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0 05:07:26

모용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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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33067><colcolor=#ece5b6>
전연 초대 황제
모용황 | 慕容皝
출생 297년
서진 창려군 극성현
(現 랴오닝성 진저우시 이현)
사망
(음력)
348년 10월 25일 (향년 52세)
전연 용성
(現 랴오닝성 차오양시)
능묘 용평릉(龍平陵)
재위기간 요동공 세자
321년 ~ 333년 6월 4일
제5대 군주
333년 6월 4일 ~ 337년 10월
초대 국왕
337년 10월 ~ 34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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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33067><colcolor=#ece5b6> 성씨 모용(慕容)
황(皝)
부모 부황 고조
모후 부인 단씨
형제자매 10남 1녀 중 3남
배우자 문명황후, 문소황후, 공손씨, 고씨
자녀 17남 4녀
신장 191cm
아명 만년(萬年)
원진(元眞)
작호 좌현왕(左賢王)
망평후(望平侯)
→ 조선공(朝鮮公) → 요동공(遼東公)
→ 연왕(燕王)
묘호 태조(太祖)
시호 문명왕(文明王)
→ 문명황제(文明皇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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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초기2.2. 모용부의 대인2.3. 모용인의 난2.4. 단부와의 갈등2.5. 연왕 즉위2.6. 동진의 연왕 책봉2.7. 주변국 정벌2.8. 최후
3. 기타
3.1. 한국에서의 인지도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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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5호 16국시대 초기 선비 모용부의 제5대 대인이자, 전연(前燕)의 창업군주였다.

휘는 황(皝), 자는 원진(元眞)으로 묘호는 태조, 시호는 문명제(文明帝)였다. 선비 모용부를 크게 일으킨 제4대 대인 모용외의 3남.

2. 생애

2.1. 초기

원강 7년(297년), 모용황은 모용외의 3남으로 태어났는데, 얼굴은 용을 닮았고, 치아는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고 한다. 장성하여서는 7척 8촌[1]에 달하는 거대한 체구를 지녔고, 용맹하고 결단력이 있는 성격이었으며, 전략에 능하고 경학을 숭상하였다. 또, 그에게는 여러 기이한 재주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천문학에 능하여 국인(國人)들로부터 칭송받았다.

건무 원년(317년) 3월, 강동에 정착한 낭야왕 사마예가 진왕(晉王)에 즉위하고, 모용부로 사자를 파견해 모용외를 용양장군•대선우•창려공로 삼았다. 이때 모용황도 동진 조정에 의해 관군장군•좌현왕으로 임명되고, 망평후(望平侯)에 봉해졌다.

대흥 2년(319년) 12월, 우문부의 군대가 극성(棘城)을 포위했을 때, 모용황은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정예병을 이끌고 장사 배억과 함께 선봉에 서서 성 밖으로 나가 우문부의 군대를 공격해 격파하였다.

대흥 4년(321년) 12월, 동진에서 알자를 파견해 아버지 모용외를 요동공(遼東公)으로 책봉하자, 모용외는 첩 소생인 모용한을 제끼고 적처 소생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모용황을 세자로 삼았다. 이때 모용외는 교육의 목적으로 동횡(東橫)을 설치하고, 유학자 유찬을 동황좨주로 삼아 모용황과 여러 자제들을 교육하게 하였다.

영창 원년(322년) 12월, 요서의 선비족 단부를 습격해 단말배를 격파하고, 영지(令支)까지 들어가 그곳의 백성 1,000여 호를 납치해 돌아갔다.

태녕 3년(325년) 2월, 후조의 조왕(趙王) 석륵이 우문부의 대인 우문걸득귀(宇文乞得龜)에게 관직과 작위를 주고 모용부를 치게 하였다. 모용외는 모용황에게 단부와 탁발부 군사를 배속시킨 뒤, 요동상 배억을 우익으로 삼고, 모용인을 좌익으로 삼아 이를 영격케 하였다. 우문걸득귀는 요수(澆水)를 낀 채로 모용황의 진격을 가로막으면서 조카 우문실발웅(宇文悉拔雄)을 따로 파견해 모용인을 막게 하였다. 모용인이 우문실발웅 참수하여 그의 군대를 격파하였고, 그대로 요수에서 우문걸득귀와 싸우던 모용황과 합류해 우문걸득귀마저 대파하였다. 우문걸득귀는 전장에서 이탈해 도망침으로써 자신의 군사들을 버렸고, 모용황과 모용인은 우문부의 국성(國城) 점거한 후 경기병을 추격대로 보내 우문걸득귀의 뒤를 쫓게 하였다. 그러나 우문걸득귀는 이미 멀리 도망간 상태라, 추격대는 300리 가량 달리다가 우문부의 보물들과 가축 백만 마리를 노획하였다. 이때 수만 명의 우문부 백성들도 모용부로 귀부하였다고 한다.

태녕 4년(326년), 동진 조정에서 모용황을 평북장군으로 삼고, 조선공(朝鮮公)으로 진봉시켰다.

2.2. 모용부의 대인

함화 8년(333년) 5월, 모용외가 사망하고, 모용황이 그의 뒤를 이어서 모용부의 제5대 대인이 되었다.

함화 8년(333년) 6월, 모용황이 경내에 사면령을 선포하고, 평북장군•행 평주자사(行平州刺史)가 되어 모용부를 통솔하고 감독하였다. 또, 좌장사 배개는 군자좨주, 낭중령 고후는 현도(玄莵) 태수, 대방(帶方) 태수 왕탄(王誕)은 좌장사로 삼았다. 이때 왕탄이 좌장사 직책을 양보하면서 요동태수 양무를 천거하니, 양무는 좌장사가 되었고 왕탄은 우장사가 되었다.

함화 8년(333년) 7월, 모용황이 장사 왕제(王濟) 등을 동진으로 파견해 아버지 모용외의 상사를 보고하게 하였다.

함화 8년(333년) 8월, 우문부에서 내분이 일어나, 동부대인 우문일두귀(宇文逸豆歸)가 우문걸득귀를 몰아내는 데 성공하니, 우문걸득귀는 우문일두귀의 추격을 피하다가 외지에서 비명횡사하였다. 모용황이 이를 틈타서 우문부를 토벌하기 위해 기병을 거느리고 광안(廣安)에 주둔하자, 우문일두귀는 두려워하며 화평을 청하였다. 모용황은 화평을 승낙하고, 유음(榆陰)과 안진(安晉) 두 장소에 성을 축조한 뒤에 돌아갔다.

모용황이 처음 모용부를 통솔하게 되었을 때, 법률을 엄하고 각박하게 집행하여 무리의 인심을 얻지 못하였다. 주부 황보진이 이에 대해 간곡히 간하였으나, 모용황은 듣지 않았다. 당시 서형인 건무장군 모용한과 동복동생인 정로장군 모용인은 용맹과 지략을 겸비하여 이전에도 여러 차례 전투에서 공을 세워 병사들의 마음을 얻었고, 막내동생 모용소도 재능이 있어 아버지 모용외의 총애를 받았었다. 모용황은 평소 이처럼 유능한 형제들을 시기하였는데, 모용부를 통솔하면서 혹독한 정치를 시행하니, 불안해진 모용한은 단부로 도망쳐 단부의 대인 단료의 환대를 받았다. 하지만 도망쳐버린 모용한과 달리 모용인, 모용소 형제는 자신들이 죽임당하기 전에 먼저 거병하여 친형 모용황을 제거할 음모를 꾸몄다.

2.3. 모용인의 난

함화 8년(333년) 10월, 모용인이 평곽(平郭)에서 거병하고, 은밀히 서쪽으로 진격함으로써 불시에 극성을 공격해 함락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모용인이 미처 이르기도 전에, 어떤 사람이 모용인과 모용소의 모반 계획을 누설하였고, 모용황은 처음에 이를 믿지 못해 평곽으로 사자를 파견해 진위 여부를 조사하게 하였다. 모용인의 군대가 황수(黃水)에 도착했을 때 모용황의 사신을 만나니, 모용인은 일이 탄로났음을 깨닫고 사신을 죽인 뒤에 회군하여 평곽을 점거하였다. 이로써 모용인의 모반 사실이 명확해지자, 모용황은 우선 동생 모용소에게 자결을 명한 뒤, 군자좨주 봉혁을 파견해 요동을 위무케 하였다. 그리고 고후를 광무장군으로 삼아, 이복동생인 건무장군 모용유(慕容幼), 모용치(慕容稚), 광위장군 모용군(慕容軍), 녕원장군 모용한(慕容汗)[2], 사마 동수와 함께 5,000 군사를 이끌고 모용인을 토벌하게 하였다. 그러나 고후가 이끄는 토벌군은 문성(汶城) 북쪽에서 모용인에게 대패하여 모용한(汗)을 제외한 모용유 등 이복동생들은 전부 사로잡혔고, 과거 모용인의 사마를 지낸 적 있던 동수는 모용인에게 투항하였다.

모용황이 보낸 군대가 대패하자, 양평(襄平) 현령 왕영(王冰)과 장군 손기(孫機)가 요동성에서 거병하여 모용인에게 호응하였다. 이에 동이교위 봉추, 호군 을일(乙逸), 요동상 한교(韓矯)는 어쩔 수 없이 성을 버리고, 고후와 합류해 모용황에게로 도망쳤다. 이때 요동으로 향하던 봉혁 또한 요동성이 적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모용한(汗)과 함께 돌아왔다. 그 결과, 모용인은 요동의 땅을 전부 차지하게 되었고, 모용부와 적대 관계인 단부, 우문부 등 여러 선비족 부들이 모용인을 멀리서 응원하였다.(모용인의 난) 모용황은 그제서야 자신의 통치 방식을 반성하고, 일전에 황보진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그를 평주별가(平州別駕)로 삼았다.

함화 9년(334년) 정월, 모용황이 군자좨주 봉혁을 파견해 선비족 목제(木堤)를 백랑(白狼)에서 공격하고, 양위장군 숙우(淑虞)를 파견해 오환족 실라후(悉羅侯)를 평강(平岡)에서 공격하여, 목제와 실라후 모두 격파해 참수하였다. 재관장군 유패(劉佩)는 을연(乙連)을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함화 9년(334년) 3월, 단부의 단료가 병력을 보내 도하(徒河)를 침구하자, 모용황은 별장 장맹(張萌)을 보내 이를 요격하여 무찔렀다. 이에 단료는 다시 동생 단난(段蘭)과 일전에 도망쳐온 모용한(翰)에게 병력을 주어 유성(柳城)을 공격하게 하였다. 유성도위 석종(石琮)과 성대(城大) 모여니(慕輿埿)가 힘을 합쳐 유성을 굳건히 수비하였고, 단난 등은 결국 이기지 못하여 후퇴하였다. 그러자 단료는 분노하여 단난 등을 책망하면서 반드시 유성을 함락시키라 명령하였고, 단난과 모용한은 20일 정도 휴식을 취한 뒤에 병력을 보강하여 다시 유성을 공격하였다. 단부의 병사들은 모두 두꺼운 웃옷과 방패를 갖추어, 공성용 사다리인 비계(飛梯)를 만들어 올리고, 땅굴을 파면서 네 방면으로 동시에 밤낮으로 쉬지 않고 공격하였다. 그렇게 다시 20일을 공격하여 유성의 군사 1,000여 명을 사살하였으나, 석종과 모여니가 단단히 지켜 성은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함화 9년(334년) 4월, 모용황은 유성을 구원하기 위해 녕원장군 모용한(汗)과 봉혁에게 군사를 주어 보냈다. 구원군이 출발하기 전, 모용황은 모용한(汗)에게 주의를 주며 말했다.
"적들은 수가 많고 기세가 날카로워, 정면으로 맞서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섣불리 진격하지 말고, 반드시 병력을 모으고 진형을 갖추어 만반의 준비를 마친 후에 공격하라."
그러나 사납고 과감한 성격인 모용한(汗)은 기병 1,000여 기로 스스로 선봉을 이끌며 앞장서서 진격하였다. 봉혁은 그를 말리려 했으나, 모용한(汗)은 이를 무사하고 진격하다가 우미곡(牛尾谷)에서 우연히 단난의 군대를 만나 대패하였다. 모용한(汗)의 병력 절반 이상이 사망했지만, 뒤따라오던 봉혁이 진을 정돈하고 힘껏 싸운 덕에 전멸을 면할 수 있었다. 단난은 승세를 이용해 모용한(汗)을 끝까지 추격해 내친 김에 극성까지 습격하고자 했지만, 내심 모용부가 정말로 멸망할까 두려웠던 모용한(翰)이 그를 뜯어말려서 그만두었다.

함화 9년(334년) 8월, 동진에 모용외의 사망 보고를 마치고 돌아오던 장사 왕제(王濟)가 동진의 시어사 왕제(王齊), 알자 서맹(徐孟)과 함께 모용황을 진군대장군•대선우•평주자사•요동공으로 삼는다는 성제 사마연의 조서를 들고, 요동의 마석진(馬石津)에 배를 정박했다가 모두 사이좋게 모용인에게 붙잡혀 억류당했다.

함화 9년(334년) 11월 15일[3], 모용황이 친히 요동을 정벌하여 양평에 이르자, 요동 사람 왕급(王岌)이 비밀리에 서신을 보내 모용황에게 투항을 청하였다. 이에 모용황이 곧바로 진군하여 요동성에 입성하니, 모용인이 임명한 동이교위 적해(翟楷)와 요동상 방감(龎鍳)은 단기로 달아났다. 모용황은 모용인에게 호응한 전적이 있는 요동 사람들을 모두 구덩이 넣어 죽이려 했지만, 고후가 이를 강력히 반대하며 간언하여 그만두었다. 그러자 모용인이 임명한 거취(居就) 현령 유정(劉程)이 성을 들어 투항하였고, 신창(新昌) 사람 장형(張衡)이 모용인 임명한 신창현령을 사로잡아 모용황에게 바쳤다. 모용황은 잡혀온 신창현령을 참수하고, 요동의 호족들을 극성으로 이주시켜 관리하였다. 그리고 두군(杜群)을 요동상으로 삼아 유민들을 안심시키게 하고, 요동에 화양(和陽), 무차(武次), 서락(西樂) 3현을 설치한 뒤에 돌아갔다.

함화 9년(334년) 12월, 모용인이 군대를 이끌고 신창을 습격하였지만, 독호 왕우(王寓)가 이들을 공격하여 물리쳤다. 이후 모용황은 신창의 백성들을 양평으로 이주시켰다.

함강 원년(335년) 정월, 사마 한교를 좌사마, 군자좨주 봉혁을 우사마로 삼았다.

함강 원년(335년) 7월, 아들 모용준을 세자로 삼았다. 이후 우사마 봉혁을 파견해 우문부를 습격하게 하니, 봉혁은 우문부의 장수 섭야간(渉夜干)을 격파하고 많은 물자를 노획해 돌아왔다. 섭야간은 기병을 이끌고 추격해, 혼수(渾水)에서 봉혁을 따라잡아 공격했지만 또 패하였다.

함강 원년(335년) 10월, 모용인이 지난번에 억류시켰던 장사 왕제 등을 풀어주고, 모용황에게 돌아가게 하였다. 왕제 등은 바다 길을 통해 극성으로 나아갔지만, 도중에 풍랑을 만나 이르지 못하였다.

함강 원년(335년) 12월, 왕제 등이 마침내 극성에 이르렀고, 모용황은 비로소 성제의 조서를 받들어 정식으로 관작을 임명받았다. 이 시기에 모용황의 장하독 장영(張英)이 기병 100여 기를 거느리고, 샛길을 통해 나아가 평곽성 바깥에 머물고 있던 단부와 우문부의 사신들을 습격해, 우문부의 사신 10여 명을 죽이고, 단부의 사신을 납치해 돌아갔다.

함강 2년(336년) 정월, 모용황은 장차 모용인을 치기 위해 고후를 불러 의논하였다. 고후가 말했다.
"모용인이 반역하여 임금과 친족을 저버리니, 신령과 백성들이 분노함에 따라 일찍이 언 적이 없던 바다가 모용인이 반란을 일으킨 이래로는 세 차례에 걸쳐 얼었습니다. 과거 광무제 또한 호타(滹沱)의 얼음을 건너 큰일을 이룬 적이 있는데, 지금 모용인은 오로지 육로만 방비하고 있으니, 이는 곧 하늘이 우리에게 얼어붙은 바다를 건너 그를 습격하라 이르는 것입니다."
여러 신하들은 바다가 얼어있다고는 해도 그 위를 건너는 것은 위험하다 반대하였지만 모용황은
"내 마음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이를 감히 저지하려는 자는 베겠다!"
라 선언하고, 창려(昌黎) 동쪽에서부터 얼어붙은 바닷길을 이용해 진군하였다. 평곽성 7리 밖으로 무사히 진입한 모용황의 군대를 본 모용인은 별동대인 줄로만 알고 전군을 성 서북쪽으로 내보내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모용군이 갑자기 휘하 부대를 이끌고 모용황에게 투항하면서 모용인의 병사들은 모두 동요하였고, 이 기회를 이용해 총공격을 감행한 모용황에 의해 모용인의 군대는 궤멸하여 흩어졌다. 모용인은 부하들의 배신으로 붙잡혀 모용황에게 자결을 명령받고 사망하였다. 이로써 요동을 완전히 되찾은 모용황은 모용인에게 넘어갔던 백성과 관리들을 모두 사면하였고, 동진에 서신을 보내 보고하였다.
"신(臣)이 멀리서 폐하의 위엄을 빌려 직접 평곽을 정벌하였습니다. 장병들이 정성을 다하여 목숨바쳐 바다 위의 얼음을 건너 300리 이상을 진군하였습니다. 신(臣)이 나라를 세운 이래로 옛 기록과 노인들에게 묻고 들은 바에 의하면, 바닷물이 얼었다는 해는 올해가 처음이므로 이를 보고드립니다."

2.4. 단부와의 갈등

함강 2년(336년) 4월, 조양문(朝陽門) 동쪽에 큰 농지를 조성하고, 이를 관리할 관청을 설치하였다.

함강 2년(336년) 6월, 단부의 단료가 중군장군 이영(李詠)을 보내 무흥(武興)을 야습하게 하였으나, 이영은 진군 도중에 비를 만나 그냥 돌아가려 하였다. 하지만 이미 이영의 움직임을 파악한 도독 장맹이 돌아가는 이영의 군대를 추격하여 격파하고 이영을 사로잡았다.

단료가 다시 단난에게 수만 병력을 주어 곡수정(曲水亭)에 주둔시키고, 또다시 유성을 공략할 준비를 하였다. 이때 우문부의 대인 우문일두귀도 안진(安晉)을 공격해 단부에게 호응하니, 모용황은 친히 50,000 군사를 거느리고 유성으로 향하였다. 이에 두려워진 단난이 군대를 이끌고 단부로 돌아가자, 우문일두귀 또한 치중을 전부 버리고 회군하다가 봉혁이 이끄는 경기병대의 습격을 받고 대패하였다. 봉혁은 우문일두귀가 치중을 버린 모두 회수하느라 20일이 지나서야 귀환할 수 있었다. 모용황이 장수들에게 말했다.
"두 오랑캐가 부끄럽게도 아무런 공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으니 다시 이를 것이 분명하다. 마땅히 유성 좌우에 군사를 매복시켜 그들을 기다림이 좋겠다."
그리고는 봉혁을 마두산(馬兜山)에 매복하게 하였다.

함강 2년(336년) 7월, 과연 모용황의 예상대로 오래지 않아 단료가 기병 수천 기를 거느리고 노략질하자, 봉혁은 나아가 단료를 대파하고 그 장수 영백보(榮伯保)를 참살하였다. 봉혁은 이어서 우문부 소속의 부락들도 침공하여 승리하였고, 모용황은 그 공적을 인정하여 봉혁을 좌장사로 승진시켰다.

함강 2년(336년) 9월, 모용황이 겸장사 유빈(劉斌), 겸낭중령 양경(楊景)에게 명하여, 시어사 왕제와 알자 서맹을 호송하여 동진에 돌려보내게 하였다.

함강 2년(336년) 10월, 모용황이 세자 모용준을 보내 단부의 여러 성들을 공격하게 하고, 우사마 봉혁을 보내 우문부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모용준과 봉혁 모두 큰 승리를 거두고 귀환하였다.

함강 2년(336년) 12월, 모용황이 납간(納諫)의 나무를 세워, 신하들이 간언을 나무에 새김으로써 좀 더 자유롭게 바른 말을 올릴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함강 3년(337년) 정월, 창려군(昌黎郡)을 이동시켜 을연 동쪽에 호성(好城)을 축조하였다.

함강 3년(337년) 3월, 호성이 완공되자 절충장군 난발(蘭勃)을 보내 그곳을 진수하게 하였다. 그리고 곡수에 또다른 성을 축조해 난발을 지원하면서 을연성을 압박하였다.

함강 3년(337년) 4월, 을연에 극심한 기근이 발생하자, 단료는 수천 대의 수레를 이용해 을연으로 조를 운송하였다. 그러나 난발이 이를 기습하여 조를 모두 빼앗아갔다.

함강 3년(337년) 6월, 단료가 사촌동생인 양위장군 단굴운(段屈雲)을 보내어, 정예 기병을 이끌고 세자 모용준이 있는 흥국성(興國城)을 야습하게 하였다. 모용준은 이를 영격하였고, 두 군대는 오관수(五官水)에서 크게 싸운 끝에 단굴운이 패하여 참수되었으며, 그의 병력은 모두 모용부의 포로가 되었다.

2.5. 연왕 즉위

함강 3년(337년) 9월, 좌장사 봉혁 등이 모용황에게 마땅히 연왕(燕王)을 칭해야 한다 주장하였다.

함강 3년(337년) 10월 14일[4], 모용황이 문덕전(文德殿)에서 연왕으로 즉위하여 연나라(전연)를 건국하고, 경내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그리고 관제를 개편하여 봉혁은 상국, 한수(韓壽)는 사마, 배개는 봉상(奉常), 양무는 사예(司隸), 왕우는 태복, 이홍(李洪)은 대리(大理), 두군은 납언령(納言令)으로 삼았다. 또, 송회(宋詼), 유첨(劉瞻)[5], 석종은 상백(常伯), 황보진, 양협(陽協)은 용기상시(冗騎常侍), 송황, 평희(平熙), 장홍은 장군, 봉유(封裕)는 기실감(記室監)으로 삼았다. 그리고 나머지 문무 관원들에게도 각자 차등있게 관직을 수여하였다. 연왕에 오른 모용황은 문창전(文昌殿)에서 여섯 마리의 말이 끄는 금근거(金根車)를 타고 궁을 드나들었으며, 그가 거동할 때 일반인들의 통행이 금지되었다.

함강 3년(337년) 11월 갑인일[6], 아버지 모용외를 '무선왕(武宣王)'으로, 어머니 단씨(叚氏)를 '무선후(武宣后)'로 추존하였다. 또, 부인 단씨는 왕후, 세자 모용준은 왕태자로 삼으니, 이는 위무제진문공의 고사와 같았다.

모용황은 단료가 여러 번 변경에서 문제를 일으킴에 따라, 양렬장군 송회(宋回)를 보내 후조에 조공을 바치면서 단료 정벌을 청함과 동시에, 후조에서 이를 수락한다면 스스로 모든 국내 병력을 이끌고 함께 나아갈 것을 청하고, 동생인 녕원장군 모용한(汗)을 볼모로 제공하였다. 후조의 석호는 크게 기뻐하며, 모용황의 제안을 후하게 받아들여 볼모로 온 모용한(汗)을 돌려보내고, 이듬해에 크게 병사를 일으켜 단료를 도모할 계획을 세웠다.

함강 4년(338년) 정월, 모용황이 도위 조반(趙槃)을 후조로 보내 석호에게 단부를 정벌할 시기를 구하였다. 이에 석호는 용감한 자 30,000명을 모집하여 그들 모두를 용등중랑(龍騰中郎)으로 삼고, 수군 100,000명과 보•기 70,000명으로 요서의 단부를 정벌하였다.

함강 4년(338년) 3월, 조반이 극성으로 돌아와 모용황에게 경과를 보고하였다. 이에 모용황도 친히 군대를 이끌고 영지 이북의 여러 성들을 공략하였다. 단료가 동생 단난을 보내 모용황을 막게 하니, 모용황은 단난과 크게 싸운 끝에 단난을 패배시키고, 적군 수천 명을 참수한 뒤, 백성 5,000호와 가축 수만 마리를 노획하여 돌아왔다. 마침 석호의 대군도 계(薊)에 입성하자, 근거지가 박살난 단료는 밀운산(密雲山)으로 달아나 숨어버렸고, 단부에 의탁하고 있던 이복형 모용한(翰)은 우문부로 달아났다.

함강 4년(338년) 4월 3일[7], 동진에서 사자를 보내, 모용황을 정북대장군•유주목(幽州牧)•영 평주자사(領平州刺史)로 삼고, 산기상시를 더하였으며, 식읍을 10,000호로 늘렸다. 지절•도독•대선우•요동공을 비롯한 그 밖의 사항은 예전과 같이 유지하였다.

함강 4년(338년) 5월, 영지에 입성한 석호는 모용황이 먼저 단료를 공격해 이익을 독점한 것에 분노하여 대군을 그대로 돌려 극성으로 진군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모용황은 육경(六卿), 납언(納言), 상백(常伯), 용기상시(冗騎常侍) 등의 관원들에게 후조군의 침공에 대비토록 하였다. 이윽고 석호의 십수만 대군이 극성으로 향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연나라의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모용황 또한 불안하여 고후에게 후조군을 막을 방도를 묻자, 고후가 답했다.
"조나라의 병사들은 정예이지만 우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굳게 지키면서 응전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석호는 극성으로 진군하면서 연나라 각지로 사자를 파견해 변방의 이민족과 백성들을 유혹하였다. 그러자 모용황이 임명한 성주(成周) 내사 최도(崔燾), 거취현령 유홍(游泓), 무원(武原) 내사 상패(常霸), 동이교위 봉추, 호군장군 송황 등 등을 포함한 36개의 성이 모두 반란을 일으켜 석호에게 호응하였다. 또, 기양(冀陽)에 정착했던 유민 무리가 기양태수 송촉(宋燭)을 살해한 뒤에 석호에게 투항하였다.

영구(營丘) 내사 선우굴(鮮于屈) 역시 석호에게 사자를 보내 투항하려 하니, 무녕(武寧) 현령 손흥(孫興)이 백성과 관리들에게 유세하여 상황을 설명하고, 선우굴을 체포해 그의 죄를 나열하고 처형한 뒤에 성문을 걸어잠그고 방어하였다. 조선현령 손영(孫泳)은 무리를 통솔해 후조를 막고자 하였는데, 호족 왕청(王清) 등이 비밀리에 후조에 호응하려 모의하자, 주모자들을 붙잡아 참수하였다. 이에 왕청과 공모했던 수백 명의 사람들이 두려워 죄를 자백하였고, 손영은 이들을 모두 용서한 뒤에 함께 성을 방어하였다. 낙랑태수 국팽(鞠彭)은 대부분이 배반한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용감한 장사(壯士) 200명을 선발해 극성으로 들어가 모용황을 지원하였다.

함강 4년(338년) 5월 9일[8], 후조의 대군이 마침내 극성에 당도하자, 모용황은 두려워 성을 버리고 도망치려 하였다. 이때 절충장군 모여근이 나아가 말했다.
"조나라는 강대하고 우리는 약소하여, 만약 대왕께서 물러나신다면 조나라는 더욱 기세를 올려 진격할 것입니다. 적이 이곳을 차지하여 계속 진군한다면 그 군대는 더욱 강해질 것이고, 식량 역시 이전보다 많이 확보함에 따라 저희로서는 막을 길이 없어집니다. 적은 분명 대왕이 도망가기만을 바라고 있을 터인데, 어찌 구태여 적의 바람대로 움직이려 하십니까! 지금 굳게 지키고 농성한다면 오히려 아군의 사기는 100배가 될 것이고, 적의 공격을 버티다보면 파고들 틈도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 싸우기도 전에 도망친다면 그때는 재기할 가망조차 없습니다!"
이에 모용황은 도망을 중지하였으나 안색에 두려운 빛은 여전하여, 이번에는 봉혁을 불러 계책을 물었다. 이에 봉혁이 말했다.
"석호는 심히 흉포하고 잔학하여 사람이나 신령 할 것 없이 모두 고통받고 있으므로, 그에게 재앙과 패망이 들이닥칠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비록 지금 정세가 이미 기운 것처럼 보일지라도 수비에 비하면 공격하는 측이 훨씬 어려워, 그들의 병사와 말이 강해도 우환이 되기는 힘든 법입니다. 적군은 며칠만 지나도 반드시 틈을 보일 것이니, 저희는 그저 굳건히 지키고 때를 기다리면 됩니다."
봉혁의 말을 들은 모용황은 그제서야 안심하며 투항하자 권유하는 신하들을 물리쳤다. 이후 후조군이 이르러 극성을 포위하고 개미떼처럼 성벽에 달라붙어 공략을 시도하였다. 모여근 등은 성벽 위에서 올라오는 후조군을 손수 베면서 밤낮으로 열흘 동안 싸워 적의 공격을 막아냈고, 무리한 공성으로 후조군은 결국 지쳐서 후퇴하였다. 이때 모용황은 아들 탕구장군 모용각 등에게 2,000 기병을 주어, 출격하여 후퇴하는 후조군의 뒤를 치게 하였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후조군은 크게 놀라 병장기를 내팽개친 채 도주하였고, 모용각은 승세를 몰아 크게 이기고 후조군 30,000여 명을 사살하였다.

이어서 모용황은 병력을 여러 갈래로 나누어 반란한 성들을 모두 평정하고, 더 나아가 범성(凡城)까지 영토를 확장시키니, 이전에 석호에게 호응했던 자들은 모두 도망쳐 고구려로 망명하였다. 모용황은 국팽, 손영, 모여근 등에게 상을 하사한 뒤, 미처 고구려로 도망가지 못한 반란자들을 모두 주살하게 하였는데, 그 수가 무척 많았다. 다만, 이 사건의 처리를 맡은 공조장사(功曹長史) 유상(劉翔)의 노력으로 많은 이들이 다행히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로써 반란들을 모조리 진압한 모용황은 범성에 수자리를 두고 돌아갔다.

함강 4년(338년) 12월, 밀운산(密雲山)에 숨어있던 단료가 후조와 전연으로 각각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석호는 정동장군 마추(麻秋)에게 30,000 군사를 주어 단료를 영접해오게 하면서 선우량, 양유도 같이 종군하게 하였다. 모용황 역시 태원공 모용각과 황보진에게 기병 7,000기를 주어 단료를 영접해오게 하였다. 전연군은 후조군보다 빠르게 진군하여 단료를 거두었고, 돌아가는 길에 모용각은 삼장구(三藏口)에서 후조군을 습격해 대파하고 선우량과 양유를 사로잡았다. 모용황은 단료를 상빈(上賓)의 예로 극진히 대우하였으며, 양유를 낭중령, 선우량을 좌상시로 삼았다.

함강 5년(339년) 4월, 모용황이 전군사 모용평(慕容評), 광위장군 모용각, 절충장군 모여근, 경거장군 모여니를 파견해 후조의 영역인 요서를 공격하였다. 모용평 등은 후조군을 격파하여 후조의 적노장군 호연황(呼延晃), 건위장군 장지(張支) 등을 참수하였고, 1,000여 호를 약탈하여 돌아왔다. 이때 단료가 반란을 도모하자, 모용황은 단료와 그 일당 수십 명을 처형하고, 단료의 수급을 석호에게 보냈다. 이후 석호가 진원장군 석성(石城)을 보내 범성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이에 석성은 군대를 돌려 광성(廣城)을 함락시켰다.

함강 5년(339년) 5월, 대나라의 대왕(代王) 탁발십익건이 사신을 보내 통혼을 요청하자, 모용황은 자신의 여동생 흥평공주(興平公主)를 보내 처로 삼게 하였다.

함강 5년(339년) 9월, 영지를 진수하던 후조의 영주목(營州牧) 이농이 30,000 군사를 발동하여, 후조의 정북대장군 장거(張琚)와 함께 범성을 공격하였다. 이때 어난장군 열관이 병력 1,000명으로도 성을 굳게 방어하였고, 후조군은 10일 넘게 공성해도 떨어뜨릴 수 없어 이내 물러났다.

함강 5년(339년) 10월, 모용황이 고구려를 정벌해 신성(新城)에 이르자, 고국원왕이 화평을 청하여 받아들이고 돌아왔다. 이후 아들 모용각, 모용패를 보내어 우문부의 별부(別部)를 치게 하였는데, 이때 13세 밖에 되지 않은 모용패의 용맹이 3군 중 제일이었다.

함강 6년(340년) 정월,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세자를 전연으로 보내 조정에 참석하게 하였다. 이는 단료가 패망한 이후로 처음 발생한 일이었다.

함강 6년(340년) 2월, 우문부로 도망쳤던 서형 모용한은 일부로 미친 척하고, 술에 빠져 머리를 늘어뜨리고 노래하며 우문부 곳곳을 활보하였다. 이에 우문일두귀는 모용한을 전혀 경계하지 않았고, 모용한은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우문부의 산과 강의 지형을 탐색하면서, 전투에 중요한 통로를 미리 파악해둘 수 있었다. 모용황은 상인 왕차(王車)를 보내 모용한이 돌아오고 싶어한다는 마음을 파악하고, 왕차에게 활과 화살을 주어 모용한에게 전달하게 하였다. 이를 받은 모용한은 우여곡절 끝에 두 아들과 함께 전연으로 돌아왔고, 모용황은 크게 기뻐하며 모용한을 매우 후하게 대우하였다.

2.6. 동진의 연왕 책봉

함강 6년(340년) 8월, 모용황은 비록 변방에서 연왕을 칭하였지만, 아직 동진에서 이를 승인한 것은 아니었기에, 장사 유상과 참군 국운(鞠運)을 보내 후조와 싸워서 승전한 일을 동진 조정에 보고하게 하고, 임시로 연왕 작위를 부여받고자 하는 뜻을 함께 전하며, 중원을 대대적으로 정벌할 시기를 요청하게 하였다. 또, 유량(庾亮)이 죽고 그 아우인 유빙(庾冰), 유익(庾翼)이 뒤를 이어 정권을 잡았다는 소식을 듣고 조정에 다음과 같이 상표하여 말했다.
"신(臣)이 이전 시대의 암군과 명군들을 살펴본 바에 따르면, 현명한 자를 가까이하여 이들을 세우는 군주는 성공적으로 평화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주나라의 신백(申伯)은 '현구(賢舅)'라 칭송받았음에도 외곽에서 국가를 방어하면서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반해 진소(秦昭)는 충분히 훌륭한 군주였으나, 두 외척에게 권력을 위임하여 나라를 거의 혼란에 빠뜨릴 뻔했습니다. 한무(漢武)는 전분(田蚡)을 중용하여 국가의 모든 중대사를 그에게 결정하게끔 하였으나, 전분 사후에는 이를 갈며 그를 원망했습니다. 성제(成帝)는 무능하고 유약해 스스로를 지탱하지 못하여, 안으로는 아름다운 아내에게 현혹되었고, 밖으로는 다섯 외척에게 마음대로 하도록 하여 결국 왕망에게 황위를 빼앗겼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을 볼 때면 누가 고통스러워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외척들이 양후(穰侯)나 왕봉(王鳳)처럼 현명했다면, 이들은 두 명의 신하로서 임금의 명령을 들을 것이지, 두 명의 주인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심지어 그런 외척들이 무능하기까지 한다면 두헌, 양기처럼 국가에 재앙을 불러올 것입니다. 이 모든 성공과 실패는 이미 그렇게 이루어져 왔습니다. 다만, 지금이라도 방향을 바꿀 수 있다면,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천명을 받들어 진나라(晉)의 도(道)를 높이셔야 하나, 국가는 현재 여러 어려운 상황을 겪고 있으니, 그 걱정이 매우 큽니다. 과거를 돌이켜볼 때면, 아직도 그 상처가 명확하여 가슴이 아려옵니다. 그 궤적을 따라가보자면, 실제로는 전임 사공 유량이 외척으로서의 높은 지위와 권력을 가지고 정치를 행하면서 변방의 장군들을 경시했기에, 소준조약 같은 이들이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국가를 배반하였다가 패망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황태후께서 분노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만약 사직의 영령이 도움을 주지 않고, 사람과 신령이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이리나 승냥이와 같은 마음은 언제든지 극도로 사악해질 것입니다! 따라서 과거의 일을 잊지 말고 미래의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지금 중서감•좌장군 유빙 등이 내부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외부에서 상장(上將)을 거느리며, 형제가 나란히 권력을 자치하고 있어, 어떤 신하도 그들과 견줄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위양(渭陽)을 깊이 중시하셨으니, 유빙 등은 스스로 그 예를 따라야 합니다.

신(臣)은 항상 말씀드렸습니다. 만약 천하의 군주가 외척을 높이고자 한다면, 그들을 변방의 국가에 봉하고, 그들의 녹봉을 풍부하게 하는 대신 권력을 제한하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하면 위에서는 편애가 없고, 아래에서는 사사로운 논의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어찌 영화와 치욕이 발생하겠습니까! 어찌 소문이 발생하겠습니까! 과거에는 유량 한 사람뿐이었고, 이미 명망이 있는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해악을 끼쳤는데, 하물며 지금 유량을 대신해 그 자리에 있는 자들은 본래 명망은 있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인간의 감정은 쉽게 현혹되고, 개별적으로 알리기도 어렵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설령 그들을 사사로이 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 중 누가 그들에게 사사로움이 없다고 이르겠습니까?

신(臣)과 유빙 등은 명성과 지위가 다르고, 출신과 처지가 매우 다릅니다. 신(臣)은 혼자서 이러한 말을 하며 저항하는데, 이는 폐하를 위해서이고, 나아가 유빙을 물러나게 하기 위한 계획입니다. 신(臣)은 부당한 것을 용납하고 앉아서 득실을 따지는 신하를 싫어합니다. 만약 나라가 위태로워도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런 재상이 어찌 쓸모가 있다 할 수 있겠습니까? 과거 서복(徐福)과 곽씨의 경고를 선제(宣帝)가 따르지 않아, 결국 충신이 역적이 되도록 만들었는데, 이는 조사가 면밀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방비가 점진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습니다. 신(臣)이 지금 말하는 것은 점진적인 대비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폐하께서 신(臣)의 충심을 헤아리시지 못하고, 신(臣)의 계획을 사용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일이 지나고 났을 때는 이미 다 타버린 잿더미만 남을 것입니다.

과거, 왕장(王章)과 유향(劉向)이 매번 상소할 때마다 왕씨(王氏)를 지적하지 않은 적이 없어, 그 결과 그들의 두 아들이 죽거나 형벌을 받았습니다. 곡영(谷永)과 장우(張禹)는 주저하며 대답하지 않아, 겨우 몸을 보전하였으나, 세상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신(臣)은 피발(被髮)하는 특이한 풍습을 따르고, 상장(上將)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낮과 밤 걱정만 하며, 어떻게 국가에 보답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오직 외적을 소멸하고, 내부에서는 충성을 다해 전심전력으로 국가의 은혜에 보답할 뿐입니다. 신(臣)이 이를 말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말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함강 6년(340년) 9월, 모용황이 후조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며 여러 장수들에게 말했다.
"석호는 스스로 여러 성들의 방어가 매우 철저하다 여기며 안락하게 지내고 있을 것이나, 성의 남쪽과 북쪽으로는 분명 방비가 되어있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 만약 예상치 못한 길로 나간다면, 기주(冀州) 북쪽의 땅을 파괴할 수 있을 것이다."

함강 6년(340년) 10월, 모용황이 직접 날랜 기병 20,000기를 거느리고 열옹새(蠮螉塞)로 빠져나와, 길목을 지키던 후조군의 수자리들을 무너뜨리고, 그 장수들을 모두 사로잡았다. 그리고 긴 진군 끝에 계성(薊城)에 도착하니, 후조의 유주(幽州) 자사 석광(石光)은 수만 병력을 성 안으로 모으고, 성문을 굳게 닫아 수비하면서 싸움을 피하였다. 이에 모용황은 계성을 우회하여 무수진(武遂津)에서 후조군을 격파하고, 고양(高陽)으로 진입하였다. 전연군은 지나가는 곳마다 후조군이 비축해둔 군량을 불태우고, 많은 것을 약탈하였으며, 유주와 기주의 백성 30,000여 호를 약취한 후에 돌아갔다.

함강 7년(341년) 정월, 모용황은 유성(柳城) 북쪽과 용산(龍山) 남쪽, 그 사이에 있는 땅을 복된 땅으로 여겼다. 이에 당국(唐國) 내사 양유에게 용성(龍城)을 건설하도록 하여, 문, 궐, 궁전, 사원, 정원을 조성하고, 토지를 등록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유성은 용성현(龍城縣)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극성의 흑석곡(黑石谷)에서 큰 돌이 스스로 일어나 걸어다녔다고 한다.

함강 7년(341년) 2월 22일[9], 장사 유상 등이 동진의 수도 건강(建康)에 도착하여 모용황의 상소문을 전달하자, 성제가 그들을 불러 친히 면담하고, 모용황의 안녕에 대해 물었다. 이때 유상 등이 답변하면서 대장군•연왕 글자가 새겨진 인새를 요구하니, 성제가 말했다.
"전례에 따르면 대장군은 국경에 주둔하지 않으며, 한나라와 위나라 이후로 다른 성씨를 왕으로 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요구는 승인할 수 없다."
이에 유상이 말했다.
"유연석륵이 난을 일으킨 이래로 장강 이북은 무법지대가 되었는데, 중화의 공경 가문들 중 무기를 들고 저 도적들을 물리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오직 모용 진군장군 부자(父子)만이 전력을 다하여 본조(本朝)를 위해 적은 수로도 많은 적을 여러 차례 격파함으로써 석호를 두려워하게 만들었고, 조나라 국경 지역의 백성을 세 방면으로 흩어지게 하여, 그 국토를 천 리나 줄였으며, 계성(薊城)을 북쪽 국경으로 맞대고 있습니다. 이러한 공적에도 불구하고 해북(海北)의 땅을 봉지로 삼지 않다고 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과거 한나라의 고조는 한신팽월에게 왕작을 아끼지 않았기에 황제의 업(業)을 이룩할 수 있었고, 항우는 왕의 인장까지 조각했으면서 주지 않았기에 결국 몰락하였습니다. 신(臣)의 진심은 단지 그를 높이고자 함이 아니라, 성스러운 조정이 충성과 의리를 소홀히 하여 천하의 사람들이 그것에 감화되지 않는 것이 그저 아쉬울 따름입니다."
이때 상서 제갈회는 유상의 처남임에도 여기에 반대하며, 오랑캐에게 가볍게 이름과 권위를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생각해 유상에게 말했다.
"설령 모용 진군장군께서 석호를 제거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또다른 석호를 얻는 것과 같을 것인데, 조정은 그로부터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유상이 답했다.
"과부조차도 주나라가 멸망할 때 애도하였다고 하였는데, 지금 진실(晉室)이 위태로운 마당에 원개(元凱)처럼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그대에게는 전혀 없는 것인가? 만약 미(靡)와 격(鬲)[10]이 공을 이루지 않았다면 소강(少康)이 어찌 하나라의 제사를 지낼 수 있었겠는가? 또, 제환공과 진문공이 전투에서 승리하지 않았다면 주나라 왕실은 진작에 무너졌을 것이다. 모용 진군장군께서는 무기를 베개로 삼고, 동이 트기만을 기다려 흉역한 자들을 멸하려는 뜻을 품고 계시다. 그럼에도 그대는 사악한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말을 부르짖고 충신을 시기한다. 사해(四海)가 아직 통일되지 않은 것은 바로 그대와 같은 인물들 때문이다!"
이후로도 유상은 1년 동안 건강에 머물면서 여러 논의를 거쳤지만, 끝내 결론이 나지 않아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유상은 중상시 욱홍(彧弘)을 찾아가 말했다.
"석호는 8개 주를 소유하고 있고, 백만 명의 병사를 거느려 장강과 한수(漢水) 이남까지 삼키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으며, 삭두(索頭)와 우문(宇文)을 비롯한 여러 소국들이 그에게 복종하고 있습니다. 오직 무용 진군장군만이 천자를 보호하며 강성한 빛나는 정신력을 유지하고 있으나, 여전히 특별 예우의 명령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천하 사람들이 마음을 돌리고, 흩어져서 다시는 남쪽으로 향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과거에 공손연오나라에 아무런 이익을 주지 않았으나, 손권은 그를 연왕으로 봉하고 구석(九錫)을 더해 주었습니다. 이에 반해 모용 진군장군께서는 그것이 정당하지 않다고 여겨 구석은 거절하셨습니다. 지금 조정은 헛된 명성을 아끼고, 충성과 순종을 억제하는데, 이것이 과연 국가를 위한 장기적인 계책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이미 때는 늦을 것입니다."
욱홍이 성제에게 이 말을 전달하자, 성제는 하는 수 없이 이를 허락하고자 하였다.

한편, 모용황은 유빙에게도 서신을 따로 보내어 유상을 통해 전달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그대는 황후의 친척이라 외척의 친밀함을 바탕으로 중앙 권력을 통제하고, 왕명을 출납하며, 여러 군대와 지방의 요직을 겸하고 있소. 또, 형제들을 요직에 배치하여 권력의 망을 넓히고, 조정에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소. 진나라한나라 이래로 이처럼 극도로 번영하고 영화로운 사례가 과연 있었겠소? 내가 보건대, 만약 업적을 이룩하여 사업이 성공한다면, 반드시 주나라의 신백과 같은 명성을 누릴 것이나,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양기, 두헌의 길을 피할 수 없을 것이오.

역사를 돌아보면, 임금이 모계 친족을 지나치게 총애하고 권력을 부여하여 정국을 혼란에 빠뜨린 경우가 많았으며, 처음에는 그들도 대대적인 영예를 누리다가 이내 큰 짐을 떠안게 되었소. 이는 즉, 총애가 지나치면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이오. 나는 역대 군주들이 미리 위험을 방지하지 않고, 계속해서 총애하는 것에 대해 항상 분노하였소. 왜 봉지 하나를 주고, 변방 국가로 남아서 주나라 시기의 제(齊)나 진(陳)처럼 대대로 계승하게 하지 않는단 말이오? 이와 같이 하면 영원히 스스로를 보존하면서 남면(南面)하여 존엄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데, 어떤 멸시나 굴욕을 받을 걱정이 있겠소? 두무하진이 선한 것을 좋아하여 자신을 비우자 현명한 선비들이 마음을 돌렸고, 비록 비록 환관들에 의해 위험해질지라도, 천하는 이들의 죽음을 탄식하고 비통해 하였소. 이들은 유능하면서도 교만에 빠지지 않았고,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진 사람들이오.

현재 사방에는 엄중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중원에는 주제넘게 거역하는 도적들이 있소. 집안마다 피를 흘리는 원한에 사무쳐 있고, 사람들은 복수하고 싶어하며 한을 품고 있는데, 어찌 평안히 잠을 자며 여유롭게 지내고, 우아하게 대화나 하면서 해를 보낼 수 있겠소? 나는 비록 미덕이 적지만, 선제(先帝)로부터 장군의 임무를 받았고, 몇 개 군의 사람들을 다스리며 여전히 강적을 삼키고자 하오. 그래서 최근부터 지금까지 칼날을 맞대고 싸우며, 한 시기는 농사를 짓는 데 사용하고, 세 시기는 무력을 사용하여 전쟁을 벌이고 있소. 그럼에도 우리 군사들은 지치지 않으며, 창고에는 여전히 남은 곡식이 있으니, 적은 매일 두려워하고, 우리의 영토는 나날이 넓어지고 있소. 더구나 왕자(王者)의 위엄과 위풍당당한 모습은 어찌 같은 해에 그대들의 행적과 비교할 수 있겠소?"
유빙은 모용황이 올린 상소문과 자신에게 온 서신을 모두 보고는 모용황을 심히 껄끄럽게 생각하였으나, 그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통제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유빙도 하충 등과 함께 모용황이 연왕을 칭하는 것을 승인하도록 상주하였다. 그리고 유빙은 모용황에게 따로 선물을 보내면서 답신하여 말했다.
"등백산(鄧伯山)이 예전에 내게 이 코뿔소 가죽으로 만든 두 개의 갑옷과 하나의 목걸이를 보낸 적이 있었소. 비록 처음 받았을 때처럼 완벽하게 좋지는 않으나, 이것이 특이한 물건이기 때문에 다시 그대에게 보내겠소."

함강 8년(342년) 2월 28일[11], 성제가 마침내 대홍려 곽희(郭悕)를 보내 모용황을 사지절•시중•대장군•대도독•하북제군사(河北諸軍事)•유주목•대선우•연왕으로 삼고, 모든 물품과 전책(典策)은 특별한 예우에 따라 지급하였다. 또한, 세자 모용준을 가절•안북장군•동이교위•좌현왕으로 삼고, 그에게 수백만 전 어치의 군자금과 병장기를 지급하였다. 그리고 유상을 대군(代郡) 태수로 삼고, 임천향후(臨泉鄉侯)에 봉하였으며, 원외산기상시를 더하였으나, 유상은 굳게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함강 8년(342년) 6월, 석호가 대군을 이끌고 모용황을 공격해 대파하였다. 다만, 자세한 경위는 알 수 없다.

함강 8년(342년) 7월, 곽희와 유상 등이 연나라에 도착하자, 모용황은 성제의 조서를 받들었다. 이후 유상을 동이교위•영 대장군 장사(領大將軍長史), 당국내사 양유를 좌사마, 전서령 이홍을 우사마, 중위 정림(鄭林)을 군자좨주로 각기 삼았다.

함강 8년(342년) 7월 12일[12], 용성에서 새로운 궁궐을 한창 건축하고 있을 때, 대극현(大棘縣)의 강변이 무너져 내리면서 1,174개의 철제 삽날이 나왔다. 영락(永樂)의 백성 곽릉(郭陵)이 이를 보고, 모용황에게 달려가 상황을 아뢰니, 모용황이 말했다.
"영전(營殿)을 처음 짓기 시작할 때, 철제 도구가 나오는 것은 신령과 인간이 서로 협력하여 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곽릉에게 관내후(闗內侯) 작위를 하사하였다.

함강 8년(342년) 9월, 모용황은 아들 모용각을 도요장군으로 삼아 평곽을 진수케 하였다. 평곽은 과거 모용한이 단부로 도망쳤던 이래로 많은 장수들이 거쳐갔으나, 그들 중 유능한 이가 없었다. 하지만 모용각이 평곽에 도착하여 옛 사람들을 달래는 동시에 병력을 모집해 새로운 군대를 편성하고, 여러 차례 고구려의 군대를 격파하니, 고구려는 그를 두려워하여 침략을 감히 하지 못하였다.

함강 8년(342년) 10월, 모용황이 극성에서 용성(龍城)으로 천도하고, 경내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2.7. 주변국 정벌

건무 8년(342년) 11월, 모용황이 고구려 침공을 감행해 친히 40,000명의 정예군을 거느리고, 건위장군 모용한과 평적장군 모용패를 선봉으로 삼아 남도로 진격하였다. 이때 장수 왕우에게 따로 15,000명의 병력을 주어 북도로 나아가게 하였다. 이에 고구려의 고국원왕도 즉각 대응에 나서며, 동생 고무에게 50,000명의 정예병을 주어 북도를 막게 하고, 자신은 약한 병사들로 남도를 막았다. 선봉인 모용한의 군대가 고국원왕의 군대와 먼저 조우하여 전투를 시작하였고, 그 뒤에 모용황이 많은 군사를 이끌고 도착하였다. 좌상시 선우량 수십 기병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진영을 돌파하니, 이로 인해 고구려의 진영이 뒤틀렸고, 모용황은 이를 기회로 전군에게 총공격을 명해 고구려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좌장사 한수가 고구려 장수 아불화도가를 참수하였고, 승세를 탄 전연군은 도망치는 고구려군을 추격해 고구려의 수도인 환도까지 밀고 들어왔다. 고국원왕이 홀로 말을 타고 도망치자, 경거장군 모여니가 그 뒤를 쫓아가 고국원왕의 어머니와 처를 사로잡고 돌아왔다. 하지만 모용황은 북도로 나아가던 왕우가 고무에게 패사했다는 소식이 받고, 더이상의 정벌은 무리라 판단해 중단하였다. 그리고 고국원왕의 아버지 미천왕의 시신과 함께 고국원왕의 어머니와 처, 수세대에 걸쳐 축적된 보물, 남녀 50,000여 명을 약탈하고, 고구려의 궁실을 불태웠으며, 환도성을 헐은 뒤에 돌아갔다.

건원 원년(343년) 2월, 고국원왕이 동생을 전연에 입조시켜 칭신하고, 진귀한 보물 1,000여 개를 바쳤다. 모용황은 고국원왕의 아버지인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보내는 대신, 그 모친은 남게 하여 인질로 삼았다.

고구려가 패배하고 나서야, 우문부의 우문일두귀가 뒤늦게 재상 막천혼(莫淺渾)을 보내 전연을 침공하였다. 여러 장수들은 당장 나가서 싸워야 한다 주장했지만, 모용황은 장수들의 청을 모두 불허하고, 일부로 응전하지 않으면서 적이 방심하기만을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고, 막천혼은 모용황이 자신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해, 방탕하게 술을 마시고 사냥에 빠져서 전연군의 습격에 대비를 하지 않았다. 어느덧 때가 되었다 판단한 모용황이 말했다.
"막천혼은 이미 지나치게 방탕하고 게을러졌으니, 지금이 바로 싸울 수 있는 때이다."
그리고는 모용한을 내보내 막천혼을 공격하였다. 막천혼은 대패하여 겨우 죽음만 면한 채로 도망쳤고, 그 무리는 모두 전연군의 포로가 되었다.

건원 원년(343년) 7월, 탁발십익건이 다시 전연에 사신을 보내 혼사를 청했다. 모용황은 이번엔 말 1,000필을 예물로 줄 것을 요구하였는데, 탁발십익건은 주지 않고 오히려 거만한 태도로 나와 사위로서의 예를 다하지 않았다.

건원 원년(343년) 8월, 모용황이 왕세자 모용준, 전군사 모용평을 보내 대나라를 침공하니, 탁발십익건은 무리를 거느리고 재빨리 달아나버렸다. 모용준의 군대는 탁발십익건의 뒤를 쫓아 텅 빈 들판만 가로지르다가 허탕만 치고 연나라로 돌아갔다.

건원 원년(343년) 10월, 모용황이 직접 여러 군현을 순시하며 농업과 양잠을 장려하였고, 용성의 궁궐을 대대적으로 수리하였다.

건원 2년(344년) 정월, 모용황은 좌사마 고후와 더불어 우문부 정벌에 대해 논하였다. 고후가 말했다.
"공격하면 반드시 이길 것이나, 그리 하지 않고 내비둔다면 장차 유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모용황은 직접 20,000 기병을 이끌고 우문부를 정벌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모용한을 전장군으로 삼고, 유패를 그의 부관으로 배속시킨 다음, 광위장군 모용군, 도요장군 모용각, 평적장군 모용패, 절충장군 모여근을 거느리고 병력을 세 갈래로 나누어 진군하였다. 우문일두귀는 용맹하기로 유명한 남라 대인 섭야간을 보내 정예군으로 모용한을 막게 하였다. 이에 모용황이 사람을 보내어 모용한에게 당부하였다.
"섭야간의 용맹은 삼군 중에서 으뜸이니, 잠시 피하고 적의 기세가 오만해지면 그때 공격하라."
그러나 모용한이 반대하며 말했다.
"우문일두귀는 그의 국내에 있는 모든 정예병을 소집하여 섭야간에게 맡겼고, 섭야간 오랜 기간 동안 용맹으로 이름을 날렸기에, 우문부는 그 자 하나에게 의지하고 있습니다. 만약 지금 그를 이긴다면, 그의 나라는 공격하지 않고도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 또한, 저는 섭야간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데, 그는 겉으로는 명성이 있지만 실제로는 얼마든지 쉽게 상대할만한 자입니다. 적을 방치하여 우리 군의 사기를 꺾어서는 안 됩니다."
이리하여 전투가 진행되었고, 모용한은 직접 적진으로 돌격하여 섭야간과 용맹히 싸웠다. 섭야간이 모용한에게 정신이 팔려있을 때, 모용패가 옆에서 갑자기 공격해 섭야간을 베어 참수하였고, 우문부의 병사들은 섭야간이 죽는 것을 보고 싸우지도 않고 도망가기 시작하였다. 연나라의 군대는 승세를 타고 진격하여 우문부의 도성을 함락시켰고, 우문일두귀는 멀리 막북(漠北)으로 도망치다가 객사하였다. 우문일두귀 사후, 나머지 우문부의 사람들은 제각기 흩어져 도망가는 이들이 많았고, 탁발황은 그들이 남기고 간 가축, 재화, 물자를 모두 전부 빼앗았으며, 1,000리 이상의 땅을 개척하여 50,000명의 부민(部民)들을 이주시켰다. 비록 고후와 유패가 유시에 맞아 전사하는 피해를 입기도 하였으나, 결국 우문부는 결국 한 달도 버티지 못한 채 멸망하고 말았다.(우문부 멸망)

우문부를 멸망시킨 모용황은 섭야간이 통치하던 성인 창려(昌黎)의 이름을 위덕성(威德城)으로 고치고, 동생 좌장군 모용표(慕容彪)를 그곳에 주둔시킨 후에 용성으로 돌아왔다. 당초 우문일두귀는 후조에게 매번 공물을 바치면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기에, 모용황이 우문부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석호는 우장군 백승(白勝)과 병주자사 왕패(王霸)를 감송(甘松)에서 출격시켜 우문부를 구원하게 하였다. 하지만 우문부가 예상보다 너무 빨리 무너져,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우문부가 멸망한 뒤였고, 백승 등은 위덕성이라도 공격해보지만 함락에 실패하고 돌아갔다. 그때 모용표가 성 밖으로 뛰쳐나와 돌아가는 후조군을 격파하니, 모용황은 그 공로에 따라 차등있게 논공행상을 실시하였다. 당시 모용한도 우문부와의 전투에서 유시에 맞아 부상을 입었고, 집에서 요양하면서 이를 치유하고 있었는데, 모용황은 모용한이 반란 일으키려 한다는 누군가의 참소를 믿고 이복형 모용한을 사사하였다.

건원 2년(344년) 2월, 탁발십익건이 대인 장손질(長孫秩)을 파견해 연나라에서 처를 구하였다.

건원 2년(344년) 4월, 후조의 평북장군 윤농(尹農)이 군대를 이끌고 범성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여 그냥 돌아갔다.

건원 2년(344년) 7월, 모용황이 대나라로 사신을 보내 통혼을 제안하니, 탁발십익건이 이를 허하였다.

건원 2년(344년) 9월, 탁발십익건이 선왕(先王) 탁발예괴의 딸 탁발씨를 보내 모용황과 혼인하게 하였다.

영화 원년(345년) 정월, 당시 연나라는 가난한 가정에게 소를 빌려주고, 왕실의 정원에서 농사짓게 한 다음, 그 수확량의 8할은 국고에 귀속시키고, 나머지 2할은 경작한 그 가정에서 가져가게 하였다. 소는 있어도 땅이 없는 사람의 경우에는 수확량의 7할을 국고에 귀속시키고, 나머지 3할은 경작자에게 주었다. 이에 기실참군 봉유가 모용황에게 간하여 아뢰었다.
"신(臣)이 들은 바에 의하면, 현명한 왕이 나라를 다스릴 때에는 세금을 적게 거두어 백성들에게 남는 것이 많았다고 하였습니다. 이때 농지를 세 등급으로 나누어 수확량의 10분의 1을 세금으로 매겼고, 추운 사람에게는 옷을, 굶주린 사람에게는 음식을 제공하여 모든 가정이 사는 데 필요한 것들을 충분히 갖출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비록 홍수나 가뭄이 발생해도 사람들이 이를 재앙으로 여기지 않았던 까닭이 과연 무엇이었겠습니까? 훌륭한 농관(農官)을 선발하여 농업을 권장한다면 사람들이 100이랑의 땅을 갈고 관리하는 데 소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됩니다. 성실하게 농사짓는 농부는 명예로운 상을 받고, 게으른 농부는 수치스러운 벌을 받습니다. 또한, 일의 양에 맞게 관직을 설치하고, 관직에 맞게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각 관직이 필요로 하는 만큼만 인원을 두고, 아무도 자리를 헛되이 차지하지 않게 합니다. 그리고 해마다 들어오는 수입을 측정하여 그에 따라 봉급을 정하고, 백관에게 공급되는 것 이외의 것은 모두 태창(太倉)에 비축하여, 3년의 농사로 얻은 것 중 1년 치의 곡물을 보관합니다. 이렇게 축적한다면 어찌 왕실이 사용함에 있어서 부족함이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홍수나 가뭄이 발생해도 백성들이 걱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 농업을 장려하는 명령이 여러 번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2,000석 관리들 중 공적인 일에 헌신하고 지역의 이점을 극대화하려는 의지가 있는 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나라 시기에 이를 알고, 백성들의 경작지가 충분치 않다는 것을 명목으로 2,000석 수십 명을 처형하였고, 그 결과 명제(明帝)장제(章帝)의 재위기는 번영의 시대라고도 불렸습니다.

영가의 난 이래로 백성들이 피난다니게 되면서 각지를 유랑하게 되니, 중원(中原)은 황폐해지고 천 리에 걸쳐 연기가 나는 집이 없어졌습니다. 굶주림과 추위로 사람들이 쓰러져 죽어, 시신들이 나날이 골짜기에 늘어났습니다. 하오나 선왕(先王, 모용외)께서 신적인 무용과 성스러운 지략으로 한 지역을 보호하시어, 그 위엄을 통해 사악한 것들을 제거하시고, 덕을 통해 먼 곳을 품으셨습니다. 그 결과, 구주(九州) 사람들과 변경의 다양한 이민족들은 수만 리를 걸어서, 마치 어린아이가 자애로운 아버지에게 돌아가듯 이곳으로 모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영성한 자질로 선대의 사업을 크게 확장하시어, 남쪽으로는 강대한 조나라를 꺾으셨고, 동쪽으로 고구려를 멸하시어 영토가 3,000리 확장되었고, 호구 수는 100,000호가 증대되었으니, 무왕을 이어받아 공을 널리 펼친 서백(西伯)과 같은 위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여러 정원을 처분하여 그 땅을 유민들이 경작하게끔 하는 것이 적합합니다. 또, 재산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소를 하사하여 목축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 사람들은 곧 전하의 백성인데, 이것이 어찌 소를 잃는 것이겠습니까! 백성 속에서 간직하게 하는 것만으로 잘 간직한다 이르기 족합니다. 최근 전하께서는 백성들이 바라는 기대를 깊이 충족시키시어, 중국의 백성들이 모두 음식이 담긴 항아리를 들고 나와 환영했는데, 석호가 어찌 여기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위나라와 진나라는 비록 도(道)가 쇠퇴한 시대였음에도 백성이 수확한 것 중 7할이나 8할까지 가져가는 일은 없었고, 관아 소유의 땅과 소를 빌려 농사짓더라도 백성이 4할을 가졌으며, 자신의 소로 관아의 땅에서 농사짓는 자는 절반을 가져갔습니다. 백성은 이에 안정을 느꼈고,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신(臣)은 이것이 현명한 왕의 길이 아니라 생각하는데, 하물며 이것보다 더욱 많이 가져가면 어떻게 합니까!

가뭄, 홍수와 같은 재난은 요(堯), 탕(湯)조차도 피해갈 수 없었으니, 왕이라면 마땅히 운하를 깊게 파서 관리하고, 정백(鄭白), 서문(西門), 사기(史起)의 관계법을 순차적으로 따라야 합니다. 가뭄이 들면 운하를 뚫어 비를 대신하고, 홍수가 나면 물을 운하로 유도하여,위로는 하늘에 구름과 은하가 이어지는 것을 걱정하지 않으며, 아래로는 농작물이 물에 잠기는 해를 겪지 않습니다.

고구려, 백제, 우문부, 단부의 사람들은 모두 군사들에게 이끌려 강제로 이주당했기에, 중국(中國)의 사람들처럼 의로움을 사모하여 온 것이 아니어서 모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있습니다. 현재 거의 10만에 달하는 이들의 가구가 좁고 협소한 수도에 몰려 있으니, 이 상황이 훗날 국가에 깊은 해를 끼칠까 우려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형제와 종족을 나누어 서쪽 경계의 여러 도시로 이주시키고, 그들을 은혜로 달래고 법으로 감독하여, 그들이 임의로 흩어져 살지 못하게 하고, 국가의 허실(虛實)을 알게 해야 합니다.

지금 중원은 아직 평정되지 않아 자원과 가축을 확보해야 함에도, 관리가 너무 많고 놀고 먹기만 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농사를 짓지 않으면 일 년 내내 굶주림을 겪게 되기에, 반드시 농사를 짓는 사람들로부터 음식을 가져올 것입니다. 이는 곧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노동력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수만 명의 게으른 사람들이 먹고 있으니, 손실도 마찬가지인데, 어찌 집안이 풍족하고, 사람들이 만족하며, 나라가 평안해질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도 고금의 사건들을 공부하셔서 아시듯이, 정치의 큰 재앙 중 이보다 더 심한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노는 자들 중 세상을 경영할 전략과 시대의 요구에 부합하는 재능이 있는 자들이 있으면 반드시 선발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해야만 합니다. 이 외의 사람들은 농사를 지어 먹고, 누에를 길러 옷을 만드는 것이 곧 하늘의 도리입니다.

전하께서는 성스럽고 명철하시어, 말씀과 생각이 마치 목마름과 같아, 사람들은 자신의 견해와 의견을 모두 제시하고, 잘못이 있어도 숨김이 없습니다. 전임 참군 왕헌(王憲)과 대부 유명(劉明)이 나란히 충성을 바쳐 간언하자, 전하께서는 그들에게 최고로 좋은 말을 하사하셨습니다. 그들의 말이 다소 역린을 건드렸을 소지가 있었으나, 전하께서는 이로써 그들의 의도를 책망하지 않으려 하셨습니다. 주인된 자를 받드는 위치에 있으면서 요사스런 말로 상관을 범하는 자가 있어 법대로 처형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폐하께서는 너그러움을 발휘하시어 이를 포용하시고 사형은 시키지는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강등시키시고, 금고에 처하게 한 뒤에 조정에서 배척시켰습니다. 그들의 말이 옳다면 전하께서 그것을 받아들이시는 것이 마땅하고, 그들의 말이 그르다면 의당 그 광견(狂狷)을 명확히 하셔야 합니다. 비판하는 신하를 벌하면서 직언을 요구하는 것은 북쪽으로 가면서 월나라를 찾는 것과도 같은데, 어찌 그러실 수 있습니까! 우장사 송해 등은 아첨하면서 간언하는 선비들을 탄핵하고, 용기와 소신이 없으며, 남이 가진 것을 시기하여 자신의 눈과 귀를 가리니, 그 불충함이 매우 심합니다.

국가의 자산으로는 네 가지의 업(業)이 있습니다. 교육의 업은 국가의 번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사안입니다. 전쟁을 준비하고, 농사를 짓는 업은 국가의 기초입니다. 그리고 백공(百工)과 상업은 그 끝자락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국가와 군대에 필요한 인력을 측정하여 그 인원수에 맞게 배치하고, 그 외의 인원은 농업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군사로 뽑힌 이들에게 전술을 교육하고, 교육받는 이들 중 3년 동안 성과가 없다면, 그들 역시 농업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단순히 많은 수의 인원을 채워 넣어서는 안 되며, 이로 인해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들의 길이 막혀서는 안 됩니다.

신(臣)의 말이 옳다 여기신다면 즉시 실행하여 주시되, 그렇지 않다면 즉각적인 처벌을 가하여 천하에 알림으로써 조정이 선함을 따르는 것이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악함을 벌하는 것이 지체되지 않음을 보여주길 바랍니다. 왕헌과 유명은 충신입니다. 그들이 용의 역린을 건드린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것을 취하여 약석(藥石)의 효과처럼 받아들이기를 바랍니다."
이에 모용황이 명령을 내려 말했다.
"기실참군의 간언을 검토한 후로 과인은 실로 두려웠도다. 임금은 백성을 국가의 기반으로 삼고, 백성은 곡물을 생명으로 여기니, 농부는 곧 국가의 근본이다. 하나, 2,000석들이 맹춘(孟春)에 내렸던 명령을 따르지 않고, 게으른 농부들을 독려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관리들은 마땅히 개간을 소홀히 하는 자들에게는 형법을 적용하고, 엄격하게 관할 지역을 관리하도록 하라.

기실참군의 주된 주장을 명확하고 자세히 검토하여 상황을 보고받은 결과, 모든 왕실 소유의 정원과 토지를 폐기할 것이며, 이를 땅이 없는 백성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다. 또, 가난한 사람들은 전혀 자산이 없어 스스로를 유지할 수 없으니, 각자에게 한 마리의 소를 목축할 수 있도록 하사할 것이다. 만약 개인적으로 여력이 있어 기꺼이 관아의 소를 기르고 관아의 땅을 경작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 앞으로 위나라, 진나라의 옛 법에 따르게 하라.

운하와 관개 시설은 공사(公私) 모두의 이익에 도움이 되므로, 해당 업무의 주된 자들은 건축을 위한 측량을 실시하고, 수륙의 세력을 최대한 활용할 방안을 모색하라.

중주(中州)는 아직 평정되지 않았고, 병란도 쉴새 없이 들이닥치고 있으며, 공을 세우고 충성스러운 자들 역시 많기에, 관료 수를 줄일 수 없다.

모든 백공과 상인의 숫자를 정확히 파악하고, 사좌(四佐)와 장수들의 주요 직책을 속히 결정하도록 하라. 그리고 남은 이들은 돌아가 농업에 종사하도록 하고, 성과 없는 교육생들 역시 관리 명부에서 제외한다.

무릇 신하가 임금에게 중요한 말을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우니, 기이하고 근거 없는 일들은 모두 단호하게 묻지 않아야 하고, 좋은 것들을 골라 그것을 따라야 한다. 왕헌과 유명은 그들의 죄로 인해 축출되었으나, 그것 또한 과인이 큰 관용을 가지지 못하여 발생한 일이다. 그들을 모두 원래의 직위로 복귀시키고, 이전과 같이 간사(諫司)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라.

봉유는 충성을 다하여 왕의 신하된 자로서의 본분을 깊이 이해하고 있다. 《시경》에 이르기를 '답하지 못할 말이 없다(無言不酬)'라 하였으므로, 그에게 금전 50,000전을 하사하겠다. 내외에 공표하여 명하노니, 나의 실수를 지적하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신분에 관계없이 어떠한 말도 꺼리지 말라."

영화 원년(345년) 2월, 흑룡과 백룡 각기 한 마리씩 용산(龍山)에 출몰했다는 보고를 들은 모용황은 여러 신하들과 함께 이를 구경하러 갔다. 두 용들과의 거리가 200여 보 남짓 남았을 때, 모용황과 신하들은 용들을 향해 태뢰(太牢)의 예로 제사를 올렸다. 두 용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즐겁게 놀다가 뿔을 떨어뜨리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모용황은 크게 기뻐하며, 환궁하여 경내에 사면령을 내리고, 새로 축조된 궁의 이름을 '화룡(和龍)'이라 하였다. 또, 용산 위에 용상불사(龍翔佛寺)라는 절을 세웠다.

모용황은 대신의 자제들 중 관직에 임명된 학생들에게 '고문생(高門生)'이라는 칭호를 붙이고, 옛 궁궐을 학교로 개조하여 동상(東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고문생들에게 동상에서 향음주례를 행하게 하였고, 매달 모용황이 참관하여 학생들의 우열을 시험하였으며, 친히 태상장(太上章)을 만들어 급하게 취하던 것을 대신하였다. 또한, 법률과 계율을 담은 15편의 글을 저술하여 귀족 자제들을 가르치는 데 사용하였다.

연왕 12년(345년) 10월, 고대 제후들이 즉위할 때는 각자 연호로 원년을 칭하던 전통에 따라 동진의 연호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연왕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연왕을 칭한지 12년만이었다.

연왕 12년(345년) 11월, 도요장군 모용각이 고구려를 공격해 남소(南蘇)를 빼앗고 돌아왔다. 이때 후조의 정동장군 등항(鄧恒)이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낙안(樂安)에 주둔하면서 장차 후진을 침공할 계획을 세웠으나, 평적장군 모용패가 도하(徒河)에 주둔하는 것을 보고 두려워 스스로 물러났다.

연왕 13년(346년) 정월, 모용황은 세자 모용준에게 광위장군 모용군, 도요장군 모용각, 절충장군 모여근 세 장수와 17,000명 기병을 거느리고 부여를 습격하게 하였다. 모용준은 중앙에서 군대를 지휘하였고, 모든 임무는 모용각에게 맡겨졌다. 전연군은 마침내 부여를 뽑고, 부여의 현왕과 부여 백성 50,000여 명을 붙잡아 돌아왔다. 이때 모용황은 현왕을 진군장군으로 삼고, 자신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2.8. 최후

연왕 14년(347년) 정월, 모용황이 직접 동상에 방문하여 고문생들을 시험하였다. 여기서 경전에 능통하고 뛰어난 자들을 발탁하여 가까이 두고 시중들게 하였다.

연왕 14년(347년) 5월 11일[13], 동진에서 사신을 파견해 모용황을 안북대장군으로 삼고, 나머지 직책은 이전과 같게 하였다.

연왕 14년(347년) 10월, 모용황이 승건전(承乾殿)에서 여러 신하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었다. 이때 탐욕스러운 성격을 가지고 있던 우장사 송해에게 비단 100필을 하사하고, 스스로 짊어지고 돌아가게 함으로써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였다.

이 시기에 연나라에 오랜 가뭄이 지속되자, 모용황은 백성들의 농지세를 면제시켜 주고, 성주, 기양, 영구 등 여러 군(郡)을 폐지하였다. 또, 발해군(渤海郡)을 흥집현(興集縣), 하간군(河間郡)을 녕집현(寧集縣), 광평군(廣平郡)과 위군(魏郡)을 흥평현(興平縣), 속래군(束萊郡)과 북해군(北海郡)을 육려현(育黎縣), 오군(吳郡)을 오현(吳縣)으로 모두 이름을 바꾸고 연나라에 속하도록 하였다.

연왕 15년(348년) 7월, 모용황이 서쪽 변방으로 사냥을 나갔다. 모용황이 강을 건너려 할 때, 한 노인이 흰 말을 타고 나타나더니, 손을 들어 모용황을 막으며 말했다
"이곳은 사냥할 곳이 아니니, 왕께서는 의당 돌아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모용황은 이 말을 비밀로 하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며, 강을 건넌 후 여러 날 동안 사냥하여 많은 동물들을 잡았다.

연왕 15년(348년) 8월, 잠시 휴식을 취하던 모용황이 흰 토끼를 발견하고는, 다시 말 위에 올라 그것을 쏘려 하였다. 그러나 토끼를 추격하다가 말이 돌에 걸려 넘어지면서 모용황도 낙마하여 부상을 입었다. 그제서야 모용황은 주변 사람들에게 강을 건너기 전에 노인이 해준 말을 전했고, 수레에 실린 채로 궁으로 돌아와 요양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세가 악화되자, 모용황은 세자 모용준을 불러 후사를 맡기며 말했다.
"지금 중원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니, 지금은 현명하고 유능한 사람에게 일을 맡겨 국가의 세세한 업무를 처리해야 할 시기이다. 모용각은 지혜와 용기를 겸비하고, 능력도 뛰어나 중책을 맡길 수 있으므로, 너는 그에게 위임하여 내 뜻을 이루어라. 또한, 양사추(陽士秋)는 뜻과 행실이 고결하고, 충직하며 굳건하니, 그 역시 큰 일을 맡길 수 있다. 너는 그를 잘 대우하라."

연왕 15년(348년) 9월 11일[14], 모용황이 승건전(承乾殿)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재위 15년만이었다. 향년 52세.

연왕 15년(348년) 10월, 용산에서 장례가 치러졌다.

아들인 열조 경소제 모용준의 치세때 '태조 문명황제'로 추존되었고, 그의 릉은 '용평릉(龍平陵)'이라 이름하였다.

3. 기타

남북조시대 후기 북제에서 편찬된 북위의 역사서인 《위서》에서는 모용황의 이름이 북위의 추존 황제인 공종 경목제 탁발황의 휘와 비슷했기 때문에 이를 피휘하여 '모용원진'으로 기록했다.
모용황은 선비 탁발부가 세운 대나라의 국왕 탁발십익건의 장인이었다. 모용황은 딸 모용씨를 정략결혼으로 시집보내 대국의 왕비가 되게 했는데 탁발십익건과 딸의 친손자가 북위의 태조 도무제 탁발규였다. 어찌보면 탁발규는 나중에 자기의 친할머니의 친남동생이었던, 후연의 초대 황제 모용수(세조 성무제)와 싸운 것이 된다.

3.1. 한국에서의 인지도

한국 고대사에서 아버지 모용외에 이어 부여를 사실상 작살내고, 덤으로 고구려의 제16대 고국원왕 고사유까지 관광태워버린 인물로 인지도가 있다. 대중적으로는 드라마 <근초고왕>에 등장하면서 어느 정도 인지도가 생겨난 편이다. 배역은 송용태.[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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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덕 모용초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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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191cm가 나온다.[2] 모용황의 이복형 모용한과의 혼동을 방지하고자 후술할 내용부터는 모용한(翰)과 모용한(汗)으로 구분한다.[3] 갑오년 병자월 갑신일. 음력으로는 11월 15일이고, 양력으로 12월 26일이다.[4] 정유년 신해월 정묘일. 음력으로는 10월 14일이고, 양력으로 11월 23일이다.[5] 혹은 유목(劉睦).[6] 정유년 임자월에는 갑인일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오기로 보인다. 다만, 어느 날짜를 오기한 것인지 알 수 없다.[7] 무술년 정사월 계축일. 음력으로는 4월 3일이고, 양력으로 5월 8일이다.[8] 무술년 무오월 무자일. 음력으로는 5월 9일이고, 양력으로 6월 12일이다.[9] 신축년 신묘월 을유일. 음력으로는 2월 22일이고, 양력으로 3월 25일이다.[10] 미와 격 모두 하나라의 인물로, 상왕이 시해당하자 소강왕을 옹립하여 나라를 부흥시켰다는 인물이다.[11] 임인년 계묘월 을묘일. 음력으로는 2월 28일이고, 양력으로 4월 19일이다.[12] 임인년 무신월 정묘일. 음력으로는 7월 12일이고, 양력으로 8월 29일이다.[13] 정미년 병오월 무진일. 음력으로는 5월 11일이고, 양력으로 6월 5일이다.[14] 무신년 임술월 병신일. 음력으로는 9월 17일이고, 양력으로 10월 25일이다.[15] 공교롭게 <대조영>에서도 모용황처럼 고구려를 침공한 인물인 당태종 이세민을 연기했다. 그리고 <광개토태왕>에서는 고국양왕, <태조 왕건>에서는 고구려의 후신을 내세운 고려의 개국공신 홍유, <태종 이방원(드라마)|태종 이방원>에서는 고려의 마지막 수호신 최영, <정도전>에서는 이성계를 도와 고려를 멸망시킨 배극렴을 연기하면서 고구려와 묘한 인연이 있는 배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