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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적 제339호 | |
<colbgcolor=#315288> 전주 경기전 全州 慶基殿 | Jeonju Gyeonggijeon | |
소재지 |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태조로 44 (풍남동3가) |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제사유적 / 제사터 |
면적 | 49,589㎡ |
지정연도 | 1991년 1월 9일 |
제작시기 | 조선 시대[1] |
<colbgcolor=#bf1400> 경기전의 홍살문 |
경기전 본전 |
[clearfix]
1. 개요
국보 제317호인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인〈조선태조어진〉을 봉안한 곳이며, 영정을 실제로 모신 정전 건물은 보물 제1578호다.경기전 권역은 1991년 사적 제339호로 지정받았다.
<colbgcolor=#bf1400> 경기전에 봉안했던〈조선태조어진〉 |
2. 상세
1410년(태종 10년)에 전주, 평양, 경주, 개성, 영흥에 태조의 어진을 모시는 '어용전(御容殿)'을 세웠는데, 1442년(세종 24년)에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集慶殿)', 평양은 '영숭전(永崇殿)'[2]으로 이름을 고쳤다.[3]'경기(慶基)'라는 이름은 조선의 국성(國姓)인 전주 이씨의 발상지이므로 '경사스러움(慶)이 터잡은(基) 곳'이라는 뜻으로 지은 것이다.
경기전 동편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전주사고도 설립되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 다른 3곳의 사고가 모두 소실되는 와중에 전주사고의 실록들은 극적으로 옮겨져 소실을 면하면서 조선 역사 자료를 지켜냈다. 실록의 보관사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조선왕조실록 문서 참조. 현재 존재하는 실록각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탄 이후 1991년 복원한 것이다.임진왜란 당시 이 경기전을 제외한 4곳은 모두 불탔고 정유재란 때 이 경기전마저 소실되었다. 그 후 광해군 때 경기전만 복원했다. 태조 어진은 임진왜란 당시 묘향산, 병자호란 때는 무주 적상산, 정유재란 때는 서울 명륜당 그리고 동학농민운동 때는 위봉산성으로 옮기어 보존할 수 있었다.[4]
경기전에 있는 어진은 1872년(고종 9년)에 원본이 너무 오래되어 모사한 것이다. 현재 경기전 진전에 있는 어진은 모사본이며,〈조선태조어진〉원본은 어진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원본은 1년에 1번 11월중에 약 3~4주간 전시된다고 한다.
경기전 입구에 있는 하마비(下馬碑)에는 이곳이 어떤 장소였는지를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이라고 새겨져 있으며, 계급의 높고 낮음,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의 출입을 금한다는 뜻이다.
참고로 경기전 코 앞에는 천주교 전주교구 전동성당이 작은 길을 사이에 두고 이웃하고 있다. 완고한 왕조의 갖은 탄압을 뚫고 전세계 거의 유일하게 자생적으로 신앙을 싹틔운 한국 가톨릭의 오래된 교회와, 바로 그 유교 이념으로 500년을 버틴 왕조의 시조를 모신 준 묘사(廟祠)가 얼굴을 바로 맞대고 있는 셈이다.[5] 실제로 처음 방문해 보면 이 고즈넉한 마을에 우뚝선 두 건물들의 이질감이 매우 인상적이다.[6]
다소 충격적이기까지한 이 절묘함은 두 건물 사이를 지나는 태조로가 조선시대까지는 전주부의 남쪽 성벽 자리였던 것에서 기인한다. 가톨릭 선교가 자유화[7]되어, 박해를 피해 숨어 살던 전주지역 신자들이 점차 산골에서 내려오고 수도 늘면서 전주부 내에 성당을 짓기 위해 성벽에 붙어있는 구례 영저리[8] 저택을 사들여 임시 성당 겸 성당 신축 부지로 삼았다. 그런데 착공 직전인 1908년 통감부가 전주부성을 헐어버리면서 성당 부지와 경기전이 장애물 없이 서로 마주보게 되었다.
현재 경기전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경기전과 전주사고, 조경묘, 어진박물관, 경기전 부속채를 관람할 수 있다.
3. 훼손과 복원
<colbgcolor=#bf1400> 일제강점기 경기전 배치도[9] | <colbgcolor=#bf1400> 일제강점기 경기전 본전 |
4. 관람
입장료는 무료였으나, 2012년 9월에 유료화 정책이 발표되어 2018년 12월 현재는 어른이 3,000원 (65세 이상은 무료), 청소년이 2,000원, 어린이가 1,000원이다. 그리고 경기전에는 정문과 동문, 서문이 있다. 경기전과 중앙초등학교 사이길로 가면 어진박물관과 가까운 동문이 있고, 경기전막걸리, 옛촌막걸리 방향에 서문이 있는데, 사람들이 한옥마을에 면한 정문에만 줄을 길게 서서 이 쪽은 한적한 편이다.보다 저렴하게,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전주시민은 어른도 천원이고, 매월 마지막주 수요일은 문화가 있는 날로 무료관람일이다.
2018년 기준 왕과의 산책 프로그램이 진행중이다.
오전 10시 오후 2시에 찾아가면 외국인을 위한 영어, 중국어, 일본어 가이드가 제공된다.
2012년부터 경기전 관광사업의 일환으로 경기전 정문에 수문장 배치, 교대식[11] 및 경기전 부속건물에 여러 체험[12] 이벤트가 시행되고 있는데 관광객이 몰리는 방학 시즌에는 휴무인 월요일을 제외한 모든 요일에 실시하고 있다. 가격도 저렴한 편. 1,000원 내지 2,000원 정도 된다.
경기전 정문에 서 있는 수문장은 경복궁 및 여러 궁궐에서와 마찬가지로 기간제 알바일지언정, 나름 훈련받은 전문 인력이다.
KBS 1TV의〈숨터〉에서도 파노라마 형식으로 소개되었다.
5. 기타
KBS 대하드라마〈용의 눈물〉에서 개성 수창궁으로 나오기 시작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으며 지금은 전동성당과 더불어 전주 한옥마을의 핵심 랜드마크가 되었다.경기전 내에는 작은 대나무 숲이 있어서 많은 사극에서 단골 촬영지로 나왔다. KBS 사극 명성황후의 갑신정변 에피소드에서는 경우궁으로 나온다. 여름휴가철에 경기전에 방문하면 이 대나무 숲 앞에서 사진찍으려는 인파로 길게 줄을 선 것을 볼 수 있다.
영화 태어나길 잘했어에서 주황 역을 맡은 홍상표는 경기전 수문장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오고, 태평소를 연습하는 것으로 나온다.
6.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전주 경기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전주경기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경기전
- 국립고궁박물관: 철종 어진
- 답사여행의 길잡이 13 - 가야산과 덕유산: 경기전
- 대한민국 구석구석: 경기전
-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경기전
- 두산백과: 전주 경기전
7. 사적 제339호
조선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신 곳이다.
태종은 1410년 전주·경주·평양에 태조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를 모시고 어용전이라 하였다. 그 후 태종 12년(1412)에 태조 진전이라 부르다가 세종 24년(1442)에 와서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숭전으로 달리 이름을 지었다. 경기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고쳐 지었다.
건물의 구성은 본전·헌·익랑 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를 내삼문과 외삼문으로 둘렀다.
※(경기전 → 전주 경기전)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태종은 1410년 전주·경주·평양에 태조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를 모시고 어용전이라 하였다. 그 후 태종 12년(1412)에 태조 진전이라 부르다가 세종 24년(1442)에 와서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숭전으로 달리 이름을 지었다. 경기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고쳐 지었다.
건물의 구성은 본전·헌·익랑 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를 내삼문과 외삼문으로 둘렀다.
※(경기전 → 전주 경기전)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1]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는 전주 경기전의 제작시기를 밝히지 않았다.[2] 이후 다시 '숭령전(崇靈殿)'으로 고쳤다.[3] 위키백과 해당 문서에서 인용.[4] 동학농민운동 당시 전주성이 동학군에게 함락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조선 조정이 뒷목을 잡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왕조의 창업자인 태조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이 전주성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전주성을 점령한 뒤 농민군은 전주관아나 향교 같은 주요 관공서 건물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애초에 조선 왕조 자체를 부정하고 전복할 목적으로 일으킨 운동도 아니었고.[5] 서울의 경우 종묘공원 정문 인근에 종로성당이 있기는 하나, 종묘공원 정문과 종로성당은 300m 정도 떨어져 있으며, 현재의 종로성당 건물도 1987년에 지어진 건물이기에 전동성당-경기전과는 비교 범주가 다르다.[6] 두 건물을 가로지르는 태조로에는 점집과 상가 등이 가득하여 매우 종교적인 관광지 분위기를 자아낸다.[7]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을 계기로, 이때부터 한국에서도 가톨릭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었다.[8] 관찰사와의 연락을 위해 파견된 지방 아전[9] 중앙에 학교라는 글자가 보인다[10] 현재의 전주중앙초등학교의 전신인데, 똑같이 심상소학교가 전신인 전주조촌초등학교와 다르게 학교 역사에 공식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11] 살아있는 왕이 거주하는 곳이 아니므로 서울의 궁궐 등에서 치러지는 것에 비하면 조촐하게 치러진다.[12] 왕실 의상, 수문장 체험, 제례 체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