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31 13:24:29

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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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4년 ~ 407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전진 북연
전연 남연
별칭 후연(後燕), 모용연(慕容燕)
위치 중국 화북 동부
수도 중산(中山) → 화룡성(和龍城)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성 모용(慕容)
국가원수 천왕
주요 황제 성무제 모용수
소문제 모용희
언어 중세 중국어, 선비어
문자 한자
종교 불교, 도교, 유교
종족 선비족, 한족
현재 국가 중국

1. 개요2. 역사
2.1. 전연의 멸망과 부활2.2. 혼란과 수습2.3. 폭정과 멸망
3. 기타4.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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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後燕

오호십육국시대의 한 축을 이룬 국가로 모용수가 멸망했던 전연을 그대로 다시 세운 국가이다.

하북과 산동, 요서, 요동 일부 지방을 모두 움켜쥔 강대국이자 북위와 함께 화북 통일의 유력 후보 중 하나였다. 하지만 북위에게 하북을 잃어 그 사이에 모용덕이 남연을 건국해 산동이 떨어져 나가고, 고구려에게 요동을 빼앗기고 반란까지 일어나 무너지면서 모용부의 완전한 몰락으로 종지부를 찍게 된다.[1]

2. 역사

2.1. 전연의 멸망과 부활

전연 태조 문명제 모용황의 다섯째 아들인 모용수는 간신 모용평의 암살 음모를 피해 전진으로 망명했는데, 이후 전진의 부견비수대전에서 패해 무너지고 틈을 타 자립하여 멸망했던 연을 다시 세우는데, 이 새로운 연나라를 현대에는 후연으로 칭한다.

그는 하북을 평정하고 386년 중산에 정도하여 황제를 선포했다. 이후 같은 모용씨 국가인 서연을 멸망시키고 산동까지 정복하는 등 당대의 최강자에 오르나, 북위와의 참합피 전투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고, 모용수는 이 참합피 전투의 참상을 본 후 죽은 병사들을 위해 제를 지내다가 화병으로 사망함으로써 후연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어쨌든 요하를 중심으로 요서와 요동 일부를 차지했으며, 비록 하북을 차지했던 과거와는 비교도 못하지만 전국시대 강국 의 영역과 비슷함을 생각하면 결코 작은 영역은 아니었다.[2] 일단 북위에게 하북을 빼앗기고 남연이 떨어져나간 시점에서는 요서에 살았던 인구가 50만 정도로 추산된다.[3] 이 인구는 후연이 차지하고 있었던 요동 부분은 제외하고 추산된 것이니 실제 인구는 좀 더 많았겠고, 동한 시대 요서 인구 40만(사마의가 동연을 정복하고 대학살을 저지르며 이후 조위-서진 정권이 고의적으로 요서 인구를 줄이려 했던 시절엔 20만이었다.)에 비해 약간 늘어난 것이지만 동방의 맞수 고국양왕~광개토대왕 시대의 고구려보다 국력이 확실히 약했던 것만은 분명하다.[4] 그러나 고구려에게 어쨌든 양면전선을 강요할 정도 국력은 되었고, 말이 50만이지 이 정도로 돌아가는 중앙 집권화된 국가면 고대 세계에서 결코 허수아비라곤 볼 수 없이 꽤 많은 인구다.

2.2. 혼란과 수습

모용수가 북위에게 대패한 충격과 그 전투에서 죽은 병사들의 해골을 보고 절망감으로 화병을 앓다가 사망하여 그의 4남 모용보가 즉위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의 쇠락상을 극복할 만한 위인은 아니었다. 그의 치세에는 온갖 내분이 횡행했고, 막 세력을 확장해나가던 북위의 탁발규에 의해 백사(柏肆)에서 15만 대군이 전멸하고, 1년 만에 중산과 화북도 상실하면서 이후에는 그야말로 멸망에 가깝게 무너져갔다. 그의 아우 모용덕이 남연을 세우며 남쪽 지방이 한꺼번에 떨어져나간 것도 치명타였다. 그래서 이때부터 북연이라고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끝내 모용보는 먼 친척이자 사돈인 난한에게 죽임을 당하고, 난한이 황위를 찬탈하여 모용씨의 왕조는 일시적으로 붕괴했으나, 난한은 곧 모용보의 아들이자 자신의 사위인 모용성에게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고 끝내 모용성이 황위를 회복하여 왕조를 되살리게 된다.

모용성은 공포 정치로 여러 인사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여 반란이 끊이질 않았으나 모두 진압하는 위용을 과시했다. 그 뒤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조공을 받았으나[5] 역으로 사신의 무례함을 명분 삼아 광개토대왕이 신라 구원을 위한 가야 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평양으로 가 있는 동안 고구려를 침공, 신성과 남소성을 함락하고 700여 리를 개척하여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까지 위협하였다.

하지만 몰락해가는 후연을 재건하고 고구려까지 위기로 몰아넣은 모용성은 얼마 가지 않아 용성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다가 패잔병의 습격으로 허무하게 사망한다.

2.3. 폭정과 멸망

그 뒤 모용수의 늦둥이 아들 모용희가 군주가 되었다. 모용성의 두 아들을 제치고 그가 즉위한 것엔 형 모용보의 부인, 형수 태후 정씨의 공이 컸다. 정씨는 모용희와 간통했는데 그 대가로 황제에 올려주었다. 모용희는 즉위 이전에 표기대장군으로 있으면서 고구려 토벌을 지휘하여 위에 기술한 바와 같은 큰 공을 세웠고, 그 전에 북위와의 전투에서도 여럿 공을 세운 바 있었다. 이런 배경으로 후연의 군권을 휘어잡았고 더군다나 모용수에 버금간다고 할 만큼 뛰어난 평을 받는 인재였다.

하지만 즉위 이후에는 정반대의 막장일로를 걷는다. 신라 원정에서 돌아온 광개토대왕의 대반격으로 요동 전역을 잃은 것을 넘어 영토 깊숙한 곳의 숙군성, 연군[6]까지 털리면서 이제는 반대로 후연이 고구려에게 수도 용성을 위협받는 역전이 일어났다. 게다가 아예 이 시기에는 요서 일대에 고구려가 알박기를 시전하면서 적어도 오늘날 대한민국 충청남도 정도 면적은 해당하는 영토를 직접 지배화하려 할 정도.[7]

모용희는 부씨 자매를 총애해서 황후와 귀비로 삼고 말 그대로 뭐든지 들어주었다. 한편 태후 정씨는 총애를 잃고 절망하다가 병부상서 정신과 함께 모용희를 폐위하려고 모의했다가 발각되어 자살했다. 부씨 자매는 민간에 놀러다니며 초호화판 파티를 했고 또 모용희에게 각종 사치스런 토목공사를 장려했다. 모용희는 그것을 모두 들어줬고 갑자기 귀비 부씨가 앓다가 죽자 치료하던 태의 왕온이 성의가 없었다면서 잔인하게 쳐 죽였다. 그는 내친 김에 고구려에 반격하여 요동성을 공격해서 함락 직전까지 몰았다. 그런데 갑자기 전투를 중단시키고 자신이 황후 부씨와 함께 가장 먼저 요동성에 입성하겠다며 요동성을 무너뜨리고 평지로 만들어 가도를 뚫도록 명령한다. 이 때문에 요동성 함락은 실패했다. 이후 거란을 원정했다가 무리가 많음을 보고 지레 겁을 먹고 공격하지 못했다. 모용희는 퇴각하려고 했으나, 황후 부씨가 왠지 거절하자 이번에는 고구려를 공격하려고 했다. 동호[8] 대신 동이를 공격한다. 이동의 신속함을 위해 치중과 무거운 것을 모두 버리고 경무장으로 무려 3,000리를 행군하여 목저성을 공격했으나 역시 패퇴했다.

이후 황후 부씨가 죽자 모용희는 슬픔에 잠겨 성대한 장례식을 치뤘는데 크고 아름다운 무덤을 축조토록 했다. 또 전국에 명을 내려 눈물을 흘리지 않거나 곡을 하지 않은 자는 처벌하도록 했고 대신들을 그 무덤에 순장시키려고 해서 나쁘던 민심을 더욱 잃는다. 모용희는 이미 염습이 끝난 부씨의 관을 열고 시간을 한 뒤[9] 상복을 입고 머리를 풀어헤치며 맨발로 그 상여를 직접 메고 용성을 나섰다. 그런데 상여가 너무 커서 북문을 무너뜨리고 나갈 정도였으며 이 틈을 타 호한 혼혈로 한족이던 풍발이 반란을 일으켜 모용보의 양자인 고구려계 모용운(慕容雲)을 황제로 추대했다.

모용희는 용성을 공격했지만 실패하고 군대마저 흩어져 자신이 세웠던 용등원으로 달아났다가 끝내 사로잡혀 처형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래도 모용운은 예의를 갖춰 부씨와 합장해 주었다. 이렇게 후연은 외우내환으로 멸망하였고, 모용운이 북연을 건국하며 명맥을 이어나갔다.

3. 기타

2011년 KBS 드라마 광개토태왕고구려의 메인 적국으로 등장하는데 후연과 고구려 인물들이 연이 아니라 후연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후연은 후대에 역사가들이 먼저 있던 춘추전국시대의 연, 전연과 나누려고 본래 국호인 연나라에 뒤 후(後)자를 붙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국호가 같으면 후(後)나 고(古)를 붙여 나누는 일이 있는데도(예를 들면 고조선조선, 고구려후고구려, 백제후백제) 드라마에서 연나라라고 한 건 얼마 없고 매번 다 후연으로 언급하고 넘어가 버리니.

어쩌면 제작진이 알면서도 시청자들이 헷갈릴까봐 그냥 후연으로 불렀을 수도 있으나 그럴 개연성은 없다. 시청자들은 그런 거 의외로 관심이 없고 후연이 전연의 연장이니 전연이나 후연이나 거기서 거기다. 거기다가 북연까지 쭉 (대)연이라는 국호를 잇고, 이로 말미암아 북연의 시작이 모용보고운이냐 풍발이냐라는 논쟁까지 나는 마당인데 그런 배려가 얼마나 도움일까? 게다가 후고구려(태봉)와 후백제태조 왕건에서는 극중에서는 고증에 맞게 인물들이 다 고려, 백제로 국호를 언급하며 칭했다.

그냥 당시 드라마 제작진이 역사적 지식이 매우 부족해서 그랬다는 간단한 이유로 넘길 수 있다.

4. 역대 군주

<rowcolor=#fff>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능호
- - 연왕(燕王) 모용수 연원(燕元) 384년 ~ 386년 384년 ~ 386년 선평릉(宣平陵)
1대 세조(世祖) 성무황제(成武皇帝) 모용수 건흥(建興) 386년 ~ 396년 386년 ~ 396년 선평릉(宣平陵)
2대 열종(烈宗) 혜민황제(惠愍皇帝) 모용보 영강(永康) 396년 ~ 398년 396년 ~ 398년 -
임시 - 창려왕(昌黎王) 난한 청룡(靑龍) 398년 398년 -
3대 중종(中宗) 소무황제(昭武皇帝) 모용성 건평(建平) 398년
장락(長樂) 399년 ~ 401년
398년 ~ 401년 흥평릉(興平陵)
4대 - 소문황제(昭文皇帝) 모용희 광시(光始) 401년 ~ 406년
건시(建始) 407년
401년 ~ 407년 -

[1] 다만 후연의 멸망으로 모용부가 완전히 사라진건 아니다. 아직 남연이 남아있었고 또 모용외의 이복형인 모용토욕혼이 세운 토욕혼은 7세기까지 남아있었다. 다만 남연의 멸망으로 모용외의 후손들은 망했다. 심지어 후연이 북위와의 전쟁으로 멸망한 와중에 토욕혼은 오히려 북위와 손잡고 사이에 있는 북하를 공격하기도 했다(...)[2] 다만 영역만 작지 않았다 뿐이지 이것도 결국 원래 있던 영토에서 줄어든게 이 모양인데다 심지어 산동은 남연으로 떨어져 나감으로서 위치상으론 중국 동북부 끝자락에 위치한 초라한 나라가 된 셈이다(...) 전신인 전연은 아얘 현 허베이성에 위치한 업을 수도로 삼았다는걸 감안하면 대단히 초라한 수준.[3] 한성백제박물관 발간 백제사 시리즈 요서 편 참조[4] 이 정도 국력이면 총 인구만 따질 경우 진사왕과 아신왕의 그 백제보다도 적었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백제는 가야, 왜와의 외교도 잘해서 원래 국력을 초과한 병력도 뽑아낼 정도였는데 후연은 그런 상황도 아니었다.[5] 황제로 등극한 모용성이 이해 설날에 자신의 칭호를 천왕으로 삼았는데 이를 기념하는 명분으로 사신을 보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전에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후연을 달래 놓을 의도가 있었을 수도 있다.[6] 원래는 베이징 부근이지만, 앞서 연군 태수가 이미 북위에게 항복한 사건이 있었으니 옮겨진 대릉하 유역으로 옮겨진 행정구역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다만 이전보다는 소수지만 북경이라는 견해도 여전히 어느정도의 근거를 갖추고 있다.[7] 그러나 이 영토는 그 당시 복수욕에 미친 아신왕의 백제가 또 가야-왜-백제 삼국 연합군을 끌고 평양 주변을 공격하던 터라, 요서 방어선 구축에 유리하지 않겠다고 판단한 광개토대왕이 포기하고 물러나게 된다. 물론 요동강 서쪽의 고구려 요새들은 무려 수양제 시기 이전까지도 유지되고 있었는데 이 당시 광개토대왕이 확보한 영역이었을 개연성은 높다.[8] 사실 후연의 모용선비족도 거란족과 같은 동호 계통이다.[9] 대렴이 이미 끝나, 그 관을 열어서 겹쳐 더불어 교접하였다. 大斂既訖,複啟其棺而與交接。 ─ 《진서》 124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