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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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건안경백(建安敬伯) 諸葛恢 | 제갈회 | |
시호 | 경(敬) |
작위 | 건안백(建安伯) |
성 | 제갈(諸葛) |
휘 | 회(恢) |
자 | 도명(道明) |
생몰 | 284년 ~ 345년 5월 |
출신 | 낭야국(琅邪郡) 양도현(陽都縣) |
부모 | 부친 - 제갈정(諸葛靚) |
자녀 | 3남 3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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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의 인물로 자는 도명(道明). 낭야국 제갈씨 중 제갈탄의 손자로, 중원에서 피난온 명사 중 영천의 순개(荀闓), 진류의 채모와 더불어 "중흥삼명(中興三明)"이라 불렸다. 형으로는 제갈이(諸葛頤)가 있는데, 그도 동생처럼 능력이 있었는지 원제 사마예 시기에 중용을 받아 관직이 태상에 이르렀다고 한다.2. 생애
약관의 나이에 명성을 얻어 구현(丘縣)의 현장에 시수[1]되었고, 합격하여 임기(臨沂)의 현령으로 옮겨졌다. 이후 팔왕의 난으로 천하가 혼란에 빠지자 장강을 건너 강동으로 도주했는데, 제갈회의 명성은 북에서 넘어온 명사들 중 왕도, 유량 다음으로 높았다.영가 원년(307년) 9월, 낭야왕 사마예가 안동장군에 제수받고 건업(建業)에 진수해 인재를 모았다. 제갈회는 사마예의 휘하로 들어가 주부에 임명되었다가 강녕현령으로 옮겨졌다.
영가 5년(311년) 정월, 주복의 난을 토벌에 공을 세워 박릉정후(博陵亭侯)에 봉해지고 진동참군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종사중랑으로 승진해 통기실(統記室)을 겸했다. 당시 사방에 벌어지는 일이 많아 상소가 산적해 있어, 제갈회가 바쁜 사마예 대신 이를 도맡아 재량껏 처리했는데, 모두 적절했다고 한다. 왕도, 왕돈은 장군을 맡았고, 제갈회, 안함이 내부에서 요직을 맡았으며, 유초가 충성을 다해 조서를 받드니, 사람들은 사마예가 인재를 잘 선발했다고 칭찬했다.
건흥 원년(312년) 4월, 장안에서 민제 사마업이 즉위해 천하의 인재들을 초빙하기 시작했다. 제갈회도 초빙하여 상서랑으로 삼았으나, 사마예가 상소해 그를 계속 강동에 머물게 하고 회계태수에 임명했다. 제갈회가 회계로 떠나기 전, 사마예는 그를 전송하면서 술자리를 열고 말했다.
"지금의 회계는 과거의 관중(關中)과 같이 병사와 식량이 많으므로 좋은 태수가 필요하오. 그대가 그곳에 부임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오. 지금 사방이 무너져 마땅히 바로잡아야 할 것들이 많은데, 어떤 정치를 앞세워야 할지에 대한 그대의 생각을 듣고 싶소."
제갈회가 대답했다."오늘날 천하가 상란을 만나 풍속이 쇠퇴하였으니, 마땅히 다섯 가지의 미덕을 높이시고, 네 가지의 악(惡)을 막으며, 충성스럽고 실속 있는 인재를 등용해 겉만 화려한 자들을 내치셔야 합니다."
사마예는 그의 조언을 진심으로 새겨들었다.건흥 원년(318년) 3월, 마침내 동진의 황제로 즉위한 원제 사마예는 제갈회가 모든 지방관들 중 실적이 1등인 것을 보고 조서를 내려, 그의 공을 치하하고 녹봉을 2,000석으로 늘려주었다. 오래지 않아 제갈회는 모친상을 이유로 사직했고, 상을 무사히 마친 뒤 복직되어 중서령을 지냈다. 대장군 왕돈이 조정에 상소해 제갈회를 단양윤에 임명하고 자신의 곁에 두고 싶어 하자, 그의 악명을 익히 들었던 제갈회는 병을 이유로 사퇴했다.
태녕 2년(324년) 6월, 원제가 붕어하면서 황위를 계승한 명제 사마소가 왕돈을 토벌하기 위해 제갈회를 불러 시중으로 삼고 봉거도위를 더했다. 이후 왕돈의 형인 왕함 토벌에 공을 세워 건안백(建安伯)으로 진봉되었고, 원래 작위는 차남 제갈숙(諸葛虪)이 이어받아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 제갈회는 관직 생활을 무난히 이어나가, 후장군, 회계내사, 시중, 좌민상서, 무릉왕사, 이부상서, 상서우복야, 산기상시, 은청광록대부, 양주대중정, 상서령 등을 역임했다.
함강 8년(342년) 6월, 성제 사마연은 병세가 위중해져 자신의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조서를 내려 낭야왕 사마악을 황태제로 삼음과 동시에, 중서감 유빙, 중서령 하충, 무릉왕 사마희, 상서령 제갈회를 불러 보정을 부탁했다. 강제 사마악이 즉위하자, 제갈회는 다시 시중에 임명되고 금자광록대부를 겸했다.
영화 원년(345년) 5월, 세상을 떠났다. 향년 62세. 좌광록대부, 의동삼사로 추증되었고, 하사된 부장품들은 태위 육완의 선례에 따랐으며, 제사는 태뢰로 지냈다. 장남 제갈감(諸葛甝)이 아버지의 백작 작위를 이었고, 그의 관직은 산기상시에 이르렀다.
《세설신어》에 따르면 제갈회에겐 세 명의 딸이 있었는데, 장녀 제갈문표(諸葛文彪)는 영천 유씨 집안의 유빈, 차녀 제갈씨는 태산 양씨 집안의 양해, 막내딸 제갈문웅(諸葛文熊)은 진군 사씨 집안의 사석에게 시집갔다. 참고로 이들이 시집 간 집안은 모두 당시 동진을 주름잡던 명문가 중의 명문가였다.
[1] 試守. 정식으로 임관하기 전에 시험삼아 1년 동안 임시로 관직에 두고 지켜보는 제도. 전한 시기부터 시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