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01:50:15

성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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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9대 국왕
성종 | 成宗
파일:선릉성종.jpg
선릉 성종 능침
출생 1457년 8월 28일[1]
(음력 세조 3년 7월 30일)
한성부 경복궁 자선당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즉위 1470년 1월 9일[A] (12세)
(음력 1469년, 예종 1년 11월 28일)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사망 1495년 1월 29일[B] (향년 37세)
(음력 1494년, 성종 25년 12월 24일)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능묘 선릉(宣陵)
재위기간 조선 제9대 국왕
1470년 1월 9일[A] ~ 1495년 1월 29일[B]
(음력 1469년, 성종 즉위년 11월 28일 ~ 1494년, 성종 25년 12월 24일)
서명
파일:성종(조선)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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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혈(娎)
부모 생부 덕종(의경세자)
생모 소혜왕후
양부 예종
양모 안순왕후
형제자매 2남 1녀 중 2남
배우자 공혜왕후 (1467년 혼인 / 1474년 사망)
폐비 윤씨 (1476년 왕비 책봉 / 1479년 폐위)[6]
정현왕후 (1480년 왕비 책봉)
후궁
12명 [ 펼치기 · 접기 ]
귀인 엄씨, 귀인 정씨, 귀인 권씨, 귀인 남씨, 소의 이씨, 숙의 홍씨, 숙의 하씨, 숙의 정씨, 숙용 심씨, 숙용 권씨, 숙원 김씨(명빈 김씨), 숙원 윤씨
자녀 16남 12녀 (19남 15녀)
종교 유교 (성리학)
아호 경신(慶新), 아무
명조(明照) / 평남(平南)
봉호 잘산군(乽山君) 혹은 자을산군(者乙山君)
전호 영사전(永思殿)
묘호 성종(成宗)[7]
시호 조선: 인문헌무흠성공효대왕
(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
: 강정(康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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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100222112854a000a010-001.jpg
성종 상상 어진

1. 개요2. 생애3. 가계4. 기타5. 대중매체6. 관련 문서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조선의 제9대 국왕. 덕종의 차남이자 연산군중종의 아버지이고 인종명종의 할아버지이며, 순회세자선조에게는 증조할아버지가 된다. 묘호성종(成宗), 시호는 '강정인문헌무흠성공효대왕(康靖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 휘는 '혈(娎)'이다.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덕종)와 수빈 한씨의 적차남으로 태어났는데,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는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고, 왕위 계승권은 작은아버지 예종에게 넘어갔으나, 그마저도 즉위 1년 3개월 만에 갑작스럽게 승하하였다. 당시 자을산군(성종) 본인은 왕위 계승 서열 3위에 불과했는데도 불구하고 사촌동생 제안대군과 친형 월산대군을 제치고 장인 한명회라는 어마어마한 지원과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자 할머니인 자성왕대비(정희왕후) 윤씨의 지목을 받아 예종의 양자로 입적되면서 1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임금으로 즉위했다. 왕이 된 시기도 문화적 유산들이 꽃이 피는 때여서 성종 본인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도 큰 어려움이 없었으며, 별다른 잡음 없이 태평성대가 지속되었고, 그와 함께 수많은 업적들을 남겼다. 군주로서 받은 스트레스와 을 너무 좋아해서 스스로 건강을 해친 것이 원인이 되면서 39세라는 아깝고 젊은 나이에 승하했다. 죽고 나서 성종(成宗)이라는 묘호를 받았고, 조선시대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세종과 더불어 성군으로 불렸다.

2.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성종(조선)/생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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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계

  • 후궁: 소의 이씨
  • 후궁: 숙의 하씨
  • 후궁: 숙의 정씨
  • 후궁: 숙용 권씨
    • 아들: 요절한 왕자 혹은 왕자 이견석[25][E]
    • 딸: 경휘옹주
  • 후궁: 숙원 윤씨

4. 기타

  • 정사(政事)에 있어서는 조선왕조 역대 국왕들 중에서 성군이자 현자로 불리울 정도로 긍정적 평가를 받으나, 정작 가족 및 여자 관계나 자식농사 같은 사생활 면에서는 다소 부실한 면이 있다는 부정적 평가가 있다. 특히 장남이자 폐비 윤씨의 소생인 10대 왕 연산군은 생모에 대한 과한 집착으로 인해 관료들을 살육하고 민생고를 극심한 끝에 조선 최초로 반정으로 축출된 왕이 되었고, 중전 윤씨의 소생이자 차남인 11대 왕 중종은 이복형 연산군의 뒤를 이어서 왕으로 올랐지만, 조광조에 대한 지나친 불신으로 인해서 사약을 내린 점 때문에 그리 긍정적이지 못한 평가를 받아왔다. 폐비 윤씨는 후궁들, 대비들과의 잦은 갈등과 신경전을 벌여왔는데 이에 그리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으며 또한 세자 시절 연산군을 증오하는 어머니 인수대비 한씨의 연산군 견제에도 그리 적극적이지는 않았고 자신이 승하한지 100년이 지나도 폐비 윤씨의 죽음에 대해서는 연산군이 평생 알지 못하도록 유훈(遺訓)을 내렸지만 결국 생모를 그리워하는 연산군에 의해서 유훈은 깨지고 연산군에 들어서 무오사화와 폐비 사약을 지지한 관료들과 인수대비를 지지하였던 관료들이 다수 참수되고 인수대비도 병세가 악화된 상태에서 손자 연산군에게 막말을 듣는 등 말년에 험한 꼴을 당했다.
  • 폐비 윤씨가 성종에게 "전하께서는 어찌 그리 키가 크십니까?"라고 묻자 성종이 "나보다 더 큰 사람도 있소."라며 당시 조정 대신 중 장신 축에 들었던 허종이라는 신하를 불러 비교해 보았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을 포함한 기록에는 허종이 기골이 장대하다라는 표현만 있고 구체적인 키는 묘사되지 않는데 조선 후기 인물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의하면 11척 2촌(十一尺二寸)으로 나온다. 당시 척으로 환산해도 2m가 족히 넘는다. 현재도 농구선수로 입신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딱 좋을 법한 상당히 큰 키인데, 평균 키가 더 작은 당시 조선의 기준으로는 아마 거인 수준이었을 것이다. 성종은 허종 다음 자신이 제일 컸다고 하였는데, 이를 볼 때 구체적으로 성종이 정확히 몇 척인지에 대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나, 성종도 상당한 장신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조선의 역대 임금들 중 이성계와 더불어 키가 가장 컸다고 한다.[41][42] 또한 성종의 부친 덕종 역시 기골이 장대했다고 하며, 모친 인수대비 역시 미녀에 당시 여성으로서는 키가 큰 편이었다고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 둘 다 키가 컸으니 아들 성종도 장신이 유전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친형 월산대군도 키가 컸다고 전해지며, 또한 인수대비의 얼굴을 닮아 미남이었다고 한다. 키는 성종과 월산대군 형제 둘 다 컸으며, 인수대비의 얼굴과 덕종(의경세자)의 성격은 월산대군이 닮고, 인수대비의 성격과 덕종의 얼굴은 성종이 닮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누나 명숙공주의 외모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알려진 사실은 없으며, 위의 그림은 성종의 실제 어진이 아닌 우승우 화백의 상상도다.
  • 성종은 풍류를 즐기고 예술적인 기질이 다분했던 인물이였다.[43] 그는 을 매우 좋아해서 종친들을 접견하거나 왕실의 웃어른들인 자성대왕대비, 인수대비, 인혜대비와 친형인 월산대군을 위해 잔치를 자주 열었다. 성종은 학문을 좋아했고 독서를 즐겨 하며 특히 해서에 정통하여 글씨체가 사랑스럽고 단아했으며 무게 있었고 명필이였던 안평대군에 버금 갔다고 한다.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고 조선시대에 그림 그리는 일을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청인 도화서에 애정을 가지고 능력 있는 화원을 키우기 위해서 노력했으며 난을 치거나 그림도 그렸다고 하지만 오늘날까지 알려진 작품은 딱히 없다. 대간들은 성종의 취미 생활이나 사생활에 사사건건 딴지를 걸며 하지 말라고 반대하는데 궁궐에서 애완 동물에게 옷 하나 입혀서 키우려 해도 반대, 매사냥도 하지 말라고 반대, 활쏘기도 공식적인 행사 아니면 하지 말라고 반대해 왕이였지만 하고 싶은 일을 제대로 즐길 수 없는 처지였다. 그나마 허용된게 술을 마신다거나 밤마다 후궁 처소로 가서 씨를 뿌려 왕실을 번성하는 것은(...) 권장되는 일이라 대간들이 태클을 걸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38세의 나이에 16남 12녀[44]라는 어마어마한 자식들을 두어 왕실을 번성시키지만 건강을 해쳐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 시를 매우 좋아했는데, 시를 잘 짓거나 문장을 잘하는 신하와 종친들을 총애했다. 성종은 할머니인 자성대왕대비, 장인인 한명회, 친형인 월산대군을 위해 시를 친히 짓기도 하였는데 대간들은 군주가 시를 짓는 것은 체통에 맞지 않다고 반대를 해대는 바람에 한명회에게 내린 시를 거둬들이고 공식적으로 시를 짓거나 신하들에게 시를 지어 주지 않고 오직 친형인 월산대군에게만 시와 문장인 서를 지어주고 월산대군과 서로 수창을 자주 하였다고 한다. 이는 월산대군도 시를 좋아하고 잘 지으며 피를 나눈 하나뿐인 형제 사이라 친했고 형과 개인적으로 주고받는 시와 편지들은 대간들이 알 수가 없으니 자유롭게 시를 지을 수 있었다. 역대 조선 국왕들의 시와 서를 모아 책으로 발행한 <열성어제>에 따르면 성종이 지은 시와 서가 상당수 있으며 친형 월산대군과 주고 받은 시가 대다수이다. 하지만 1488년 월산대군이 병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성종은 형을 잃은 슬픔에 한동안 시를 짓지 않았다가 몇 년 후 유호인이라는 문신과 시를 주고 받았는데 알려진 시는 1편 뿐이다. 사실 임금이 신하를 위해 시를 지어주는 것은 드문 일이였고 대간들이 반대하는 행동이어서 성종은 신하들에게 시를 지어서 바치라고 명해 시를 감상만 할 뿐 월산대군이 죽은 이후에는 별다른 시문을 남기지 않았다. 성종이 지은 시에는 월산대군과 형제간의 정을 읊은 것들이 많고 임금의 특성상 지방의 야외보다는 궁궐 안 생활과 관련된 구절이 많은 편이다. 끝으로 성종이 지은 시 2수만 소개한다.

    妙年得慶良可驚

    묘년에 경사 얻어 진실로 놀랐는데

    微兄誰識弟深情

    형이 아니면 아우의 깊은 정을 누가 알랴

    聯茵相對竢有日

    자리 깔고 마주할 날이 오길 기다리고

    談笑自應肝膽傾

    담소하며 마땅히 속마음을 터놓으리라



    <친형 월산대군을 위해 지은 시>


    椒殿祥凝福自宜

    초전에 상서 어려 복이 절로 알맞고

    陽來覆載亦如私

    천지에 양기 옴도 사사로운 은혜 같네

    蟠桃閬苑三千歲

    낭원의 반도는 삼천 년에 열리고

    古栢人間一百圍

    세상의 잣나무는 백 아름이나 되네

    今日來開王母宴

    오늘에 대왕대비 잔치를 개최하니

    一心猶勝老萊嬉

    마음은 노래자의 기쁨보다 낫구나

    壽觴縱醉恩何盡

    축수 술에 취해도 은혜 어찌 다하랴

    晨夕長知奉罔違

    아침저녁 오래도록 어김없이 받들리라



    <할머니 자성대왕대비를 위해 지은 시>
  •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고려성종과도 비슷한 점이 상당히 많다.[45] 우선 아버지가 군주가 아니었으며 위에 형을 둔 상태로 왕위에 올랐고 사후에 받은 묘호도 둘 다 성종(成宗)으로 똑같았다. 유교를 바탕으로 한 정책을 펼쳐 나라의 기틀을 잡았다는 공통점도 있으며, 사망했을 당시의 나이도 38세로 같은데, 심지어 사후에 나라 꼴이 막장이 되었다는 것도 같았다.[46] 맹꽁이 서당에서도 이를 가리켜 신묘한 우연의 일치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조선 성종은 조선을 건국하는데 1등 공신인 신진사대부들에게 족쇄를 채우던 제도들을 숱하게 남긴데 반해 고려 성종은 장원이라는 대토지제인 공음전을 가속화시켰고 부곡민 체제를 허물지 않으면서 역으로 노비환천법을 실행에 옮기며 문벌귀족, 호족 등 기득권 지배층에게 오히려 힘을 실어줬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한 고려 성종은 숙부 광종이 없앤 장원을 도로 부활시킨데 반해 조선 성종은 공음전보다 더 개혁적인 과전법을 거쳐 직전법을 시행하여 장원을 아예 없앴다는 점에서도 서로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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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32권, 4년( 1473 계사 / 명 성화(成化) 9년)
일본국 인백단 삼주 태수 원교풍이 양영서당을 보내어 선물과 글을 올리다

일본국(日本國) 인백단 삼주 태수(因伯丹三州太守) 산명전(山名殿) 소필(少弼) 원교풍(源敎?)이 양영 서당(亮瑛西堂)을 보내어 와서 토의(土宜)를 바치고, 아울러 사서(四書) 각각 1건(件)씩을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는 이르기를,

“공경히 생각하건대, 황제 폐하(皇帝陛下)께서 보위(寶位)에 오르시어 천운(天運)을 이어받으시니, 구방(舊邦)이 유신(維新)하며, 덕(德)이 하(夏)나라·은(殷)나라의 초정(初政)보다 뛰어나시고 도(道)가 요(堯)임금·순(舜)임금보다 위에 짝하시니, 지극히 축하하고 지극히 축수합니다. 신은 선조(先祖) 이래로 가세(家世)에서 상국(上國)3198) 에 빙문(聘聞)을 통하지 아니한 적이 없기 때문에, 경인년3199) 가을에 일개 암자승(菴子僧)과 석도문(奭都聞) 등을 차견(差遣)하여서, 옛날의 맹세를 닦으며, 또 토의(土宜)의 미미한 정성을 바쳤습니다. 다행히 금상 황제(今上皇帝)3200) 께서 왕위(王位)를 이어받으시는 초정(初政)을 만나서, 눈으로는 한(漢)나라 관리의 위의(威儀)를 보겠고, 귀로는 주(周)나라 시(詩)의 가송(歌頌)을 듣겠으니, 아아, 성대(盛大)합니다. 실로 문무(文武)의 나라인지라 영우(榮遇)하기가 너무나 크옵니다. 전사(專使)3201) 가 일을 끝마치고 동쪽으로 돌아오게 되매, 화로 동반(火爐銅盤) 1개와 동경(銅磬) 1개를 더하여 내려 주시니, 이미 후한 은혜를 받았으므로, 감격하고 기쁜 마음이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만복사(萬福寺)의 주지(住持) 양영 서당(亮瑛西堂) 등을 보내어 바다를 건너가서 박(薄)한 폐물(幣物)을 바치어 오로지 황제께서 왕위를 이으신 것을 배하(拜賀)하게 합니다. 신은 비록 먼 하늘, 먼 바닷가의 땅에 있어서 위궐(魏闕)3202) 아래에 달려가 마음을 바치지는 못하나, 구구(區區)한 단성(丹誠)3203) 을 엎드려 예찰(睿察)하여 주시기를 빌며, 그리하여 주시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신의 봉지(封地) 안의 백주(伯州)에 만복 선사(萬福禪寺)라고 하는 옛 사찰(寺刹)이 있는데, 허물어져 무너진 지가 세월이 오래 되었으므로 장차 다시 영조(營造)하려고 하여, 저번 때에 상국(上國)에 조연(助緣)3204) 을 구(求)하였으나, 너그러이 용납하여 주심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바라는 바는 대왕께서 관인(寬仁)으로써 포금(布金)3205) 의 봉시를 속히 행하여 주시면, 불각(佛閣)과 승방(僧房)을 일시에 다시 옛날처럼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길이 성수(聖壽)가 만안(萬安)하시도록 봉축(奉祝)하는 일단이 될 것입니다. 하정(下情)3206) 은 지극히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여 변변치 않은 방물(方物)을 별폭(別幅)에 갖추었습니다.”||

  • 일본 다이묘들의 사신들이 조공을 바치며, '황제 폐하'라 불렀다. 실록1, 실록2 오늘날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달리 조선의 외왕내제 체계, 그리고 당시 동아시아의 여러 정치체 간의 관계를 고려했을 때 이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동아시아에서 황제 또는 황제국,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외교 관계는 황제국이 물질적인 것을 받고(대표적으로 조공) 타국의 군주를 봉작하고 권위를 부여하는 시스템이었으므로 이에 근거한다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다만 대내외적으로 공식적인 것으로 확정하지 않았을 뿐. 유사하게 일본 무로마치 막부쇼군의 신하도 성종을 '황제 폐하'라 불렀다.[47] 실록
  • 동물애호가로 동물을 매우 좋아해서 궁중에서 애완동물을 키웠다. 특히 동물들을 데려다 키우려다 사료값으로 쓰는 돈이 지나치게 많다면서 신하들이 자주 태클을 걸어 의견충돌이 많았다. 동물 수입 건수가 사슴 51건, 노루 31건, 송골매 25건, 물소 23건, 원숭이 15건, 고양이 15건, 개 11건, 낙타 3건, 공작새 4건, 고니 7건, 앵무새 2건이나 되었다. 한 일화로 원숭이에게 집을 지어주고 옷도 입혀주려고 하다가 신하들이 비용 문제를 들어 "백성들은 누더기 한 벌 제대로 못 입고 쌀밥조차 못 먹는데 절대 안 됩니다."라며 강력하게 반대했다.[48]
  • 임진왜란일본군이 무덤을 도굴해서 무덤 안에 있던 부장품들을 모조리 다 가져가고 재궁을 불태워 버리는 바람에 성종의 시신이 한 줌의 재로 불타버려 유실되었다.[49] 이로 인하여 다른 조선의 임금들은 어진이 소실되었어도 시신만 스캔하면 얼굴을 알아낼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성종의 진짜 얼굴은 하필 어진과 시신까지 모두 소실되어 할아버지 세조처럼 어진이 극적으로 발견되지 않는 한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 이는 똑같이 임진왜란 때 도굴 후 시신이 불태워진 중종도 마찬가지.[50]

5. 대중매체

5.1. 영화

5.2. 드라마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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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율리우스력 8월 19일.[A] 율리우스력 1469년 12월 31일.[B] 율리우스력 1월 20일.[A] [B] [6] 연산군이 제헌왕후(齊獻王后)라고 추숭했으나 중종반정 이후 반정 군에 의해 강제 삭탈되었다.[7] 묘호 후보 중에는 인종(仁宗)도 있었으나 반려되었다.[8] 왕자(王子)가 졸(卒)하였는데, 폐비(廢妃) 윤씨(尹氏)의 소생이었다. - 《성종실록》, 성종 10년 6월 12일 정유 3번째기사[9] 공교롭게도 생모 윤씨가 폐출된지 10일 만에 사망했다.[10] (중략) 을사년(1485년) 11월에 아홉 달 만에 공주가 출생하므로 궁중이 깜짝 놀랐었고 (중략) - 《중종실록》, 중종 25년 8월 23일 경진 2번째기사[11]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새로 낳은 공주가 비록 허무하기는 하나 어제 죽었으니, 내일의 조하(朝賀)는 정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 《성종실록》, 성종 17년 2월 14일 경인 3번째기사[12] (중략) 경술년(1490년) 11월에 공주가 출생하였으며, (중략) - 《중종실록》, 중종 25년 8월 23일 경진 2번째기사[13] 성종 때에는 숙원이었다가 숙용, 숙의를 거치면서 빈으로 추증되었다. 《연려실기술》에서 명빈 김씨와 숙의 김씨로 분리되어 각각 다른 인물인 것처럼 기록되어있지만 명빈 김씨의 묘지를 보면 동일인인 것을 알 수 있다.[14] 남흔의 아들 남섭원에게 하가하는데 남섭원은 경순옹주의 부마인 남치원과 사촌간이다.[15] 숙원 김씨(金氏)가 3남 3녀를 탄생하였는데, 휘숙 옹주(徽淑翁主)는 풍원위(豐原尉) 임숭재(任崇載)에게 하가하였고, 경숙 옹주(敬淑翁主)는 아직 하가하지 아니하였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 《성종대왕묘지문》[C] 성종25년 12월 24일 기록에 따르면 명빈 김씨는 3남3녀를 낳았고 휘숙옹주와 경숙옹주를 제외하고 모두 어리다라고 기록되어있다. 명빈 김씨의 자녀들 중 작호를 받은 이는 최종적으로 휘숙옹주, 경숙옹주, 휘정옹주, 무산군 넷 뿐이므로 나머지 두 왕자는 일찍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일찍죽은 두 왕자는 휘숙옹주, 경숙옹주보다는 나이가 적은것이 확실하고 경숙옹주가 1483년 생, 휘정옹주가 1489년 생, 무산군이 1490년 생인 것으로 볼 때, 나머지 두 아들은 1484년~1488년과 1491년~1494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는 1486년 생인 이견석의 생년과 겹치고 성종 사망당시 같은 1486년 생인 정순옹주 또한 작호를 받기 전이었음으로 이견석의 군(君)작호가 없는거에 대한 설명이 된다.[17] (중략) 숙용(淑容) 정씨(鄭氏)는 2남 1녀를 낳았고 (중략) - 《성종실록》성종 14년 6월 12일 계유 1번째기사[18] 막내 정혜옹주는 성종 21년(1490년)에 태어났다.[D] 1483년 6월 12일 이전에 태어난 성종의 옹주들은 혜숙옹주(숙의 홍씨 소생), 숙신옹주(생모 미상 소생), 휘숙옹주(명빈 김씨 소생/당시 궁인 김씨), 공신옹주(귀인 엄씨 소생), 경순옹주(숙용 심씨 소생) 이 5명인데 실록의 기록과 대조해보면 숙의 김씨와 숙용 정씨(훗날 귀인 정씨)만 남으므로 숙신옹주의 생모는 이 두 후궁 중 한명으로 추측된다.[20] 생년은 알 수 없으나 안양군이 1480년 1월 생, 봉안군이 1482년 9월 생인데 이 왕녀는 1483년 6월에 생존해있다는 것으로 보아 봉안군의 누나인 것은 확실하고 안양군의 동생인지 누나인지는 확실치않다.[21] 한경침에게 하가하는데 한경침은 한명회의 손자이다. 성종에게는 사위인 동시에 처남의 아들, 처조카이기도 하다.[22] (중략) 숙의(淑儀) 김씨(金氏)는 1녀를 낳았고 (중략) - 《성종실록》성종 14년 6월 12일 계유 1번째기사[D] [24] 경순옹주는 남경의 아들 남치운에게 하가하는데 남치원은 휘정옹주의 부군인 남섭원과 사촌간이다.[25] 숙원 권씨(權氏)가 1남 1녀를 탄생하였는데, 모두 어리다. - 《성종대왕묘지문》[E] 또 다른 생모 후보로는 숙용 권씨도 있다. 성종25년 12월 24일 기록에 따르면 숙용 권씨는 1남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라고 되어있다. 숙용 권씨의 자녀 중 작호를 받은 이는 경휘옹주 밖에 없음으로 권씨의 아들은 일찍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성종의 서출자녀 중 성종 생년에 1483년 생인 경숙옹주까지만 작호를 받은것으로 확인이 되었다. 그럼 경휘옹주가 1489년 생이므로 숙용 권씨의 왕자가 경휘옹주의 오빠라면 1484년~1488년에,(1483년 6월 12일에는 권씨가 자식을 낳았다는 기록이 없다.) 남동생이라면 1490년~1494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는 1486년 생인 이견석의 생년과 겹치고 성종 사망당시 같은 1486년 생인 정순옹주 또한 작호를 받기 전이었음으로 이견석의 군(君)작호가 없는거에 대한 설명이 된다.[27] 왕자(王子) 이효신(李孝信)이 졸(卒)하였다. 태어난 지 겨우 다섯 달이므로, 3일만에 장사하고 관곽(棺槨)을 쓰지 말고 제사에 흰 떡을 쓰고 1백일 만에 그치라고 명하였다. - 《성종실록》 55권, 성종 6년(1475년 명 성화(成化) 11년) 5월 20일 무진 4번째기사[28] 연산군이 성종의 맏이인것으로 보아 연산군보다 더 일찍 태어난 이효신 역시 폐비 윤씨의 아들일 것으로 추측된다. 이효신을 원자(元子)나 대군(大君)이 아닌 왕자(王子)로 칭하는 것을 보아 사망할 당시 서출왕자임을 알 수 있고 폐비 윤씨가 1473년 3월 19일(19살)에 후궁이 되었고 1476년 8월 9일(22살)에 왕비가 되어 같은 해 11월 7일에 연산군을 낳았음으로 1474년 12월에 태어난 이효신을 낳았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29] 서울시 서대문구 증산동에서 출토된 王女阿只氏胎室(왕녀아지씨태실)에 成化十二年六月初八日入石(성화12년(1476년)6월 초8일에 세웠다)라고 적혀있다. 1746년 6월 초8일 이전에 태어난 왕녀로 성종의 장녀로 알려진 혜숙옹주보다도 2년 이상 빨리 태어난 것은 물론 같은 해 11월에 태어난 연산군보다 더 일찍 태어났다.[30]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효자동에서 출토된 王女胎室(왕녀태실)에 成化十三年九月入石(성화13년(1477년)9월에 세웠다)라고 적혀있다. 1477년 9월 이전에 태어난 왕녀로 성종의 장녀로 알려진 혜숙옹주보다도 1년 이상 빨리 태어났다.[31] 숙신 옹주(淑愼翁主)가 졸(卒)하였다. 임금의 딸인데 나이가 어려서 출가하지 않았었다. - 《성종실록》, 성종 18년 8월 20일 정해 5번째기사[32] 숙신옹주(淑愼翁主)가 졸(卒)하였는데, 나이 12세이다. 임금이 나이가 어린 것 때문에 내수사(內需司)로 하여금 염습(斂襲)하고 빈소(殯所)하는 일을 맡게 하였다. - 《성종실록》, 성종 20년 11월 8일 임술 5번째기사[33] (중략) 숙의(淑儀) 김씨(金氏)는 1녀를 낳았고, 엄씨(嚴氏)도 1녀를 낳았고, 숙용(淑容) 정씨(鄭氏)는 2남 1녀를 낳았고, 숙원(淑媛) 홍씨(洪氏)는 3남 1녀를 낳았고, 궁인(宮人) 하씨(河氏)는 1남을 낳았고, 김씨(金氏)는 1녀를 낳았고, 심씨(沈氏)도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중략) - 《성종실록》성종 14년 6월 12일 계유 1번째기사[D] [35]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원당리에서 출토된 2개의 王女胎室(왕녀태실) 중 하나는 공신옹주의 것이지만 成化十七年七月二十一日入石(성화17년(1481년)7월 21일에 세웠다.)라고 적혀있는 태실의 주인은 밝혀지지 않았다.[F]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화봉리에서 출토된 2개의 王女胎室(왕녀태실)에 成化十七年十月初九日立石(성화17년(1481년)10월 초9일에 세웠다)라고 적혀있는데 태실의 주인이 밝혀지지 않았다.[F] [38] 성화 22년(1486년) 12월 초6일 해시에 태어난 왕자 견석의 태실을 성화 23년(1487년) 4월 초7일 조성 - 《울진삼달리태실》[C] [E] [41] 성종의 피를 이어 받은 아들들인 연산군중종장신이었다.[42] 이성계 또한 180cm의 장신으로 키가 정확하게 기록된 조선의 역대 국왕들 중 최장신이었던 사람이다.[43] 만약 군주가 되지 않았더라면 친형 월산대군이나 작은할아버지 안평대군처럼 예술인으로 명성을 떨쳤을 듯 하다.[44] 일찍 요절하여 작호를 받지 못한 자녀와 최종 가계에서 누락된 숙신옹주를 합하면 19남 15녀이다.[45] 사실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다. 원래 묘호는 군주 사후에 그의 업적을 기려서 지어올리는 이름이므로 묘호가 같다는 것은 군주에 대한 평가에 유사성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46] 고려에선 자신의 뒤를 이은 조카 목종의 모친 천추태후와 그녀의 최측근 김치양, 조선에선 아들 연산군에 의해 나라가 어지러워졌다. 다만 고려는 현종 이후 다시 부활의 길을 걸으면서 100년 동안 태평성대를 유지하며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조선은 연산군 이후에도 한동안 침체기와 암흑기를 전전했다는 것이 차이점이다.[47] 쇼군이 보낸 사절이 아니고 이세의 태수인 '정친'이 보낸 사절이다. 그러나 당시 이세노카미는 따로 있어 '정친'이 대체 누구를 말하는지 알 수가 없다. 유력해보이는 건 당시 무로마치 막부 만도코로(政所)의 집사이자 이세노카미였던 이세 사다치카(貞親)가 아닌가 싶은데 한자 표기가 다르다.[48] 이를 모티브로 지어진 대체역사물이 바로 짐승조선이다.[49] 성종과 정현왕후가 묻힌 선릉 안에는 시신이 없다. 즉, 가묘(假墓) 상태이다.[50] 아이러니하게도 성종과 중종 모두 생전에는 어진이 그려지지 않았다가 사후에야 어진이 그러졌다.[51]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양녕대군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