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15 07:51:16

위영지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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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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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강릉환공(江陵桓公)
魏詠之 | 위영지
시호 (桓)
작위 강릉현공(江陵縣公)
(魏)
영지(詠之)
장도(長道)
생몰 ? ~ 405년 10월
본적 임성군(任城郡) 임성현(任城縣)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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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의 인물. 연주 임성군(任城郡) 임성현(任城縣) 출신. 동생으로는 위순지(魏順之)가 있는데, 관직이 낭야내사에 이르렀다고 한다.

2. 생애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도 몸소 밭을 갈고 집안일을 도우면서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위영지는 태어날 때부터 윗입술이 세로로 갈라져 있었는데, 한 관상가가 이를 보고 훗날 부귀해질 상이라 예언했다. 그렇게 그가 18세가 되었을 무렵, 형주자사 은중감의 휘하에 명의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가 윗입술에 있는 장애를 고치려 했지만 행장을 꾸리기에는 너무 가난했다. 이에 부모님에게 말했다.
"이렇게나 추한데 살아서 무엇 합니까!"
위영지의 부모는 아들 위해 힘들게 쌀 몇 가마니를 마련했고, 위영지는 마침내 행장을 꾸려 은중감에게로 갈 수 있었다. 위영지가 은중감의 집 문 앞에 다다랐을 때, 은중감은 그의 사정을 전해듣고, 그 성의를 가상히 여겨 의사를 부르고 은중감의 윗입술을 살피게 하였다. 의원이 말했다.
"베어서 보충하는 형태로 고칠 수는 있습니다. 다만, 100일 동안은 죽만 드셔야 하고, 웃어서도 안 됩니다."
위영지가 답했다.
"반평생 말할 수 없어도 마땅히 치료받을진대, 하물며 100일이면 어떠랴!"
은중감은 별채 하나를 내어주어 그곳에서 치료받게 했고, 위영지는 의원으로부터 무사히 수술받았다. 수술이 끝나고 그는 의원의 말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죽만 마셨다. 이윽고 전부 완치가 되자, 은중감은 그가 떠날 때, 자금을 두텁게 하사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위영지는 연주에서 주부(主簿)로 임관하였다. 이후 환현을 만날 기회가 생겨 접견을 신청했지만, 환현은 그의 출신이 비천함을 알고 혐오하여 만남을 거절한 뒤 돌려보냈다.

원흥 3년(404년) 2월, 위영지는 일찍이 유유와 친분이 있었는데, 환현이 제위를 찬탈하고 나라를 어지럽히자 유유의 환현 타도 계획에 동참했다. 유유와 함께 거병해 환현을 건강에서 쫓아낸 후, 건위장군, 예주자사에 임명되어 역양을 진수했다.

원흥 3년(404년) 4월, 환현의 조카 환흠(桓歆)이 인근에서 양추(楊秋)의 저족 세력과 연합해 역양을 침공했다. 위영지는 선성내사 제갈장민, 진릉태수 유경선, 주부 유종(劉鍾)을 거느리고 적들을 격파했다.

의희 원년(405년) 3월, 조서가 내려져 정로장군으로 승진하고, 오국내사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사마휴지를 대신해 형주자사에 임명되고, 지절, 도독6주제군사(都督六州諸軍事), 영남만교위(領南蠻校尉)로 옮겨졌다. 이로써 위영지는 평민 시절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부귀해졌지만, 그는 과거 빈천하게 지내던 시절을 부끄럽다 생각하지 않았고, 자신의 부귀를 주위에 뽐내지도 않았다.

의희 원년(405년) 10월, 세상을 떠났다. 조정에서 그를 태상으로 추증하고, 산기상시를 더했으며, 강릉현공(江陵縣公)으로 추봉하니, 그 식읍이 2,500호에 달했다. 시호는 환(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