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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제(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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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제4대 황제
민제 | 愍帝
출생 300년
서진 하남군 낙양
(現 허난성 뤄양시)
즉위 307년 1월 11일
서진 하남군 밀현
(現 허난성 정저우시)
사망 318년 2월 7일 (향년 18세)
전조 평양
(現 산시성 린펀시)
능묘 미상
재위기간 서진의 황제
313년 6월 7일 ~ 316년 1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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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후 영천 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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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호 진왕(秦王)
시호 효민황제(孝愍皇帝)
연호 건흥(建興, 313년 ~ 3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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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즉위 과정3. 마지막 발버둥4. 장안 함락과 폐위5. 최후6. 여담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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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나라의 제4대 황제이자, 서진의 마지막 황제. 시호는 민황제(愍皇帝). 자는 언기, 진무제 사마염의 15남인 오왕 사마안의 아들로 숙부 사마간의 양자가 되어서, 사마간이 요절한 후 뒤를 이어서 진왕(秦王)이 되었다.

서진의 마지막 황제지만, 서진은 이미 낙양 함락과 회제의 죽음으로 사실상 멸망한 상태였고, 진민제가 직접 통치한 범위는 장안과 그 주변에 불과하였다. 당시 화북은 전조가 차지하고, 강남(중국)은 서진의 영토였으나, 사마예가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어서, 민제의 서진 조정은 사실상 지방 정권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최후의 발버둥을 쳤지만 멸망은 피할 길이 없었으며 멀리 양자강 너머 강남에 있어 안전을 보장받은 사마예가 동진을 수립해서 대를 이었다.

2. 즉위 과정

영가 5년(311년), 영가의 난으로 인해 낙양이 떨어지자 숙부 회제가 사로잡혔고 아버지 사마안도 죽었다. 당시 11살이었던 사마업은 영가 6년(312년)에 밀현으로 이동했고 거기서 만난 외삼촌이자 서진 관리들인 순번, 순조에 의해 군주로 추대되었다. 이듬해에 중앙 정부를 다시 세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염정이 사마업을 관중에 모시려고 시도했으나 그 과정에서 친척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지지자들이 사마업을 떠났다. 그래도 염정과 사마업은 결국 관중에 도착했고 안정태수였던 가필 장군의 지원을 받았다. 장안은 그전에 유총이 점령했지만 잠시 흉노의 내분을 이용해 312년에 가필이 장안을 탈환했기 때문에 사마업은 그 곳에 본거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312년 가을 염정과 가필은 사마업을 황태자로 추대하고 임시 정부를 조직했다.

영가 7년(313년) 봄, 전조의 유총에 의해서 회제 사마치가 처형되었고, 이 소식이 장안까지 닿는 데에 3개월이 걸렸다. 이후에 숙부 사마치의 상을 치르고 결국 황위에 올랐다. 하지만 오랜 전란으로 장안은 총 가구수가 100호도 되지 않았고, 사용 가능한 마차 역시 4대밖에 없었다. 또 관리들이 사용할 도장과 피복까지 부족한 상황이었고, 병권은 국윤과 삭침이 쥐고 있었다.

3. 마지막 발버둥

사마업은 이미 죽은 동해왕 사마월의 조카인 사마보가 진주에 상당한 세력을 가진 것을 알고, 남양왕에 봉했으며, 사마의의 4남 사마주의 손자인 사마예장강 유역 및 강남(중국)에 상당한 영토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낭야왕에 봉했다. 이것은 그들에게서 도움을 얻기 위한 것이었지만, 민제에게 사마보와 사마예는 특별한 충성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건흥 2년(314년), 전조는 장안을 급습했고 그 공격 자체는 실패하기는 했지만 이는 민제 정권하의 서진이 자기 자신을 방어하는 데에도 힘이 부족했던 것을 보여주었다. 그나마 양주 자사 장궤가 약간의 군사를 파견하여 장안을 잠시 도와주어서 수비가 가능했다.

건흥 3년(315년), 사마보는 사마업을 돕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는 않았고, 삭침 역시 황제가 사마보에게 이용을 당할까 우려되어 황제를 사마보에게 보내지 않았다.

4. 장안 함락과 폐위

건흥 4년(316년) 가을, 전조의 장군이자 유총의 친척이었던 유요가 민제의 영토에 대규모 침공을 해왔고 북지의 비밀기지가 함락되면서 관중에 있었던 다른 도시들도 붕괴된다. 구원군이 2곳에서 도착했지만 막상 유요군과 맞서기를 주저했고, 유요는 장안의 외성을 포위했다. 외성이 떨어지고 장안의 식량이 거의 바닥나 쌀 1말이 금과 같은 가격으로 거래되었고 내성도 떨어질 위기에 처했다. 이때 죽으로 연명하던 사마업은 항복을 결심해 윗도리를 벗으며 옥새를 차고 입에는 구슬을 물며 양을 끌고 가는 고대 중국의 항복 의식(함벽여츤)을 수행하면서 투항했다. 그는 이후 유요에 의해 전조의 수도 평양으로 압송되었다.

5. 최후

유총은 포로로 데려온 사마업을 회평후(懷平侯)에 봉했다. 건무 2년(318년) 유총은 그를 거기 장군에 임명했지만 연회에서 죽은 사마치처럼 사마업에게도 하인 노릇을 시키고, 사냥갈 때는 맨 앞에서 창을 들고 걸어가게 하는 굴욕을 주었다. 당시 전조에 대한 여러 봉기가 있었는데 그의 태자 유찬을 대신해 진 황제를 다시 옹립하려는 목적이었으므로 유찬은 사마업의 처형을 건의하였고 유총은 이를 받아들여 사마업을 죽였다. 나중에 유총의 아들 유찬을 죽인 근준의 난을 틈타 동진의 원제 사마예가 태상 한윤(韓胤) 등을 보내 사마치와 사마업의 영구를 강남으로 가져와 안장했다.

6. 여담

한편 남양왕 사마보의 아버지 남양왕 사마모는 형제인 사마월을 배신하고 관중에서 독자적으로 세력을 키웠으나, 영가 5년(311년)에 살해되고, 아들인 사마보가 남양왕의 자리를 계승했다. 하지만 사마업이 사로잡힐 때까지 구원해 주지 않고 결국 사마보는 대흥 2년(319년) 4월에 독자적으로 진왕이라 칭했다. 하지만 다음 해 3월 사마보는 부장이었던 장춘, 양차 등에 의해 살해당하고 그 세력은 장궤의 아들 장식유찬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이로서 서진은 멸망하였으며 사마예가 동진을 건립하게 된다.

한때 손오의 수도였던 건업(建業)은 이 인물의 이름을 피휘한다는 이유로 도시 이름이 건강(建康)으로 바뀌게 된다.

7. 둘러보기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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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펼치기 · 접기 ]

[추존] [2] 황제로서의 뚜렷한 존호를 헌상받지 못했으나 다른 추존 황제와 동격배향(同格配享).[3] 친부는 의양성왕[4] 친부는 안평헌왕[5] 숙부(실제로는 종숙) 창무정후에게 출계(出系)[추존] [추존] [8] 친부는 진문제[9] 종숙(실제로는 숙부) 요동도혜왕에게 출계[10] 종숙(실제로는 숙부) 광한상왕에게 출계[추존] [12] 적장자나 두 살에 요절하여 혜제가 사실상 장남이 되었다. 항목이 존재하고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13] 친부는 회남충장왕[14] 여기까지 서진[15] 친부는 오효왕[16]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17] 숙부 성양애왕에게 출계[18] 친부는 사마유(동래왕)[19]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20] 적장자였던 비릉도왕처럼 한 살에 요절했으나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한다.[21] 직접 난을 일으킨 적은 없는 여남문성왕 대신 팔왕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22] 백부 진세종에게 출계.[23] 친부는 진무제[24] 친부는 제헌왕[25] 백부 성도왕에게 출계[26] 친부는 제헌왕[27] 숙부 연왕 경에게 출계[28] 난을 일으킨 적은 없기에 팔왕에서 빼고 대신 효회황제를 넣는 시각도 있다.[29] 여기부터 동진[30] 친부는 진문제[31] 윤통(閏統)[32] 숙부 사마익에게 출계[33] 숙부 사마형에게 출계[34] 백부 사마랑에게 출계[35] 숙부 하비헌왕에게 출계[36] 숙부 안평왕에게 출계[37] 친부는 남궁현왕[38] 진안이 장사만 황제의 예로 올리고 시호는 왕으로 하였다.[39] 종조부 사마민에게 출계했다지만 이러면 소목에 어긋나 항렬이 꼬임[40] 종실에서 팔왕의 난에 아니 가담하고 난이 끝나가는 직전까지 살았다.[41] 친부는 단수현후. 다만 종조부에게 출계하면 항렬이 꼬여서 친부가 법적으로 종형이 되는데 이 문제는 어찌 된 건지 몰?루[추존] [43] 아니 추존되었으나 칠묘에 동격배향(同格配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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