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7 21:16:00

몽촌토성

백제의 도성 및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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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백제
하남위례성[a] 하북위례성[b]
풍납토성 몽촌토성
||<tablewidth=100%><tablebgcolor=#fff,#1f2023><bgcolor=#008080> 웅진백제 ||
웅진성
공산성

||<-3><tablebgcolor=#fff,#1f2023><tablewidth=100%><bgcolor=#008080> 사비백제 ||
사비성
별도
금마저
부소산성 / 관북리 유적 부여 나성 / 청산성 왕궁리 유적

||<tablewidth=100%>[a] 어떤 성곽이 위례성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b] 하북위례성 또한 존재만 전할 뿐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았다. ||

||<tablewidth=100%><tablebgcolor=#008080> 백제의 왕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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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사적 제297호
서울 몽촌토성
서울 夢村土城
Mongchontoseong Earthen Fortification,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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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colbgcolor=#fff,#191919> 서울특별시 송파구 방이동 88-3번지 외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면적 482,164㎡
지정연도 1982년 7월 22일
제작시기 삼국시대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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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몽촌토성.jpg
<colbgcolor=#008080> 목책을 두른 몽촌토성[1]
파일:서울_몽촌토성_4_(촬영년도___2015년).jpg
성 위에서 바라본 몽촌토성[2]
1. 개요2. 1980년대 발굴조사와 보존3. 용도
3.1. 방어의 이점
4. 21세기의 발굴 조사
4.1. 발굴보고서 및 파노라마
5. 기타6. 외부 링크7. 사적 제29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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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킹-갓네이버지도.jpg
<colbgcolor=#008080> 몽촌토성 위성 사진[3]
서울특별시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경내에 위치한 백제시대의 토성(土城). 현재 토성 성벽 및 그 내부가 사적 문화재로 공식 지정되었다.

한성백제 시기의 토성으로 북쪽에 있는 풍납토성과 함께 하남 위례성(城)의 주성(主城)이었던 것으로 학계에서 보통 인정받고 있다. 이외 선사시대 때 존재했던 움집터, 판축터, 지하구멍 등이 발굴되었고, 토성의 축조는 3세기경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유물에 근거한 추정이기 때문에 추후 발굴조사 및 성벽 절개조사를 통해 바뀔 가능성이 아주 크다.

위 사진을 보면 남쪽 한성백제박물관부터 북문까지를 호수가 성벽과 거의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건 해자자리로 추정되며, 인근 한강 물줄기를 끌어들여 만든 것으로 보인다. 공원 준공 후 계속 물이 차 있었고 발굴된 적이 없기 때문에, 바닥을 더 파면 뭐가 나올지 모른다. 봐서는 그냥 분수가 있는[4] 작고 예쁜 경관용 호수로 보이지만, 알고 보면 2000여년 된 호수인 것. 경상북도 경주시의 월성 동궁과 월지 못지않은 중요 유적이다.

서울 지하철 8호선 몽촌토성역의 역 이름도 이 곳에서 따 왔다.

2. 1980년대 발굴조사와 보존

몽촌토성은 그냥 야트막한 언덕 수준의 가치로 전락한 상태[5]였으며, 심지어 한강 정비 때 잠실도를 육지화하는 데에 이곳의 흙을 쓰자는 제안이 나왔을 정도였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이 백제의 하남위례성 터일지도 모른다고 강력히 주장한 덕에 보존될 수 있었다.

이후 정부에서 땅 밑에 무언가가 있어 개발도 못할 땅이니 아예 다른 것으로 못 쓰게 해두자는 생각으로 1984년 올림픽공원을 착공하였는데, 역시나 공사 도중 토성터와 유물들이 발굴되면서 1983년부터 1987년까지 학자들의 발굴조사를 통해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올림픽공원 안에 토성터와 유물들을 보존하기로 함에 따라 1986년 올림픽공원 개장 때 공원 안에 존치한 유적으로 바뀌었다. 이미 들어선 아파트 단지 때문에 제대로 발굴도 못 하고 보존도 못 하는 풍납토성을 생각하면, 고고학자들의 판단은 매우 현명하였다. 토성 터의 둘레는 약 2.7 km, 높이는 6.7 m.[6]

1983년에서 1987년까지 이루어진 조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7]

1983년에는 성의 규모, 축조방법, 외부시설을 확인하기 위해 성 외부에 탐색갱(트렌치)을 넣어 조사를 실시하였고 1984년에는 서울대, 숭실대, 한양대, 단국대 합동으로 성의 규모, 축조방법, 내부시설에 대한 발굴을 실시하였다. 1985년에는 성 내부 민가가 철거되어 내부의 전면적인 유구의 분포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1987년에는 성의 동북쪽 부분에 대한 전면발굴을 실시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풍납토성과 함께 백제 도성을 이루고 있는 몽촌토성에서 고구려 건물지 유구와 함께 고구려 토기가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전형적인 고구려 토기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사이장경옹(나팔입항아리)'이 확인되어 주목을 받았다. 이는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해 한성을 함락하고 한강 이남으로 진출하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경기 북부에서부터 남쪽으로는 충주, 대전까지 고구려 유적이 드문드문 확인되긴 하지만 백제의 도성을 이루는 곳에서 확인되었다는 점은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파일:몽촌토성 출토 고구려 토기.jpg
<colbgcolor=#008080> 몽촌토성 출토 고구려 토기[8]
풍납토성에선 전체의 절반도 발굴하지 못했지만 현재까지 조사된 바에 따르면 고구려 유구 및 유물은 확인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고구려 토기가 확인되긴 하지만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층위적으로도 백제 문화층에서 확인되어 교류로 보아야 한다. 결국 고구려는 백제의 한성을 함락시킨 후 몽촌토성에 주둔하면서 한강 이남으로 진출하기 위한 군사거점으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은 약 30년 만에 한성백제박물관이 다시 실시한 몽촌토성 발굴조사에서 더 명확해졌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문단 참고.

3. 용도

현재는 풍납토성과 함께 백제의 첫번째 수도였던 하남 위례성이었을 것으로 거의 확정된 상태.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위례성은 북성(北城)과 남성(南城)으로 나뉘었는데, 학자들은 북성이 풍납토성, 남성이 몽촌토성이라고 추측한다.

학자들은 풍납토성이 사실상 왕성이고, 몽촌토성이 외적이 공격하는 등 비상시에 들어가 농성하는 대피성(城)이라고 추정한다. 풍납토성에서 계속 출토되는 어마어마한 유물로 미루어 볼 때 두 성간 관계가 이러했을 확률이 매우 높다.

사실 이렇게 성을 투 트랙으로 운용함은 삼국시대고구려신라에서도 보인다. 고구려 역시 첫 번째 수도인 졸본에서 대피성 개념으로 오녀산성을 사용했고, 국내성에도 환도산성이라는 대피용 성이 있었다. 후에 천도하는 평양에도 이 같은 개념이 적용되어 평양성 외에 대성산성을 따로 수축했다. 신라도 수도 경주 월성 외에 동쪽 산자락에 명활산성이라는 전시 예비수도를 두기도 했었다. 백제에도 이 같은 개념이 적용되었던 걸로 생각 가능하다. 또한 이러한 방식은 시대를 가리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후대의 후삼국시대에도 후백제가 평지의 왕성(중노송동 일대 추정)과 대피용성인 동고산성, 남고산성을 운영하였으며, 조선시대에도 평시의 한성과 비상시의 북한산성, 남한산성을 건설했고, 조금 더 위급한 상황이 예상되면 강화도를 이용했다.

3.1. 방어의 이점

몽촌토성을 실제로 살펴보면 대피성이라 보기 좀 어려울 지도 모른다. 다른 대피성들[9]들과 달리 산성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야트막한 언덕이라는 자연적 지형을 이용해 지은 토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몽촌토성은 수비에서 두 가지 이점이 있다. 첫 번째는 인근 지역을 감제할 수 있는 지형에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지금도 몽촌토성의 꼭대기에 올라가면 현재의 강남구, 송파구, 강동구하남시 일대를 대부분 볼 수 있다. 이는 만약 공격 편대가 몰려올 경우 거점지역으로서 미리 대비도 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 적극적으로 요격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두 번째는 성이 비스듬한 형태로 축조되었다는 것이다. 언덕의 비탈을 따라 성을 축조해서 외부에서 내부를 바라볼 수 있다. 이런 구조가 나빠보이지만 꼭 나쁘다고 할 순 없다. 외부 병력이 내부를 볼 수도 있지만, 반대로 내부에서도 가까이 달라드는 적병들을 포함하여 외부의 움직임을 훤히 꿰뚫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병은 성벽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내부를 보기 힘들거니와, 비탈을 따라 토성이 구축되어 적이 공격하는 방향이 일정할 수밖에 없다. 이런 구조가 극대화된 곳이 안시성이다.

또한 몽촌토성에는 대략 2 m가 넘는 나무들로 만든 목책과 해자가 있었다. 공격자는 해자를 넘어 목책을 뚫어야 하지만, 방어자는 그 위 언덕에서 적을 내려다보면서 공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공성전술이 한정되고 공격장비도 변변찮았던 2~3세기에 공격군들은 해자와 목책으로 방어되는 몽촌토성을 공략하기 힘들었을 터이다. 게다가 가야 기마 무사상이나 유골[10]로 알 수 있듯 당대 사람들은 (현대의 초등학생 6학년~중학생 정도로) 현대인들보다 훨씬 키가 작았으니, 몽촌토성 공략은 훨씬 더 난해했을 것이다.

4. 21세기의 발굴 조사

2013년 11월 5일부터 한성백제박물관에서 몽촌토성을 다시 한 번 발굴조사를 하였는데, 2014년 7월 29일, 백제시기로 추정되는, 수레자국이 선명한 도로유적과 통일신라시기 유적들이 나왔다. 관련 기사.

또한, 가장 큰 규모의 고대 도로 유적이 발굴되었다. 이 도로는 백제에 이어 고구려, 통일신라 역시 개축해 이용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기사.

1980년대 이루어진 조사는 올림픽공원 조성을 위한 긴급발굴에 가까웠기 때문에 몽촌토성 내부에 대한 전면적인 발굴조사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에 따라 한성백제박물관에서는 몽촌토성 발굴조사에 대한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하여 약 30년 만에 다시 발굴조사에 착수하였다. 2013년부터 2018년 현재까지 발굴조사가 진행된 구역은 '내성농장'이 있었던 자리로 나홀로나무(왕따나무) 바로 아래쪽에 해당한다. 발굴조사와 관련한 내용은 한성백제박물관 홈페이지의 백제학연구소에 들어가면 확인할 수 있다.

이곳은 주변에 비해 지형이 낮고 물이 많이 모이기 때문에 집수시설이 있었으리라 추정하였고 현재 그 실체를 확인하였다. 뿐만 아니라 1980년대 조사에서 고구려 유구 및 유물이 확인되었듯이, 현재 조사지역에서도 고구려의 유구와 유물이 상당히 많이 확인되었다. 이로써 고구려가 몽촌토성을 남쪽으로 진출하기 위한 군사거점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현재도 계속 발굴조사가 진행 중인 관계로 추후 추가될 예정이다.)

2022년 1월 18일에 고구려의 것으로 보이는 목간이 출토되었다.

2022년 2월 18일, 잠실진주아파트 부지에서 한성백제와 6세기 신라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 곳이 몽촌토성 바로 옆이라는 점에서 몽촌토성과 관련된 유적일 가능성이 크고, 한편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도 몽촌토성 부지를 계속 활용했다는 추가적 증거가 되었다. [단독] 하반기 분양 앞둔 잠실진주서 '문화재 발견'…분양 밀리나

2022년 7월 7일에 고구려의 목재 쟁기가 출토되었다.

2024년 2월 26일에 4~5세기 백제의 목조 우물이 출토되었다.몽촌토성 인근서 4~5세기 백제 우물 발견..."한성 백제 연구에 중요"

4.1. 발굴보고서 및 파노라마

5. 기타

  • 인근 강남구 삼성동(강남구)에 삼성동 토성이 있다. 심하게 파괴되어 흔적만 간신히 남아있지만 삼국사기 속 사성(蛇城)으로 비정하는 학자도 있는 만큼 백제 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유적이다.
  • 단지 올림픽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는 정도를 넘어서, 실제 1988 서울 올림픽의 경기장으로도 활용되었다. 근대5종의 마지막 종목인 크로스컨트리는 당시 규정상 말그대로 언덕을 오르내리며 뛰어다니는 코스가 필요했는데 마침 몽촌토성이 올림픽의 주요경기장 옆에 위치한 데다, 적당한 언덕으로 이뤄져 있었기에 산책로 위주로 이곳을 오르내린 뒤 88잔디마당에 결승선이 위치하는 코스로 설계되어 경기가 치러졌다.
  • 2010년에 방영된 SBS 월화드라마 자이언트에서도 언급된다. 작중 황정연의 만보건설이 한강건설의 개포지구 개발을 견제할 목적으로 송파지구에 토지를 대거 매입한 뒤 아파트 단지를 개발하던 중 공사 현장에서 백제 시대 유물이 무더기로 나와 공사가 중단되고 만다. 이후 송파지구 공사 현장 일대가 과거 백제의 토성 자리였다고 언급되며 확인사살.

6. 외부 링크

7. 사적 제297호

한강의 지류인 성내천 남쪽에 있으며, 둘레가 약 2.7㎞ 되는 백제 전기의 토성이다.

자연 지형을 이용해 진흙으로 성벽을 쌓고, 나무 울타리로 목책을 세웠던 흔적도 확인되었다. 자연 암반층을 급경사로 깎아 만들기도 하였으며, 성을 둘러싼 물길인 해자도 확인되었다. 조사 결과 문터와 집자리, 저장용 구덩이가 확인되었고, 출토유물로는 동전무늬가 찍힌 자기조각과 여러 종류의 토기류, 철제 무기류 등이 나왔다. 특히 동전무늬가 찍힌 자기조각은 중국 서진(265∼316)대의 유물이어서 시대 확인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성의 위치·규모·출토유물로 볼 때 백제 초기 군사적·문화적 성격을 살필 수 있는 유적이며, 주변에 풍납토성과 백제 석촌동 무덤들을 비롯한 백제 전기의 유적이 있어 역사적으로도 가치 있는 곳이다.

※ 명칭변경 : 몽촌토성 → 서울 몽촌토성(2011.07.28 고시)


[1]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2]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3] 사진 출처 - 네이버 지도.[4] 음악 분수다.[5] 풍납토성도 마찬가지지만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1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침식 등으로 깎여나간 부분이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이뿐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살던 유적이 있는 지층은 현재의 지표에서 약 3~4 m를 파야 나온다. (풍납토성에선 약 3~4 m를 파야 백제시대 유적이 나온다.). 즉, 당시 성벽은 현대의 우리들이 보기보다 훨씬 높았다. 인간이 축조한 건축물은 지속적인 관리가 없으면 망가지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6] 이런 선견지명으로 보호받지 못한 풍납토성은 지금 난개발로 시달리고, 혈세 수조 원이 들어갈 예정이다.[7] 이하 내용은 서울대학교박물관에서 1988년 발간한 몽촌토성 발굴조사 보고서를 참고하였다.[8] 사진 출처 : 서울대학교박물관 , 한성백제박물관.[9] 고구려오녀산성, 환도산성, 대성산성, 신라명활산성, 후백제동고산성, 남고산성, 조선남한산성[10] 둘 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