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3:51:51

동궁과 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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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5288> 경주 동궁과 월지
慶州 東宮과 月池
Donggung Palace and Wolji Pond, Gyeongju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517 일대
분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궁궐·관아/궁궐터
면적 350,042㎡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건축시기 통일신라시대
소유 경주시
관리 경주시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유네스코 세계유산
<colbgcolor=#000> 경주역사유적지구
Gyeongju Historic Areas
Zones historiques de Gyeongju
<colcolor=#fff> 국가·위치 <colbgcolor=#fff,#1f2023>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경상북도 경주시
등재유형 문화유산
지정번호 976
등재연도 2000년
등재기준 (ii)[1], (iii)[2] }}}
파일:경주 월지.jpg파일:external/www.andongnews.net/DSC_0140.jpg
<rowcolor=#fff> 주간 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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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월, 궁궐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귀한 날짐승과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
삼국사기 권제7 신라본기 제7권 문무왕편 中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517 일대에 있는 통일신라시대궁궐 유적으로, 안압지(雁鴨池)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의 사적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은 본래 신라별궁으로, 신라의 태자가 사는 곳이었다. 동궁(東宮)이라는 이름은 신라의 법궁이었던 경주 월성의 동쪽에 있다는 데에서 붙은 이름으로, 이 궁궐의 바로 남서쪽에 경주 월성이 붙어 있다.

2. 명칭

안압지()라는 명칭은 조선 초기 동국여지승람동경잡기 등에 기록된 것이다. 조선 시대에 이미 폐허가 되어 갈대가 무성한 이 곳 호수에 기러기(雁)와 오리(鴨)들이 날아들자 안압지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이 명칭으로 더 잘 알려졌다.

그러나 1980년에 안압지에서 발굴된 토기 파편 등으로 통일신라시대에 이 호수를 월지(月池)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월지'란 명칭은 반월성(半月城: 경주 월성)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고, 임해전(臨海殿)의 이름도 원래는 월지궁이다.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여 2011년 7월부터 이곳의 정식 명칭도 오랫동안 써 왔던 '안압지' 대신 '동궁과 월지'로 변경되었고 각종 안내문에서도 변경된 명칭을 따랐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래로 안압지로 알려진 기간이 워낙 길어서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압지라고 부르고 표기하기도 한다. 동궁과 월지에 비해 부르기도 더 쉬운 점도 한몫한다.

다만 신라 시기에도 '임해전'이란 명칭을 일부 쓰기도 한 듯하다. 삼국사기에는 동궁을 임해전[3]이라고 부른 기록이 있다. '바다와 가까운 건물'이라는 뜻으로 안압지를 상징화했다고 추정한다. 해당 건물군들 주변 연못가에서 금동판불 등이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보아 여기에서 종교적인 의례를 거행했을 가능성도 있다. 즉, 월지를 만든 시기가 나당전쟁 당시인 데다가 김유신이 사망한 뒤 지진, 반란이 일어나고 호랑이가 궁궐에 출몰하는 등 흉흉한 시절이다 보니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 국난 극복용으로 어떤 의례를 거행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그 외에 춘궁(春宮) 혹은 청궁(靑宮)#이라고도 불렀다. 오행설에서 목(木)이 방위로는 동쪽, 계절로는 , 빛깔로는 파란색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2.1. 상세

왕이 사는 법궁경주 월성과는 북동쪽으로 접해 있으나, 현재는 원화로에 의해 갈라져 있다. 또한 황룡사의 남서쪽에 있다. 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과도 아주 가깝다.[4]

궁궐은 바로 당시 통일신라시대 때 수십 개 전각이 늘어서 있었지만 지금은 1, 3, 5호 건물지 3채만 복원한 상태다.

또한 이곳의 심벌은 '월지'라는 이름의 인공 호수인데, 사실 궁궐의 이미지보다는 과거 통칭이었던 '안압지'라는, 월지 호수와 누각으로서 훨씬 잘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고대 한국 건축물 중 하나이며, 통일신라 정원 양식의 원형이 잘 보존되었고 당시의 건축, 생활 양식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들이 많이 나왔다. 보통 한국의 다른 고대 유물들은 무덤에서 출토된 것이 많은데, 이곳에서 나온 유물의 특징은 문고리, 옷걸이, 가위, , 출퇴근 카드로 쓴 목간, 젓갈 제조일자 꼬리표, 실제로 쓴 각종 그릇 등 온갖 실생활 용품이 많이 나왔다는 점이다.

임해전(臨海殿), 임해문(臨海門) 등이 있었다. 링크

3. 역사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유적이다.

3.1. 신라시대

3.1.1. 연혁

문무왕(文武王)이 674년궁전 경주 월성의 동쪽에 호수를 만들고, 679년에 같은 위치에 동궁을 별궁으로 짓고 여러 건물의 이름을 새로 지었다. 이 시기는 나당전쟁당나라의 도독부 공식 철수와 공격 포기로 사실상 마무리되면서[5] 기나긴 삼국통일전쟁이 마무리되고 평화 시대가 시작되면서 정궁인 경주 월성의 규모가 협소했던 것을 확장해 왕권강화하기 위해서였고, 동궁은 태자가 거처하는 곳이 되었다. 죽어서 동해의 용왕이 되었다고 믿어진 문무왕이 만든 곳이라 그런지 용왕에게 제사를 올리는 용왕전(龍王殿)이라는 건물이 있었고 용왕에 대한 제사는 출토된 신심용왕(辛審龍王) 유물로도 증명되었다.

경복궁의 경회루처럼 풍류와 연회 장소로도 쓰였다. 697년과 769년, 881년 등 대신들을 모아 잔치를 벌인 기록이 있으며 804년과 867년에 대대적으로 중수했다. 후삼국시대인 931년에는 고려 태조 왕건을 초대해 잔치를 베풀기도 했다.

3.1.2. 신라시대 당시의 구조와 건축물

파일:안압지 - 중전.png
파일:안압지 - 정전.jpg
<colbgcolor=#4a2d5b> 한 누리꾼이 복원한 '동궁과 월지'의 중전(中殿)과 정전(正殿)[6]
동궁에서 호수와 가장 인접한 곳에 임해전(臨海殿)을 세웠고, 여기서는 호수를 바라보며 연회를 즐기는 장소로 쓰였다. 신라가 멸망하기 직전인 931년 왕건서라벌을 방문했을 때 경순왕이 왕건을 임해전에서 접대하기도 했다. 특이점으로 임해전의 건물 구조는 이 없는 것을 제외하면 전형적인 사찰 가람 양식이다. 실제로 호수 안에서 불상불교 관련 유물이 좀 나오기도 했는데, 신라는 왕실과 석가모니 가문을 동일시할 정도로 불교와 왕실이 밀착해 있었으므로 왕실 건축도 영향을 받은 듯하다. 동궁에는 임해전을 비롯해 건물 27동의 건물이 확인되고 있는데, 임해전, 사정부, 소년감전, 예궁전, 동궁아관, 동궁아, 어룡성, 세택, 급장전, 월지전, 승방전, 포전, 월지악전, 용왕전 등이 있었다. 현재는 건물 3채만 복원했고, 나머지는 울타리를 쳐놓고 주춧돌만 보존한다. 동궁과 월지에 가 보면 입장 후 호수까지 가는 길에 건물 터들을 볼 수 있다. 궁궐의 바닥은 경주 월지 보상화무늬 전과 같은 전돌보도블럭처럼 깔아서 포장했다.

동궁의 동쪽에 있는 호수 월지(안압지)는 별궁인 동궁에 붙어 있고 신라 왕궁 안쪽의 친수 구역으로, 거대한 인공 연못에 조경을 해놓았다.

임해전(臨海殿) 전각의 이름에서 보듯 호수바다를 형상화해서 만들었다. 좁은 호수를 넓어 보이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를 고려하였다. 서쪽과 동쪽의 높이를 다르게 하고, 동쪽의 해안선을 구불구불하게 만들어 어디에 서서 봐도 호수 전체가 보이지 않도록 했다. 신라 때부터 연꽃을 식재했지만 연꽃이 무제한으로 번식하여 수면을 뒤덮어 좁아 보이게 됨을 방지하고자 물 안쪽에 우물 정(井)자형으로 귀틀을 만들고 그 안에만 연꽃을 심었다. 하지만 현대의 복원 과정에서 이를 고려하지 않아 호수 여기저기에 연꽃이 만발해졌다.

월지에는 가장자리가 곡선과 직선이 섞인 연못이 있고, 연못 안에 크기가 서로 다른 섬 3개를 만들어[7] 섬 안에는 각종 진귀한 식물동물들을 풀어 놓았다고 한다. 모두가 여기에서 키우던 동물인지 그냥 고기를 먹고 뼈다귀를 호수에 내던져 버렸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호수 속을 조사했을 때 , , 돼지, , 노루, 산양, 사슴, 멧돼지, , 오리, , 거위, 기러기 등의 뼈가 출토되었다.

의 곡선이 교묘하게 처리되어 절대 한 곳에서는 그 전체 모습이 다 보이지 않음이 특징이다 보니 별 달리 지루한 것이 없다. 월지 등장 이후 이런 자연스러운 굴곡이 있는 연못 형상이 한국뿐만 아니라 비슷한 시기 일본 나라 쪽 연못에서도 유사점이 보이는데, 아마 이걸 본 일본 관료들이 일본에 있는 백제계 조경가들을 불러서 만들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통일전쟁 직후에 만든 곳이라 고구려와 백제계 장인이 참여했을 것이라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1970년대 발굴을 위해 호수의 물을 빼자 거대한 석축이 드러났는데 큰 돌을 벽돌 모양으로 가공해 가지런히 쌓고 석축 주위에 보호석을 깐 것은 고구려의 산성 양식과 유사하고, 출수구에서는 궁남지와 같은 연못 조경을 발달시켜온 백제 양식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전 황룡사 목탑 건축에도 백제 장인 아비지가 참여했음을 보면 구삼국 출신 장인들이 모두 참여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호수의 물은 북동쪽에 있는 북천의 물을 인공 수로로 끌어오는데 신라시대에 만든 입수구 장치가 지금도 남아 있다. 여기에도 여러 과학적 장치가 있는데, 물이 호수로 떨어지기 전에 거북이 등껍질을 음각한 듯한 두 개의 수조를 지나게 되어 있어 북천 물에 섞여온 자갈과 흙들은 이 수조에서 거르고, 입수구의 물이 떨어지는 곳에는 판판한 돌을 깔아서 침식과 흙탕물이 되지 않도록 했다. 물이 떨어져 흐르는 곳 바로 앞에 작은 인공섬을 만들어 물살을 느리게 하고 자연스럽게 물이 흐르도록 했다. 서남쪽에는 호수 물이 빠져나가는 배수구가 있는데 나무 마개 3개로 호수의 높이를 조절했다.

3.2. 신라 이후

신라가 멸망한 후 점점 관리가 소홀해졌다. 또한 《고려사》를 비롯한 여러 기록들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부터는 멸망한 신라 왕조의 유산과 흔적을 없애기 위하여 동궁의 전각들을 무너트리거나 강제로 훼철했다는 시각이 있었다. 하지만 고려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이 발굴됨으로서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생겼으며 오히려 고려 시대에도 유지 보수가 지속되었을 수도 있다.# 동궁과 월지 일대로 추정되는 조유궁황룡사 9층 목탑 보수를 위해 철거됐다는 것은 그 전까지는 궁이 훼철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고려 시대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난 구한말에는 건물들은 터만 남고 호수 정도만 덩그러니 남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임해정이라는 전각을 새로 지은 적이 있으며, 결국 이는 복원을 위해 1977년에 북쪽에 있는 황성공원으로 옮겨졌다. 임해정의 현재 이름은 호림정이다.
파일:attachment/1950Apalace.jpg
<colbgcolor=#4a2d5b> 1950년의 월지와 임해정
일제강점기에 설치된 동해남부선(현 동해선) 철도가 동궁 부지 유구 위를 일부분 밟고 지나갔다. 다만 동해선이 최중요 부분인 금당지를 밟고 지나가는 경주 사천왕사지에 비하면, 여기는 끄트머리 쪽이라 그런지 인지도는 좀 낮다. 어쨌든 이 부분만 발굴조사를 못 하고 있고, 네이버 지도다음 지도의 위성 사진을 봐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동해선이 경주역이 있는 건천읍으로 이설됐으므로, 선로를 걷어내고 조사가 시작될 계획이다.


1976년 컬러 영상

월지는 경주 시내의 유일한 호수로, 원래는 발굴할 계획이 없었다. 그냥 동네 낚시터였다. 다만 1974년에 이미 폐허가 되어 탁한 물만 고여 있는 월지를 좀 더 깔끔하게 〈임해전지〉로 정리하려고 준설 작업을 하는 도중, 수많은 유물이 나오는 바람에 1975년부터 2년 동안 호수의 물을 빼고 발굴하게 되었다. 이때 5군데의 누각터를 비롯해 건물지 31곳, 선착장이 드러났고 함께 3만여 점의 유물이 나왔는데 그 전까지 고대 유물이 주로 출토되던 무덤 등의 부장품과 달리 실생활에서 사용하던 것이 많이 나왔다. 유물에 대해서는 하단의 출토된 유물 단락 참고. 이때 발굴한 유물들은 국립경주박물관 내부의 월지관(구 안압지관) 건물에 소장되어 있다.

이후에는 신라시대연못과 석축, 그리고 세 동의 전각을 지어놓은 상태.

4. 복원 계획

경주시는 장기적으로 안압지와 임해전을 신라 때처럼 수십 채의 전각이 있는 별궁의 모습으로 완전히 복원할 생각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근처의 유적지(경주 월성, 황룡사, 경주 최씨 고택, 월정교 등)를 하나로 묶어서 관광 상품으로 개발하려고 하는 분위기를 봐서는 언젠가는 복원할 기세이다. 사실 경주에서 가장 원형대로 복원하기 쉬운 곳이 안압지이기도 하다. 다른 데선 원형이 남아나기 힘든 목재를 비롯해 여러가지 사소한 건축 자재 유물들까지 많이 나와서 상대적으로 그 모습을 짐작하기 쉽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주변이 허허벌판이었으며 여기까지 경주시 도심이 확장되지 않은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거기에다가 근처 인공 호수진흙 속에 묻혀 있던 다양한 유물들이 발굴 직전까지 거의 천 년을 버텨준 덕분에 그동안 발견된 적이 없는 그야말로 희귀한 유물들이 많이 보존되었다. 건물이 그대로 주저앉아 일부 목재와 기둥이 보존된 운 좋은 경우도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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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2d5b> 국립경주박물관 월지관에 있는 안압지와 임해전의 복원 모형 <colbgcolor=#4a2d5b> 임해전 모형 세부

4.1. 복원 비판

파일:wolji_5ho_rep.jpg
<colbgcolor=#4a2d5b> 복원된 월지 5호 전각의 단청
안압지의 세 전각을 우선 복원하였는데 일부에서는 복원을 잘못했다고 지적한다. 전각의 구조는 그럭저럭 원형의 모습을 최대한 반영하여 복원한 것 같지만, 안압지에서 출토된 화려한 금속 장식물들을 전혀 활용하지 않은 점 등 문제가 있다. 신라시대궁궐 건축물은 금속 장식물로 사치를 부리는 것을 경계했던 조선 시대와 달리, 서까래나 난간 끝에 일일이 금동으로 된 장식 마개 등을 달았다. 이 덕분에 햇빛이 비치는 날이면 건물이 황금빛으로 번쩍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끼우는 금동 장식 유물들이 출토되어 버젓이 바로 옆에 있는 국립경주박물관 월지관에 전시 중임에도 불구하고 3개 건물을 복원하며 하나도 쓰지 않았다. 이렇게 서까래에 금속 장식을 다는 건 일본의 건축 양식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일본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쭉 해온 거고 한국이나 중국은 원래 있다가 없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런 양식은 원래 한중일 공통으로 있었던 양식이라고 보는 게 옳다. 그러므로 실제 발굴 유물까지 존재하는 신라시대 건축물인 이곳에는 만들어서 달아두는 것이 옳은 복원이다.

섬세하게 조각된 장식 기와를 활용한 점은 좋지만 마무리가 좀 어설픈 편이다. 단청도 논란이 되었는데, 일반적으로 고려 말~조선시대부터 유행한 상록하단 단청을 입혔기 때문이다. 발굴된 단청 항아리에 녹색 안료가 있었으므로 상록하단 단청이 삼국시대에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한국에서 상록하단 단청이 보편화된 것은 고려 시대 말부터다. 신라시대에 어떤 단청을 칠했는지에 대한 확실한 자료가 없어서 이 부분은 결론이 안 나오지만, 신라는 기둥을 붉게 하고 금색 단청을 칠하였다고 대부분 학자들이 받아들인다. 즉, 현재 칠해져 있는 상록하단 단청은 신라시대의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붉은색을 왜색 또는 중국풍으로 받아들이는 대중 때문에 자리잡은 국내 복원 사업의 악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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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2d5b> 복원 조감도 <colbgcolor=#4a2d5b> 최근에 제작한 복원 조감도[8]
경주시는 〈신라왕경조성계획〉의 일환으로 2010년부터 2018년까지 사업비 630억 원[9]을 들여 동궁(東宮)내 정전(正殿) 및 회랑 복원, 선착장 발굴 및 구조물 정비, 미조사 지역 확대 발굴 및 경역 정비 등의 복원 사업을 진행하고 실시 설계에 들어가 2015년 7월에 복원 공사를 발주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계속 연기되다 결국 2018년 10월 유네스코 측에서 이번 복원이 정확한 기록이나 역사적 사료가 부족한 복원이라고 판단, 반대하여 복원 사업이 취소되었다.

2019년 출간된 동궁과 월지 실시 설계 보고서를 보면, 국립경주박물관 소장의 월지 출토 목재를 연구하고 이 성과를 설계에 반영하였다. 동궁과 월지 서편 건물의 복원안을 보면 중층 전각은 고대 중국이나 일본에서 많이 사용한 적층식 구조[10]를 적용했고, 고구려 고분 벽화의 인자화반과 월지 출토 파만자형 난간 등도 적용하였다.

실시 설계 도면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서까래와 부연에 월지 출토 금동마구리를 반영하고, 난간에도 금속 철물을 반영한다는 점이다. 일본 평성궁 대극전과 느낌이 유사하다. 실제 재현 공사가 완료되었다면 평성궁과 흡사한 분위기였을 것이다. 단청은 최신 연구 결과가 거의 그대로 반영되어 주칠 위주에 문양을 올리는 방안으로 추진할 예정이었다. 건물의 당호는 특이하게 당나라의 사례를 따라 서편 건물지 일대를 묶어서 '임해전'이라 부르고, 중문만 '임해문'으로 부를 예정이었던 듯하다. 아쉬운 점은 2014년에 이루어졌던 생활사나 내부 가구에 대한 연구가 이번 보고서엔 수록되지 않았다는 것. 이는 굉장히 중요하다. 생활사나 내부 의장을 충분히 고증하지 않으면 그저 거금을 들여 만든 드라마 세트장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백제문화단지가 그 사례로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위에 서술된 것처럼 유네스코의 반대로 복원 사업은 무산되었고, 예산도 국가에 반납한 상황이었으나, 2020년 12월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에 관한 특별법이 시행되었고, 2021년 1월 주낙영 경주시장이 신년사에서 동궁과 월지의 복원을 직접 언급했으므로 다시 복원에 박차를 가할 듯하다.

2022년 말, 동궁과 월지의 재정비가 완료되었다. 여전히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1호 건물지는 발굴중이지만 기타 복원된 전각들은 여전히 상록하단을 고수하긴 해도 실전된 전통안료 제조법을 복원하여 제조한 전통안료로 단청을 칠했다.

5. 월지 동쪽과 북동쪽의 발굴조사

월지 동쪽과 북동쪽은 일제강점기 때 깔린 동해선 철도가 깔려 있어서, 매일 열차가 달리는 선로 아래로는 제대로 발굴 조사가 진행되지 못했다.[11] 2021년 12월 28일에 동해선이 건천읍으로 이설되어 구 동해선 선로는 철거되었다.

일단 월지 동북쪽을 2017년부터 선로 노반을 피해 나머지 부분에서 발굴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5.1. 훨씬 넓은 궁궐이었을 가능성

월지 동북쪽에서는 현재 수세식 화장실과 여러 대형 건물, 유물들이 대규모로 출토되고 있어서 동궁의 중심지가 월지 호수 서쪽이 아닌 북쪽일 가능성도 생겨나고 있다.
파일:경주 월성 주변 항공 사진.png
<colbgcolor=#4a2d5b> 경주 월성 주변 항공 사진
그리고 월지 호수 북동쪽은 바로 황룡사 부지와 쭉 이어진다. 동궁이 월지 북동쪽까지 뻗어 있었다면 자연스레 황룡사동궁이 연결되어 {남궁경주 월성동궁과 월지황룡사 }와 같이 신라 왕실과 관련된 궁궐과 건물들이 서로 연결되었다는 여러 설들이 생겨나고 있으며 특히나 신라 왕실과 관련된 설이 주목을 받고 있다. 81m 높이의 거대한 9층 목탑으로 세간에 유명한 황룡사는 본래 신라의 왕실 사찰이라는 점이나 신라에서 국교와 같았던 불교의 위상을 감안하면 왕궁의 일부와 같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고[12] 동궁이 예상외로 현재 알려진 범위보다 대규모로 위치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앞에 쓴 4개 왕궁 시설이 쭉 연담화[13]되어 있었다고 가정하고 이를 하나의 궁역으로 계산하면 흥선대원군이 무리해서 크게 중건한 그 경복궁보다도 더 넓었고, 동아시아 주변 국가들의 현재 남아 있는 고궁인 일본의 교토고쇼류큐 왕국슈리성, 베트남후에 황궁보다도 더욱 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재까지 동궁의 발굴을 통해서 밝혀진 규모가 신라의 전성기에 비해 지나치게 작다는 것은 이번 월지 북동쪽 발굴 조사를 통해서 확인되었다.

1970년대에 발굴이 월지 서쪽과 월지를 중심으로 발굴한 것이지만 2017년부터의 발굴이 월지 북쪽을 중심으로 발굴한 것이기에 동궁의 각종 궐내각사침전, 화장실, 창고가 더 나올 가능성도 있다. 네이버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동궁 서쪽과 남쪽은 현재 '원화로'로 인하여 끊겨 있고, 동쪽과 북쪽은 동해선 철도로 끊겨 있다. 사방이 막혀 있어 아직까지 발굴조차 하지 못한 상황이다. 일부 학자들은 북쪽과 동쪽에서의 발굴을 통해서 역사와 기록 속의 전각들과 유물들이 추가로 출토될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고 있다.

6. 발굴과 출토된 유물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물의 양이 3만 점에 달한다고 한다. 호수 안쪽의 진흙이 유물이 썩거나 훼손되지 않게 보존해준 역할을 했다고 한다. 고대 건축물에 대한 정보가 절대 부족한 상황에서 수많은 건물 자재와 장식들이 나왔으며, 이런저런 고대의 생활상에 대한 기록이 이두로 써 있는 목간도 다수 출토되었다. 가령 '문호목간(門號)'이 있는데, 이는 신라시대의 출퇴근 카드이다. 왕궁의 궁문별로 배치한 경비 인원을 목간에 기록한 다음, 그날그날 근무자의 실재 여부를 감독자가 직접 검사해서 경비의 이름 아래에 '있었다'라는 뜻인 '재(在)' 자를 기록했다. 그리고 이 목간은 나중에 경비원이 봉급으로 받을 곡식을 청구하는 데 썼다. 이런 기록으로 동궁의 구조나 인력 운영 방식까지 알 수 있었다. 이외에 식해 같은 발효 음식의 제조일자를 꼬리표로 달아놓은 목간이 여럿 나왔는데 가오리, 돼지고기, 개고기, 노루고기, 내장 등을 연월일 - 음식물명 - 가공 방식 - 용량, 용기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외에도 의약 처방 기록 목간, 젓갈이 급히 필요하니 강원도 고성에서 택배로 보내오라고 요청한 목간 등 여러 가지 일상생활에 쓰였을 법한 목간들이 다수 나왔다. 기사. 심지어는 한사(韓舍)[14]라는 똑같은 글씨를 잔뜩 써놓아 마치 필체를 연습한 듯한 목간, 사람의 얼굴을 낙서한 목간[15] 같은 것도 있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물건이 많이 나왔는데 그중에는 문고리, 옷걸이, , 가위, 담았던 것의 흔적까지 남은 각종 그릇 같은 일상용품, 정교한 조각이 된 향로 뚜껑,[16] 호숫가에 설치했을 난간과 기와 같은 동궁 건축의 잔해, 그 외에 신라의 주사위 같은 이색적인 물건도 있으며, 나무로 된 남근 조각상 같은 것도 있어서 후손들의 불순한 마음을 자극하고 있다.
파일:WoodenPhallusImage.png
<colbgcolor=#4a2d5b> 출토한 남근상
남근상을 종교적 목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실제로 남근상은 1960년대 이전까지 한국 무속에서도 많이 사용했고,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부터 시작해서 고대 그리스나 고대 로마, 북유럽 등등 거의 세계 전부라고 말해도 과장이 아닐 만큼 광범위한 문화권에서 종교적 목적으로 사용된 게 발견된다.
파일:external/thumbnail.egloos.net/a0101184_496e395d2579d.jpg
<colbgcolor=#4a2d5b> 출토한 서양 할버드와 비슷한 쇠창[17]
그 외에 고고학적인 조사 결과를 통해 동궁과 월지에 흥미로운 부분이 많았다는 점이 드러나고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2017년에 발견된 수세식 변기의 존재이다. 그동안 '화장실'의 존재는 고고학적으로 꽤 발견이 있었지만 이렇게 수세식 변기의 형태를 띤 유적은 처음이다. 시대적인 배경으로 보아 대략적으로 8세기 신라 동궁에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넓은 석조 발판이 양쪽에 있고 아래쪽에 변기가 위치하고 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수세식 화장실로 추정된다고. 따로 물을 흘려보내는 시스템은 없는 것으로 보아 볼일을 본 후 항아리에 있는 물을 사용해서 밑으로 흘려보내는 배수로를 통해 분뇨를 아래로 내려보낸 것으로 보인다. 이런 수세식 화장실의 존재는 당대 신라 최상위 계층이 세련된(?) 문화를 영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해당 유적에 대한 관련 기사

그리고 땅 밑과 위에는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대하고 기다란 화강암 배수로가 있다. 현재는 땅 위에 있는 일부 배수로만 확인되며 실제로는 그 밑에 엄청난 길이의 배수로가 존재한다. 일부 배수로는 이를 따라서 월지 내부로 이어진다. 당시 건축 기술과 배수 기술이 엄청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

6.1. 경주 월지 금동용머리 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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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경주 월지 금동초심지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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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목제 주령구(酒令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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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img.yonhapnews.co.kr/PYH2011060204880005300_P2.jpg
파일:external/blog.joins.com/re_5285f1e47c5df.jpg
<colbgcolor=#4a2d5b> 주령구 <colbgcolor=#4a2d5b> 주령구를 본뜬 빵
나무로 만들어진 14면의 주령구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다.
  • 삼잔일거(三盞一去): 세 잔을 한 번에 마시기
  • 음진대소(飮盡大笑): 다 마시고 크게 웃기
  • 임의청가(任意請歌): 마음대로 노래 청하기
  • 자창자음(自唱自飮): 혼자 노래 부르고 혼자 마시기
  • 금성작무(禁聲作舞): 노래 없이 춤추기
  • 유범공과(有犯空過): 덤벼도(장난쳐도) 그대로 있기
  • 중인타비(衆人打鼻): 여러사람 코 때리기
  • 곡비즉진(曲臂則盡): 팔뚝 구부린 채 다 마시기[18]
  • 농면공과(弄面孔過): 얼굴 간질여도 가만 있기
  • 월경일곡(月鏡一曲): 월경(月鏡: 노래 이름) 한 곡 부르기
  • 자창괴래만(自唱怪來晩): 스스로 괴래만[19]으로 부르기
  • 공영시과(空詠詩過): 시 한 수 읊기
  • 추물막방(醜物莫放): 더러워도 버리지 않기
  • 양잔즉방(兩盞則放): 두 잔 쏟아버리기(마시기라는 해석도 있다)

그야말로 고전적인 술 게임. 이 때문에 이 주사위에는 〈주령구(酒令具)〉라는 이름이 붙었다. 아마 포석정에서도 비슷한 놀이를 했을 것이다. 다만 이 주사위 유물 원본은 보존을 위해 건조를 하던 중 기기의 작동 이상으로 건조 온도가 너무 높아져 그만 재가 되어 버렸다. 그나마 건조기에 넣기 전에 기록을 해 두었던 것이 불행 중 다행.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은 복제품이다. 기념품으로 판매하기 위해 다양한 크기로 만들어진 상품들도 구할 수 있으며 아예 몇 배 이상 뻥튀기한 대형 사이즈의 주령구도 설치되어 있다.

6.4. 안압지 출토 금동판 불상 일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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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경주 월지 유리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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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경주 월지 목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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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경주 월지 금동화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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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경주 동궁 출토 신라 수세식 화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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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경주 월지 금동 발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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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경주 월지 꽃·새무늬 뼈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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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1. 경주 월지 보상화무늬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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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 경주 월지 순금 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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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 경주 월지 금동 봉황 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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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4. 경주 월지 사자모양 곱돌향로뚜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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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 경주 월지 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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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6. 경주 월지 금동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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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7. 경주 월지 입수쌍조문 사자공작무늬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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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8. 꽃 장식 평탈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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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9. 명활산성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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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입장료

성인 3,000원
청소년/군인 2,000원
어린이 1,000원

경주시민(주민등록증/운전면허증 제시), 장애인 복지카드, 국가유공자증 소지자는 입장료가 면제된다. 단, 내부 공사 중일 경우에는 무료로 개방한다.

8. 기타

  • '제2안압지'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던 또 다른 신라 인공 호수 정원 유적이 경주시에 존재한다. 경주 용강동 원지 유적(대한민국의 사적 제419호)인데, 이곳 역시 동궁과 월지에 비하면 규모가 작지만 유사한 궁궐건축으로 추정되며 진성여왕대의 북궁이거나 적어도 별궁 유적지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다만 동궁과 월지에 비해 정비를 하지 않았고 물을 채워놓지도 않았기 때문에 학자가 아닌 일반인이 보기엔 그냥 잔디 공원처럼 보일 뿐이고 경주 시내 반대편에 있어 다른 주요 관광지와도 거리가 먼 편이다.
  • 동궁과 월지 주변을 빙 둘러 음성 안내 시스템 QR코드 안내 피켓이 있다.
  • 야경이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하다. 이 때문에 네이버 지도 거리뷰로 동궁에 가면, 항상 주간에 찍는 것이 원칙인 다른 곳들과는 다르게 거기만 야간으로 되어 있다.[20] 당연히 야간에 동궁과 월지 일대에는 길 건너편의 첨성대와 엮어서 관광객들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 월지의 형태가 동아시아지도를 표현했다는 견해도 있다. 실제로 가서 보면 잘 알기 어렵지만 공중에서 바라보면 관람자가 서는 곳(서쪽) 기준에서 봤을 때 호수의 윤곽선이 상당히 중국 동해안부터 한반도로 이어지는 해안선과 유사하다.[21] 중국은 대충 큰 땅덩어리 정도로 처리했지만 한반도 부분 해안선은 상당히 유사하다. 이에 따르면 위에서 말한 섬 3개는 제주도, 일본 등을 표현한 것이라고. 지도 모양으로 만든 게 맞다면 세계 최초의 입체 지도라고 하며, 동아시아 전체를 표현한 지도 중 실물이 남은 가장 오래된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보다도 600년 이상 오래된 셈이다. 국립경주박물관의 월지관에도 월지 해안선 지도설 이야기를 실어놓았다. 물론 한반도 지형처럼 우연히 닮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건 인공 호수이기에 목적과 의도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에 관한 뚜렷한 기록이나 물증이 없어 가설로만 남은 상태이다.

[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3] 당장 동궁 동쪽의 황룡사 자리로 가는 길 이름이 "임해로"다.[4] 1974년 박물관 건설 당시 왕궁 터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굴되어 지금의 박물관이 있는 쪽까지 왕궁 구역의 일부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5] 당시 당나라는 서쪽 토번(티베트)과 동쪽 신라와 동시에 양면전쟁을 하고 있었는데 이미 고구려 때부터 계속 전쟁을 해왔기 때문에 국력 부담이 컸고 실제로 나중에 토번에게 수도 장안 근처까지 털린다. 사실 나당전쟁도 이런 당나라의 상황을 파악한 문무왕이 고구려 부흥 세력과 입을 맞춰놓는 등 판을 짜놓은 뒤 선제 공격해서 시작한 것이다.[6] 사진 출처.[7] 섬 3개 때문에 조선시대에 나온 안정복이 지은 동사강목에서는 '상무산십이봉' 즉, 무산 십이봉을 본떠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1999년 이전까지 이러한 구절을 인용해서 신선사상 등을 표현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정작 동사강목보다 훨씬 신라와 가까운 자료, 즉 삼국사기일본서기 등에서는 월지를 두고 '귀한 식물, 동물을 풀어놓았고 관상용으로 즐겼다는 것' 이외의 별다른 묘사를 하지 않았다. '무산 십이봉'이라는 개념이 나오기 전에 월지를 만들었음을 감안하면, 안정복이 조선시대 사람이니 당연히 당시 사고방식으로 잘못 판단한 것이다.[8] 이렇게 최근에 만들어진 복원도가 과거 만들어진 복원도와 가장 큰 차이가 나는 부분은 중전이 중층에서 단층으로 줄어든 것이다. 고증 관련 문제인지 예산관련 문제인지는 불명.[9] 국비 441억, 도비 57억, 시비 132억.[10] 별개의 분리된 층을 올려서 중층을 만드는 방식. 입면이 자유로운 장점이 있다.[11] 비슷하게 경주시에서 동해선 철도가 깔고 지나가서 조사하지 못한 곳으로 경주 사천왕사지가 있다.[12] 실제로 삼국사기에서도 원래 궁전으로 만들던 것을 공사 도중 사찰로 용도변경했다고 한다.[13] 담이 연결되어 하나의 건물군을 이루는 것을 뜻한다.[14] 신라의 관등 이름이다.[15] 찾아보면 썩소를 짓고 있는 얼굴을 그려놓았다. 목간은 고대史 비밀 푸는 열쇠[16] 사자 모양인데 몸통이 비어 있어 향을 피우면 사자의 코와 입을 통해 연기가 나오게 만든 것이다.[17] 해당 유물은 드라마 해신에서 신라군 창으로도 나온 바 있고, 비슷한 유물이 개성에서 출토된 적도 있다. 북한에선 철검이라고 한다.[18] 후세 사람들 중에선 이것을 러브 샷으로 추정하는 사람들도 있다.[19] 밤 늦게 곤드레되어 들어오는 모양새[20] 다른 하나는 광안대교.[21] 파일:map00001.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