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2 04:01:26

정묵

鄭默
(213 ~ 280)

1. 개요2. 생애

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 서진의 인물. 자는 사원(思元). 정무의 아들.

2. 생애

위나라에서 기가를 통해 비서랑에 임명되었고 고전을 연구했으며, 상서로 옮겼다가 낭에 올랐으며, 촉을 멸망시키자 관내후에 봉해졌고 사도좌장사에 임명되었다. 263년에 사마염이 황제에 올라 서진을 건국하자 곽혁과 함께 중서자가 되었으며, 조정에서 태자의 신하를 배신[1]라 칭해야 한다고 하자 황태자의 관속에 한정되는 일 없이 진 왕조의 신하 모두에게 전원을 배신이라 해야 한다고 했다.

낙양을 나와 동군태수가 되었고 기근이 일어나자 창고를 열어 식량을 주었는데, 정묵은 자신의 독단이라면서 죄를 청했지만 조정에서 정묵이 나라를 위해 한 일을 칭찬했고 정묵은 낙양으로 들어가 산기상시가 되었다.

예전에 사마염은 고귀한 집의 자제 중에 자신과 비교할만한 사람을 찾았지만 고향에는 그만한 인물이 없었고 범위를 주까지 넓혀서 찾자 12군 중에서 정묵이 발견되었으며, 사마염이 남교에 출사하고 정묵을 임금의 수레를 끄는 참승을 시키도록 했다. 사마염은 자신이 실제 정치에서 활약하고 정묵이 말단이라면 주에서 사마염, 정묵이라 동격이라 했기에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했다.

사마염이 정묵에게 정사에 대해 묻자 농업 진흥은 국가의 기초, 인재 선출은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구제하는 도로 유능한 인재가 오랫동안 관직을 하는 것은 정사에 있어 당연한 것, 진퇴의 때를 밝혀 삼가는 것은 상벌을 바로 하는 것, 유학을 숭상하는 것은 덕, 도의를 가르치는 것의 기본이라면서 정사에 필요한 것은 이것 뿐이라 했다.

273년에 아버지 정무가 사망하자 관직을 떠났고 상이 끝나자 정위가 되었으며, 이 때 원의가 뇌물을 여러 공경대부에 바친 일로 여러 사람들이 연루되어 감옥에 갇혔지만 조정의 관리들 대부분이 체포되었지만 정묵은 뇌물의 풍조에 물들지 않았다.

산도는 인척을 박사에 천거하고 싶어했지만 정묵이 있어서 혈연을 연줄로 출세시키는 것을 못하겠다고 했으며, 사마유가 제나라로 향할 때 법령에 대해 논의하는 일을 맡았고 조지 등이 이의를 제기했고 정묵은 조지가 사마염에 대한 비판하는 것에 대해 용인하면서 이에 연좌되어 파면되었다.

대홍려에 임명되었지만 어머니가 사망하자 복직하지 않았고 상을 마친 후에 대사농, 광록훈이 되었으며, 280년에 68세로 사망해 시호를 성(成)이라 했다. 위관은 정묵에 대해 재주, 명망을 가지고 논했으며, 구경에 다섯 번 올랐지만 지위가 덕에 어울리지 못해 삼사에 오르지 못했다고 했다.

과거에 양준은 딸을 정묵의 아들인 정례의 아내로 삼으려고 하자 정묵은 권력다툼에 휘말리기 위해 싫어해 거절했고 양준은 정묵을 원망하게 되었으며, 정묵에 대한 추증을 할 때 양준이 반대해 정묵은 삼사가 되지 못했다.


[1] 제후의 신하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