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11 13:42:07

이세(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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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 제5대 황제
이세 | 李勢
<colbgcolor=#CD7F32> 묘호 없음
시호 없음
제호 후주(後主)
작위 귀의후(歸義侯)
연호 태화(太和, 344년 ~ 346년)
가녕(嘉寧, 346년 ~ 347년)
이(李)
세(勢)
자인(子仁)
생몰 기간 ? ~ 361년
재위 기간 343년 ~ 347년

1. 개요2. 생애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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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오호십육국시대의 십육국 중 하나인 성한의 제5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 자는 자인(子仁). 멸망군주이기 때문에 묘호와 시호는 없고 통칭은 후주(後主)로 동진에서 받은 작위는 귀의후(歸義侯)이다.

2. 생애

본래 이수의 본처인 염씨(閻氏)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이에 이수의 아버지 이양이 이봉(李鳳)의 난을 진압할 때 이봉을 죽이고 그 딸인 이씨(李氏)를 이수에게 첩으로 시집보냈다. 여기서 이씨가 낳은 아들이 이세로, 첩소생이라 적장자는 아니었지만 어차피 적자가 태어날 일도 없어서 이수의 세자가 되었다. 이세의 키는 7척 9촌에다 외모도 나름 준수했는지 이기는 이세의 용모와 자질을 흠모해 익군장군으로 삼아 곁에 두었다. 338년에 아버지가 이기를 폐위시키고 황제에 오르자 한왕세자에서 태자가 되었다.

341년 12월, 이수가 태자 이세에게 영대장군, 녹상서사를 겸하게 했다.

343년에 이수의 뒤를 이어 황제로 즉위하였다. 연호를 태화(太和)로 고치고 적모 염씨를 황태후로, 생모 이씨를 태후로 모셨다.

344년, 태사령 한호(韓皓)가 "형혹성[1]이 심수[2]에 머무러 있으니, 이는 그동안 종묘를 보수하지 않은 것에 대한 하늘의 규탄입니다."라며 상소하였다. 이세가 이 일에 대해 조정에서 신하들과 논의하자 상국 동교(董皎), 시중 왕하(王嘏)가 말했다.
경황제 이특과 무황제 이웅께선 국가 대업을 세우셨고 헌제 이양과 소문제 이수께선 국가 정권을 계승하였습니다. 이들은 국가와 끊을 수 없는 사이이므로 결코 소원히 대해선 안되니, 반드시 제사를 재개하여야 합니다.
이에 이세는 이수가 폐지한 이특과 이웅의 제사를 다시 지내도록 명했지만, 대신 황제가 아닌 왕의 예로 제사를 올리게 했다.

345년 9월, 이세에게 자식이 없었기에 아우인 대장군 한왕(漢王) 이광(李廣)은 자신이 황태제가 되고 싶어하였다. 이세의 부하인 마당(馬當)과 해사명(解思明)도 이광을 황태제로 삼을 것을 이세에게 주청하였으나, 이세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세는 오히려 마당과 해사명이 이광과 함께 음모를 꾸미는 것으로 의심하여, 이들을 붙잡아 죽였고 삼족을 멸하게 했다. 그리고 태보 이혁(李奕)에게 부성(涪城)에 있던 이광을 습격해 작위를 임공후(臨邛侯)로 깎아내렸다. 이 일로 이광은 크게 절망하여 결국 자결한다. 처형장으로 끌려가던 해사명은 태연히 웃으며 탄식했다.
나라가 이 지경이어도 지금까지 멸망하지 않은 것은 우리들 덕분이거늘, 이제 우리들마저 죽으니 나라가 위태로워 지겠구나!
해사명은 일반 백성과 병사들 사이에서도 인망이 높아 그가 처형되자 애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346년 10월, 태보 이혁이 진수(晉壽)에서 거병해 그 무리가 수만에 이르렀다. 이혁의 군사적 능력은 출중했기에 이세가 근심하여 직접 성벽 위에 올라 친히 군대를 지휘해 이혁의 공세를 막았다. 그러나 이혁은 홀로 말을 타고 성문을 향해 돌진했다가 이세의 병사가 쏜 화살에 맞아 그대로 허무하게 사망하면서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혁을 주살한 이세는 대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가영(嘉寧)으로 바꾸었다.

이세는 이혁의 반란을 보고도 배운 것이 없었는지, 이후로도 교만하고 음란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궁궐 안에 항상 틀어박혀 있어 신하들을 만나는 일이 매우 적었다. 아첨하고 모함하는 자들을 승진시키고 가혹한 형벌을 함부로 휘두르니 촉의 민심이 모두 이반하였다. 산에만 틀어박혀 살던 요족(獠族)들도 이때를 기점으로 하나둘 내려와 백성들을 약탈하고 난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요족의 부락들은 파서에서 재동까지 흩어져 성한 내부에 엄청난 혼란을 일으켰다. 백성들이 고통받는 가운데 이세는 요족의 난을 진압할 생각은커녕, 재물을 탐하고 여색을 밝혀 유부녀를 취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346년 11월, 내부의 혼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동진환온이 성한을 침입하였다. 347년 2월에 환온의 군대가 청의(靑衣)에 주둔하자, 이세는 군사를 크게 일으켜 숙부 우위장군 이복(李福), 사촌형 진남장군 이권(李權), 전장군 이잠견(李昝堅)을 보내 합수(合水)로 나아가게 했다. 이복과 이권은 합수 남쪽에 매복하려 했지만 이잠견은 이에 동의하지 않고 혼자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건위(犍為)로 향했다.

한편, 팽모(彭模)에 도착한 환온은 원교(袁喬)의 건의를 받아들여 필사의 각오를 다지기 위해 가마솥과 질그릇을 깨고 3일치 식량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강물에 버렸다. 그 후 손성(孫盛)과 주초(周楚)는 팽모에 남아 치중을 지켰고, 주력은 계속하여 성도로 향했다. 이복의 군대가 팽모에 있는 동진군을 습격했으나 손성과 주초의 분투로 인해 이내 지쳐 물러났다. 이권도 유리한 지형을 이용해 성도로 향하는 동진군을 세 차례나 기습하지만 전부 패배하여 병력은 모두 흩어졌고, 진남장군 이위도(李位都)는 환온에게 항복, 이권만 홀로 성도로 달아났다. 건위로 향하던 이잠견은 환온과 길이 엇갈린 것을 알고 급히 군사를 돌려 사두진(沙頭津)을 건너서 겨우 환온군과 만날 수 있었지만, 환온군이 이미 성도로부터 십리도 안되는 곳까지 당도한 것을 본 이잠견의 병사들은 망했음을 알고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마침내 성도에 도착한 환온은 이세가 친히 지휘하는 성한군과 성도 작교(笮橋)에서 맞붙었다. 전투는 무척 치열하여 동진의 참군 공호(龔護)가 전사하고 환온이 탄 말이 화살의 맞아 죽는 등, 동진군의 전세가 불리하였다. 환온이 후퇴하기 위해 퇴각을 명했는데 북치는 병사가 이를 잘못 보고 전진 신호를 보내니, 환온군의 선봉장 원교가 칼을 뽑아 직접 성한군에 돌진하였다. 대장이 적군에 기세좋게 뛰어드는 것을 본 병사들도 사기충전하여 온 힘을 다해 성한군을 쳐 결국 대파하였다. 이세는 패주해 성도로 들어갔지만 바짝 뒤쫓아온 환온이 성 앞까지 도착하여 각 문에 불을 질렀다. 이세의 자제들은 공포에 떨며 이미 성을 지킬 생각 따윈 없었고, 중서감 왕하, 산기상시 상거 등의 신하들은 얼른 항복해야 한다 주장했다. 이세가 시중 풍부(馮孚)에게 의견을 묻자 풍부가 답했다.
과거 오한이 촉 땅을 정벌하고 공손씨를 멸족한 일을 잊으셨습니까? 지금 항복하더라도 진나라가 이씨를 사면하지 않는 이상 살 길은 없을 터이니, 일단 몸을 피하고 목숨부터 구해야 합니다.
이세도 이를 옳게 여겨 성도를 빠져나와 가맹관으로 도망친 뒤, 그곳에서 사면을 청하는 항복 문서를 써서 보내니, 환온은 이세의 청을 받아들였다. 이윽고 이세가 스스로를 결박한 채 수레로 관을 끌면서 환온군 진영 앞에 이르자, 환온이 나와 손수 이세의 결박을 풀어주고 그 관을 불태워 사면을 확실하게 약속했다. 이세는 이복, 이권 등 성한의 황족 10여명과 함께 동진의 수도인 건강으로 압송되었다. 건강에 도착한 이세는 귀의후(歸義侯)로 책봉받아 동진에서 여생을 보냈고 361년에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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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의 역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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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날의 화성(火星)으로 고대에는 병란과 재화를 의미했다.[2] 동양의 28수 별자리 중 하나로, 서양으로 치면 전갈자리. 고대 중국에서는 재앙의 별인 화성이 왕의 자리를 상징하는 전갈자리에 드리우는 것을 매우 불길하게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