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30 20:38:15

모용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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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임시 제3대 말대
성무제 혜민제 창려왕 소무제 소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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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부 慕容部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막호발 모용목연 모용섭귀 무선제 문명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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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연 섭인 도이후 부연수 과여
제16대 제17대 제18대 제19대
세부 부윤 낙갈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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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8a2c8><colcolor=#000>
후연 제2대 황제
열종 혜민제 | 烈宗 惠愍帝
출생 355년
후연 장락군 신도현
(現 허베이성 헝수이시)
즉위 396년 6월 2일
후연 화룡성
(現 랴오닝성 차오양시)
사망 398년 5월 27일 (향년 43세)
후연 화룡성 성밖
(現 랴오닝성 차오양시)
능묘 미상
재위기간 후연 황태자
384년 1월 ~ 396년 6월 2일
제2대 황제
396년 6월 2일 ~ 398년 5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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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8a2c8><colcolor=#000> 성씨 모용(慕容)
보(寶)
부모 부황 세조
모후 성소황후
형제자매 10남 중 4남
배우자 혜덕황후, 맹씨, 모씨
자녀 8남 1녀
아명 고구(庫勾)
도우(道祐)
묘호 열종(烈宗)
시호 영황제(靈皇帝)
혜민황제(惠愍皇帝)
연호 영강(永康, 396년 ~ 3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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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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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연(後燕)의 제2대 황제.

휘는 보(寶), 자는 도우(道祐)로 묘호는 열종, 시호는 혜민황제(惠愍皇帝)였다. 세조 성무제 모용수의 4남으로, 후연의 제위를 물려받았다. 이미 북위의 위협이 가시화된 마당에 무리한 개혁을 추진하여 반발이 일어났고, 마침내 북위의 공세를 버티지 못한채 요서로 달아나게 되었다. 요서에서 다시 중원으로 나오려던 와중에 단속골의 반란으로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었으며, 단속골을 죽인 난한이 모용보를 받들겠다고 하자 이를 믿고 용성으로 들어갔다가 난한에게 목숨을 잃었다.

후연의 태자이자 황제로서 고작 3년만에 비명횡사했다. 하지만 후연이 약해져버린 것이 딱히 그의 잘못만은 아니다. 모용보를 깔보고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키며 후연의 국력을 의미없이 소진시켰던 다른 모용씨 황족들이 의외로, 일선 소부대 지휘관으로서는 나쁘지 않았던 모용보에게 당해 참살당한 케이스가 꽤 된다. 서장자인 모용성(중종 소무제)은 꽤 뛰어난 점도 있었고.

2. 생애

장남 모용전, 5남 모용주와 함께 전처 단씨의 소생이었다. 그의 형들은 모용수가 전진에 있을 때 사망했다고 한다. 모용보의 서장자인 모용성부견이 몰락한 후 벌어졌던 장안의 모용씨 학살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도망쳐왔다.

북위의 건국자인 태조 도무제 탁발규가 강성해지자 태자로서 아버지 모용수의 명령을 받아 정벌에 나섰지만, 도리어 탁발규의 계책에 낚여 회군하다가 참합피 전투에서 참패하여 결과적으로 아버지도 분사하게 만들었다. 모용수 항목 참조. 모용수가 붕어한 후 탁발규는 , , 세 땅만 남겨놓고 후연 전역을 유린했으며, 모용보는 그나마도 항복할 경우 무조건 죽이는 탁발씨의 잔혹함이 아니었으면 민심을 수습하지 못해 지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군사적인 재능이 아주 없지는 않아서 회군하던 북위군을 불시에 엄습한 호연타 전투에서는 탁발규도 위험했다. 그러나 북위군의 진영을 야간에 접수한 후연군이 서로의 오해로 자중지란에 빠졌던 데다가 예비대를 지휘하던 모용보가 너무 망설이는 바람에 호기를 놓쳤다.

이후 탁발규가 되돌려 대승했고, 정책을 투항 우대로 전환하면서 신만을 함락시켰다(397). 탁발규는 회군해 다음해 황제로 즉위했고, 이후 강족 요씨의 후진과 영토 분쟁을 벌였다.

398년 탁발규의 북위 군대가 돌아가자, 모용보는 영토 수복에 나서서 대군을 이끌고 용성 서쪽 을연에 주둔했으며, 다른 북위 주둔군한테서 소소한 승리도 거두고, 그를 만만하게 본 다른 모용씨 종실의 군대도 쉽게 진압했다.[1] 그런데 금위군 장상이었던 단속골이 반란을 일으켜 세조 성무제 모용수의 7남 모용륭의 아들인 모용숭을 추대했다(단속골의 난). 이에 모용보는 부황 모용수의 6남 모용농[2]의 군영으로 달아나 아들 모용성의 군대와 합세하여 용성으로 들어갔고, 단속골은 모용보의 동복동생인 모용주를 비롯한 종실의 여러 왕족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이어서 모용숭을 추대한 단속골이 상서 난한과 함께 용성을 공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 모용농마저도 난한의 꼬임에 넘어가자 한동안 수성전을 벌이던 모용보와 모용성 부자는 남쪽으로 달아났고, 모용농은 모용숭의 부하들에게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내 난한이 다시 반란의 주모자인 단속골을 죽인 뒤 모용보를 보위한다는 말로 꾀어들여서 시해하고, 난한 자신이 대선우로 즉위했다.(난한의 난) 이후 모용씨 황실은 모용성, 세조 모용수의 막내 아들 모용희 정도만 빼고는 거의 몰락해버렸다.

3. 대중매체에서

희대의 막장 사극 <광개토태왕> 초반부에 등장한다. 배우는 임호. 전형적인 주적 캐릭터로,[3] 어떤 자리에서도 담덕을 죽이기 위해 별의별 계략을 다 짜지만 담덕한테는 그냥 손바닥 안이다(...). 그런 주제에 꼴에 태자랍시고 광개토태왕을 일생일대의 라이벌[4]로 여기며 열폭한다. 그나마 극도의 잔인함이 부각되는 아우 모용희보다는 인간성이 조금은 있는 편. 후반부에 담덕에게 열폭해 나라까지 말아먹을 수준의 전쟁을 준비하다가, 모용희의 반정때 모용희의 칼에 스스로 찔려 사망한다. 다만 이건 작가가 역사를 잘 몰라서 상당히 캐릭터를 잘못 해석한 것으로, 주변인물들에게 어느 정도 찌질이로 오해받지만 결정적일 때 할 건 하는 의외의 모습을 구현했다면 더 나았겠지만 해당 사극 작가가 워낙 역사에 관심이 없었기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4. 둘러보기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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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제기(帝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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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18,#e5e5e5
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사마연(衍) · 사마악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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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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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기(戴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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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해 ,유화 · 유선, 유총 ,유찬 · 진원달, 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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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륵 ,석홍 · 장빈, 석계룡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배억 · 고첨, 모용황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왕타, 부견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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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때 공을 세운 장수들 중 한 명이 훗날 북연의 초대 황제가 되는 고운(모용운)이었다.[2] 고구려 제18대 고국양왕이 요동군과 현도군을 점령했을 때 탈환한 인물이었다.[3] 실제로 모용보는 담덕과는 별 연관이 없었던 사람이며, 아들 모용성과 동생 모용희가 진짜 주적이었다.[4] 다들 알겠지만 모용보만 그리 생각했다. 담덕에게 있어서는 그냥 지나가는 벌레 수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