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5px -10px 0px"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B9A26A> 대한불교조계종 | |
분황사 芬皇寺 | Bunhwangsa | ||
<colbgcolor=#B9A26A><colcolor=#fff> 위치 | 경상북도 경주시 분황로 94-11 (구황동) | |
설립 | 634년 | |
창건자 | 선덕여왕 | |
주지 | 성제 | |
링크 |
대한민국 사적 | ||
경주 분황사지 慶州 芬皇寺址 | ||
<colbgcolor=#315288><colcolor=#fff> 소재지 | <colbgcolor=#fff,#1f2023> 경북 경주시 분황로 94-11 (구황동) | |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사찰 | |
수량/면적 | 28,703㎡ | |
지정일 | 2019년 2월 26일 | |
시대 | 신라시대 | |
소유단체 | 경주시 등 | |
관리단체 | 경주시 | }}} |
<colbgcolor=#ff8c00> 분황사 전경 |
불교방송에서 제작한 분황사 다큐멘터리 |
[clearfix]
1. 개요
苔繞空階竹拂簷
境淸不復受朱炎
僧閑雅笑迴黃眼
客醉高談奮紫髥
蓮沼我常尋慧遠
柳門公亦引陶潛
含盃傲兀忘歸路
淅瀝殘陽下半簾
이끼가 빈 섬돌을 덮고 대나무 줄기가 처마에 스치워
경내(境內)가 청량하니 무더위 따위 받지 않네.
중은 한가롭게 고아한 웃음으로 누른 눈길 돌리고
손[客]은 취하여 고담(高談)하며 붉은 수염 흩날리네.
연꽃 핀 못에선 난 항상 혜원(慧遠)[1]을 떠올리고,
버드나무 선 문(門)에서는 공(公) 역시 도잠(陶潛)을 잡아끄네.
술잔을 품고 취하여 돌아갈 길도 잊었는데,
쓸쓸한 저녁 볕이 발[簾]의 반쪽을 비추네.
김극기, '분황사'
境淸不復受朱炎
僧閑雅笑迴黃眼
客醉高談奮紫髥
蓮沼我常尋慧遠
柳門公亦引陶潛
含盃傲兀忘歸路
淅瀝殘陽下半簾
이끼가 빈 섬돌을 덮고 대나무 줄기가 처마에 스치워
경내(境內)가 청량하니 무더위 따위 받지 않네.
중은 한가롭게 고아한 웃음으로 누른 눈길 돌리고
손[客]은 취하여 고담(高談)하며 붉은 수염 흩날리네.
연꽃 핀 못에선 난 항상 혜원(慧遠)[1]을 떠올리고,
버드나무 선 문(門)에서는 공(公) 역시 도잠(陶潛)을 잡아끄네.
술잔을 품고 취하여 돌아갈 길도 잊었는데,
쓸쓸한 저녁 볕이 발[簾]의 반쪽을 비추네.
김극기, '분황사'
경상북도 경주시 분황로 94-11 (구황동)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의 말사이다.
황룡사지나 감은사지처럼 석탑이 유명하지만 이와 다르게 분황사'지'가 아니다. 그 이유는 신라시대 전성기보다 좀 많이 작아지긴 했어도 엄연히 '현존하는' 사찰이기 때문이다. 한편 분황사 주변 일대는 2019년 2월 26일 경주 분황사지(慶州 芬皇寺址)라는 이름으로 사적 제548호로 지정되었다. 2023년 기준으로,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아도의 비문에는 칠처가람지허(七處伽藍之墟) 중 용궁북(龍宮北)이었다고 하였다.
삼국유사 제3 흥법편 아도기라 항목에서 칠처가람을 말하며 전불시가람지허(前佛時伽藍之墟)라고 설명한다. 경주에 빈 절터 7곳(칠처가람지허)가 있는데, 과거불 시대의 절터(전불시 가람지허)라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기원전 500년대, 혹은 400년대 사람인 석가모니 이전에도 부처 6명이 더 있었다고 하여 과거불(過去佛) 또는 전불(前佛)이라고 부르고, 그 6명에 석가모니까지 더해서 과거칠불(過去七佛)이라고 칭한다. 여기서 말하는 칠처가람지허는 전불시대의 절터라고 하므로, 석가모니와 과거불까지 일곱 부처가 오래 전에 그 일곱 곳에서 설법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석가모니 이전의 시대에는 한국에 불교가 들어오기는커녕 신라라는 나라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으니, 절의 명맥이 끊어지고 자시고도 할 것도 없다. 불교가 외래의 종교가 아니라 (후손들이 망각했었을 뿐) 조상들이 믿던 종교라고 주장하고, 당시 불교를 대대적으로 지원하던 신라왕실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퍼트린 이야기로 볼 수 있다. 흥륜사 터가 원래 천경림(天敬林)이라는 숲으로 신라 토속신앙의 성지였으므로, 분황사 터도 원래는 천경림처럼 토속신앙의 제사터였을 가능성이 크다.
분황사의 상징은 바로 모전석탑이다. 전탑 모양을 흉내낸 석탑으로, 돌을 깎아 벽돌처럼 만들어 쌓은 탑이다. 보통 경주 관광에서는 월성, 국립경주박물관, 안압지, 황룡사 터 그리고 분황사로 코스가 이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절터만 남았지만 거대한 황룡사터에 비해 인지도가 좀 낮은 대신, 석탑이 대부분인 한국에서 보기 드문 모전석탑이 있는 절로서 인지도가 있다.
또한 한국 불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승려 원효가 머물며 많은 저작을 남긴 곳으로, 분황사와 인연이 깊다.
2. 역사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선덕여왕 3년(634년)에 세워졌다. 분황사가 세워진 해에 선덕여왕은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새로 바꿨다. 분황사는 이름 자체가 '향기로운(芬) 임금님(皇)의 절(寺)'로 선덕여왕을 염두에 둔 이름이다. 중국의 송고승전에는 왕분사(王芬寺)로 나오고 있다.선덕여왕의 이름은 '덕만(德曼)'으로 <현재현겁천불명경(現在賢劫千佛名經)>에 등장하는 ‘덕만불’에서 비롯된 것이다. 불교를 수용한 이후의 신라는 기독교를 수용해 국교로 삼은 로마 제국처럼 상당히 종교적으로 변했는데, 성골 왕실은 아예 자신들을 불교의 찰제리종이라고 주장하며 여왕의 아버지 진평왕은 ‘백정’, 어머니는 ‘마야부인’으로 이름을 썼다. 모두 석가모니 부처의 부모 이름이다.
분황사는 6세기 진흥왕 때 먼저 지어졌던 황룡사의 바로 북쪽에 건설되어 담이 마주보고 있었을 것이다. 사찰은 황룡사가 더 먼저 세워졌으나 황룡사에서 가장 유명한 9층 목탑은 선덕여왕이 분황사를 세운 이후에 건설되었다.
이후 경덕왕 14년(755년) 거대한 약사불상을 새로 주조하여 이 약사불상을 안치하기 위해 다시 한번 분황사를 중수하며 동금당과 서금당을 철거하여 중금당의 규모를 늘리고 중문을 새로 지었다. 분황사의 약사여래동상은 무게가 30만 6700근에 달하고, 장인은 나마(乃末) 관등의 강고(强古)였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같은 왕 때 한기리의 여인 희명(希明)의 아이가 태어난 지 다섯 달 만에 눈이 멀어 이 절의 천수대비(千手大悲) 에게 기도하였더니 눈이 떠졌다고도 한다. 이 일화에 나오는 향가가 도천수대비가이다.
아래의 넓은 터가 황룡사지이며, 위의 작은 숲이 분황사다. |
황룡사와 마찬가지로 승려 원효가 이 분황사에서도 활동했다. 분황사의 역사에서 원효는 빼놓을 수 없는 존재로, 분황사에서는 해마다 원효를 기념하는 재가 열리고 있으며, 1995년에는 원효학연구원도 분황사에서 설립했다. 원효 관련 논문 중에는 아예 원효를 분황원효(芬皇元曉)라고 부른 것도 있다. 고려 시대까지도 원효를 종조(宗祖)로 하는 분황종(芬皇宗)이라는 종파가 존재했고, 그 본산이 이곳 분황사였다.
실제로 원효가 의상과 함께 당으로 유학길에 올랐다가 도중에 깨달음 얻고 돌아온 뒤에 머무른 곳이 분황사였고, <금광명경소>나 <화엄경소> 등 현전하는 원효의 대부분의 저작[2]도 분황사에서 집필되었으며, 마지막 저술이라는 <화엄경소>도 분황사에서 저술되었다.
고려 시대에 원효를 위해 '화쟁국사비' 비석이 세워진 곳도 분황사였다. 세워지기는 고선사의 서당화상비가 가장 오래되었고, 일부나마 비문이 남아 있지만 화쟁국사비는 아예 비문도 남아 있지 않다. 고선사는 현재 덕동댐 밑으로 수몰되어 있다. 이 화쟁국사비는 조선 후기 이전 어느 시점에 사라져서 비석이 세워져 있던 부지에만 김정희가 '화쟁국사비가 있던 곳'이라고 남겨둔 글이 있다. 원효는 이 곳에서 많은 저작을 남겼고, 원효 사망 후에 아들인 설총이 유해로 상을 만들어 이 곳에 봉안했다(원효회고상). 원효의 뼈를 부수어 만들었다는 전승이 전해진다.
원효 외에도 신라 율종의 개조인 자장이 귀국한 뒤에 분황사에 머물렀다. 황룡사처럼 화가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도가 분황사에도 있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효녀 지은이 분황사 근처에서 살았다고도 한다.
신라 말기의 고승인 혜거국사(惠居國師)가 924년에 경애왕의 초청으로 분황사에 와서 주석했다고도 한다. 924년은 최치원의 사산비명 가운데 하나인 지증대사비가 문경 봉암사에 세워진 해이기도 한데, 지증대사비의 글씨를 분황사의 승려 혜강(慧江)이 썼다고 되어 있다.
분황사 중문터에서 발굴된 치미. 지붕 양쪽 끝에 얹는 장식이다. 사진 출처 : 치미, 하늘의 소리를 듣다 |
이후 몽골의 침략 때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황룡사 9층탑이 불탄 것이 고려 고종 25년(1238년) 겨울 10월 11일(양력 11월 25일)이었으니 분황사도 이 무렵에 불타 버렸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동국여지승람(15세기)에는 '분황 폐사'라고 해서 분황사가 폐사된 사찰이었던 것처럼 되어 있다. 이후에 차츰 복구된 것 같은데, 조선 중기의 문신 홍성민(洪聖民)의 계림록에서 분황사를 소개하고 있다. 이 절에 높이 10척(약 3 m) 높이 금 불상과 높이 100인(仞)의 전탑이 있었다고 한다. 모전석탑을 말하는 것 같다. 이걸 전탑이라고 하면 틀린 거라 시험에서 함정문제로도 많이 나왔지만, 아무튼 전탑 모양을 흉내 내었기에 홍성민도 전탑으로 헷갈린 듯.
그러나 또 임진왜란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동경잡기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군이 원래 9층탑이었던 이 탑의 반을 헐었으며, 후에 분황사의 승려들이 처음부터 다시 쌓다가 또 허물어졌다고 한다. 조선 초기 서거정의 시에는 승려라고는 없는 분황사에 탑과 함께 장륙존상이 남아 있었고, 조선 중기 인물 김수흥(金壽興, 1626∼1690)이 남긴 남정록(南征錄)에서도 분황사는 이미 폐허가 된 지 오래고 탑은 허물어지고 1개 층만 남아있으며 커다란 동불(銅佛)만 우뚝 솟아 있다고 남겼다. 탑이 무너졌다는 건 동경잡기의 언급과 같고, 임진왜란 이전에 있었다는 금불에서 일본군이 금칠을 벗겨내 구리 불상만 남은 것으로 추정. 경덕왕 때 안치했다는 약사여래좌상도 임진왜란 중 분실되었다. 이후로는 아주 작은 사찰이 되어서 근근히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현재의 규모가 작기 때문에 그리 크지 않은 절로 보이나, 2000년대 이후의 발굴 작업들을 통해 현재 있는 규모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절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깃발을 걸던 당간지주도 분황사 경내가 아니라 황룡사와 분황사 중간쯤에 있다. 오랜 기간동안 가람의 배치는 계속 변해왔으며, 전성기 면적은 황룡사의 2/3정도에 육박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분황사 옆에는 구황동 원지가 있는데, 이곳이 분황사에 부속된 곳이었는지 아니면 독립된 시설이었는지는 학자마다 설이 나뉜다.
분황사는 1935년에 실화 사고로 한 번 전소된 적이 있다. # 광복 직후에는 이승만 정부에 의한 불교정화운동의 일환이었던 대처승 추방 과정에서 주지가 분황사를 나온 뒤 대구의 법륜사에서 1955년 9월 10일에 할복하는 사건이 있기도 했다. #
법륜 비구의 은사인 불심도문(佛心道文)[3]이 이 분황사의 주지였다. 예전부터 청소년, 학생, 군인에 대한 포교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며, 법륜 비구 역시 고등학생이던 1969년 당시 도문과의 선문답에서 크게 충격을 받고 출가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서라벌 복원 모형도 가운데 분황사 부분. |
가람은 1탑 3금당식으로 추정되는데 모전석탑을 가운데에 두고 주위를 금당이 둘러싼 고구려식에 더 가까운 가람배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동,서쪽의 금당이 탑이 아닌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 고구려식 가람배치와의 가장 큰 차이다. 다만 755년 중수 이후에는 중금당의 규모를 넓히는 대신 동금당과 서금당을 모두 철거한 것으로 보여 사실상 1탑 1금당 형식을 취하게 된다.
위의 복원모형은 1탑 3금당과 중문이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전부 상상에 입각한 복원도다. 저게 절의 전부라면 분황사는 강당과 승방 같은 부대시설 없이 금당만 존재하는 상당히 비상식적인 절이 되어 버린다. 다만 현재와 같은 절간 안에 승려들의 거주 공간인 요사채(승방)가 함께 있는 구조는 선종 도입 이후 변화한 양식이고, 그 이전 불교계의 주류였던 교종 불교에서 사찰 공간과 승려들의 거주 공간은 엄격하게 구분되어 법회도 금당(대웅전)이 아니라 따로 마련된 강당에서 거행했다. 즉 사찰은 철저히 법회나 강설을 위한 공간으로서 전용되었고 법회나 강설이 아니면 승려들은 대체로 사찰 외부에서 거주하는 것이 선종 불교가 자리를 잡기 이전의 사찰 형태였다는 것으로, 이 점은 인도의 불교 강원과도 비슷하다.
가운데 중금당터는 절에 들어가서 탑 뒤로 현재 대웅전으로 쓰이는 보광전(普光殿) 앞마당에 돌을 낮게 둘러쌓고 지면에 살짝 솟아난 듯한 평평한 부지로, 언뜻 봐서는 티가 안 난다. 분황사에서는 2005년부터 장기적으로 이 금당을 복원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듯, 금당 복원을 위한 기와 불사(佛事)를 벌이고 있기는 하다. 불사란 기왓장에 시주한 사람의 이름하고 그 사람의 소원 적고 얼마씩 내는 식의 행사. 복원 계획 자체는 이미 1998년에 지역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
그러나 언제 복원될지도 모르고 고증상 문제도 많다. 분황사는 755년에 중수하면서 기존 동서금당을 모두 철거하고 중금당 규모를 넓혔다고 하는데 그런데 최근에 나온 분황사 중창불사 계획도에는 중금당 외에도 동서 금당까지 모두 짓기로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만약 복원이 된다 해도 옛날 문화재를 그대로 '복원'한다는 의미보다는 현역 사찰인 분황사에서 실제로 사용될 종교적 기념물을 중창 내지 재건하는 쪽에 더 가까울 것이다. 참고로 중금당터는 지금의 보광전 부지까지 모두 포함하고 있는 규모다. 중금당터 한 모퉁이에 보광전이 올려져 있는 모양새. 다시 말해 중금당을 완전복원하기 위해서는 보광전을 이건해야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섣불리 시도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중금당을 세운 뒤에 보광전은 또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도 관건이고.
다만 이 기사에 따르면 분황사의 완전복원계획 자체는 잡혀있는 것으로 보인다. 절 안에 들어가 보면 실제로 위의 1탑 3금당 형태로 절을 중창할 계획으로 불사를 벌이고 있다. ##
사찰 자체는 불국사에 비해 훨씬 작은 규모지만 시내와 가깝고 수려한 풍경을 갖춘 덕에 경주 관광지로 꼽힌다. 봄에는 청보리밭, 여름~초가을에는 코스모스, 가을에는 단풍으로 장식되어 계절별로 사진 찍기 좋은 곳이다.
2.1.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4] |
2.2. 팔각정
경내에 있는 우물로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 또는 호국용변어정(護國龍變漁井)이라고도 불린다. 화강암을 통째로 움푹하게 파낸 다음 그 위에 다시 돌을 쌓아 만든 것으로, 통일신라시대부터 만들어져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외부는 높이 70cm로 윗부분은 8각형이며, 내부는 원형으로 되어있다. 이것은 불교의 팔정도와 원융(圓融)의 진리를, 우물 안의 4각형은 불교의 근본교리인 사성제를 뜻하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원성왕 11년(795)에 당나라의 사신이 경주에 들렀다 떠나게 되었는데, 갑자기 아름다운 두 여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저희들은 동지(東池)와 청지(靑池)[5]에 사는 두 호국용의 아내입니다. 어제 당나라 사신과 하서국(河西國)[6] 사람들이 주문을 외워 우리 남편들과 분황사 우물에 사는 호국용을 작은 물고기로 변화시켜 대통 속에 넣어 가지고 갔습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부디 두 사람에게 칙명을 내리시어 나라를 지키는 용인 우리 남편 등을 머무르도록 해 주시옵소서."
라고 호소하였다. 이 말을 들은 원성왕이 날랜 기마병 50명을 몸소 거느리고 사신을 뒤쫓아 그들이 묵고 있는 하양관에 이르게 되었다. 왕은 친히 잔치를 베풀고 당나라 사신과 하서국 주술사를 꾸짖어 "너희들은 어이하여 나의 용 3마리를 잡아가지고 이 곳까지 왔는가? 만약에 사실대로 털어놓지 않으면 극형에 처할 것이다."라고 했더니, 그제서야 벌벌 떨며 물고기로 변한 호국용 3마리를 내어 바쳤다. 그 호국용 3마리를 들고 와서 각각 제자리에 놓아주었더니 놓은 곳마다 물이 한길이나 솟아오르고, 호국용들도 원래 모습으로 변했으며, 기뻐 뛰놀면서 물 속으로 들어갔다.
당나라 사신은 신라 왕의 명철함에 감탄하여 돌아가서 "다시는 용을 훔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라고 당의 황제에게 아뢰었다 한다. 이때부터 팔각정을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 또는 '호국용변어정(護國龍變漁井)'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2.3. 보광전
금당 3개가 모두 소실되고 없는 현재 분황사의 대웅전 구실을 하고 있는 전각. 외관으로만 따져도 상당히 낡았다. 1998년 해체 수리 당시 분황사의 창건과 소실 경위 등이 담긴 상량문이 나왔는데, 보광전이 1680년 5월에 다시 지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보광전 안에 모셔져 있는 3.45 m짜리 금동약사여래입상은 구리 5,360근이 들었는데 18세기 후반의 작품이라고. 불상을 받치는 대좌는 석제인데 원래 부지에 있던 것을 재활용한 듯하다. 한쪽에 원효대사의 초상화도 같이 모셔두었다. 안에 불상이나 대좌, 갖가지 불화에 작은 보살과 위패가 벽에 가득하고 천장에는 연등까지 달려서 안에 들어가면 좁게 느껴진다.
3. 수정화주
사진 출처1 : 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닷컴 - 선덕여왕이야기 수정화주, 사진 출처2 : 국립경주박물관 홈페이지 - 수정화주(水晶火珠)
임진왜란 이후 절의 승려들이 탑을 다시 쌓기 위하여 헐었더니 바둑알만한 작은 구슬이 나왔는데, 그 구슬은 수정처럼 빛나고 투명하였으며 태양을 쪼여 솜을 가까이 대면 불길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것을 백률사에 보관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다.
이 전설이 진짜였는지는 알기 힘들다. 와전된 것일 수도 있다. 1915년에 분황사 탑을 수리하면서 발견된 사리함 안에 진짜 수정화주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대략 7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돋보기 혹은 불씨를 얻는데 쓰였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 안경의 역사와 관련된 유물 중 하나.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4. 반달리즘
근처에 우물이 있는데 경내에 있는 돌우물이 아니라, 분황사 북쪽 담에서 약 33 m 떨어진 또 다른 신라 우물이다. 이 우물 안에서 목이 잘린 불상 수십 좌가 발견 되었다. 불상은 비록 넘어지면 목이 쉽게 부러지는 구조이지만, 목 잘린 불상이 우물에 가득 쳐박혔으니, 과거 조선 시대에 반불교적 사상(숭유억불)을 가진 선비들이 작정하고 벌인 반달리즘일 가능성이 높다. 지금은 이 목 잘린 불상들을 건져서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전시관에 줄 세워 놓았다. 남산(경주)에도 의도적으로 파불(破佛)됐던 불상과 조각의 안면과 목을 다시 붙여놓은 것을 무수히 많이 찾아볼 수 있다.5. 기타
향가 도천수대비가는 신라 경덕왕시절 눈이 먼 아이가 분황사에 걸려 있던 천수대비의 그림 앞에서 기도하며 불렀던 노래다. 결국 눈을 떴다는 전설이 있다.홍수피해를 유난히 많이 받은 절이기도 하다. 사진에서 보듯 물길이 여기서 커브를 트는데, 상류에서 물이 넘치면 이것이 곧장 절로 직행한다. 애초에 법력으로 홍수를 막기 위해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윤경렬 선생이 쓴 신라 이야기 1권에 따르면, 물줄기가 흐르는 방향을 두고 분황사 부처와 헌덕왕릉이 서로 자기 쪽으로 안오게 하려고 기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그 싸움의 흔적으로 헌덕왕릉에는 현재 석물이 별로 남지 않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헌덕왕릉은 실제로 북천 강변에 바짝 닿아 있다. 하지만 결국 보문호와 덕동댐 건설 이후에야 홍수는 잦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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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 | 가족관계 | ||
매체 | 대중매체 | ||
설화 | 설화 | ||
연호 | 인평 |
[1] 동진의 승려인 여산혜원. '사문불경왕자론'으로 유명하다.[2] 불교신문에 따르면 원효 자신의 저서 107종 231권 대부분을 분황사에서 저술했다고 한다. #[3]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명이었던 승려 용성진종(龍城震鍾, 1864∼1940)의 손제자이다. 용성진종-동헌완규(東軒完圭, 1896~1983)-불심도문 이렇게 계보가 이어진다.[4] 사진 출처 : 문화유산채널 - 국보 제30호,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慶州 芬皇寺 模塼石塔)[5] 청지는 삼국유사에는 동천사(東泉寺)라는 사찰의 연못이라고 되어 있다. 박혁거세가 알에서 나왔을 때 목욕을 시켰다는 우물인 동천(東泉) 근처에 진평왕이 지은 사찰이라고 하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고려 이제현의 형인 승려 목암 체원(木庵體元)이 1324년 이후에 동천사의 주지가 되었다고 하니 14세기 고려 때까지는 존재한 듯하다. 목암체원은 국보 감지은니대방광불화엄경 진본을 제작한 사람이기도 하다.[6] 중국에서는 일반적으로 감숙성 황하의 서쪽 지역, 흔히 하서회랑으로 불리는 지역을 하서라고 부른다. 원성왕의 위대함을 전하기 위한 것이므로 행정단위의 국(國)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