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2-23 14:44:31

제사


<keepall> 관혼상제

1. 개요2. 유래
2.1. 조상(祖上)2.2. 상제(上帝)2.3. 성현(聖賢)2.4. 혼백(魂魄)2.5. 효()
3. 절차4. 종류
4.1. 사시제(四時祭)
4.1.1. 절차
4.2. 차례(茶禮)4.3. 시조제(始祖祭), 선조제(先祖祭), 녜제(禰祭)4.4. 기제(忌祭)4.5. 묘제(墓祭) (묘사)4.6. 절충안
5. 형식
5.1. 차례와 기제사의 차이5.2. 음복5.3. 가문별, 지역별 특색5.4. 금기 음식5.5. 용어5.6. 온라인 차례상
6. 각국의 제사7. 사회적 의의8. 오해와 갈등9. 논란10. 폐해11. 제사에 대한 견해12.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경우13. 제삿밥14. 기타15. 관련 문서

1. 개요

제사()는 신이나 조상신 등 영적인 존재에게 제물을 바쳐 예를 표하는 의식이다. 넓게는 고대 종교의 신전 제의나 가톨릭미사 등도 포함되지만, 현대 한국어에서는 주로 조상을 기리는 유교식 제례를 의미한다.

한국에서 통용되는 유교식 제사는 일반적으로 '4대봉사'(四代奉祀)를 기준으로 한다. 이는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제주)의 4대조(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까지 제사를 지내는 관행을 말하며, 5대조부터는 사당에서 신위를 모시지 않고 묘소에서 묘사(墓祀)를 지내는 것이 원칙이다. 다만 공적이 큰 조상은 불천위로 지정되어 세대가 지나도 계속 제사를 지낸다.

서양권에서는 이를 일반적으로 Korean Ancestral Rites로 번역하거나, 고유어인 Jesa로 음역하기도 한다.

2.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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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조상(祖上)

제사의 유래는 중국 고대의 상나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상나라에서 말하는 상제(上帝)는 단일한 인격신이 아니라, 당시의 조상 숭배 전통에 바탕을 둔 조상령들의 총체적 권위로 이해된다. 즉, 상제는 왕실 조상들의 위엄과 신성을 집약한 존재로, 마치 조상령들의 전당이자 위원회와도 같은 성격을 지닌다. 상나라에서 보이는 갑골문과 제례의 구조는 이러한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며, 자연신과 조상령이 혼합된 상태에서 가장 상위의 신적 실체이자 질서로서 '상제'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처럼 초기 중국에서는 상제가 단일 신격이 아니라 조상령들이 모인 집합적 권위, 다시 말해 살아 있는 후손들에게 명을 내리는 '집단적이고 신성한 질서'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제 개념은 주나라가 상나라를 정복하면서, 상제의 상징이었던 '천(天)'이라는 표현이 보다 강조되어 추상화된다. 상기했듯이 주나라 왕실은 자신들의 통치 정당성을 '천명(天命)'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하면서, 이전 상제의 권위를 단절하지 않고 새로운 보편적 권위로 누적·통합하였다. 이 과정에서 상제의 권위는 보다 보편적이고 도덕적 질서로 확장되었다. 이때도 조상령들의 위원회적 성격은 사라지지 않고 이어졌으며, 주 왕실은 자신들의 시조와 선왕들이 천명(하늘의 명령)을 전달하거나 매개하는 존재로 인식했다. 이는 상나라의 '조상령의 총의 = 하늘(상제의 의지)'이라는 발상이, 주나라에 이르러 '조상령의 뜻 = 천의 명'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유교적 세계관은 천을 하나의 초월적 기준으로 도입하면서도, 그것을 여전히 조상령의 질서 속에서 읽어내고 의례적으로 존중하는 문화를 계승한 셈이다.

유교는 이후 역사에서 이 전통을 철학적·윤리적으로 지속적으로 정비하면서도, 하늘(천)이라는 초월적 질서가 조상령의 유업과 도덕을 통해 인간 사회에 반영된다는 관념을 유지하였다. 제례(祭禮)와 사당 중심의 예학은 바로 이러한 조상 중심 질서가 유교 내부에서 여전히 살아 있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제도다. 조상은 단지 경배 대상이 아니라, 하늘의 명을 함께 전하고 윤리적 도리를 인간 세계에 관철시키는 도덕적 중재자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유교는 상제 개념을 보다 추상화하고 도덕적으로 고양했을 뿐, 그 근간에는 여전히 조상령들의 권위와 그 총의로서의 '천' 개념이 중심에서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유교의 천은 인격신이 아닌 도덕적이고 초월적인 질서이지만, 그 밑바탕은 자연과 조상숭배가 결합된 고대 상제 개념에 닿아 있으며, 그 '하늘' 아래에서의 도덕과 철학체계란 조상령들의 집단적 권위를 윤리화하고 철학화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유교의 천 개념은 서양 종교철학의 개념과 구분되는 동아시아 고유의 조상 중심 종교성이 철학과 결합된 독특한 정신적 유산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2.2. 상제(上帝)

반면, 도교의 발전 방향이 여기서 유교와 구분된다. 도교는 이 상제 개념을 더욱 신격화하고 의인화하여, 대중들에게도 흔히 알려진 '옥황상제(玉皇上帝)'라는 독립적이고 인격화된 최고신으로 발전시킨다. 도교적 세계관에서 옥황상제는 유교와 달리 조상령의 총합이나 추상적 질서가 아니라, 천상계 전체를 통치하는 개별 주권자이며, 제국적 관료체계처럼 정비된 신계의 정점에 서 있는 실질적인 통치자이다. 이는 도교가 각지의 신화와 민간신앙을 적극 수용하고, 무수한 신격과 그 신격들 간의 관료적 위계의 세계를 형상화해낸 결과로, 천상의 정치질서를 지상 정치의 반영처럼 이해하는 특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유교와 도교는 상나라와 주나라에서 비롯된 '상제'라는 개념을 공유하지만, 그 발전 방향은 전혀 다르게 분화했다고 할 수 있다. 유교는 상제를 인격화하지 않고, 조상령들의 의지가 반영된 도덕적 질서이자, 통치 정당성의 초월적 원천으로서의 '천'으로 점진적으로 추상화시켰다. 반면 도교는 그 상제 개념을 신화적 상상력 속에서 강화하고, 정교한 신격 질서로 구체화하여 궁극적으로 '옥황상제'라는 절대적 인격신을 만들어낸 것이다. 흔히 유교의 제사를 옥황상제나 신령들에게 제사하는 도교의 제사로 오인하는 사람들이 많기에, 이를 명확히 구분해야 유교의 제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가능하다.

2.3. 성현(聖賢)

유교의 제사에서 다뤄지는 '혼백(魂魄)'은 본래 하나의 단어가 아니라, 사람의 기(氣)가 분리된 두 성분을 뜻하는 개념이다. 공자논어에서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는다"고 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적 존재나 미신을 멀리해야 한다고 말했으나, 이는 영혼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도덕과 예의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당대의 '민간신앙적 개념들'을 함부로 언급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드러낸 말이다. 실제로 공자는 천(天)의 존재를 명백히 믿었고, 제사를 통해 조상에게 예를 다하는 것을 인간 도리의 핵심으로 보았다. 그는 하늘이 자신을 알고 있으며, 자신의 사명은 하늘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자주 말했다. 즉, 공자에게 있어서 '천'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이전의 유교 전통과 마찬가지로 천상의 조상령들과 도덕 질서가 융합된 도덕적 권위의 근원이었다.

따라서 공자에게 유교의 제사는 조상과 소통하는 동아시아 우주론에 기반한 상징적 의례이자, 도덕적 실천의 핵심 행위였다. 동아시아 전통 세계관에서 인간은 기(氣)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기는 두 성분으로 나뉜다. 정신적이고 상승적인 성질의 혼(魂)은 하늘(天)에서 유래했고, 육체적이고 하강적인 성질의 백(魄)은 땅(地)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졌다. 사람이 죽으면 이 혼과 백은 각각 하늘과 땅으로 돌아가게 되며, 이는 곧 인간이 천지(天地)의 운행 속에서 생겨나고 소멸한다는 우주론적 이해에 바탕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자의 가르침은 '하늘'을 변덕스럽고 공포스러운 존재로 여겼던 당시 고대 중국인들의 조상과 하늘 인식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킨 계기가 되었다. 공자에게 있어 조상령은 인간을 공포로 다스리려는 초자연적 존재가 아니라, 천(天)의 질서에 속하며 역대 성현(聖賢) 조상들이 모여 이루는 위대한 도덕적 위원회의 구성원들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조상령의 분노와 저주를 크게 두려워하며 법령을 필요 이상으로 가혹하게 제정하고, 지배층은 사후세계에서 받을 조상들의 호통과 처벌을 피하고자 순장 등의 극단적인 제사의식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공자는 이를 강하게 비판하며, 조상령들이 공포를 조장하는 무리가 아니라 오히려 맑은 심성과 도덕적 자질을 갖춘 자들에게는 결코 함부로 분노하지 않는, 도의와 이성을 갖춘 존재들이란 가르침을 전파했다. 즉, 그는 조상령의 세계인 하늘을 무작위적 응보가 아닌 도덕적 질서의 연장선상에서 작동하는 세계로 이해했으며,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미신적 두려움 대신 도덕적 삶의 자기 수양을 장려하는 철학적 가르침을 제공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조상 숭배가 단순한 종교적 공포를 넘어서, 윤리적 내면화와 사회 질서 유지의 장치로 작용하도록 재해석된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2.4. 혼백(魂魄)

이러한 맥락에서, 공자 이후부터 유교적 제사는 죽은 조상의 기, 즉 '하늘의 혼'과 '땅의 백'을 일시적으로 다시 합쳐 이승으로 환원시켜 소환하는, 고도로 상징화된 제례로 변화된다. 즉, 후손은 정해진 절차와 예(禮)를 따라 혼백이 머무를 수 있는 공간과 조건을 마련하고, 향, 음식, 술, 촛불, 제문 등의 구성 요소를 통해 혼백이 돌아올 수 있는 통로와 자리를 의례적으로 준비한다. 이러한 준비와 절차는 조상과 실질적인 감응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 예지적 구조에 기반한 것이다. 따라서 유교에서 제사는 단순한 추모의식이 아니라, 천지의 질서 속에서 인간과 조상이 다시 만나는 순간이며,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조상령과의 실제적 소통을 구현하는 의례다. 이는 공자가 말한 '괴력난신'을 배척한 맥락과도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조상령은 한때 천지 아래 실재했던 존재이고, 천지의 이치 속에 기로 구성된 실체이며, 그들이 남긴 유업과 도덕은 현실 속에 작동하는 질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유교의 제사는 신령의 기분을 달래는 행위로 인식해야 할 것이 아니라, 천지의 운행과 인간 윤리를 통합하는 정교한 사유 체계의 일부로서 하늘과 인간, 조상을 잇는 도덕적·우주론적 교량으로 기능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또 이렇게 제사가 종교성을 유지하면서도 고도로 상징화 및 추상화되었기에, 유교의 제사에 대해서는 동아시아 내부의 문화 전통과 외부 세계의 인식 차이로 인해 오랜 논쟁이 이어져 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17세기부터 18세기까지 벌어진 가톨릭 세계 내의 '전례 논쟁(禮儀論爭)'이다. 당시 예수회는 조상 제사를 중국의 유교적 전통이며 사회적 예의범절의 일환으로 간주하고 이를 허용했으나, 도미니코회프란치스코회는 이를 우상 숭배에 해당하는 종교적 행위로 해석하여 엄격히 반대했다. 이 견해 차이는 곧 가톨릭 내부의 심각한 갈등으로 비화되었고, 결국 18세기 교황청은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의 입장을 채택해 중국 내 조상 제사를 금지하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이 결정은 단순한 종교 교리 차원의 논쟁을 넘어, 청나라와 조선에서의 가톨릭 수용 과정에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조선에서는 제사를 거부하는 천주교의 교리가 기존 유교적 윤리 질서와 충돌하면서 박해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처럼 유교 제사는 단순한 가족 중심의 공경 행위인지, 아니면 종교적 의미를 지닌 제의인지에 대한 판단이 문화권에 따라 크게 달랐으며, 동아시아 내부에서도 철학적·종교적 해석이 혼재되어 있는 만큼, 이를 일면적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오늘날에도 유교 제사는 사회적 예절과 정체성 유지의 장치이면서 동시에 종교적 감응과 조상과의 의사소통을 포함하는 상징 행위로 복합적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유교 제사를 단순한 관습 혹은 종교로 한정짓기보다는, 동아시아 전통에서 종교와 철학, 예절이 유기적으로 얽힌 복합적 행위로 파악하는 것이 보다 균형 잡힌 접근이라 할 수 있다.

2.5. 효()

조선 후기 이후 확립된 제사법은 일반적으로 주자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원래 주자학의 원칙에서 다소 변형되고 확대된 해석에 가깝다. 주자는 성리학적 예학에서 제사의 대상과 범위를 신분과 사회적 역할에 따라 제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았으며, 특히 3품 이상의 고위 관직자만이 4대 조상(고조할아버지까지)의 제사를 올리는 것이 타당하다고 가르쳤다. 이는 단순히 예절상의 규정이라기보다는, 조상들과의 심리적 거리감과 현실적 부담을 고려한 실리적 판단이었다. 다시 말해, 일반 백성의 경우 부모 제사에 집중하고, 더 이상 조상에 대한 예는 현실적으로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 주자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조선 사회에서는 '효'를 국가 통치의 중심 윤리로 삼았고, 이를 통한 도덕성과 예의의 전면적 강화가 요구되었다. 특히 사대부 계층은 주자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는 과정에서 예학의 실질보다 상징성과 모범성을 강조하게 되었고, 이러한 흐름은 점차 일반 서민층에게까지 확산되었다. 결과적으로 조선에서는 벼슬 유무나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4대 봉사(四代奉祀)를 가정의 도덕 실천으로 간주하며 제도화하게 되었다. 이는 주자의 예학이 왜곡되었다기보다는 조선이라는 유교적 사회질서 속에서 새로운 사회적 기능을 갖게 된 사례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즉, 조상 제사의 확대는 조선이 당시의 사회문화적 상황에 맞게 예의 실천을 재구성한 결과이며, '효'와 '예'를 결합한 독자적 윤리 체계로 분화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주자가 염려한 허례허식의 위험도 분명 존재했지만, 조선 사회에서는 가족 공동체의 지속성과 도덕적 정체성의 상징으로서 그 나름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국왕들은 천자(天子)의 지위를 자처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하늘(天)에 직접 제사를 지낼 수 없었고, 대신 왕조의 조상신을 모신 종묘와 토지신·곡신을 모신 사직에 제사를 올렸다. 그러나 대한제국 선포 이후, 고종은 자임한 황제의 지위에 따라 환구단을 설치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의례를 부활시켰다. 또한 가정 단위에서는 ''를 통해 가문 통치의 정당성과 도덕적 권위를 정당화하였으며, 이러한 유교적 조상 숭배는 사후 세계에서의 인정을 통한 일종의 간접적 영생관을 내포했다.

물론 이러한 변형에는 비판받을 지점도 분명 존재한다. 조선의 사대부 계층은 주자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는 과정에서, 제사의 본래 의미나 실질적 기능보다는 상기했듯이 형식적 상징성과 모범성, 즉 도덕적 과시를 점차 더욱 중시하게 되었다. 제사는 조상과의 교감을 위한 진정한 소통이라기보다, "나는 효자이며 유교적 예법을 따르는 도덕적 인간이다"라는 허세 행위로 변질된 측면도 있었고, 이는 점차 사회적 위신과 가문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의례적 과시로 굳어졌다. 그 결과 사대부들은 예를 명분 삼아 과도한 제례 부담을 후손에게까지 강요했고, 유교적 효의 정신은 오히려 과중한 의무와 허례허식의 논리로 치환된 부분도 있었다. 이는 조선 유교가 갖는 형식주의적 경향과 함께, 도덕 실천보다는 외형적 준수에 치중하는 태도를 고착화시킨 일면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3. 절차

제사의 진행 순서와 예법은 가문과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일반적인 전통 제례의 절차는 다음과 같다:
1. 영신(迎神)
먼저 고인의 영혼을 맞이하기 위해 대문이나 현관문을 연다. 제상의 북쪽(뒤쪽)에 병풍을 치고, 제수 음식을 진설한 뒤 위패에 지방(紙榜)을 써 붙이거나 고인의 영정 사진을 올려 준비를 마친다. 전통적으로는 사당에서 신주(神主)를 모셔오는 '출주(出主)'라는 절차가 있었다.
2. 분향강신(焚香降神)
고인의 영혼을 모시는 의식이다. 제주(祭主)가 향을 피운 뒤, 집사(執事)가 술잔을 건네주면 제주가 잔을 3번 향불 위에서 돌린 후, 모사(茅沙) 그릇에 조금씩 세 번 따르고 다시 빈 잔을 돌려준다. 이후 고인의 신위 앞에 두 번 절한다. 향은 하늘에 계시는 조상들에게, 모사에 따르는 술은 토지신에게 제사의 시작을 알리는 의미를 갖는다.
3. 참신(參神)
고인의 영혼이 오셨다고 가정하고 고인의 영혼에게 인사하는 절차다. 제주와 참사자들이 모두 2번 절한다. 전통적으로 여성은 4번 절했으나, 현대에는 2번으로 줄인 경우가 많다. 신주를 모신 제사에서는 참신을 먼저, 지방을 모신 제사에서는 강신을 먼저 행한다. 어떤 가문은 이 절차 이후 제수를 올리는 '진찬(進饌)'을 따로 진행하기도 한다.
4. 초헌(初獻)
제주가 처음으로 술을 올리는 의식이다. 제주가 꿇어앉아 향을 피운 뒤, 집사가 술잔을 건네면 잔을 향불 위에서 3번 돌리고, 모사에 3번 따르고 남은 술은 제물 앞에 놓는다. 이후 젓가락을 제물 위에 얹고, 제주가 2번 절한다. 부부 합설 제사에서는 남자 신위에 먼저, 이어 여자 신위에 술을 올린다. 일부 가문은 이때 메 그릇의 뚜껑을 여는 의식을 함께 한다.
5. 독축(讀祝)
축문을 낭독하는 절차다. 초헌 후 참사자들이 모두 꿇어앉으면, 제주 또는 집사가 정중하게 염불하듯이 축문을 읽는다. 과거에는 독축 후 '곡(哭)'을 하기도 했으나, 현재는 장례식도 끝난 관계로 생략하는 집안도 많고, 주로 묘제에서 시행한다. 독축 후 모두 일어나 2번 절하면서 초헌 절차가 마무리된다.
6. 아헌(亞獻)
2번째 술잔을 올리는 의식이다. 원래는 주부(제주의 아내)가 올리는 것이 관례지만, 주부가 참석할 수 없거나 어려운 경우에는 제주의 다음 순위에 해당하는 근친 남성이 초헌과 동일한 절차로 대신 올린다. 이때는 모사(茅沙)에는 술을 따르지 않는다. 주부를 포함한 여성은 4번 절한다.
7. 종헌(終獻)
3번째 술잔을 올리는 절차로, 보통 아헌자 다음 순위의 근친자가 올린다. 경우에 따라 고인과의 관계나 정분을 고려해 참가자 중 다른 이가 올리기도 한다. 절차는 아헌과 동일하며, 술은 대개 7부 정도만 따라 올린다.
8. 첨작(添酌)
종헌이 끝난 후, 제주가 신위 앞으로 나아가 꿇어 앉으면 집사가 술 주전자로 신위 앞 술잔에 세 번 나누어 술을 부어 가득 채운다. 어떤 가문은 새로운 잔에 술을 조금 따라 제주에게 준 후, 제주가 이를 다시 집사에게 돌려주면, 집사가 기존 술잔에 세 번 나누어 첨작하기도 한다.
9. 삽시정저(揷匙正箸)
메(飯) 그릇의 뚜껑을 열고, 숟가락을 밥 위 중앙에 세워 꽂는 절차이다. 이때 숟가락의 오목한 면이 동쪽을 향하도록 한다. 젓가락은 시접 위에 올리되, 손잡이가 왼쪽을 향하게 한다. 이후 제주가 2번, 주부는 4번 절한다.
10. 합문(闔門)
고인의 영혼이 식사할 시간을 주기 위한 절차이다. 참사자들이 모두 밖으로 나가 문을 닫고, 잠시 조용히 기다린다. 제상을 대청에 차린 경우 뜰 아래로 내려가 읍(揖, 공손히 절하는 자세)을 하거나, 가만히 서서 고인의 영혼이 잡수실 때까지 지켜보거나, 그대로 자리에 엎드려 머무르기도 한다. 현대에는 1분 가량 서서 정숙하거나, 생략하기도 한다.
11. 계문(啓門)
문을 다시 여는 절차로, 축관(祝官)이 3번 헛기침을 한 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다른 참사자들도 뒤따라 입장한다. 축문처럼 생략하는 경우도 많다.
12. 헌다(獻茶)
차를 올리는 절차이다. 갱(국) 그릇을 내려놓고, 숭늉을 올린 후 숟가락으로 메를 3번 떠서 말고 수저를 숭늉 그릇에 놓는다. 참사자들은 읍한 자세로 잠시 꿇어 앉았다가, 제주의 기침 소리에 맞춰 고개를 든다.
13. 철시복반(撤匙復飯)
숭늉 그릇에 놓인 수저를 거두고, 메 그릇의 뚜껑을 다시 덮는 절차이다. 이는 고인의 식사가 끝났음을 의미한다.
14. 사신(辭神)
고인의 영혼을 전송하는 절차이다. 참사자들이 신위 앞에서 두 번 절한 뒤, 축관이 지방과 축문을 향로의 불에 태워 올린다. 지방을 쓴 경우에는 태워 없애고, 신주를 사용한 경우에는 사당으로 다시 옮긴다. 이로써 제사의 절차가 마무리된다.
15. 철상(撤床)
제상이 끝난 뒤, 제수 음식을 모두 거두는 절차이다. 일반적으로 제상 뒤쪽부터 차례대로 물리며, 음식 일부를 잘라 바깥에 묻는 풍습이 있는 집안도 있다. 고인이 고인의 조상들과 배우자 조상들의 영혼들을 모셔와서 함께 잡수시라고 바치는 배려의 뜻을 담고 있다.
16. 음복(飮福)
참사자들이 제사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의례다. 이를 통해 고인의 복을 나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음복이 끝나기 전까지는 제복을 벗거나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이 예의다. 유교 전통이 강한 가문에서는 남녀 따로 음복을 하기도 한다.

4. 종류

4.1. 사시제(四時祭)

봄 제사를 사(祠)라 하고, 여름 제사를 약(礿)이라 하며, 가을 제사를 상(嘗)이라 하고, 겨울 제사를 증(烝)이라 한다.
제사를 자주 올리면 번잡해지고, 번잡해지면 경건함을 잃는다.
성기면 게을러지고, 게을러지면 결국 잊히게 된다.
《공양전(供養典)》중
사시제는 일 년에 네 번, 계절의 변화를 따라 지내는 정기 제사이다. 봄에는 사(祠), 여름에는 약(礿), 가을에는 상(嘗), 겨울에는 증(烝)이라 하며, 이를 통틀어 사시제(四時祭)라고 부른다.

이는 "자주하면 더러워지고, 더러워지면 공경하지 않으며, 성글면 게으르고, 게으르면 잊는다"는 《예기(禮記)》의 가르침에 따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조상에 대한 공경을 실천하고자 마련된 제도이다.

보통 음력 2월, 5월, 8월, 11월의 상순(上旬), 즉 초열흘 안의 정일(丁日) 또는 해일(亥日)을 가려 제일로 삼으며, 실제 날짜는 보통 전달 하순에 정한다. 이 때는 조상의 기일이나 명절 제사와 달리 사당에 모셔진 신위 전체를 함께 모시는 종합적 제사로, 문중 단위로 진행되는 경우도 많다.

사시제는 매우 격식을 중시하는 의례로, 제사 3일 전부터 재계(齋戒)를 한다. 재계는 부정(不淨)을 멀리하고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여 신령을 맞이하는 정화 의식이다. 이 기간에는 고기, 술, 부부생활 등을 삼가고, 제사 준비에 전념한다.

제사 하루 전날에는 다음과 같은 준비가 이뤄진다:
  • 정침(正寢, 신주를 모실 안방)을 깨끗이 청소하고 신위를 모실 자리를 마련
  • 향탁(香卓)을 중앙에 놓고, 향로・향합・촛대 등을 정위치
  • 제기를 꺼내 깨끗이 손질하고, 제찬(祭饌, 제사 음식)을 정성껏 준비

4.1.1. 절차

제삿날에는 전날 밤부터 촛불을 밝혀 두며, 날이 밝자마자 제주와 참사자들은 제복을 갖춰 입고, 사당으로 나아가 분향 후 신위를 정침으로 모셔온다.

전형적인 사시제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참신(參神): 신령에게 인사하며 제사의 시작을 알림

2. 강신(降神): 신령의 강림을 청함

3. 초헌(初獻): 제주가 첫 번째 술잔을 올림

4. 아헌(亞獻): 제주의 근친자 또는 주부가 두 번째 잔을 올림

5. 종헌(終獻): 나머지 참사자가 세 번째 술잔을 올림

6. 유식(侑食): 신령이 식사하는 시간을 줌

7. 합문(闔門) → 계문(啓門): 신령이 식사하는 시간, 문을 닫고 열며 고요한 시간을 유지

8. 수주(收主): 신위를 다시 사당으로 옮김

9. 사신(辭神): 신령을 전송하고 지방 및 축문을 소각

10. 납주(納主): 신위를 원래 위치에 안치

11. 철상(撤床): 제상 위 음식을 물림

12. 음복(飮福): 제수를 나누어 먹으며 조상의 복을 함께 누림

사시제는 정월・추석・기일 등의 비정기 제사와는 달리, 시간과 질서를 중시한 천문(天文)적 시간 관념과 유교 예제의 합일로서, 조상과 천도(天道)에 대한 존중을 보여주는 대표적 제례이다.

4.2. 차례(茶禮)

차례는 설날, 한식, 단오, 추석 등 네 가지 명절에 지내는 조상 제사를 말한다. 본래는 차(茶)와 과일 등 간소한 제수를 올리며 차를 대접하는 의례에서 유래한 것으로, 중국에는 없는 조선 고유의 명절 제사이다.

차례는 정제(正祭)에 해당하는 기일제사나 시제에 비해 격식이 낮고 절차가 간략하다. 시제(時祭)가 성묘와 함께 묘소에서 지내는 큰 제사라면, 차례는 집안에서 명절 아침에 간소히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전통적으로는 술과 과일, 포(脯), 숙채(熟菜) 등 간단한 음식을 올렸으나, 현대에는 명절 음식(떡국, 송편 등)을 함께 올리는 경우가 많다.

차례의 목적은 조상에게 명절을 알리고 감사와 공경을 표하는 것으로, 의례 후에는 가족들이 제수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조상과의 유대와 가족 간 결속을 다졌다.

4.3. 시조제(始祖祭), 선조제(先祖祭), 녜제(禰祭)

  • 시조제
동지에 시조에게 제사지낸다.
나머지는 시제의 의식과 같다.
  • 선조제
입춘에 선조[1]에게 제사지낸다.
나머지는 시제의 의식과 같다.
  • 녜제
계추[2]에 어버이에게 제사지낸다.
나머지는 시제의 의식과 같다.

주자는 시조제와 선조제를 분수에 넘친다면서 폐하였으나 예외적으로 녜제만을 남겨두었는데, 조선 유학자들은 주자의 생일이 계추이므로 생일상을 겸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4.4. 기제(忌祭)

기일에 고인께 제사를 지낸다. 일반적인 제사의 의미가 이것이다.

4.5. 묘제(墓祭) (묘사)

위의 제사들은 모두 집에서 지내고, 묘제는 한자 뜻 그대로 직접 조상들의 선산을 찾아가서 벌초를 하고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경상도에서는 '묘사'라고도 부른다. 집에서 지내는 제사랑 방식이 거의 비슷하지만, 야외에서 축문도 읽는다는 게 차이점이다. 뱀(독사)ㆍ멧돼지ㆍ해충(특히 진드기)들이 목숨을 빼았고 방해할려고 도사리고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하자.

1. 친척들과 상의해서 날을 정한다.[3]
2. 목욕을 한다.
3. 제수 음식을 만들어 선산에 포장해 간다.(그 전날 만들기도 한다.)
4. 친척들을 만나 인사를 나눈 뒤 산소 주위에 물을 뿌리거나 예초기를 가동시켜 벌초를 시작한다.
5. 벌초가 끝났으면 집에서 차례나 기제사를 지내듯이 자리를 펴고 제수 음식을 묘석에 올린다.
6. 제주가 먼저 2번 절한 뒤 다 같이 2번 절하면서 묘사를 거행한다.
7. 제주나 근친자가 절에서 염불을 외듯이 축문을 엄숙한 목소리로 읽고, 나머지 참석자들은 엎드려 있거나 꿇어앉는다.
8. 축문이 끝나면 다 같이 또 2번 절하고 제수 음식을 물린 뒤 그 자리에서 음복한 뒤 귀가하거나 아예 본인 집으로 포장해가거나 묘제에 참석 못한 친척 집에 가져다 드린다.

4.6. 절충안

보다시피 저걸 다 하면 1년 내내 제사가 있게 된다. 특히 사시제 넷과 차례 넷, 그리고 묘제 둘이 계절별로 겹쳐버리는바, 조선의 유학자들도 이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였다. 율곡은 한식과 추석에는 사당에서 FM대로 하고, 설날과 단오에는 묘에 가서 간소하게 제사지내는 절충안을 건의하고 꽤 많은 이들이 이를 따랐다.

5.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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飯() 盞()[4] 醋醬(초장) 羹()
麪食(만두/국수/) 肉(고기) 炙(꼬치) 魚(생선) 米食()
脯(육포/어포) 熟菜(나물) 醢(염장고기) 醋菜(생채) 鮓(식해) 沉菜(김치)
果(과일) 果(과일) 果(과일) 果(과일) 果(과일) 果(과일)

위의 사진은 현대에 정립된 일반적인 제사상으로, 1960년대에 허례허식화된 가정 의례를 쉽게 알고 실행하기 위한다는 취지로 간략화시킨 건전가정의례준칙에 의거한다.

현재는 고기, 꼬지, 생선으로 크게 분류하지만 과거에는 '육전, 육적, 소적, 어전, 어적'으로 세밀하게 구분했다. 국수 위치는 집안 마다 다르다. 어느 집안은 밥 왼쪽에 놓고, 또 어느 집안은 고기 왼쪽에 위치시킨다.

아래는 1792년에 간행된 가례증해에 따른 제사상으로 1위당 1상을 원칙으로 한다. 따라서 1인분만 올라가므로 비교적 양이 적은 편. 가례증해는 저 도해는 예시로 생전에 고인이 좋아하던 음식이나 집에 좋은 음식이 들어왔을 경우에는 그것을 올려도 상관없으며, 다만 과일은 짝수, 어육은 홀수로 형편에 맞게 정성껏 찬을 차리면 족하다고 하였다.

현대의 제사상은 지나치게 화려하고 전통에 맞지 않다는 의견이 퍼져 있으나, 실제로 제사상은 과거에 이보다 화려했다. 이 당시의 제사는 집안 사람들만 아니라 동네사람들까지 간만에 맛있는 음식을 포식할 기회였었고, 이 때문에 부유하거나 전통이 있다 자부한 집안에서는 동네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상부러질 정도로 차렸던 것이었다. 사실 현대의 제사상은 건전가정의례준칙에 의거한 것이라서 1970년대 이전의 제사상에 비하면 한결 검소한 버전인데, 오히려 현대에는 이것도 화려하다는 인식이 있는 것은 건전가정의례준칙이 시행되었을 당시에는 다자녀 가정이 많았던 시절이라 그랬던것으로, 이후의 이촌향도와 산아제한, 핵가족화가 겹치면서 먹는 입이 줄어들자, 이것도 화려하다는 인식으로 이어지게 된것이다. 성균관 의례부장 '홍동백서 등 차례상 규칙 근거 없다'와 같은 기사가 나오긴 하였으나 이는 차례상으로, 원래 유교에서는 차례상과 제사상을 엄격히 구분하였으며 차례상은 간단히 차와 술, 다과만을 올리고 제사상은 화려하게 각종 전통음식을 예절에 맞춰 올렸다.

그렇지만 현대에 일반적으로 문제삼는 제사라는 게 일반적으로 기제사 등을 말하는 게 아니고[5] 명절의 차례인 것을 생각하면 지나치게 화려하고 전통에 맞지 않다는 의견이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현대에는 명절 차례상을 구분하지 않고 대부분 기제사처럼 인식해서 차리는 경우가 많다보니 생기는 문제.

5.1. 차례와 기제사의 차이

두산백과에 따르면 음력 매달 초하룻날과 보름날, 명절날, 조상 생일 등에 간단히 지내는 제사를 차례라고 한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 특별한 명절(설날, 추석)에 한해서 제사가 아니라 차례라고 부른다는 것. 즉, 차례는 제사에 포함되는 개념이며, 제사의 특별한 케이스가 차례이다. 그러니 설날이나 추석에 지나는 제사도 '제사'라고 불러도 무방하며 딱히 틀리거나 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모든 제사를 차례라 부르진 않으며, 그렇게 부르는 것은 틀린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제사라고 하면 기제사를 가리키는데, 기제사란 죽은 사람의 기일에 그 사람만을 위해 지내는 제사를 의미한다. 기제사든 차례든 보통 제주 위로 돌아가신 4대 조상[6][7]까지 지내는 건 마찬가지지만, 명절 등에 지내는 차례는 4대 조상까지 연달아 대접하는 제사를 의미하므로, 기제사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차례는 삼국사기 제사지의 내용이나 중국의 가 전해지고 재배한 역사를 감안하면 명절 제례로 신라시대부터 지낸 것으로 추정되고, 이름 그대로 원래는 를 올리는 다례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불교가 국교이던 삼국시대, 남북국시대, 고려시대와 차라는 부분을 고려하면, 세시풍습 + 계절제와 불교식 성향이 더해져서 탄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한 조선시대가 되면서 불교식 세시풍습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기 때문에 세시 풍습도 유교식으로 변화해간다. 실제로 조선시대 예법의 기본 취급 받는 주자가례 중 참례와 천신례는 세시의 제사를 다루고 있는데, 이때 초일에는 술과 차를, 그리고 보름에는 차만을 올렸다. 그러나 술 대신 차를 올리는 것이 아무리 봐도 불교 냄새가 강하다는 생각도 있었고, 중국과 달리 조선에서 차는 엄청난 고급 사치품이었기 때문에[8]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아무래도 중국에서는 차를 올리지만, 조선은 술이죠"라면서 차례상에서 차를 빼고 술로 일원화했다.[9]

이후 명절에 지내는 제사의 다른 이름이 된 것은 조선 후기 성리학적 성향이 강해진 영향으로 보인다.

5.2. 음복

제사를 지낸 뒤에 제사에 쓰인 제주(祭酒)와 제물을 나눠서 먹는 것. 집안에 따라 제상에 올린 나물과 밥을 함께 비벼서 비빔밥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10]

제물이 평소 먹던 음식보다 맛없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 음식이 식고 난 뒤에 먹기 때문이다. 특히 고기생선류는 한번 조리되고 나서 식으면 수조육류 특유의 냄새가 나고, 다시 데우면 오히려 냄새가 심해진다. 양념이 안 되다 보니, 양념이 들어갔을 때보다 냄새가 심하다. 음식에 간은 하지만 양념을 하지 않는 이유는, 양념의 매운 맛이나 향이 영혼을 쫓아낸다는 믿음 때문이다. 무당들도 귀신을 쫓아내는 의식을 행할 때 마늘이나 고춧가루를 사용한다. 물론 무당 이야기 나온 것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근거 따위는 전혀 없다. 실제로 강한 양념을 하지 않는 것은, 양념을 강하게 하는 것이 상스러운 것으로 취급받았기 때문이거나, 혹은 강한 양념 자체가 제사 풍습이 확립된 다음에 들어왔기 때문.[11] 그 향신료로 귀신을 쫓을 수 있느냐 마느냐는 모든 종교의 바탕인 신과 귀신의 실존을 증명할 수 없는 이상 믿음의 문제니 넘어갈 일이다.

거기다가 남아서 냉장고에 넣어 두면 냉장고의 냄새까지 밴다(...). 밀폐용기나 지퍼백에 넣어두는 것이 낫다. 과거 이런 용기나 생활방식이 없던 시절에는 대부분의 집이 비닐봉지에 대충 담아놓았고, 이렇게 보관하다 보니 누군가 먹다 버린 것 같은 느낌이나 음식에 상한 냄새가 난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다.

팁을 적자면, 수제 냉동식품처럼 취급하면 된다. 2,3일 안에 먹을 것은 냉장실에 보관하고, 그 후에 먹을 것은 전을 한입거리로 잘라 비닐백에 골고루 소분해 넣어 꽁꽁 얼리면 된다. 집에서 만들었는데 양을 줄여도 전이 남아 골치라면, 손님이 돌아간 다음, 한 번에 소분 냉동해도 된다.

1) 바닥에 신문지를 넓게 깔고, 전바구니와 도마를 놓고, 도마 주변에 롤백 비닐봉지 10~30개를 주머니처럼 입을 벌여 놓는다.
2) 전바구니에서 전을 종류별로 적당한 갯수씩 주머니에 나눠 담는다. 큰 전이면 한입거리로 잘라 나눈다.
3) 롤백 한 봉지에 들어갈 분량은 한 번에 먹을 양. 되도록 프라이팬 하나로 데울 양을 넘지 않는다. 한 봉지에 전 여러 종류가 골고루 들어가도록 한다.
4) 김치냉장고에 꽁꽁 얼린다.

먹기 전날 냉장고 냉장실에서 해동한다. 이게 가장 좋다. 급하면 꺼내 전자레인지에 1차 해동하거나, 여유가 좀 있다면 프라이팬에 기름을 조금 두르고 데워 식사나 도시락 반찬으로 사용한다. 즉석냉동식품과 다를 게 없다. 나물류와 탕국은 가능한 재료를 섞어 육개장을 만드는 것도 방법.

그리고, 음복 때에는 제사에 쓰인 인 제주를 제사에 참여한 모든 구성원들이 한 잔씩 하는 경우가 많다. 제사용 주류는 곡물로 담근 맑은 양조주한국식 청주[12]를 사용하는 것이 원칙으로, 축문의 맨 마지막 구절인 謹以酌庶羞恭伸奠獻尙饗[13]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제사를 지내는 집안, 특히 봉제사접빈객을 의무로 삼는 양반가에서는 모두 청주를 담갔고, 이런 각 가문의 가양주들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다양한 전통주가 되었다. 2023년 1월 현재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술 중에서는 예담, 화랑이 전통적, 혹은 전통에 가까운 방식으로 양조한 한국식 청주에 해당한다. 증류주소주는 잘 사용되지 않는데, 한국 전통 소주는 1~3회 단식증류로 도수가 40~60도 정도인 증류식 소주라서 술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면 마시기 힘들기 때문. 현대에 접어들면서는 예법을 엄격히 따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주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 가정이 많고, 따라서 고인이 평소 즐기던 탁주희석식 소주를 사용하는 경우는 꽤 흔하게 않게 볼 수 있으며, 간혹 맥주화이트 와인[14]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조상 대대로 술을 마시지 않는 집안에서는 술 대신 사이다나 맹물을 올리기도 한다. 그래도 곡물로 빚은 맑은 양조주, 즉 청주를 사용하려는 경향은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제사용 주류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은 쉽게 구할 수 있는 주정으로 양을 불린 일본식 청주백화수복이다.

한국의 "민짜"들이 공개적으로(…) 술맛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인데, 이런 데 엄격한 집안에서는 이럴 때도 아이들에게 술을 못 마시게 하지만, 어른들이 보는 앞에서 음주함으로써 주도를 배우는 기회로 활용하는 집안도 많다. 처음 술버릇이 평생의 술버릇에 미치는 영향이 정말 지대하다는 걸 고려하면, '순한 술'로 가문의 어르신들 앞에서 미성년 자녀가 적당히 긴장하면서 "주도"를 훈육받는 게 상당히 효과가 좋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대부분 당연히 민짜들끼리 모여서 그냥 마시거나 대학에 입학해서 몇살 차이나지 않는 선배들과 값싸고 에탄올만 많은 싸구려 술을 들이붓거나 하면서 술을 잘못 접하게 된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명절에 차례나 성묘를 하고 제주로 음복을 하고는 음주운전을 하는 사례도 심심찮게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명절날 큰 묘지 주변에선 낮시간에도 음주단속을 하기도 한다. 아무리 소량이라도 술은 술인 만큼 운전할 사람은 제주를 마시지 말자. 단속 이전에 안전 문제다. 조상님들 제사 지내러 왔다가 오히려 다음 제사부터 조상님들과 다같이 제삿밥 먹을 수도 있다.

현대 이전에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에는 명절, 잔치와 함께 음식을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기회가 음복이기도 했으며, 부유하거나 전통이 있다 자부하는 집에서는 동네사람들에게도 음식을 나누었기 때문에 이 당시를 살아간 사람들에게 있어서 양반집과 부잣집 제삿날이 외식날이기도 했다. 아래 내용의 '헛제삿밥'의 기원으로 이를 꼽기도 한다.

영혼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의식이다 보니 어른들이 "남의 집 젯밥은 먹으면 안 된다."고 충고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남의 집 젯밥을 먹음은 곧 남의 집 귀신과 한솥밥을 먹은 셈이기 때문이다. 자기 조상도 아니고, 남의 조상 귀신과 한솥밥을 먹는다니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비슷한 이유로 무당들도 제사를 지낸 음식에는 귀신이 붙어 먹으면 부정을 탄다고 하여 일절 손을 대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당대에는 동네 사람들이 제사를 도와주면서 제삿밥을 얻어먹는 경우가 일반적이었고, 동네 제삿날을 숙지해서 외식 기회로 삼았기도 했다.(...) 본토와 문화가 다른 제주도 토박이 가문들은 예외로 지인의 집 제사에 참석하거나 하는 경우도 허용된다.[15] 또한 음식이 몹시 귀하던 시절의 전후 세대, 기성세대들은 여간 가난한 게 아니다보니 귀신이 먹던 거라도 안 먹으면 당장 자기부터가 귀신이 될 판국이라 어린 시절 음복을 얻어먹기 위해 보자기를 들고 줄 서 있었다.

5.3. 가문별, 지역별 특색

  • 제주도에서는 제사를 식게라고 부른다. 균분상속의 전통이 있어 시집간 딸과 사위도 제사에 참석한다.[16] 자녀가 생기면 자녀도 동행하므로 외손자가 제사에 참석하는 게 유별난 일이 아니다.[17] 뿐만 아니라 친구를 제사에 초대하는 경우도 있다. 만약 제주도 사람이 제사에 초대한다면 혈족만큼 친밀하게 여기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된다.[18] 그리고 제주도에서만 상에 올리는 음식들이 있다. [19], 빙떡이 대표적이다. 갱도 생선국[20]으로 올린다(주로 생선 미역국). 제주도인 특성상 어적도 빠지지 않고 올린다. 적갈 재료는 주로 상어, 오징어, 옥돔이 대표적이다. 명절 때 차례상에 만두를 올리지 않는다. 술 대신 음료를 쓰기도 하는데, 주로 과일주스가 사용되고 청량음료는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으나, 사용된다 하더라도 환타, 오란씨, 데미소다, 써니텐처럼 과일이 들어간 청량음료가 사용된다.# 다만 이건 저 집안의 다소 특이한 사례로 보이고, 일반적으로는 청량음료 특성상 살아 있는 사람들의 건강에 좋지 않은 걸 고인에게 올리기에 껄끄럽다는 인식 때문에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 경상도도 제주도와 마찬가지로 다른 지방에서 보기 힘든 음식인 돔배기(상어간고등어처럼 소금에 절여 직사각형 모양으로 만든 것)가 제사에 올라온다. 조기도 올린다. 제사 음식 중에서도 비중을 상당히 높게 치는 편이다. 경상도에서는 돔배기를 안 올리면 고인과 가문을 욕보인다고 여긴다. 집안에 따라서는 문어오징어를 통째로 데친 숙회를 올린다. 어떤 집은 고등어조기도 구워 올리기도 한다. 통닭수육(주로 삼겹살이나 오겹살을 올린다. 동파육을 연상케 할 정도로 닭이나 수육에 간장 양념을 해서 올리기도 하며 에어 프라이어오븐에 굽기도 한다.)도 올리는 곳도 있다.
  • 수도권빈대떡과 통북어를 올린다.
  • 안동에는 헛제삿밥이라는 음식이 있다. 안동의 헛제삿밥이 맛있기로 유명하자 그곳에 부임한 미식가 관리가 이를 원하였는데, 아랫 사람이 실제 제사에 쓰인 음식은 아니고 같은 재료로 똑같이 만들어 대접하자 관리가 이를 먹고서는 "향이 나지 않으니 진짜 젯밥이 아니구나(헛제삿밥)[21]"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헛제삿밥에도 돔배기 조각이 있다.
  • 조선 전기의 문신이었던 신숙주의 본관인 고령 신씨의 일부 집안에서는 제사상에 숙주나물을 올리지 않는다.
  • 일반적인 제수와 달리 종묘제례사직제례에 쓰이는 제수에는 익히지 않은 날 것과 양념하지 않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 종종 산신제나 일부 종중에서도 볼 수 있는데, 산신제에서 이렇게 올리는 것은 유교의 영향이다. 산신제에는 고기를 잘 쓰지 않으나, 이는 현재 대부분의 산신각이 안에 있는 것도 있고, 남자 산신에게만 고기를 올리는 곳도 있다. 강원도 영월군의 태백산 산신제에서는 쇠고기를 쓰는데, 이는 영월 청령포에서 세조에게 사사당한 단종을 태백산 신으로 존대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 조선 후기 이후 제사의 주체는 일반적으로 남자장남이 지내는 것으로 인식되나, 현대에는 평등 의식으로 인해 형제들이 순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지내거나 함께 지내는 경우도 있다.
  •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발의 가문인 광산 이씨 문중에서는 칼로 고기나 무를 썰 때 '정철정철정철…'이라고 외운다고 한다. 이발의 가문은 정여립의 난 때 정철의 주도로 철저하게 숙청당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정철에 대한 원한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 율곡 이이의 제사상엔 소고기가 올라가지 않는다. 이이가 생전에 "를 사람들이 부려먹으니 소고기를 먹을 수 없다"는 견해를 지녔기 때문이다.
  • 명재 윤증의 직계인 파평 윤씨 노종파 종가의 제사상은 엄청나게 검소한데[22], 이는 "제사상에 손이 많이 가는 전과류나 기름이 들어가는 을 올리지 말라."는 유훈을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
  • 남부 해안 지방에는 명절 차례를 당일날 아침에 지내지 않고, 이전인 전날 저녁이나 밤(자정 직후)에 지내는 곳이 있다.
  • 경상남도 서부 내륙 지방에서는 소고기 산적 대신 돼지 수육을 쓰며, 닭고기 산적 대신 삶은 달걀이 쓰이기도 한다.

5.4. 금기 음식

유교의 가르침에는 괴력난신을 논하지 않는데 귀신 운운하는 내용이니 근거가 없는 이야기로, 민간이나 도교에서 내려오는 풍습이 와전돼서 터부화 된 것이다. 최근에는 그냥 조상이 생전에 좋아했던 음식 위주로 제사상을 꾸리는 게 대세이다.
  • 복숭아 - 귀신을 쫓아낼 때 사용하는 과일이기 때문에 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복숭아 나무로 만든 목검이나 제기로 귀신을 쫓는 중국 무속으로부터 유례된 풍습일 것 같지만, 사실 그런 건 아니고 중국에서 복숭아는 장수의 상징이기도 한데, 이미 죽은 사람에게 장수의 과일을 올리는 건 고인을 욕보이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 다만 현대 중국에서는 완전 금기 수준까지는 아닌지 생전에 복숭아를 좋아했던 고인의 제사에는 가끔 올리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 고춧가루, 마늘 같은 매운 양념ㆍ향신료 - 고춧가루, 마늘의 냄새가 고인의 혼을 쫓는다고 하여 제사 음식에는 간만 해두지 양념을 하지 않으며, 소금조차 넣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밥상에 자주 보이는 김치가 제사상에 올라가지 않는 이유도 이것이다. 다만 오늘날에는 치면 눈에 확 띠는 고춧가루는 사용하지 않지만 실고추는 사용하는 집도 있고, 후추, 생강, 마늘처럼 색이 없는 것은 얼마든지 쓰는 집이 많다. 요즘은 또 케바케라서 고춧가루 잔뜩 풀어넣은 찌개를 올리는 집안도 있다.
  • 팥이 들어간 음식들 - 고추가루처럼 고인의 혼을 쫓아내는 데 사용하기 때문에 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 '치' 자가 들어간 음식들 - '痴(어리석을 치)', '恥(부끄러울 치)' 와 같은 음이어서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 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치 자가 들어간 생선을 올리지 않는 경우도 많은데, 이 생선들은 격이 떨어지고 고인과 윗대 선조들을 욕보인다는 인식 때문에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23]

5.5. 용어

제사 음식을 쉽게 차리기 위한 다양한 단어들이 존재하지만 주자가례, 국조오례의 등과 같은 유교 서적에는 나오지 않는 근거 없는 단어들이고, 1980~1990년대 언론들이 몇몇 가문들의 상차림을 인용하여 상은 이런 식으로 차려야 한다며 만들어 전파된 단어들이며, 그냥 차리고 싶은대로 차려도 유교 예법에 전혀 어긋나지 않는다. 다만 제사 지내는 집안의 어른들은 이 단어들에 익숙해져서 이 형식을 지키지 않으면 혼을 내는 경우가 종종 나타난다. 그래도 전형적인 상차림에 없는 메뉴가 점점 늘어나면서, 눈에 확 띄는 몇 가지만 괜찮으면 아무래도 좋다 정도가 되어가고 있다.

동쪽이니 서쪽이니 하는 말이 있지만 신위를 북쪽으로 치고 하기에 동쪽은 신위를 마주보고 오른쪽을, 서쪽은 왼쪽을 말한다.
  • 어동육서(魚東肉西): 물고기는 동쪽에 고기는 서쪽에 놓는다.
  • 두동미서(頭東尾西): 물고기의 머리는 동쪽으로 꼬리는 서쪽으로 가게 놓는다. 즉 생선의 배가 신위를 바라보게 놓는다. 망자 쪽에서 생각해 보면 이쪽이 먹기 편하기 때문.
  • 홍동백서(紅東白西): 붉은 과일은 동쪽에 흰 과일은 서쪽에 놓는다. 그런데 과일이 꼭 붉고 흰 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과일줄에 약과나 산자 등 다른 디저트류도 올라가기 때문에 애매한 경우가 많다. 이럴 때는 보통 진한 색은 동쪽, 옅은 색은 서쪽에 둔다.
  • 조율이시(棗栗梨枾): 왼쪽부터 대추, 밤, 배, 감 순서로 놓는다. 다만 대추, 밤, 감, 배 순으로 놓는 조율시이(棗栗枾梨)도 혼용되고 있으며 이는 집안마다 다르다. 고로 남의 제사상에 감놔라 대추놔라 하지 말자. 홍동백서를 쓰는 집안에서는 조율이시를 쓰지 않는 경우가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위에 말했듯 제사 예법이라는 게 집집마다 다 달라서 함부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조율이시를 쓰고 나머지를 홍동백서로 쓸 수도 있고. 제일 동쪽에 대추와 밤을 놓고 홍동백서를 따른 후 마지막에 배와 감을 놓을 수도 있다.
  • 좌포우혜(左脯右醯): 포는 왼쪽에 식혜는 오른쪽에 놓는다.
  • 반서갱동(飯西羹東): 반(밥)은 서쪽에, 갱(국)은 동쪽에 차린다.
  • 생동숙서(生東熟西): 날것은 동쪽에, 익힌 것은 서쪽에 차린다.
  • 건좌습우(乾左濕右): 건한 음식은 왼쪽에 습한 음식은 오른쪽에 놓는다.
  • 적전중앙(炙奠中央): 적과 전은 중앙에 위치한다.
  • 접동잔서(接東盞西): 접시는 동쪽에 잔은 서쪽에 놓는다.
  • 남좌여우(男左女右): 남자는 제사상의 왼쪽에서 여자는 오른쪽에서 절을 한다.[24] 손을 가지런히 할 때 어느 손이 올라와 하느냐는 말이나, 잔을 돌릴때 어느 방향으로 회전시켜야 하느냐는 말만큼이나, 남녀의 절하는 자세와 자리 구별은 의미없어지고 있다.

제사상을 놓는 법을 쉽게 기억하려면, 신주를 중심으로 첫 열에 밥, 2번째에 메인요리 (적), 3번째 열에 탕, 4번째 열에 반찬, 마지막 열에 디저트라고 생각하면 쉽다. 우리가 평소 밥 먹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제사 지내는 쪽에서는 이걸 거꾸로 보니 (첫열에 디저트) 외우기가 어렵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제사상 놓는 법이 아니다. 고인이 좋아하던 것으로 차릴 수도 있고 후손들, 특히 어린이의 참여를 높이기 위해 어린이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차려도 무관하다.

5.6. 온라인 차례상

사용자는 웹 화면에서 밥·탕·전·과일 등을 클릭하여 원하는 위치에 배치함으로써 가상의 차례상을 구성할 수 있다. 기능만 놓고 보면 과거 포털 사이트에서 유행하던 플래시 게임류와 상당히 흡사하다. 실제 음식을 올리지 않기 때문에 '조상신이 다마고치냐' 등의 비난 글이 쏟아졌다.
  • 2020년 인천가족공원 온라인성묘[25] 파일:인천가족공원+아이콘.png
  • 2023년 보건복지부 디지털 추모서비스[26]파일:e하늘_아이콘.png

    엄마: "아니, 이게 뭐라니?"

    아들: "엄마, 이거 인터넷 차례상이야"

    엄마: "뭐라고?"

    아들: "이제 귀찮게 안 차려도 돼~ 아부지가 좋아하던 게 뭐였지?"

    엄마: "난 족발 먹을란다"

    아들: "아니, 엄마 말고. 아부지 말이야. 잠깐만, 고기도 넣고 나물도 넣고 막걸리도 넣자"

    엄마: "너희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다. 응? 어쨋든 맛있게 먹고가요"



    [병맛더빙] 온라인 차례상파일:YouTube Shorts 아이콘.svg

6. 각국의 제사

6.1. 한국


  • 고인의 장남의 집에서 제사를 지내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장남이 사망하면 차남의 집에서 지낸다.
  • 삼국시대 이전: 토테미즘이나 애니미즘, 하늘 숭배 사상이 유행하는 원시적인 종교 형태를 띠고 있다.
  • 삼국시대 초기: 고조선, 부여, 고구려, 삼한(마한, 진한, 변한)에선 동맹, 수신, 영고 등 산과 강, 신과 하늘에게 지내는 의식 비슷한 제사가 진행됨. 이후 왕조의 형태가 잡히면서 주로 황실에서 시조에 대한 제사가 진행됨. 이때 고구려에서 시조의 조각상을 세우고 그를 숭배하는 제사는 고려에도 이어진다.[27]
  • 삼국시대 중후반 ~ 남북국시대: 불교도교의 수입이 이루어지면서 이 세워지고 불교식 제사가 자주 진행됨. 팔관회나 연등회 같은 행사가 황실 위주로 이루어짐. 신라에선 도교식 제사인 초제[28]가 행해져 조선 중기까지 이어진다. 이후 유교의 수입도 이어져 신라에선 종묘와 사직단이 설치되어 황실에서 유교식 제사가 이루어진다.
  • 고려 시대: 삼국시대의 제사들이 이어져 내려오고 성종 때 종묘와 환구단, 사직단 등을 설치해 황실에서 제사를 시행, 민중들은 팔관회, 연등회 등에 참가했다.
  • 고려 말기: 성리학의 수입과 더불어 주자가례에 따라 가문의 무덤(가묘)를 설치하려는 운동이 사대부 사이에서 활발해졌으나 별로 보급되진 않음. 에 제사를 대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 조선 시대 초기: 고려 때 있었던 불교식 의례의 전통이 남아 주자가례와 같은 유교 의례는 사회 전반에 보급되지 않았다. 경국대전에서는 문무관 6품 이상 관료는 3대, 7품 이하 관료는 2대, 서민은 부모만 제사 지내도록 했다.[29]
  • 16세기 중반: 성리학이 심화되어 양반사회에서 주자가례가 정착되고 주자가례에 명시된 4대조까지 제사를 지내는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면서 조상에 대한 존경과 추모의 표시로 행하여 지고 있다. 20세기 이후 개신교의 유입으로 인해 개신교 신자들은 제사가 자신들의 교리와 충돌한다는 이유로 제사를 거부하곤 한다.


  • 하회탈 전설 제사 : 고려 시대 중반 마을 사람들이 허도령의 죽음을 목격하고 자살한 김 씨 처녀의 제사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 삼척 해신당(海神堂) : 마을 제사를 지내는 제주(祭主)가 자신의 실물크기 남근을 깎아 모셨는데, 이것은 모태솔로사망한 처녀의 영혼인 해신을 위로하고 풍어와 다산을 염원하는 행사이다.
    파일:좌측_남근목5개.jpg

    처녀 영정 좌측 남근목 5개 배치
  • 수성당 :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에 있는 제당. 칠산바다를 관장하는 개양할미와 그녀의 딸 8자매를 함께 모시며 해마다 음력 1월 14일에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개양할미는 키가 매우 커서 나막신을 신고 서해를 걸어 다니며 수심이 깊은 곳은 메우고, 풍랑을 다스려 어부들이나 이곳을 지나는 선박들을 보호하는 바다의 여신이다.
  • 꽃뫼 제사 유적지 : 수원시 화서동 688-4에 위치해 있다. 옛날 옛적 병든 아버지를 극진히 모시던 한 처녀가 함께 일하던 머슴에게 강간당한 후 이 산에서 목을 매달았는데, 몇 해가 지난 후 그 처녀가 묻힌 자리에서 꽃나무가 무성히 자라났다. 그 때부터 사람들은 효심이 지극했던 처녀의 무덤이라하여 '꽃뫼'라고 부르며 제사를 지내줬다.
  • 아랑사 전설 제사 : 해당 문단 참조. 실제로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앙암의 용진은 나주시의 관원이 제사를 지낸다"라고 적혀있다.

북한의 경우 유물론적 공산주의 체제를 명분으로[30] 1960년대부터 조상숭배와 민간풍속을 봉건 잔재, 구 폐습으로 규정하고 혁파해버렸다. 성묘, 제사까지 금지당하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조금 허용되었다. 탈북민의 증언에 따르면 함경도 특유의 문어임연수어, 수수전을 차례상에 올리는 풍습은 단절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나 지도부의 권위를 가장 손상시킬 수 있는 신위를 올리는 것이나 제사와 무관하게 스승이나 부처에게 세 번 절을 하는 풍습은 거의 단절되어 북한에서는 절은 세 번 하게 되었다.

남북을 막론하고 고인이 사형수나 흉악범인 경우에는 제사를 당연히 지내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고위층의 제사용 얼음은 주로 동빙고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6.2. 미국

일부 한국계 미국인들이 제사를 지내는 경우가 있으나, 한국 본국에 비해 제사를 지내는 비율은 훨씬 적다.

일단 1세대 한국계 이민자 커뮤니티가 한인교회[31]를 중심으로 형성되었기에 개신교로 개종한 이민자들은 당연히 제사를 지내지 않게 되었다. 한인교회를 다니지 않거나 다니더라도 인맥을 위해 형식적으로 다니는 한인들의 경우도, 타지에서 먹고 살기 바쁜 와중에 친척들이 모일 수도 없는데 자신들끼리 제사를 지내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서 제사를 관두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는 교민 사회에서 한인교회의 영향력이 예전보다 훨씬 못하다지만 애초에 한국에서도 제사 문화가 쇠퇴하는 중이니 21세기 들어서 이민한 사람들은 개신교와 무관하게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중국계 미국인, 베트남계 미국인, 일본계 미국인 중에서도 드물게 제사를 지내는 집안들이 있다.

6.3. 중국

파일:돼지구이 제사음식 나르는 로봇개.webp
돼지 통구이 제사음식을 싣고 산을 오르는 로봇개
현대 중국은 제사가 간단한 수준이고, 한국에 비하면 복잡하게 지내지도 않는 편이다. 이미 제사는 중화민국 시대부터 간소화되어 가고 있었다. 1970년에 타이완 외성인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2대 봉사가 보편적이었고 제사상도 한국보다 훨씬 자유로운 편이었다.#

하물며 문화대혁명을 겪은 대륙에서는 하나의 제사상으로 6대 조상의 제사를 전부 지내며, 제사음식은 생선튀김, 닭튀김, 안 깎은 과일 몇 개가 끝이다. 중국 산둥성공자묘가 있는데, 제사 그딴 거 없다. 문화대혁명홍위병들이 공자묘를 훼손시킬 정도였다.

반대로 한국은 공산화가 되지 않아 유교 문화가 비교적 잘 보전되었기 때문에 무형문화재 85호로 석관대제(공자 제사)가 지정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는 석전대제가 실전되어 한중 수교 후 한국에서 배워가야 했고, 공자의 후손인 쿵더청은 곡부에 와주십사 하는 중국 쪽 친척들의 요청에 '조상님 묘를 파헤친 공산당이 있는데 어떻게 가냐? 미국중국의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고 미국의 도움을 받아서 국민당이 중국 대륙을 통일하게 되면 그 때 가겠다!'고 딱 잘라 거절하고 쿵더청의 대성지성선사봉사관[32] 작위를 이은 손자 쿵추이창도 한국에서 유교 행사를 함께할 정도로 유교 문화 소실이 심했다.

6.4. 일본

애초에 섬나라였던 특성상 일본은 중국의 문물들을 받아들이되 자신들에게 알맞은 수준으로 변화시켰고 당연히 유교식으로 거창하게 제사를 지내지는 않는다. 일반 국민은 화장한 후 묘비를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며 조상의 혼을 위해 성묘(墓参り)를 하고 집안에 설치된 불단에 공양(お供え)을 올린다. 성묘와 공양은 불교적 종교행사일인 피안(彼岸, 봄 피안은 3월 중순~말이며 가을 피안은 9월 중순~말)과 오봉(お盆)에 이루어진다.

에도 시대에 조선 및 명의 유신들을 통해 성리학을 받아들인 일부 유학자들이 불교식 화장을 거절하고 유교식 매장 및 삼년상을 치르기도 했는데, 이 경우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르지 않는 이들을 기리시탄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6.5. 베트남

호치민 초대 주석이 추석(Tết Trung Thu, 節中秋)을 어린이날로 바꾸자는 제안을 해서, tet thieu nhi라고 부르기도 한다. 낮에 제사를 지내며, 가족이나 친구끼리 월병을 먹는다. 여담으로 하노이에는 공자 제사를 지내는 문묘가 있다.

베트남의 제사상에는 이 올라간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명절이나 음력 보름날 등 제사를 많이 지내는 시기는 꽃장사의 대목이라고.

7. 사회적 의의

조선시대나 현대 핵가족화 이전에는 제사는 출세나 생계, 상속문제에 있어 매우 중요했다. 장자나 특정 자손이 선대의 땅과 노비를 물려받을 수 있는 합법적 명분이 '제사를 잇는 것, 또는 제사에 참여할 수 있는가' 였기 때문이다.[33]

하지만 현대사회는 개인의 사회참여권이나 생계를 각자가 꾸려나가는 시대로 바뀌었지 문중이나 집안 어른이 결정하는 경우가 없기에 그런 제사의 위상은 없어진거나 마찬가지다.

제사는 친족들과 조상들 간의 결속력을 강화시키는 역할도 하긴 한다.

8. 오해와 갈등

학계에서는 "현재에도 제사를 올리는 집은 조상에 대한 숭배의 목적이 아닌 친척 형제와의 관계유지와 전통적인 관례와 풍습으로 하는 것이고, 조상신을 모신다는 종교적인 이유는 매우 약해졌다"고 본다. 유교에서는 제사를 '근본에 보답한다'는 관점으로 바라볼 뿐 귀신의 존재유무에 대한 논의를 자제한다. 이는 "귀신은 공경하되 멀리하라"거나 "마치 옆에 계신 듯이 제사를 모셔라"라는 공자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실제 조상신이 강림한다는 믿음을 요구하는게 아니라, 마치 조상이 옆에 계신 듯이 하라는 요구에서 그치는 것이다. 박성규[34] 등 학술적인 연구에 따르면, 주자 역시 이러한 공자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주자는 조상의 영혼이 어딘가에 존재하다가 후손의 제사에 반응해서 내려온다는 개념은 명백하게 부정하였고, 영혼은 흩어질 뿐이며 성인의 영혼역시 더 잘 흩어질 뿐이라고 명시하였다. 공자 이전에 성립한 유교문헌을 해설할 필요성 때문에 '신이 있는 것 처럼'말하는 경우가 있지만, 주자 역시 영적인 존재인 귀신을 상정 한 것은 아니고, 순전히 인간의 도리에 관련된 의식일 뿐이다.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들 면면을 보면 그 중에서 몇명이 여전히 '조상신을 모신다'는 관습적 혹은 종교적 이유로 고집하고, 나머지는 이 사람을 반대하지 않아서 유지되는 면이 가장 크다. 종교적으로 유교는 사멸되고 있으며, 반전의 여지가 없고, 한중일을 막론하고 유교에 우호적인 사람들마저 중국공산당뿐만 아니라 중국국민당, 일본, 대한민국유교 합리주의자들 전부 무신론자들이라는 점에서 다른 종교와 명백히 다르다. 조상신을 고집스레 섬기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사람들 대부분이 유교가 아니라 무속의 관점에서 제사를 바라보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유교는 원시유교건 양명학이건 성리학이건 어느 쪽이건 간에 종교인과 상극이라 유학자들은 주기적으로 무속인, 승려, 기독교인 등등 모든 종교인들을 괴력난신 혹세무민한다고 처벌ㆍ학살하던 사람들인 걸 생각하면, 원래부터 종교라고 정의하는 게 가능하지 않다는 오래된 논란이 중국공산당의 유교부흥정책을 기점으로 중국발 논문의 물량공세 덕에 = 종교가 아니다. 정리되고 있는 추세다. 물론 조지타운 대학교, 서강대학교 등 유교가 종교라고 주장하는 논문을 쏟아내는 대학도 있는데,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작 유교를 스스로의 종교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과거나 현재나 유교를 우호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나 유학자들은 스스로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유교 외부에선 천명이나 천, 개념을 중심으로 너도 종교라고 칭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경우 조차, '천'개념 등을 종교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지, '조상신'에 대해서 종교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아니다. 성리학, 나아가서 송나라 명나라의 이른바 '리학'은 불교의 도전에 대한 유교의 응전으로 이해될 수 있다. 불교의 영향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근본적으로 불교와 차별화하겠다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성립된 체계이다. 박성규[35]에 따르면, 만약 어딘가에 영혼이 있어서 제사에 반응한다고 말을 하면 불교의 윤회론과 실질적으로 차별화하기 어려워진다. 따라서 그런 류의 주장은 불교 또는 불교의 영향을 받은 민간신앙의 영역이지, 불교에 대결의식을 가진 성리학자들의 주장이 될 수가 없다.

핵가족화가 진행되다 못해 일반적인 현대에는 제사를 지내는 게 정서적, 물리적으로 어려워지고 있고 성리학의 우주론마저 종교적으로 설득력을 잃어, 의의가 매우 퇴색되었다. 일단 보통 미디어 등에서는 제사가 후손들에게 공경심과 효심을 나타내는 의식으로 사회적 소속감, 연대감을 증진하며 가족 간의 우애와 화목을 다지는 의미를 보는데, 사실 이게 송대 주자가 주장하던 성리학적 제사론에서 춘추시대 공자가 주장한 원시유교의 제사론으로 돌아가는 것에 가깝다.

자세한 설명을 하자면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는 분명하게 "괴력난신을 논하지 않았다."라고 했다. 공자는 제사를 매우 중요한 의례라고 생각한 이유는, 그가 이상향으로 돌아가길 바랬던 주나라에서 봉건제의 근간을 이루는 종실중심주의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고대 중국에서 ‘’는 장례사를 일컫는 말이었다.

즉 주나라 천자는 종실의 장으로서 조상들에게 후손들을 대표하는 제사주가 된다. 그리고 제후들은 주나라 종실의 친척으로서[36] 제사에 참여함으로서 종실과 유대감을 가지고 지도에 따르며 보호를 받는다.

제후들은 자기 봉지에 가서 자기 부모제사를 지내는데 여기에는 대부들이 참여한다. 대부들도 당연히 인척이다. 대부들도 자기네 봉지로 돌아가서 또 제사를 지내는데 이때 경ㆍ사들이 참석한다. 이런 식으로 족벌 중심의 통제가 이루어지는 걸 종법질서라고 부른다. 즉 공자는 제사를 지냄으로서 얻어내던 권위와 그 권위에서 오는 질서와 평화를 원했기 때문에, "뭔진 몰라도 하던 대로 그대로 콜"을 외쳤던 것이다.
혼은 2대까지 남고 백은 4대까지 남는다는 주장은 불교에서 영향받은 영혼론이고, 이기론 역시 불교의 화엄경, 음양오행설과 태극도설은 도교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렇게 주돈이, 주희등의 설정덕후들이 우주나 내세등에 대한 설정을 확립시키면서, 검증할 수 없고, 잘 모르는 허황된 것에 대해서는 일체 이야기하지 않는 유교, 아니 그러다 못해 괴력난신하는 사람들을 증오하는 것이 전통이던 유교를 종교로 변화시켜 나갔다. 지식인들 이외의 민초나 아녀자들에게 있어 설득력을 제공할 수 없었고, 도교나 불교에 대응할 수 없으니 성리학으로 우주론과 내세론을 짬뽕하면서 이 시점부터 유교는 제도나 사상이라기보다는 종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건 공자가 창시한 원시유교와는 거리가 먼 아이디어다. 물론 성리학자들은 자신들이 적통이라고 하지만, 성리학에 대해 비판적인 유학자는 당대에도 있었다. 성리학송나라 시기에 성립된 이후 크게 융성했지만, 유학을 탄압한 원나라 때 크게 쇠하고, 명나라 때 융성한 양명학 등은 성리학의 바로 이 경향을 집어 큰 비판을 했다. 청나라대에는 문자의 옥으로 확대해석이 쉽게 가능한 형이상학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라 고증학으로 실용주의적 성향이 강해졌고, 특히 고전복원이 치밀하게 이루어져서 성리학과 공자, 맹자의 저서간의 차이가 크다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다. 다시 말해 중국에서 성리학을 유교의 적통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 공산주의 중국 정부에서만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를 좀 더 현대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일단 성리학이 형이상학적, 그리고 신비주의적(종교적) 관점을 포용한 것 자체는 어찌보면 유교(유학)이 사회의 주류 사상이자 지배 이념으로 자리잡는 과정에서 당연히 일어날법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사회의 이념과 사상에 대한 대중의 욕망중에는 괴력난신이나 주술, 점술이라거나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고, 정의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기능도 담당하는) 내세관에 대한 욕구도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만약 유학이 저러한 요소들을 받아들여 종교화되는 과정을 전혀 거치지 않았다면 사회의 주도 이념으로써의 기능 역시 제한적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특히 조선과 같이 유교를 사실상 유일한 공식 이념으로 삼는 사회에서는 유학의 종교화에 대한 욕구가 더 강력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으며, 이것이 조선에서 특히 성리학이 크게 융성한 이유 중 하나라 예상하는 것에도 큰 무리는 없는 것. 그래서 이러한 성리학에 대한 비판으로 양명학, 고증학등이 등장했다고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반대로 사회의 주류 사상으로는 한계가 있었던 것. 예를 들어 양명학은 성리학의 추상적, 공론적 측면을 비판하며 보다 현실적인 측면에 주목했고, 그를 통해 사회 비판의 영역까지 나아갔지만 그렇기 때문에 관학, 즉 정부에 의해 공인된 국가/사회의 주도 이념의 입지를 차지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고증학은 애초에 도피적 목적, 즉 형이상학이나 정치, 역사철학적 주제를 건드렸다가는 어디서 꼬투리가 잡혀 목이 날아갈지 모르니 안전한 고전 연구에 집중하는 과정에서 발전한 것이기에 오히려 현실적 기능을 회피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고증학 연구를 통한 고전복원에서 성리학이 공자, 맹자 시대의 고전 유학과 차이가 크다는 것이 명백히 밝혀지기는 하였으나, 이는 일종의 부수적 효과이지 그것이 본래 고증학의 목적이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더이상 유교(유학)이 '사회의 유일한 주도적 이념'을 담당하지 않고, 담당해서도 안 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성리학이 본래 가지고 있던 '필연성'은 더이상 필연적이거나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게 된다. 현대의 유학자 중 상당수는 아예 성리학을 유교 전통에서 많이 벗어난 일종의 "이단"으로 취급하며 성리학적 해석을 비정통적인 해석으로 취급하는데, 왜냐하면 국가 무신론을 장려하는 중국에서 많은 유학자를 배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유교 전통에서 성리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거의 대부분이나 다름없는 한국의 전통 유학자들은 "이게 무슨 곡학아세냐?"라고 말하겠지만, 이는 또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유교적 전통이 적폐나 인습 비슷한 취급을 받고 있는 한국의 사정과는 달리 중국에서는 공자학원등을 설치하여 국가 차원에서 유교 연구를 지원하고 있는 상황이니 어느 쪽이 더 주류로 자리잡기 쉬운 입장인지는 뻔한 것이다. 제 3자의 입장, 예를 들어 동아시아 철학사상사을 연구하는 외국 대학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영어로는 Confucianism(공자주의)라 불리는 유교의 원산지는 애초에 중국이다. 그리고 접근할 수 있는 자료의 양도 중국에 훨씬 많고[37], 인구수도 압도적인만큼 학자의 수도 그만큼 더 많은 중국의 주류 의견을 주류의 관점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훨씬 높은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성리학을 중시하는 한국의 관점은 그냥 '한국 학계의 특수한 경향'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현대의 무신론적, 또는 탈 종교적 합리주의에 기반한 해석'은 오히려 창시장인 공자의 생각과 가장 가까운 것이기도 하다. 제사는 친척들이 모여 조상을 기리면서 동시에 친목을 도모하는 행위인데, 이것을 백성들이 하면 그냥 가족의 우애를 다지는 행위가 되지만 전근대의 친족권력집단이 하면 이것이 곧 제국의 통치체제가 되는 것이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제사의 위상 변화 역시 이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잇다. 집성촌을 중심으로 한 농업의 비중이 높던 전근대 사회와는 달리, 일제강점기6.25 전쟁, 그리고 급격한 산업화 및 도시화를 거친 한국에서는 대가족(및 친족집단)이 곧 생산과 사회활동의 기반이라는 위상 역시 급속히 상실하게 된 것. 게다가 친족끼리는 서로 돕는 것이 당연하던 전근대에 비해 현대 사회에서는 친족에 대한 당연한 도리라고 여겨지는 범위 자체가 훨씬 작아졌고, 사회적 공정성에 대한 기준이 새로워지면서 어떠한 '도움'은 부정행위로 여겨지게 되는 변화도 생긴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도 집성촌과 종중을 유지하고 선산을 비롯한 재산권이 얽혀있는 집안에서야 그런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라도 제사가 여전히 중요한 문제로 여겨지겠지만, 그렇지 않은 많은 집안에서 제사는 이전 시대에 비해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된 것. 위에서는 제사란 친족권력집단(왕실)에서는 '정치행위'이지만 일반 백성들에게는 '친족간의 우애를 다지는 행위'라고 했는데, 이 '친족간의 우애를 다지는 행위' 역시 전근대 사회에서는 친족집단 자체가 중요한 사회적 단위였기에 실질적으로 중요한 영향력을 끼쳤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정말 단순하게 감정적, 정서적인 기념행위라는 측면에 계속 무게가 더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제사를 아직 유지하고 있는 사례의 많은 경우가 관습적, 종교적 전통의 유지에 대한 고집 때문인 것 역시 이 관점에서 보면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전통적으로 지켜오던 관습이니 계속 지키고 싶다'는 것은 분명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동기이기 때문이다.

9.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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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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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제사에 대한 견해

〈UPINEWS〉가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서치뷰'에 의뢰해 전국 만 19세 이상 성인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전체의 35.7%가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국민 3명 중 1명은 이번 추석에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는 조사결과다.​

지역별로는 보수적인 대경권에서는 80.7%가 차례를 지낸다고 응답한 반면, 서울호남은 차례를 지낸다는 응답이 각각 53.2%, 53.9%로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38]

또헌 기사에 따르면,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이 최근 조합원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결과, 남성의 16.7%, 여성의 2.4%만 "사후에 자손들이 나를 기리는 제사를 지냈으면 좋겠다"고 응답했다. 조합원 남성의 84%, 조합원 여성의 대부분은 자신의 사후 제사나 차례를 지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최근에는 제사상을 차리길 거부하는 소위 '며느리 파업' 같은 사례도 생기고 아예 제사상을 대신 차려주는 업체에게 전부 맡기고 집안의 여성들에게 제사상 차리는 일을 시키지 않는 걸로 타협을 하는 집들도 늘어나고 있고, 집안의 제사를 중단하는 사례도 계속 생기고 있다.

2019년 기사

시대의 변화 때문인지성균관도 전향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

2023년 기사

11.1. 종교별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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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경우

단순히 집안 행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39]가 아닌, 말 그대로 특정 이유 때문에 제사만 할 수 없는 경우들이다.
  • 개신교 교파 및 이슬람 등: 이 쪽은 제사 자체를 교리에 어긋나는 우상숭배라며 전면 금지시킨다. 개신교에서는 제사 대신 추도예배를 드린다.
    • 가톨릭 신자의 경우는 상술했다시피 여러 가지 원칙을 지킨다면 조건부로 제사를 지낼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유교식 제사'는 지낼 수 없다고 보면 된다. 제사를 드리려면 천주교식 제사법을 따르거나 '신(神)'자가 적힌 신주 또는 지방, 축문, 합문[40] 등의 미신적인 요소를 없애야 하며, 이를 무시할 경우 고해성사를 봐야 하는 대죄가 된다.[41] 성공회 역시 제사에 대해 가톨릭과 비슷한 태도를 보였다.
    • 항목에 나오듯이 예외도 많은데, 가령 무슬림이 전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지만 유목민적 전통도 적잖게 남아 있는 튀르키예 같은 경우 제사와는 다소 다르지만 고인의 무덤을 방문해 성묘를 하고 의식을 치르는 풍습이 있다.
  • 성매매 여성: 전근대에는 부정하기 때문에 제사에 참석하면 무례하다 하여 자발적으로 또는 집안에서 강제로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 임산부: 절하는 것이 몸에 무리가 간다는 이유로 대개 금지된다. 만삭인 경우라면 더더욱.
  • 하반신 장애인 등 일부 지체장애인: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절을 할 수 없어 제사에 참여할 수 없다. 과거 주리틀기를 당한 죄수들이 적장자라도 폐적된 이유. 부상을 이유로 다리나 발에 깁스를 한 경우에도 동일하다.
  • 고인이 사형수인 경우: 북한에서 사형수는 반역자로 취급되어 '반역자는 제사를 지낼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금지하고 있다. 이게 걸리면 노동단련대로 끌려간다. 물론 남한에서는 당연히 사형수의 제사를 지냈다고 처벌하는 법은 존재하지도 않지만 애초에 교정주의를 지향하는 사법체계인 대한민국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을 정도면 누명을 쓴 것이 아닌 이상 가족마저도 손절할 법한 흉악범죄자[42]라는 뜻이기 때문에 제사까지 지내주는 자체가 사실상 없다고 보면 된다. 애초에 사형까지 안 가더라도 고인이 무기 또는 일정 이상의 유기징역/금고형을 선고받은 경우에도 제사를 건너뛰는 경우도 많다.[43]

원래 제사를 지낼 때에는 심신이 청정해야 한다 하여 목욕제계를 한다거나, 음식도 비린 것을 먹지 않거나 하는 등 준비과정이 있었다. 제삿날에 남의 집에 문상을 갔거나 집안에 병자가 있거나 하는 경우에는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유교적 예법에서는 심지어 관리가 형벌에 관련된 문서를 처리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제사를 앞두고 남에게 벌을 주는 과정에 참여하는 것은 '심신의 청정'을 깨트리는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13. 제삿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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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안동 헛제사밥.jpg
안동의 헛제삿밥

위 문단의 설명처럼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은 금기나 규칙이 많기 때문에 평소 먹는 밥상과 다르다. 전과류나 기름이 들어가는 전을 많이 쓰고 고춧가루, 마늘 같은 향신료를 쓰지 않아, 마치 사찰음식처럼 일반적인 한식과 별개의 영역이 되었다. 지역이나 집안마다 다르긴 하지만 탕국, 돔배기, 삼색나물처럼 제사상에서만 볼 수 있는 요리가 많다. 이런 제사음식의 맛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리는데, 고추 같은 자극적 향신료를 덜 쓰는 점이나 제사를 준비하고 지내면서 식어버리는 점, 그리고 한 끼에 먹어버리기엔 많이 만들기 때문에 냉장고에 보관되면서 맛이 더 떨어지는 점 때문에 젊은층으로 갈수록 불호가 점점 많아지는 추세다.

경상북도 안동시 등에는 헛제삿밥이라는 향토음식이 있는데, 제사가 없는 평소에도 제사 음식을 먹으려고 생겨난 것이다. 제대로 하는 식당은 약식이지만 제사를 지내는 곳도 있으며 나이 지긋한 사람들은 그렇게 해야 진짜 맛이 난다고 한다.

14. 기타

  • 현대 한국은 교육열이 강해지면서 자녀가 외국어고등학교과학고등학교특수목적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는 중3이라거나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고3이라면 그 해 제사를 포기하기도 한다. 고시생이나 공무원 준비생들 역시 시험에 합격할 때까지 제사 참석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위원과 관리요원, 검토위원처럼 업무를 위해 외부와 격리되는 경우, 당연히 참여하지 못한다. 수능뿐 아니라 공무원 시험이나 각종 자격면허 시험에서도 출제위원, 관리요원, 검토위원들은 제사가 걸려도 못 간다.[44] 이들은 직계가족의 장례 때만 짧은 외출이 허용될 뿐, 이 때도 보안요원이 동행한다. 탁구선수 유승민은 제삿날에도 경기가 있어서 참석하지 못했다고 한다. 올림픽 선수들은 올림픽 기간에 제사가 껴 있으면 메달을 노리기 위해 대부분 불참한다.
  • KBO 리그에서도 제사와 관련된 사건이 있었다. SK 와이번스 (현 SSG 랜더스)의 2군 코치가 이만수 당시 2군 감독에게 부친의 제사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받으려 했는데 이만수가 1군 감독 김성근의 허락도 없이 OK를 했고, 이를 알아차린 김성근 당시 1군 감독은 제사 참석도 장수가 전쟁 중에 전쟁터를 비우는 행위로 간주해 “어딜 감히 장수가 전쟁 중에 전쟁터를 비우냐”면서 화를 냈다고 한다.
  • 현대에 와서는 차례나 기제사를 지내게 되면 전국, 적어도 두 광역시권에 흩어진 친척이 모이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 보니 구제역이나 MERS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같은 전염병이 생기면 제주 일가만 간소하게 지내기도 한다. 집안에 임산부와 환자가 있는 경우도, 집에 따라 아이가 아직 돌이 되지 않은 경우도 마찬가지로 참석하지 않거나 부르지 않는다. 제사가 학기 중의 평일이나 시험기간에 걸려 있으면 대부분 불참한다.
  • 실향민들은 대부분 임진각 망배단[45] 등 북녘이 보이는 곳으로 가서 제사를 지낸다. 건설로 고향이 수몰되거나[46] 이런저런 시설을 짓는 과정에서 고향이 철거된 지역 출신[47], 문화재 복원으로 인해 고향이 철거된 지역[48] 출신 등 극소수의 경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실향민들은 고향을 북한 지역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 제사상의 동서남북은 실제 방위와 다를 수 있다. 같으면 좋겠지만 건물 구조상 불가능한 경우, 제사상의 방/신위가 있는 곳을 북쪽, 지내는 사람이 있는 곳을 남쪽, 동쪽은 지내는 사람의 오른쪽, 서쪽은 지내는 사람의 왼쪽으로 설정한다. 전통가옥이면 대청마루가 남향이니까 맞지면 현대는 그냥 신위가 북쪽이다.
  • 놀부는 제물 대신에 종이에 음식 이름을 써서 올렸다. 조선 후기 주자가례가 널리 보급되면서 사당을 지을 능력이 되지 않는 집에서는 사당을 그린 그림을 대신 걸고 제사를 지내긴 했지만, 놀부는 재력도 있으면서 구두쇠라 아끼려고. 그 다음 해에는 제기 위에 그냥 동전을 올리고, 그 다음 해에는 무려 신위를 들고 시장바닥을 돌아다니며 음식 앞에다가 신주를 들이 밀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도 등장인물마다 다르게 묘사된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가난한 선비가 제사는 지내야 하는데 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조상님의 신주를 들고 시장을 돌아다녔는데, 그날 밤 꿈에 조상님이 나타나 배불리 먹어 만족스럽다며 은덕을 베풀었다는 이야기다.
  • 제사 날짜는 대부분 음력으로 계산하는 경우가 많지만, 일부에서는 양력으로 계산하기도 한다. 성균관 문묘에서 행하는 석전대제와 종묘 제례는 양력으로 계산해서 치르고 있다. 석전대제는 9월 28일(공자의 탄신일)과 5월 11일(공자의 기일), 종묘제례는 매년 5월의 첫째 주 일요일에 행한다. 양력을 중심으로 한 생활 습관에 익숙한 세대가 늘면서 음력으로 치르는 집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 2월 29일이 제삿날이면 4년에 한 번[49]씩 제사를 지내게 된다. 이렇게 되면 평년에는 2월 28일이나 3월 1일로 땜빵하거나 음력으로 환산한 날짜에 제사를 지내야 한다. 음력으로 윤달이 제삿날이면 날짜를 영원히 못 찾을 수 있으므로[50] 무조건 양력으로 지내야 한다.
  • 한복을 입고 제사를 지낼 때 여자는 두루마기를 벗고, 남자두루마기를 입어야 한다. 여자는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제사를 지내도 되지만 남자의 경우 바지저고리 차림(생활한복은 제외)이나 마고자 차림으로 제사를 지내서는 안 된다는 뜻. 현대 시중에서 파는 아동한복의 90% 이상이 두루마기가 없기 때문에 아이들의 경우에는 그냥 저고리나 마고자 차림으로 제사를 지낼 수밖에 없다.

    양복을 입고 제사를 지내면 남자는 와이셔츠 단추를 끝까지 잠그고 넥타이를 맨 뒤 블레이저를 입으며, 여자는 블라우스 단추를 끝까지 잠그고 블레이저를 입는 것이 원칙이다. 즉, 와이셔츠블라우스 차림으로 제사를 지내서는 안 된다는 뜻. 다만 장례식장에서 철저히 지켜지는 것과는 달리 제사나 차례에서는 지키지 않는 집안도 많다. 교복한복이 아닌 이상 교복을 입고 제사를 지낼 때도 양복과 동일하게 적용된다. FM(?)을 중시하는 집안이 아닌 한, 단정한 차림이면 모두 허용하는 집도 많다.
  • 고려 시대에는 불교국교이고 유교적인 제사문화가 완전히 정착하기 이전이라, 이나 무당에게 땅이나 노비 등의 재산을 제사 비용으로 주고 제사를 대리하는 경우도 흔했다. 이런 풍조는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중기부터 유교적 제사문화가 강화되어 없어졌으나, 유교의 영향력이 약화된 현대에는 부활하여[51] 점점 성행하고 있는 중. 때문에 불교 집안이라도 자주 다니는 절에 제사를 맡기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 집도 있다. 혹은 명절법회라 하여, 명절마다 절의 신도들이 한데 모여 합동 차례를 지내기도 한다.
  • 고려 말기에는 유밀과가 크게 유행했는데, 불교 국가인 고려의 특성상 살생을 터부시하다 보니 대충 동물 모양으로 유밀과를 올리던 게, 점점 과일 대신 과일 모양 유밀과도 올리고, 모양도 점점 호화로워지니 보다 못한 조정에서 유밀과 금지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한 게, 전통 한과는 제조하는 데 엄청난 비용과 노력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과 문서로.
  • 천도교에서는 향아설위(向我設位)라 하여 위패가 아니라 제사를 지내는 사람을 기준으로 제물을 진설하고 제사를 지낸다. 다만 일반 가정에서는 그다지 엄격하게 지키지는 않는 듯.
  • 홀수가 상당히 중요하다. 수를 셀 수 있는 제물들(ex-과일, 송편, 포 등)은 절대 짝을 맞춰 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제물 준비를 할 때 밤을 10개를 샀다 해서 10개를 다 놓느냐 하면 10개는 짝수기 때문에 1개는 남겨놓고 9개만 올리는 방법이다. 사실 이는 음양의 철학문제로, 땅에서 난 것은 음의 속성을 가졌으므로 홀수로 놓아 고인과 더불어 음양의 조화를 꾀했다고 봐야한다.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난 것, 이를테면 새 종류는 원래 짝수를 놓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의미가 없어지고 '홀수로 놓아야 한다'는 규칙만 살아남은 것.
  • 현대에는 인간이 아닌 생물에게 제사를 지내는 경우도 있다. 이는 유교적인 의식보다는 추모 행사에 가까운 것. 개인이 생전에 아끼던 애완동물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나 혹은 의학생물학 연구를 위한 실험 과정에서 희생된 생물들을 추모하기 위한 것 등이 있다. 또한 대구 치맥 페스티벌은 닭들을 위한 위령제를 개막행사 때 진지하게 지낸다. 사실 이것은 윤회와 축생의 영혼을 믿는 불교 수륙재의 영향이기도 하다.
  • 북한에서도 봉건적인 잔재라고 해서 없애려고 노력을 했고, 많은 가족들이 제사를 지내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고, 80년대 이후 당국의 허용으로 제사를 다시 지내는 가족이 늘어나긴 했다. 하지만 많은 북한 사람들은 여전히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조상에 대한 예라고 해봐야 무덤에 가서 을 바치고 묵념하는 정도이다. 제사를 할 경우 남한에서는 제사 때 2번 절하지만 북한에서는 3번 절한다. 다른 점은 사형수에 대한 취급인데, 남한에서는 고인이 사형수라고 하더라도 유족이 원하면 제사를 지낼 수 있지만,[52] 북한에서는 사형수는 반역자로 취급되어 '반역자는 제사를 지낼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제사를 못 지내게 하고 사형수의 제사를 지내려다가 걸리면 노동단련대로 끌려간다. 이는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유현주가 증언했다고 한다. 유현주가 증언한 해당 사례는 그녀의 고향인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공개처형을 당한 사형수의 제사를 지내려다 발각된 가족이 두들겨 맞고 6개월짜리 노동단련대로 끌려간 사례였다.
  • 남의 집 제사를 방해하면 제사방해죄로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 제사방해에는 제사장소에서 떠들거나 제사상을 뒤엎거나 제사를 진행할 수 없게 하는 행위등이 있다. 정말로 남의 집 제사에 감놔라, 배놔라 하면 제사방해로 졸지에 벌금형을 받을 수도 있으며#, 최악에는 3년 이하의 징역도 가능하다.#
  • 무슬림은 샤하다[53] 때문에 제사를 지낼 수 없다.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제사상에 절하는 것을 이슬람교 교리에 어긋나는 우상숭배라며 죄악시하기 때문이다.[54] 개신교의 경우는 워낙 신학적 스펙트럼이 넓기 때문에 제사에 대한 의견이 갈린다. 교회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한국의 경우 대부분의 개신교 교단은 제사를 금지한다.[55]
  • 사제(司祭)라는 직명을 직역하면 "제사를 맡는 사람"이라는 의미인데, 사실 이 말은 기독교 신학적으로 보더라도 절대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동아시아식 제사'와는 목적도 형식도 모두 다르다. 자세한 것은 미사, 성찬예배, 감사성찬례 문서로.
  • 설날이나 추석 때 합동 차례를 지내는 군 부대도 있다. 대상은 설날이나 추석 때 휴가를 안 나가는 부대원 전체다. 대부분 병사식당 한켠에 차례상을 차려놓고 개신교와 같이 제사를 금지하는 종교를 믿는 사람은 뒤에 서서 목례, 그 외에는 절 한두번만 하고 끝낸다. 대부분의 합동 차례상은 한사람 분량만 차리는데 조상들의 수대로 하면 아무리 먹성 좋은 20대 군인이 있더라도 다 먹지 못하고 버려지는 음식물이 많아지기 때문이다.[56] 부대 분위기에 따라서는 간부들(특히 지휘관, 참모, 주임원사)도 상당수가 명절 땐 휴가를 못가고 당직이 아님에도 부대에 출근해서 이 행사를 같이 치러야 한다. 특히, 차례상 차리는 거 감독해야 하므로 조리 부사관들은 태생적으로 명절 당일 반일 정도는 의무적으로 출근해야 한다. 축구대회 등 단결행사로 이어지는 경우도 흔하다. 높으신 분들은 명절 연휴 중 병들 무료하게 놔두면 고향 생각에 우울해지거나 심심함을 못 이겨 사고 친다고 여겨서 일부러 고생시킨다는 카더라가 많이 퍼져있다. 다만 실제로는 사서 고생을 시킨다기보다는, 명절 때 이런저런 이벤트를 많이 하는 것이 명분이 서기 때문이다. 이런 이벤트들은 휴가외박이 걸려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무작정 고생만 하는 것은 아니니까 힘을 내보자. 배에서 생활하는 해군의 경우에는 함정에서, 공군은 병사식당에서 차례를 지낸다고 한다. 지휘관이 대인배인 경우는 종교별로 병들을 분류하여 각자의 종교에 따른 방식으로 제사를 지내게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종교적으로 제사가 허용되지 않는 병들은 안 해도 된다.[57] 그리고 개신교를 믿는 지휘관과 병사들은 따로 영내 교회에서 추도.명절예배를 드리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지휘관이 참석하면 계급이 높은 지휘관이 추도ㆍ명절예배 설교를 하는 경우가 있다.
  • 교도소에서도 설날, 추석에는 차례를 지낸다. 이를 "재소자 합동차례"라고 부른다. 물론 모범수에게만 허용되어 있다. 하지만 사회적 인식상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 BC 3000년 경 갑골문 연구로 은나라의 왕이 자신이 왕이 되고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주변에 있는 토착종교를 싸그리 배척하고 왕의 조상만 섬기게 하는 문화를 만들었고, 이에 대해 일어날 불만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 자기 조상을 섬기면 날씨도 좋아지고 전쟁도 이기고 하는 일마다 잘된다고 하였다. 그러다 은나라는 주나라에 멸망 당하는데 주나라가 자기 나라도 졔례의식을 잘 받아들이고 은나라의 제사담당자를 불러들인다. 그러면서 주나라에도 조상숭배 문화가 퍼진 것이다. 그러다 춘추전국시대 공자의 등장으로 유교의 영향아래 지금까지 오게 된 것이다라는 주장이 있으나 해당 주장은 유학에 매우 비판적인 김경은 교수의 주장에서 나온 것이므로 그 부분은 고려해서 판단하자.
  •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정치가였던 안영은 "유자(儒者)들은 복상(服喪)의 예를 중시하고 가산을 기울여서라도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는데, 만약 그것을 백성들이 본받게 된다면 이 또한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주문왕(周文王)은 이미 가셨고 왕실까지 쇠퇴한 지 오래 되었는데도 지금 유자들은 의례(儀禮)를 성대히 꾸미고 번잡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세상에 옛날의 예를 부활하려고 하더라도 헛수고에 끝날 것은 명백합니다."라고 하며 제사의 폐단을 지적했다.
  • 제사 음식에 특별한 제한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알려지기 시작하자 제사상에 피자, 스테이크, 치킨 등의 신세대 음식이나 양식을 올려서 조상님들이 다양한 음식을 맛보게 해드리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집안도 있다. 또한 제사를 지내고자 하는 조상이 얼마 전에 돌아가신 경우이고 직계 가족이 살아있는 경우라면, 해당 인물이 조상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터이니 조상님께서 생전에 좋아하던 음식 위주로 차려 놓고 제사를 지내는 경우도 있다. MZ세대가 제사를 지내게 되는 2040~2050년 이후로는 직접 제사음식을 만들기 보다는 피자, 치킨, 햄버거 등의 패스트푸드는 물론 짜장면이나 짬뽕 등의 배달음식을 시켜 제사상에 올리는 경우도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애당초 현대 사회의 제사 음식은 1960년대 농경 사회의 잔치 음식을 제사상에 올리던 것이 표준화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 윤달에 사망한 사람의 제사를 언제 지낼지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현대에는 갖가지 방법이 나왔다. 윤달이 있는 해에만 지내기도 하고[58]도 있고, 윤달이 없는 해에는 평달에 지내고 윤달이 돌아오면 그 윤달에 지내기도 하고[59] 평달에 지내는 것은 맞지 않으니 다음 달 초하루에 지내기도 한다.[60] 사실 조선시대에도 이 문제가 아리송하기 때문에 저명한 유학자들에게 물어보는 이들도 있었는데, 퇴계 이황 등 조선의 유학자들은 제사는 무조건 평달에 지낸다는 견해였다. 이유는 윤달은 '정상적인 달'이 아니라는 것. 음력 윤8월 14일에 죽은 사람이 있다면, 그 제사는 무조건 평달 8월 14일에 한다는 것이다. 제사상에 비정상적인 것을 제물로 올리지 않듯이, 제사를 지내는 시기 또한 비정상적인 때는 피한다는 논리이다. 삼년상을 치를 때에도 중간에 윤달이 걸리면 상을 지내는 기간을 한 달 더 늘렸다.
  • 음력 11월 중순~12월 중순이 기일이라면 윤달 배치에 따라 한 해에 두 번 제사를 지내는 해와 아예 제사를 지내지 않는 해가 나타나기도 한다. 2016년 12월 25일이 음력 11월 27일이었으므로 이 날 제사를 지냈다면 2017년에는 윤5월[61] 때문에 건너뛰고 2018년 1월 13일에나 다음 제사가 오는 셈이다.
  • 제사 지낼 때 대개 남성들은 방 안에서, 여성들은 방 밖에서 지내기도 하는데, 남아 선호 사상의 영향이다. 음복도 남녀 따로 하는 집안들도 꽤 있다.
  • 모종의 이유로 환갑을 맞지 못하고 죽은 사람의 환갑에 지내는 제사는 ‘사갑제’라고 부른다.
  • 일부에서는 장애인들이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하는 경우가 있다.
  • 기독교에서의 제사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기독교에서 제사의 대상은 하느님 뿐이며, 이 제사를 집전하는 이를 사제라고 칭한다. 가톨릭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등에서는 사제가 미사성찬예배를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로서 바친다. 개신교에서는 예수가 사제인 동시에 십자가 위에서 제물이 되어 한 번의 완전한 제사를 이뤘으므로 더이상의 제사는 무의미하다는 신앙을 갖고 있으며, 사제의 직위 또한 부정한다. 다만 성공회의 경우는 좀 복잡한데, 사제 계급이 존재하며 감사성찬례라는 제사를 드리지만, 평신도 또한 일상 생활 속에서 하느님 나라를 실천하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 거룩한 사제와 제물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신앙을 갖고 있다.
  • 2020년에는 코로나19 사태로 온라인 제사가 등장하기도 했다.
  • 일부 집안에서는 고인이 일정 이상의 형을 선고 받은 경우 그 사람의 제사를 지내지 않기도 한다. 예를 들면 고인이 징역 10년 이상 또는 금고 10년 이상의 형의 선고를 받은 적이 있는 사람은 제사를 지낼 수 없도록 하였을 때 아버지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면 그 제사는 건너뛰게 된다. 이런 경우는 보통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 받았을 때로 정하며,[62] 벌금형을 추가하는 경우도 드물게 있다.
  • 2023년 5월, '자녀 중 연장자'를 제사주재자로 가장 우선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와 판례 변경 되었다. 원래는 '장남'이 제사 주재자가 되어야 했다. #
  • 코로나 19 이후 페미니즘 향상과 반유교의 확산으로 인해 점차 폐지되는 추세이다.

15. 관련 문서


[1] 초조 이하 고조 이상의 조상[2] 음력 9월[3] 보통 한식 때 묘사를 거행한다. 10월에 또 하기도 한다.[4] 사진에는 제주라고 나오는데 제사에 쓰이는 술(祭酒)이라는 뜻으로 같은 말이다.[5] 기제사는 일반적으로 모인다고 해도 직계가족들만 모이고 명절처럼 일가친척들이 죄다 모이는 경우가 잘 없으므로 규모나 비용는 둘째치고 그만큼 인간적인 스트레스 받을일은 없다.[6]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7] 다만 고려 시대에는 3품 이상 관료가 되어야 3대까지 제사를 지냈으며 조선 경국대전의 경우 3품 이상 4대, 6품 이상 3대, 7품 이하 2대까지 제사가 가능했고 일반 양인은 부모선까지로 제사지내는 대수가 제한되었다. 건전가정의례준칙에서는 제주 위로 2대 조상(부모, 조부모)까지만 모시도록 되어 있다.[8] 는 아열대 지역 식물이라 온대기후인 조선에서는 극히 일부 지역에서 나는 고급품이었고, 석회수 때문에 맥주를 물 마시듯 마셔야 했던 중세 유럽처럼 차가 필수적이었던 중국과 달리 조선은 석회수가 거의 없어 그냥 자연상태의 물을 바로 마실 수 있는 환경이었으므로 차를 마실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그 당시 조선은 차의 공급도 수요도 적을 수밖에 없었던 것.[9] 술 진상은 본래 주자가례의 참례에도 있었으며 이 부분은 동일하다(주자가례 사당편). 율곡 이이가 지은 격몽요결에서는 "차는 중국 풍습이고, 술이 조선 풍습이다"라고 하면서 차를 빼버린다. 그러나 이건 상술됐듯 차가 조선에서는 대단히 고급 사치품이었기 때문이라는 다소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10] 제사도 안 지냈으면서 제사와 똑같은 재료로 비빔밥을 만들어 먹으면 이걸 헛제삿밥이라고 하는데, 특히 경북 안동시의 헛제삿밥이 유명하다.[11] 단적으로 고춧가루가 전해진 시기를 보면 왜 오신채에도 이름이 없고, 고춧가루 이야기는 언급도 없는지 알 수 있다.[12] 주세법상으로는 약주로 분류.[13] 삼가 맑은 술과 음식으로 공손히 잔을 올리니 흠향하소서.[14] 레드 와인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데, 첫번째로는 색이 붉기 때문이고 두번째로는 대부분의 경우 한식과의 조합이 극악이기 때문. 화이트 와인도 탕국씨간장을 풀어버리는 순간 그 어떤 화이트 와인을 갖고와도 답이 없게 되긴 하지만 레드 와인보다는 상황이 좀 낫다.[15] 오래 전부터 내려오던 관습이긴 하지만, 사실 여기에는 근현대의 아픈 역사도 숨어 있다. 제주도는 이웃집이나 친구 집에서도 제삿날이 같은 사람들이 아주 많아 생전에 고인이 친했던 집들끼리 지금까지도 매년 4월 3일마다 모이는 경우가 많다.[16] 그러나 제사는 아들들만 번갈아가며 지내는 게 보편적이다.[17] 사실 한반도에서도 고려 ~조선 초까지는 유교적인 가례문화가 약해서 지금과 많이 달랐다. 딸과 외손자가 제주가 되거나 상속을 받는 게 당시는 특별한 게 아니었다.[18] 이러한 제주도 특유의 제사방식이 원래(유교 도입 이전) 한반도의 전통적인 제사가 아닌가하는 의견도 있다. 고인보다는 교통이 발달하지 못해 자주 만나지 못했던 자손들이 만날 수 있는 잔치적인 의미를 지닌다. 유교 이전 고인을 기리며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식사가 유교 이후 홍동백서를 비롯한 오직 고인만을 위한 상차림으로 의미가 변질되었다는 것이다.[19] 본래 제주도는 토질의 특성상 농사를 짓는 것이 매우 어려워 쌀밥이 대단히 귀했다. 그래서 이나 보리를 쪄서 반죽해 쌀밥 대신 올렸는데, 현대에는 이것이 으로 정착되었다.[20] 제주도에서 생선이라 함은 옥돔을 지칭한다. 물고기를 총칭하는 의미로도 쓰인다.[21] 제사를 지내면 향을 피우고 그 향의 냄새가 음식에도 배야 하는데 그게 없으므로 진짜 제사를 지낸 음식이 아니라는 것.[22] 탕이랑 밥을 합쳐도 올라간 제수가 10개가 안 된다.[23] 통상적으로 이름에 '치'가 들어가는 생선은(꽁치, 삼치 등) 등푸른 생선이 대다수이며, 지방 성분이 많아 비린내가 제법 나는 생선이기도 하다.[24] 여자가 제사에 아예 참석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여자도 남자와 같은 방식(여성의 절하는 자세는 더 힘들다)으로 절해도 무방한 집도 많다. 여자는 의무인 집도 있고 의무가 아닌 집도 있고, 소수가 지금도 여자는 배제하는 듯. 과도기였던 21세기 초반엔 여자아이들만 참석시키고 여자 어른들은 참여하지 않는 가문도 있었다.[25] 코로나 19로 인해 제작된 전국 최초 온라인 차례상이다. 회원 로그인 필수.[26] 간편 로그인하면 된다. 메뉴바 '추모관꾸미기' 클릭. 또 한 번 우측 상단 '추모관꾸미기▼'클릭하여 '차례상 꾸미기'에 접속하면 된다[27] 왕건 문서의 청동상 문단으로.[28] 도교 속 신들과 별의 신, 옥황상제에게 지내는 제사[29] 요즘으로 치면 행정고시를 통과한 5급 사무관 정도는 되어야 증조부모 제사를 지낼 수 있었고 6급 이하 공무원은 조부모까지만 제사를 지낼 수 있고 공무원이 아닌 사람은 부모 제사만 지내라는 뜻.[30] 하지만 유교적인 이념이라도 남한보다도 논어에서 유래한 '이신작칙' 같은 말을 자주 쓰는 등 지도부의 권위를 드높일 수 있는 요소는 막지 않았다.[31] 한국의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한인교회도 기독교 근본주의 성향이 매우 심하다.[32] 공자의 후손들이 세습하는 관직명. 장관급에 상응하지만 무보수 명예직이다. 원래 이 관직은 연성공이라 하여 군주국의 귀족 작위에 해당했으나 신해혁명으로 신분제가 폐지되고 공화국이 된 후에는 공화국에 귀족 작위가 있다는 게 모순이라는 지적이 제기되어 쿵더청 대에 '~관'이라는 근대적 관직명으로 바꿔서 장관급 공직자의 격으로 해주었다.[33] 남성만이 제사를 이을 수 있었으며, 아무리 가까운 남성이라도 성(姓)이 다르거나(외손, 사위 등 부계 후손이 아닌 자) 출신에 문제가 있다면 문중의 제사에 참여할 수가 없다.[34] 박성규, 토픽맵에 기초한, 철학고전 텍스트들의 체계적 분석 연구와 디지털 철학 지식지도 구축, 주희 주자어류(권3),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6[35] 박성규, 토픽맵에 기초한, 철학고전 텍스트들의 체계적 분석 연구와 디지털 철학 지식지도 구축, 주희 주자어류(권3),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6[36] 원래 주나라의 봉건제는 주나라 종실의 친족들에게 영토를 분봉해주는 제도였기 때문에, 당연히 제후들은 종실의 멀고 가까운 친척이 된다. 간단히 말해 호경(현재의 시안) 일대를 지배하는 성읍국가였던 주나라가 정복과 개척을 통해 영토를 점차 확장하면서 왕실의 친족(예컨데 천자의 형제들 -주로 동생들-이나 장자를 제외한 아들들)에게 영토를 나눠준 것이 주나라 봉건제의 시작이라는 것. 따라서 천자는 장자의 장자로 이어져온 종가가 된다. 물론 영토 확장 과정에서 복속된 이성제후도 있었지만 개념상으로는 그렇다는 뜻이다.[37] 문화대혁명으로 물론 많은 전통과 자료가 소실되었지만 그 넓은 땅덩이 여기저기에 문화대혁명의 불길을 피해 남아있는 자료의 양은 무시할 수 없다. 부동산 개발하다 오래된 묘지에서 천몇백년 전의 유교경전이 튀어나오면 대한민국에서는 그대로 국보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내지겠지만 중국에서는 지방정부가 회수에서 그냥 장서고에 집어넣는다고 할 정도. 애초에 문화대혁명 이전에도 분서갱유니 원대의 핍박이니 문자의 옥 등등의 사태는 끊이지 않았고, 여러 시대마다 이를 피하기 위해 목숨걸고 파묻었던 서적의 숫자도 어마어마하다.[38] 해당 기사를 보면 알겠지만,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하는 집은 종교적인 이유가 40.6%로 가장 많다. 여기서 말하는 종교는 거의 확실하게 개신교일 것이다. 왜냐하면 개신교에서는 제사를 우상숭배로 보고 원칙적으로 금하기 때문. 호남 지역의 낮은 제사율 또한 개신교 신자 비율이 높은 것과 연관이 있을 걸로 추정된다. 그리고 서울은 젊은 인구 비율이 높아서 제사 지내는 비율이 낮다.[39] 고3, 고시생, 유학생, 운동선수, 해외 파병 및 복무 중인 군인,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위원 및 관리요원 등.[40] 조상이 음식을 드시도록 제사에 참석한 이들이 문을 닫고 나오는 행위.[41] 참고로 처음 천주교가 들어왔을 때에는 천주교도 제사를 엄격히 금했다.[42] 최소 2명 이상 살해한 연쇄살인마, 살인이 동반된 성범죄자, 대량살인마, 피해자가 아동인 살인사건의 범인, 테러리스트와 같이 변호사마저 변호를 포기할 법한 악질 범죄자가 해당된다.[43] 대표적으로 대구 지하철 참사김대한의 가족들은 집안에서 없는 사람 취급당했다고 한다.[44] 심지어 시험지를 인쇄하는 인쇄공까지도 마찬가지다.[45] 주로 황해도평안도 계통 실향민들이 여기로 간다. 함경도와 미수복 강원도 계통 실향민들은 통일전망대로 많이 간다.[46] 임하룡 등. 임하룡의 고향은 충청북도 단양군 단성면 북하리인데 그의 고향은 충주댐 건설 관계로 수몰되었다.[47] 정태춘 등. 정태춘은 고향이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도두리인데 그의 고향은 주한미군 기지 건설 관계로 철거되었다. 그 밖에 리조트, 대학교, 군부대, 산업단지, 관공서, 교도소, 고속철도 및 여타 교통 관련 시설(공항, 고속도로 등) 등을 짓는 과정에서 고향이 철거돼 버린 경우도 실향민이라 할 수 있다.[48] 서울에는 풍납토성몽촌토성 등 일부 문화재 복원으로 인한 실향민이 있고 경주에는 문화재 실향민이 더 많을 것이다.[49] 100으로 나누어 떨어지는 해를 끼고 있는 경우에는 8년까지도 벌어진다. 이는 4로 나누어 떨어지는 경우에는 윤년으로 하되 100으로 나누어 떨어지면 평년, 400으로 나누어 떨어지면 윤년으로 한다는 규칙 때문이다. 이 때문에 xx96년 2월 29일에 제사를 지내고 나면 4년이 지난 xy00년이 400으로 나누어 떨어지는 해가 아닌 이상 xy04년까지 제사를 제 날짜에 못 지낸다![50] 특히 10, 11, 12, 1월에 윤달이 끼면(...)[51] 지금은 당연히 노비부동산이 아니라 돈으로 낸다.[52] 단지 상술했듯 교정주의적 사법태도 특성상 사형은 커녕 무기징역이나 30년 내외의 유기징역만 받아도 가족중에 범죄자 조상 제사지내고 싶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53] "알라 이외에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의 사도이다"라는 구절이다.[54] 다만 '민속적 관습'이라는 시점에서는 지내도 된다는 일부의 의견이 존재하기도 한다.[55] 개신교 신자는 제사 대신 추도예배를 드린다. 안내문은 교회에서 나누어 준다고.[56] 거기에 부대에서는 설날과 추석 같은 명절, 국군의 날에 부식이 다른 날에 비해 잘 나온다.[57] 아예 시작하기 전에 절 안 하는 병사 손 들라고 해서 인원를 파악한 다음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58] 윤5월 17일에 죽은 사람의 제사를 윤5월이 있는 해에만 지낸다든가 하는 식.[59] 윤8월 14일에 죽은 사람의 제사를 보통 해에는 평달 8월 14일에 지내다가 윤8월이 돌아오면 제대로 된 날에 제사를 지낸다든가 하는 식.[60] 윤7월 13일에 죽은 사람의 제사를 음력 8월 초하루에 지낸다든가 하는 식.[61] 2017년 윤5월은 6월 24일~7월 22일.[62] 집행유예는 보통 추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