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54:30

유화(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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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C283F><colcolor=#ece5b6>
전조 제2대 황제
유화 | 劉和
출생 연대 미상
조위 병주 신흥군
(現 산시성 신저우시)
사망 310년 9월 4일
전조 평양 황궁 광극전 서실
(現 산시성 린펀시)
능묘 미상
재위기간 전조 황태자
310년 1월 ~ 310년 8월 29일
제2대 황제
310년 8월 29일 ~ 310년 9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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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C283F><colcolor=#ece5b6> 성씨 유(劉)
화(和)
부모 부황 태조
모후 호연황후
형제자매 7남 중 장남
현태(玄泰)
작호 양왕(梁王)
제호 폐황제(廢皇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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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2. 생애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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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오호십육국시대 전조(前趙)의 제2대 황제. 폐위 절차도 없이 궁궐로 쳐들어온 유총에 의해 즉살당했기 때문에 묘호는 물론 시호조차 받지 못했다.

2. 생애

태조 광문제 유연의 적장자로, 키는 8척에 달했으며 씩씩한 기상과 아름다운 자태를 지녔다고 한다. 어렸을 때도 조숙하여 학문을 좋아했고, 《모시(毛詩)》, 《좌씨춘추(左氏春秋)》, 《정씨역(鄭氏易)》을 익혔다.

영봉 원년(308년) 10월, 아버지 광문제 유연이 칭제하자 대장군에 임명되었다가, 동년 12월에 대사마로 옮겨져 양왕(梁王)에 봉해졌다.

하서 2년(310년) 정월, 황태자로 책봉되었음에도 내외로 시기심이 많아 부하를 부리면서 은정으로 보살피지 않았다.

하서 2년(310년) 7월 16일, 광문제 유연이 붕어하고 그로부터 이틀 뒤에 태자 유화가 즉위하였다. 유화는 황제가 된 이후로 외숙부인 종정 호연유(呼延攸)[1], 시중 유승(劉乘)[2], 위위•서창왕 유예(劉銳)[3]를 가까이 하였다. 당시 평양 근교에는 유화의 동생들인 제왕•대사도 유유(劉裕), 노왕•상서령 유륭(劉隆), 북해왕•무군대장군 유예(劉乂), 초왕•대사마 유총이 각기 강력한 군대를 보유한 채 주둔하고 있었는데, 서로 이해관계가 맞어떨어졌던 호연유, 유승, 유예는 황자들을 숙청하자 합의하고 유화에게 나아가 유세하였다.
"선제께서 경중(輕重)의 계책을 고려하심 없이 세 왕들에게 궁중의 금군을 맡기셨고 또, 대사마 유총은 10만의 강병을 거느린 채 평양성 근교에 주둔하고 있으니, 폐하께서는 지금 손님의 지위에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는 화란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상황이므로, 원컨대 폐하께서는 조속히 대책을 세우셔야만 합니다."
황제 유화 또한 이들의 말에 넘어가 심히 그러하다 여겼다.

동년(310년) 7월 20일, 황제 유화는 선제의 유조를 받들어 금군을 통솔하던 안창왕 유성, 안읍왕 유흠(劉銳), 서양왕 유예(劉璿)를 밤에 동당(東堂)으로 소환하고, 아울러 좌위장군 마경(馬景), 우위장군 유안국(劉安國) 등 황궁의 장수들도 모두 모이게 하였다. 유화가 유성 등 3명의 왕들에게 4왕 토벌 계획을 꺼내자, 유성이 반대하며 아뢰었다.
"선제의 관은 안장되지도 않았고 4명의 왕들 또한 반역의 뜻을 갖고 있지 아니함에도, 오늘날 갑자기 물고기와 고기를 두고 다툰다면 신(臣)은 폐하께서 훗날 먹을 것이 없어지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천하는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며, 대업은 정해지지 않았으니, 원컨대 폐하께서는 선제의 홍기(鴻基)를 뜻으로 삼으시고, 저 광간(狂簡)한 말을 귀담아 듣지 마십시오. 《시경》에 이르기를, '어찌 남이야 없을까마는, 나와 부모만 하리.(豈無他人,不如我同父)'라 하였습니다. 폐하께서 여러 동생들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누굴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호연유, 유예가 화를 내며 말했다.
"오늘의 논의에 다른 도리는 언급할 가치도 없다. 그대들은 폐하의 명령에 복종하고 군대를 이끌면 될 것이지, 장수가 무슨 말이 그리 많은가!"
이후 좌우에 명해 유성을 칼로 베게 하였다. 유성이 즉석에서 살해당하는 것을 본 유흠, 유예와 마경 등의 장수들은 두려움에 떨며
"폐하께서 명령만 내리신다면, 신들은 폐하를 욕보이지 않게 죽음으로 받들겠습니다."
라 하고, 엎드려 복종하였다. 이후 호연유 등은 동당에서 장군들에게 모두 맹세를 강요하고, 4왕 토벌을 준비할 것을 명했다.

바로 다음날인 7월 21일, 서창왕 유예는 마경과 함께 선우대(單于臺)에 주둔해 있던 초왕 유총을 공격하였고, 호연유와 유안국은 제왕 유유를 공격하였으며, 유승과 유흠은 노왕 유륭을 공격하였다. 또, 상서 전밀(田密)과 서양왕 유예는 별동대를 거느리고 북해왕 유예를 쳤다. 그러나 전밀과 유예는 사자를 보내 이 사실을 알리며 유총에게 귀부하였고, 유총은 그들에게 갑옷을 입고 대기하도록 한 뒤 반격을 준비하였다. 선우대로 향하던 서창왕 유예는 유총이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말머리를 돌려 호연유, 유승과 합류하여 일단 제왕 유유와 노왕 유륭 토벌을 도왔다. 이때 호연유와 유승은 유안국과 유흠이 내통한 것이라 의심하여 둘 다 살해하고, 제왕 유유와 노왕 유륭을 공격해 참수하였다.

동년 7월 23일, 초왕 유총이 선우대에서 나와 서명문(西明門)에서 금군을 격파하고 수도인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서창왕 유예 등이 남궁(南宮)으로 달아나니, 유총은 선봉군을 보내 추격케 하였다.

동년 7월 24일, 황제 유화는 광극전(光極殿)의 서실(西室)에서 재위 7일만에 이복동생인 초왕 유총에게 살해당했다.(하서정변) 유총은 이후 서창왕 유예, 유승, 호연유도 모두 사로잡아 처형하고 대로변에 효수하였다.

3. 둘러보기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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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제(従弟)이며 동시에 태조 광문제 유연의 처남이었던 호연유(呼延攸)는 숙부이며 악부였던 호연익의 아들이었다. 광문제 유연은 호연유의 무능하고 속물적인 인격을 꺼리고 싫어하여 결코 요직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2] 평소 초왕 유총을 싫어했다고 한다.[3] 광문제 유연이 죽기 직전에 여러 대신들에게 관직을 내리고 후사를 부탁했는데, 유예는 여기에 선택받지 못한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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