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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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33067><colcolor=#fff> 건녕경공(建寧敬公) 陽騖 | 양무 | |
시호 | 경(敬) |
작위 | 건녕공(建寧公) |
성 | 양(陽) |
휘 | 무(騖) |
자 | 사추(士秋) |
생몰 | ? ~ 368년 1월 12일 |
출신 | 우북평군(右北平郡) 무종현(無終縣) |
부모 | 부친 양탐(陽躭) 모친 이씨(李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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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연의 인물. 동이교위 양탐의 아들. 대장군 좌사마 양유의 사촌.2. 생애
어려서부터 청렴하고 소박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여 지식이 깊고 원대하였다. 장성하여서는 평주(平州)별가에 임명되어 집안을 일으켰고, 모용외의 곁에서 나라를 강성하게 만드는 책략을 바쳐 모용부 내에서 중용받았다가 요동태수로 부임하였다.함화 8년(333년) 6월, 모용외 사후 그 세자 모용황이 후사를 이어 요동공에 올랐다. 모용황은 처음에 대방(帯方)태수 왕탄(王誕)을 좌장사로 삼으려 하였는데, 왕탄은 양무가 더 유능하다며 그 자리를 사양하였다. 이에 모용황은 양무를 불러 좌장사로 삼았고, 이후로 양무는 모용황을 보좌하면서 요동에서 반란을 일으킨 모용인과 단부를 정벌할 때 종군하여 공을 세웠다.
함강 3년(337년) 10월, 모용황이 연왕(燕王)을 자칭하고 관제를 갖추자, 양무는 사예교위에 임명되었고 건녕공(建寧公)에 봉해졌다.
영화 4년(348년) 9월, 연왕 모용황은 낙마할 때 입은 부상이 심해져 오늘내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모용황은 세자 모용준을 불러
"양사추(陽士秋)는 사대부의 고결한 기풍을 지녔으며, 충직하고 마음이 곧으니, 가히 대사(大事)를 맡길 만한 인물이다. 너는 그를 잘 대하도록 하라."
라는 말을 남기고 사망하였다.영화 4년(348년) 11월, 연왕에 즉위한 모용준은 양무를 낭중령으로 삼았다.
영화 5년(349년) 5월, 후조가 무제 석호 사후 내전에 휩싸이자, 연왕 모용준은 양무를 보의장군에 임명하여 보필장군 모용평, 보국장군 모용각과 나란히 '3보(三輔)'라 칭하고, 중원 평정의 계책을 세우게 하였다..
영화 6년(350년) 2월, 염민이 염위를 세웠다는 소식을 들은 연왕 모용준은 마침내 때가 되었다 여겨 거병하고, 건봉장군 모용패로 하여금 동쪽 길을 통해 20,000 군사를 이끌고 도하(徒河)로 나아가게 하고, 장수 모여우(慕輿于)로 하여금 서쪽 길을 통해 열옹새(蠮螉塞)로 나아가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친히 가운데 길을 통해 노룡새(盧龍塞)로 나와 후조의 요충지 공략을 노렸다. 이때 모용각과 선우량이 선봉에 섰고, 양무는 모용준 곁에서 종군하였다.
원새 원년(352년) 8월, 후조의 유주자사 왕오(王午)가 안국왕(安國王)을 자칭하며 할거하자, 연왕 모용준은 양무와 보국장군 모용각, 오재장군 봉혁을 보내 왕오 토벌을 명하였다. 전연군이 오는 것을 보고 두려워진 왕오가 성문을 굳게 닫고, 염민의 아들 염조(冉操)를 바치며 용서를 구하니, 양무 등은 이를 받아들이고 노구(魯口) 인근에 심어져있는 벼만 약탈한 뒤 돌아갔다.
원새 원년(352년) 11월, 황제에 즉위한 모용준이 양무를 상서령으로 삼았다.
원새 3년(354년) 4월, 사공으로 승진하고, 수상서령을 겸하였다.
원새 4년(355년) 11월, 동진으로부터 진북장군 직위를 수여받은 단부의 단감이 경소제 모용준에게 서신을 보내 황제를 칭한 것을 비판하였다. 단감의 서신을 받은 경소제 모용준은 분노하여 태원왕 모용각을 대도독, 무군장군으로 삼고, 양무를 모용각의 부관으로 배속시켜 단감을 치게 하였다.
원새 5년(356년) 11월, 단감은 광고(廣固)에서 농성하며 전연군에게 저항했으나, 역부족이었으므로 결국 성은 함락되고 단감은 패하여 항복하였다.
광수 2년(358년) 9월, 원래 후조의 장수였던 장평(張平), 이력(李歷), 고창(高昌) 등이 후조가 망하자 전연, 동진, 전진 모두로 사자를 보내 투항하고, 각 나라들로부터 작위를 받아 자신의 영역을 지키면서 중립을 도모하였다. 경소제 모용준은 이들을 완전히 장악하고자 상용왕 모용평을 보내 병주의 장평을 정벌케 하고, 양무를 보내 동연(東燕)의 고창을 정벌케 하였으며, 낙안왕 모용장(慕容臧)을 보내 복(濮)의 이력을 정벌케 하였다. 양무는 소릉(邵陵)에서 고창을 격퇴하여 그를 동연군에서 쫓아내는 것까진 성공했으나, 고창의 장수가 여양(黎陽)을 굳게 지키는 바람에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였다.
광수 2년(358년) 10월, 동진의 태산태수 제갈유(諸葛攸)가 전연의 영역인 동군(東郡)을 공격해 무양(武陽)으로 진입하였다. 이에 경소제 모용준은 이미 장평 토벌을 마친 태원왕 모용각에게 명을 내려 양무와 모용장과 합류케 한 후에 제갈유를 공격토록 하니, 제갈유는 패하여 다시 태산으로 돌아갔다. 전연군은 그대로 황하를 도하하여 그 땅을 일부 빼앗고 그곳에 태수와 관리들을 두었다.
광수 4년(360년) 정월, 경소제 모용준은 병에 걸린 몸으로도 야망을 포기하지 않고, 동진 정벌을 목표로 업(鄴)에서 각지의 군대를 모아 친히 열병하였다. 그리고 양무와 모용각에게 그 대군을 맡겨 동진으로 출발하게 하려던 찰나에 병이 급격히 위독해져 중단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모용준은 동진 정벌의 꿈을 실행하지 못한 채 양무, 모용각, 모용평, 모여근에게 유조를 내려 뒷일을 부탁하고 붕어하였다. 일찍이 모용준의 황자들은 모두 요절하였기에, 당시 11세이던 태자 모용위가 황위에 올랐고, 태원왕 모용각은 태재에 임명되어 주도적으로 조정을 이끌었다. 양무는 사공에 임명되어 모용각을 보좌함으로써 보정에 참여하였다.
건희 6년(365년) 4월, 태위 봉혁이 사망하자, 헌무제 모용위는 양무를 태위로 삼으려 하였다. 이에 양무는라 한탄하며 그 직책을 간곡히 사양하였다. 그러나 헌무제 모용위는 조서를 내려 그를 위로하면서도 거부를 불허하여 태위로 삼았다. 양무는 모용외부터 모용위까지 4대에 걸쳐 나라를 섬긴 대신이라 태원왕 모용각 이하 백관들은 모두 그를 대할 때는 배례하였다. 양무는 이토록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사람됨이 무척 겸손하고 근면하였으며, 평소에도 검소한 생활을 즐겨 군공(郡公)의 작위에 있는 인물답지 않게 소가 이끄는 허름한 수레를 타고 다녔다. 다만, 자식 교육은 매우 엄혹하게 하고, 그 행실을 똑바로 교정하니, 그의 아들들은 나중에 모두 고위관직에 올랐다고 한다.
건희 8년(367년) 12월 7일[1], 양무가 세상을 떠났다. 사후 그의 집에는 재물이 하나도 없었고, 사람들 중 그의 죽음을 비통해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시호는 '경(敬)'.
아들 양요(陽瑤)는 훗날 전연이 전진에 의해 멸망했을 때 왕맹의 천거를 통해 전진의 저작랑으로 임관하여 고위직을 역임했다고 한다.
[1] 양력으로 계산할 시 368년 1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