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17 12:01:53

기가(전량)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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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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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祈嘉
(? ~ 388)

전량의 인물. 자는 공빈(孔賓). 양주(涼州) 주천군(酒泉郡) 출신.

2. 생애

기가는 어릴 적부터 청빈하였으나 학문을 좋아하였다. 그의 나이가 어느덧 20여 세에 이르렀을 때, 야밤에 갑자기 창밖을 보면서 외쳤다.
"기공빈, 기공빈아! 은거하라, 은거하라! 인간의 세상에서 겉모양을 꾸미는 것은 무척 괴로워 어울릴 수가 없구나! 벌어들인 돈으로 저울눈을 털끝만큼도 움직이지 못 하니, 그 상심함이 낭떠러지와 같도다!"
그리고는 새벽에 가출하여 서쪽으로 향했다. 돈황(敦煌)에 자리잡은 기가는 학관에 들어가 겨우 서적을 접할 수 있었으나, 가진 돈이 없어 입거나 먹을 것을 모두 자급자족하여야 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하여 마침내 경전과 대의(大義)에 정통하게 된 기가는 다시 서쪽으로 길을 떠나, 해저(海渚)를 유람하고 100여 명의 제자를 가르쳤다.

전량의 국왕 장중화는 기가의 명성을 전해듣고 그를 유림좨주로 초빙하였다. 기가는 성정이 너그럽고 순하여 중앙의 고관대작들은 물론이고, 팽화정(彭和正) 등과 같은 군현의 수령들도 그의 수업을 들었는데, 그 수가 무려 2,000여 명에 이르렀다. 기가는 벼슬아치들에게 유학을 교육하면서도 경전 연구도 게을리 하지 않아, 《이구신경(二九神經)》 등을 편찬하였다. 훗날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는 마음에 본명 대신 "천석선생(天錫先生)"이라 칭하였다. 이후 기가는 천수를 모두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