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19:33:31

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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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중국사3. 한국사
3.1. 고조선 ~ 삼국시대3.2. 통일신라3.3. 고려 원 간섭기 이전3.4. 고려 원 간섭기 이후3.5. 조선 ~ 대한제국
4. 목록
4.1. 조()4.2. 종()
5. 기타
5.1. 대중매체

1. 개요

묘호(, Temple name)는 임금죽은 뒤에 생전의 공덕을 기리어 붙인 이름이다.

중국사상나라에서 유래된 유교왕실 예법으로 중화제국한국, 베트남에서 사용되었다.

천자의 영()을 태묘(太廟)에서 제사 지낼 때 사용되는 이름이다.
천자는 칠묘제 종묘를 쓰고 공덕이 클 시 묘호를 올린다.
예기
새롭게 즉위한 천자가 붕어한 천자에게 '○조()' 또는 '○종()'이란 형식으로 묘호를 지어 올린다. 묘호에 붙는 한자는 시호의 뜻을 정하는 시법을 따르며, '공덕이 클 시'라는 문구 때문에 이전까진 창업군주이거나 소수의 아주 위대한 천자에게만 올렸다. 그 외에는 경제처럼 이전까지 죽은 황제를 부르는 명칭은 묘호가 아닌 시호였다.

심지어 묘호가 이미 올려진 황제를 두고도 신하들이 '묘호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여 기존의 묘호를 폐지한 경우까지 있을 정도로 원칙에 충실했다. 실제로 한나라의 역대 황제들 중에는 묘호가 있는 사람보다 없는 사람이 훨씬 더 많고, 묘호를 받았다가 폐지당한 사람도 꽤 있다. 그래서 삼국시대, 남북국시대까지 한국 왕조들도 모든 임금이 아닌 일부 임금에게만 묘호를 올렸다. 대표적인 예가 태종 무열왕이다.

하지만 측천무후가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자신의 존호(살아있는 황제의 호칭)를 거창하게 지었고, 이게 전통으로 남았다. 측천무후의 손자현종 때부터 '생각해보니 이러면 자신의 조상들이 초라해지는 것 같다'는 이유로 이전 황제들의 시호에도 온갖 미사여구를 덕지덕지 붙여버렸다. 이러다보니 시호가 점차 길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송나라에 이르러서는 수십 글자씩 붙는 경우도 생겨 호칭으로 부르기에는 곤란해졌다. 때문에 당 이후부터는 모든 황제에게 묘호를 붙였으며, 묘호를 약칭으로 황제를 부르게 되었다.

명나라청나라일세일원제 즉 황제 한 명당 연호 하나만 사용하는 제도가 확립되었기 때문에, 묘호보다는 군주의 약칭으로 살아있는 황제 본인에게도 사용 가능한 연호+제로 불렀다. 이는 공식적인 이름이라기보다는 통칭의 개념에 가깝고, 공식적으로 선대 황제를 지칭할 때는 연호보다는 주로 묘호나 시호로 지칭했다. 가령 명실록은 명나라의 5대 황제를 '선종 장황제(宣宗章皇帝)'로 지칭하지, 연호에서 따온 통칭인 선덕제라 지칭하지 않는다.

만력제·강희제 등의 명칭에서 '만력'과 '강희'는 각각 당대 중국에서 실제로 사용하던 연호이다. 원나라까지는 원래는 한 황제의 치세에 연호가 자주 바뀌어서 시호 혹은 묘호로 호칭했지만, 명·청 시대부터는 정통제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대개 1황제 1연호의 원칙이 지켜졌는지라 연호로 임의의 황제를 지칭할 수 있었다. 정통제만 토목의 변으로 인해 오이라트에 인질로 잡혀가자 조정에서 급하게 동생인 주기옥을 황제로 옹립했다가, 나중에 탈문의 변으로 다시 복위해 '천순'이라는 새로운 연호를 사용해서 '영종'이라는 묘호로만 불리는 편이다. 숭덕제도 국호를 금에서 청으로 바꿀 때 연호도 천총에서 숭덕으로 바꾼 케이스라 연호보다는 묘호인 '태종'이 더욱 익숙하다.

그런데 이 때문인지 한국에서는 묘호는 제후국의 칭호이고 '연호+제'만이 황제의 호칭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있다. 특히 한국사에서는 고려 이후 대부분의 군주가 ○조, ○종 등의 묘호를 사용하고, 대한제국에 와서야 태황제, 효황제 등으로 부른다는 점과 맞물린 듯하다. 즉 연호나 묘호는 천자국의 전유물로, '연호+제'보다 격이 낮은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이는 대한제국이 직접적으로 황제란 용어를 사용한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초라해보이는 이미지라 생기는 인식이고 조 및 종도 원칙적으로는 왕보다 더 높은 호칭이다.

묘호는 원칙적으로는 천자국 전용 칭호였기 때문에, 극복 불가능한 덩치를 가진 중국의 명분적 우위를 인정하던 전근대 동아시아 구도상 한국사에서 사용한 묘호 대부분은 외왕내제의 일환으로 중국 몰래 사용한 것이다. 즉 이성계가 조선 국내에서는 태조였지만,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에서는 강헌왕(康獻王)이라는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로만 칭했다. ○○왕·○○공 등의 시호는 제후왕이나 신하에게도 내려지지만, 묘호는 천자, 즉 황제의 태묘()에 올라간 이에게만 붙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어떠했는가를 평가하는 시호와 달리 묘호는 '천자'로서 행적을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 따라서 제후왕 또한 '황제의 신하'로서 묘호를 사용할 수 없다. 그렇기에 설령 한국 왕조가 유교를 받아들여 예법을 따른다 해도 오묘제를 사용하고 중국 왕조에서 시호를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천자국이 아니니까. 고려와 조선이 묘호를 사용한 것은 중국 몰래 사용한 것이며, 이는 대월국 황제를 칭한 베트남의 역대 왕조도 동일하다.

중국이 보고 지적을 하든 말든 대놓고 묘호를 쓴 것은 신라 신문왕대한제국이 있다. 전자는 나당전쟁에서 당나라를 싸워서 격퇴한 후 자신감이 붙어있었기 때문에 당이 태종 무열왕의 태종 묘호에 태클을 걸어도 공공연히 거절하며 당당한 외교적 자세를 표출하던 시기이고, 후자는 19세기 말 청나라아편전쟁·태평천국의 난·청일전쟁 등으로 쇠약해지자 아예 황제국을 선포한 마당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비슷하지만 다른 호칭으로 능호가 있는데, 종묘에서 사용하는 호칭인 묘호와는 달리 이 능호는 무덤 자체의 이름이다. 다만 능호도 묘호처럼 거기 묻힌 군주를 가리키는 호칭으로도 사용했다. 가령 "한명회광릉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란 표현은 광릉이란 무덤의 덕을 보았다는 게 아니라 광릉에 묻힌 세조에게 은혜를 입었다는 표현이다.

광해군이나 연산군처럼 폐위된 후 복권되지 않은 군주의 신위는 종묘에 없기 때문에 묘호가 없다.

보통 망국의 군주는 태묘에 모셔질 일이 없으므로, 굳이 후대 왕조에서 공식적으로 묘호를 올리는 경우는 거의 없고 비교적 간략한 시호 정도만을 내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가령 당애제는 후당 명종 시기에 경종(景宗)의 묘호와 소선광렬효황제(昭宣光烈孝皇帝)의 시호를 올리는 것이 제안되었으나 시호만 채택되었을 뿐, 묘호는 태묘에 모시지 않았다는 이유로 채택되지 않았다. 원순제의 경우에도 명나라에서는 따로 묘호를 올리지 않고 순황제(順皇帝)라는 시호만 내렸다. 다만 후신 왕조인 북원에서 혜종(惠宗)이라는 묘호를 공식적으로 올렸기에 지금은 원혜종으로 불린다.

참고로 묘호, 시호 등은 동아시아권에서만 있기에 나머지 국가에서는 이름이 겹칠 경우 ~로 구분하며 특별한 특징이 있다면 별칭을 붙인다. 예를 들어 대머리왕 샤를 1세, 승리왕 샤를 7세, 존엄왕 필리프 2세, 사자심왕 리처드 1세 등...

2. 중국사

원래 중국사에서 묘호는 예외적으로 뛰어난 업적을 남긴 군주에게만 올려지던 것이었다. 먼저 나라를 세운 시조에 해당되는 군주에게는 조(祖)를 사용한 묘호를 올린다. 대부분 태조, 고조 중 하나이며 종종 세조를 사용하기도 한다. 혹은 재위 기간 중 국가가 전복될 만한 위난이 닥쳤으나 잘 대처했을 때, 혹은 새로 건국한 것에 버금갈 만큼 큰 개혁을 완수한 중시조급 군주에게도 조를 사용하기도 한다. # 그 외에도 앞의 임금과 어떻게 해서라도 정통이 이어지지 않는 경우에도 붙이기도 하였다. 왕조의 창시자의 선조에게 부여되는 경우(추존)도 있으나, 예외가 많으며, 이는 실제 군주와는 그 의미가 다르다. 아래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조를 사용한 묘호는 많지 않다.[1][2]

한편 종(宗)자가 들어가면 시조로부터 잘 계승하였다는 의미이다. 묘호가 정착된 이후에는 폐위되지만 않으면 붙었지만, 그 이전엔 말 그대로 '잘 계승하였다'라는 의미로, 적어도 백성들을 잘 다스려서 성군 소리를 들을 정도는 되어야 붙었고, 전한 시절만 해도 일반적인 황제에게는 종도 안 붙은 일이 흔했다. 심지어 명군으로 꼽히는 한경제조차도 묘호가 없을 정도. 또한 정통이 이어지지 않음에도 종을 붙이는 경우는 앞의 군주를 제대로 된 군주로 인정 안 한다는 의미를 갖기도 한다. 묘호를 모든 황제에게 붙이기 시작한 건 당나라 때부터이다. 간섭기 이전 고려나 조선에서 모든 국왕에게 묘호를 올린 것도 당나라 이후의 중국의 제도를 따라한 것이다.

한편 추존 군주 중 최초로 '조'의 묘호를 받은 이는 바로 조조다. 이때만 해도 조조가 위왕으로서 황제에 오르지 않았을 뿐이지 사실상 조위를 개창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태조라는 묘호를 받았다. 이후로도 왕조 성립 이전에 기틀을 마련하거나 일정한 공이 있던 조상이라면 조를 받았다. 이 덕분인지 수나라 때까지만 하더라도 추존 군주는 모두 창업 군주의 부친이나 조부뿐이었다. 하지만 당나라부터는 이런 규칙이 깨지고 증조부, 고조부, 많게는 4~6대조까지 추존하면서 모두 묘호에 조를 올렸다.

또한, 청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선통제에게도 헌종(憲宗)[4], 공종(恭宗)[5]이라는 묘호가 올려졌지만, 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 모두 이를 인정하지 않아 선통제는 공식적으로 묘호가 없다.

3. 한국사

3.1. 고조선 ~ 삼국시대

고조선, 고구려, 백제, 발해는 묘호를 사용한 확실한 기록이 없다.

고구려의 경우 태조대왕에게 태조라는 묘호를 올렸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는 학계에선 묘호라기보다 묘호와 비슷하게 지은 호칭이라는 게 통설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에는 동명성왕을 '태조 중모왕'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동명성왕이 '태조'라는 묘호를 썼을 가능성도 있다.

백제의 경우 한국의 사서엔 전하지 않고 일본 기록인 《속일본기》에 백제의 "태조"가 도모왕이라고 기록돼 있다. 한반도에서 고대에는 한자로 인명을 쓰지 않았고 고유어로 인명을 썼으며, 기록에는 이것을 한자로 음차하여 표기했기 때문에 인명 표기가 통일되지 않은 채 여러 가지로 쓰였다. 그래서 이 도모왕은 발음이 비슷한 고구려 시조 추모일 가능성이 높다.

이상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온조왕유리명왕에게 밀려나 이주하여 백제를 세운 뒤 동명왕을 모시는 사당을 지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기 때문에 백제 왕실이 주몽의 정통 후계자를 자처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백합야 전투부여창고구려 장수를 향해 "우리는 너희와 성이 같다."라고 말한 바가 있다. 고구려는 (高)씨이고 백제는 부여(扶餘)씨임에도 성이 같다는 것은 부계 조상이 같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며, 이로써 백제의 왕과 왕족들은 고구려의 핏줄을 물려받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음을 알수가 있다.

성과 씨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며 제대로된 성과 씨를 사용했다는 가정하에 백제 왕실은 고가문의 성을 가지고 있으며 부여씨를 사용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따라서 백제는 고구려 왕을 비정통 또는 방계로 취급하고 그 과정에서 주몽을 태조라고 높였을 가능성을 예상할 수 있다.

3.2. 통일신라

묘호를 확실하게 사용한 첫 국가는 신라로 여겨진다. 거의 모든 군주에 묘호를 올린 고려, 조선과 다르게 태조, 태종, 열조 세 임금만 보인다. 한편 무열왕에게 태종이라는 묘호를 올렸을 때 당나라가 이를 문제삼고 철회를 요구했지만 신문왕이 이를 거절하자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무열왕의 전례로 봤을 때 당연히 후세 왕들에게도 묘호가 올려졌을 가능성이 있다. 무열왕의 경우 태종이라는 묘호가 당나라와 분쟁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삼국사기에 기록이 올라가게 되었으나, 아쉽게 다른 왕들의 묘호는 따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원성왕의 경우 최치원원성왕릉의 왕릉사찰인 숭복사의 비문을 썼는데, 여기서 열조(烈祖) 원성대왕(元聖大王)이 등장한다. 경주 숭복사비 신라 당대 금석문 기록이므로 신빙성이 있다.

조(祖)가 붙은 것은 원성왕은 신라 중대하대가 나뉘는 기준에 있는 하대의 중시조에 해당하는 임금이라 그런 듯하다. 신라는 보통 혜공왕까지를 중대, 원성왕 앞 선덕왕부터 하대로 보는데, 계보상 선덕왕은 무열왕계와 내물왕계 사이에 껴있는 징검다리, 과도기에 가깝고 원성왕부터 내물왕계로 쭉 이어지게 된다.

그 외에 진흥왕 순수비흥덕왕릉비 같은 금석문에서 태조라는 묘호를 쓰는 신라의 임금 성한왕이 거론된다. 이는 신라 당대에 만들어진 것이므로 신라시대에 태조로 불리는 왕이 누군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에서도 일단 인명은 나오지 않지만 신라 태조 자체는 거론된다.

다만 성한이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이 문헌기록에는 없어 대체 누가 신라의 태조인지에 대해 설이 분분하다. 탈해 이사금, 김알지, 미추 이사금, 김세한[6] 등이 그 후보로 거론된다. 신라는 오묘제를 운영하였으나 하대 애장왕 때에는 변칙적인 오묘제(실질적인 7묘제. 즉 불천위 2묘와 5묘를 결합하여 운용)를 운영하였다. 한편 조선 영조 때에 영조가 직접 쓴 인원왕후(숙종 제2계비, 경주 김씨) 지문에는, 김알지가 세조로 추존됐다고 적고 있다.

흔히 잘 아는 고려나 조선에서는 일부 폐주나 원 간섭기 국왕을 제외한 모든 왕에게 묘호가 있어서, 일부 왕한테만 묘호가 있는 신라가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른데, 위에서 언급되었지만 중국 고대 왕조에서도 묘호는 일부 군주에게만 올렸기 때문이다. 예기를 엄격히 적용하자면 신라고려, 조선보다 유교 예법을 충실히 따른 셈이다.

3.3. 고려 원 간섭기 이전

태조의 삼대조 국조, 의조, 세조 세 명을 제외하고 실제로 군림했던 국왕 중에선 초대 태조에게만 조(祖)를 붙여 올렸으며 제2대 혜종에서 제24대 원종까지 모두 종(宗)을 붙였다. 태묘는 성종 때 제후왕의 5묘제로 시작되었으나 의종 때에 7묘 9실제의 천자식 종묘로 정립되어 원종조까지 사용된다. 종묘에는 두 가지 제도가 있는데 천자의 7묘제, 제후의 5묘제가 그것이다. 고려는 성종이 처음 종묘를 세울 때 5묘제를 택하고 있어 제후국의 예를 따른 것으로 보이나, 실은 중국의 경우도 건국 초기에는 7묘를 채우지 못하였다.

제14대 헌종과 제18대 의종은 실제로 군림했음에도 사후 묘호를 받지 못했다. 각자 강제로 퇴위당했기 때문인데, 헌종은 예종이 묘호와 새로운 시호를 올렸으며 의종은 조위총의 공개적인 성토 덕분에 묘호와 시호, 능호가 올려졌다.

사후 묘호가 추존된 인물은 성종의 아버지 대종현종의 아버지 안종이다.

원종은 '해동천자'의 자격으로 묘호와 함께 고려 종묘에 올라간 마지막 임금이다. 그 이후에는 묘호가 올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3.4. 고려 원 간섭기 이후

이후 원 간섭기에 들어선 충렬왕부터 충정왕까지는 독자적 묘호와 시호를 올리지 못했으나 원으로부터 독립한 공민왕 치세에 충정왕을 제외하고 독자적 시호를 올렸다. 하지만 독자적 묘호는 회복하지 못하였고 공민왕 역시 우왕에게 독자적 시호만 받았지, 묘호는 받지 못하였다. 우왕창왕은 이성계에 의해 신돈의 아들과 손자로 몰려 묘호는커녕 시호조차 받지 못하였고, 공양왕 역시 폐위된 왕이기 때문에 묘호를 받지 못하고 조선 태종에 의해 시호만을 받았다.

한편 원 간섭기에는 예전에 묘호가 붙은 왕의 경우까지도 O조/종을 O왕으로 고쳐 불렀다. 예를 들어 태조는 태왕 또는 조왕(祖王), 혜종은 혜왕, 성종은 성왕이라 부르는 식이었다. 이는 공민왕 대에도 온전히 복구되지는 못했는데, 이를테면 고려사 공양왕 세가에서는 신종을 신왕(神王)으로 표기하였으며#, 이외의 공민왕 이후의 고려사 기록과 조선왕조실록 중 태조~세종실록에서도 고려의 O조/O종을 O왕으로 표기한 기록들이 많다.# 고려의 임금들을 O조/O종으로 확실히 표기하는 건 세종 이후 고려사가 편찬되고 묘호가 정착되었을 때다.

3.5. 조선 ~ 대한제국

조선은 제후국 예법을 철저하게 따랐으나 사망한 임금에게 묘호를 올렸다. 심지어 고려가 천자국 용어를 사용한 것을 참람하다고 여겼지만 묘호만큼은 고려의 전통을 그대로 따랐다.

원래 건국 직후에는 원 간섭기 이후의 고려처럼 창업군주 4대조에게 목왕, 익왕, 도왕, 환왕으로 시호를 올렸으며, 1408년에 승하한 이성계에게도 묘호 없이 강헌왕이라는 시호만 붙을 예정이었으나 태종태조라는 묘호를 올리고, "모()왕"으로 추존되었던 태조의 조상들에게도 각각 목조, 익조, 도조, 환조로 묘호를 올리면서 묘호제가 정착되게 되었다. 물론 명나라, 청나라와 교류할 때는 태조성종이니 하는 묘호 대신 중국 왕조로부터 받은 시호만을 사용했다.

한편 성종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면서 우리는 제후국인데 묘호 쓰는 것을 중국에 걸릴 것을 걱정하여 묘호를 삭제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이 지시는 신하들의 반대로 철회되었다. 묘비나 편장 등에서 묘호의 조, 종을 운자로 쓴 것이 많아 시호로 무조건 바꾸기 어렵고 다른 수많은 서책들을 모두 바꿀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서책이 중국으로 들어가 알려질 수도 있으니 서책에서는 쓰지 말자는 주장이었고, 자기 묘호를 쓰지 말라는 지시도 공식 전교가 아니라 대비가 전한 것으로 '내가 공이 없는데 어찌 묘호를 받을 수 있는가.' 하는 정도의 겸양의 의미였다.
엎드려 듣자오니, 지금 묘호를 의논하면서 혹은 '인()'으로 하자 하고, 혹은 성()으로 하자고 하다가 마침내 성(成)으로 칭하여 올리기로 하였다 합니다. 삼가 상고하건대, 시법(諡法)에 ‘백성을 편안케 하고 정사를 세운 것을 성(成)이라 한다.[安民立政曰成]’ 하셨으니, 이것으로는 대행왕의 거룩한 덕을 다 표현하지 못합니다. 전()에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그친다.[爲人君止於仁]’ 하였으므로 자고로 제왕의 아름다운 칭호로 인(仁) 자 만한 것이 없습니다. 신 등이 비록 시호를 의논하는 반열에 참여하지는 못하였으나, 거듭 깊이 생각건대, 인(仁)으로 칭하여 올리자는 것이 의논하지 않고도 생각이 같으니, 이것이 실로 공론이며 여러 사람의 마음에 아주 맞는 것입니다. 지금 중조의 묘호(廟號)를 피하여 아름다운 칭호를 올리지 않으니, 신자(臣子)의 마음에 심히 미안합니다. 묘호를 한 번 정하면 백세에 고치지 못하는 것이니 위에서 재량하소서.
연산군일기》, 연산군 1년 1월 14일 1번째 기사

이후 성종의 묘호와 관련된 논쟁에서 '인(仁)' 을 지지하는 파에서는 "시법에 '백성을 편하게 하고 정사를 바로 세운 것'을 成이라 하는데 이걸론 대행왕의 성덕을 다 표현 못합니다"라든지, "成은 仁에 미치지 못하옵니다" 라는 발언이 속출하였다. '인(仁)'은 당시 유학자들 사이에서 굉장히 고평가받는 묘호였으나 정작 이 묘호를 받아간 임금은 즉위 기간이 1년밖에 안 된 인종과 후대의 평가가 많이 박한 임금인 인조였으니 아이러니. 그래도 인종은 묘호 그대로 인자하기는 했다. 또 仁이 명나라 홍희제의 묘호를 범한다는 반론에 대해서는 '仁 한 글자가 참람해서 피할 거면 애초에 묘호도 올리지 말아야 할 것 아니냐'며 재반박하기도 하였다.

'성(成)'을 지지하는 세력도 이에 맞서 판서급 대신들이 "성종(成宗)으로 하되 혹 대성(大成)으로 하는거면 모르겠습니다."라는 말을 하면서 반박하였지만 신하들은 전반적으로 인종으로 하자는 여론이 매우 우세했다.

하지만 정승들이 "중국의 묘호를 범(犯)하는 것(명나라 4대 황제 홍희제의 묘호가 인종) 은 옳지 않으며 성종도 뜻 자체로는 훌륭한 이름입니다"라는 의견이 있었다. 이건 대간들이 태조태조를 섬겼고 태종태종을 섬겼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원로대신들이 태조는 건국한 임금, 태종은 계승한 임금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사로운 칭호가 아니라고 반박했다.[7]

게다가 "내가 통감을 보니 인종이라는 묘호가 처음 쓰였던건 송나라이던데 송나라 인종은 물러터져서 오랑캐의 화를 겪었다더라. 그게 울 아빠의 성덕에 견준다고 생각해?"라는 연산군의 의견이 맞아떨어져 결국 성종으로 결정되었던 것이다.

참고로 명나라 인종의 묘호를 범할 수 없다는 정승들의 논리는 이후 끝까지 지켜지지는 못했는데 나중에 이러한 원칙을 다 무시하고 결국 인종이란 묘호를 올린 사례(조선 인종)가 발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정유재란 때 명나라의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과 손잡고 명나라를 치려 한다는 무고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증거로 든 것 중 하나가 묘호의 사용이었다.[8] 바로 몇 년 전에 일본과 피터지게 싸운 조선이 일본과 손잡았다는 말 자체가 허무맹랑한 것이었기에 정응태가 사형당하는 것으로 끝났으나, 다른 건 다 모함이었다고 해도 묘호 사용은 사실이었기에 조선 측에서도 별다른 해명을 하지 않고 고려 때부터 관습적으로 이어져 온 것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했다. #

어차피 조선에서 내부적으로 묘호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었고 중국도 모른 체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에서 그 문제를 굳이 들추려는 사람은 정응태 외에는 아무도 없었으므로 조선에서도 솔직담백하게 해명할 수 있었다. 이 사건 때문에 명나라와 조선 사이에 소동이 있긴 했지만, 결국 앞으로 묘호 문제가 화제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자는 다소 싱거운 결말로 끝났다. 청나라도 마찬가지라 삼전도의 굴욕을 겪은 후에도 조선에서는 묘호를 계속 사용했다. 어찌 됐든 시간이 지나면서 느슨해지긴 했어도 당대에 묘호를 사용하는지 아닌지를 상당히 신경썼다는 걸 알 수 있다.

조선의 경우는 다른 왕조에 비해 조(祖)를 붙인 왕이 지나치게 많다. 이건 비록 후대만 그렇게 인식하는게 아니라 당대 조선인들부터가 "우리나라에 조가 너무 남발되는거 같다"는 인식을 가졌고 때문에 후술하듯이 인조가 '인조'의 묘호를 받았을때 너도나도 효종에게 '이거 뭔가 잘못된 거 같다, 대행대왕의 묘호를 고쳐야 한다'고 상소도 꽤 많이 올린 적이 있다. 효종은 상소를 올린 신하들을 유배까지 보내면서 인조 묘호를 끝내 강행했는데, 당시 올라온 상소를 보면 세조의 묘호부터 뭔가 당시의 소인배들이 올리면 안 되는걸 억지로 올린거라는 인식이 당대 조선 사대부들에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해당 상소문들을 정리한 글[9]

일단 기본 용법 중 하나인 개국 시조 앞 몇 대를 추존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조선에서 실제로 재위한 왕들 가운데 조의 시호를 받은 왕은 창업군주인 태조 이성계를 비롯하여 세조, 선조, 인조, 영조, 순조로 무려 6명이나 되며 추존 왕인 태조 이성계의 4대조(고조부 목조 이안사, 증조부 익조 이행리, 조부 도조 이춘, 부친 환조 이자춘), 대한제국 시기에 장조로 추존된 사도세자, 역시 대한제국 시기에 정조로 추존된 정종, 문조로 추존된 효명세자까지.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공식적으로 문조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므로 고종부터 4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장조-정조-순조-문조-고종으로 가계가 이어졌다. 이 때문에 헌종과 철종은 '조'로 추숭되지 못한 것.

다른 왕조의 사례를 보면 바로 전 왕조인 고려도 추존된 태조 왕건의 3대조인 국조, 의조, 세조를 제외하면 500년 동안 조를 받은 왕은 태조 한 사람뿐이다. 이는 고려조에는 법도가 달랐던 것이 아니라, 왕건의 가계가 4대조를 상고할 수 있을 정도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조는 왕씨 직계 조상이 아니라 외가 쪽 조상으로 추정된다. 그 전의 신라도 천년 역사를 통틀어 시작을 연 태조 성한왕, 계보상 확실한 중시조인 열조 원성왕 딱 두 명이다.

이런 조종 묘호 시스템의 원조인 중국에서 찾아보면 한나라, 명나라, 원나라(몽골 제국)는 두 명[10], 심지어 당나라송나라, 요나라, 금나라 등은 중국 왕조치고 오래 지속된 나라들인데도 창업군주 딱 한 사람만 '~조' 자 묘호를 받았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이들 '조'들에게도 일관된 법칙이 있는데, 바로 형제승계 혹은 방계승계로 사실상의 새 왕통을 열었고, 이후 자신의 직계가 대를 이어간 임금들이다. 정조는 대한제국의 4대 추숭으로 올라간 것이고, 순조는 양자인 철종이 강력하게 '조' 추존을 주장하여 생긴 것이라 이 두 사례는 예외다. 이는 적장자 외의 승계가 어느정도 용인되던 고려와 달리, 성리학 국가인 조선에서는 종법에 따른 적장자 절대우위 원칙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형제승계를 터부시했고, 자연히 비적장자승계로 즉위한 임금의 후손들은 자신의 직계 조상에 대해 정치적으로 그 격을 높여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태종은 정종의 적장자 자격이고, 세종이나 효종은 각각 원래 대종이던 양녕대군과 소현세자 가계가 폐세자와 민회빈 역모 혐의로 대종에서 탈락했기 때문에 예외.

태조 이후 최초로 '조'가 붙은 세조의 경우 예종이 대놓고 "재조(再朝, 나라를 다시 일으킴)하신 분이니 그냥 세조로 하지?"라고 갈궈서 성사시킨 것이었다.# 이후 명종의 조카로 조선 최초의 방계왕통을 연 선조, 광해군을 들어엎고 다시 한 번 방계왕통을 연 인조, 경종으로부터 사상 초유의 왕세제 책봉[11]을 받아 형제승계를 이룬 영조 등.

사실 세조 이후 네 군주의 경우 '공이 있어서' 조(祖)를 붙인다는 것이 공식적인 입장이긴 한데, 공으로 따지자면 양차 왕자의 난을 승리하고 조사의의 난을 평정한 태종, 대마도 정벌과 4군6진 개척에 나선 세종 등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위의 선조와 영조, 정조, 순조도 원래 선종, 영종, 정종, 순종이었으나 후에 재추숭하여 조로 올린 것이기 때문에 태종과 세종도 마찬가지로 사후 추숭하면 그만이었다.

다만 태종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일단 태 자가 붙은 상태에서는 확실히 불가능한데 이미 태조가 있기 때문이다. 즉 하려면 명성조처럼 아예 글자 자체를 바꾸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태종이라는 타이틀 자체가 어지간한 ~조 씹어먹는 수준의 위력을 지녔다는 게 또 문제다.

결국 공 운운은 갖다 붙인 구실이고 실제 정치적인 목적은 따로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위에 나왔듯이 시호를 짓는데 시법이 있듯이 당연히 묘호를 짓는데 그 방법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유난히도 조선에서는 세조부터 지켜진 적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처음에는 '종'으로 묘호를 올렸으나 이후에 추숭한 경우가 너무 많다. 조선에서 '조(祖)'를 받은 임금들의 각각 받은 사유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 목조, 익조, 도조, 환조: 개국 시조 앞의 4대조에 해당. 이는 한자 문화권의 모든 왕조들이 기본적으로 해온 것으로서 정상적인 묘호 추존이다.
  • 태조: 개국 시조들이 거의 기본적으로 받던 묘호로서 정상적인 묘호 추존이다.
  • 세조: 아들인 예종이 강력히 밀어붙여서 채택되었다. 원래는 신숙주 등이 신종(神宗), 예종(睿宗), 성종(聖宗)으로 정해 올렸다. 전통적으로 묘호를 정할 때 하나만 올리면 신하가 왕에게 통보하는 모양새가 되어 좋지 못하므로 보통 신하들이 묘호나 시호 후보 세 가지를 올리면, 대개는 첫 번째 후보로 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상 신하들이 첫 번째로 내놓은 안건으로 하자는 뜻으로 올린 걸 왕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말 없이 첫 번째를 택하곤 했다.
    그런데 예종은 이를 정면으로 뒤집어 버린 것. 참고로 예종이라는 묘호는 세조의 아들인 본인이 다음대에 가져갔다. 세조의 묘호 후보로 나온 성종과 세조의 손자 성종은 한자가 다르다. 결국 예종은 신숙주가 올린 안건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반드시 세조로 해야 한다고 강경하게 주장하여 결국 관철시켰다. 실록 기사 그리고 예종이 이렇게 선례를 만들어버린 탓에 이후 조선에서 '조' 남발이 시작된다.
  • 선조: 세조와는 달리 원래 묘호가 '선종'이었다. 광해군 시기에 정통성을 강화하는 목적에서 추숭되었다. 추숭할 때의 명분은 종계(宗系)를 올바르게 밝히고, 왕업을 중흥한 공로. 실록 기사
  • 인조: 1차로 정해진 것은 '열조'였으나, 남당열조가 하필 찬탈한 황제라 찔렸는지 논란이 되었고, 일주일 뒤에 다시 의논을 하여 '인조'로 정했다. 실록 기사 이에 '조(祖)'가 너무 남발된다며 반발하는 상소가 올라오기도 했지만 효종들이 있는데 뭐가 문제냐고 가볍게 일축해버렸다. 실록 기사
  • 순조: 원래 묘호는 '순종'이었으나, 철종 시기에 정통성을 강화하는 목적에서 추숭되었다. 추숭할 때의 명분은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고, 사학(천주교)을 처단했다는 근거였다.
  • 영조: 원래 묘호는 '영종'이었다. 1890년 고종 시기에 정통성을 강화하는 목적에서 추숭되었다. 추숭할 때의 명분은 나라를 오래 안정시키고 백성을 잘 다스렸다는 것. 선조와 마찬가지로, 실록에는 '영종'으로 표기되어 있다. 실록 기사
  • 장조, 정조, 문조: 엄밀히 말하면 조선의 추숭으로 조로 올라간 것이 아니고 대한제국의 4대조 추존으로 인해 올라간 사례. 셋 모두, 처음에 받은 묘호는 '조(祖)'가 아니었다. 각각의 원래 묘호는 장종, 정종, 익종. 고종의 친아버지는 알다시피 흥선대원군이지만, 왕위에 오른 후 효명세자의 양자로 입적했기 때문에 저 셋은 고종의 양고조할아버지, 양증조할아버지, 양아버지에 해당한다. 순조도 양할아버지에 해당하지만, 이미 철종 때 '조(祖)'로 추숭되었기 때문에 묘호가 바뀌지는 않았다. 즉, 조선의 '조(祖)' 묘호 남발과는 좀 다른 경우에 해당한다. 대한제국이 워낙 짧게 끝났기 때문에 조선의 연장선처럼 취급되고, 하필 고종이 대한제국의 개국 시조보다는 망국의 군주 이미지가 강해서 그렇지 이들의 묘호를 '조(祖)'로 하는 것은 동아시아 왕조 국가의 전통상 합당하다. 대한제국이 오래 갔다면 오히려 고종도 고조(高祖) 같은 '조(祖)'의 묘호가 붙었을 가능성이 100%다.

이 외에도 중종의 묘호와 관련해 아들 인종이 '중조'로 고치는 것이 어떠하냐며 의견을 피력했으나 실록 기사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실록 기사

사례를 잘 보면, 4대조 추존 등 합당하게 '조'로 올린 것과 왕위 계승이 워낙 개판으로 이루어진 조선 후기의 정통성 강화 목적으로 올린 영조와 순조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왕이 된 아들들이 '조'로 하자고 홀로 주장해서 '조'가 된 케이스들이다. 세조로 해야 한다고 강하게 밀어 붙인 예종이나, 선조로 추숭한 광해군, 인조로 올린 효종 등이 이에 해당하는데 '인조'로 묘호를 정하고 나서 들어온 상소문을 보면 "예종과 광해군이 부왕의 묘호를 세조와 선조로 정한 것은 잘못되었다."는 인식이 당대에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예종은 조선왕조 임금들 중에서 유일하게 자기가 원하던 묘호가 붙은 임금이다. 살아 생전에 자기가 죽으면 묘호를 예종으로 하고 싶다고 직접 밝혔다고 한다.

고종순종경술국치 이후 그들이 죽자 조선총독부이왕직에서 올린 묘호이다. 일본에서 올린 묘호인 셈인데, 경술국치 이후에는 각각 "덕수궁 이태왕", "창덕궁 이왕"으로 격하되어 황제 대접을 받지 못했으니 묘호를 받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왕직에서는 의외로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설왕설래 끝에 고종이 생전에 황제위에 있었다는 점을 존중하기로 하고 황제의 예법에 따라 고종에게 묘호(고종)와 시호(태황제)를 올렸다. 이후 1926년 순종이 승하했을 때에도 고종의 예에 따라 묘호(순종)와 시호(효황제)를 올렸고, 실록도 각각 "고종실록", "순종실록"으로 발간되었다.

‘사이버조선왕조’라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광해군에게 재평가의 의미로 혜종(惠宗)이라는 묘호를 올린 사례가 있고, 심지어 의친왕이나 영친왕에게 묘호를 붙여 부르는 이도 있다고 하나, 이런 사례들은 개인이나 사적 단체에서 사사로이 행한 이벤트에 불과하다고 보아야 하고, 공식적으로 광해군이나 영친왕에게 묘호는 없다. 광해군은 조선 왕조가 끝날 때까지 복권되지 못했고, 영친왕대한제국 황제로 재위한 적이 없으며 의친왕은 황제는 물론 황위 요구자로도 있던 적이 없으므로 현대의 한국에서 그들에게 묘호를 올린 사실도,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묘호는 종묘에 신위를 봉안할 때 올리는 이름인데, 종묘에 봉안되지도 않은 인물에게 그냥 묘호만 지어 올린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엄밀히 말해 이는 묘호(廟號)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영친왕과 황사손 이구에게 사시(사적으로 올린 시호)를 올린 바는 있으나,[12] 이때도 시호를 올리는 선에서 그쳤고 묘호를 올리지는 않았다.

4. 목록

  • 추존 군주 포함.
  • 묘호 문서의 수여자 배치 순서는 한국사-중국사-베트남사 순이다.
  • 추존 군주는 재위기간 칸이 비워져있음.
  • 추후 묘호가 삭탈된 경우는 묘호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없었던 것이 되기에 묘호를 취소선 처리함. 시호까지 삭탈한 경우 시호도 취소선 처리함.
  • 묘호가 개정된 경우는 마지막으로 정해진 묘호를 각주로 병기함.

4.1. 조()

묘호 성명
고상조(高上祖) 여회
경조(景祖) 문서 참조
고조(高祖) 문서 참조
강조(康祖) 자효(경정)
광조(光祖) 막낀코안
국조(國祖) 왕국조, 호꾸이리
대조(代祖) 유지겸
덕조(德祖) 문서 참조
도조(度祖) 이춘
탁조(度祖)
목조(穆祖) 문서 참조
문조(文祖) 문서 참조
선조(宣祖) 문서 참조
성조(成祖) 문서 참조
성조(聖祖)
대성조(大聖祖) 노자
세조(世祖) 문서 참조
숙조(肅祖) 문서 참조
순조(純祖) 이공
순조(淳祖) 정영
소조(昭祖) 문서 참조
시조(始祖) 문서 참조
신조(神祖) 완복란
엄조(嚴祖) 무극기
연조(淵祖) 정기
연조(衍祖) 유씨(劉氏)
열조(烈祖) 문서 참조
영조(英祖) 이금
영조(寧祖) 진흡
예조(睿祖) 희씨(姬氏, 주평왕의 아들)
왕조(王祖) 전안
원조(元祖) 진리(陳李)
유조(裕祖) 문서 참조
의조(懿祖) 문서 참조
익조(翼祖) 문서 참조
인조(仁祖) 이종, 주세진
장조(莊祖) 이선
정조(正祖) 이산
정조(靖祖) 석경
조조(肇祖) 먼터무, 완감
태조(太祖) 문서 참조
태초조(太初祖) 황제(黃帝)
통조(統祖) 진완
헌조(憲祖) 문서 참조
헌조(獻祖)
현조(顯祖) 문서 참조
혜조(惠祖) 이율
휘조(徽祖) 유충(劉忠)
환조(桓祖) 이자춘
홍조(弘祖) 정작
흥조(興祖) 푸만
희조(熙祖) 문서 참조

4.2. 종()

묘호 성명
가종(嘉宗) 여유회
갑종(甲宗) 늠신
간종(簡宗) 완복호
강종(康宗) 문서 참조
기종(夔宗) 자시계
경종(景宗) 문서 참조
경종(敬宗)
경종(慶宗)
계종(系宗) 막경희
고종(高宗) 문서 참조
공종(恭宗) 문서 참조
광종(光宗) 문서 참조
단종(端宗) 문서 참조
대종(代宗) 문서 참조
대종(戴宗)
덕종(德宗) 문서 참조
도종(道宗) 문서 참조
도종(度宗)
목종(穆宗) 문서 참조
무종(武宗) 문서 참조
문종(文宗) 문서 참조
명종(明宗) 문서 참조
민종(愍宗) 문서 참조
민종(閔宗)
선종(宣宗) 문서 참조
성종(成宗) 문서 참조
성종(聖宗)
세종(世宗) 문서 참조
소종(昭宗) 문서 참조
소종(紹宗)
숙종(肅宗) 문서 참조
순종(順宗) 문서 참조
순종(純宗)
숭종(崇宗) 이건순
신종(神宗) 문서 참조
안종(安宗) 문서 참조
양종(襄宗) 이안전
애종(哀宗) 문서 참조
원종(元宗) 문서 참조
위종(威宗) 문서 참조
열종(烈宗) 문서 참조
영종(英宗) 문서 참조
영종(寧宗)
예종(睿宗) 문서 참조
예종(禮宗)
예종(藝宗)
우종(佑宗) 여유의
유종(裕宗) 문서 참조
의종(毅宗) 문서 참조
의종(懿宗)
의종(義宗)
이종(理宗) 조윤
익종(翼宗) 문서 참조
인종(仁宗) 문서 참조
장종(莊宗) 문서 참조
장종(章宗)
정종(定宗) 문서 참조
정종(貞宗)
정종(靖宗)
정종(正宗)
중종(中宗) 문서 참조
진종(眞宗) 문서 참조
진종(晉宗)
질종(質宗) 주유숭
철종(哲宗) 문서 참조
태종(太宗) 문서 참조
통종(統宗) 유오
헌종(憲宗) 문서 참조
헌종(獻宗)
현종(顯宗) 문서 참조
현종(玄宗)
혜종(惠宗) 문서 참조
환종(桓宗) 이순우
회종(懷宗) 조병, 주유숭
홍종(弘宗) 완복창
효종(孝宗) 문서 참조
휘종(徽宗) 문서 참조
흠종(欽宗) 조환
흥종(興宗) 문서 참조
희종(熙宗) 문서 참조
희종(僖宗)
희종(熹宗)

5. 기타

정체자 廟號
간체자(중국 본토) 庙号
신자체(일본식) 廟号(びょうごう [13])
한어병음 miào hào
베트남어 Miếu hiệu[발음]
영어 Temple Name

5.1. 대중매체

  • 백작과의 기묘한 산책에서 나오는 국가인 '제국'에는 묘호 제도가 존재한다. 초대 황제는 당연히 태조, 2대 여황제는 예후. 따라서 남황제의 묘호는 현실 세계에서처럼 ~祖 또는 ~宗, 여황제의 묘호는 ~后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후 폐지된 건지 설정구멍인지 황제 크리스토프가 사망한 후에도 묘호가 올려지지 않았다.

묘호는 군주가 죽은 후 정해지는 것이므로 창작물에서 살아있는 군주를 묘호로 부르는 것은 중대한 오류로서, 이 같은 오류는 고증에 큰 신경을 쓰지는 작품에서 자주 발견된다. 동아시아 역사에서 생전부터 묘호를 정해서 사용했던 군주는 조위 열조 조예가 유일한데 이 경우에도 후대 역사가들로부터 예법을 크게 벗어난 비상식적인 처사로 큰 비난을 받았다. 이처럼 생존한 군주에게 묘호를 공식적으로 부여하는 것은 상궤에 어긋나는 것으로 여겨졌던 만큼 창작물에서 생존한 상태의 군주를 묘호로 칭하는 것은 꽤 심각한 고증 오류에 속한다. 아래는 그 사례들이다.
  • 문명 5에 등장하는 세종대왕(문명 5)은 첫 만남에서 "조선의 궁궐에 당도한 것을 환영하오, 낯선 이여. 나는 나의 훌륭한 백성들을 굽어살피는 깨우친 임금, 세종이오."라고 소개하는데 상술한대로 이는 고증오류이다. 세종은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세종인 줄 몰랐다.
  • 크루세이더 킹즈 2의 중화제국 황제는 랜덤 생성된 묘호로 표기되며 커서를 올려 휘를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묘호라는 것은 황제가 죽은 후에 정해지는 것이기에 황제가 즉위하자마자 묘호를 받고 그 묘호로 불리는 것은 오류이다.

[1] 지나치게 많은 사례가 기재될 수 있으므로 통일 왕조 및 주요 왕조만 기재함. 또한 의례적으로 추존되는 건국 군주의 조상들을 추존하는 사례도 제외한다.[2] 물론 어디나 예외는 있다. 대체로 혼란기에는 조를 남발한 경우가 많았다. 조위(2대 열조 조예)를 시작으로 오호십육국시대남북조시대, 오대십국시대의 국가들은 2명 이상이 조를 받은 국가들이 수두룩하다.[3] 흔히 한 고조로 알려져 있지만 유방의 정식 묘호는 태조이다. 고조라는 표기는 고황제의 존칭.[4] 1967년에 대만에 있던 종친들로부터 받은 묘호[5] 2004년에 구 청나라 황실로부터 받은 묘호[6] 삼국사기에선 김세한, 삼국유사에선 김열한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알지의 아들, 즉 김알지의 1대손으로 추정된다.[7] 대다수 국가에서 태종이라는 묘호가 두 번째 임금에게, 국조에게는 태조라는 묘호가 올라갔다. 태조와 태종이 단순 묘호를 넘어 일종의 보통명사로 굳어진 셈이다. 고려 2대 왕인 혜종도 2대 국왕이라는 의미에서 태종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조선 태종도 그 당시에는 2대 정종이 '권서국사'라는 명목으로 공정왕 시호만 받고 묘호를 못 받아 실질적으로는 태종이 2대 왕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원나라도 '원나라'라는 나라를 처음 세운 황제는 쿠빌라이 칸이지만 몽골 제국의 초대 칸인 칭기스 칸과 2대 칸인 오고타이 칸을 넓은 의미에서 원나라의 국조와 2대 황제로 간주하여 각각 원 태조, 원 태종으로 추존하고 자신은 세조의 묘호를 받았다.[8] 자세한 건 정응태 무고사건 참조.[9] 단 해당 링크의 글에는 길고 어려운 사료의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요약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속어 표현이 들어갔으니, 대강 이런 내용이겠거니 참고만 하자. 그래도 글 말미에 실록 원문이 링크되어 있다.[10] 창업군주를 제외하면 다른 한 사람은 각각 광무제, 영락제, 쿠빌라이 칸인데, 이쪽 역사를 안다면 알 수 있겠지만 이 세 사람은 사실상 나라를 새로 세운 거나 마찬가지인 사람들이다.[11] 태종은 정종의 양자로 들어가서 세자 자격으로 왕위를 승계받았다.[12] 영친왕에게 의민(懿愍), 이구에게 회은(懷隱)이라는 시호를 올렸다.[13] '뵤-고-' 정도로 읽는다. 일본에서는 유교적 종묘제도가 도입되지 않아 묘호가 쓰이지 않았다.[발음] 미에우 히에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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