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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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a11><tablebgcolor=#a11> ||
}}}}}}}}}}}}}}} ||<colbgcolor=#374ba3><colcolor=#ece5b6> 진류도왕(陳留悼王) 모용소 | 慕容紹 | |
시호 | 도(悼) |
작위 | 진류왕(陳留王) |
성 | 모용(慕容) |
휘 | 소(紹) |
자 | 불명 |
생몰 | ? ~ 395년 12월 8일 |
출신 | 창려군(昌黎郡) 극성현(棘城縣) |
부왕 | 모용각(慕容恪) |
형제자매 | 3남 중 차남 |
최종직책 | 우복야(右僕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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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연의 황족. 세조 성무제 모용수의 조카이자, 전연의 태재•평원왕 모용각의 차남. 태원원왕 모용해의 동생.2. 생애
건원 6년(370년) 11월, 헌무제 모용위가 전진에 패하여 나라가 멸망하자, 모용소는 다른 황족들과 마찬가지로 모용위를 따라서 장안(長安)으로 들어갔다. 천왕 부견이 멸망한 전연의 여러 황족들에게 관직을 분배할 때, 모용소는 양평국(陽平國)의 상시(常侍)로 임명되었다.건원 12년(376년) 12월, 천왕 부견이 탁발십익건의 대나라를 멸망시키자, 모용소가 형 모용해에게 은밀히 말했다.
"진나라(秦)는 자신의 강대함을 믿고 전쟁을 멈추지 않아, 북으로는 운중(雲中)을 진수하고, 남으로는 촉한(蜀漢)을 지키고 있습니다. 먼 거리를 전쟁하면서 이동하느라 길가에는 시체가 넘쳐나고, 병사들은 외지에서 지쳤으며, 백성들은 고통받고 있으니, 그 멸망이 가까워졌습니다. 숙부(叔父)께서는 인자하시고 지혜로우시며 영민하시어 반드시 연(燕)의 운명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는 그저 몸을 아끼며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건원 19년(383년) 8월, 천왕 부견이 동진의 정벌을 선포하면서 모용수를 선봉으로 삼았다. 이때 모용해는 동생 모용소와 함께 모용수를 찾아가 말했다.
"주상의 교만함이 극에 달하였으니, 숙부께서는 중흥(中興)의 업을 세우시려면 이번 기회에 이루셔야 합니다."
모용수 답했다."그렇다. 그대들이 아니면 내가 장차 누가와 더불어 이를 이루겠는가?"
이후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대패하여 패망의 길에 들어서고, 모용해는 모용수를 따라 업(鄴)으로 가 자립을 준비하였다.건원 19년(383년) 12월, 업(鄴)을 진수하던 장락공 부비는 모용수를 내심 꺼려 모용수로 하여금 신안(新安)에서 반란 일으킨 정령족 적빈(翟斌) 토벌을 명하였다. 모용수는 아들 모용농과 조카 모용해, 모용소를 업에 남겨두고, 부비가 감시역으로 붙여둔 광무장군 부비룡(苻飛龍)과 함께 적빈을 토벌하러 떠났다.
부비룡을 성공적으로 제거한 모용수는 황하를 건넌 다음, 참군 전산(田山)을 업으로 보내 모용농과 모용해 등에게 군사를 일으켜 호응할 것을 명하였다. 전산이 모용농 등에게 이를 전달했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어, 모용농과 모용해는 일단 업성에서 가만히 하룻밤을 보냈고, 모용소만 먼저 부비의 준마 수백 필을 훔쳐 포지(蒲池)에서 모용농과 모용해를 기다렸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모용농과 모용해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기병 수십 기를 인솔하여 열인(列人)으로 달아났다.
건원 20년(384년) 정월 초하루, 장락공 부비는 신정을 기념하기 위해 연회를 성대하게 열고 수많은 빈객을 초대하였는데, 모용농 등만이 오지 않자 비로소 변고가 발생했음을 깨닫고 사방으로 사람을 파견해 그들의 행방을 조사하였다. 그리고 조사한지 3일만에 그들이 열인으로 가서 거병하였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부비는 장수 석월을 보내 모용농 등을 공격했지만, 석월이 오히려 대패하여 참수당했다.
정월 26일[1] 모용수가 군대를 모아 업(鄴)으로 들이닥쳤고, 모용농, 모용해, 모용소는 무리를 거느려 모용수와 합류하였다. 모용수는 연왕(燕王)을 자칭하며 후연을 건국한 뒤, 모용소를 진남대장군으로 삼고 삼고 진류왕(陳留王)에 봉하였다.
정월 29일[2], 연왕 모용수가 모용소를 행 기주자사(行冀州刺史)로 삼아 광아(廣阿)에 주둔케 하였다.
당시 동호(東胡) 사람 왕연(王晏)이 관도(館陶)를 점거하여 업을 지키는 장락공 부비에게 호응하니, 여전히 많은 선비족, 오환족과 군현의 백성들이 제각기 요새를 점거한 채 복종하지 않았다. 이에 모용수는 정서대장군•평원왕 모용해와 모용소 형제를 보내 이들을 토벌케 하였다. 형 모용해가 모용소에게 말했다.
"선비, 오환, 그리고 기주(冀州)의 백성들은 본래 모두 연의 신하였으나, 이제 대업이 막 시작되어 인심이 아직 충분히 모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작은 이익을 탐하기보다는 덕으로써 그들을 안심시켜야 하며, 위엄으로 그들을 억누르는 것은 옳지 않다. 나는 한 곳에 주둔하여 군대의 중심이 될지니, 너는 백성과 오랑캐를 순찰하며 대의(大義)를 보여 주어라. 그리하면 그들은 반드시 복종할 것이다."
이후 모용해는 벽양(辟陽)에 주둔하였고, 모용소는 기병 수백을 거느리고 왕연에게 가서 화복(禍福)을 논함으로써 설득하였다. 왕연은 모용소를 따라서 모용해를 찾아가 투항하였고, 모용해는 그 무리의 노약자를 머무르게 한 뒤에 수령을 두어 다스리게 하고, 장정 100,000여 명을 징발하여 왕연과 함께 업으로 돌아갔다. 모용수는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너희 형제는 문무를 겸비한 선왕(先王: 모용각)의 재주를 이어받았구나."
건흥 원년(386년) 6월, 성무제 모용수는 모용소, 조왕 모용린, 평원왕 모용해, 장무왕 모용주를 보내 전진의 부정(苻定), 부소(苻紹), 부모(苻謨), 부량(苻亮) 등을 공격하게 하였다. 모용해가 먼저 서신을 보내 화복(禍福)을 설명하니, 부정 등은 모두 항복하였고, 모용수는 항복한 전진의 황족들을 모두 받아들여 후작에 봉하고 말했다.
"이로써 진주(秦主: 부견)로부터 받은 은덕을 갚았노라."
건흥 2년(387년) 2월, 성무제 모용수가 제섭(濟涉)을 위군(魏郡) 태수로 임명했으나, 제섭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동진의 태산태수였던 군벌 장원(張願)과 연합하였다. 이에 모용소는 범양왕 모용덕, 고양왕 모용륭, 용양장군 장숭(張崇) 등과 더불어 장원을 토벌하였다. 장원이 옹구(甕口)에서 모용륭과 모용덕에게 패하여 삼포구(三布口)로 들어가고, 후연군이 진군하여 역성(歷城)을 함락시키자, 청주(青州), 연주(兗州), 서주(徐州)의 군현과 요새들이 많이 항복하였다. 이후 모용소는 청주자사로 임명되어 역성을 진수하였다.
건흥 3년(388년) 2월, 동진의 평원(平原) 태수 벽려혼(辟閭渾)이 핍박해오자, 모용소는 황건고(黄巾固)로 물러나 주둔하였다. 이에 성무제 모용수는 그를 서주자사로 전임시켰다.
건흥 8년(393년) 4월, 상서우복야로 임명되었다.
건흥 10년(395년) 5월, 태자 모용보가 북위 정벌에 나설 때, 범양왕 모용덕과 함께 보•기 18,000명을 이끌며 모용보의 뒤를 이었다.
건흥 10년(395년) 11월 10일[3], 후연군이 대패한 참합피 전투에서 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