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02:19:35

장녹수


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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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식 후궁 첩지가 있는 사람만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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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연산군의 후궁
숙용 장씨 | 淑容 張氏
출생 1470년
사망 1506년 9월 28일(음력 9월 2일)
(향년 36세)
한성부 군기시 앞
재위기간 조선 숙원
1503년 1월 3일 ~ 1504년 1월 21일
조선 숙용
1504년 1월 21일 ~ 1506년 9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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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본관 흥덕 장씨(興德 張氏)
녹수(綠水)
부모 아버지 장한필(張漢弼)
어머니 장한필의 측실[1]
부군 연산군
자녀 슬하 1녀
딸 - 이영수(李靈壽, 1502 ~ ?)
봉작 숙원(淑媛) → 숙용(淑容)
}}}}}}}}} ||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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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연산군후궁.

아버지는 문의현[2]령을 지낸 장한필(張漢弼)이고 어머니는 장한필의 첩이다. 동복언니의 이름은 장복수(張福壽)로 연산군에 의해 면천되기 전까지 내수사 여종이었다.[3] 그러므로 장녹수의 어머니는 천첩이며 일천즉천(一賤則賤)의 원칙에 따라서 장녹수도 천민의 신분이다.[4]

2. 생애

장녹수를 두고 《연산군일기》에서는 본래 제안대군의 가비(家婢)였다고 썼다. 처음에는 집이 매우 가난하여 몸을 팔아서 생활하고 혼인도 여러 번 하였다. 그러다가 제안대군이 부리는 가노(家奴)의 아내가 되어서 아들 하나를 낳고 노래을 배워서 창기(娼妓)가 되었다. 따라서 유부녀에 연산군보다 연상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반적인 대중의 생각과 달리 외모는 평범하여 미인은 아니었다. 대신 엄청난 동안으로 30대에 16세 소녀로 보였으며 연산군이 원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비위를 잘 맞추는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결국 연산군의 최측근이 된 비결은 용모가 아닌 그녀의 언행과 교태였다.[5] 연산에게 반말과 조롱, 하대까지 하였으나 이도 장녹수가 연산의 기분을 알고 한 교태였으므로 연산은 화를 내기는커녕 맞춰주며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고 한다. 노래 실력이 출중해서 연산군이 궁중으로 불러 들였다고 한다.
노래를 잘해서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도 소리가 맑아서 들을 만하였으며, 나이는 30여 세였는데도 얼굴은 16세의 아이와 같았다.······얼굴은 보통을 넘지 못했으나, 남모르는 교사(巧詐)와 요사스러운 아양은 견줄 사람이 없었다.······왕을 조롱하기를 마치 어린아이같이 하였고, 왕에게 욕하기를 마치 노예처럼 하였다.
연산군일기》 연산군 8년 11월 25일

궁중으로 간 장녹수는 애교와 말재주로 연산군의 환심을 받게 되었고 나중에가면 후궁이 되었다. 1503년(연산군 9) 12월 종3품 숙용(淑容)으로 품계가 올랐다. 1504년 3월 연산군은 무명 5백 필을 그녀의 집에 하사하는가 하면 그녀의 집이 여염집 사이에 있어 화재가 나면 위험하다는 이유로 주변의 집을 헐어버리고 새로 지어주었다.

장녹수의 형부인 김효손(金孝孫)은 사정(司正)[6]에 제수되었다가 함경도 전향별감(傳香別監)[7]이 되어서 집안이 크게 부귀영화를 누렸다.

당시 장녹수가 누렸을 권세를 짐작케할수 있는 일화들이 있다.

장녹수가 궁녀 수근비(水斤非)와 전향(田香)을 참소하여 왕이 죽이라고 명을 내리자 조정에서 반대하는 여론이 없었다.[8] 그들은 한때 연산군의 승은을 입은 궁녀였지만 장녹수가 그들을 질투하여 연산군에게 참소하자 머리가 잘려 효수되고 손과 발은 하나씩 잘려 사방에 전시되는 등 참혹한 최후를 맞았다. 마찬가지로 기생 옥지화(玉池花)도 장녹수의 치마를 밟았다가 참형에 처해졌는데 역시 조정 대신들은 반발없이 그대로 따랐다.[9]

1504년, 동지중추부사 이병정이 자신의 노비에게 꾸지람을 한 일을 빌미삼아 그를 감옥에 보냈고, 이병정은 가산을 털어 장녹수에게 뇌물을 바친 후에야 풀려났다. 하지만 이후에도 이병정은 장녹수에게 몇 번이나 더 뇌물을 바쳐야 했다.

1505년 12월에는 장녹수의 치마를 밟았다는 이유로 하급 기생인 운평(運平)에 속하는 옥지화(玉池花)를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취홍원(聚紅院), 뇌영원(蕾英院)에 돌려 보이고, 연방원(聯芳院)에 효시(梟示)하기도 하였다.

1506년 1월에는 내수사의 여종이었던 언니 장복수(張福壽)와 조카들을 면천해 양인(良人)의 신분으로 올렸다.

1506년(중종 1) 결국 중종반정이 일어나 장녹수는 전비, 김귀비 등과 함께 군기시 앞[10]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이 때 분노한 군중들이 그들의 성기에 기왓장과 돌멩이를 던지면서 "일국의 고혈이 여기에서 탕진됐다"고 외쳤다. 돌무더기가 산을 이뤘다는데 이후에 시신 처리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슬하에 이영수라는 1명[11]이 있었는데 왕위 계승권이 없는 딸이어서 폐세자 이고처럼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다. 《중종실록》에 따르면 1518년(중종 13)에도 살아있었고 집, 노비, 약간의 토지를 하사받았다.[12] 그리고 1529년(중종 24)에는 권한에게 은밀히 시집을 간 일이 알려진 것을 보면 이 때도 생존해있던 것으로 보인다.[13]

3. 대중매체에서

버라이어티한 시대를 한층 드라마틱하게 만든 인물로 연산군을 다루는 사극에서는 대부분 등장할뿐 아니라 주인공으로 직접 나온 적도 있다. 캐릭터의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 연산군의 정실 부인인 폐비 신씨조차 제치고 아내처럼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는 엄연히 고증오류로 볼 수 있는 부분으로, 연산군은 정실 부인인 신씨한테서 가장 많은 자식을 두었고, 후궁한테서는 그리 많은 자식을 두지 않았다. 연산군이 문란한 생활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연산군이 가장 사랑했던 여인은 변함없이 중전이었다. 임기 후반에 대놓고 맛이 간 폭군이 되었음에도 신씨 앞에서는 평정심을 유지했으며, 죽기 직전에도 중전이 보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14] 장녹수의 최후를 실록 그대로 그려낸 사극은 존재하지 않는다.[15] 사극에서는 대부분 연산군 배우보다 성숙한 외모인 미녀 배우가 맡는다.[16]

3.1. 소설

  • <숨덕부>의 저자인 오버정우기가 정사와 야사와 작가의 상상력을 더해서 장녹수의 삶을 <녹수별곡>이라는 제목으로 그려냈다.
  • 슈타인호프대체역사소설 <명군이 되어보세!>에서는 연산군에 빙의한 현대인 주인공이 장녹수와 엮이면 안 좋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냥 초대가수 형식으로 잔치 때 불러서 가무를 감상하기만 하지 궁에 들이거나 가까워지지는 않는다. 장녹수는 연산군을 유혹해보려고는 하나 안되자 재위 9년차 쯤에는 거의 포기한다. 그래도 여기서는 주인공이 빙의한 덕에 연산군이 폭군이 아닌 명군 무종으로 생을 마쳤고 장녹수도 왕과 특별히 얽힌 점이 없었기 때문에 무종 사후에도 큰 기복없이 유명한 가수로 살다가 천수를 누리고 갔을 듯. 외모가 조선 전기 기준으로 평범한거지 현대인인 주인공이 보기에는 딱 K-POP 걸그룹 센터같은 미모였다고 묘사된다.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에서는 주인공에 의해 연산군이 중전과 가까워지자 이를 시기해 염매를 시도하다 장씨 집안의 죄가 다 드러나면서 장복수와 장복수의 남편은 물론 관련자들이 처벌을 받는건 동일하다. 원작에서는 죄를 인정하지 않고 발악하다 거열형에 처해지는 비참한 결말을 맞았는데 웹툰판에서는 일단 죄는 인정했으며 처형 방식도 참수형이었다가 집행 직전 폐서인 및 유배형으로 감형되어 일단 목숨은 건진다. 여기서는 장녹수가 연산군 어머니의 빈 자리를 채워주는 여자로 묘사된다.

3.2. 드라마

  • 2017년 MBC 드라마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에서는 배우 이하늬가 연기했다. 배우 본인의 장기를 살려서 국악 솜씨를 잘 보여주었던 덕분에[17] 실제 장녹수에 관하여 기록된 모습들이 극 중에서 구현되었으며 백성들의 돌에 맞아 죽는 것으로 나온다.

3.3. 영화

  • 1972년 개봉한 영화 《사모곡》에서는 배우 윤정희가 연기했다. 너무 순해 보인다는 평을 들었다.
  • 2005년 개봉한 영화 《왕의 남자》에서는 배우 강성연이 연기했다. 기자 간담회에서 이준익 감독이 "연산군을 홀린 여자이니 요염하게 등장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영화 중간중간마다 요부같은 연기를 잘했다는 호평이 있었다.
  • 2015년 개봉한 영화 《간신》에서는 배우 차지연이 연기했다. 극 중 창소리를 곁들인 나레이션도 이 사람. 영화 자체는 흥하지 못했지만 차지연의 연륜 있는 연기는 호평받았다.

3.4. 노래

  • KBS 드라마 <장녹수>의 OST. 작사 박성훈, 작곡 임택수, 노래 전미경. 한국 드라마 사상 가장 큰 인기를 누린 주제가 중 하나일 것이다. 드라마 방영 시 미칠듯한 인기를 누렸으며 지금까지도 노래방 인기가요 리스트 등에 이름을 올릴 정도이다. 드라마를 본 적이 없거나 해당 드라마를 아예 모르는 사람이라도 웬만하면 이 노래는 알고 있거나 최소한 어디서 제목은 몰라도 노래 자체는 들어보기는 했을 것이다. 애절하면서도 전통적인 멜로디 덕인지 색소폰 연주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곡이다.

3.4.1. 가사

가는 세월 바람 타고 흘러가는 저 구름아
수많은 사연 담아 가는 곳이 어드메냐
구중 궁궐 처마 끝에 한맺힌 매듭 엮어
눈물강 건너서 높은 뜻 걸었더니
부귀도 영화도 구름인 양 간 곳 없고
어이타 녹수는 청산에 홀로 우는가

한조각 구름따라 떠도는 저 달님아
한많은 사연담아 네 숨은곳 어드메냐
곤룡포 한 자락에 구곡간장 애태우며
안개강 건너서 높은 뜻 기웠더니
부귀도 영화도 꿈인 양 간 곳 없고
어이타 녹수는 청산에 홀로 우는가
[1] 천민 출신.[2]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3] 연산군일기 61권, 연산 12년 1월 14일 갑오 5번째기사. #[4] 부모 중 한쪽이 천민이면 그 자식 역시 천민이 된다.[5] 이에 대해 연산군에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어머니에 대한 애정 갈구가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장녹수와 연산군을 다룬 작품에서는 장녹수가 연산군을 어린아이를 대하듯 달래주거나 연산군이 장녹수에게 어머니처럼 애정을 갈구하는 모습이 많이 나온다.[6] 5위(衛)에 속한 정7품 무관직.[7] 조선 시대에는 중요한 국가 의식과 제사를 거행할 때는 향을 피웠다. 그러나 왕이 지방까지 직접 가서 축문을 읽고 향을 피울 수 없었으므로 대신 제사를 맡는 관리에게 축문과 향을 전달할 역할이 필요했다. 조선 전기에는 주로 환관이 맡았고 성종 시기부터 주로 충찬위(忠贊尉)와 충의위(忠義衛)가 맡았다.[8] 연산군일기 54권, 연산 10년 6월 9일 무진 1번째기사. #[9] 연산군일기 60권, 연산 11년 11월 7일 무자 2번째기사. #[10] 지금의 서울특별시청 광장이 있는 지점.[11] 미디어에서는 장녹수가 연산군의 총애를 독점한 것처럼 비춰지지만 연산군이 정실인 폐비 신씨에게서 요절한 자식까지 포함해 총 7명의 자식을 낳았던 것과 대조된다.[12] 영수·함금에게 노비 15구와 가사 1좌 전지 15결을 하사하라고 명하다 -《중종실록》 31권, 중종 13년(1518년 명 정덕(正德) 13년) 1월 17일[13] (전략) "권한은 서자(庶子)로서 분수를 모르고 장 숙원(張淑媛)의 딸 【폐주(廢主)의 숙원 녹주(綠珠)가 폐주에게 굄을 받아 낳은 딸이다.】 에게 은밀히 장가들었으니 지극히 놀라운 일로, 본사(本司)가 추문하다가 형장 추문하기를 청하였습니다. (후략)- 《중종 24년(1529년) 6월 1일 갑자 2번째기사》[14] 애초에 임금인 연산군의 마음을 철저히 꿰뚫어 보고 반말이나 하대를 하는 등의 위험천만한 교태를 능수능란하게 할 정도로 남자를 잘 아는 장녹수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몰랐을 리가 없다.[15] 실제로는 정식 절차를 밟아 사형이 집행되고 시체가 거리에 전시된 이후에야 백성들이 몰려들어 돌을 던졌는데 살아있는 상태에서 돌맞아 죽는걸로 묘사되거나 반정군이 그 자리에서 척살해버리는 식으로 처리되는게 대부분이다.[16] 영화 <연산군>에서는 연산군 역의 배우가 장녹수 역의 배우보다 20세 이상 연상이었지만 드라마 <왕과 나>처럼 장녹수 역의 배우가 연산군 역 배우보다 연상인 경우도 있었다.[17] 실제로 이하늬는 가야금을 전공했다. 그간 가야금을 배웠는데 장녹수 배역을 위해 장구 수업을 받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