주둔시키고, 보국장군 사마 환인(桓寅)을 홍농(弘農) 태수로 삼아 등강을 대신하여 섬성(陜城)을 지키게 한 후,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 시기에 모용수와 함께 도망쳤던 세자 모용령이 왕맹의 계략에 속아서 연나라로 돌아왔다가, 모용위의 의심을 받아 사성(沙城)으로 유배당했다.

건희 11년(370년) 2월 28일[15], 수춘의 양주자사 원진이 사망하였다. 이에 진군태수 주보는 원진의 아들 원근(袁瑾)을 세웠고, 원근은 건위장군•예주자사에 올라 수춘을 굳게 지켰다. 이때 주보는 자신의 아들 주건지(朱乾之)와 사마 찬량(爨亮)을 업(鄴)으로 보내 원근의 관직을 정식으로 임명해주기를 청하며, 동시에 구원군을 요청하였다. 모용위는 원근을 양주자사(揚州刺史), 주보를 형주자사로 각각 임명하고, 군대를 보내 그들을 구원하게 하였다.

건희 11년(370년) 4월 27일[16], 환온이 독호 축요(竺瑤), 교양(矯陽) 등을 파견해 원근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때 모용위가 보낸 구원군이 이미 수춘에 도착해 있었으나, 무구(武丘)에서 축요 등과의 전투했다가 패배하였다. 이후 환온이 친히 20,000 병력으로 광릉(廣陵)에서 수춘으로 진격하였고, 원근은 성을 견고히 지키며 항전하였다. 이윽고 환온은 긴 포위선을 구축하여 성을 포위하였다.

건희 11년(370년) 5월, 모용령이 사성에서 유배병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으나, 그의 동생 모용린의 고발과 사성성대 섭규(涉圭)의 배신으로 반란은 실패하고, 모용령 역시 참수당했다.

건희 11년(370년) 6월 12일[17], 전진의 천왕 부견이 다시 보국장군 왕맹을 보내어 진남장군 양안 등 10명의 장수와 함께 보병과 기병 60,000명을 지휘하여 연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왕맹의 군대는 진격하여 파상(灞上)에 주둔하였다.

건희 11년(370년) 7월, 왕맹은 군대를 두 갈래로 나누어 자신은 직접 호관(壺關)을 공격하였고, 양안 등은 진양(晉陽)을 공격하게 하였다.

건희 11년(370년) 8월, 모용위가 태부•상용왕 모용평과 하비왕 모용려에게 300,000여 병력을 주어 전진의 군대에 맞서도록 하였다. 이 당시 주군(州郡)에서는 도적들이 크게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업(鄴)에서는 괴이한 현상들이 잇따라 일어나 모용위는 크게 불안해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에 모용위는 산기시랑 이봉, 황문시랑 양침, 중서시랑 악숭을 불러 물었다.
"진나라(秦)의 병력이 얼마나 많은가? 대군이 이미 출동하였는데, 왕맹과 양안이 과연 막을 수 있겠는가?"
이봉이 대답하였다.
"진나라(秦)는 국토가 작고 병력이 약하여 우리 왕의 군대의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왕맹은 일개 범부로, 태부(모용평)와 비교할 만한 인물이 아니니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양침과 악숭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병법에 따르면, 적의 전투 능력을 계산하여 승리를 거두어야 합니다. 적이 싸우지 않기를 기대하는 것은 만전(萬全)의 방책이 아닙니다. 과거 경정(慶鄭)도 말하기를, '진나라 군대는 비록 숫자가 적지만, 그 전사들은 우리 병력의 두 배에 달하는 전투력을 지니고 있다' 하였습니다. 전투에서 병력의 다소(多少)는 중요하지 않으며, 진나라(秦)는 천 리를 달려 먼 곳에서 적을 치러 왔으니 당연히 전투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책을 세워 승리를 구해야 하며, 단순히 적이 싸우지 않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모용위는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상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맹이 호관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연나라의 상당(上黨) 태수•남안왕 모용월(慕容越)을 사로잡았다. 그가 지나가는 주군(州郡)은 모두 항복하여 따랐고, 업 중(鄴中)은 크게 동요하였다. 이때 황문시랑 봉부가 또다시 사도 장사 신윤에게 물었다.
"이번에는 상황이 어떻게 될 것 같소?"
신윤이 탄식하며 말했다.
"업(鄴)은 반드시 함락될 것이고, 우리 모두 올해 진나라(秦)의 포로가 될 운명인 듯하오. 그러나 옛날 월나라가 오나라에게 패했으나, 결국 세월이 지나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켰듯이, 지금 연나라의 복덕(福德)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소. 비록 진나라가 이번에 승리를 거둘지라도, 연나라는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부흥할 것이오."

한편, 연나라와 전진이 한창 싸우고 있을 이 시기에 환온이 마침내 수춘성을 함락시키고, 원근과 주보를 사로잡아 동진의 수도 건강(建康)으로 압송해 참살하였다.

건희 11년(370년) 9월, 양안은 진양을 공격하였으나, 진양에는 병력이 많고 식량도 충분하여 성을 굳게 지키고 있었으므로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이에 왕맹은 둔기교위 구장(茍萇)을 호관에 남겨 진수케 하고, 직접 병력을 이끌고 양안을 지원하여 진양을 공격하였다. 그들은 땅굴을 파서 진양성 안으로 침입하였고, 호아장군 장자가 수백 명의 용사를 이끌고 몰래 성 안으로 들어갔다. 진입에 성공한 장자는 성 안에서 큰 소리로 외치며 성문을 열었고, 왕맹과 양안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입성하면서 진양성도 결국 함락되어, 연나라의 병주자사•동해왕 모용장(慕容莊)이 사로잡혔다. 이 소식을 들은 태부 모용평은 전진군이 두려워 감히 진격하지 못하고, 노천(潞川)에 주둔하였다.

건희 11년(370년) 10월 10일[18], 왕맹은 장수 모당을 진양에 남겨 지키게 하고, 군대를 이끌고 노천으로 진군하여 모용평과 대치하였다. 모용평은 왕맹의 군대가 홀로 깊이 들어왔으니, 신속히 전투를 끝내는 것이 이롭다고 생각하면서도 지연전으로 대응하려고 하였다. 이때도 모용평의 탐욕스럽고 비열한 성품은 어디 가지 않아, 산천을 가로막아 자신의 병사들에게 물을 팔았고, 병사들은 비단 한 필당 물 두 석을 받았다. 이렇게 쌓인 재물은 언덕처럼 많았고, 군사들은 분노하여 싸우려는 의지가 없었다. 왕맹은 이 소식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
"모용평은 정말로 하찮은 자로다. 억조의 군대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데, 하물며 몇십만이겠는가! 이제 그들을 깨뜨리는 것은 필연적이다."
왕맹은 유격장군 곽경(郭慶)에게 기병 5,000기를 주어, 야간에 샛길을 통해 모용평의 진영 뒤로 접근하게 하였다. 그들은 산에서 불을 질러, 모용평의 물자들을 불태웠고, 그 불빛은 업(鄴)에서도 보였다. 이를 본 모용위는 두려워하며 시중 난이(蘭伊)를 보내 모용평에게 말했다.
"왕은 고조(高祖, 모용황)의 아들로서 사직과 종묘를 염려해야 할 자다. 어찌하여 전사들을 돌보지 않고, 나무와 물을 팔아 이익을 취하며 오직 재물 모으기에만 몰두하는가? 나라의 재물은 짐이 왕과 함께 쓸지니, 그대는 가난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만약 적군이 쳐들어와 나라가 망하면, 왕이 그동안 모은 재물은 장차 어디에 두겠는가? 가죽이 없으면 털도 붙을 곳이 없는 법이다. 재물을 군사들에게 나누어주고, 적을 물리친 후 승전하여 돌아오는 것이 우선이다."
모용평은 크게 두려워하여 왕맹에게 사신을 보내 전투를 청하였다.

10월 23일[19], 왕맹은 위원(渭源)에 진을 치고 군사를 배치하였으며, 그의 군사들은 용맹하게 나아가 모용평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모용평의 군대는 결국 대패하여 50,000여 명이 포로로 잡히거나 전사하였다. 왕맹은 승세를 타고 모용평을 추격하였고, 그 과정에서 연나라 군사 100,000여 명이 더 죽거나 항복하였다. 모용평은 홀로 말을 타고 도망쳐 업(鄴)으로 돌아갔고, 왕맹은 다시 추격하여 연나라의 수도 업에까지 진격하였다.

당초 의도왕 모용환은 10,000여 병력을 이끌고 사정(沙亭)에 주둔하여 모용평의 후속 지원군이 되었는데, 모용평의 패배 소식을 듣고 병력을 이끌고 내황(內黃)에 주둔하였다.

건희 11년(370년) 11월 6일[20], 모용환이 선비족 5,000여 명을 인솔하여 용성으로 달아났다.

당시 전진의 천왕 부견이 100,000명의 정예병을 거느리고 직접 왕맹을 지원하러 장안(長安)에서 출진하여 7일만에 업에 도착하였다. 왕맹의 군대와 업에서 합류한 부견은 건무장군 등강을 신도(信都)로 보내 공격하게 하였다.

11월 7일[21], 산기시랑 여울(餘蔚) 등은 부여, 고구려, 그리고 상당(上黨)의 포로 500여 명을 이끌고, 야간에 업성(鄴城)의 북문을 열어 전진의 군대를 들여보냈다. 모용위는 상용왕 모용평, 낙안왕 모용장, 정양왕 모용연(慕容淵), 좌위장군 맹고, 전중장군 애랑(艾朗) 등과 함께 수십 기병을 이끌고 창려(昌黎)로 도망쳤다. 이에 부견은 곽경을 파견해 그들을 추격하게 하였다.

당시 도로는 험난하였는데, 좌위장군 맹고는 몸을 던져가며 황제 모용위와 상용왕 모용평, 정양왕 모용연을 보위하였다. 도중에 여러 번 도적과 만나 싸우면서 전진하였으며, 며칠 동안 행군한 끝에 복록(福祿)에 이르러 무덤 근처에서 휴식을 취하였다. 이때 갑자기 20여 명의 도적이 활과 화살을 들고 나타났고, 맹고는 칼을 들고 싸워 몇 명의 도적을 죽였다. 그러나 힘이 다하여 반드시 죽을 것을 직감한 맹고는 도적 한 명을 붙잡아 땅에 내리쳐 죽이면서 크게 외쳤다.
"남아(男兒)로서 다하였도다!"
그때 다른 도적이 옆에서 맹고를 활로 쏘아 죽였다. 애랑 역시 맹고가 혼자 분전하는 것을 보고, 다시 돌아와 도적과 싸우다가 함께 전사하였다. 모용위는 말에서 떨어져 도보로 도망치다가, 결국 곽경에게 추격당해 고양(髙陽)에서 따라잡혔고, 곽경의 부장 거무(巨武)에게 사로잡혀 결박되었다. 이에 모용위가 말했다.
"네가 어찌 소인배 주제에 천자를 결박할 수 있단 말이냐?"
거무가 대답하였다.
"나는 양산(梁山)의 거무로, 황제의 명을 받아 도적을 결박하는 것이다. 천자는 무슨 천자란 말이냐?"
그리고는 모용위를 부견에게 보냈다.

부견이 모용위에게 항복하지 않고 도망친 이유를 추궁하자, 모용위는 말했다.
"여우도 죽을 때는 머리를 고향으로 돌리듯, 저도 선조의 무덤에서 죽고자 했을 뿐입니다."
이에 부견은 그를 불쌍히 여겨 용서하고, 모용위를 업궁으로 돌려보내어 문무백관을 이끌고 항복하도록 하였다. 한편, 곽경은 도망에 성공하여 용성으로 들어간 모용평을 끝까지 추격하였고, 모용평은 곽경의 추격이 좁혀져 오자 고구려로 도망쳤으나, 고구려는 모용평을 붙잡아 전진에 넘겼다.

용성에 있던 의도왕 모용환도 진동장군•발해왕 모용량(慕容亮)을 죽이고, 그 군대를 흡수하여 요동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요동태수 한조(韓稠)는 이미 진나라에 항복하였기에, 모용환이 도착했을 때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모용환은 요동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이윽고 곽경은 장수 주억(朱嶷)를 보내 모용환을 공격하였고, 모용환은 군대를 버리고 홀로 도망쳤으나, 주억이 그를 잡아 죽였다. 이에 모든 연나라 주군의 목(牧)과 태수, 육이(六夷)의 우두머리들은 전진에 항복하였다.(전연 멸망)

2.3. 최후

건원 6년(370년) 12월, 천왕 부견이 업궁으로 들어가 정양전(正陽殿)에 올랐다. 부견은 모용위와 황후, 왕공(王公) 이하 귀족들과 선비족 40,000여 호를 장안으로 이주시켰고, 모용위를 신흥군후(新興郡侯)에 봉하여 5,000호의 봉읍을 주었다. 이후 모용위는 상서에 임명되었으며, 부견이 훗날 천하통일의 야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동진을 대대적으로 정벌할 때 평남장군•별부도독으로 임명되어 운성(鄖城)에 주둔하였다.

건원 19년(383년) 11월, 비수대전에서 부견이 패망하자, 연나라를 부흥시키자는 모용덕의 제안을 무시하고, 군대를 버리고 달아나 부견과 함께 장안으로 돌아갔다. 이후 오왕 모용수가 거병하여 연나라를 부흥시키고 후연을 세우자, 모용위는 전진의 수도 장안에서 감시를 받는 처지에 놓였다.

건원 20년(384년) 2월, 월성(月星)이 갑자기 밝아졌고 형혹성(熒惑星)이 삼수(參宿)에 머물렀다. 이에 점성가들이 말했다.
"삼수는 위(魏)의 땅을 상징하니, 재앙이 연나라에 닥칠 것이다."

건원 20년(384년) 4월, 동생인 모용홍서연을 건국하고, 전진의 군대를 연이어 격파한 뒤에, 부견에게 사자를 보내 좋은 말로 할 때 항복하라는 오만방자한 서신을 전하였다. 부견은 크게 노하여 모용위를 불러 꾸짖으며 말했다.
"경과 경의 아비는 나라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반역하여 인신(人神)을 거스르는 짓을 하였다. 짐은 하늘의 뜻을 받아 경을 정벌하여 군사력으로 경을 얻었는데, 경은 잘못을 깨닫거나 선(善)을 따르지 않는구나! 경은 짐과 함께 종묘를 지킬 기회를 얻었고, 용서를 받아 경의 형제들 또한 상장군의 자리에 올랐다. 비록 연나라가 멸망했으나 사실상 귀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왕사(王師)가 작은 패배를 겪자마자 그대들은 이리도 방자하게 굴 수 있단 말인가? 모용수는 관동에서 긴 뱀처럼 횡행하고, 모용홍은 군대를 일으켜 내부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 지금 모용홍의 서신이 이와 같으니, 경이 떠나고자 한다면 짐이 경을 도울 수도 있다. 경의 종족은 '인면수심'(人面獸心)으로, 국사(國士)로서 대우할 가치가 없구나."
모용위는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피를 흘리고, 눈물을 흘리며 사죄하였다. 부견은 오랫동안 이를 지켜보더니 말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부자와 형제는 서로를 해치지 않는다'라 하였는데, 경의 충성심은 짐의 마음에 새겨졌다. 이는 세 명의 악당이 꾸민 일이니, 경의 죄가 아니다."
그러고는 모용위의 작위를 회복시키고, 예전과 같이 대우하였다.

부견은 모용위로 하여금 서신으로 모용홍과 모용수를 설득하여 전쟁을 멈추고, 장안으로 돌아와 반역의 죄를 용서받게 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모용위는 비밀리에 사신을 보내 모용충에게 말했다.
"지금 진나라(秦)의 운명은 다하였고, 장안에서는 기이한 일들이 매우 많이 일어나고 있어 오래 버틸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미 새장에 갇힌 신세가 되어 돌아갈 방법이 없으니, 과거에 종묘를 지키지 못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모두 나의 잘못이다. 나는 연나라의 죄인으로, 나의 생사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대는 사직을 위해 대업을 일으키고, 연나라를 부흥시키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라. 오왕(吳王) 모용수를 상국(相國)으로 삼고, 중산왕(中山王) 모용충을 태재(太宰) 겸 대사마(大司馬)로 삼아라. 그대는 대장군 겸 사도(司徒)를 맡아 모든 직무를 이어받고 봉작을 할 수 있다. 내가 죽으면 그대가 즉시 존위를 이어가라."
이로써 모용홍은 군사를 이끌고 장안을 향해 진격하였으며, 서연의 연호를 '연흥(燕興)'으로 개원하였다.

건원 20년(384년) 11월, 모용홍을 따르던 부하들이 그에게 덕이 부족하다 여겨 그를 죽이고, 그의 동생 모용충을 서연의 황제로 옹립하였다. 모용충이 장안을 포위하여 공격하자, 모용위가 동당(東堂)에 들어가 부견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고 말했다.
"동생 모용충이 의로움을 알지 못하여 나라에 반역하여 국가의 은혜를 저버렸으니, 신의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폐하께서 하늘과 땅 같은 자비를 베풀어주시어 신은 다시 살아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신의 두 아들이 어제 혼례를 올렸는데, 내일은 그 혼례의 삼일째입니다. 미천한 신은 잠시 폐하를 신의 사저로 모시고자 합니다."
이에 부견은 이를 허락하였다. 모용위가 나가자, 왕가(王嘉)가 말했다.
"갈대를 모아 집을 지으려 해도 제대로 된 구조물조차 만들지 못할 것이다."
그 후 큰 비가 내려, 부견은 모용위의 집으로 가지 않았고, 왕가의 예언대로 모용위의 부견 암살 계획은 실패하였다.

건원 20년(384년) 12월, 모용위는 본래 그의 여러 형제를 외부로 보내 군사를 일으키게 하려 했으나, 부견의 방비가 매우 엄중하여 내응할 기회를 찾지 못하였다. 당시 장안성 내에는 여전히 1,000여 명의 선비족이 있었고, 모용소의 형 모용숙(慕容肅)은 모용위와 모의하여 선비족을 결집시키고, 매복하여 부견을 죽이려 하였다. 이 계획은 선비족 무리인 실라등, 굴돌철후(屈突鐵侯) 등도 함께하였는데, 선비족 북부(北部) 사람 돌현(突賢)이 그의 여동생과 작별하며 계획을 누설하였다. 돌현의 여동생은 전진의 좌군장군 두충의 첩이었으므로, 이 사실을 두충에게 전하여 그로 하여금 부견에게 고하게 하였다. 부견은 크게 놀라 실라등을 붙잡아 사실을 확인하였고, 실라등은 결국 모의를 자백하였다.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부견은 즉시 모용위와 모용숙을 소환하였다. 이때 모용숙이 모용위에게 말했다.
"이제 일이 발각된 것 같습니다. 성 안은 이미 경계가 삼엄하니, 지금 나아가면 둘 다 죽을 것입니다. 차라리 부견의 사자를 죽이고 성 밖으로 달아나 대군을 모으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모용위는 이를 따르지 않고 부견에게 나아갔다. 모용위와 대면하게 된 부견이 말했다.
"짐이 그대를 어떻게 대했는데, 어찌 이와 같은 반역을 꾀하였는가?"
모용위는 변명으로 무마하려 했으나, 모용숙이 갑자기 나아가 말했다.
"가문의 국사(國事)는 위중한데, 어찌 의기(意氣,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릴 수 있겠습니까!"
이에 부견은 먼저 모용숙을 죽이고, 이어 모용위와 그의 아들들 및 일족을 모두 처형하였다. 성 안에 있던 선비족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학살되었다.

이때의 선비족 학살극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것은 모용수의 서손인 모용성 밖에는 없었다. 서연의 모용충은 모용위를 '유황제(幽皇帝)'로 추존했고, 약 14년 뒤 숙부인 모용덕이 세운 남연에선 '헌무황제(獻武皇帝)'로 추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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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연의 초대 황제인 세종 헌무제 모용덕이 추증한 시호이다.[2] 서연의 초대 황제인 숙종 열문제 모용홍이 추증한 시호이다.[3] 정사년 계묘월 계축일. 음력으로는 2월 23일이고, 양력으로 3월 29일이다.[4] 경신년 무인월 무술일. 음력으로는 1월 25일이고, 양력으로 2월 27일이다.[5] 경신년 경진월 기묘일. 음력으로는 3월 6일이고, 양력으로 4월 8일이다.[6] 신유년 경인월 을축일. 음력으로는 1월 28일이고, 양력으로 3월 20일이다.[7] 辰時, 오전 7~9시 사이[8] 임술년 갑진월 기유일. 음력으로는 3월 18일이고, 양력으로 4월 28일이다.[9] 임술년 병오월 정사일. 음력으로는 5월 27일이고, 양력으로 7월 5일이다.[10] 계해년 무오월 계묘일. 음력으로는 5월 19일이고, 양력으로 6월 16일이다.[11] 갑자년 병인월 병진일. 음력으로는 1월 6일이고, 양력으로 2월 24일이다.[12] 갑자년 기사월 갑진일. 음력으로는 4월 25일이고, 양력으로 6월 11일이다.[13] 을축년 신사월 임오일. 음력으로는 4월 9일이고, 양력으로 5월 15일이다.[14] 정묘년 계축월 갑오일. 음력으로는 367년 12월 7일이고, 양력으로 368년 1월 12일이다.[15] 경오년 기묘월 계유일. 음력으로는 2월 28일이고, 양력으로 4월 10일이다.[16] 경오년 신사월 신미일. 음력으로는 4월 27일이고, 양력으로 6월 7일이다.[17] 경오년 계미월 을묘일. 음력으로는 6월 12일이고, 양력으로 7월 21일이다.[18] 경오년 정해월 신해일. 음력으로는 10월 10일이고, 양력으로 11월 14일이다.[19] 경오년 정해월 갑자일. 음력으로는 10월 23일이고, 양력으로 11월 27일이다.[20] 경오년 무자월 정축일. 음력으로는 11월 6일이고, 양력으로 12월 10일이다.[21] 경오년 무자월 무인일. 음력으로는 11월 7일이고, 양력으로 12월 11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