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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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范粲(202 ~ 285)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자는 승명(承明). 연주 진류군(陳留郡) 외황현(外黃縣) 출신. 범교의 아버지, 범단의 손자.
2. 생애
고상하고 절조가 있었으며, 널리 사물을 파악하고 기억력이 좋았다. 그의 학문을 모두 본받으려 해서 멀고 가깝게 무리들이 유익한 사람이 되었으며, 성품이 조심스럽고 엄숙하지 않았지만 모두 공경했다.위나라 때 주부에서 다투어 그를 벽소했지만 모두 가지 않았으며, 오랜 시간이 지나 승낙해 치중, 별가 등을 지내고 태위연으로 벽소되었다. 나가서는 정서사마가 되었고 역임한 직위에서 모두 명성을 얻었으며, 사마의가 보정이 되자 무위태수로 옮겼다. 군에 이르자 어진 관리를 선발해 학교를 세우고 농업과 양잠을 권장했으며, 융이 침입하자 질서를 갖추어 막자 적이 함부로 침입하지 못해 서역은 통할 수 있었고 봉화가 오르는 경계가 없었다.
군은 부유해져 진기한 물품들이 모였고 범찬은 화려함과 사치를 단속하고 절제했으며, 어머니가 연로해 관직을 떠났지만 군에 도적과 오랑캐가 접근하자 다시 가서 낙현령으로 좌천되었다.
얼마 후에는 태재종사중랑이 되었고 어머니의 상을 당해 괴로워하자 효성이 있다고 칭송받았으며, 상복을 입고 입궐해 다시 태재종사중랑을 지냈다. 제왕 조방이 유폐당해 금용성으로 옮겨지자 소복을 입고 전송하자 주변에서는 애통해했다.
사마사가 보정이 되자 군의 관리가 불러 회의를 하려고 하자 범찬은 가지 않았으며, 병이 있다면서 문을 나가지 않았다. 사마소가 시중을 시키자 거짓으로 미친 척 해서 말하지 않았으며, 수레 위에서 자고 땅을 밟지 않았다. 자손들이 혼례와 출사 같은 일이 있을 경우에 은밀히 가서 의견을 물었는데, 뜻이 맞으면 안색의 변화가 없지만 맞지 않으면 잠을 설쳐 처자들이 이를 보고 뜻을 헤아렸다.
자식 3명이 학업을 포기하고 오로지 집에서 부모님만 모셨는데, 진나라가 건국되고 태시 연간에 태자중서자 손화가 천거했지만 가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2천 석의 녹봉을 주어 병을 치료하게 하고 비단 1백 필을 하사했지만 범교는 부친의 병이 중하다고 사양해 받지 않았으며, 말을 안한 지 36년이 된 84세에 수레 위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