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5 06:45:32

사마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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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황제는 추존황제를 포함해서 자황색()으로 굵게 쓰고 팔왕은 빨갛게 쓴다. 그리고 8왕의 난에 관련된 종실은 갈색으로 쓴다.
※ 출계(出系)는 취소선을 치고 계자(系子)는 밑줄을 친다.
각주 [ 펼치기 · 접기 ]

[추존] [2] 황제로서의 뚜렷한 존호를 헌상받지 못했으나 다른 추존 황제와 동격배향(同格配享).[3] 친부는 의양성왕[4] 친부는 안평헌왕[5] 숙부(실제로는 종숙) 창무정후에게 출계(出系)[추존] [추존] [8] 친부는 진문제[9] 종숙(실제로는 숙부) 요동도혜왕에게 출계[10] 종숙(실제로는 숙부) 광한상왕에게 출계[추존] [12] 적장자나 두 살에 요절하여 혜제가 사실상 장남이 되었다. 항목이 존재하고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13] 친부는 회남충장왕[14] 여기까지 서진[15] 친부는 오효왕[16]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17] 숙부 성양애왕에게 출계[18] 친부는 사마유(동래왕)[19]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20] 적장자였던 비릉도왕처럼 한 살에 요절했으나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한다.[21] 직접 난을 일으킨 적은 없는 여남문성왕 대신 팔왕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22] 백부 진세종에게 출계.[23] 친부는 진무제[24] 친부는 제헌왕[25] 백부 성도왕에게 출계[26] 친부는 제헌왕[27] 숙부 연왕 경에게 출계[28] 난을 일으킨 적은 없기에 팔왕에서 빼고 대신 효회황제를 넣는 시각도 있다.[29] 여기부터 동진[30] 친부는 진문제[31] 윤통(閏統)[32] 숙부 사마익에게 출계[33] 숙부 사마형에게 출계[34] 백부 사마랑에게 출계[35] 숙부 하비헌왕에게 출계[36] 숙부 안평왕에게 출계[37] 친부는 남궁현왕[38] 진안이 장사만 황제의 예로 올리고 시호는 왕으로 하였다.[39] 종조부 사마민에게 출계했다지만 이러면 소목에 어긋나 항렬이 꼬임[40] 종실에서 팔왕의 난에 아니 가담하고 난이 끝나가는 직전까지 살았다.[41] 친부는 단수현후. 다만 종조부에게 출계하면 항렬이 꼬여서 친부가 법적으로 종형이 되는데 이 문제는 어찌 된 건지 몰?루[추존] [43] 아니 추존되었으나 칠묘에 동격배향(同格配享).
}}}}}}}}} ||
<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서진의 황족
회남충장왕(淮南忠壯王)
司馬允 | 사마윤
시호 충장(忠壯)
작호 복양왕(濮陽王) → 회남왕(淮南王)
사마(司馬)
이름 윤(允)
흠도(欽度)
생몰 272년 ~ 300년 8월
재위 서진의 복양왕
277년 ~ 289년
서진의 회남왕
289년 ~ 300년
부모 친부: 사마염
친모: 부인 이씨
1. 개요2. 행적3. 평가

[clearfix]

1. 개요

서진의 황족이자 무제 사마염의 9남으로 자는 흠도(欽度). 봉토는 회남군(淮南郡)이고 작위는 왕(王)이며 추시(追諡)가 충장(忠壯)이므로 봉작은 모두 더해서 회남충장왕(淮南忠壯王)이다. 모친은 이부인으로 사례 하내군 온현 사람.

2. 행적

277년 8월 21일에 복양왕으로 봉해졌다가 289년에 회남왕으로 봉해져 도독양강제군사가 되어 가절을 가지고 봉국으로 갔으며, 300년에 조왕 사마륜이 혜제(사마충)의 황후 가남풍을 폐위하자 여름 4월 7일에 표기장군, 개부의동삼사가 되어 중호군을 관장하게 되었다. 성격이 침착하지만 굳건해 숙위하는 장령 등과 병사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복종했으며, 사마륜과 권신 손수(사마륜의 직속 부하)가 다른 뜻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몰래 죽음을 무릅쓰고 싸울 병사를 기르면서 그들을 몰아내려고 했다.

가을 8월에 태위로 임명되어 사마륜이 관직을 높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면서 병권을 빼앗으려고 하자 몸이 아프다고 해 벼슬을 받지 않았으며, 손수가 어사 유기를 파견해 사마윤을 압박하면서 그의 관속 이하 여러 사람들을 체포했다. 또한 손수가 조서를 거부해 대역 불경한 죄를 지었다는 명목으로 탄핵하자 조서를 보고 손수가 직접 손으로 쓴 것임을 확인한 후 크게 화가 나 어사를 가두고 그의 목을 베려고 했다가 어사가 도망가자 그의 영사 두 명의 목을 벴다.

회남국의 군사와 장하에 있는 700명을 인솔해 조왕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외치면서 자신을 따를 사람은 옷을 왼편으로 여미라고 하자 그에게 귀부하는 사람이 많았으며, 궁궐로 갔지만 상서좌승 왕여가 액문을 닫아걸어 들어가지 못하자 상국부를 포위하면서 사마륜을 공격해 여러 차례 이겼다. 사마윤은 승화문 앞에 진을 치고 궁노를 일제히 발사했고 이 때 진준이 사마윤을 돕기 위해 사마충에게 백호번[1]을 들어 싸움을 해산시켜야 한다고 했고 사마독호 복윤이 기병 400명을 거느리고 나갔다.

그런데 복윤이 여음왕 사마건의 설득에 넘어가 사마륜을 돕기로 하면서 복윤이 글자가 없는 공판을 가져거서 거짓으로 황제(혜제)가 회남왕을 도우라는 조서를 내렸다고 하자 진을 열어 복윤을 들어오게 했다. 사마윤은 수레에서 내려 조서를 받으려고 했다가 이 틈을 노린 복윤에게 살해되었고, 사마윤의 두 아들 사마욱, 사마적도 사마륜에게 주살되었다.

사마윤이 그렇게 막으려고 했던 사마륜은 결국 이 사건 이후 황제에 올라 혜제를 폐위했다가, 다시 사마경 등에게 역관광 당해 세상을 하직하고 그렇게 황족들의 피바람은 이어진다.

3. 평가

요약하면 팔왕의 난 시기에 가장 담백한 황족 중 하나[2]였는데 용기있게 궐기했다가 승리도 권력 획득도 못해보고 끔살당했다.

정확히 말하면 팔왕에 속하지도 못한다. 게다가 이름 때문에 사마륜과도 헛갈리는 사람들이 많다.

좋은 평가를 들었다는 점과 봉토가 회남으로 (낭야왕이었던 사마예를 포함해) 강남에 가장 가까웠다는 점에서, 살아있었다면 위기 상황에서 더 큰 역할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 여러모로 안타까운 인물이라 하겠다. 동진의 시조인 원제 사마예보다 고작 4살이 많다.

팔왕의 난을 다룬 토탈 워: 삼국/캠페인 팔왕의 난 DLC에서는 클론 무장으로도 구현되지 못했다.

[1] 싸움을 독려한다는 뜻이다.[2] 다른 후보로는 사마충의 서자인 사마휼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