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2 05:56:51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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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하 초대 황제
혁련발발 | 赫連勃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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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만성유물박물관에 있는 혁련발발의 동상 (왼쪽)
출생 381년
전진 삭방군 삭방현
(현 산시성 위린시 징볜현)
사망 425년 9월 18일(향년 45세)
북하 통만성 황궁 영안전
(현 산시성 위린시 징볜현)
능묘 가평릉(嘉平陵)
재위기간 후진의 오원공
402년 ~ 407년 6월
초대 천왕
407년 6월 ~ 418년 11월
초대 황제
418년 11월 ~ 425년 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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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6619C><colcolor=#ece5b6> 성씨 유(劉) → 혁련(赫連)
발발(勃勃)
부모 부황 태조
모후 부인 부씨
형제자매 5남 중 3남
배우자 부인 파다라씨, 부인 양씨
자녀 7남 5녀
신체 201cm[1], 115cm(허리 둘레)[2]
굴혈(屈孑)
작호 오원군공(五原郡公)
묘호 세조(世祖)
시호 무열황제(武烈皇帝)
연호 용승(龍昇, 407년 ~ 413년)
봉상(鳳祥, 413년 ~ 418년)
창무(昌武, 418년 ~ 419년)
진흥(眞興, 419년 ~ 4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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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멸문지화2.2. 북하 건국2.3. 후진 침략2.4. 관중 공략2.5. 칭제
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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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북하(北夏)의 초대 황제.

남흉노 선우 호주천의 후예이자, 남흉노와 선비족혼혈이었던 철불부의 수장 유위진의 아들로, 본래 이름은 유발발이었으나 413년에 성씨를 "혁련(赫連)"으로 고쳤기 때문에 혁련발발이라 칭해진다.

2. 생애

2.1. 멸문지화

태초 6년(391년) 11월, 대래성(代來城)에서 철불부의 부족민들을 모아 힘을 키우던 아버지 유위진이 아들 유직력제(劉直力鞮)를 보내어 북위를 침공하였는데, 그 군대는 8 ~ 90,000명에 이르렀다. 당시 북위의 위왕 탁발규는 병력 5 ~ 6,000명 밖에 없는 상태에서 유직력제에 의해 포위되었으나, 탁발규는 수레를 이용해 방진(方陣)을 만들어 전투를 벌이면서 전진하였고, 철기산(鐵岐山) 남쪽에서 유직력제을 크게 격파하였다. 유직력제는 홀로 말을 타고 도망쳤으며, 탁발규는 승세를 타고 200,000마리 이상의 소와 말을 노획하였다. 탁발규는 승세를 타고 북쪽으로 추격하여 오원(五原)의 금진(金津)에서 남쪽으로 황하를 건너 대래성에 이르렀다. 이 소식에 유위진의 백성들은 놀라 혼란에 빠졌고, 여러 부락은 흩어지고 도망쳤다.

탁발규는 곧바로 유위진이 거주하던 열발성(悅跋城)에 도착하였다. 유위진과 그의 아들들은 크게 놀라 도망쳤고, 탁발규는 여러 장수들에게 경기병을 나누어 보내 그들을 추격하게 하였다. 북위의 진류공 탁발건은 남쪽 백염지(白鹽池)에 이르러 유위진의 가족들을 사로잡았고, 장군 이위(伊謂)는 목근산(木根山)에 이르러 유직력제를 붙잡고 그의 무리를 모두 섬멸하였다. 유위진은 홀로 말을 타고 도망쳤으나, 그 역시 결국 그의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 마침내 유위진이 몰락하고, 그의 종족 5,000여 명의 종실들은 주살당해 시신은 모두 강에 던져졌다.

이때 유위진의 셋째 아들 유발발은 가까스로 도망쳐 선비 질간부로 피신하니, 북위의 도무제 탁발규가 사신을 보내 유발발을 요구했다. 이에 질간부의 수장 질간타두(叱干他斗)는 북위가 두려워 유발발을 압송하려 하자, 질간타두의 조카 질간아리(叱干阿利)가 급히 나아가 아뢰었다.
"작은 새도 사람에게 의탁하면 마땅히 구제받아야 하는데, 하물며 유발발은 나라가 멸망하고 집안이 몰락하여 우리에게 귀의하였으니, 비록 구해주지 못할지라도 그가 도망칠 곳을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지금 그를 사로잡아 보낸다면 이는 진정으로 인자한 자의 행동이 아닙니다."
그러나 질간타두는 북위에 책망받을까 두려워 이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 질간아리는 하는 수 없이 몰래 용맹한 병사를 보내어 유발발을 압송해가던 일행을 습격하고는, 그를 빼돌려서 강족 요씨의 후진으로 보냈다. 이후 유발발은 후진의 휘하에서 오르도스 지역의 고평을 다스리던 선비 다란부(多蘭部)의 수령 몰혁간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고, 그의 과 결혼했다.[3]

홍시 4년(402년) 2월 14일[4], 북위의 상산왕 탁발준 등이 군대를 이끌고 고평을 습격하였다. 몰혁간은 크게 놀라 유발발과 함께 기병 수천 기를 거느리고 진주(秦州)로 도망쳤으며, 탁발준은 와정(瓦亭)까지 추격하였지만 끝내 그들을 따라잡지 못하고 포기하였다. 그 대신 다란부가 비축해둔 물자를 전부 약탈하여, 말 4,000여 필, 낙타와 야크 3,000여 마리, 소와 양 90,000여 마리, 수많은 다란부의 부족민들을 약취해 돌아갔다.

유발발이 장성했을 때, 그의 키는 8척 5촌[5]으로 매우 컸으며, 허리 둘레는 10위[6]나 될 정도로 체격이 컸다. 그는 특히 재치 있고 지혜로우며, 외모도 웅장하고 당당하여 매력적인 풍모를 가지고 있었다. 후진의 황제였던 고조 문환제 요흥이 유발발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 깊이 존경하고 예우하면서 그를 효기장군으로 임명하고, 더불어 봉거도위로 삼아 국가의 중요한 회의에 자주 참여하게 하였다. 요흥이 유발발에게 베푸는 은총과 대우는 공훈이 있는 구신(舊臣)들보다도 더 뛰어났다. 이에 요흥의 동생 제남공 요옹이 경고하였다.
"유발발은 천성이 잔인하여 가까이 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폐하께서 그를 총애하시니, 신은 이것이 매우 의아할 따름입니다."
그러자 요흥이 반박하였다.
"유발발은 세상을 구제할 재능이 있다. 나는 지금 그의 재능을 모아 쓰고자 하니, 그와 함께 천하를 평정하는 데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너는 어찌하여 그를 거부하려 하는가?"
그 후 유발발은 안원장군으로 승진하고, 양천후(陽川侯)에 봉해졌다. 요흥은 유발발을 고평으로 돌려보내 몰혁간을 도와 그곳을 지키게 하고, 성 두 곳과 삭방(朔方)의 여러 이민족, 옛 유위진의 부락 30,000여 명을 모두 그에게 배속시켜, 그로 하여금 북위를 정탐하고 침략하는 역할을 맡기려 하였다. 이때 요흥의 동생 제남공 요옹이 강력히 반대하여 중지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요흥은 유발발을 다시 지절•안북장군으로 임명하고, 오원공(五原公)에 봉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삼교(三交)와 다섯 선비족 부락 및 여러 잡족 30,000여 호를 배속시켜 삭방을 지키게 하였다.

2.2. 북하 건국

홍시 9년(407년) 5월, 북위의 도무제 탁발규와 후진의 문환제 요흥이 서로 포로를 교환했다. 북위에선 일전에 전투에서 사로잡은 후진의 월기교위 당소방(唐小方)을 보내왔고, 후진은 억류했던 북위의 사자 북부대인 하적간(賀狄干)을 명마 1,000여 필과 함께 돌려보냈다. 유발발은 이 소식을 듣고 요흥이 원수인 북위와 화친한다고 오해하여 크게 분노하고, 후진에 반역할 계획을 세웠다. 당시 유연족의 카간 욱구려사륜은 말 8,000필을 북위에 바치려 하였는데, 욱구려사륜이 대성(大城)을 지나갈 때 유발발이 습격해 말들을 빼앗고, 자신의 무리 30,000명을 소집하였다. 이후 유발발이 고평천(高平川)에서 사냥하는 척하다가 장인인 몰혁간을 기습하여 그를 죽이고, 그의 군사를 합병하니 유발발의 군대는 수만 명에 이르렀다.

용승 원년(407년) 6월, 유발발은 스스로 하나라 사성 하후씨의 후손임을 칭하면서 북하를 건국해, 대하천왕(大夏天王)•대선우(大單于)를 자칭하고, 연호를 '용승'(龍昇)이라고 했다. 큰형 유우지대(劉右地代)를 승상•대공(代公)으로 삼고, 둘째형 유직력제를 대장군•위공(魏公)으로 삼았다. 또, 질간아리는 어사대부•양공(梁公), 동생 유아리라인(劉阿利羅引)은 정남장군•사예교위, 유약문(劉若門)은 상서령, 유질이달(劉叱以韃)은 정서장군•상서좌복야, 유을두(劉乙斗)[7]는 정북장군•상서우복야에 각각 임명하였다. 나머지 인물들도 각각 순서에 따라 직책을 부여받았다.

용승 원년(407년) 10월, 북하를 건국한 유발발은 후진에 복속되어 있었던 선비족 설간부(薛干部) 등 3부를 격파해 그 무리 10,000여 명을 항복시켰다. 그리고는 삼성(三城)[8] 이북에 후진이 세워둔 여러 주둔지를 토벌하여 후진의 장수 양비(楊丕)와 요석생(姚石生) 등을 참수하였다. 이때 여러 장수들이 견고한 요새를 굳건히 지키는 것이 좋다고 간언하였으나, 유발발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얼마 뒤, 여러 장수들이 다시 유발발에게 간하였다.
"폐하께서 천하를 경영하시려면, 남쪽으로 장안을 취하시기 전에 먼저 근본을 굳게 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안심시키셔야 합니다. 고평(高平)은 산천이 험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도읍으로 삼기에 적합합니다."
그러나 유발발이 말했다.
"경들이 아는 것은 한 가지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알지 못하는구나. 지금 나의 대업은 이제 막 시작되어, 군사와 백성이 아직 많지 않다. 요흥도 은 당대의 영웅으로, 그의 장수들이 명령을 잘 따르고 있어 관중(關中)을 도모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이다. 만약 내가 하나의 성을 지키기에만 집중한다면, 그는 모든 힘을 나에게 집중시킬 것이고, 군사력의 차이가 크니 우리가 패망할 것은 자명하다. 그러므로 차라리 기병을 몰아 바람처럼 빠르게 그의 허를 찌르고, 전방을 구원하려 하면 후방을 치고, 후방을 구원하려 하면 전방을 치는 식으로 그를 지치게 만드는 것이 낫다. 이리하면 나는 여유롭게 기동하면서 전쟁을 할 수 있을 것이고, 10년이 지나지 않아 영북(嶺北)과 하동(河東)은 모두 내 것이 될 것이다. 장안은 요흥이 죽은 뒤에 천천히 취하면 되고, 요홍(姚泓)은 겨우 어린아이에 불과하니 쉽게 포로로 잡을 수 있다. 이 모든 전략은 이미 내 계획 속에 있느니라. 옛날 헌원씨도 사람들을 이리저리 거처를 옮겨 20여 년을 그렇게 보냈는데, 어찌 나라고 못하겠느냐?"
그리하여 북하군은 유발발의 지휘 아래 한동안 전통적인 유목민족의 생활방식을 고수하며 일부러 도읍을 정하지 않고 떠돌아 다니는 독특한 전략을 채택하는 등 유격전을 벌이며 후진을 압박했다. 특히 영북군과 하동군을 자주 침략해오니, 각 성문은 낮에도 감히 문을 열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유발발의 계책으로 국경이 혼란스러워지자, 문환제 요흥은
"내가 황아(黃兒, 요옹의 아명)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라며 탄식하였다.

용승 원년(407년) 11월, 유발발이 처음 천왕을 자칭한 이후, 남량의 군주 독발녹단에게 혼인을 청하였으나 독발녹단이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유발발은 크게 분노하여 기병 20,000기를 거느리고 남량을 침공하였다. 그는 양비(楊非)에서 지양(支陽)까지 총 300여 리를 진격해 10,000여 명을 살해하고, 백성 27,000여 명과 소, 말, 양 등 가축 수십만 마리를 노획한 뒤 돌아갔다. 독발녹단이 분노하여 북하군을 추격하려고 하자, 그의 장수 초랑(焦朗) 만류하며 말했다.
"유발발은 천성이 영웅적이고 군대를 다스림에 질서가 있어, 지금 경솔히 그를 공격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현재 그들은 약탈한 물자를 가지고 돌아가려 하고 있으니, 싸우고자 하는 마음은 크지 않을 것입니다. 이들을 직접 상대하기보다는, 먼저 북쪽으로 건너가 만곡퇴(萬斛堆)에서 강을 막고 길목을 차단하는 것이 승리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다른 장수 하련노(賀連怒)는 초랑의 의견에 반대하며 말했다.
"유발발은 한번 죽을 뻔한 위기를 겪고도 겁을 상실하여, 무리를 이끌고 반역해 우리에게 대적하고 있습니다. 우연히 큰 전공을 세웠다고는 하나, 지금 그들이 지나는 길은 소와 양으로 가득 차 있고, 재물은 산처럼 쌓여 있습니다. 그들의 군대는 피로하고 약탈에 눈이 어두워 더는 전력을 다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대군을 이끌고 가면 그들은 틀림없이 무너질 것인데, 어찌하여 군대를 물림으로써 그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려 하십니까? 지금 기세가 등등할 때 신속히 추격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에 독발녹단은
"내가 이미 추격하기로 결심하였으니, 이를 막는 자는 참하겠다!"
라며 엄포를 놓고 출진했다.

유발발은 독발녹단이 추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는 양무(陽武) 아래의 협곡에서 길을 막기 위해 도로를 파고, 수레를 묻어 방해물을 만들었다. 드디어 북하군을 만난 독발녹단은 먼저 활을 잘쏘는 병사들을 앞으로 보내 활을 쏘게 했는데, 유발발의 왼쪽 팔뚝에 화살이 꼳혔다. 하지만 유발발은 내색 한번 하지 않고 화살을 뽑은 뒤, 날랜 기병들을 몰아 매섭게 진격하니, 예상외의 기동력과 용맹함에 놀란 남량군은 황급히 맞서싸우다가 백정(百井)에서 결국 대패하였다. 유발발은 80여 리를 추격하여 적군 수만 명을 살상하였고, 적장 열 명 이상을 참수하였으며, 적의 수급들을 모아서 경관을 만들어 "촉루대(髑髏臺)"라고 이름하였다. 독발녹단은 유발발의 추격에서 벗어나 겨우 목숨을 부지하였고, 유발발은 약탈한 물자를 가지고 귀환하는 길에 청석원(青石原)에서 후진의 장수 장불생(張佛生)을 격파하고, 5,700명을 포로로 잡거나 참수하였다.

2.3. 후진 침략

용승 2년(408년) 5월, 문환제 요흥이 상서좌복야 제난(齊難)에게 기병 20,000기를 주어 유발발을 토벌하게 하였다.

용승 2년(408년) 7월, 유발발은 제난을 피해서 하곡(河曲)으로 일단 군사를 물렸다. 이에 제난은 유발발이 멀리 물러났다고 생각하고, 군대를 풀어 들판에서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던 유발발은 비밀리에 진군하여, 전군을 들어 약탈에 정신이 팔린 제난의 후진군을 습격하여 완전히 섬멸하였다. 유발발은 7,000여 명의 포로를 사로잡고, 그들의 군마와 병기를 모두 노획하였다. 제제난은 군대를 이끌고 퇴각하였으나, 혁련발발은 다시 목성(木城)에서 그를 추격하여 성을 함락하고 제난을 사로잡았으며, 그의 장수와 병사 13,000여 명과 군마 10,000필을 얻었다. 이 사건 이후, 영북에 거주하던 이민족과 한족 수만 명이 강족의 후진을 버리고 유발발에게 항복했으며, 유발발은 이들을 모두 받아들이고 수령을 임명해 관리하였다.

용승 3년(409년) 4월, 유발발이 기병 20,000기를 거느리고 후진을 침공하여, 고국(高國)으로 들어가 오정(五井)에 이르렀다. 그는 평량(平涼)의 여러 이민족 7,000여 호를 약취하여 후군(後軍)에 배속하고, 군대를 이끌고 다시 나아가 의력천(依力川)에 주둔하였다.

용승 3년(409년) 9월, 문환제 요흥이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유발발을 공격하기 위해 이성(貳城)에 도착하였다. 이때 요흥은 안원장군 요상 등을 보내 세금을 징수하고 군량을 운반하게 하였다.

유발발은 후진의 군대가 아직 집결하지 않은 틈을 타 허를 찔러 이성을 기습하였고, 요흥은 크게 놀라 장수 요문종(姚文宗)을 보내 맞서 싸우게 하였다. 유발발은 요문종과 싸우다가 거짓으로 퇴각하고, 매복을 준비하여 후진군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요흥은 다시 장수 요유생(姚榆生) 등을 추가로 보내 추격하게 하였으나, 매복한 유발발의 병사들이 양쪽에서 기습하여 요유생 등을 사로잡았다. 유발발은 기세를 타고 이성을 밀어붙였으나, 요문숭의 분투로 인해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물러나야만 했다. 문환제 요흥 또한 전투가 끝나자 수도 장안으로 돌아갔다.

후진의 장수 왕해(王奚)는 강족 병사 3,000여 명으로 칙기보(敕奇堡)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유발발이 그곳을 공격하여 물길을 막아버렸다. 칙기보 안의 사람들이 몹시 궁핍해져 왕해를 사로잡아 유발발에게 바치며 투항하니, 유발발이 왕해에게 말했다.
"그대는 충신이로다! 나는 그대와 함께 천하를 평정하고자 한다!"
왕해가 대답했다.
"내가 여기서 죽는 것이야말로 큰 은덕(恩德)이다."
그러고는 측근 수십 명과 함께 죽음을 택했다. 칙기보를 점령한 유발발은 황석강(黃石岡)에서 후진의 장수 왕낙생(王洛生)을 공격해 무찔렀고, 뒤이어 장수 미저호지(彌姐豪地)가 지키는 아라성(我羅城)까지 공격해 함락시켰다. 세 지역에 살던 백성 7,000여 호는 대성(大城)으로 강제이주시키고, 승상 유우지대를 유주목(幽州牧)으로 삼아 이들을 관리하도록 했다.

용승 4년(410년) 3월, 유발발이 상서 호금찬(胡金纂)을 보내어 기병 10,000기로 평량군을 다시 침략했으나, 문환제 요흥이 친히 구원군을 이끌고 와, 호금찬은 격렬한 전투 끝에 전사하였다. 이에 유발발은 자신의 조카인 좌장군 유나제(劉羅提)에게 보병과 기병 10,000명을 주어 정양(定陽)으로 가, 후진의 북중랑장 요광도(姚廣都)를 치도록 하였다. 유나제는 정양을 함락시키고, 요광도를 사로잡았으며, 4,000여 명의 후진 장병을 생매장하였다. 유나제는 정양을 약탈하여 여인과 아이들을 군사들에게 포상으로 주었고, 요광도를 태상으로 임명하였다.

이어서 유발발은 또 후진의 농(隴) 일대를 침범해, 백애보(白崖堡)를 헐고 청수(清水)로 진격하였다. 후진의 약양(略陽) 태수 요수도(姚壽都)는 청수성을 버리고 상규(上邽)로 도망쳤고, 유발발은 그 지역의 백성 16,000여 호를 대성으로 강제이주시켰다. 이때 요흥은 안정(安定)에서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추격하여 수거천(壽渠川)에 이르렀으나, 유발발을 막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그해, 북하에 항복했던 제난과 요광도가 반역을 모의하다가 모두 처형되었다.

용승 5년(411년) 정월, 후진의 안원장군 요상이 행성(杏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유발발이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남쪽의 대소(大蘇)로 도망갔다. 유발발이 평동장군 녹혁간(鹿弈干)을 보내 요상을 추격하여, 요상과 그 병사들을 포로로 잡았다. 요상은 유발발에게 끌려가 그 앞에서 책망을 받은 후 처형되었다.

용승 6년(412년) 2월, 유발발이 기병 30,000기를 이끌고 남쪽으로 진군하여 안정(安定)을 공격하였고, 후진의 상서 양불숭(楊佛嵩)을 청석(青石)의 북원(北原)에서 격파하였다. 이때 유발발은 양불숭의 병사 35,000여 명의 투항을 받았고, 군마 20,000필을 획득하였다. 이후 후진의 장수 당지륭(黨智隆)이 지키고 있던 동향(東鄉)을 공격하니, 당지륭은 유발발에게 항복하여 광록훈으로 임명되었고, 그 백성 3,000여 호는 이성(貳城)으로 이주되었다.

이 무렵 후진의 진북장군 참군 왕매덕(王買德)이 귀순하자, 유발발이 왕매덕에게 후진을 멸할 계책을 물었다. 왕매덕은
"진나라(秦)의 덕은 비록 쇠퇴하였으나, 변경의 방어는 여전히 견고하니, 당장은 힘을 비축하여 기회를 기다리십시오."
라고 진언하였다. 이에 유발발은 그를 매우 칭찬하며 군사중랑장(軍師中郎將)으로 삼았다.

용승 6년(412년) 6월, 서진에서 반란이 일어나 국왕 걸복건귀가 암살당하자, 유발발은 그의 죽음을 기회로 삼아 서진을 정벌하려 하였다. 그러나 왕매덕이 말하기를,
"걸복치반은 우리와 동맹을 맺은 사이이고, 이제 막 국왕의 상을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를 돌보지 않고 공격하는 것은 비열한 행위입니다. 하물며 만승의 군주라면 이를 어찌 부끄러워하지 않겠습니까?"
라며 만류하였고, 유발발은 이 말을 듣고 정벌할 생각을 멈추었다.

용승 6년(412년) 10월, 문환제 요흥이 양불숭을 안원장군•옹주자사(雍州刺史)로 삼아, 영북의 병사들을 통솔해 북하를 치도록 하였다. 양불숭은 며칠 간 행군하여 북하를 공격했으나, 유발발의 반격을 받고 또다시 패배하여 칼로 목을 찌르고 자결하였다.

봉상 원년(413년) 3월, 유발발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은 자들까지 모두 사면하고, 연호를 '봉상'(鳳翔)으로 개원하였다. 그는 어사대부 질간아리를 장작대장(將作大匠)으로 임명하고, 영북의 이민족과 한족 백성 100,000명을 동원하여 흑수(黑水) 남쪽에 새로운 성을 축조하였다. 유발발은
"옛사람들이 성읍을 세울 때, 산천의 지형에 따라 짓거나, 이름에 의미를 담아 명명하였다. 이제 도성이 완성되어 만 리에 이르는 장대한 도시가 되었으니, 마땅히 훌륭한 이름이 있어야 한다. 나는 장차 천하를 통일하고, 만국을 다스릴 것이니, '통만(統萬)'이라 이름하는 것이 좋겠다."
는 의미를 담아 성을 '통만성'(統萬城)이라고 명명하였다. 현장 감독을 맡은 질간아리는 기술적으로 매우 능숙했지만, 성격이 잔인하고 냉혹하여 백성들을 풀과 같은 존재로 여겼다. 그는 흙을 쌓는 방식으로 성벽을 쌓았는데, 흙으로 된 성벽에 송곳을 찌르게 하여 1촌 이상 들어가면 그 작업자를 죽여 성벽에 함께 묻었고, 송곳이 들어가지 않으면 그 송곳으로 찌른 사람을 죽였다. 또한, 질간아리는 구리를 주조해 큰 북과 비렴(飛廉), 옹중(翁仲), 낙타, 용, 호랑이 등의 동상들을 만들어, 이를 황금 장식으로 한껏 꾸민 뒤, 대궐 앞에 진열했다. 이 과정에서 정교함을 따지느라 공인 수 천 명이 살해당했으나, 유발발은 이를 질간아리의 충성심이라 여겨 오히려 기특하게 생각했다. 마침내 통만성이 완성되자 이곳을 도읍으로 정했다.[9]

유발발은 장인들에게 명해 다섯 가지 병기를 제작하게 하였는데, 그 예리함이 매우 뛰어났다. 그는 백련강(百煉鋼)으로 활을 제작하게 한 후, 이를 시험하는 과정에서 제작한 활이 갑옷을 뚫지 못하면 활을 만든 장인을 참수하였고, 갑옷이 뚫리면 갑옷을 만든 장인을 참수하였다. 또한, 유발발은 백련강으로 만든 다섯 자루의 검을 제작하였는데, 검의 등 부분에는 용과 참새 모양의 큰 고리가 있으며, 금으로 용 모양을 새겨 넣었다. 이 검은 길이가 3척 9촌 이며, '대하룡작(大夏龍雀)'이라 이름을 붙였다. 검의 등에는 다음과 같은 명문이 새겨졌다.
古之利器呉楚湛盧大夏龍雀名冠神都可以懐逺可以柔邇如風靡草威服九域

옛 명검, 오초(吳楚)의 잠로(湛盧)와 같이, 대하룡작(大夏龍雀)의 명성은 신도(神都)에 으뜸이라. 멀리는 적을 위협하고, 가까이는 백성을 어루만지니, 바람이 풀을 쓰러뜨리듯, 아홉 지역이 그 위엄에 복종하리라.
이 검은 세상에서 매우 소중히 여겨졌으며, 사람들은 이를 귀하게 여겼다. 또, 유발발은 삼교(三交) 지역에 연못을 파서 녹련지(淥漣池)를 만들었다.

봉상 원년(413년) 5월, 통만성에 하늘에서 물고기가 비처럼 쏟아졌다. 당시 유발발은 무리하게 백성들을 동원해 공사를 벌이자, 민심은 크게 피폐해져 백성들이 이를 견디지 못하였다.

유발발은 자신의 성씨를 부끄럽게 여겨, 이를 '혁련(赫連)'으로 고치며 조서를 내려 말했다.
"짐의 황조(皇祖)는 북방에서 유삭(幽朔)으로 이주하여 성씨를 '사(姒)'로 고쳤으나, 그 음이 중국과 달랐다. 그러므로 모계의 성을 따라 '유(劉)'라 하였으나, 이는 예(禮)에 맞지 않았다. 옛 사람들은 성씨를 일정하지 않게 두고, 태어난 곳에 따라 성을 정하거나, 조상의 이름을 따라 성을 정하였던 바, 짐 또한 이러한 의리를 따르고자 한다. 제왕이란 하늘에 계승되는 자로, 그 이름의 빛나는 위엄은 하늘과 연결되어 있다. 이제 짐은 성을 혁련(赫連)으로 고쳐 황천(皇天)의 뜻에 부합하여 영원히 무궁한 대경(大慶)을 누리도록 하겠다. 하늘의 존귀함을 계승한 자는 지파(支庶)들과 같은 성을 공유해서는 안 되며, 정통이 아닌 자들은 모두 '철벌(鐵伐)'을 성으로 삼도록 하라. 짐의 종족과 자손들은 강인하고 날카롭기를 철과 같이 하여, 모두 사람을 제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리하여 방계에겐 '철벌'(鐵伐)이라는 성씨를 내렸다.

봉상 원년(413년) 12월, 혁련발발은 아내 양씨(梁氏)를 왕후로, 아들 혁련괴(赫連璝)를 태자로 삼았다. 나머지 아들들인 혁련연(赫連延)은 양평공(陽平公), 혁련창은 태원공(太原公), 혁련륜(赫連倫)은 주천공(酒泉公), 혁련정(赫連定)은 평원공(平原公), 혁련만(赫連滿)은 하남공(河南公), 혁련안(赫連安)은 중산공(中山公)에 각각 봉하였다.

봉상 2년(414년) 정월, 혁련발발이 북위의 하동(河東)과 포자(蒲子)를 침략하였다.

봉상 3년(415년) 3월, 혁련발발이 후진의 장수 요규(姚逵)가 지키고 있던 행성(杏城)을 공격하여 20일 만에 성을 함락시키고, 요규와 다른 장수 요대용(姚大用), 요안화(姚安和), 요이복(姚利僕), 윤적(尹敵) 등을 사로잡았으며, 후진군 20,000명을 생매장해 죽였다.

봉상 3년(415년) 5월, 혁련발발은 어사중승 오락고(烏洛孤)를 북량으로 보내어 저거몽손과 동맹을 청하고, 다음과 같은 서약을 맺었다.
"진(晉)이 쇠락한 이후로 재앙이 아홉 지역을 얽어매었고, 조(趙)와 위(魏) 일대는 긴 뱀처럼 폐허가 되었으며, 진(秦)과 농(隴) 일대는 이리들의 구덩이가 되었다. 두 도성의 신도(神都)는 무성한 풀밭이 되었고, 가엾은 백성들은 무엇을 의지해야 할지 모르게 되었다. 하늘이 재앙을 뉘우치고 운명이 두 가문에 이르렀으니, 국경이 가깝고 의리로 맺어진 이들은 서로 화목을 도모해야 한다. 세상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면 화합과 동맹이 필수적이므로, 나라와 가정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신령과 조상 앞에 맹세를 하지 않으면 안 되며, 강철과 같이 굳건한 약속을 해야만 시작과 끝을 다짐할 수 있다.

그러나 진(晉)과 초(楚)의 동맹, 오(吳)와 촉(蜀)의 약속들은 모두 서약한 피가 마르기도 전에 배신당하였다. 하나, 이제 우리 두 가문은 과거와는 다르게 서로 깊은 사랑과 신뢰로 맺어졌으며,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서로 깊이 아끼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먼지바람을 멈추고 함께 세상을 구제하려는 진정한 의지를 공유하게 되었으니, 힘을 합쳐 온 마음을 다해 천하를 구해야 한다. 만약 천하에 일이 생기면 함께 의로운 깃발을 높이 들고, 세상이 안정되면 노(魯)와 위(衛)처럼 서로 공고한 관계를 유지한다. 험난한 상황에서도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교류와 무역을 통해 필요를 충족시키고, 이 약속은 자손에게까지 전해져 영원히 우정을 쌓아가도록 한다."
저거몽손도 그의 동생인 황하(湟河) 태수 저거한평(沮渠漢平)을 보내어 동맹을 체결하였다.

봉상 3년(415년) 9월, 혁련발발이 그의 장수 혁련건(赫連建)을 보내, 군사를 이끌고 후진을 침공하게 하였다. 혁련건은 평량태수 요주도(姚周都)를 사로잡고 신평(新平)에 진입하였으나, 후진의 광평공 요필(姚弼)과 용미보(龍尾堡)에서 전투를 벌였다가 패배하여 오히려 사로잡히고 말았다.

봉상 4년(416년) 6월, 혁련발발은 후진의 진주(秦州) 자사 요숭이 구지공 양성과 대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병 40,000기를 거느리고 진주자사 치소가 위치해 있는 상규를 습격하였다. 혁련발발이 상규에 이르기도 전에 요숭이 양성과 죽령(竹嶺)에서 전투를 벌였다가 전사하였고, 혁련발발은 이를 기회로 삼아 상규를 공격하여 20일 만에 함락시켰다. 혁련발발은 새로 임명된 후진의 진주자사 요평도(姚平都)와 후진군 5,000여 명을 죽이고, 그는 성을 파괴한 뒤에 음밀(陰密)로 진격하여, 그곳을 지키던 요랑자(姚良子)와 후진군 10,000여 명을 사살하였다.

혁련발발은 아들 태원공 혁련창을 사지절•전장군•옹주자사로 삼아 음밀을 진수하도록 하였다. 음밀을 빼앗겼다는 소식을 들은 후진의 정북장군 요회(姚恢)는 안정군을 버린 채 수도 장안으로 도망쳤고, 안정군 사람 호엄(胡儼)과 화도(華韜)는 50,000여 호를 이끌고 혁련발발에게 투항하였다. 혁련발발은 호엄을 시중, 화도를 상서로 임명하고, 진동장군 양구아(羊苟兒)와 선비족 5,000명을 배치하여 안정을 지키게 하였다.

혁련발발은 다시 진격하여 후진의 진서장군 요심(姚諶)이 주둔한 옹성(雍城)을 치자, 요심은 진지를 버리고 장안으로 도망쳤고, 혁련발발은 옹성을 점령하고 미성(郿城)을 약탈하였다. 이에 문환제 요흥이 붕어하고 그 자리를 계승한 요홍이 동평공 요소와 정로장군 윤소(尹昭)에게 보병과 기병 50,000명을 주어 미성에 있는 혁련발발을 치니, 혁련발발이 패배해 다시 안정으로 퇴각하였다.

이때 항복했던 호엄 등은 성문을 굳게 닫고, 진동장군 양구아(羊苟兒)와 선비족 병사들을 습격해 살해하고는 다시 안정을 들어 후진에 항복하였다. 혁련발발은 하는 수 없이 행성으로 방향을 돌렸는데, 추격해오던 요소의 군대와 안정 남쪽에 위치한 마안판(馬鞍阪)에서 조우하여 대패하고 말았다. 요소는 혁련발발을 쫓아 조나(朝那)까지 추격하였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돌아갔다. 행성으로 무사히 도망쳐온 혁련발발은 다시 혁련나제를 보내 부풍군의 지양(池陽)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후진의 거기장군 요유(姚裕), 전장군 팽백랑(彭白狼), 건의장군 사현(虵玄)이 혁련나제를 요격하여 패주시켰다.

2.4. 관중 공략

봉상 4년(416년) 8월, 동진의 명장이자 권신인 태위 유유가 후진을 정벌한다는 소식에 혁련발발이 웃으며 신하들에게 말했다.
"유유가 진나라(秦)를 정벌하기 위해 수륙 양면으로 진군한다니! 유유는 세상에 드문 탁월한 전략가라, 요홍(姚泓)이 어찌 스스로 지켜낼 수 있겠는가! 짐이 하늘의 때와 인간사의 흐름을 살펴본 결과, 유유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더구나 요홍은 형제들 사이에 내분이 있으니, 어떻게 적을 막아낼 수 있겠는가. 유유가 장안을 정복한다 하여도, 그는 빨리 돌아가는 것이 유리하기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을 것으로, 유유는 그의 자제들과 장군들을 관중(關中)에 남겨두고 떠날 것이다. 유유가 떠나면 짐은 그곳을 마치 떨어진 물건을 주워가는 것처럼 쉽게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짐의 군사와 말들을 힘들게 할 필요가 없다."
혁련발발은 이후 말들에게 먹이를 주고, 병기들을 갈며, 병사들을 휴양시키면서 전투 준비를 하였다.

봉상 5년(417년) 3월, 혁련발발이 다시 진격하여 안정을 점령하였다. 이에 영북 일대에 주둔한 후진군의 진지와 후진의 군현들이 모두 항복하였고, 결국 혁련발발은 영북의 모든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봉상 5년(417년) 9월, 유유가 후진을 멸망시키고 장안으로 들어가, 혁련발발에게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며 형제를 약조하자고 했다. 이에 혁련발발은 암암리에 중서시랑 황보휘(皇甫徽)에게 답서를 대신 쓰라 명령했고, 황보휘가 답서를 써오자 몰래 받아 봉인한 뒤에 유유의 사신에게 건네주었다.[10] 혁련발발의 답서를 읽은 유유는 그의 박식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심지어 혁련발발을 직접 만나고 온 사신 또한 그의 기이하고 잘생긴 용모를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니, 유유는
"내가 그보다 못하구나!"
라며 탄식하였다.

봉상 5년(417년) 10월, 혁련발발이 도읍 통만성으로 귀환하였다.

봉상 5년(417년) 11월, 태위 유유가 그의 둘째 아들 계양공 유의진을 도독옹양진3주제군사(都督雍梁秦三州諸軍事)•안서장군•영 옹동진2주자사(領雍東秦二州刺史)로 삼아 장안을 지키게 하였다.

봉상 5년(417년) 12월, 유유가 장안에서 출발하여 낙양(洛陽)으로 들어갔고, 다시 강줄기를 따라 변거(汴渠)로 들어가 동진으로 개선하였다. 혁련발발은 유유가 갔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왕매덕을 불러 관중을 공략할 방법을 물었다. 왕매덕이 답했다.
"관중의 지세가 비록 유리하나, 머리에 피도 안마른 애송이에게 이를 지키게 한 것은 장기적으로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유유가 이런 결정을 하고 황급히 돌아간 이유는 그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제위 찬탈을 하고자 하여, 중원에 신경쓸 겨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폐하께서는 장강 이남과 관중을 잇는 요충지인 청니(青泥)와 상낙(上洛)에 유격대를 배치하시어 동진과의 왕래를 차단하고, 동관(潼關)과 효섬(崤陝)에 군대를 주둔시켜 수륙 양로를 점거하십시오. 그런 다음 폐하께서 관중 각지에 격문을 띄워 은덕을 널리 알린다면, 관중의 백성들은 모두 술과 음식을 들고 폐하의 군대를 환영할 것입니다. 유의진 혼자 빈 성에 앉아 도망갈 곳이 없을 터이니, 반드시 10일 안에 폐하 앞에 와서 투항할 것이고, 이리하면 병사들의 칼에 피를 묻힐 필요없이 바로 관중을 장악할 수 있습니다."
혁련발발은 이를 매우 옳다고 여겨, 태자 혁련괴를 도독선봉제군사•무군대장군으로 삼아 기병 20,000명을 거느리고 장안으로 나아가도록 하였다. 또한 전장군 혁련창에게도 군사를 주어 동관(潼關)을 치게 하고, 왕매덕을 무군우장사로 임명해 청니(青泥) 남쪽으로 나아가 길을 끊게 하였다. 그리고 혁련발발 본인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그들의 후속 지원군으로 나섰다.

봉상 6년(418년) 정월, 혁련괴가 위양(渭陽)에 이르자, 관중의 백성들이 줄을 지어 항복해왔다. 동진의 유의진은 용양장군 심전자를 보내 북하군을 막았으나, 심전자는 혁련괴를 막지 못하고 유회보(劉回堡)로 퇴각하였다. 이후 심전자는 사마 왕진악에게 이 상황을 보고하였다. 보고를 받은 왕진악은 심전자의 사자로 온 왕수(王修)를 향해 말했다.
"유공(劉公, 유유)은 열 살짜리 아이(유의진)를 우리에게 맡겼으니, 우리가 힘을 합쳐 노력해야 한다. 지금 병력을 갖추고도 진격하지 않으면, 어찌 적을 평정할 수 있겠는가?"
왕수가 돌아가 심전자에게 이를 전하자, 심전자는 매우 두려워하는 동시에 왕진악과의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다.

당초 유유가 동쪽으로 돌아갈 때, 심전자와 부홍지는 유유에게 왕진악이 관중에 가족을 두고 있어 신뢰할 수 없다고 여러 차례 보고하였다. 유유는 이에 대해
"지금 내가 너희들에게 정예 병력 10,000명을 남겨두었다. 그가 나쁜 짓을 하려고 한다면 스스로 멸망할 것이니, 더는 말하지 말라. 종회가 반란을 일으키지 못한 이유는 위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호랑이도 여우 떼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대들은 열 명이 넘는데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라며, 심전자를 안심시킨 적이 있었다. 하지만 왕진악과의 사이가 틀어진 이후로 그들은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왕진악과 심전자는 모두 북지(北地)로 나아가 경상(涇上)에서 북하의 군사에 맞서 싸웠는데, 군중에는 왕진악이 동진의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유의진을 남쪽으로 돌려보낸 후, 관중을 점령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그해 정월 15일[11], 심전자는 왕진악에게 성 밖으로 나와서 함께 녕삭장군 부홍지의 진영에서 회합하여 일을 의논하자고 요청하였다. 이때 심전자는 그의 친족 심경인(沈敬仁)에게 왕진악을 암살하도록 명령하였고, 왕진악이 막사 안에서 심경인에게 살해당하자, 이를 교묘하게 위조하여 태위 유유의 명령으로 왕진악을 주살했다고 주장하였다. 부홍지는 이 사실을 유의진에게 보고하였고, 유의진과 왕수는 갑옷을 입고 횡문(橫門)에 올라 그 변화를 살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심전자는 수십 명을 이끌고 도착하여 왕진악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다시 주장하였다. 이에 왕수는 심전자를 붙잡고, 그가 사사로이 왕진악을 죽였다는 죄를 추궁하여 처형하였다. 이후 관군장군 모수지를 안서장군 사마로 삼아 왕진악을 대신하였다.

봉상 6년(418년) 4월, 유의진은 다시 부홍지를 보내 지양(池陽)에서 혁련괴를 격파하고, 과부도(寡婦渡)에서 한번 더 격파시키니, 혁련괴는 잠시 물러났다.

봉상 6년(418년) 9월, 유의진은 나이가 어리다 보니 좌우 측근들에게 무절제하게 상을 내리곤 하였다. 장사 왕수가 이를 자주 제지하고 억제하였는데, 그로 인해 유의진의 측근들은 왕수를 원망하였다. 그들은 유의진에게 왕수를 비방하며 말했다.
"왕진악(王鎮惡)은 반란을 일으키려 했기 때문에 심전자(沈田子)가 그를 죽였습니다. 왕수가 심전자를 죽인 것도 그가 반란을 일으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유의진은 이를 믿고 측근인 유걸(劉乞)에게 명령하여 왕수를 살해하였다. 이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은 이탈하고 두려움에 빠져 서로 통일되지 못하였다. 이때 유의진은 북하의 군대가 두려워 외부 군대를 장안성 안으로 소환하여 성 안으로 들이고, 성문을 걸어 잠그는 최악의 수를 두었다. 의지할 데가 없어진 관중의 군현들은 모두 북하에 투항하였고, 패잔병 수습을 마친 혁련괴가 군사를 몰아 장안성을 야습했지만 공략에 실패하고 퇴각하였다.

한편, 혁련발발은 진격하여 함양(咸陽)을 점령하고, 장안으로의 나무 벌채와 식량 보급 경로를 차단하였다. 태위 유유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보국장군 괴은을 장안으로 보내 유의진을 소환하고, 그를 동쪽으로 낙양(洛陽)을 경유하여 물러가라 명령하였다. 또, 유유는 상국 우사마 주령석을 도독관중제군사(都督關中諸軍事)•우장군•옹주자사로 임명하여 장안의 지휘를 맡기고, 유의진을 대신해 장안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이때 유유는 주령석을 보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경이 장안에 도착하면 유의진에게 명령을 내려, 가벼운 짐만 챙기고 속히 출발하게 하라. 관문을 벗어나면 그때부터는 천천히 가도 된다. 만약 경이 관중(關中)을 도저히 지킬 수 없다 판단되면, 유의진과 함께 돌아오도록 하라."
또한, 중서시랑 주초석을 보내 하남(河洛) 지방을 위로하고 격려하게 하였다.

봉상 6년(418년) 11월, 주령석이 장안에 도착하였으나, 유의진과 그의 장수들은 더이상 성을 지켜낼 수 없음을 알고 방종하여 장안성을 크게 약탈하였다. 이후 그들은 약탈한 많은 보화와 및 여자와 아이 등을 수레에 싣고 느릿느릿 동쪽으로 향하였다. 유의진이 천천히 행진하여 파상(灞上)에 도착하였을 때, 옹주별가 위화(韋華)가 혁련발발에게 투항하였고, 장안의 백성들은 주령석을 몰아내고 혁련발발을 맞이해 장안으로 들였다. 주령석은 이에 장안의 궁궐을 불태우고 동관으로 도망쳤다.

한편, 혁련괴가 군사 30,000명을 이끌고 유의진의 뒤를 추격하고 있었다. 이에 부홍지가 유의진에게 말했다.
"공께서는 빨리 진군해야 하는데, 지금 너무 많은 보급품과 짐을 가지고 있으니 하루에 10리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추격병이 곧 도착할 것이니 어떻게 맞서겠습니까? 짐을 버리고 가볍게 이동해야만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의진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혁련괴의 군대가 들이닥쳐 동진군을 습격하였다. 부홍지와 괴은은 후방을 맡아 싸우며 연일 교전하였고, 청니 북쪽까지 물러나는 데 성공하였다. 부홍지는 직접 갑옷을 입고 싸워 기세가 삼군에서 빼어났지만, 청니에 주둔해 있던 왕매덕까지 가세하면서 중과부적으로 이기지 못하고 모두 북하군의 포로가 되었다.

유의진은 앞서 나아가고 있었고, 날이 저물면서 혁련괴의 군사들이 더이상 그를 추격하지 않아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그의 좌우 병사들은 모두 흩어졌고, 유의진은 풀숲에 홀로 숨어 있었는데, 중병참군 단굉(段宏)이 홀로 말을 타고 길가에서 유의진의 이름을 부르며 찾았다. 유의진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에게 풀숲에서 나와 말했다.
"그대는 단 중병(段中兵)이 아닌가? 나를 데리고 간다면 우리는 모두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오. 차라리 나의 목을 베어 남쪽으로 보내 공의 가문이 절망하지 않게 하시오."
단굉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죽고 사는 것을 함께 하겠습니다. 제가 감히 그럴 수 없습니다."
그는 유의진을 묶어 자신의 등에 짊어지고 홀로 말을 타고 동진으로 향하였다. 이때 유의진은 단굉에게 말했다.
"오늘의 일은 정말 예측하지 못한 일이나, 남자가 이와 같은 어려움을 경험하지 않으면 어찌 세상의 고난을 알 수 있겠소?"

혁련괴에게 사로잡힌 부홍지는 혁련발발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혁련발발은 항복을 권하였으나, 부홍지가 이를 거부하니 혁련발발은 부홍지를 벌거벗게 하였다. 그때는 마침 추위가 매서웠기에, 부홍지는 혁련발발을 욕하다가 곧 얼어 죽었다. 이 전투에서 부상당하거나 죽은 동진군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는데, 혁련발발은 포로로 잡은 동진의 장수와 병사들을 모두 죽이고, 그 수급들을 쌓고 경관을 만들어 또 "촉루대(髑髏臺)"라고 이름하였다. 이후 그는 장안에 입성하여 연호를 '창무(昌武)'로 개원하고, 장병들을 위한 연회를 크게 열면서 술잔을 들어 왕매덕에게 감사를 표하였다. 왕매덕은 이번 전투에서의 공을 인정받아 도관상서•관군장군으로 임명되었고, 하양후(河陽侯)로 봉해졌다.

한편, 동관의 조공고루(曹公故壘)에는 동진의 용양장군 왕경선(王敬先)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장안에서 도망친 주령석이 그를 찾아갔다. 이때 주령석이 조공고루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주초석도 포판(蒲阪)에 있다가 그에게로 달려갔다. 태원공 혁련창은 왕경선의 요새를 공격하여 물길을 차단하였고, 이에 따라 군사들은 목이 말라 싸울 수 없게 되었다. 보루가 곧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주령석은 주초석에게 말했다.
"형제가 함께 이국에서 죽게 되면 우리의 늙은 부모님은 무슨 마음이겠느냐. 너는 틈을 찾아 달아나 집으로 돌아가라. 나는 이곳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
주초석은 울며 말했다.
"사람이 어찌 죽지 않겠습니까? 오늘 형님을 두고 어떻게 떠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주초석은 왕경선, 우군참군 유흠지(劉欽之)와 함께 포로로 잡혀 장안으로 보내졌고, 혁련발발은 그들을 모두 처형하였다.

혁련발발은 관중을 평정하고도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당시 승려 담시(曇始)도 죽을 위기에 처했으나, 그를 해치려는 칼이 전혀 그를 상하게 하지 못했다. 혁련발발은 이를 기이하게 여겨 담시를 용서하였다.

2.5. 칭제

혁련발발이 장안을 차지하고 마침내 관중을 평정하자, 여러 신하들이 그에게 황제를 칭할 것을 권하였다. 이에 혁련발발이 말했다.
"나는 난세를 바로잡을 재능이 없고, 백성들을 구제하지 못하였소. 나는 지난 12년간 칼과 갑옷을 벗지 못하고 싸워왔으나, 아직도 사방이 하나로 통일되지 않았고 남은 적들도 여전히 번성하고 있소. 어떻게 하늘의 뜻에 보답할 수 있을지 모르겠소. 훗날 누군가 더 나은 지도자가 나타나면 왕위를 그에게 넘겨주고, 나는 북쪽으로 돌아가서 검소한 삶을 살겠소. 황제라는 칭호는 나 같은 덕이 부족한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이 거듭 청하자, 마침내 혁련발발은 이를 받아들였다.

창무 원년(418년) 11월, 혁련발발은 파상(灞上)에 제단을 세우고 황제로 즉위하면서 경내에 대사면령을 내렸고, 연호를 '창무(昌武)'로 개원하였다. 문무백관의 관직도 차등에 따라 승진시켰다.

창무 2년(419년) 정월, 혁련발발이 장수 질노후제(叱奴侯提)에게 보병과 기병 20,000명을 주어 포판을 치게 하였다. 포판을 지키던 동진의 보국장군 모덕조는 팽성(彭城)으로 도망쳤고, 혁련발발은 질노후제를 병주자사로 삼아 포판을 수비하게 하였다.

창무 2년(419년) 2월, 혁련발발이 은사(隱士) 위현(韋玄)을 소환하였다. 위현이 도착하자, 두려워하며 지나치게 예를 갖추어 절을 하니, 혁련발발은 분노하여 위현을 죽였다.

여러 신하들이 장안을 도읍으로 하길 청하자, 혁련발발이 말했다.
"짐이 어찌 장안이 여러 황제들이 도읍으로 삼았던 곳이라는 것을 모르겠는가? 장안은 산과 강으로 사방이 막혀 있고, 토지가 비옥하여 지리적으로 매우 안전하다. 그러나 형주(荊州)와 오(吳)는 멀리 떨어져 있어 우리에게 위협이 되지 않으며, 동쪽의 위(魏)와 우리는 풍속이 거의 같고 국경이 서로 접해 있다. 통만(統萬)에서 위나라의 경계까지는 불과 몇백 리 거리일 뿐이다. 짐이 장안에 머물면 통만이 위태로워져 지킬 수 없을까 두렵다. 하나, 짐이 통만에 있으면 그들은 결코 황하를 건너 서쪽으로 오지 못할 것이다. 그대들은 이 점을 보지 못했을 뿐이다."
그리고는 장안에 남대(南臺)를 설치한 뒤, 혁련괴를 대장군•옹주목으로 임명하여 남대의 상서 업무를 맡기고, 장안을 지키게 하였다. 혁련발발은 삼교(三交)에서 농사를 짓고, 녹련지(淥漣池)에 이르렀다가 통만으로 돌아갔다.

진흥 원년(419년) 2월, 통만성에서 황궁이 완성되자, 혁련발발은 경내에 사면령을 내려 중범죄자를 포함해 대사면을 하였으며, 연호를 '진흥(真興)'으로 바꾸었다. 통만성 남쪽에는 비석을 세워, 비서감 호의주(胡義周)에게 명하여 공덕을 칭송하는 글을 새기게 하였다. 혁련발발은 자만심이 강하여 자신의 위대함을 자랑하기 좋아하였으며, 통만성의 네 문에 이름을 붙였다. 남문은 '조송문(朝宋門)', 동문은 '초위문(招魏門)', 서문은 '복량문(服涼門)', 북문은 '평삭문(平朔門)'이라고 하였다.

이 무렵 혁련발발은 기병 3,000기를 보내 북위의 하서(河西)를 공격하였다. 북위 조정은 산기상시 구퇴(丘堆)와 옛 후진의 장수 왕낙생을 보내 이를 격퇴하였다.

진흥 원년(419년) 4월, 토욕혼의 멱지(覓地)가 남쪽 약수(弱水) 지역에서 무리 6,000여 명을 모아, 사자를 보내 혁련발발에게 항복할 의사를 전하였다. 이에 혁련발발은 멱지를 약수호군(弱水護軍)으로 임명하였다.

진흥 2년(420년) 5월, 통만성에서 또 물고기 비가 내렸다.

진흥 2년(420년) 10월, 혁련발발은 통만 남산에 충천대(沖天臺)를 세우고, 그곳에 올라 장안을 바라보려 하였다. 그는 선조들을 추존하여, 고조부 고즙원(誥汁爰)을 '원황제(元皇帝)', 증조부 유호를 '경황제(景皇帝)', 조부 유무환을 '선황제(宣皇帝)'로 추시하였다. 또, 아버지 유위진을 '환황제(桓皇帝)'로 추시하여 묘호를 '태조(太祖)'라 하고, 어머니 부씨(苻氏)를 '환문황후(桓文皇后)'로 추존하였다.

혁련발발은 성격이 흉폭하고 잔인하여 살해를 즐겼으며, 백성들을 초개처럼 여겨 규칙을 지키지 않았다. 그는 성 위에 올라 활과 칼을 곁에 두고, 싫어하는 자가 있으면 손수 그를 죽였다. 신하들이 그에게 반감을 보이면 눈을 도려내고, 웃는 자는 입술을 찢었으며, 충고하는 자는 비방했다고 하여 먼저 혀를 자르고 그 뒤에 참수하였다. 그로 인해 한족과 흉노족 모두 두려워했고, 아무도 생명을 보장받지 못하였다.

진흥 6년(424년) 12월, 혁련발발은 장남 혁련괴를 태자에서 폐하고 주천공 혁련륜을 태자로 세우려고 했다. 이에 분노한 혁련괴가 군사 70,000명을 이끌고 장안에서 나와 혁련륜을 치니, 혁련륜은 고평(高平)에서 30,000명의 기병으로 저항했으나 패배하고 전사하였다. 그러자 혁련발발의 차남 혁련창이 기병 10,000기를 이끌고 혁련괴를 기습해 죽이고는, 그의 무리를 병합해 총 85,000명을 거느린 채 통만성으로 귀환했다. 혁련발발은 크게 기뻐하며 태원공 혁련창을 태자로 삼았다.

진흥 7년(425년) 6월, 태묘(太廟)가 무너졌다.

진흥 7년(425년) 7월, 혁련발발이 병에 걸렸다. 병세가 심해지자, 그는 영안전(永安殿)으로 거처를 옮긴 후, 신하들을 불러 후사를 당부하였다.

진흥 7년(425년) 8월 20일[12], 혁련발발이 영안전에서 붕어하고 태자 혁련창이 그 뒤를 이었다. 시호는 '무열제(武烈帝)', 묘호는 '세조(世祖)'로 했고, 가평릉(嘉平陵)에 안장되었다. 다만, 가평릉의 위치는 현재로선 명확하지 않고, 단지 청나라 시대에 쓰여진 《연안부지》의 기록을 참고하여 옌안시 옌촨현에 있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옌촨현에 혁련발발의 묘비와 주민들이 세운 작은 절이 있긴 하나, 학자들은 후대에 세워진 것이며 실제 가평릉은 아닐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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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권 「절의전(節義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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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도등 · 이궤 · 장안조 · 왕려 · 곽염 · 지용초 · 을속고불보 · 이상 · 두숙비 · 이악 · 유원 · 장수타 · 양선회 · 노초 · 유자익 · 요군소
진효의 · 두송지 · 곽세준 · 낭방귀
86권 「순리전(循吏傳)」
장응 · 노옹 · 염경윤 · 명량 · 두찬 · 두원 · 소숙 · 장화업 · 맹업 · 소경 · 노거병 · 양언광 · 번숙략 · 공손경무 · 신공의 · 유검 · 곽현 · 경숙
유광 · 왕가 · 위덕심
87권 「혹리전(酷吏傳)」
우락후 · 호니 · 이홍지 · 장사제 · 조패 · 최섬 · 저진 · 전식 · 연영 · 원홍사 · 왕문동
88권 「은일전(隐逸傳)」
휴과 · 풍량 · 정수 · 최곽 · 서칙 · 장문후
89·90권 「예술전(藝術傳)」
조숭 · 장심(1) · 은소 · 왕조 · 경현 · 유영조 · 이순흥 · 단특사 · 안악두 · 왕춘 · 신도방 · 송경업 · 허준 · 유준세 · 조보화 · 황보옥 · 해법선 · 허준 · 위녕 · 기모회문 · 장자신 · 육법화 · 장승 · 강련 · 유계재 · 노태익 · 경순 · 내화 · 소길 · 양백추 · 임효공 · 유우 · 장주현 · 주담 · 이수 · 서건 · 왕현 · 마사명 · 요승원 · 저해 · 허지장 · 만보상 · 장소유 · 하조
91권 「열녀전(列女傳)」
난릉공주 · 남양공주 · 초국부인
92권 「은행전(恩倖傳)」
왕예 · 왕중흥 · 조수 · 여호 · 조옹(趙邕) · 후강 · 구락제 · 왕거 · 조묵 · 손소(孫小) · 장종지 · 극붕 · 장우 · 포억 · 왕우 · 부승조 · 왕질 · 이견 · 유등 · 가찬 · 양범 · 성궤 · 왕온 · 맹란 · 평계 · 봉진 · 유사일 · 곽수 · 화사개 · 안토근 · 목제파 · 고아나굉
93권 「참위부용전(僭偽附庸傳)」
혁련발발 · 모용외 · 요장 · 풍발 · 걸복국인 · 저거몽손 · 소찰
94권 「고려등전(高麗等傳)」
고려 · 백제 · 신라 · 물길 · 해족 · 거란 · 실위 · 두막루 · 지두우 · 오락후 · 류구 · 왜국
95권 「만등전(蠻等傳)」
만족(蠻) · 요족(獠) · 임읍 · 적토 · 진랍 · 파리
96권 「저등전(氐等傳)」
저족 · 토욕혼 · 탕창 · 등지국 · 당항 · 부국 · 계호국
97권 「서역전(西域傳)」
선선 · 포산국 · 실거반 · 권우마국 · 차사국 · 우전국 · 고창 · 차미 · 언기 · 구차 · 고묵국 · 온숙국 · 울두국 · 오손국 · 소륵국 · 열반국 · 토호라
소월씨 · 아구강국 · 속특국 · 파사국 · 복로니국 · 색지현 · 가색니국 · 고창 · 차미 · 여국
98권 「연연등전(蠕蠕等傳)」
연연 · 우문막괴 · 단질육권 · 고차
99권 「돌궐등전(突厥等傳)」
돌궐 · 철륵
100권 「자서전(自序傳)」
이연수
(1) 본명이 장연(張淵)으로 당고조 이연(李淵)을 피휘하여 심(深)으로 개칭되었다.
(2) 본명이 후연(侯淵)으로 당고조 이연(李淵)을 피휘하여 심(深)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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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8척 5촌[2] 10위[3] 참고로 질간부가 유발발을 보내오지 않자 북위의 도무제 탁발규는 그대로 군사를 보내 질간부를 도륙내버렸다. 이로 인해 질간타두는 북쪽으로 도망쳤고, 질간아리는 후진에 있는 유발발에게 갔다.[4] 임인년 계묘월 계축일. 음력으로는 2월 14일이고, 양력으로 4월 2일이다.[5] 당시 척인 23.7cm로 계산하면 201cm가 나온다.[6] 현재 기준으로 계산하면 115cm 정도이다.[7] 혹은 유을승(劉乙升).[8] 현재의 중국 옌안시.[9] 이 통만성은 엄청나게 화려했는지, 훗날 통만성을 함락시킨 북위 제3대 세조 태무제 탁발도가 궁전을 둘러보며 "이렇게 백성들을 수탈했는데 어찌 망하지 않기를 바라겠는가"라고 탄식했을 정도였다. 이후 태무제 탁발도는 진귀한 물건은 죄다 떼어내 가져가고 목장으로 만들어버렸다.[10] 글자도 모르는 까막눈이라서 대필을 명령한 건 아니고, 당시 한족 지식인이나 귀족들이 쓰던 격식있는 문체에 약했던 것으로 보인다.[11] 무오년 갑인월 신해일. 음력으로는 1월 15일이고, 양력으로 3월 7일이다.[12] 을축년 을유월 계묘일. 음력으로는 8월 20일이고, 양력으로 9월 18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