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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서진 제2대 황제 혜제 | 惠帝 | |||
출생 | 259년 2월 13일 | ||
조위 사례 하내군 온현 효경리 (現 허난성 자오쭤시 원현 샤오징진) | |||
즉위 | 290년 5월 16일 | ||
서진 사례 하남군 낙양 (現 허난성 뤄양시) | |||
사망 | 307년 1월 8일 (향년 48세) | ||
서진 사례 하남군 낙양 황궁 현양전 (現 허난성 뤄양시) | |||
능묘 | 태양릉(太陽陵) | ||
재위기간 | 서진의 황태자 | ||
267년 2월 28일 ~ 290년 5월 16일 | |||
서진의 황제 | |||
290년 5월 16일 ~ 301년 1월 10일 | |||
서진의 태상황 | |||
301년 1월 10일 ~ 301년 3월 6일[1] | |||
서진의 황제 | 복위 | |||
301년 3월 6일 ~ 307년 1월 8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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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충(衷) | ||
부모 | 부황 세조 무황제 모후 무원황후, 계모 무도황후 | ||
형제자매 | 26남 12녀 중 차남 | ||
배우자 | 정실 폐후 가씨, 혜헌황후 후궁 사구 | ||
자녀 | 1남 5녀 | ||
자 | 정도(正度) | ||
시호 | 효혜황제(孝惠皇帝) | ||
연호 |
[clearfix]
1. 개요
중국 서진(西晉)의 2대 황제로 시호는 혜황제(惠皇帝), 자는 정도(正度)다.사마궤가 요절[3]했기에 사실상 장남으로 265년 1월 18일에 황태자가 되었다. 무원황후의 소생으로 무제 사마염이 죽자 290년에 황제로 즉위한다.
굉장히 희귀한 케이스로, 기록이 모두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경도의 지적장애나 경계선 지능이었을 것이 거의 확실한 인물이다. 행적을 보았을 때 지적장애 3급 혹은 경계선 지능의 행동과 유사하다. 사료만으로 정신질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현대의 우수한 정신과 전문의에게도 조심스러운 일이지만, 기록이 워낙 많이 나오는지라 그 가능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막말로 정신과 전문의들에게 《진서》의 <혜제기>를 읽게 해도 딱히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사실 혜제만큼은 아니지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지도층이 민생에 대한 기본 정보가 결여되는 사례는 의외로 많았다. 가령 명나라 때 어떤 신하는 반란군이 (밀을 주식으로 하는) 서북지역 출신이라 쌀밥을 먹지 못하니 강남 지역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고, 청나라 광서제는 계란 4개의 가격을 은 수십 냥으로 알고 있었다.[4]
2. 백치 황제
맨 위에 나왔던 "곡식이 없다니 어째서 고기죽을 먹지 않는 것이냐"는 말도 그렇고, 또 밤에 공부하는데 개구리가 울자 "저 개구리들이 공적으로 울까? 사적으로 울까?" 라는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조조나 유비가 이랬다면 농담 정도로 받아들이거나 무슨 의도가 있지 않을까 했겠지만, 식량이 없으면 고기죽을 먹으면 되지 않느냐는 식의 말을 하는 혜제이니만큼 그냥 별 뜻 없는 헛소리일 가능성이 크다. 그 와중에 옆에 있던 한 노신은 깨알같이 "사유지의 개구리는 사적으로 울고 공유지의 개구리는 공적으로 울지요" 라고 했다고.그 외에도, 자기 친아들 사마휼을 알아보지 못하고 사마염이 "이 아이는 네 아들이다."라고 말해준 뒤에야 깨달았다거나, 싸움을 말리기 위해 백호번을 들고 가야한다는 신하의 말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윤허한 일 등의 일화들이 있다.[5]
이후 가충의 딸인 가남풍을 황후로 맞이했다. 외척의 득세와 팔왕의 난까지 겹치며 서진은 멸망을 향한 막장일로를 달리게 된다.
그래도 인성은 좋았던 것 같다. 혜강의 아들 혜소[6]가 난리 통에 사마충을 몸으로 지키다가 살해당하면서[7] 그 피가 용포에 묻었는데, 나중에 하인이 피를 닦으려 하자 충신의 피이니 닦지 말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오기는 한다. 사마충이 남긴 것 중에 유일하게 훈훈한 일화다.[8] 육적회귤에 비길 만한 고사다. 이는 어떻게 보면 혜제가 어리석은 만큼 순수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많은 군주들은 복잡한 정치적 계산에 얽매여서 설령 자신을 구한 부하라 해도 상황에 따라 비정하게 내치지만, 혜제는 특유의 순수함 때문에 '자신을 지킨 사람 = 충신'이라는 매우 단순한 논리를 적용했을 거라고.[9] 그 외에도 피난길에서 신발을 잃어버려 시종의 신발을 신게 되자 눈물을 흘리며 시종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는 걸 보면 인성만큼은 진짜 순진하고 착했다고 할 수 있다. 태어날 때부터 실질적 황족이었던 사마씨 가문에서 태어나 세상물정 모르고 곱게 자란 인물이지만 피난길에서 겨밥이나 거친 밥도 맛있게 먹었다는 점에서 어떤 꿀물 황제와 상당히 비교된다. 이렇게 보면 참 안타까운 인물.
물론 아버지 사마염도 바보가 아닌지라 사마충을 놔둬도 괜찮은지 알아보고자 노신 위관의 제안에 따라 시험 문제를 줬는데 이를 가남풍이 조작했고 합격점을 받았다. 게다가 조작 방법도 학자들을 매수해서 쓰게 했는데 너무 잘 쓰면 의심 받을 거라고 생각하고 잘 쓰지도, 못 쓰는 것도 아닌 평범한 솜씨로 답을 쓰게 했다. 여기서도 사마충의 재능은 빛(?)이 나는데…사마충이 쓰긴 썼는데 자기가 쓰고도 뭔 소린지 아예 하나도 모르고 "잘 썼지?"라는 식으로만 말했다고 전한다.
물론 사마염이 이걸 믿진 않았겠지만 지금 와서 태자를 다시 세우기도 그런 데다 주변에 노신들과 황족들 도움을 받아 통치하게 하는 방법도 있고, 무엇보다 손자 사마휼이 총명했기에 거기에 기대를 걸고 있어 그냥 태자 자리에 두고 말았다.[10] 참고로 비슷한 상황이 몇천 년 뒤 조선에도 있었는데, 이 때는 영조가 총명한 세손에게 보위를 넘기려고 아들을 폐세자하고 죽인다.
하지만 그도 간과한 것은 며느리 가남풍이 이 사마휼까지 죽이는 정치적 자살행위[11]를 할 만큼 미친 여자였다는 것이다.
3. 팔왕의 난
그런데 정작 황후 가씨(가남풍)의 전횡으로 그의 외아들이었던 첩 사씨의 소생인 태자 사마휼이 죽었고, 301년에 사마의의 9남이자 사마염의 숙부인 조왕 사마륜이 찬탈했을 때는 사마휼의 아들이자 손자였던 사마장이 살해당했으며, 그 동생 사마상은 요절해서 사마충의 대는 확실히 끊겼다.이런 짓을 저지른 이유는 사마륜이 방계 황족이라 정통성이 있었던 사마장을 죽인 것인데, 당연히 만천하에 찬탈자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았으므로 그 행동이 사마륜의 생명을 보전해주지 못해서 성도왕 사마영, 장사왕 사마예 등 다른 사마씨들의 손에 살해당했다.
이후 사마충은 다시 복위되었다.
그가 황제로서 유일하게 자기 뜻대로 명령을 내린 것이 이 직후. 301년 5월에 의양왕 사마위[12]를 주살하게 한 일로 제왕 사마경, 장사왕 사마예, 성도왕 사마영, 하간왕 사마옹, 신야군왕 사마흠 등이 사마륜을 몰아내자 사마충이 복위하면서 사마위를 가리켜 "이 사람이 나에게 퇴위하도록 하고 옥새를 탈취했다"라고 말해 죽게 한 것이다. 사마륜이 죽은 지 3개월 만이었다. 지적 장애인의 경우 거짓말을 잘 못하는 성향이 있어서[13]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여하간 황제 본인도 팔왕의 난 때 이리저리 끌려 다니고 황제에서 밀려나기도 했는데, 절정은 업에 있던 사마영에게 끌려갔을 때. 사마영이 다른 왕과 싸우면서 사마충은 풀숲에 숨어 있었다. 사마충은 이때 습격을 받아 옥새를 잃어버리고 얼굴에 화살을 몇 방 맞으며 포로가 되기도 했다.
결국 팔왕의 난은 동해왕 사마월이 집권하면서 종식되었으며, 사마충은 사마월이 올린 떡을 먹고 앓다가 307년에 급사하고 태양릉에 안장되었다. 사실 떡을 먹고 앓다가 죽은 대목에서 동해왕 사마월의 독살을 암시한다는 해석도 있다. 다만 사마월이 굳이 왜 사마충을 죽였는지는 의문이다. 그의 뒤를 이은 회제 사마치는 사마충보다 훨씬 똑똑했으며, 사마월이 권력을 휘두르는 걸 그냥 두고 보지 않았으니.[14]
4. 사후 후일담
그의 두 번째 황후였던 혜헌황후 양씨(양헌용)는 영가의 난 때 흉노족 유총의 친척 유요의 부인이 되었으며 훗날 사마충을 비난했다. 하루는 유요가 농담으로 "나와 사마씨 꼬맹이 중 누가 나은가?" 하자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사마충 그 자는 암군으로 전란 속에서 자신의 처자를 지키지도 못했고 (…) 이제서야 당신 같은 진짜 남자를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물론 양헌용도 살기 위해서는 그렇게 말해야만 했겠지만 진심으로 한 말일 수도 있다. 본인이 여러번 폐위당할 동안 남편이 아무 도움이 못됐으니.참고로 사마진 황제들은 대부분 오래 못살고 요절했는데, 혜제는 그나마 40살을 넘긴 4명의 황제 중 하나였다.
5. 가족 관계
- 혜문황후 가씨(가남풍)
- 장녀 하동공주: 남편은 손회다. 손회는 몸집이 작고 용모가 추했으나 아버지가 권신인 손수였기에 하동공주와 결혼할 수 있었다. 아마도 사마륜이 몰락했을 때 함께 처형당했을 것이다.
- 차녀 시평공주
- 3녀 홍농군공주 사마선화: 영가의 난 때 회제가 전조로 끌려가자 회제 탈환을 위해 의병을 모집했다.
- 4녀 애헌황녀 사마여언: 8세에 죽었다. 매우 총명하고 서학에 능통하여 시문을 쓸 수 있었다고 한다. 가남풍은 그녀를 무척 사랑해서 죽기 전 공주로 봉하려고 했으나 자신은 어리며 성인도 되지 못했는데 공주의 예우는 쓸모없다며 스스로 거부했다.
- 혜헌황후 양씨(양헌용)
- 5녀 임해공주: 원래 작위는 청하공주였으나, 영가의 난 혼란기에 인신매매당해 오흥의 전온이라는 사람의 노비로 팔렸다. 전온은 그녀를 자신의 딸에게 보내 매우 잔혹하게 대했다. 이후 사마예가 건업에 이르자 사마예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모진 수모를 말했다. 이에 사마예는 전온과 그의 딸을 주살하고 그녀를 임해공주로 봉하며 종정 조통에게 시집보냈다.[15]
유희·유습·유천: 사마충의 자식들이 아니라 유요의 자식들이다. 이 중 장남 유희는 유요가 죽은 뒤에 전조의 마지막 황제가 되지만 일종의 잔당일 뿐이었고 결국 석륵에 의해 사로잡혀 일족과 함께 처형된다.- 사부인(사구): 사마충의 외아들 사마휼을 낳았으나, 299년 가남풍에게 살해된다.
- 장남(외아들) 민회태자 사마휼(愍懷太子 司馬遹)
- 서의: 가남풍의 유모
- 자녀 없음
- 궁인 송씨(송단)
- 자녀 없음
6. 미디어 믹스
- 고우영의 십팔사략 만화에서도 바보 황제로서 허수아비로 묘사했다. 얼빠진 외모가 그 증거다. 고우영의 만화에서는 사마월이 사마충을 독살하고 사마치를 옹립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 삼국전투기에서는 천재 바카본(얼렁뚱땅 반쪽이네)의 반쪽이(바카본)으로 등장했다. 에필로그를 제외한 본편 마지막 에피소드인 삼국 통일 (7)편의 타이틀 컷을 장식하기도 했으며, 소개컷에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발언은 사실무근이지만 사마충의 "곡식이 없으면 고기죽을 먹으면 되지"라는 말은 역사에 남은 사실이라고 서술되어 있다. 독발수기능의 난 편에서 처음 등장. 그런데 어째 처음부터 바보였다기보다는 미녀인 위관의 딸을 제치고 추녀인 가남풍이 아내가 되자 충격을 받아 바보가 되는 것처럼 묘사된다. 서릉 전투 편에서는 공식적으로 식을 올리며 가남풍과 결혼했다. 삼국 통일 편의 마무리 파트에서 노래를 부르며 삽을 들고 걸어가는 모습으로 잠깐 출연했다.
-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는 계보 마왕재림의 패에 소속된 장수로 병과는 이 게임에서 드문 천자계다. 다른 천자계 장수인 고대무장 영정, 유방에 비해 능력치가 낮아 거의 쓰이지 않았다. 그나마 쓰임새는 코스트가 낮아 아무 덱에나 집어넣을 수 있는 정도. 능력치는 무력 48, 지력 21, 통솔 55, 민첩 68, 행운 89이고 성격은 만용이다. 성우는 이규창이다. 위의 백치 황제 단락처럼 대사는 순진무구하다.
- 토탈 워: 삼국의 DLC 팔왕의 난에 등장한다. 게임 시스템상 장수나 캐릭터로 나오는 건 아니고 한 멸망 이전의 헌제처럼 일러스트로만 나온다. 게임 시작 시 낙양에 거주하는 것으로 표시된다. 이후 팔왕인 플레이어가 낙양을 점거하고 섭정이 되면 다른 수도로 옮겨진다. 여담으로 초상화의 표정이 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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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이 좋아 태상황이지 사실상 금용성에 유폐된 상태였다.[2]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을 때 혜제가 한 말. 마리 앙투아네트가 했다고 알려진 말과 비슷한데 마리 앙투아네트가 한 말은 루머지만 혜제가 한 말은 보다시피 정사에도 나오는 사실이다. 심지어 조선의 어숙권이 「패관잡기」를 지으며 제안대군에 대해 평가하며 써먹기까지 했다.[3] 아기일 때 죽어서 권력 다툼이고 뭐고 없었다.[4] 실제 당시 계란 1개의 가격은 동전 몇 닢 정도로 광서제가 알고 있는 가격은 1,000배 이상이다. 당연히 내무부에서 황제를 속이고 중간에서 횡령한 것.[5] 싸움을 말릴 때 쓰는 것은 추우번이고, 백호번은 싸움을 독려할 때 쓰는 것이다. 신하가 고의적으로 바꿔 말해 사마충을 속인 것.[6] 고사성어 군계일학(群鷄一鶴)에 나오는 인물이기도 하며 뒷날 남송의 충신 문천상의 정기가에도 나온다.[7] 혜제도 건드리지 말라고 병사들에게 호소하였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8] 아이러니하게도 혜소의 부친인 혜강이 사마씨에 의해 주살당했다.[9] 틀린 판단은 절대로 아니다. 충신이 아니라면 왕이 죽을 정도로 위험할 때 황제를 버리고 도망치지 목숨 걸고 황제를 지킬 리가 없으니까. 권신일지언정 자신이 섬기는 군주에게는 충성하는 유형이나 충성심은 대단한데 하필 군주가 띨띨이인 경우는 성군을 보필하는 명신 같은 유형의 충신보다야 낮게 평가되지만 이 역시도 충성심 자체는 의심할 바가 전혀 없다. 하지만 머리가 좋은 군주는 오히려 복잡한 이해관계에 얽혀 이런 간단한 사실을 간과하기도 한다는 게 문제. 명군 반열에 드는 한고제 유방조차도 홍문연에서 자신을 구했던 번쾌를 숙청하려 했으니... 그러나 유방의 경우 이성왕 숙청 후 처가인 여씨를 꺾으려고 했는데 번쾌가 여씨와 혼인관계에 있다는 점이 숙청의 이유였고 또 번쾌가 홍문연에서 유방을 구했을 때와 이 때는 시간차도 12년이나 난다. 12년 사이 사람 맘이 어떻게 바뀔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10] 사마충이 바보지만 장남이고 이미 이에 맞춰서 며느리도 들이고 후계자로 세워놓기도 했는데 폐태자 시킨다면 이리저리 꼬이는게 많아진다.[11] 엄연히 자살행위 맞다. 가남풍은 소생의 아들이 없는 만큼 사마휼을 양자 삼아서 공조할 만한 필요가 분명히 존재했으며, 그럼에도 사마휼을 죽였다는 것은 그 정도의 정치적 감각도 없거나 시기심이 절제를 못할 수준으로 강했다는 소리이다.[12] 먼 친척뻘로 팔왕의 난을 시작한 사마충의 동생 초왕 사마위(사마충과 8살 터울)와는 동명이인이다.[13] 물론 100%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14] 찬탈하기 위함이라해도 이상한데 백치인 40대 후반 황제와, 총명한 20대 황제를 비교하면 누가 더 찬탈하기 쉬울 지는 뻔하다.[15] 임해공주의 이야기는 가남풍 열전에 실려있지만『태평교람』에 따르면 임해공주는 양헌용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