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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반정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시대의 성공한 반정
무인정사 계유정난 중종반정 인조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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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반정 · 정릉 · 중종 시기의 괴수 출현 소동 · 중종실록 · 대전후속록
중종반정
中宗反正
<colbgcolor=#C00D45,#600823><colcolor=white> 시기 1506년 9월 2일 (음력)[1]
장소 조선 한성부 창덕궁 및 인근
원인 연산군의 폭정 (갑자사화, 채홍사 등)
교전 세력 <rowcolor=#C00D45,white> 조선 조정
(진압군)
반정 세력
(반란군)
주요 인물
지휘관

연산군 (국왕)
지휘관

성희안 (이조참판)
박원종 (중추부지사)
류순정 (이조판서)
참가자

중전 신씨
신수근[2]
신수겸[3]
신수영[4]
임사홍[5]
참가자

진성대군[6]
자순왕대비 윤씨
장정[7]
박영문[8]
홍경주[9]
병력 불명 불명
피해 불명 불명
결과 반란군의 승리
- 연산군 폐위 및 진성대군 즉위(중종)
- 임사홍 등 親연산군세력 제거
영향 연산군 폐위 및 유배[10]
중종 즉위
1. 개요2. 전개3. 의의와 영향4. 중국의 기록5. 중종반정을 다룬 사극들

[clearfix]

1. 개요

"지금 위에서 임금의 도리를 잃어 정령(政令)이 혼란하고, 민생은 도탄에서 고생하며, 종사(宗社)는 위태롭기가 철류(綴旒)와 같으므로, 신 등은 자나깨나 근심이 되어 어찌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진성대군(중종)은 대소 신민(臣民)의 촉망을 받은 지 이미 오래이므로, 이제 추대하여 종사의 계책을 삼고자 감히 대비(정현왕후)의 분부를 여쭙니다."
중종실록 1권, 중종 1년(1506) 9월 2일 무인 1번째 기사[11]

중종반정()은 1506년(연산군 12) 음력 9월 2일(양력 9월 18일) 당시 폭정의 극을 달리던 조선 제10대 국왕 연산군을 몰아내고, 그의 이복동생인 중종을 옹립한 사건이다. 제3대 왕인 태종1차 왕자의 난2차 왕자의 난이나 제7대 왕 세조계유정난, 제16대 왕 인조인조반정과 달리 새로 집권한 왕이 직접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다.

유순정, 성희안, 박원종, 유자광, 유순 등을 비롯하여 왕에게 불만을 품은 인물들이 연합해 일어난 반정이다.

2. 전개

실록의 기록

무오사화 때만 해도 훈구파는 비교적 단일한 정치세력으로 왕과 결탁하여 사림파를 몰아내었다.

무오사화 이후 왕의 씀씀이가 커지고 국가재정이 살짝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국정운영은 정상적으로 했고, 백성들의 삶도 아직 성종 때와는 별 차이가 없었다.

훈구파는 신수근, 임사홍 등을 중심으로 하는 궁중파와 유자광 등을 중심으로 하는 부중파로 나뉘었다. 갑자사화 때 훈구파는 물론 사림파도 대거 화를 입었다. 그러나 왕과의 혈연 등으로 맺어진 궁중파는 소수였고 부중파가 다수였다. 궁중파는 왕에게 아부하며 빌붙어 그의 은총을 믿고 많은 전횡을 일삼았지만 이는 극소수였고 사림파는 물론이고 훈구파의 다수인 부중파는 폭군인 연산군에게 등을 돌렸다.

왕은 사치와 사냥을 일삼고 유희에 빠지며 국정에 태만하고 재정이 급속히 악화되었으며 사치성 사업에 따른 세금과 공납 증가로 인해 백성들의 삶이 급속히 도탄에 빠졌다. 거디다 툭하면 대신들을 숙청하는 등 반정이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었다. 신료들은 본인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제일 중요한 문제는 왕의 사치와 폭정으로 얼룩진 나라를 다시 회복시키려면 반정에 가담해야 했다. 반정이 일어나자 상당수의 부궁파들이 슬쩍 반정에 가담했다.

연산군일기를 보면 반정 며칠 전 왕이 후궁들과 놀다가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숙용 전씨와 숙용 장씨(장녹수)에게 "지금 태평한 지 오래이니 어찌 불의에 변이 있겠느냐마는, 만약 변고가 있게 되면 너희들은 반드시 면하지 못하리라." 하고 물건을 하사했다고 하는데 왕 본인도 반정이 일어나리라 미리 예측하였다.

이조참판이었던 성희안은 풍자시로 간언했다가 한번에 종9품 부사용으로 좌천되자 박원종을 끌어들여 반정을 모의했다.

박원종의 거사 동기를 누이인 월산대군[12] 부인 박씨(승평부대부인)가 왕한테 겁탈당했기 때문이라고 아는 경우가 많은데, 이 이야기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왕은 박씨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는 박원종을 보내 간호하게 했는데, 만약 정말로 간통 내지는 강간이 있었다면, 왕이 일부러 그 사람의 남동생을 보내 간호를 시킬 리가 만무하다. 박씨가 임신 당하여 수치심에 자살했단 이야기도 근거는 없다. 이 임신 이야기의 근거도 연산군일기를 쓴 사관이 실록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이러한 소문이 있었다고 언급한 수준이다. 실록을 보면 왕이 박씨에게 세자의 보육을 맡기고 곡식이나 포목과 같은 물품을 자주 하사하는 등 박씨에게 상당한 호감을 나타낸 것은 사실이지만, 단순히 백모로 많이 존대하는 수준에 가까웠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당시 사망당시 박씨의 나이는 51세에, 자신의 직손이 아닐지라도 이미 손자를 세명[13]이나 두고 있던 할머니였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보면 과연 박씨가 임신을 할 수 있는 몸이었을지조차 불확실하다.

박원종이 반정에 참여한 실제 이유는, 왕과의 알력 때문이었다. 당시 박원종은 왕에게 유일하게 바른 말을 할 수 있었다. 또한 박원종의 집안도 상당한 명문가였다. 박원종의 증조할아버지인 박석명은 태종 시절 총애를 받았던 문신이었고, 박원종의 할머니 심씨는 세종왕비소헌왕후의 여동생이었다. 아버지 박중선은 세조의 눈에 띄어 세조부터 성종 대까지 연간 병조의 사무를 처리한 권력자였다. 사실상 당시 가장 유력한 외척 중 한 명이 박원종이었던 것. 위에 나온 박씨에 대한 호감도 박원종의 총애로 이어졌다. 박원종이 왕에게 간언을 해도, 왕은 약간의 불평을 했을 뿐 그를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벼슬을 올려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왕은 점점 날이 갈수록 폭정이 심해지고 패악을 부리게 되며, 왕이 박원종 본인을 포함한 우호적인 관계자들까지 건드려 협박을 가하고 짜증을 내기 시작해, 박원종을 포함한 신료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우려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고로 위협을 느끼게 된 박원종이 이대로 계속 버티다가는 죽을 위기에 처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먼저 선수를 쳤다고 해석하는 게 더 옳다.

반정에 부중파가 다수 참여하거나, 참여하지 않아도 간접적으로 지지했으므로 반정 이후 소수의 궁중파를 제외한 나머지 대다수 훈구파가 그대로 정권을 잡았다. 이는 부중파였으며 연산군 시대 중신이었던 유자광이 반정 1등 공신이 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신수근과 동생인 신수겸과 신수영, 그리고 임사홍은 거사가 시작되자마자 바로 제거당했다. 사람을 각자의 집에 보낸 다음 궁에서 부른다는 핑계로 꾀어내 전부 참살했다.

반정 3공신인 유순정, 성희안이 김종직의 직계이므로 사림 역시 자리를 차지하였다. 훈구파와 사림파는 혈연이나 학연관계에서 딱 떨어지는 개념이 아니다. 사림이 훈구가 되고, 훈구의 자제가 사림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조광조인데, 5대조가 조선 개국공신 중 한 명인 훈구 공신 조온이다.[14]

의외로 반정 당시 왕은 도주하거나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결과를 받아 들였다. 궁을 장악한 반정 세력이 옥새를 요구하자 "내 죄가 중하여 이리 될 줄 알았다. 좋을 대로 하여라." 라며 순순히 내주었고, 교동에 유배될 때도 띠를 두르지 않은 점잖은 차림새로 나와 "내가 죄가 큰데 상(중종)의 덕을 입어 무사히 간다." 라며 가마에 올랐다고 실록에 나와 있다. 이 전후에도 왕이 자신의 행위를 변명하거나 저항한 기록은 없다.

3. 의의와 영향

중종반정은 조선 왕조 최초로 순전히 신하들이 주도하여 을 몰아낸 반정이다. 이전의 태종세조, 훗날의 인조도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왕족이 반정을 주도했다. 반면 중종은 가만히 있다가 신하들에 의해서 옹립되었다. 중종은 선왕의 적자이다.

왕을 끌어내림은 유교 정신을 논할 것도 없이 어느 나라든 엄청난 부담이 따르는 시도임에도 반정이 큰 위기없이 성공한 이유는 간단하다. 여타 폭군들이 자기 편은 확실히 챙기는 것과 달리 연산군은 그냥 미친 사람이 왕을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왕 본인조차 자신의 행태가 비정상적임을 알고도 신하들을 회유하거나 방비를 강화하는 움직임을 일절 보이지 않고 끝까지 향락에만 몰두하다 반정날 순순히 체포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당시의 연산군은 자기통제를 완전히 잃고 누가 자신을 폐위시켜주길 기다리는 꼴이었다.

연려실기술에서 중종반정을 기록한 부분을 보면 반정이 일어난 날에야 비로소 반정군에 참여하여 살아남은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다. 당시 왕과 극소수의 최측근을 제외한 조정의 신하들 사이에 '이 자식 안 되겠어 빨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분위기가 퍼져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왕과 극소수의 최측근만 제거당하고 대부분의 부패한 인물들이 그대로 남게 되었다는 문제도 있었다. 그래도 의외로 이들은 권신치곤 빨리 사라졌다. 유자광의 경우 무오사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과거 때문에[15] 중종 2년에 축출되어 귀양지에서 71세로 사망하였다. 유자광의 아들 두 명은 왕의 배려로 유자광의 사후 공신의 지위를 회복하였고 예를 갖추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이후 반정을 이끈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3대신이 중종 5년, 7년, 8년에 줄줄이 죽으면서 왕은 조광조를 비롯해 사림에 힘을 실어줄 수 있었다.

반정이 일어났어도 백성의 삶에 큰 변화가 없었다. 금표를 철폐했는데 왕이 금표로 빼앗은 땅의 대부분 주인은 대신이나 대간들이었다. 왕이 유흥 비용 마련을 위해 내수사를 과세 기관으로 초법적, 비공식적으로 운영하던 것을 중종 시기에 공식 기관으로 인정하였다. 불교 탄압도 그대로 이어졌다.이건 뭐 개국 초부터 하던거고...

연산군 시기에 백성에게 가장 큰 부담이 되었던 것은 공물이었다. 본래 토지세인 전세와 개인 현물세인 공물, 노동력 제공인 역으로 이루어져 있는 세금체계에서 가장 비중이 높았던 것은 전세였다. 그런데 연산군 시기 사치스런 생활을 위해 공물의 양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백성의 부담이 크게 늘었다. 무엇보다 공물은 재산의 다과라 할 수 있는 토지와 관계없이 개인당 부과되는 인두세 같은 개념이었기 때문에 빈한한 계층일수록 공물에 부담이 컸다.

공물 문제를 해결해야 했지만 반정 이후로도 이러한 공물 과다 수취는 개선되지 않았다. 늘어난 재정에 따라 이미 사용처가 만들어진 상황에서 다시 없애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이를 바꾸기 위해서는 공물 대신 전세의 비중을 높여야 했고, 조광조가 공안개정을 주장했지만 기묘사화로 실권하면서 현실화되지 못했다.[16]

공물 과다 수취는 세조 때 보법을 실시하여 군역부담 증가로 붕괴하고 있던 양인층에 결정타를 먹였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서 양인의 몰락이 가속화되었고, 임진왜란 이후 공물 수취의 모순이 대동법을 통해서 해결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중종도 초반에 노회한 반정공신들에게 밀려서 제 목소리를 못 냈다. 즉위했을 때 그는 열아홉 살이었다. 반정에 참여했던 채수는 자신의 소설 설공찬전에서 공신들을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반정을 주전충에 빗대어 비난하는 바람에 왕을 모욕했다 하여 큰 논란이 되었다. 공신 문제는 이후 조광조의 위훈 삭제 시도와 기묘사화로도 이어진다.

반정 도중에 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의 장인이었던 신수근이 살해된 것과 단경왕후의 폐위도 반정의 의의를 깎아먹었다. 왕의 조강지처를 반정공신들이 강제로 내쫓았기 때문.[17] 그래서 반정공신들 3인방은 배향공신에서 파내자는 상소가 순조 때까지 올라왔다. 심지어 이 3인방도 폭군을 몰아낸 충신(?)치고 대부분 행적이 나빠서 성희안만 빼면 욕을 먹고 그나마 성희안만 안 먹지만 그도 자기 친인척을 공신에 슬쩍 끼워넣은 일이 있다.

그리고 일본 센고쿠 시대의 오우치 가문와 몇몇 다이묘 가문들에게는 조선에서 무역을 통제하기 시작하며 이익이 줄어들게 된다. 이에 오우치 요시오키는 자신이 백제 왕의 후손임을 내세워[18] 특혜를 받으려 했으나 실패한다. 이는 삼포왜란, 닝보의 난으로 계기로 센고쿠의 오우치 가문이 몰락하게 되는 시발점이 된다.

4. 중국의 기록

명사에서 정덕 2년 12월 9일에 보고가 올라온다.
내용은 이렇다.출처
정덕(正德) 2년 융(㦕)(연산군)이 세자 고(𩔇)가 어린 나이로 죽은 것을 몹시 슬퍼하다가 병을 얻었으므로[19] 국사를 아우인 이역(李懌)(중종)에게 넘겨주겠다고 주청해 왔고, 그 나라 사람들 역시 이역을 왕으로 봉하여 주기를 주청해 왔다.

예부에서 이를 의논하여 역에게 국사만을 맡게 하고, 융이 졸하기를 기다렸다가 국왕으로 봉해주기로 하였다. 앞서 배신(陪臣)[20] 노공필(盧公弼) 등이 조공하기 위해 수도[경사(京師)]에 와서 역을 봉해주기를 거듭 주청하였었는데 조정의 의논으로 윤허하지 않은 적이 있었다. 12월에 융의 대비(정현왕후)가 역은 나이도 들었고 현명하니 중임을 맡겨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주하였다.

이에 예부에서, “융은 고질병으로 왕위를 사퇴하였고, 역은 친동생으로서 왕위를 물려받은 것이 이미 명백한 사실이니, 우애를 지키지 못한 것도 아닙니다. 그 나라의 모든 신민들도 한결같이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그들의 청원대로 따르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상주하였다. 황제는 이에 융의 선위를 윤허하고, 내관을 파견하여 국왕 책봉의 칙명과 아울러 그 비 윤씨(장경왕후)의 고명을 내렸다.
명사》 권320, 열전제208 外國一 朝鮮

5. 중종반정을 다룬 사극들

연산군 ~ 중종 시대가 워낙 사극의 배경으로 많이 쓰이는 시기라서, 사극에서도 자주 나오는 사건이다. 연산군이나 그 측근이 주인공일 경우 사극의 대미를 장식하는 엔딩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고, 중종 시대의 인물이 주인공일 경우[21] 사극의 도입부(오프닝)로 나오곤 한다. 즉 사극에서는 누가 드라마의 주역이냐에 따라 사극의 오프닝 아니면 엔딩으로 쓰이는 사건.

[1] 양력으로는 연산군12년, 1506년 9월 28일이다.[2] 익창부원군. 연산군의 처남. 중종의 장인. 최종관직은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 춘추관 관상감사.[3] 개성부유수[4] 정헌대부 겸 오위도총부도총관[5] 채홍사[6] 반란으로 왕이 된 다른 인물들과는 다르게 본인은 가만히 있다가 마지막에 새로운 왕으로써 추대 받으며 합류하기에 가장 중요한 인물이면서도 가장 마지막에 합류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7] 전 수원부사[8] 군기시첨정[9] 사복시첨정[10] 이후 연산군은 유배 두 달만에 질병에 걸려서 강화도(유배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11] 중종실록의 첫 기사이다.[12] 왕의 큰아버지[13] 파림군 이주, 계림군 이유, 전성부정 이리[14] 굳이 따지면 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학맥은 김종직의 직계는 아니다. 김종직이 사장(글쓰기)을 경학보다 중시한다고 김굉필이 김종직을 떠났기 때문이다.[15] 사실 이건 부스터에 지나지 않고 시작은 창녕, 고성의 수령이 대간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는데 이때 내려진 구언의 전교에 유자광이 이 두 수령을 변호하자 이에 대간이 반격한 것이 시작이었다. 뭐, 애초에 유자광은 진작에 찍혀있었긴 했지만 어쨌든 그게 계기는 아니었다.[16] 물론 공안개정이 실현되었다 하더라도, 당시의 미약한 시장 경제의 발달 수준, 공납을 상당부분 대신할만큼 토지 생산력이 뒷받침되었는지 여부를 고려할 때 실패할 정책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17] 별거 아닌것 같지만 기본적으로 조강지처를 내쫓는 건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악마 비스무리하게 취급된다. 그걸 또 강제로 내쫓았으니...[18] 족보상 임성태자의 후손이었다.[19] 이건 반정세력이 연산군을 몰아낸 이유를 만들기 위해 둘러댄 것이다. 세자를 죽인 것은 반정 공신들이다.[20] 신하의 신하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조선의 신하를 가리키는 말. 당시 공식적으로는 조선 국왕이 명 황제의 신하이므로, 조선의 신하는 명 입장에서는 명 황제 신하의 신하, 즉 배신이다.[21] 사실 중종 치세가 사극의 배경으로 많이 다뤄지나 중종 본인이 사극의 주인공으로 나온 적은 없었으나, 7일의 왕비가 최초로 다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