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두돈대
대한민국의 사적 제227호 | ||
강화 광성보 江華 廣城堡 | ||
{{{#!wiki style="margin: 0 -12px; border-right: 2px solid transparent; border-left: 2px solid transparent"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1px; margin-top: -6px; margin-bottom: -5px"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23-1번지 |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시설 | |
면적 | 144\,632㎡ | |
지정연도 | 1971년 12월 29일 | |
제작시기 | 조선 시대 | |
위치 |
1. 개요
廣城堡. 광성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광성보는 원래 고려 무신정권 시대 몽골의 침입을 막기위해 만들어졌다. 조선 효종 대에 국방 시설을 강화도에 지음으로써 재건했다. 광성포대, 광성돈대, 용두돈대, 손돌목돈대 등의 여러 포대와 돈대가 소속되어 있는데, 이 요새가 유명해진 것은 신미양요 때 제일 치열한 격전지였기 때문이다.광성보는 1971년 사적 제227호로 지정됐다.
2. 역사
2.1. 신미양요 당시
첫 번째 전투는 용두돈대에서의 포격전으로 별 피해가 없었지만 미군이 본격적으로 전투를 하면서 알려진다. 당시 광성보에는 어재연 장군 휘하 군사 500명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미군이 초지진, 덕진진을 함락하면서 광성보로 접근했다. 그 과정에서 조선군 사수 200여명에게 집중 사격을 당하지만 마침내 요새에 근접했고 조선군과 미군은 손돌목돈대에서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게 된다. 그 결과 미군은 맥키 대위 이하 3명이 전사 9명이 부상을 당하지만 조선군은 지휘관 어재연, 그의 동생 어재순, 그리고 군사 300여 명이 죽거나 다치고 20명이 포로, 100명이 자결하는 대패를 당한다. 하지만 이 전투 이후에 조선 정부의 변함 없는 태도와 여러가지 불리한 상황[1]을 고려한 미군은 철수한다.2.2. 그 후
나라에서는 어재연과 어재순 두 형제를 추모하는 쌍충비와 전사자들의 무덤(무명용사 무덤)을 만들었다. 한동안 폐허로 있다가 1970년대 강화도 정비 사업으로 복원되었고 박정희 대통령이 전사자들의 무덤에 헌화, 사적 제227호로 지정됐다. 현재는 어재연 장군의 동상과 함께 나란히 세워져 있다.3.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광성보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강화광성보
- 답사여행의 길잡이 7 - 경기남부와 남한강: 광성보
- 대한민국 구석구석: 광성보
- 인천관광 100선: 광성보
- 인천 보물섬에서 놀자: 광성보
- 두산백과: 강화 광성보
4. 사적 제227호
광성보는 덕진진, 초지진, 용해진, 문수산성 등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이다.
고려가 몽고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로 도읍을 옮기면서 1233년부터 1270년까지 강화외성을 쌓았는데, 이 성은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성으로 바다길을 따라 길게 만들어졌다. 광해군 때 다시 고쳐 쌓은 후 효종 9년(1658)에 광성보가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숙종 때 일부를 돌로 고쳐서 쌓았으며, 용두돈대, 오두돈대, 화도돈대, 광성돈대 등 소속 돈대가 만들어 졌다.
영조 21년(1745)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만들었는데 ‘안해루’라 하였다. 이곳은 1871년의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용감히 싸우다가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으며 문의 누각과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이 파괴되었다.
1976년 다시 복원하였으며, 광성보 경내에는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와 신미순의총 및 전적지를 수리하고 세운 강화전적지, 수리한 것을 기록한 비석 등이 건립되었다.
※(광성보 → 강화 광성보)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고려가 몽고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로 도읍을 옮기면서 1233년부터 1270년까지 강화외성을 쌓았는데, 이 성은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성으로 바다길을 따라 길게 만들어졌다. 광해군 때 다시 고쳐 쌓은 후 효종 9년(1658)에 광성보가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숙종 때 일부를 돌로 고쳐서 쌓았으며, 용두돈대, 오두돈대, 화도돈대, 광성돈대 등 소속 돈대가 만들어 졌다.
영조 21년(1745)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만들었는데 ‘안해루’라 하였다. 이곳은 1871년의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용감히 싸우다가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으며 문의 누각과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이 파괴되었다.
1976년 다시 복원하였으며, 광성보 경내에는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와 신미순의총 및 전적지를 수리하고 세운 강화전적지, 수리한 것을 기록한 비석 등이 건립되었다.
※(광성보 → 강화 광성보)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1] 보급이 원활치 못하고 풍토병에 걸리거나 식수가 부족한 상황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