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15 06:37:12

이수(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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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 제4대 황제
이수 | 李壽
<colbgcolor=#CD7F32> 묘호 중종(中宗)
시호 소문황제(昭文皇帝)
능호 안창릉(安昌陵)
연호 한흥(漢興, 338년 ~ 343년)
이(李)
수(壽)
무고(武考)
생몰 300년 ~ 343년
재위 338년 ~ 343년

1. 개요2. 생애3. 기타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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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호십육국시대의 왕조 성한의 제4대 군주. 묘호는 중종(中宗), 시호는 소문황제(昭文皇帝)이며 헌제(獻帝)로 추존된 이양의 아들이다.

2. 생애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아량이 넓었으며 예의를 숭상했다. 삼촌 이웅은 그의 재능이 범상치 않다 여겨 그가 19살이 되었을 때 전장군, 독파서군사로 임명해 중임을 맡겼고, 얼마 뒤 정동장군으로 승진시켰다. 이수는 파서땅 초야에 묻혀 은거하던 초수(譙秀)라는 선비를 초빙해 그의 조언을 전적으로 받아들였다.

323년, 이웅의 명을 받아 이오(李玝)와 함께 양난적을 치기 위해 음평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양난적이 군사를 보내 이들의 진격을 막으니 나아갈 수가 없어 성과도 없이 돌아왔다.

328년, 아버지 한왕 이양(李驤)이 사망하자 그 상여를 가지고 도성 성도로 왔다. 이웅은 이수를 대장군, 대도독, 시중으로 승진시켜 녹상서사를 겸하게 하고 풍공(風公)에 봉했다. 대장군에 임명된 이수는 이때부터 군공을 착실히 쌓아가기 시작한다. 330년에는 정남장군 비흑(費黑)을 앞세워 동진의 파동태수 양겸(楊謙)과 감군 관구오(毌丘奧)를 무찌른 뒤 파동(巴東)과 건평(建平)을 차례로 점령했고, 331년에 무도와 음평을 쳐 그동안 말썽을 피우던 양난적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듬해인 332년에 비흑을 선봉으로 삼아 광한(廣漢)에서 나오고, 진남장군 임회(任回)는 월수(越巂)에서 출진하게 해 두 갈래로 동진의 영주(寧州)를 쳤다. 이수와 비흑의 군대가 주제성(朱提城)에 이르자 주제태수 동병(董炳)이 성문을 걸어잠그고 수성했다. 영주자사 윤봉(尹奉)은 건녕태수 곽표(霍彪)를 파견해 동병을 구원하게 했는데, 이수는 곽표의 군대를 이용해 주제성의 군량을 소진하게 할 생각으로 길을 비켜주었다. 그러나 곽표가 주제성에 들어갔음에도 성안의 식량을 떨어질 기미가 보이질 않아 군사를 독려해 급히 공격했지만 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이에 지구전을 주장한 비흑에게 모든 걸 일임하여 마침내 100여일 만에 주제성이 함락되고 동병과 곽표가 항복하였다. 윤봉 또한 주제성 함락 이후 동요하는 민심을 진정시키지 못해 결국 영주를 들어 항복을 선언했다. 영주를 손에 넣은 이웅은 크게 기뻐하며 이수를 건녕왕(建寧王)에 봉하고 영주 전역을 관장하게 했다.

334년, 이웅의 유언에 따라 이반의 보정대신이 되었다. 이반이 즉위하고 사도 하점(何点), 상서 왕귀(王瑰)와 함께 조정의 정사를 모두 처리하였는데, 종형제 이기가 이반을 죽이고 제위를 찬탈하자 보정대신에서 강등되어 한왕(漢王)에 임명되었다. 본래 식읍이었던 영주는 이기가 새로 임명한 건녕왕인 이월(李越)에게로 넘아갔다.

이반이 살해당했을 때 그의 동생 이오는 도성을 빠져나와 부성(涪城)으로 도망쳤는데, 정동장군 이시는 이수에게 이오를 잡아죽이자 권했다. 애초에 이기를 따를 마음이 없었던 이수가 선뜻 수락하지 않고 머뭇거리자, 이시는 분노하여 이기에게 이를 일러바치고 이수가 두 마음을 품고 있으니 마땅히 그를 죽여야 한다며 참소했다. 하지만 이기는 능력있는 이수를 이용하고 싶었기에 황명을 내려 이수로 하여금 부성을 치게 하니, 이수가 하는 수 없이 이에 따랐다. 이오를 죽이고 싶지 않았던 이수는 이오에게 사신을 보내 이해를 따지며 도망가라 설득했다. 이오 또한 승산이 없다 여겨 성을 버리고 동진으로 망명했다. 부성을 되찾았다는 소식을 들은 이기는 이수에게 양주자사(梁州)를 겸하게 하고 부성에 머물도록 했다.

336년, 한중을 공격해온 동진의 사마훈을 물리치고, 부하를 한중에 배치시켜 한중과 남정(南鄭)을 지키게 했다.

이수의 명성은 너무 높아 이기와 그의 무리인 이월, 경건 등이 항상 이수를 대하기 꺼렸다. 이수도 이들이 자신을 경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매번 입조하라는 조서가 올 때마다 변방에 문제가 생겼다는 거짓 핑계를 대며 거절하였다. 이수는 내심 성도를 칠 마음까지 품어 몰래 장사 나항(羅恒), 해사명(解思明) 등과 반란을 모의했다. 그러던 중 이수가 반란을 모의한다는 밀고를 받은 이기는 이수의 의붓동생 이유(李攸)를 독살하고 여러 차례 환관 허부(許涪)를 부성으로 보내 동태를 살피게 했다.

338년, 허부의 거동이 수상하다 느낀 이수는 선수를 쳐 이기보다 먼저 군사를 일으켰다. 이수는 성도가 함락되면 약탈을 전면 허용한다는 공약을 내세워 보기 1만을 즉각 소집하고 이혁(李奕)을 선봉으로 삼아 성도로 돌격했다. 이수가 바로 쳐들어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이기는 아무런 방비도 하고 있지 않았다. 경비가 얼마나 개판이었는지 이수의 세자 이세가 그냥 성도의 성문으로 가 문을 열어주었을 정도였다.[1] 아무런 저항도 없이 성도에 입성한 이수가 군대를 황궁 문앞에 주둔시켜 압박하니, 이기가 사신을 보내 위로하였다. 이수는 사신을 받들면서 이기에게 표문을 올려 이월, 경건, 요화, 전포, 허부, 정서장군 이하(李遐), 장군 이서(李西) 등의 무리는 간사하여 조정을 어지럽히고 사직을 전복하려 했으므로 주살하라 청했다. 이기는 이수의 요청에 따라 이월, 경건 등을 죽였다.

목적을 달성한 이수는 당초 약속한대로 군사를 풀어 성도를 마음껏 약탈하게 했다. 병사들의 약탈은 성안의 백성들은 물론이고 황궁에까지 미쳐 이웅의 딸들과 이씨 황족들까지 강간과 약탈을 당했다. 성도는 말그대로 생지옥이 펼쳐졌고 며칠이 지나서야 겨우 진정 되었다고 한다.

손쉽게 정권을 장악한 이수는 태후 임씨의 명령을 빙자하여 힘 빠진 이기까지 폐위시켰다. 그러나 이수의 세력은 오래지 않아 이수의 칭제 여부를 두고 두 갈래로 갈라져 갈등했다. 한쪽에선 나항, 해사명, 이혁 등이 이수에게 성도왕을 자칭하고 동진에 칭신하자는 주장을 펼쳤고, 다른 쪽에선 이수의 매부 임조(任調),사마 채흥(蔡興), 시중 이염(李艳), 장열(張烈) 등이 이수에게 칭제하라 권유했다. 두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에 빠져있던 이수는 점쟁이를 불러 점을 보게 했다. 점쟁이는 점을 보더니 "수년간은 천자로 군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괘를 내놓았다. 임조는 하루라도 족한데 수년씩이나 할 수 있다면 무조건 칭제를 해야한다 말하자 해사명이 반박했다.
수년간 천자로 군림하는 것이 백세(百世)의 제후에 비할 바가 어디 있겠는가!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수가 말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으니[2] 임후의 제안이야 말로 상책이다.
그리고는 338년 4월에 황제 즉위해 국호를 '성(成)'에서 '한(漢)'으로 고치고 연호는 한흥(漢興)으로 개원했다. 아버지 이양을 헌제로 추존하고 어머니 신씨(辛氏)를 태후로 높였다. 세자 이세는 태자가 되었다.

338년 7월, 누군가가 광한태수 이건(李乾)이 대신들과 모의하여 이수를 폐위시키려 했다며 이수에게 밀고했다. 이수는 내부 결속의 필요성을 느껴 대신들을 불러모아 대궐 앞에서 그의 차남 이광(李廣)과 맹세 의식을 진행하고, 이건을 한가(漢嘉) 태수로 임명해 변방으로 보냈다. 당시 폭풍우가 몰아쳐 낙뢰가 궁문을 내리쳤다. 이수는 이를 불길하게 여기면서 신하들에게 만약 내가 잘못하는 것이 있다면 충언을 아끼지 말라 명령하였다.

동년 9월, 임태후의 동생인 복야 임안(任顔)이 모반을 꾀하여 그를 잡아다 처형했다. 이때 이웅의 자식들도 전부 연루시켜 숙청해버렸다.

339년 3월, 동진의 광주자사 등악이 군사를 이끌고 영주를 쳤다. 건녕태수 맹언(孟彦)이 배반하여 영주자사 곽표를 사로잡아 등악에게 항복하면서 성한은 영주를 상실했다. 동진의 참군 이송(李松)도 성한의 파군, 강양군을 침략했고 이수의 아들인 형주자사 이굉(李閎), 파군태수 황식(黃植)이 포로로 잡혔다. 이수는 이혁을 진동장군에 임명해 군사를 주어 파군에 주둔시켰다. 이혁은 군사를 이끌고 파동군을 쳐 동진의 장수 노양(勞楊)을 전사시키는 공을 세웠다.

이수가 병들자 상서령 나항, 광한태수 해사명이 다시 한번 동진에 칭신할 것을 권하나 거절당했다. 몇 개월 안지나서 이연(李演)이 해당 내용을 또 상소하자 분노하여 이연을 잡아 죽였다. 병이 나은 후 군사를 보내 동진에게 빼앗긴 영주를 다시 되찾고는 배신자 맹언, 유제(劉齊), 이추(李秋) 등을 참살했다.

340년 9월, 후조석호가 함께 협력하여 동진을 정벌해 강동을 나눠갖자 제안하였다. 이수는 크게 기뻐해 산기상시 왕하(王嘏), 중상시 왕광(王獷)을 후조의 사신으로 파견한 뒤, 전함을 건조하고, 무기를 수리하는 등 본격적인 동진 정벌 준비에 열을 올렸다. 상서령 마당(馬當)을 6군의 도독으로 삼아 7만명을 징집해 수군 훈련을 받게 하고 성도에서 크게 열병하니, 북소리가 강을 가득 메웠다. 그러나 해사명, 공장을 비롯한 대신들이 불가론을 주장하며 반대하는 바람에 동진 정벌 준비를 그만두었다. 그 대신 이혁에게 명을 내려 장가군(牂柯郡)을 공격하게 했으나 장가태수 사서(謝恕)의 굳건한 방어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퇴각하였고 성한의 동진 정벌은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그 해 10월, 동진에 사로잡혔던 이굉이 탈출하여 후조로 도망쳤다. 이수가 후조에 서신으로 이굉을 돌려보내달라 요구하면서 석호를 '조왕 석군(趙王石君)'이라 지칭하였다. 석호는 이를 불쾌히 여겼는데 마침 읍루국(挹婁國)[3]에서 사신을 보내 가시나무로 만든 화살과 돌화살 촉을 조공으로 바쳤다. 이에 중서감 왕파(王波)가 석호에게 읍루국의 화살과 화살촉을 이굉과 같이 보내서 우리가 먼 변방의 나라까지 복속시킬 정도로 강대하다는 것을 알려주자 건의했다. 석호는 왕파의 말을 채택하여 이굉을 후히 대접해 성한에 돌려주면서 화살과 화살촉도 같이 보냈다. 하지만 애초에 쓰촨 지방에서 일생 대부분을 보낸 이수가 만주 지방에 위치한 말갈족의 화살을 알아보기는 커녕 그 존재 자체를 알 리 없었다. 이수는 그저 이를 후조의 진상품 정도로 생각해 '갈족이 우리에게 화살을 바쳤다'는 조서를 내렸다. 뒤늦게 이 사실을 전해들은 석호는 분노하여 중서감 왕파를 면직시키고 일반 백성으로 살게 했다.

사신으로 업에 다녀온 왕하가 돌아와 업성에 있는 궁궐의 장엄함과 화려함을 묘사하고, 석호가 어떤 식으로 형벌을 내려 사람들을 다스리는지 보고했다. 이수는 이를 흠모하여 그동안 따르던 이웅의 정책을 모두 폐기하고, 업성의 궁궐을 본떠 자신의 궁궐도 화려하게 건축했으며 후조의 형법을 본떠 엄격한 법을 제정했다. 작은 잘못에도 큰 처벌을 하자 백성들과 신하들의 원성이 높아졌다. 좌복야 채흥, 우복야 이억(李嶷)이 간언했지만 이수에게 처형당했다. 부세와 노역으로 인해 거리에서는 백성들의 한탄하는 소리가 가득했고 반란을 생각하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곧 이수가 중병에 걸려 몸져누웠고 343년 향년 44의 나이로 사망하여 안창릉(安昌陵)에 매장되었다. 제위는 아들 이세가 이었다.

3. 기타

이수는 본래 전한유철, 조위조예를 항상 동경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 이양의 일화와 삼촌 이웅이 다스리던 시대에 관해 듣는 것을 매우 수치스러워 하며 자신이 그들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상소하는 신하들에게 다른 건 몰라도 선대의 정치나 교화를 언급하지 말라 명하였다.

4. 둘러보기

성한의 역대 황제
5대 폐제 이기 6대 중종 소문제 이수 7대 후주 이세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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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웃기게도 이기는 이수를 그렇게 경계했지만 그 아들인 이세는 용모를 마음에 들어해 곁에 두었다.[2] 논어 상론 이인(里仁)편에 나오는 '朝聞道 夕死可矣'의 인용이다.[3] 말갈족이 세운 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