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25:49

팔미도 등대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사적 제557호
인천 팔미도 등대
仁川 八尾島 燈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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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인천광역시 중구 팔미로 28 (무의동)
분류 유적건조물 / 교통통신 / 근대교통·통신시설 / 해운
면적 25.8㎡(등대 및 돌담)
지정연도 2020년 9월 15일
제작시기 1903년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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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사적제557호인천팔미도등대1.jpg

1. 개요2. 내용3. 여담4. 외부 링크5. 사적 제557호

1. 개요

仁川 八尾島 燈臺. 인천 팔미도 등대는 인천광역시 앞바다의 팔미도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등대이다.[1] 다만 이 등대를 계속 사용하고 있진 않고, 2003년 완공된 신등대에서 등대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2002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되었다가 2020년 사적 제557호로 승격지정되었다.

2. 내용

인천 팔미도 등대는 한반도에 처음으로 들어선 근대식 등대로, 1902년에 착공해서 1903년에 준공되었다. 최초 점등일은 1903년 6월 1일이다. 등대의 총 높이는 약 8m이며, 형태는 지름 약 4.67m의 원통형이다.[2] 처음 건설했을 때의 형태가 아직도 잘 남은 편이다.

다만, 등대를 세우기는 대한제국 조정이 하였으나, 실제 건설에는 일본 제국의 입김이 많이 작용했다. 등대가 점등하고 1년 뒤에 발발한 러일전쟁때 일제가 꽤나 요긴하게 써먹었다고 한다.

등대가 세워지고 47년이 지난 1950년,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팔미도 등대가 다시 한 번 등장했다. 6.25 전쟁 중 시행된 인천 상륙 작전에서, 팔미도는 작전 수행 상 상륙 부대의 진로에 위치한 주요 요충지였고 이로 인해 섬과 등대는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거점이었다. 또한 자정을 넘은 심야에 상륙 부대가 안전하게 상륙하기 위해서는 등대불의 인도가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북한군의 수중에 떨어져 있던 이 등대를 UN군이 탈환하여 수복하였고,[3] 등대의 불을 밝히는 것으로 인천상륙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6.25 전쟁 이후로도 근 50년간 인천항 길목의 등대로 계속 사용되어 왔으나 100년에 달하는 시간의 흐름을 결국 이기지 못하고 등대 건물이 노후화되었으며 이로 인해 등대 기능 수행에 무리가 왔다. 이에 따라 신등대를 건설하여 2003년에 완공하였고 등대 기능은 신등대로 모두 이관되었으며, 구 등대 건물과 부속시설들은 잘 보존되었다.

인천 팔미도 등대는 2002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되었다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등대라는 대한민국 근현대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와 6.25 전쟁의 전세를 뒤바꾸는데 기여한 건축물로서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20년 9월 15일 사적 제557호로 승격지정되었다.링크 참조 1: 한겨레 - 인천 상륙작전 불 밝힌 ‘팔미도 등대’ 국가사적 지정, 링크 참조 2: 인천일보 - 인천 팔미도등대 '국가지정문화재'로 우뚝

3. 여담

인천 출신으로 1930년대 말~1940년대에 활발히 활동했던 극작가 함세덕의 희곡 작품 <해연(海燕)>의 배경이기도 하다.

킬로이 다녀감 낙서가 있다고 한다.

4. 외부 링크

5. 사적 제557호

「인천 팔미도(八尾島) 등대」는 1903년에 세워진 국내 현존최고(最古)의 근대식 등대로서,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당시 연합군함대를 인천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6·25전쟁의 국면을 일시에 뒤바꾸는 데 기여한 역사적, 상징적 가치가 있음.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인 팔미도 등대는 1894년 공무아문이 설치되고, 1902년 5월 소월미도, 북장자서, 백암등표와 함께 건축에 착수하여 1903년 4월에 준공되었으며, 같은 해 6월 1일 국내 최초로 점등되었다.

팔미도 등대는 6.25 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주요 요충지였다 연합군의 팔미도 등대 탈환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서울 수복을 달성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현재 불을 비추는 등대는 2003년 12월 세워진 등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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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확한 주소는 인천광역시 중구 팔미로 28(舊구소 무의동 산373)이다.[2]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팔미도등대[3] 다행히 병력 손실 없이 무혈 입성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