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23 17:54:30

묘호




廟號 / miao hao(중국어), Miếu hiệu(미에우 히에우, 베트남어)

1. 설명2. 한국에서의 사용3. 용례
3.1. 고려의 경우3.2. 조선의 경우
4. 나무위키에 등록된 묘호
4.1. 조(祖)4.2. 종(宗)
5. 墓號

1. 설명

주나라에서 유래된 유교식 왕실 예법 중 하나이며 천자의 영(靈)을 태묘(太廟)에서 제사지낼 때 사용되는 이름이다. 새롭게 즉위한 천자가 붕어한 천자에게 추존하며 "X조(祖)", "X종(宗)"의 형태를 갖는다.

종묘, 그중에서도 칠묘제 종묘에 올라가야만 올릴 수 있다. 광해군연산군처럼 폐위되고 영영 복권되지 않은 군주의 신위는 종묘에 없기 때문에 묘호가 없다.

당 이전까진 소수의 아주 위대한 천자에만 올렸다. 하지만 당 이후부터 모든 천자에게 올리게 됐다.

또한 대 이후 황제의 시호가 점차 길어져 줄여 부르기 위해 묘호를 약칭 대신으로 사용하였다.[1] 명나라부터는 한 명의 황제는 하나의 연호만 쓰는 일세일원제가 확립되었기 때문에 군주의 약칭으로 살아있는 황제 본인에게도 사용가능한 연호를 사용했다.

시호는 제후와 대부(大夫, 신하) 모두에게 쓸 수 있지만 묘호는 천자의 묘(廟)에 올라간 군주만 붙는다는 점이 차이이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어떠했는가를 평가하는 시호와 달리 묘호는 "군주"로서의 업적을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 따라서 원칙적으로 제후에게 쓸 수 없다.

비슷하지만 다른 호칭으로 "능호"가 있는데 종묘에서 사용하는 호칭인 묘호와는 달리 이 능호는 무덤 자체의 명칭을 뜻한다. 다만 능호도 묘호와 같이 단순히 무덤이 아닌 군주 본인을 가리키는 호칭으로도 사용했다. 가령 "한명회광릉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란 표현은 광릉이란 무덤의 덕을 보았다는 게 아니라 한명회는 광릉에 묻힌 세조에게 은혜를 입었다는 표현이다.

현대에선 명나라 이후 중국의 황제들을 부를 때 '묘호 연호+제'에서 묘호도 빼버린 '연호+제'가 통칭으로 쓰이고 있다.[2] 이 영향인지 대한민국에선 고려 이후 군주들의 통칭이 대부분 "X조", "X종"이고 대한제국에서야 군주의 칭호가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묘호는 왕으로서의 칭호이고 중국 황제들의 통칭으로 쓰이는 "연호+제"가 황제로서의 칭호인 걸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묘호는 원칙적으로 천자국만 쓸 수 있기 때문에 묘호가 '연호+제'보다 격이 낮다고 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2. 한국에서의 사용

묘호에 붙는 한자는 시호의 뜻을 정하는 시법을 따른다.

유교의 경전 중 하나인 예기에는 "천자는 칠묘제 종묘를 쓰고 공덕이 클 시 묘호를 올린다."라고 쓰여있다. 그렇기에 설령 한국 왕조가 유교를 받아드려 예법을 따른다 해도 오묘제를 사용하고 중국 왕조에서 시호를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천자국이 아니니까. 하지만 외왕내제 체제가 존재한 한국 왕조들은 묘호, 시호를 자국에서 그대로 사용한다.

고조선, 고구려, 백제, 발해는 묘호를 사용한 확실한 기록이 없다. 묘호를 확실하게 사용한 첫 왕조는 신라 왕조인데 고려, 조선조와 다르게 태조, 태종 두 임금만 보인다. 흔히 잘 아는 고려나 조선에서는 일부 폐위된 왕을 제외한 모든 왕에게 묘호가 있어서 신라가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런 차이가 나는 이유는 본래 묘호 시스템의 원조인 중국에서도 당나라 이전, 보다 자세하게 따지면 처음으로 묘호를 사용한 상나라 이후 묘호 제도를 부활시킨 한나라 때만 하더라도 역대 군주 중 일부 소수의 중요한 업적을 세운 군주에게만 특별히 묘호를 올렸다.[3]

심지어 묘호가 이미 올려진 황제들에 대해서 "묘호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신하들의 주장이 제기되어 기존의 묘호를 폐지한 경우까지 있을 정도로 묘호의 원칙에 충실했다. 그래서 삼국시대, 남북국시대까지 한국 왕조들도 모든 임금이 아닌 일부 임금에게만 묘호를 올렸다.

이하는 한국 왕조의 사용례이다.
  • 고구려
    • 명칭 그대로 6대 국왕 태조왕에게 묘호를 올렸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는 학계에선 묘호라기보다 묘호와 비슷하게 지은 호칭이라는 게 통설이다.
  • 백제
    • 한국의 사서엔 전하지 않고 일본 기록인 《속일본기》에 백제의 "태조"가 도모왕이라고 기록돼 있다. 한반도에서 고대에는 한자로 인명을 쓰지 않았고 고유어로 인명을 썼으며, 기록에는 이것을 한자로 음차하여 표기했기 때문에 인명 표기가 통일되지 않은 채 여러 가지로 쓰였다. 그래서 이 도모왕은 발음이 비슷한 고구려 시조 추모일 가능성이 높다.
    • 이상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온조왕유리왕에게 밀려나 이주하여 백제를 세운 뒤 동명왕을 모시는 사당을 지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기 때문에 백제 왕실이 주몽의 정통 후계자를 자처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4]따라서 백제는 고구려 왕을 비정통 또는 방계로 취급하고 그 과정에서 주몽을 태조라고 높였을 가능성을 예상할 수 있다.
  • 신라
    • 무열왕에게 태종이라는 묘호를 올렸다. 이에 대해 당나라가 문제삼고 철회를 요구했지만 신문왕이 이를 거절하자 더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무열왕의 전례로 봤을 때 당연히 후세 왕들에게도 묘호가 올려졌을 가능성이 있다. 무열왕의 경우 태종이라는 묘호가 당나라와 분쟁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삼국사기에 기록이 올라가게 되었으나, 아쉽게 다른 왕들의 묘호는 따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 최치원원성왕릉의 왕릉사찰인 숭복사의 비문을 썼는데, 여기서 열조(烈祖) 원성대왕(元聖大王)이 등장한다.경주 숭복사비 신라 당대 금석문 기록이므로 신빙성이 있다. 조(祖)가 붙은 것은 원성왕은 신라 중대하대가 나뉘는 기준에 있는[5] 하대의 중시조에 해당하는 임금이라 그런 듯 하다.
    • 그 외에 진흥왕 순수비흥덕왕릉비 같은 금석문에서 태조라는 묘호를 쓰는 신라의 임금 성한왕이 거론된다. 이는 신라 당대에 만들어진 것이므로 신라시대에 태조로 불리는 왕이 누군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에서도 일단 인명은 나오지 않지만 신라 태조 자체는 거론된다. 다만 성한이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이 문헌기록에는 없어 대체 누가 신라의 태조인지에 대해 설이 분분한데 박혁거세, 김알지, 미추 이사금, 김세한[6] 등이 그 후보로 거론된다. 신라는 오묘제를 운영하였으나 하대 애장왕 때에는 변칙적인 오묘제(실질적인 7묘제. 즉 불천위 2묘와 5묘를 결합하여 운용)를 운영하였다.
  • 한편 조선 영조 때에 영조가 직접 쓴 인원왕후(숙종 제2계비, 경주 김씨) 지문에는, 김알지가 세조로 추존됐다고 적고 있다.
  • 고려
    • 원 간섭기 이전인 원종 이전까지 모든 왕에게 묘호를 올렸다. 태묘는 고려 성종조에 5묘제로 시작되었으며 이후 의종 때에 칠묘제로 정립되어 원종조까지 사용된다.
  • 조선
    • 한국 왕조 중 제후국 예법을 가장 철저하게 따랐던 조선조차도 이 부분에서는 그냥 무시하고 자신들의 왕에게 묘호를 올렸다.
    • 조선시대에는 조를 종보다 더 좋게 쳐줬는데세종 뜻 밖의 1패 선조 뜻 밖의 1승 종은 덕이 있는 임금 조는 공이 있는 임금에게 대게 붙였는데 덕이 있다는 건 의례상 하는 것에 가까워서 조를 더 좋아한 듯. 실제로 정통성이 조금 부족했던 왕은 대게 조를 많이 썼다. 묘호를 받을 임금이 적장자 계승이 아니어서 새로운 왕통을 연 것으로 평가될 경우 조를 주는 경우가 많으며, 조선시대에 조 묘호를 남용했다는 부정적 평가가 많지만 실제로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며 추숭한 조 묘호를 제외하면 세조, 선조, 인조, 영조 4명뿐이다.
    • 예종은 조선시대 임금들 중에서 유일하게 자기가 원하던 묘호가 붙은 임금이다.
    • 영조정조는 원래 영종과 정종이라는 묘호가 붙혀졌으나 고종 때 현재의 묘호로 고쳐부르게 되었다. 영조의 경우 생전의 공덕이 재평가 되어 종에서 조로 승격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정조는 대한제국의 건국, 고종의 황제 즉위와 함께 직계 4대 임금까지 황제로 추숭하며 고쳐진 사례이다.
    • 고려와 조선은 명목상 제후국이었기 때문에 중국 왕조 몰래 쓴 것이다. 즉 중국과 교류할 때는 태조성종이니 하는 묘호 대신 중국 왕조로부터 받은 시호인 "XX왕"이라고 했다. 조선 성종 때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면서 우리는 제후국인데 묘호 쓰는 것을 중국에 걸리는 것을 걱정하여 묘호를 삭제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이 지시는 신하들의 반대로 철회되었는데 묘비나 편장 등에서 묘호의 조, 종을 운자로 쓴 것이 많아 라임이 안 맞아서 시호로 무조건 바꾸기 어렵고 다른 수많은 서책들을 모두 바꿀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7]
    • 정유재란 때 명나라의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과 손잡고 명나라를 치려 한다는 무고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증거로 든 것 중 하나가 묘호의 사용이었다. 바로 몇년 전에 일본과 피터지게 싸운 조선이 일본과 손잡았다는 말 자체가 허무맹랑한 것이었기에 정응태가 사형당하는 것으로 끝났으나, 다른 건 다 모함이었다고 해도 묘호 사용은 사실이었기에 이것만큼은 고려 때부터 이어지던 것을 그냥 계속하는 잘못을 범했다고 사죄해야 했다. 그러고도, 심지어 삼전도의 굴욕을 겪은 후에도 계속 사용했지만. 이를 보면 시간이 지나면서 느슨해지긴 했어도 당대에 묘호를 사용하는지 아닌지를 상당히 신경썼다는 걸 알 수 있다.

3. 용례

원칙적으로 왕조의 창시자에게는 조(祖)를 올린다. 대부분 태조, 고조, 세조 셋 중 하나다. 그 외에 재위 기간 중 국가가 전복될 만한 위난이 닥쳤으나 잘 대처했을 때, 혹은 새로 건국한 것에 버금갈 정도의 큰 개혁을 완수한 경우에도 조를 쓴다. 왕조의 창시자의 선조에게 부여되는 경우(추존)도 있으나, 예외가 많다. 반면 종(宗)자가 들어가면 덕이 있다는 뜻으로, 쉬운 말로 그냥 그럭저럭 어려운 사건도 없었고 대단한 업적도 없이 자리보전이나 잘 했다는 뜻이다. 다만 종도 적어도 백성들을 잘 다스려서 성군 소리를 들을 정도는 되어야 붙었고, 전한 시절만 해도 일반적인 황제에게는 종도 안 붙은 일이 흔했다. 심지어 명군으로 꼽히는 한경제조차도 묘호가 없을 정도. 묘호를 모든 황제에게 붙이기 시작한 건 당나라 때부터이다. 간섭기 이전 고려조선에서 모든 국왕에게 묘호를 올린 것도 당나라 이후의 중국의 제도를 따라한 것이다.

앞서 보듯 초기에는 묘호 자체, 즉 조와 종 모두가 드문 것이었다. 종은 뒤에 남발되지만 조는 더더욱 남발되지 않았기에 조의 남발은 조선만의 특수사례였다. 고려 때는 그 많은 국난이 있었지만, 잘 헤쳐나간 경우에도 '조'를 붙인 왕은 오직 태조 왕건밖에 없었다. 추존왕도 왕건 이전의 에게만 '조'를 붙였다.

묘호의 본고장인 중국에서는 대체로 조를 아주 특별한 사유가 아니면 안 썼다.
  • 수나라 역시 수문제는 고조로 묘호를 받았고 수양제 역시 세조로 올려졌으나 이를 추존한 세력이 정통으로 인정 받지 못하는 왕세충 하의 꼭두각시 황제였기 때문에 후세 사가들은 양제를 세조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선 잘 인정하지 않는다.

이처럼 일반적인 경우 "조"를 받은 왕은 나라를 세우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제2의 개국, 국가의 재구축이라 할 만한 큰 위업을 달성한 왕이었다.

실제로 추존 군주 중 최초로 "조"의 묘호를 받은 이는 바로 조조다. 이때만 해도 조조가 위왕으로서 황제에 오르지 않았을 뿐이지 사실상 조위를 개창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태조라는 묘호를 받았고 이후로도 왕조 성립 이전에 기틀을 마련하거나 일정한 공이 있던 조상이라면 조를 받았다. 이 덕분인지 수나라 때까지만 하더라도 추존 군주는 모두 창업 군주의 부친이나 조부뿐이었다. 하지만 당나라부터는 이런 규칙이 깨지고 증조부, 고조부, 많게는 4~6대조까지 추존하면서 모두 묘호에 조를 올렸다. 4대조까지 추존하는 것은 나중에 전례란 이름으로 수입되어서 조선 건국 시 이성계의 조상 4대조를 추존하고 나중에 고종이 황제가 되자 자기 위 4대조의 조선국왕을 황제로 추존한다. 영조는 4대조가 넘으므로 영종이 영조로 오르는 정도에서 끝났지만, 그 손자인 정조는 3대조위라서 황제로 추존되었다. 정조의 소원으로 장종으로 추숭했던 고종의 4대조인 사도세자도 장조의황제로 추존 황제로 만들어주었다. 태조 이성계의 경우 왕조 창시자이기에 예외로 두고 그냥 황제가 되었다.

물론 어디나 예외는 있다. 대체로 혼란기에는 조를 남발한 경우가 많았다. 조위(2대 열조 조예)를 시작으로 오호십육국시대남북조시대, 오대십국시대의 국가들은 2명 이상이 조를 받은 국가들이 수두룩하다. 그 가운데 탑은 북위로 실제 재위한 황제 중 조를 받은 이가 4명이나 된다.

3.1. 고려의 경우

고려는 추존된 왕건의 선조인 국조 손보육의조 작제건, 세조 왕륭 등 세명을 제외하고 실제로 왕을 했던 사람들 중에선 초대 태조 왕건에게만 조(祖)을 붙였으며 2대 혜종에서 24대 원종까지는 모두 종(宗)을 붙였다.

이후 충렬왕부터 마지막 공양왕까지 묘호 없이 시호만 사용하였다.

3.2. 조선의 경우

조선의 경우는 다른 왕조에 비해 조(祖)를 받은 왕이 지나치게 많다. 일단 기본 용법 중 하나인 개국 시조 앞 몇 대를 추존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보자면 조선에서 실제로 재위한 왕 가운데 조를 받은 왕은 창업군주인 태조 이성계를 비롯하여 세조, 선조, 인조, 영조, 정조, 순조 등 총 7명이나 되며 추존된 왕인 태조 이성계의 4대조(고조부 목조 이안사, 증조부 익조 이행리, 조부 도조 이춘, 부친 환조 이자춘), 대한제국 시기에 장조로 추존된 사도세자, 역시 대한제국 시기에 문조로 추존된 효명세자까지 합치면 무려 13명이나 된다.

다른 왕조의 사례를 보면 바로 전 왕조인 고려도 추존된 태조 왕건의 3대조인 국조, 의조, 세조를 제외하면 500년 동안 조를 받은 왕은 태조 한 사람뿐이다. 이런 조종 묘호 시스템의 원조인 중국에서 찾아보면 한나라, 명나라, 원나라(몽골 제국)는 두 명[11], 심지어 당나라송나라, 요나라, 금나라 등은 중국 왕조치고 오래 지속된 나라들인데도 창업군주 딱 한 사람만 '~조' 자 묘호를 받았다.

상기 언급하였지만 시호를 짓는데 시법이 있듯이 당연히 묘호를 짓는데 그 방법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유난히도 조선에서는 세조 이후 지켜진 적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처음에는 "종"으로 묘호를 올렸으나 이후에 추숭의 경우가 너무 많다.

일단 이유는 있으니 조금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그 위난을 잘 해쳐나왔다 해서 조라는 묘호를 내린 것이다. 선조나 인조의 경우는 임진왜란병자호란 때문에, 세조의 경우는 계유정난 때문에 조를 붙였다. 이 경우에도 1차적으로 붙인 묘호는 종(세조는 신종, 선조는 선종)이었지만 후계자들(예종, 광해군)이 억지로 조로 추숭해버렸다. 다만 인조는 1차 선정부터 열조(烈祖)였다가 효종이 더 높은 글자를 쓴다고 인조로 바꿔버렸다. 결국 태조 이성계를 제외하고 세조부터는 억지라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기도 했다. 한마디로 조정의 만년 떡밥.[12]

한편 순조철종기에 조를 받았는데 지금도 한국사의 작은 떡밥으로 남아있다. 철종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한 처사로 보이며 추숭할때의 명분은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고, 사학(천주교)을 처단했기 때문". 원래 묘호는 순종이었다.

고종 때는 대한제국을 세우면서 왕위에서 제위로 바꾸고, 고종을 기준으로 4대조까지의 들을 황제로 높이고, 그에 따라 묘호를 높이면서 정조는 원래 정종이었다가 조로 추숭되었다. 조선 말기 계보도가 조금 막장이라, 고종은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익종)의 아들로 양자입적한 상태라 효명세자부터 4대를 역산하면 사도세자, 정조, 순조, 효명세자가 된다. 그래서 고종은 이들 4대를 장조, 정조, 순조, 문조로 추존했다. 그나마 엄밀히 말해서 이 4대 추존(순조 제외)은 조선의 조 남발 사례에서 한발자국 벗어나 있다고 볼 여지도 있다. 대한제국 선포 및 황제 즉위라는 제2의 개국에 해당하는 상황에서 개국 선조 4대조를 추존하는 것은 중국에서도 일반적인 사례였다. 다만 영조의 경우는 4대 추존이라는 일반적인 예법과 별도로 따로 추진된 추존사례이다. 원래는 영종이었다가, 고종 27년(1890년), 그러니까 대한제국을 세우기도 전에 그냥(...) 추존했다. 제일 오래 재위하면서 나라를 잘 다스렸으니까 추존한다는 뉘앙스. 단 영조는 황제로 추존되지는 않았다.

'조'를 붙인 경우들은 대부분 정통성 강화를 위해서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정통성이 없을수록 조가 더 남발된 것이다. 덕분에 세간에서는 '조'가 붙을수록 나쁜 왕이라는 기절초풍할 인식이 생기고 말았다. 명분은 현실을 이길 수 없다는 하나의 예. 선조는 정식 왕비에서 태어난 적자의 계통이 끊어지는 바람에 방계승통을 했다. 이런 정통성 논쟁을 잘 보여주는 것이 예송논쟁이었다. 그리고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예론과 같은 붕당의 수단들이 대두하면서 신하들이 충신이라는 명분을 어떻게든 마련하기 위해 왕의 칭호를 높이는 데 꽤나 힘썼고, 조 호칭은 더더욱 남발되었다. 애초에 조선왕조 자체가 27대 500년으로 길기도 했고, 왕족 내부의 쿠데타라고 할 수 있는 양위도 결코 드문 편은 아니었다.

몇몇 사이트에서는 광해군을 재평가하자며 광해군에게 혜종(惠宗)과 같은 묘호를 붙이고, 심지어 의친왕이나 영친왕에게도 묘호를 붙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사사로이 만든 것이고, 실제 공식적으로 광해군이나 영친왕에게 묘호는 없다. 그리고 붙일 일도 없다. 현대 대한민국은 공화국이므로 그런 것을 신경쓰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청나라 황실 종친 커뮤니티에서 청의 마지막 군주인 선통제에게도 묘호를 지어주었는데, 중국 공산당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씹었다.

4. 나무위키에 등록된 묘호

추존 군주 포함. 보통 묘호 항목의 수상자 배치 순서는 한국사-중국사-베트남사 순이다.

4.1. 조(祖)

조 묘호 대부분이 제위에 오르지 않은 추존 군주에게 올려졌으며, 제위에 오른 군주 대부분은 태조, 고조, 세조, 열조 4개를 주로 받았다.
묘호 성명
고상조(高上祖) 여회
경조(景祖) 기오창가
고조(高祖) 항목 참조
강조(康祖) 자효(경정)
광조(光祖) 막경관
국조(國祖) 왕국조, 호꾸이리
대조(代祖) 유검
덕조(德祖) 주백륙
도조(度祖) 이춘
탁조(度祖)
목조(穆祖) 항목 참조
문조(文祖) 항목 참조
선조(宣祖) 항목 참조
성조(成祖) 항목 참조
성조(聖祖)
성조(聖祖) 노자
대성조(大聖祖)
세조(世祖) 항목 참조
숙조(肅祖) 항목 참조
순조(純祖) 이공
순조(淳祖) 정영
소조(昭祖) 막격,완안석노
시조(始祖) 항목 참조
신조(神祖) 완복란
엄조(嚴祖) 무극기
연조(淵祖) 정기
열조(烈祖) 항목 참조
영조(英祖) 이금, 막무습
영조(寧祖) 진흡
예조(睿祖) 희씨(姬氏, 주평왕의 아들)
원조(元祖) 진리(陳李)
유조(裕祖) 막치
의조(懿祖) 항목 참조
익조(翼祖) 항목 참조
인조(仁祖) 이종, 주세진
장조(莊祖) 이선
정조(正祖) 이산
정조(靖祖) 석경
조조(肇祖) 먼터무, 완감
태조(太祖) 항목 참조
헌조(憲祖) 항목 참조
헌조(獻祖)
현조(顯祖) 항목 참조
혜조(惠祖) 이율
환조(桓祖) 이자춘
홍조(弘祖) 정작
흥조(興祖) 푸만
희조(熙祖) 항목 참조

4.2. 종(宗)

묘호 성명
가종(嘉宗) 여유회
갑종(甲宗) 늠신
간종(簡宗) 완복호
강종(康宗) 항목 참조
기종(夔宗) 자시계
경종(景宗) 항목 참조
경종(敬宗)
경종(慶宗)
고종(高宗) 항목 참조
공종(恭宗) 항목 참조
광종(光宗) 항목 참조
계종(系宗) 막경희
단종(端宗) 항목 참조
대종(代宗) 항목 참조
덕종(德宗) 항목 참조
도종(道宗) 항목 참조
도종(度宗)
목종(穆宗) 항목 참조
무종(武宗) 항목 참조
문종(文宗) 항목 참조
명종(明宗) 항목 참조
민종(愍宗) 항목 참조
민종(閔宗)
선종(宣宗) 항목 참조
성종(成宗) 항목 참조
성종(聖宗)
세종(世宗) 항목 참조
소종(昭宗) 항목 참조
소종(紹宗)
숙종(肅宗) 항목 참조
순종(順宗) 항목 참조
순종(純宗)
숭종(崇宗) 이건순
신종(神宗) 항목 참조
안종(安宗) 항목 참조
양종(襄宗) 이안전
애종(哀宗) 항목 참조
원종(元宗) 항목 참조
위종(威宗) 항목 참조
열종(烈宗) 항목 참조
영종(英宗) 항목 참조
영종(寧宗)
예종(睿宗) 항목 참조
예종(禮宗)
예종(藝宗)
우종(佑宗) 여유의
유종(裕宗) 항목 참조
의종(毅宗) 항목 참조
의종(懿宗)
의종(義宗)
이종(理宗) 조윤
익종(翼宗) 항목 참조
익종(益宗)
인종(仁宗) 항목 참조
장종(莊宗) 항목 참조
장종(章宗)
정종(定宗) 항목 참조
정종(貞宗)
정종(靖宗)
정종(正宗)
중종(中宗) 항목 참조
진종(眞宗) 항목 참조
진종(晉宗)
질종(質宗) 주유숭
철종(哲宗) 항목 참조
태종(太宗) 항목 참조
통종(統宗) 유오
평종(平宗) 항목 참조
헌종(憲宗) 항목 참조
헌종(獻宗)
혜종(惠宗) 항목 참조
환종(桓宗) 이순우
회종(懷宗) 조병, 주유숭
홍종(弘宗) 완복창
효종(孝宗) 항목 참조
휘종(徽宗) 항목 참조
흠종(欽宗) 조환
흥종(興宗) 항목 참조
희종(熙宗) 항목 참조
희종(僖宗)
희종(熹宗)

5. 墓號

위의 묘호(廟號)하는 무관한 단어로 군주가 묻힌 능의 이름을 뜻한다. 능호 항목 참조.


[1] 측천무후가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자신의 존호(살아있는 황제의 호칭)를 거창하게 지었고, 이게 전통으로 남아서 현종 대에서도 그러했는데, 생각해보니 이러면 자신의 조상들이 초라해지는 것 같아서(...) 이전 황제들의 시호에도 온갖 미사여구를 덕지덕지 붙여버렸다.[2] 원래는 한 황제의 치세에 연호가 자주 바뀌어서 시호 혹은 묘호로 호칭했지만 명청시대부터는 명영종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대개 1황제 1연호의 원칙이 지켜졌는지라 연호=황제가 될 수 있었다.[3] 예를 들어 한나라 역대 황제 목록을 보면 묘호가 있는 황제보다 없는 황제가 더 많다. 삼국지연의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후한 영제, 헌제 같은 암군들은 대표적인 묘호가 없는 황제.[4] 백합야 전투부여창고구려 장수를 향해 "우리는 너희와 성이 같다."라고 말한 바가 있다. 고구려는 (高)씨이고 백제는 부여(扶餘)씨임에도 성이 같다는 것은 조상이 같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며, 이로써 백제의 왕과 왕족들은 고구려의 핏줄을 물려받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음을 알수가 있다. 여담으로 성과 씨는 엄현히 다른 개념이며 제대로된 성과 씨를 사용했다는 가정하에 백제왕실 가문은 고가문의 성을 가지고 있으며 부여씨를 사용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5] 보통 혜공왕까지를 중대, 원성왕 앞 선덕왕부터 하대로 보는데, 계보상 선덕왕은 무열왕계와 내물왕계 사이에 껴있는 징검다리에 가깝고 원성왕부터 내물왕계로 쭉 이어지게 된다.[6] 삼국사기에선 김세한, 삼국유사에선 김열한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알지의 아들, 즉 김알지의 1대손으로 추정된다.[7] 서책이 중국으로 들어가 알려질 수도 있으니 서책에서는 쓰지 말자는 주장이었고, 자기 묘호를 쓰지 말라는 지시도 공식 전교가 아니라 대비가 전한 것으로 "내가 공이 없는데 어찌 묘호를 받을 수 있는가"라는 의미이다. 다만 묘호가 인종이 아니라 성종으로 결정된 것은 명나라 인종의 묘호를 범할 수 없다는 사대적인 이유였다.[8] 흔히 한 고조로 알려져 있지만 유방의 정식 묘호는 '태조'이다. '고조'라는 표기는 '고황제'의 존칭.[9] 왜 태조가 없이 바로 세조(사마염)로 넘어가냐면, 서진 건국 전에 사망한 아버지와 할아버지인 사마의사마소를 각각 고조태조로 추존했기 때문이다.[10] 엄밀히 따지명 도르곤 섭정기에 이루어진 일이지만.[11] 창업군주를 제외하면 다른 한 사람은 각각 광무제, 영락제, 쿠빌라이 칸인데, 이쪽 역사를 안다면 알 수 있겠지만 이 세 사람은 사실상 나라를 새로 세운 거나 마찬가지인 사람들이다.[12] 간단히 말해서 단지 조가 붙었다고 해서 세조가 부왕인 세종보다 더 위대한 왕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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