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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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辛恭靖생몰연도 불명
동진의 인물. 양주 농서군(隴西郡) 적도현(狄道縣) 출신.
2. 생애
젊어서부터 재기와 도량이 남들보다 뛰어나, 융안 연간(397년 ~ 401년)에 하남태수에 임명되어 낙양을 지켰다.융안 3년(399년) 7월, 일찍이 낙양 경략을 꿈꾸던 후진의 문환제 요흥이 동생인 제공(齊公) 요숭, 진동장군 양불숭(楊佛嵩)을 파견해 낙양을 공격해오자, 신공정은 성문을 굳게 닫고 농성하였다. 옹주자사 양전기는 후진의 침공 사실을 보고받고 북위에게 원군을 보내줄 것을 청하며, 강족이 낙양을 얻느니 차라리 북위가 낙양을 가져갈 것을 권했다. 북위의 도무제 탁발규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태위 목숭에게 60,000 기병을 주어 후진군을 몰아내게 했다.
융안 3년(399년) 10월, 신공정은 100여 일 동안 버텼으나, 북위의 구원군이 미처 이르기도 전에 패하고 낙양성은 후진군에게 넘어갔다. 문환제 요흥이 붙잡혀온 신공정을 향해 물었다.
"짐은 장차 그대에게 동남(東南)의 일을 맡기고자 한다.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이에 신공정이 얼굴에 노기를 가득 띄우고 답했다."나는 나라의 귀신이 될지언정 강적(羌賊)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
요흥은 분노하여 그를 별실에 유폐시켰다.원흥 원년(402년), 환현이 후진에 사자를 보내 포로로 잡힌 신공정과 하담지(何澹之)의 신변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요흥은 하담지를 보내는 것만 승낙하고 신공정은 후진에 그대로 남게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신공정이 감시자를 속이고 담을 넘어서 하담지와 동진의 사자를 따라 강동으로 도망쳐 오니, 안제 사마덕종이 이를 경사스럽게 여겼다. 환현은 표를 올려 신공정을 자의참군으로 삼고, 조정의 수장이 되어 국정을 이끌게 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 병으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