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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5px -10px -15px"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0>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 |
오봉산 낙산사 五峰山 洛山寺 | Naksansa | ||
<colbgcolor=#000><colcolor=#fff> 꿈이 이루어지는 낙산사 | ||
위치 |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강현면 낙산사로 100 (전진리 57-1) | |
설립 | 671년 | |
창건자 | 의상대사 | |
주지 | 금곡 | |
등급 | 제3교구 신흥사의 말사 | |
링크 |
대한민국의 사적 제495호 | ||
<colbgcolor=#315288> 양양 낙산사 일원 襄陽 洛山寺 一圓 Naksansa Temple and Surroundings, Yangyang | ||
<colcolor=#fff> 소재지 |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강현면 낙산사로 100, 일원 (전진리) | |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사찰 | |
면적 | 92,637㎡ | |
건축시기 | 통일신라시대 및 고려 시대 | |
지정연도 | 2008년 12월 18일 | |
관리 | 낙산사 | }}} |
낙산사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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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강현면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 신흥사의 말사이다.신라 문무왕 11년(671년)에 의상(義湘)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낙산사'라는 사명은 관세음보살이 머무른다는 인도의 보타락가산(補陀落迦山)을 낙산(落山)이라고 줄여 부른 데서 따왔다. 보타락가산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불명이지만 인도 동남쪽 바닷가에 면하였다고, 혹은 섬에 있다고 전한다. 그래서 동해바다에 있는 오봉산에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봉안한 절을 세우면서 보타락가산에 빗대어 낙산사라 이름 지었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전설에 따르면, 의상이 관세음보살을 만나고자 낙산사 동쪽 벼랑에서 27일 동안 기도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바다에 투신하려 하였다. 이때 바닷가 굴 속에서 희미하게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여의주와 수정염주(水晶念珠)를 건네주며 "내 전신(前身)은 볼 수 없으나 산 위로 수백 걸음 올라가면 대나무 2그루가 있을 터이니 그곳으로 가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는데 그곳이 바로 원통보전(圓通寶殿)[1] 터라고 한다. 이를 계기로 오봉산을 관세음보살이 있는 낙산(보타락가산)이라 여겨 '낙산사'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이외에 부속건물로 의상대(義湘臺), 홍련암(紅蓮庵) 등이 있으며 일대가 사적 제495호로 지정되었다.
3대 관음기도도량[2]으로도 손꼽히고 관동팔경[3]의 하나로 유명하다. 경내에는 조선 세조 때 다시 세운 7층석탑을 비롯하여 원통보전과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담장 및 홍예문 등이 있다.
해수관음상ㆍ의상대ㆍ홍련암은 낙산사의 3대 랜드마크다.
2. 소실과 복원의 역사
2005년 대화재 이전의 역사는 아래와 같다.- 신라 헌안왕 2년(858년)에 범일(梵日)대사가 중창하였으나 고려 고종 18년(1231년)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
- 조선 태조 이성계가 1399년에 와서 능엄법회를 열었고, 억불 군주였던 태종이 재해를 막기 위해 행차해서 기청법회를 열었으며, 조선 세조 13년(1467년)에 세조의 명으로 크게 중창하였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화재를 겪었다.
- 다시 인조 2년(1624년), 9년(1631년)과 21년(1643년) 재차 중건했다.
- 정조 원년(1777년)에 또 화재를 당했고 이듬해 다시 중건하였다.
- 6.25 전쟁으로 소실되어 결국 1953년에 다시 지었다.
2.1. 2005년 산불로 인한 전소
그러나 2005년 4월 4일 일어난 큰 산불이 5일 오전 낙산사로 번져[4]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 당시 산불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이전부터 낙산사 주변에서 물을 뿌리며 확산을 막던 소방헬기들도 다른 곳의 불을 끄느라 도저히 낙산사로 올 수 없었고, 그나마 진화를 위해 출동한 소방차마저 불에 탈 정도였다. 낙산사의 승려와 신도들이 소화기로 불을 꺼보려 했지만 고작 소화기 따위로 이 큰 산불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당시의 뉴스(2016년) 관련기사
이 화재로 보물 제479호로 지정되었던 낙산사 동종이 녹아서 소실되면서 결국 같은 해 7월 7일 지정해제되었다. 산불에 어떻게 금속 종이 녹아내리나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지만, 나무가 탈 때 내는 에너지는 생각보다 크다. 산불 같은 대화재의 겉불꽃(제일 뜨거운 부분)은 천수백°C로[5] 녹는점이 1000°C 근처인 구리나 청동은 충분히 녹일 수 있다.[6] 게다가 차라리 종이 넘어져서 땅바닥으로 굴러갔다면 손상은 입어도 녹지 않았을 텐데,[7] 하필이면 종루가 불타서 종을 그대로 덮어버려서 화덕에 들어간 꼴이 되어 녹아버리고 말았다.
2.2. 복원
전소 이후 복원불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다만 불타기 전의 낙산사는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뒤 성급하게 지어져 꽤나 난잡한 상태였기에 바로 복원하지는 않았고 발굴 조사를 통해 통일신라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낙산사 유구를 발견했다.
그 중 낙산사가 가장 번성하였던 조선시대의 모습으로 복원하기로 결정이 났고, 김홍도의 낙산사도를 참고하여 복원불사에 착수하여 2007년 4월 5일 복원이 완료되었다.
복원 과정에서 형태가 바뀐 전각도 여럿 있으며, 저번처럼 타버리지 않게 불에 강한 나무를 심거나 바람길을 뚫는 등 화재에 보다 대비했다. 또한 화재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인지 화재 이전보다 고압수방수 살포장비 등 비상대응 장비를 여기저기에 설치하였다.
화재 이전의 낙산사는 거의 숲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나무가 많았었는데, 복원된 뒤에는 약간 휑하게 보일 정도로 경내에 나무가 없어졌다. 그래도 산불 이후 15년이 지난 2020년대에는 어느 정도 나무들이 커져 그런대로 숲이 울창해지긴 했다.
낙산사 동종 역시 예전의 형태대로 복원되었지만 문화재로 등재되지는 못했다. 앞서 서술했듯이 문화재청이 문화재 가치를 잃었다고 하여 보물에서 지정해제되었기 때문이다.
절 초입에는 낙산사 산불재난 안전 체험장을 조성하여 불타버린 범종루를 형상화한 모형을 가져다 놓았다.
3. 가람
3.1. 홍예문
조선 세조 13년(1467)에 왕이 친히 낙산사에 행차하여 세운 무지개 형태의 석문.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3호에 지정되어 있다. 근처 강에서 나온 돌들을 사용해 쌓았는데, 홍예를 조성하는 석재 26개는 당시 강원도의 고을 수를 표시한 것이라고 전한다. 홍예 위에는 1962년에 세운 문루가 있었다.
2005년 화재 때 문루가 불타 홍예만 남았으며, 문루를 복원할 때 이번에는 산에서 가져온 돌을 사용하여 홍예를 보수했다.
3.2. 사천왕문
낙산사의 사천왕문. 2005년 화재의 피해를 입지 않은 극소수 건축물이다. 다만 다들 복원하는데 혼자 그냥 두긴 뭐했는지 복원 과정에서 사천왕상을 새로이 도색했다.
3.3. 범종루
보물 제479호 낙산사 동종이 걸려 있던 누각. 2005년 화재 때 불타면서 안에 있던 동종까지 모조리 녹아버렸다.[8] 현재는 동종을 예전 형태대로 복원해서 걸어 놨다. 복원 전후의 외양 차이가 다른 전각에 비해 상당히 큰 편이다.
하루 2번 이곳에서 타종을 한다고 하니 보고 싶다면 시간을 잘 맞추길 바란다.
3.4. 원통보전
절에서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시는 건물을 원통전(원통보전)이라 하는데 낙산사의 경우 창건 설화부터 관세음보살과 관련이 있으므로 일반적인 절과 달리 대웅전이 없으며 이 원통보전이 절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2005년 낙산사 화재 때 건물 전체가 소실됐으며 2007년 11월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이 과정에서 원래 청기와 건물이었던 원통보전이 일반적인 기와를 올린 건물로 바꼈다. 내부에는 보물 제1362호에 지정된 양양 낙산사 건칠관음보살좌상이 있는데 원통보전까지 불이 번지기 전에 옮겨놔 다행히 화를 면했다.
삼국유사 탑상편에 기록된 조신의 꿈 이야기가 낙산사 원통보전에서 기도하다 일어난 일이다. 현재의 원통보전에 있는 관세음보살상은 삼국시대가 아니라 조선시대에 만든 것이지만 조신의 꿈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라면 원통보전을 더 눈여겨 보게 될 것이다.
원통보전 주변을 둘러싼 담장이 아름다워 담장이 따로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4호에 등록되어 있다. 이 담장 역시 화재 때 상당 부분이 소실됐으나 남아있는 부분들을 토대로 복원했다.
3.5. 낙산사 칠층석탑
자세한 내용은 낙산사 칠층석탑 문서 참고하십시오.보물 제499호. 위의 사진처럼 원통보전 앞에 세워져 있다. 다만 정중앙이 아닌 약간 어긋난 위치에 있다. 석탑의 재질은 화강석이며 청동제 상륜을 달았다. 원래는 3층이었지만 조선 세조 13년(1467)에 탑을 중수하면서 7층으로 층수를 늘렸다. 6.25전쟁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지만 전쟁을 겪으면서 한쪽 귀퉁이가 뭉텅 잘려나가는 손상을 입었다. 다른 석탑들에 비해 독특한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어째서인지 사람들이 동전을 던져 탑에 안착시키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여겨 수십개의 동전이 탑에 얹혀졌고 지금도 그 개수는 늘어나고 있다.
3.6. 보타전
원통보전에서 해수관음상 쪽으로 가다 보면 아래쪽에 보이는 눈에 띄게 거대한 건물. 원래 있던 건물은 아니고 근래에 지어진 것이다. 낙산사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관음성지임을 상징하는 건물로, 건물 안에는 관음상 1,500좌를 봉안하였다. 천수천안 관음상을 비롯하여 얼굴과 팔이 여럿인 불상이 다수 있어서 꽤나 이국적으로 보인다. 한국 불교에 힌두교가 살짝 가미된 느낌. 앞쪽에는 낙산사 7층 석탑을 본떠 새로 지은 탑과 보타락이라는 이름의 2층 누각, 연꽃이 가득 있는 연못이 있다.
3.7. 해수관음상 (낙산사의 랜드마크)
절 끝자락에 위치한 높이 15 m, 둘레 3 m의 거대한 관음불상으로 홍련암, 의상대와 더불어 낙산사의 랜드마크. 이 해수관음상의 존재로 낙산사는 강화 석모도 보문사, 남해 보리암과 함께 3대 해수 관음기도 도량으로 꼽힌다.
1971년부터 조각을 해 1977년에 완성했으며 그 당시 동양 최대의 불상이었다. 불상의 정면 조금 아래에는 관음전이 있는데 내부에는 따로 불상이 없고, 대신 불상이 있음직한 자리에 통창이 나 있어 그곳으로 해수관음이 보인다. 즉 외부의 해수관음을 향해 실내에서 기도를 할 수 있는 건물이다. 불상 주변에는 시야를 가리는 별다른 장애물이 없기 때문에 설악산(대청봉, 울산바위), 대포항, 낙산해변 등을 조망할 수 있다. 근처에 종이 있는 종각이 있는데 누구든지 한 번씩 종을 쳐볼 수 있다. 앞에 불전함이 있는데, 액수는 자율적이다.
해수관음상에서 홍련암 방향으로 내려가다보면 보물 제1723호에 지정된 양양 낙산사 해수관음공중사리탑이 있다.
화재 당시 불길이 해수관음상을 지나 사리탑을 거쳐 홍련암 근처까지 갔기에 사리탑도 복원 수리를 해야 했는데 사리탑 내부의 사리공(舍利孔)에서 사리장엄구가 출토됐다. 사리장엄구 안에는 여러 유물들과 함께 석가모니의 진신사리 1과가 있었는데 발원문에 따르면 이 사리탑의 조성 이유는 다음과 같다.
1692년(숙종 18년) 홍련암에 있는 불상을 개금하는 과정에서 주변에 상서로운 기운이 나타나더니 닫집[9]에서 진신사리 1과가 나와 이를 사리탑에 모셨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홍련암 앞에 있는 사리탑비의 내용과 일치했다. 낙산사 사리탑과 사리탑비는 그 자체로는 독자적인 가치가 있다고 보긴 어렵지만 사리탑, 사리탑비, 사리장엄구가 일치된 내용과 관계로서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된 것은 흔치 않다는 점에서 2011년 11월 보물로 일괄 지정됐다.
앞으로는 넓게 펼쳐진 동해바다의 해안선을 볼수 있으며 해수관음상 뒤편으로는 저멀리 설악산이 보인다.
3.8. 의상기념관
절의 설립자로 알려진 의상대사와 관련된 것들을 전시하기 위해 세운 건물. 낙산사의 옛 모습과 의상에 대한 전시물들을 볼 수 있으며, 2005년에 있었던 화재에 휩쓸려 흉측하게 녹아버린 동종, 화재 당시 타고 남은 대들보로 만든 바이올린 등을 전시 중에 있다.
3.9. 의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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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이 좌선수행을 했던 곳이라 전해지는 곳. 원래는 암자가 있었다고 하나 폐허로 변해버렸고 이후 1925년에 그 자리에 정자를 세우고 의상대라 이름붙였다. 1974년 9월 9일 강원유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며 그 덕인지 양양 8경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또 엄밀히 말하면 낙산사 중에서도 이곳이 관동팔경에 속한다.
3.10. 홍련암
낙산사에서도 꽤 외진 곳에 위치해 있는 암자로 절벽 위에 석축을 세워 조성했다. 의상대에서 10여분 정도 이동하면 도착할 수 있다. 옛날에 의상대사가 참배를 할 때 갑자기 푸른 새가 나타나자 기이하게 여겨 따라가다가 어떤 석굴 속에서 자취를 감추자 그 앞에서 7일 밤낮을 기도하였고, 그러자 앞바다에 연꽃이 나타나 관세음보살이 현신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곳에 터를 닦고 암자를 세워 이름을 홍련암이라 지었다.
절벽 아래에 앞서 언급된 자연석굴이 있는데, 용이 살고 있다는 전설이 있다. 관음굴이라 불리는데, 암자 바닥에 관음굴을 볼 수 있는 작은 유리창이 뚫려 있다. 이 유리창을 통해 아래를 내려다 봤을 때 용이 보이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나? 실제로 보면 절벽과 석굴에 부서지는 하얀 파도만 보인다. 이러한 전설 덕분에 오세암과 더불어서 흔히들 말하는 기도빨 죽이는 암자로 유명하다. 이로 인해 홍련암을 찾는 불자들이 많은데, 낙산사는 관광지로도 유명하기 때문에 불자들이 기도하고 있으면 얼른 나오라고 보채는 몰상식한 관광객들[10]을 만나기도 한다.
2005년 산불 당시 바로 앞까지 불길이 번졌으나 다행히 소실되는 걸 피했다.
낙산사 화재 당시 홍련암의 모습. 바로 앞까지 불길이 번졌지만, 홍련암은 이를 가까스로 피했다.
4. 교통
- 주차장은 일주문 앞에 있는 대형 주차장과 의상대(홍련암) 쪽의 소형 주차장이 있으며, 두 곳 모두 유료다. 주차하는 데 돈 쓰기 싫다면 의상대 쪽의 주차장으로 가는 언덕길 아래의 공영주차장을 이용하면 되긴 한데, 언덕길을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그래도 크게 힘든 코스는 아니다. 두 주차장은 대략 500 m 정도 떨어져 있다.
- 800 m 정도 걸어가면 낙산시외버스터미널이 있다. 매표는 바로 옆의 편의점에서 무인발권기로 가능하다. 규모는 무지막지하게 작지만 의외로 노선이 많다.
- 속초고속버스터미널이나 양양고속시외버스터미널에서 속초 버스 9를 타면 낙산시외버스터미널에 갈 수 있다.
5. 기타
- 삼국유사에 수록된 조신의 꿈 이야기의 주요 배경이 바로 이곳, 낙산사이다. 조신은 낙산사 관세음보살상 앞에서 기도했다고 한다. 물론 절이 여러 번 불타 재건하기를 반복했으므로, 조신의 꿈 이야기의 시대배경인 9세기 시절과는 많이 다르다.
- 사찰의 규모도 꽤 큰 편이고, 바닷가에 붙어있기 때문에 경관이 좋아 관동지방 여행의 필수코스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또한 설악산, 동해 해변, 대관령 양때목장과 함께 강원도 수학여행의 목적지로도 유명해서 수학여행 시즌이면 학생들을 가득 태운 관광버스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상술했듯 2005년도 화재 사건 때는 수학여행이 취소되기도 해 많은 학생들의 아쉬움을 사기도 했다.
- 홍예문에서 사천왕문으로 가는 길에서는 각계각층에서 식재한 소나무들을 볼 수 있다.
- 원통보전에서 해수관음상으로 가는 길은 원래는 하나뿐이었는데, 나중에 휠체어를 위한 무장애 탐방로가 조성되었다.
- 일주문 쪽 주차장 근처에는 해산물을 판매하는 매장들이 잔뜩 늘어서 있다.
- 인근 관광지로는 낙산해수욕장과 연어로 유명한 남대천이 있다.
- 인근에 동해북부선의 낙산사역이 있었으나 동해북부선이 제진역~감호역 구간을 제외하고 전부 폐선되어 지금은 이용할 수 없다. 역 터는 강현면 정암리 448-2번지에 있다. 다만 직선거리로만 3km가 넘게 떨어져 있기에 걸어서 가기엔 많이 멀다.[11]
- 강릉에서 열린 2024 강원 동계청소년올림픽 K-culture 페스티벌에서 진행자 초아가 강릉에 대해 소개할 때 낙산사를 언급했다.
- 비가 온 후에 날씨가 갤 무렵 낙산사내에 있는 홍련암에 가보면 꽤 풍경이 멋있다. 어느 절이건 풍경이 좋지 않은 곳 없다하나, 특히 홍련암은 바위 중턱에 걸터앉아 위치해 있고, 동해안의 파도, 바위를 보면 그 풍경이 미묘하다.
6.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낙산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양양 낙산사 일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낙산사
- 답사여행의 길잡이 3 - 동해·설악: 낙산사
- 대한민국 여행사전: 낙산사
- 대한민국 구석구석: 낙산사
- 두산백과: 양양 낙산사 일원
- 두산백과: 낙산사
7. 사적 제495호
양양낙산사는 2005년 산불피해 이후 3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 및 고려시대 건물지와 기와편들이 다량 출토되어, 신라 문무왕 11년(671)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된 이후 헌안왕 2년(858)에 범일국사, 조선 초기 세조연간에 중창되는 등 수차례의 중창불사를 거친 역사적 사찰임이 확인되었다.
또한, 사찰 경내에는 조선전기의 7층 석탑과 원통보전의 담장, 홍예문, 사리탑, 홍련암과 의상대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주변 해변을 끼고 있는 명승지는 예로부터 관동팔경의 하나로 문사(文士)들에 의해 수많은 고전과 시문(詩文)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사찰 경내에는 조선전기의 7층 석탑과 원통보전의 담장, 홍예문, 사리탑, 홍련암과 의상대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주변 해변을 끼고 있는 명승지는 예로부터 관동팔경의 하나로 문사(文士)들에 의해 수많은 고전과 시문(詩文)이 전해지고 있다.
8. 낙산사 운영측과 사찰 내부 점포 '다래헌' 사이 분쟁
낙산사가 사찰 내부에서 영업 중이던 불교용품 판매소 겸 찻집인 다래원(茶來軒) 측에 2022년 10월부터 퇴거를 요구하면서 둘 사이에 마찰이 빚어졌다. 2023년 8월부터는 낙산사 주출입로인 후문 입구에서 다래헌 진입로까지 낙산사 측이 다래헌 측을 비난한 각종 현수막과 배너가 도배하다시피 여기저기 설치하였고, 같은 해 11월에는 일반 언론에까지 보도되었다.강원도 양양 낙산사 "나가라" vs 낙산사 불교용품 판매장 다래헌(茶來軒) "못나간다''
[조계종 3교구 낙산사 사태] 의상기념관 탐방도로까지 폐쇄한 낙산사, 도대체 왜 그런지 알고봤더니
점포 운영을 위해 상가위탁경영계약을 이전부터 체결해왔으며, 낙산사 측의 요구로 2020년 3월부터 임차료와 별개로 행락스님들의 생활공간인 '요사체' 신축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4억 원을 '시주'하였으나, 낙산사 측에서 돌연 주지 스님을 교체한 뒤 퇴거 요청을 하였다는 것이 점주의 입장이다.
이에 대해 낙산사 측은 "세간에서 다래헌 사태에 대해 오해가 있지만, 조만간 낙산사와 다래헌간 명도소송에서 결판이 날 것"이라며 "다래헌 사태는 그 판결에 따르면 될 문제"라고 일축했다.
여타 사찰과 주변 관련 점포의 분쟁들과 크게 다를 것 없어보이던 상황은 주지스님을 교체하고 현재 낙산사를 운영 중인 '무산문도회'에 눈길이 옮기며 사찰과 점포의 분쟁에서 조계종 내부의 문제로 국면을 바꾸었다.
<바른 불자연대> 라는 불교신도 단체의 황호영 대표의 주장으로 '무산문도회는 무산 오현스님 제자그룹을 자처한 세력으로, 이들이 지난해 조계종 3교구를 장악해 조계종 3교구 내 주요 사찰을 좌지우지하며 낙산사를 비롯하여 각 사찰마다 주지를 꼭두각시로 세우고, 임기가 보장된 기존 3교구 내 사찰 주지를 강제로 사퇴시키는 등 횡포를 일삼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특히 낙산사의 경우 무산문도회 수장격인 '문장' 이라 불리는 모 스님은 과거 신흥사 살인사건[12]에 연루돼 10년간 형기(刑期)를 복역해 승적도 없는 인사"라며 "이 분이 사실상 낙산사를 좌지우지하면서 지금 다래헌을 몰아내는 데 앞장서고 있다" 하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무산문도회 측 낙산사의 해당 스님은 낙산사는 주지가 별도로 있기 때문에 자신은 낙산사 행정과 무관하다는 입장을 밝혔고, 자신은 낙산사 행정에 관여한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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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세음보살을 모신 건물에 붙이는 이름들 중 하나. 관세음보살을 원통대사(圓通大師)라고 부르기도 하기 때문에 원통보전이라고 한다.[2] 강화군 보문사, 남해군 보리암, 낙산사 홍련암[3] 엄밀히 말하면 의상대가 관동팔경이다.[4] 공교롭게도 이 날은 마지막 공휴일로 지정된 식목일이기도 하다.[5] 대구 지하철 참사때 전동차 내에서 발생한 불꽃이 약 1500°C였다.[6] 여담으로, 용암의 온도는 의외로 800°C 언저리다.[7] 오래된 종의 경우 충격을 받으면 깨짐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성덕대왕 신종을 더 이상 타종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굳이 넘어지거나 하는 수준의 충격이 아니더라도, 타종을 많이 하는 종들의 경우 깨지는 경우가 제법 있다.[8] 녹아서 흉측하게 변해버린 동종은 의상기념관에서 전시 중이다.[9] 불상 위 천장에 있는 집 모양의 장식[10] "왜 이렇게 절을 오래 해?"라거나 "거 삼배만 하고 얼른얼른 나와야지!"라며 야유를 퍼붓기도 한다. 낙산사는 관광지이기 전에 사찰인데, 이를 망각한 어이없는 행동이다.[11] 버스를 타면 30분 정도에 주파할 수 있다.[12] 1983년 8월 6일 오후 3시 강원도 설악산 신흥사의 주지 부임길에 나선 혜법스님(45)과 일행 스님 14명이 절 입구 부근에서 신임 주지 부임을 반대하는 신흥사 승려 11명에게 습격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일행 중 한 명이 사망하고 혜법스님은 전치 2달의 중상을 입었다. 1980년대 기준 2억이 넘는 수익을 내던 신흥사의 주지 자리를 두고 일어난 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