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7 18:20:44

혁련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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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6619C><colcolor=#ece5b6>
북하 2대 황제
秦王 赫連昌 | 진왕 혁련창
출생 불명
전진 삭방군 삭방현
(현 산시성 위린시 징볜현)
사망 434년
북위 대군 평성
(現 산시성 다퉁시)
능묘 없음
재위기간 2대 북하 황제
425년 ~ 428년
북위 진왕
430년 ~ 4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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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6619C><colcolor=#ece5b6> 성씨 유(劉) → 혁련(赫連)
창(昌)
부모 부황 세조 무열제
모후 부인 파다라씨
형제자매 7남 5녀 중 3남
배우자 시평공주 탁발씨[1]
환국(還國)
작호 진왕(秦王)
연호 승광(昇光, 425년~42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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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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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후기 흉노(남흉노) 철불부가 세운 북하의 제2대 황제.

세조 무열제 혁련발발의 3남으로 제3대 황제인 혁련정의 형이었다.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체격이 우람했으며, 용모는 준수했다고 전해진다.

2. 생애

414년, 혁련발발이 천왕으로 즉위하여 장남 혁련괴(赫連璝)를 태자로 세우자, 혁련창은 태원(太原公)의 작위에 봉해졌다.

416년, 혁련발발이 후진의 장수 요랑자(姚良子)를 죽이고 음밀(陰密)[2]을 점령한 뒤, 혁련창을 음밀에 남겨 옹주(雍州)를 진수하도록 했다.

417년, 동진의 권신이자 명장인 유유가 후진을 멸하고 장안을 차지했으나, 어린 아들 유의진(劉義鎭)에게 장안을 맡기고는 동진으로 귀환했다. 이에 혁련발발이 혁련괴와 무군우장사 왕매덕(王買徳)에게 장안을 공격하도록 하고, 혁련창은 동진의 세력이 탈출할 수 없도록 동관(潼關)[3]을 포위하도록 명령했다.

418년, 유의진은 공세를 버틸 수 없어 장안을 실컷 약탈한 후 철수했다. 하지만 곧 혁련발발이 추격해 유의진의 동진군을 격파하고 대부분을 사로잡거나 죽였다. 이때 장안에 홀로 남아 있었던 주령석은 백성들에게 추방되어 동생 주초석과 함께 용양장군 왕경선(王敬先)이 지키던 조공루(曹公壘)[4]로 달아났으나 혁련창이 포위하여 식수를 끊으니, 머지않아 조공루는 함락되었다. 혁련창은 주령석 형제와 왕경선 등 동진군의 장수들을 모두 사로잡아 수도 통만성으로 압송했다.

424년, 혁련발발이 장안에 주둔하던 혁련괴를 태자에서 폐하고, 4남인 주천공(酒泉公) 혁련륜(赫連倫)을 태자로 세웠다. 폐태자 혁련괴는 부친에게 반기를 들어 장안에서 거병한 후, 70,000명의 대군으로 수도 통만성(統萬城)을 공격하여, 30,000명으로 항전하던 이복형제 혁련륜을 고평(高平)[5]에서 패사시켰다. 그러나 동복형제인 혁련창이 기병 10,000명으로 혁련괴를 습격해 죽이고, 85,000명을 통솔하여 통만성으로 귀환했다. 혁련발발은 크게 기뻐하며 혁련창을 태자로 세웠다.[6]

425년 8월, 혁련발발이 붕어하자, 혁련창이 제위를 계승하여 북하의 제2대 황제로 즉위했다.

426년 8월, 서진이 동맹국인 북량을 정벌하자, 북량의 군주 저거몽손이 사신을 보내 빈틈을 타 서진의 수도 부한(枹罕)[7]을 쳐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혁련창은 정남대장군 호로고(呼盧古)에게 기병 20,000명을 주어 원천(苑川)을 치게 하고, 거기대장군 혁련위벌(赫連韋伐)에게 기병 30,000명을 주어 남안(南安)을 침공하도록 했다. 호로고와 혁련위벌은 각각 남안과 원천을 무너뜨려 백성들을 노략질하고 서평(西平)[8]까지 진출했으나, 역으로 방비가 약해져 본국이 북위의 제3대 세조 태무제 탁발도에게 공격당했다.

당시 혁련창의 형제들이 서로 싸워 북하의 정세가 불안하다는 첩보를 받은 탁발도는 북하를 정벌하기로 마음먹었다. 태위 장손숭이 불가하다며 여러 차례 반대했지만 탁발도는 대노해, 병사로 하여금 장손숭의 머리를 잡아 강제로 조아리게 하고는 그대로 정벌을 단행했다. 그는 북위의 사공 해근(奚斤)에게 45,000명의 병력으로 포판(蒲阪)을 공격하게 하고, 송병장군 주기(周幾)는 10,000명의 병력으로 홍농(弘農)을 치도록 했다. 그리고 탁발도 본인은 18,000여 명의 경기병을 거느리고 친정하여 11월에 황하의 군자진(君子津)에 이르렀다. 때마침 강추위로 인해 황하의 강물이 전부 얼었으므로 북위군은 별 어려움 없이 강을 건너 북하의 수도인 통만성을 쳤다.

혁련창은 동짓날을 기리기 위해 군신들과 연회를 즐기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북위군이 코앞까지 왔다는 급보가 전해지자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탁발도의 군대가 흑수를 넘어 통만성으로부터 30여리 안에 들어오고 나서야 혁련창은 황급히 군사를 몰아 출전했지만, 북위군에게 패배해 다시 성으로 도주했다. 북하군이 미처 성문을 닫기도 전에 북위의 내삼랑 두대전(豆代田)이 기병을 재빨리 몰아쳐 서궁(西宮)으로 들어가 서문(西門)을 불살라버렸다. 전투도 승리하고 성문 하나를 없애버린 북위군은 그날 밤 느긋하게 성 북쪽에 진을 치고 잠을 잤다. 다음 날, 태무제 탁발도는 통만성으로 들어가 군대를 사방으로 나눠 백성을 약탈하니, 잡히거나 죽은 이가 수만 명이었고, 북위군은 소와 말 등 가축 수십만 마리를 얻었다. 탁발도는 아직 통만성을 완전히 점령하기는 어렵다고 여겨 백성 10,000여 호를 강제로 끌고 돌아갔다. 통만성에서 한바탕 소동이 끝나자 혁련창은 서진에 파병한 원정군을 서둘러 귀환시켰다.

한편, 북하의 홍농태수 조달(曹達)은 북위군이 내려온다는 말을 듣고 도망치니, 주기는 가뿐히 홍농을 점령하고 관중으로 진입했지만 얼마 안가 군중에서 급사해 주기의 북위군은 진군을 멈췄다. 포판을 지키던 동평공 혁련을두(赫連乙斗)는 북위군이 공격해온다는 소식을 받고 사신을 보내 통만성에 위급함을 알렸으나, 돌아온 사신으로부터 황제 혁련창의 패전 소식을 듣고는 혁련을두도 포판을 버리고 장안으로 도망쳤다. 장안을 지키던 혁련조흥(赫連助興)이 혁련을두로부터 대충 상황을 전해듣자, 혁련조흥과 혁련을두는 함께 장안을 버리고 안정(安定)으로 달아났다. 해근의 북위군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장안까지 점령하니, 진주(秦州)와 옹주(雍州)의 저족강족들이 귀부해왔고, 북하는 관중의 지배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427년 정월, 황제 혁련창은 평원공 혁련정을 보내 병력 20,000명으로 장안을 탈환해오도록 명령했다. 혁련창이 장안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 통만성을 치고 싶었던 태무제 탁발도는 집금오인 환대(桓貸)에게 명령을 내려 군자진에 다리를 설치하도록 했다. 장안에서의 전투가 대치 상태에 이르자, 탁발도는 다시 군사를 일으켜 통만성으로 향했다. 북위의 사도 장손한(長孫翰)이 기병 30,000명으로 선봉에 섰고, 상산왕 탁발소(拓跋素)가 보병 30,000명으로 그 뒤를 따랐으며, 남양왕 탁발복진(拓跋伏眞)은 보병 30,000명으로 공성기구를 옮겼고, 장수 하다라(賀多羅)가 정예병 3,000명으로 척후를 맡았다. 태무제 탁발도는 총사령관으로 직접 전군을 지휘했으며, 용양장군 육사(陸俟)에게 뒤를 맡기고 출진했다.

탁발도가 발린산(拔鄰山)에서 공성병기와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군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치중과 물자를 모두 뒤로 뺀 뒤, 선봉 기병 30,000명만 거느리고 먼저 통만성에 도착했다. 탁발도가 통만성 인근 깊은 골짜기에 군사들을 숨기고, 적은 군사로만 통만성 앞까지 접근하자, 북하의 장수 적자옥(狄子玉)이 항복했다. 적자옥은 혁련정이 올 때까지 통만성을 굳게 지키는 것이 황제 혁련창의 전략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고, 태무제 탁발도는 이를 싫어해 북위군을 물려 약점을 보였다. 그리고 영창왕 탁발건(拓跋健)과 동평공 아청(娥淸)에게 기병 5,000명으로 통만성 서쪽에 사는 백성들을 노략질하게 했다. 때마침 북위군의 진중에서 죄를 지은 병사가 북하로 달아나, 북위군의 식량은 떨어져 산 중에 나물을 캐먹고 있으며, 치중은 뒤에 있고, 보병은 이르지 않아 공격하기 적당한 때라며 혁련창에게 말했다. 혁련창은 그의 말을 믿고 보•기 30,000명을 이끌며 성에서 나왔다.

태무제 탁발도가 거짓으로 패한 척 후퇴하자, 혁련창은 양익을 펼치고 북을 세차게 치며 북위군을 추격했다. 하지만 곧 북위군의 매복에 들어오면서 두 군대는 크게 맞붙었다. 전투 중 탁발도가 낙마해 북하군이 그에게 접근했는데, 탁발도는 얼른 말에 다시 올라 접근하는 북하 기병 수십 명과 상서 곡려(斛黎)를 찔러 죽이고, 화살이 손에 맞았음에도 분격하여 마침내 혁련창의 군대를 크게 무너뜨렸다. 혁련창은 장손한에게 추격을 당해 통만성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상규(上邽)[9]로 도망쳐야만 했다. 태무제 탁발도는 통만성 북쪽에서 또 북하군을 격파해 혁련창의 동생인 하남공 혁련만(赫連滿)과 조카 혁련몽손(赫連蒙遜)을 죽이고 통만성을 점령했다. 장안에서 해근과 대치하던 혁련정은 통만성이 넘어갔다는 소식을 받고 군사를 물려 상규로 갔다.

427년 9월, 안정(安定)의 백성들이 성을 들어 북위에 항복했다.

428년 2월, 북위의 평북장군 울권(尉眷)이 상규를 침공하자 혁련창은 동쪽으로 물러나 평량(平涼)에 주둔했다. 혁련창은 안정군을 되찾기 위해 구퇴(丘堆)를 패퇴시켰고, 구퇴는 기병 수백 명과 함께 안정성으로 도망쳤다. 북위의 군사는 성안에 틀어박히게 되었고, 혁련창은 군사를 풀어 안정군을 마음껏 노략질했다. 이에 북위의 감군시어사 안힐(安詰)은 혁련창이 안정성을 공격할 때 울권과 함께 성을 나와 북하군과 싸워서 이겼다. 혁련창은 패배해 달아나다가 낙마해 추격해오던 안힐에게 생포되었다. 혁련정은 잔당 수만 명을 거두어 평량에서 북하의 황제 자리에 올랐다.

428년 3월 13일, 혁련창은 압송되어 북위의 도읍이었던 평성에 도착했다. 태무제 탁발도는 그를 후히 대하며 서궁에 거처하게 했고, 방 안의 일상 기물과 용구 등을 황제의 것과 같게 해주었다. 또, 여동생 시평공주를 그에게 시집보내면서 상충장군(常忠將軍), 회계공(會稽公)으로 삼았다. 태무제는 항상 명령하여 혁련창을 측근에서 시위로 수종하게 하고, 수렵할 때는 둘이서 같이 말을 타게 했으며, 그를 신임해 함께 깊은 산속까지 사냥하러 들어가곤 했다. 여러 제장들이 혁련창은 용명(勇名)이 있어 조심하라고 경고했지만, 태무제는
"천명(天命)은 정해져 있는데 무얼 두려워하겠는가!"
라며 반박했다.

430년 3월 16일, 혁련창을 진왕(秦王)으로 고쳐 봉했다.

430년 11월, 태무제 탁발도가 북하를 정벌하기 위해 평량성을 쳤는데 상곡공 혁련사간(赫連社干)이 성을 굳게 지켰다. 탁발도는 혁련창으로 하여금 서신을 보내 그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431년 6월, 서진을 정복한 혁련정이 북량의 정복을 무리하게 시도하다가, 황하를 반쯤 건넜을 때 토욕혼에게 기습당해 사로잡혔고 이로써 북하는 멸망했다.

432년 3월 28일, 토욕혼의 모용모괴(慕容慕璝)에 의해 동생 혁련정이 평성으로 압송되어 처형당했다.

434년 3월 11일, 혁련창은 북위를 배반해 서쪽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도망친지 2일만에 하서(河西)에서 북위의 장수에게 사로잡혀 살해되었다. 혁련창의 모반을 확인한 태무제 탁발도는 남아있던 혁련창의 형제들을 모두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3. 둘러보기

북하의 역대 황제
초대 세조 무열제 혁련발발 2대 진왕 혁련창 3대 평원왕 혁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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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위 제2대 태종 명원제 탁발사의 딸이자 제3대 세조 태무제 탁발도의 여동생이었다.[2]간쑤성 핑량시.[3]섬서성 웨이난시.[4] 현 웨이난.[5]닝샤 구위안시.[6] 혁련발발의 재위 말년에 일어난 후계 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혁련창에게 부황 혁련발발마저 사실상의 권력 누수 현상으로 압도되어 그를 태자로 책봉한 것으로 여겨진다.[7] 현 간쑤성 린샤 후이족 자치주.[8]칭하이성 시닝시.[9] 현 섬서성 톈수이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