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21:21:15

신미양요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의 대외 전쟁·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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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전쟁
,1798 ~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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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바르바리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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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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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 ~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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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국경 전쟁
,1910 ~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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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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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니카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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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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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 ~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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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전선
,1941 ~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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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 ~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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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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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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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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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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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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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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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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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분쟁 교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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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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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드론 공습
,2004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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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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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 18일 조치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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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스크 앨라배마호 피랍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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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 주둔 미군-파키스탄군 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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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리비아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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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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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제르 군사 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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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내전
,2017 ~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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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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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시리아 국기.svg 시리아 파일:바그너 그룹 로고(-2023).svg 바그너 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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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파일:시리아 국기.svg 시리아
바그다드 국제공항 공습
,2020,
파일:이란 국기.svg 이란 파일:카타이브 헤즈볼라 깃발.svg 카타이브 헤즈볼라
순교자 솔레이마니 작전
,2020,
파일:이란 국기.svg 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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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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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 위기
, 2023 ~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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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영의 수호자 작전
,2023 ~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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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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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 친이란 민병대
2024년 미국의 이라크·시리아 공습
,2024 ~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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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
辛未洋擾
United States expedition to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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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의 전개도
파일:Sujagi.jpg
강화도 함락 직후, 어재연 장군 수(帥)자기
앞에서 기념 사진을 촬영한 미 해병대[1]
시기 1871년 (고종 8년) 6월 1일 ~ 7월 3일
장소 조선 강화해협 및 강화도 일대[2]
교전국 조선
(수세)
미국
(공세)
주요 인물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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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 명칭
]][[어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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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틀:깃발|]] 어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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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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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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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틀:깃발|]] 원필드 스콧 슐레이
전력 조선군: 1,000명 (수비대) 미군: 1,230명 (해군)
피해 전사자: 53명 (조선 집계)[3]
전사자: 243명 (미국 집계)[4]
익사자: 100여 명 (투신 자살)[5]
포로: 20명
사상자: 15명
- 전사자: 3명[6]
- 부상자: 12명
결과 미국의 전술적 승리 및 조선의 전략적 승리
영향 조선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 강화
1. 개요2. 배경3. 전개
3.1. 접촉3.2. 손돌목 포격 사건3.3. 광성보 전투
4. 결과
4.1. 미국 측4.2. 조선 측
5. 뒷 이야기6. 미디어에서

[clearfix]

1. 개요

이교도우리의 작은 전쟁(Our little war with the heathen)[7]
1871년(고종 8), 미국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대한 항의와 조선의 강제 개항을 목적으로 강화도를 침공한 사건으로 북한과 미국의 교전을 제외할 경우 한미 양국이 역사상 유일하게 무력으로 충돌한 사례이기도 하다.

2. 배경

19세기, 미국은 일본 열도를 지배하던 에도 막부를 굴복시켜 강제 개항시킨 흑선 사건과 같이 포함외교(gunship diplomacy)를 통해 조선도 개항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판단은 조선군의 군사력이 허약하리라는 분석에 기초했고, 맞는 사실이었으나 순순히 쇄국정책을 포기한 에도 막부와는 달리 흥선대원군이 지배하던 조선 조정은 객관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격렬하게 저항했기 때문에 당시 군을 이끌던 로저스 제독도 당황했다.

배 구경만 시켜주었을 뿐인데 알아서 개항한 일본의 선례도 있으니 행동 개시 전에 한번 살펴볼 요량으로 신미양요 발발 직전인 1871년 2월 21일에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공동 조사와 통상 요구를 제안한다.
“미국 사신이 보낸 서신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순전히 병인년(1866)에 그 나라의 상선(商船) 두 척(隻)이 우리 나라의 경내에 들어왔다가 한 척은 풍랑을 만났다 구원되었으나 한 척은 사람도 죽고 화물도 없어졌는데, 이처럼 서로 판이하게 하나는 구원되고 하나는 피해를 당한 까닭을 알 수 없으니 그 원인을 알고 싶으며, 뒷날 그 나라의 상선이 혹시 우리 나라 영해에서 조난당할 경우 원칙에 입각하여 구해주고 화목하게 서로 대우하자는 등의 말이었습니다."

조선은 청나라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우리 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데 조난당하여 와서 정박하는 다른 나라의 여객선의 경우에는 혹 양식을 원조하고 필수품을 대준 뒤에 순풍을 기다려 돌려보내기도 하고, 혹 배가 파손되어 완전치 못하면 육로로 호송하여 각각 그들의 소원대로 해 주고 아울러 지장이 없게 해 주었습니다.

(중략)

이번에 온 편지에서 서로 화목하게 지내자고 희망하였는데, 바다 건너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로서 호의를 가지고 서로 관계를 맺자면 접대해서 보내는 도리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들이 의논해서 판명하고 교섭하자고 하는데 의논하여 판명할 것이 무슨 일이고 교섭하자는 것은 어떤 문제인지 알 수 없습니다. 조난당한 객선이 있으면 돌보아 주고, 호송해 보내는 문제는 의논하여 판명하지 않아도 의심할 것이 없다는 것을 보장합니다. 혹시 호의를 품지 않고 와서 함부로 멸시하고 학대한다면 방어하고 소멸해버릴 것이니 미국 관리와 통역들은 그저 우리 백성들이나 통제하고 도리에 어긋나게 행동하지 말도록 해야 할 것인데 교섭 여부에 대해서야 다시 더 논할 여지가 있습니까?

종전에 다른 나라들이 조선의 풍토와 물산을 알지 못하고 매번 통상 문제를 가지고 여러 차례 교섭하였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으며, 외국 장사치들도 이득을 볼 것이 없을 것이라는데 대해서는 이미 동치 5년의 공문에서 진술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가 바닷가의 한 구석에 있는 작은 나라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일입니다. 백성들은 가난하고 물산은 변변치 못하며 금은(金銀)·주옥(珠玉)은 원래 우리나라에서 나지 않는 것이고 미속(米粟)과 포백(布帛)은 넉넉했던 적이 없으니, 국내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국내의 소비도 감당할 수 없는데 만약 다시 다른 나라와 유통하여 나라 안을 고갈시킨다면 이 조그만한 강토는 틀림없이 위기에 빠져 보존되지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나라의 풍속이 검박하고 기술이 조잡하여 한 가지 물건도 다른 나라와 교역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 나라가 절대로 교역할 수 없음이 이와 같고 외국 장사치들이 이득 볼 것이 없음이 또한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매번 통상할 의사를 가지는 것은 대체로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똑똑히 알지 못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이번 미국 사신의 편지에서 아직 문제를 끄집어내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미 관리들과 의논하여 판명하고 교섭하자고 요청한 것도 혹시 이러한 일들을 하자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조난당한 객선은 전례에 따라 구호할 것이니 다시 번거롭게 의논할 필요가 없으며, 기타 문제도 따로 토의하여 판명할 것이 없으니 오가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러한 내용으로 그 나라 사신을 잘 타일러서 의혹을 풀어줌으로써 각각 편안하고 무사하게 지내게 한다면 더없이 다행이겠습니다.”

이를 정리하자면 "국적선 조난 문제면 구호해서 해당 국가로 보낼 테니 걱정할 것도 없고, 교역 문제는 만들어낼 물건도 없고 팔 물건도 그렇게 넉넉지도 않고 그나마 우리 쓸 것도 많지 않으니 장사 안 한다."는 입장으로, 단박에 통상 제안 거부 입장을 밝힌 것이었다.

미국은 조선의 답신에 이렇다 할 반응이 없다가 1871년 4월 9일에 기함으로 프리깃 USS 콜로라도를 위시한 함대를 배치하고 재차 편지를 보냈다.
서양 사람의 편지에서, ‘회답을 올립니다. 어제 영업선에서 편지를 받아보니, 「우리가 어느 나라 사람이며, 여기에 온 것은 무슨 일 때문이냐?」고 하였고, 「여기로 온 경위를 알아보았으면 좋겠다.」는 등의 내용이었는데, 이미 이 문제들을 우리 흠차대인(欽差大人)과 제독대인(提督大人)에게 편지로 알렸고, 회답을 해주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이 배는 대아메리카합중국(大亞美理駕合衆國), 즉 대미국(大美國)의 배이며 여기에 온 것은 우리 흠차대인이 조선의 높은 관리와 협상할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조약을 체결하려면 아직도 날짜가 필요하므로 우리 배는 이 바다 한 지역에서 정박하고 있으면서 조약이 체결되기를 기다렸다가 돌아가겠습니다. 배에 머물러 있는 두 대인은 다 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에 조선의 미국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는 조정 어전회의의 기록에서 엿볼 수 있다. 고종은 영의정 김병학에게 "미리견(彌利堅, 미국)이라는 나라는 어떠한 나라인가?"라고 질문하였다. 그러자 김병학은 이렇게 답하였다.
"정황이 불측한 것으로 서양 오랑캐[洋夷]와 같은 것이 없습니다. 이른바 미리견(彌利堅)은 부락만 있을 뿐인데, 그 중간에 화성돈(華盛頓)이라는 곳이 있어서 성지(城池)를 만들고 기지를 건설하여 해외의 오랑캐[洋夷]와 더불어 서로 교통하고 있으며, 영국(英國)은 거리상 가장 가까운 듯하니 이는 《해국도지(海國圖誌)》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이 경영하는 것은 오직 이익만을 좇는 것인데 바닷섬 사이를 오가면서 또한 겁탈하는 버릇도 많으니, 과연 해적과 다름이 없습니다. 저들이 소위 교역이라고 말하는 것은 더욱 해괴한 말입니다. 저들이 비록 이런 구실로 와서 소란을 피우고 있으나 일체 엄격히 막은 뒤에야 나라가 나라의 체모를 갖출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고종은 말하였다.
"비록 교역이라 하더라도 외국과 더불어 서로 교통해서는 안 된다. 만약 한 번이라도 서로 교통하게 되면 사학(邪學)이 반드시 치성해져 부자(夫子)의 도가 장차 폐지될 것[8]이다."
승정원일기 고종 8년 신미(1871) 4월 20일(기묘) 11번째 기사[9]

여기서 나오는 '부락(部落)'이라는 단어는 미국의 개별 주(State) 즉, 행정구역상의 주(州)를 뜻하는 것으로 문자 그대로 촌락을 의미하지 않는다. 실제로 국역본이 아닌 원문과 김병학이 인용한 《해국도지(海國圖誌)》의 내용을 살펴보면 부락(部落)의 진짜 뜻을 알 수 있다.[10] 과연 신미양요 시점에서 조선은 미국을 몰랐는가?

3.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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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군 측이 그린 강화도 일대의 지형과 신미양요 작전 전개도.

3.1. 접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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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거부 의사를 확실하게 밝히자 미국은 계속 개항 요구를 한 끝에 강제 개항을 염두에 두고 로저스 제독을 지휘관으로 하는 원정대를 편성했다. 미국은 프랑스에도 연합을 제의했으나 프랑스는 보불전쟁의 여파로 섣불리 개입하기 힘들었을 뿐더러 병인양요 당시 조선군에게 패배한 경험때문에 작성한 지도 정도만을 넘겨주고 협력을 거부했다. 이리하여 5월 14일에 미 해군 단독으로 나가사키에서 출항했고, 5월 21일 수원 인근에서 조선 측에 포착된다.

조선은 5월 31일에 문정관[11]을 파견해 이들의 접근 의도를 추궁했지만 미군은 딴청으로 일관하며 고위 관료를 만나게 해 달라는 요구만 반복한다.[12] 조선 측은 "협상을 하자면서 군대를 끌고 온 것은 무슨 도리이며 개항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고 이를 일축한다.

3.2. 손돌목 포격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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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진진을 함락시킨 미군

첫 접촉이 허사로 끝난 이후 미 해군함대한강의 수심을 측정하면서 6월 1일 강화도와 본토 사이의 수로인 손돌목에 접근하여 오자, 강화도의 조선군이 경고 포격을 함으로써 교전이 시작되었다. 남북 전쟁 참전자인 당시 함장들 중 한 사람이 '남북 전쟁 때도 이렇게 맹렬한 포화를 받은 적은 없었다'고 술회할 정도로 치열한 화망 사격으로, 공식 역사는 이 사건을 손돌목 포격 사건이라고 부른다. 400문에 달하는 양측 화포가 불을 뿜었으나 피해는 미군 부상 3명, 조선군 전사 1명에 불과했다. 서로 그냥 맹목적으로 쏴 댄 후 미군이 먼저 물러난 것으로 결말지어졌던 데다가 조선군의 포가 워낙 낙후되었기 때문이다.[13]

한차례 교전을 벌인 미군은 대원군과 글을 주고 받는다.
“올봄에 북경(北京) 예부(禮部)에서 자문(咨文)을 보내어 귀국 사신의 편지를 전해왔기에 우리 조정에서는 이미 의논하고 회답 자문을 보낸 동시에 귀 대인에게 전해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또 생각건대 귀국은 예의를 숭상하는 풍속이 본래 이름난 나라로 다른 나라들보다 뛰어났습니다.

귀 대인은 아마도 사리에 밝아서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을 터인데, 이번에 어찌하여 멀리 바다를 건너와서 남의 나라에 깊이 들어왔습니까? 설사 서로 살해하는 일은 없었다고 하지만 누구인들 의심하고 괴이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중요한 요새지에 갑자기 외선(外船)이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모든 나라의 일반적 규범으로서 처지를 바꾸어놓고 보아도 모두 그러할 것입니다.

지난번에 귀선(貴船)이 바닷가 요새지를 거슬러 올라와서 피차간에 대포를 쏘며 서로 경계하는 조치까지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미 호의로 대하자고 말하고서도 한바탕 이런 사달이 있게 되었으니 매우 개탄할 노릇입니다. 귀선이 오고부터 연해의 관리들과 무관들에게 절대로 사달을 일으켜 사이가 나빠지게 하지 말라고 경계하여 타일렀습니다. 그렇지만 귀선이 다른 나라의 규례를 아랑곳하지 않고 요새지 어구까지 깊이 들어온 이상 변경을 방비하는 신하들로 말하면 그 임무가 방어인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 일에 대해 괴이하게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혹시 북경 예부에서 우리의 회답 자문을 미처 전하지 못하여 귀 대인이 우리 나라의 제반 사정을 잘 알지 못하여 이런 일이 생긴 것이 아닙니까? 이제 회답 자문 부본을 보내니 한번 보게 되면 남김없이 다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외국과 서로 교통(交通)하지 않는 것은 바로 500년 동안 조종(祖宗)이 지켜온 확고한 법으로서 천하가 다 아는 바이며, 청나라 황제도 옛 법을 파괴할 수는 없다는 데 대하여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 귀국 사신이 협상하려고 하는 문제로 말하면 어떤 일이나 어떤 문제이거나를 막론하고 애초에 협상할 것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높은 관리와 서로 만날 것을 기다리겠습니까?

넓은 천지에서 만방의 생명들이 그 안에서 살면서 다 제대로 자기의 생활을 이루어가니 동방이나 서양은 각기 자기의 정치를 잘하고 자기의 백성들을 안정시켜 화목하게 살아가며 서로 침략하고 약탈하는 일이 없도록 하니, 이것은 바로 천지의 마음인 것입니다. 혹시 그렇지 못해서 위로 하늘을 노하게 한다면 더없이 상서롭지 못할 것입니다. 귀 대인이 어찌 이 이치를 모르겠습니까?

풍파만리에 고생하였으리라 생각하면서 변변치 못한 물품으로 여행의 음식물로 쓰도록 도와주는 것은 주인의 예절이니 거절하지 말고 받아주기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대아메리카합중국[大亞美理駕合衆國] 찬리(贊理) 흠차(欽差)인 영어, 한어 문건을 맡아보는 총판두(總辦杜)는【이름은 덕수(德綏), 중국인이다.】 회답합니다. 며칠 전에 군주가 파견한 우리 나라 관리에게 보내온 공문과 대청(大淸) 나라 예부(禮部)에 회답한 자문 부본에 대해 다 같이 군주가 파견한 우리 제헌(提憲)에게 전하였으며 명령을 받들어 이렇게 회답합니다. 당신들에게서 온 편지에서 언급한 내용에 의하면 귀 조정이 우리나라 군주가 파견한 관리와 그가 와서 해결하려고 하는 문제에 대하여 우의를 가지고 협상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군주가 파견한 우리 제헌이 매우 안타까워하는 문제입니다.

까닭 없이 공격한 문제에 대해서는 잘못을 책망하지 않고 도리어 비호하면서 변경을 책임진 신하의 직책으로서는 응당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제헌은 원래 포를 쏜 행위는 군사와 백성들의 망동에서 생긴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귀 조정에서 이것을 알고 꼭 책임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높은 관리를 파견하여 협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서둘러 행동하지 않고 기일을 늦추어가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만일 귀 조정에서 3일, 4일 내에 만나서 협상할 의사가 없이 기한이 되기만 기다린다면 전적으로 군주가 파견한 우리 제헌이 처리하는 대로 할 것입니다. 기일이 매우 촉박하므로 대략 이와 같이 적습니다.

보내준 많은 진귀한 물건들을 받고 은혜와 사랑을 충분히 알 수 있으며 무엇이라 감사를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어 보내온 예물을 돌려보냅니다. 이와 같이 회답합니다.”

3.3. 광성보 전투

미국은 대원군의 주장에 포격한 것이 잘못이라고 주장하면서 거듭 고위 관리를 보내서 공식적인 사과를 할 것과 협상할 것을 요구했지만 대원군은 당연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강화유수(governor of Ganghwa)가 개별적으로 연락을 취해 소 세 마리, 50마리의 닭, 1천개의 계란을 선물로 보내면서 적대적인 분위기를 누그러트리려했지만 미국측은 이 선물을 쓸모없다(worthless)로 여기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미군이 공식 사과를 요구한지 10일동안 조선측으로부터 공식적인 대응은 나오지 않았고 이에 미 해군측 지휘관 로저스 제독은 미 해군을 6월 10일 강화도에 상륙시켜 덕진진과 초지진을 점령했다.
이 당시 미국측 대사였던 프레데릭 로우(Frederick Low)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미국은 손돌목 포격을 통하여 이미 조선측이 협상이나 조약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대로 미 해군이 물러난다면 중국과 조선인의 전투적인 사기를 올려주어 결과적으로 조선과 중국에 대한 미국의 이익이 침해받을 수 있다는 사실때문에 이대로는 물러날수가 없다(“If the squadron retires now, the effect upon the minds of the Coreans, and, I fear, upon the Chinese also, will be injurious, if not disastrous to our future prospects in both countries.”)고 기록하였다.
한편, 미해군 지휘관이었던 존 로저스와 미국측 대사인 프레데릭 로가 당시에 남긴 기록을 보면 이 강화도 공격에는 손돌목 포격에 대한 보복(punitive)의 목적이 있었으며, 특히 전투를 통해 정치적인 목표를 이루겠다는 동기보다는 약소국이었던 조선이 강대국이었던 미국을 공격했으니깐 본때를 보여준다는 감정적인 요인이 동기로 더 크게 작용했다("Low’s own records show the attack on the Ganghwa fort was motivated by a desire to demonstrate American power over what he considered to be a weaker nation, rather than out of any reasonable expectation that it would achieve the political objectives of his mission")National Interest 기사미 해군 공식 기록관 - 콜로라도 함.

당연히 조선군도 바보는 아니었고 병인양요 때 겪은 서양의 압도적인 화력을 상대하기 위해 내륙으로 유인하는 전략을 펼쳤다. 이러한 전략의 일원으로 덕진진과 초지진 모두 미군이 상륙했던 시점 조선군은 모두 철수한 상태였다. 조선군은 야음과 해안가를 따라 행군하는 미군의 좌측방의 산악지대를 활용해 게릴라 공격을 펼쳤지만 짧은 조총의 사거리로 인해 피해를 전혀 주지 못했다. 다만 미군의 기록에 따르면 이러한 조선군을 고스트 아미라고 부르며 상당히 거슬려했다고 한다. 조선군의 산발적 저항을 받던 미군은 앞서 병인양요에도 참전했던 어재연 장군이 지키던 광성보를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조선과 미국의 전력 및 피해를 비교해 보면
미군

군함
- USS Colorado(1856년 건조 / 3425톤 / 10인치 포 2문, 9인치 포 28문, 8인치포 14문)
- USS Alaska(1868년 건조 / 2,394톤 / 11인치 활강포 1문, 60파운드 포 1문, 20파운드 포 2문)
- USS Palos(1865년 건조 / 420톤 / 포 2문)
- USS Monocacy(1864년 건조 / 1,370톤 / 13인치 구포 1문, 32파운드 포 2문)
- USS Benicia(1868년 건조 / 2,400톤 / 11인치 활강포 1문, 9인치 활강포 10문, 60파운드 강선포 1문, 20파운드 후장식 강선포 1문)

병력
- 해군 및 해병대 1,230명(레밍턴 롤링블럭 M1867 후미장전식 라이플(카빈)/ 스프링필드 M1861 전장식 라이플로 무장, 12파운드 곡사포 85문.)[14]

조선군

지상 병력
- 500여 명.[15] 주 무장은 화승총[16]

양측 피해

미군
= 전사 3명[17], 부상 12명

조선군
(조선측 집계)[18] = 전사 53명, 부상 24명, 기타: 초지진, 덕진진 및 광성보 시설 함락 및 조직적인 파괴와 요새 중장비 전량 노획 및 파괴, 수자기 약탈 등
(미군측 집계)[19] = 전사 243명, 익사 100여 명[20], 포로 20명

강력한 근대식 신식 화기로 무장하고 인디언 전쟁남북 전쟁 등을 거치며 단련된 미 해군에 병력과 화력 모두 열세였던 조선군은 그야말로 참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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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진을 점령한 미군들

조선군의 경우 미 해군의 상륙작전 3일 전에야 가까스로 파견된 중앙군 3개 초(오늘날의 중대급)를 광성보에 집중 배치, 미군의 공격을 강화부에서 광성보로 유도하려 했다. 이를 위해 조선군은 미군 상륙 당일 지방군 소병력을 초지진 야습에 투입해서 미군의 반격을 유도했고, 이후 해안도로를 따라 북상하는 미군 앞에서 소규모 척후 병력을 수시로 투입해 미군의 관심을 광성보 쪽으로 돌리려는 두드러진 시도를 반복했다.

이후의 전투에서도 조선군은 예하 3개 초가 모두 타 군영 소속[21]이어서 제대로 된 전투 조직을 구축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여기에 이들은 지휘관 어재연을 제외하고는 강화도에 와 본 적이 아예 없어[22] 유리한 방어 위치가 어디인지조차 모르는 말 그대로 눈뜬 장님 상태였다. 여기에 화력조차 열세인데다 화력 집중을 위한 훈련도감 기반의 기초 훈련조차 제대로 돼 있지 않은 것이 19세기 후반 조선군의 현실이었던 탓에, 미군이 본격적으로 광성보를 공격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조선군은 조직적인 화망을 구성하지도 못했고 그저 개별적으로 총격을 가했기 때문에 미군에게 사실상 거의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무려 200m에 달하는 거리를 천천히 전진하는 동안 조선군 200여 명에게 집중 사격을 당했음에도, 총에 맞은 미군은 단 2명(해군 견습수병(Landsman)과 해병상병(Corporal) 제임스 도허티 포함 각 1명)[23]뿐이었다. 결과적으로 미군측은 단 3명의 전사자가 있었으나 그것도 1명은 아군오사, 1명은 실족사(....) 한 것이었고 조선군이 유일하게 사살한 것은 휴 맥키 해군 대위(추서 계급, 전사 당시 중위) 뿐이었다. 그는 성채 안에 가장 먼저 도착했는데 조선군이 쏜 총에 가랑이 부위를 맞아 중상을 입었다. 그는 긴급히 후송되었지만 다음 날 오후 5시 45분에 USS Monocacy 함에서 사망했다.[24] 맥키를 쏜 조선군은 곧 도착한 윈필드 쉴리 중령에 의해 사살됐다. 이렇게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던 전투는 미군이 돌격을 개시한지 단 15분여만에 조선군의 궤멸로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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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멸한 광성보의 조선군
“조선군은 전근대적 노후한 병기를 가지고 미군의 현대적 총포에 대항해서 용감하게 싸웠다. 조선군은 결사적으로 용감하게 싸우면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다가 죽었다.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이보다 더 장렬하게 싸운 국민을 다시 찾아볼 수 없다.”
- W. S. Schley, Forty-Five Years Under The Flag(N. Y., 1904), p.95.
“전세가 위급해지자 어공은 말하기를 ‘내가 나라의 후은을 입었으니 죽음으로써 내 직책을 지킬뿐이다.’ 이에 몸을 일으켜 앞장서서 화포를 이끌고 있는 힘을 다해 공격하다가 탄환이 다 떨어지자, 계속 군도를 휘둘러 적군을 格殺하였다. 시살한 지 한 시각이 지나서 전세는 불리하고 힘은 다하여 난군중에 순사하니 이때가 4월 24일(양 6. 11)이었다.”
- 魚在淵文書:≪雙忠集:江都實記≫·≪忠莊公遺事(乾·坤)≫.

하지만 이런 참패의 와중에서도 조선군은 물러서지 않고 결사항전 했다. 패배가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단 한 명의 탈영병도 없었고,[25] 거의 학살 수준에 달한 광성보 전투에서도 미군이 압도적인 전력으로 몰아붙여도 끝까지 싸웠고 총알이 떨어지면 칼을 휘두르며 저항했고 칼날이 부러지면 창으로 저항했으며 이마저도 없으면 돌을 던지거나 적의 눈에 흙을 뿌려서 저항했다. 함락 직후 생포한 패잔병들에게 말을 걸려고 시도했으나, 대화를 거부하고 바로 자살하는 이도 있었다. 미군들을 노려보며 저주의 말을 남긴 채 투신 자살하거나 아니면 미군의 총검을 붙잡고 자기 목을 찌르라는 투로 들이대던 조선군도 있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피투성이 조선군을 고통없이 죽여주자던 자비를 내보였던 미군도 있었을 지경.
파일:신미양요 돈대 1.jpg 파일:신미양요 돈대 2.jpg
파일:신미양요 돈대 3.jpg 파일:신미양요 돈대 4.jpg

일단 위의 전사자와 부상자 수 비교를 보면 저게 정상적인 전투에서 나올 수 있는 비율이 아니다. 공격 측에서 사람이란 사람은 다 죽일 각오로 하거나 방어 측에서 다 죽을 각오로 싸우지 않는 한 나올 수 없는 수치인데 그전에 저 정도 전사비 자체가 웬만한 전력 차이로는 불가능한 비율이다.

지옥같은 남북 전쟁을 헤쳐나온 미군의 베테랑들도 전쟁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워낙 독종같이 달라붙으니 질릴 대로 질린 모양. 구식이고 낙후되었긴 해도 400여 년간 임진왜란, 병자호란, 홍경래의 난 등의 굵직굵직한 거대한 전쟁 등을 벌이며 쌓아온 경험과 대원군 하에서 그럭저럭이나마 군사 기반을 갖추었던 중앙집권 국가인 조선이기에, 동양의 국가들과 제대로 된 전투를 치른 경험이 없고 그저 막연히 신비주의로만 생각했던 서양 열강 미국의 입장에서, 처절했던 조선군의 항쟁은 꽤 부담스러웠던 듯 하다. 전투 개시 전, 조선군의 군가를 들은 한 미군 수병은 "무섭도록 구슬프고 장엄하다."라고 표현한 바 있다.[26]
적군은 참패의 와중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결사 항전 중이다. 패배가 당연히 보이는 상황에서 단 한 명의 탈영병도 없다. 아군이 압도적인 전력으로 몰아붙임에도 불구하고 적군은 장군의 수자기(帥字旗) 아래, 일어서고 또 일어선다. 칼과 창이 부러진 자는 돌을 던지거나 흙을 뿌려 저항한다. 이토록 처참하고, 무섭도록 구슬픈 전투는 처음이다. 그러나 군인들의 기강 문제와는 별개로 전략적인 측면에선 시작부터 실패한 일이기도 했다. 부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최소한의 병력이라도 수습해서 후를 도모하는 것이 기본이므로 당시 조선군의 지휘 체계가 얼마나 타락하고 해이해져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하지만 전투 중간에 지휘관 자리에 있는 어재연이 전사[27]해 지도력의 부재가 있었고,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해군의 상륙을 허용해 왕실과 직접 연결된 기관인 외규장각이 탈탈 털린 경험이 있는 조선군 입장에서는 유연한 대처를 기대하기 어렵기도 했다.

애시당초 상술했듯, 조선군은 미군의 공격을 그나마 방어력이 강하고 방어가 용이한 광성보로 유도를 했으며 이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조선군이 전술적으로 무능하진 않았다. 문제는 결전장으로 선택한 광성보였다. 광성보 일대는 강화도 동해안 전체적으로 바라보면 유독 동쪽으로 튀어나온 반도 지형이라 미군이 반도 입구를 봉쇄하면 퇴각이고 뭐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 조선군도 스스로 결전장으로 선택한 만큼 이 문제는 잘 알고 있었고, 이를 초지진과 덕진진에서 철수한 병력이 광성보를 포위한 미군의 뒤를 치는 것으로 만회하고자 했다. 그러나 미군 역시 후방습격 가능성을 매우 잘 알고 있었고, 광성보로 향하는 길목의 대모산 고지를 점령하는 것으로 후방 공격을 사전 차단했다. 장비의 질적차이는 논외로 하더라도 조선군에게 불운했던 점은, 미군이 남북전쟁 4년여를 겪은 사람들이어서 실전 경험이 좋았고 훈련도 또한 좋았다는 점이고, 조선은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그래도 조선군은 광성보가 함락된 후에도 초지진 등지에서 첨사 이렴의 지휘 아래 야간 기습을 가했고 미 해군 함정 한 척을 패퇴시키는 데 성공한다. 미군은 악착같이 덤벼드는 조선군에게 질려버린 데다가 한양까지 점령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광성보를 점령한 바로 다음날인 6월 11일에 철군해버렸다. 조선 조정은 3일 후인 6월 14일에 그것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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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로 잡힌 조선군들의 모습.[28]

미국은 마지막으로 사로잡은 포로들로 협상을 시도하나, 조선 조정은 "수치스럽게 살아 포로로 잡힌 이들은 알 바 아니다"라고 딱 잘라 거절했고 미국은 별 수 없이 포로들을 그냥 석방한다. 포로들을 찍은 사진이 미국에 남아 있다. 포로로 잡혔던 조선군 장병들은 미군이 주는 밥을 내던지며 일절 굴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저런 냉담한 말과는 달리 조선 조정은 정작 포로들이 귀환하자 치료와 구휼을 베풀고 군공을 인정해서 상까지 주며 예우하였다. 이를 보면 저 '수치스럽게 살아 포로로 잡힌' 운운은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미군 수뇌부의 '테러와의 협상은 없다'와 비슷한 뻗대기였을 가능성이 높다. 포로 중 한 명은 팔에 총을 맞아 괴사되었는데 미군에서 절단수술을 해주었다.

미군이 철수한 이유에는 다른 것도 있었다. 광성보를 치느라 탄약의 반 정도를 소모했고, 식수도 부족했으며, 풍토병이 번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한 고온다습했던 조선의 여름은 처음이었으며 앞서 전진을 하는 동안 갯벌등을 통과하며 개인 화기의 상태도 나빠지고 있었다. 이후 로저스 제독은 미국으로 귀환 후에 대체 그 비싼 비용 쓰고 얻은 게 뭐냐고 크게 질책당했다. 불안정한 일본은 신미양요와 비슷한 사건으로 정권이 붕괴할 가능성을[29] 고려해 개항을 진행하였지만, 조선은 통치권이 아직 견고한 중앙집권 상태였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미군은 철수하면서 조선군 시신을 일부 수습해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장교진은 그대로 매장, 일부 조선 병사들은 화장했다. 이후 시신 수습을 위해 도착한 강화도 진무사 정기원은 얼굴도 알아볼 수 없게 병사들을 불로 태워 화형시켰다며 분노하는 장계를 올리기도 했다. 한국에도 시신을 화장하는 문화는 불교의 영향으로 있긴 했지만, 조선 후기에는 성리학과 숭유억불의 영향으로 매장이 기본이었으고, 아무리 큰 전투라도 가능한한 시신은 수습, 집단 무덤을 만들어 매장했을지언정, 화장은 하지 않았다. 다만 임진왜란급 대규모 총력전이나, 병자호란처럼 겨울에 얼어붙은 시체가 봄이 되어 썩어 문드러져 전염병의 위험이 돌 정도였을 때나 예외적으로 화장했다. 이전 전쟁과 비교했을 때 비교적 적은 시신 250여 구를 바로 화장해버린 미 해군의 조치는 유교 교리를 한평생 받들어온 관리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광성보 전투의 패전은 조선군의 전략전술이 실패한것을 방증하고 있는데 병인양요에서 조선군은 프랑스군을 강화도 내륙으로 끌어들여 정족산성 전투에서 승전해 프랑스군을 몰아냈지만 신미양요와 다른데 조선군은 프랑스군을 강화도 내륙으로 끌어들이기전 문수산성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1차적으로 27명의 사상자를 내주록 유도해 강화도에 끌어들이기전 1차로 타격을 주었고 애초에 해안가와 평지에 위치해있어 방어력이 그닥인 광성보와 달리 산맥능선에 위치해있어 방어력이 광성보와 수준이 다른 정족산성으로 프랑스군을 유인해 프랑스군 수병 6명을 사살하고 35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게다가 조선군은 이 당시 화승총의 단점을 알았기 때문에 프랑스군을 상대로 근접사격을 가했는데, 방어력이 좋은 산성안에 매복해 있다가 프랑스군이 화승총 사격범위안에 들어서면 일제사격을 가하는 전술을 시행해 문수산성에서 프랑스군에게 27명의 사상자를 발생시켰으며, 정족산성에서는 6명을 사살하고 35명에게 중경상을 입혀 프랑스군을 몰아내었다. 그에 반해 신미양요에서는 조선군의 전략전술이 상당히 후퇴한 모습을 보였는데, 당장 대모산에서 광성보로 향하는 미군을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정작 대모산에서 200명의 조선군 사수들이 미군에게 사격을 가했을 때, 사정거리 밖이라는 것을 안 미군은 무시하고 광성보로 향했고 광성보 전투전 초지진,덕진진에서 미군에게 1차타격을 주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후퇴하는 바람에 미군은 광성보 전투 전 아무런 사상자 없이 광성보와 손돌목 돈대에 진입해 조선군을 15분만에 섬멸했다.

4. 결과

4.1. 미국 측

조선과의 협상이 처음부터 미국측의 목표였던만큼 베이징 주재 미국 공사 프레드릭 로우는 무력 충돌 전후에 조선과 대화를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특히 광성보 전투에서 발생한 학살에 가까운 피해가 미국의 위력을 체험한 조선으로 하여금 협상 테이블로 나오도록 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전혀 그러지 못하여 의아해했다고 한다#.
프레드릭 로우는 나름 협상카드로서 광성보 전투에서 획득한 조선군 포로를 조선에 돌려보내겠다고 제안했지만 조선 정부측에서는 그 송화된 포로들은 법에 따라 처벌될 것(punished accordingly)이라는 답변으로 협상을 거절하였다. 설상가상으로 광성보 전투 전에는 유화적인 태도였던 강화유수(governor of Ganghwa)까지 이제 협상은 없을 것이라고 냉정하게 미국측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결국 군사적인 이득이나 피해와는 상관없이 결과는 조선의 협상 거부였다.

따라서 미합중국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중 하나였는데 본격적으로 침략하거나, 그냥 포기하고 물러서거나 뿐이었다. 물론 미군과 조선군의 질적 격차는 매우 컸지만, 당장 파견한 전함 5척과 병력 1,000여 명은 한 국가 전체와 싸우기에는 부족했다. 프로데릭 로우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그들에게는 수도(한양) 공격에 필요한 지원이 부족하였고 불충분한 병력으로 수도로 진격하는 것은 막대한 위험을 동반하는 일이었다("Nothing can be effected short of [attacking] the capital. Force insufficient to go there without great risk")
외교적인 해결은 물 건너갔고 그렇다고 공세적으로 나오기에는 병력과 자원이 부족했다[30]. 결국 프레데릭 로우는 일단 강화도에서 철수하여 상부의 추가적인 지시를 기다리기로 결정하였고("If peaceful means fail, shall withdraw and wait instructions") 이로써 신미양요는 종결되었다.

4.2. 조선 측

전투 이후 대원군은 지지 세력의 결속을 위해 척화 전쟁의 승리를 선전하고, 척화비를 전국에 세웠다. 덤으로 기세를 몰아 서원 철폐도 단행했다.

미국이 물러가긴 했지만 조선군 전멸이라는 결과는 조선인 모두에게 충격을 주었다. 박규수를 비롯한 개화파는 통상 거부 정책의 한계성을 재인식했고, 위정 척사파는 위정 척사파대로 대원군의 개혁 정치 및 남인 등용으로는 양이의 군대를 막아낼 수 없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결국 단기적으로 신미양요는 대원군의 쇄국 정책에 힘을 실어주었으나, 내적으로 쌓이는 반발과 불안감을 막을 수는 없었다.

불과 2년 뒤, 대원군은 최익현의 탄핵으로 인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한다. 집권한 고종은 개국, 개화파에 힘을 실어주었다. 신미양요가 일어난 지 불과 4년 뒤, 일본이 미국을 흉내내어 운요호를 보내자, 신미양요의 피해를 복구하지 못했던 강화도의 수비 병력은 포함 한 척에 허무하게 무너져버렸고, 결국 조선은 개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운요호는 배수량 고작 249톤에 승조원도 수십 명에 불과한 작은 배였는데도 이미 그 이전에 커다란 피해를 당한 조선이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조선측은 신미양요에서는 병인양요 때와 달리 전술적 퇴보를 보였다. 병인양요 때의 조선군은 문수산성에서 프랑스군에게 나름의 출혈을 내게한 뒤 강화도 내륙 정족산성으로 끌어들여 승부를 거는 게릴라전, 방어전을 적절하게 수행했다. 고지대의 정족산성은 해안가 평지에 있는 광성보와 비교하면 방어력이 상당히 높은데 신미양요 때의 조선군은 이러한 잇점을 살리지 못하고 미군을 대모산과 광성보로 끌어들여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막상 작전 수행에서는 화승총의 사거리를 계산하지 않는 바람에 계획을 말아먹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5. 뒷 이야기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율리시스 S. 그랜트였다. 발단이 된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전임자인 앤드루 존슨 행정부 시기에 일어났다.

애초에 미국이 조선에 대해 하나도 모르고 와서 개항하라고 땡깡을 부린 것은 아니었다. 당시 미국은 애팔래치아 산맥에서 생산된 백삼을 거대한 중국 시장에 가져와서 팔려고 했지만 미국 상인을 가로막은 것은 거대한 조선 홍삼의 벽이었다. 조선 홍삼이 당시 중국 상인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높았는지 중국 상인들은 미국인들이 팔던 백삼은 쳐다보지도 않고 전부 조선의 홍삼만을 구매[31]했다. 결국 당시 미국과 조선은 군사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유례(類例)없던 경쟁자로서 마찰을 빚은 것이었다.

그로부터 11년 후 두 나라는 수교 조약을 체결하고 관계를 개선하니 상전벽해라 하겠다. 그러나 그로부터 다시 20년 후 미국 정부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는 것을 인정했고 대한제국의 도움 요청을 무시했다. 그리고 또 36년 후 미국과 일본은 국운을 건 대전쟁을 4년여간 치렀고 그 결과 대한민국은 독립. 5년 뒤 치러진 또 다른 대 전쟁 끝에 대한민국과 미국은 군사동맹을 맺고 지금에 이른다. 역사의 아이러니.

신미양요는 초기형 방탄복이었던 면제배갑이 활용된 전투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작 방탄성능 실험을 한참 약한 조총으로 해서 만든 물건이라 효과는 그냥 총검 찌르기나 막는 수준이었고, 안타깝게도 별 활약을 보여주진 못했다. 미군은 운좋게 몇개를 얻었고, 이를 매우 흥미롭게 봤는지 노획해서 전시하기도 했다. 현재 단 2개만 남았다. 하나는 육군사관학교 육군 박물관에 전시 중인데 보존상태가 좋지 않다. 다른 하나는 한동안 미국에 있었다가 임대 형식으로 반환받았다. 다만 두껍고 무거웠기에 6월의 여름에 그것을 입은 병사들은 매우 힘들어 하였고, 방염 처리를 하지 않았지만 소이탄이나 예광탄이 아닌 당시 총탄으로는 불이 붙기는 어렵다. 자세한 내용은 면제배갑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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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전투 후 미국인 사진사에 의해 촬영된 면제배갑을 입은 조선군 해당 사진의 출처

참고로, 이 당시 남북 전쟁을 겪었던 미 해군 베테랑들에게도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던 조선군의 끈질김은 겨우 4년 후에 벌어진 운요호 사건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유는 군수품 문제. 그 당시 고종이 일대 군영의 주요 수입원이던 경강수세를 갑자기 혁파하여 몇 달씩이나 군수 지원이 끊겼던 점도 있었으나[32], 아이러니하게도 운요호 사건의 서술에서 알 듯 있듯이 미군과의 교전에서 수많은 대포와 조총 등의 무기부터 성벽까지 싸그리 작살이 난 탓이 컸다.

다른 국가와 비교해보자면, 일본은 쿠로후네 사건에도 막부가 굴복하면서 전쟁은 피하다가 갑자기 제국주의로 급부상했다. 반대로 베트남은 프랑스의 선교사 살해를 명분으로 한 침공에 어설프게 전쟁을 벌였다가 국가적으로 망했다.[33] 미얀마 역시 19세기 중반 영국과 전쟁에서 여러 차례 패배해 속국으로 전락했다.

신미양요 당시 미 해군에 빼앗긴 어재연 수자기는 2007년부터 '10년 대여' 조건으로 국내에 들어와 있다. 이 유물은 현존하는 유일한 조선 시대 실물 군기 유물이라고 잘못 알려진 경우가 많은데, 조선 시대의 군기는 프랑스 성 루이 성당에 있는 깃발을 비롯해서 여러 개가 남아있다. '10년'이라는 기간 제한과 '대여'라는 표현에 피약탈국으로서 반감이 드는 건 어쩔수 없겠지만, 노략 문화재의 세계에서는 10년 대여면 오히려 후한 조건이라 할 수 있으니, 달갑지 않으나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리고 열악하기 그지없는 한국의 군사 유물 보존 실태를 고려하면[34] 냉정하게 말해 저 깃발은 미군이 가져가서 잘 보존해준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지, 안 그랬으면 우리는 수자기를 영영 그림으로나 봤을 것이다. 게다가 전시 교전으로 인해 얻은 정당한 전리품(민간에서 약탈한 물건이 아닌 병기나 군 피복, 서류 등 군사 및 정부 물품들)은 국제법상 따로 조약으로 규정하지 않는 이상 상대국에 반납할 의무도 없다.[35]

미 해병대가 최초로 해외원정 전투에서 명예훈장을 받은 전투이기도 하다. 다만 당시에는 유일한 무공훈장이 명예훈장이었다.

미군 측의 마지막 생존자는 1923년 77세를 일기로 사망한 윌리엄 루크(William F. Lukes, 1847~1923) 일병이었다. 미군측 전사자 중 최고 선임 계급인 휴 맥키(Hugh McKee) 중위를 지키기 위해 동료 두명[36]과 함께 조선군에 맞섰으나 맥키와 동료들은 전사하고 본인은 온 몸의 열여덟 군데에 자상을 입고 살아남았다. 공을 인정받아 명예훈장까지 수여받았지만[37] 전투 도중 입은 머리부상으로 인해 평생 경련으로 고생했다.

다른 전투들처럼 양측 전사자 후손들이 만나는 사례도 있었다. 동국대(경주)에서 신미양요를 연구하던 토머스 듀브나이[38]라는 교수에 의해 상기 미군 최선임 전사자 휴 맥키 중위의 증조카 제임스 워드롭(Jams Wardrop)이 초청되어 2000년 5월 27일 어재연 장군 제사에서 증손자 어윤원과 만났다.#

100여 년이 지난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데탕트, 남베트남의 패망, 지미 카터 행정부의 인권외교 등으로 인해 미국과 외교적으로 대립하는 상황에 놓이자 내부적으로 신미양요를 재조명해 주한미군 철수 대비, 7.4 남북 공동 성명 발표 등 우리식 독자외교와 "자주국방"을 강조하는데 이용했다.#아카이브[39]

6. 미디어에서

현대의 미국은 대한민국의 최고 동맹국이다보니 이 '조미전쟁'은 그렇게 크게 다루어지지는 않는다.[40] 조미 통상 조약 이후 보빙사 파견까지 밀도 있게 다룬 1980년대 사극 <풍운>에서도 그냥 내레이션으로 처리할 정도였다.
  • 1990년대 이후에 간간히 드러내기는 시작하는데, MBC 조선왕조 500년 대원군에선 병인양요와 함께 다루고 있는데 조선군이 처절하게 처발렸음을 소름끼치게 잘 묘사했다. 극중 조선군들은 프랑스 및 미군 사격에 추풍낙엽 신세였다. 다만, 병인양요 편에서도 이랬다. 그런데 휴 맥키 중위는 실제로는 창에 배를 찔려 전사했으나 본작에서는 화살을 배에 맞아 전사하고, 미군 총검에 맞아 전사한 어재연은 미군 총격에 전사하는 것으로 다르게 묘사되었다.
  • 반대로 찬란한 여명에서는 수십의 미군이 죽는 장면이 묘사된다. 어재연 혼자 칼로 베어 죽인 미군만 여러 명이며 미군이 물러날 때도 수십 명의 시체가 쌓여있는 묘사가 있다. 이쯤 되면 판타지. 참고로 동 드라마에서 병인양요 묘사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 이제마를 다룬 KBS 드라마 '태양인 이제마'의 후반부에 이 사건이 묘사되는데 당시 반미열풍이 불던 시절이라[41] 미군이 상당히 부정적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죽은 미군이 너무 많다. 막판 육반전에서 조선군 지휘관들이 칼로 베어죽인 미군과 조선군 졸병이 돌로 내려 찍어 죽이는 미군만 10명으로 전체 전사자 수를 가볍게 넘긴다. 작품 전개에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이때 스승을 잃은[42] 이제마는 조금이라도 백성들에게 보탬이 되고자 관직 생활을 시작하는 것으로 그렸다.
  • 드라마 명성황후에서는 18화에서 잠시 등장하는데 문제의 광성진 전투에서 미군이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나는 내용으로 나온다.

위에서 언급한 드라마들은 모두 병인양요 때와 마찬가지로 전투에 투입된 미군은 해군과 해병대 병력이었음에도, 대원군 드라마를 제외한 다른 드라마에서는 어설프게 재현 된 육군만 나오며 미군 사망자가 엄청나게 나온다는 공통된 역사적 재현 오류가 있다. 제대로 해군과 해병대 병력이 나오는 건 강화도에 있는 기념관의 디오라마 정도다.
  • 구한 말을 배경으로 한 수사 드라마인 별순검(시즌 3 10화 '금수산')에서는 이 신미양요 때 참전한 사냥꾼이 범인으로 등장한다. 교전 중 동료들은 모두 전사하고 혼자 도망쳐서 목숨을 건졌지만, 그 과정에서 심한 PTSD를 앓게 되고 산에 은둔하며 살다가 범행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 김은숙 작가와 이응복 PD가 2018년 tvN에서 선보인 미스터 션샤인에서 1회에서 짧게 등장했다. 비록 짧았지만 그 당시 처참했던 전투의 모습을 잘 그려낸 것으로 보인다.
  • 한제국 건국사에서는 대체 역사 소설인 만큼 여기에 해당하는 사건은 나오는데, 실제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다. 1만 명에 달하는 미국 - 영국 - 프랑스 연합군의 대함대가 강화도로, 3천 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남부 지방으로 침입하여 '양요'가 아닌 '양란' 수준인 대규모 전쟁으로 일어난다. 이때의 조선은 원 역사와 달리 무진경장을 통한 자체적인 근대화가 조금이나마 이루어진 상태였던지라 군대도 신무기인 갑식보총과 360도로 1백근 야포등이 보급되고 훈련도 잘 된 정예병이었던 덕에[43] 이 4개국 연합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어 버렸고 이 승리를 기반으로 원역사의 불평등 조약이 아닌 더 대등한 상태로 4개국과 문호 개방을 하는데 성공한다. 다만 전쟁이 크게 확대된 만큼 조선 역시 강화도는 미영프 함대의 맹포격에 아주 가루가 되어 박살나버렸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 영종진 등 포대들이 역사대로, 아니 역사 이상의 피해를 입고,[44] 강화부성마저 떨어진다. 어재연 역시 역사대로 가지만, 정기원은 역사와 달리 죽는다. 다만 이것이 허사는 아니었던 것이 그만큼 연합군의 피해도 원 역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커졌고[45] 이것으로 인해 영국에서는 전쟁을 적극 주장했던 자유당 정권이 실각해 붕괴해버렸고 미국에서도 이러한 아군 오사 사건으로 인해 그랜트 대통령이 국민들의 원성을 들으며 탄핵 직전까지 놓였으며 일본도 조선의 승리로 인한 충격으로 메이지 천황에 대한 반란이 터져 치안이 개판으로 되어 버린 통에 패전국이 된 열강들이 조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제대로 피를 보며 세계사적으로도 큰 영향을 끼쳤다.


[1] 병사 2명(존 콜먼 일병, 마이클 맥나마라 일병)과 장교 1명(패트릭 그레이스 중위)의 모습이 담겼다. 사진에 찍힌 조선군의 수자기는 촬영일 기준 136년 후인 2007년, 참여정부 시기에 10년 임대 형식으로 사실상 대한민국에 반환됐다.[2] 여러 돈대와 진을 미국이 점령하였다.[3] 고종실록에서는 이날 전투의 사상자를 미국측 집계와는 달리 전사 53명, 부상 24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출처[4] 미국측 통계에 의하면 전투가 끝났을 때 광성보 일대에 널려있는 시체수는 243구, 해협에 뛰어내려 익사한 장병이 100여 명, 총 350명이 죽었다고 집계했다. 출처[5] 역시나 미군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내용으로 조선군 100여 명이 해협으로 집단 투신 자결하였다고 한다. (참전 미군인 앨버트 가스텔의 기록)[6] 기록에 따르면 전사한 사람은 휴 맥키 중위와 해병대 일병 데니스 헨러한(Denis Hanrahan), 그리고 해군 수병(Seamen) 세스 엘렌(Seth Allen)이라고 한다.[7] 미국의 시카고 트리뷴에서 이 전쟁을 다룬 기사에서 사용한 헤드라인이다. 이는 미군 제독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 기사 내용은 미국의 경제적 이권을 위한 조선 개입이 미군의 목숨을 소모적으로 대한다고 비판적으로 보도하였다.[8] 고종이 이런 주장을 한 이유는 신유박해 당시 조정이 탄압 근거로 삼았던 무부무군(無父無君)이 당시 성리학 사회에서는 너무나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신유박해 문서 참조.[9] 이때 미국은 남북 전쟁의 여파를 수습하고 경제력으로 대영제국을 넘어서기 일보직전이었다.[10] 엄밀히 따지면 해국도지에서는 주(State)를 대부락(大部落)으로 번역했다. 다만 소부락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불명인데 글쓴이는 City 또는 County 라고 추정했다.[11] 조선 후기 외국선박이 접근해오거나 외국인이 표류할 시 이를 확인하고 사실여부를 조사하는 관직. 보통 해당 사건 지역의 수령이 겸임하는 경우가 많았고, 역관을 종사관으로 삼았다.[12] 이때 문정관 일행과 동승한 월미도의 촌장이 콜로라도 함 안에서 미군한테서 맥주 여러 병을 선물받고 웃는 모습이 찍힌 사진이 남아있는데#, 이 사진이 인터넷상에선 엉뚱하게 조선군 포로(?)의 사진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심지어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조선군 포로가 석방되는 장면을 이 사진을 바탕으로 그리는 오류를 범했다.[13] 참전했던 미 해병대 대위의 편지에서 얼마나 낙후되었는지 알수 있는데 이 대위는 "그들의 포는 매우 조잡하오. 통나무로 된 포가 얹혀 밧줄로 묶인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서 미리 정해진 지점 외로는 사격을 할 수 없다고 하오. 그래서 우리 배들이 가까이 접근했을 때에야 포격을 했소. 커다란 포환이 날아왔는데 배에는 전혀 맞지도 않았소. 단지 총통이라고 불리는 소형 화기에서 발사된 조잡한 탄환 두어 개가 적중했다고 하오. 그 총통이라는 것은 두 명이 어깨에 걸쳐메고 화승으로 발사하는 것이라고 하오. 단지 우리 승조원들 3명이 맞았는데 가벼운 부상이라고 하오. 최신의 무기로 무장한 우리들에게 그들이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은 당신도 잘 알 수 있을 것이요."라고 썼다.[14] 이 시기의 미군은 잡다하게 자국산 총기들을 채택하여 실험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흔히 미군이 이 전투에서 사용했다고 알려진 레밍턴 롤링블럭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레밍턴 롤링블럭 M1870 모델의 경우 후방 가늠자에 결함이 있어서 미 해군에서 기각하여 다른 나라들에 팔렸고, M1871의 경우는 신미양요가 벌어진 당해부터 생산되기 시작한 무기라 당시 전투당시의 미군이 사용했을지의 여부는 확실치 않다.(다만 용산 전쟁기념관에서는 레밍턴 롤링블럭 M1870 모델을 신미양요 당시 미군 측 총기들중 하나로 소개하고 있으니 참고.) 신미양요 당시 촬영된 미군 사진에서 발견되는 총기는 카빈형의 롤링블록 소총인데, 이는 신미양요 이전부터 미 해군이 채택하고 있었던 레밍턴 롤링블럭 M1867 카빈 .50-45 모델일 가능성이 높다. 참고1 참고2 참고3 참고4 참고5 참고6[15] 전투 개시 며칠 전에 급파되어 지휘 체계 엉망에 제대로 된 지원도 받지 못함.[16] 분당 10발 사정거리 400m vs 1~2발 사정거리 100m으로 양군의 화력 차이는 1:50[17] 기록에 따르면 전사한 사람은 위에서 언급된 휴 맥키 중위와 해병대 일병 데니스 헨러한(Denis Hanrahan), 그리고 해군 수병 (Seamen이라고 나와있는데, 대략 해군 일병 정도의 계급이다.) 세스 엘렌(Seth Allen)이라고 한다.[18] 고종실록에서는 이날 전투의 사상자를 미군측 집계와는 달리 전사 53명, 부상 24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출처[19] 미군측 통계에 의하면 전투가 끝났을 때 광성보 일대에 널려있는 시체수는 243구, 해협에 뛰어내려 익사한 장병이 100여 명, 총 350명이 죽었다고 집계했다. 출처[20] 역시나 미군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내용으로 조선군 100여 명이 해협으로 집단 투신 자결하였다고 한다. (참전 미군인 앨버트 가스텔의 기록)[21] 조선군은 지방에 중앙군을 파견할 때 다른 군영 부대를 뒤섞어 보내는 이상한 관습이 있었다.(아마 같은 군영 부대만을 보내면 반란을 일으킬 우려를 해서 그런 듯.) 그런데 하필 조선군은 각 군영마다 군령이 다르고 훈련 방식도 달랐다. 다만 이러한 방식이 조선만의 특이한 방식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영국군도 현재까지 원정군을 파병하는 경우 각 지역에 위치한 육군 연대에서 대대를 하나씩 뽑아 여단을 구성해서 보내는 방식이다. 그리고 비효율적이라고만 할 수는 없는 게, 당시 중앙 군영은 그냥 이름 다른 부대인 게 아니라 국가 체제(세금 징수나 부역 등)과 긴밀히 연결된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한 부대를 전체 보냈다가 전멸해 버리거나 대다수가 사망하거나 하면 국가 체제 자체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게다가 당시 조선군의 중앙군 군영들은 각 지방에서 올려보낸 번상병들을 특정 군영에서 담당해서 수용, 운용했기 때문에 군영 하나를 통째로 보냈다가 전멸하거나 하면 해당 지방은 한날 한시에 제사 지내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었다. 영국도 1차대전 초기에는 각 지방 출신들끼리 묶어서 Pal이라는 지역연대를 편성에 전장에 투입했더니 회전 한번에 한 지역이 통째로 줄초상나는 일이 벌어져 결국 Pal 제도를 폐지하고 각 지역 출신들을 뒤섞어 편성하는 것으로 바꿨다.[22] 어재연은 병인양요 당시 초지진에서 근무했었다.[23] 상륙군은 해병대 소령이 지휘했으며, 해군 병력을 선두로 하여 해병대가 뒤따라 진격했다.[24] The 1871 U.S.-Korea Conflict: Cause and Effects 여기에 따르면 상륙 전날 맥키는 자신의 약혼자가 어느 외교관과 바람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25] 루이스 킴벌리(Lewis Kimberly) 대령의 작전보고서에 따르면 조선군 100명 가량이 도주를 시도했지만 하필 그 방향에 막 전개를 마친 더글러스 카셀(Douglass Cassel) 해병 소령의 사격에 순식간에 전멸했으며, 이후 일부 조선군이 구릉지를 따라 후퇴했으나 미 해병대의 사격에 마찬가지로 전멸했다. 그러나 로저스 제독의 보고서나 참전 미군인 앨버트 가스텔의 기록에는 그런 내용이 없으며 국내에선 이쪽이 정설이다.[26] 미국에겐 이로부터 20년 후 서미 전쟁의 필리핀 전역에서 마약 빤 민다나오 모로 게릴라 군대를 만나기 전까지는 동아시아에서 치른 전쟁 중 가장 처절했다고 기록되었다. 물론 인디언 전쟁이나 남북 전쟁 중에서도 이런 전쟁이 없었던 건 아니고 의화단의 난 같은 경우도 존재했지만 이렇게 한쪽의 전세가 압도적으로 강한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저항한 경우는 드물었다. 수십 년 뒤 이오지마오키나와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지만 그건 2차 세계 대전의 추축국인 일본이 미국을 일방적으로 선공해서 일어난 전쟁이라 상황이 다르다.[27] 당시 지휘관 어재연을 전사시킨 것으로 알려진 미 해병 제임스 도허티(James Dougherty, 훗날 명예훈장 수여)의 계급은 이병이었다.[28] 오른편의 조선군이 입은 옷은 미 해병대의 전투복 상의이다. 정황상 미 해군이 지급해 준 듯하다. 동시에 조선에서 처음으로 촬영된 조선 군인의 사진이다. 참고로 최조의 조선인 사진은 아닌데 이는 이미 '광성보 전투'가 발생하기 전인 5월 31일에 문정관[46]을 파견해 이들의 접근 의도를 추궁 할 당시에 이때 문정관 일행과 동승한 월미도의 촌장이 콜로라도 함 안에서 미군한테서 맥주 여러 병을 선물받고 웃는 모습이 찍힌 사진이 시간상 먼저이기 때문이다. # 참고로 이 사진이 인터넷상에선 엉뚱하게 조선군 포로(?)의 사진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심지어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조선군 포로가 석방되는 장면을 이 사진을 바탕으로 그리는 오류를 범했다.[29] 에도가 굶어서 죽든 포격전으로 쑥대밭이 되든 도쿠가와 막부만 치명적인 피해를 입기 때문에 번국들과 파워 밸런스가 확 무너졌을 것이다.[30] 한 미국의 상원의원은 점령하기엔 너무 적고 평화를 말하기엔 너무 많은 병력을 보냈다는 말로 결과를 함축적으로 표현하였다.[31] 사실 중국인들 입장에서도 무턱대고 믿기도 영 찜찜하고 물건도 딱히 특출난 건 없어 보이는 미국인 상인들의 백삼보다 몇백년동안 거래해오며 신뢰도 쌓이고, 품질도 보증된 조선 홍삼을 사는 게 당연했다.[32] 고종 문서에도 있지만, 경강수세를 혁파한 이유는 대원군 시기의 화폐 정책 실패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발생한 조정의 재정 문제 때문이었다. 또한 운요호 사건 시기는 신미양요 시기와는 달리 본격적인 개전도 아니므로 단순 비교는 어렵다. 홍모이 혹은 도깨비 취급을 받았던 서양인에 대한 조선인들의 거부감과 초기 전투 양상 등 차이가 날 구석은 엄청나게 많은 것도 사실.[33] 하지만 베트남은 동남아에서 서구의 침공에 가장 끈질기게 저항한 국가 중 하나였다. 애초에 프랑스군은 베트남의 도성인 후에로 바로 침입하려 했으나 후에 앞 항구 다낭의 베트남군 방어선에 막혀서 몇 개월 동안 고생하다 사이공을 침입한 것이다. 그 이후에도 남부 베트남은 10여 년간 반불 항쟁으로 전통적인 지주층이 사라질 때까지 프랑스에 저항했다. 그리고 이런 저항의 역사는 이후 프랑스와 미국, 중국을 연속으로 상대해 패퇴시키는 베트남의 위업으로 다시 등장했다.[34] 조선시대의 무관심 + 일본의 총포 화약 단속법 + 6.25 전쟁 +현대의 무관심이 겹쳐져 살아남은 유물이 극히 적다.[35] 비슷한 경우가 러시아의 군함 바랴그의 군기. 문화재 관리법에 따라 인천 시청에서 러시아로 2년간 대여하는 형태로 반환했으며 한 차례 기간 연장, 그리고 현재 인천 시청으로 반환된 상태이다.[36] 세스 앨런(Seth Allen)일병, 토머스 머피(Thomas Murphy)일병[37] 사실 명예훈장이 미군 최고 훈장으로 등극한 것은 상훈규정이 세분화된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이다. 그 전까지는 명예훈장이 유일한 무공훈장이었다.[38] 미국인으로 신미양요 영문사이트 도 그가 만들었다.[39] 사실 박정희는 자기 형이 공산주의자가 되어 미국에 살해되었다고 생각하여 남조선로동당에 입당하여 군사총책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적 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일이다.[40] 물론 북한에서는 오페르트 도굴 사건,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함께 미국 까는 근대 삼종신기 중 하나다. 북한 미디어란 게 북한 내부에서만 소비되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았다.[41] 2002년 7월~10월 방영.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아폴로 안톤 오노 부정사건, 그리고 미선이 효순이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다.[42] 미군이 일부러 죽인 건 아니고 조총 들고 미군이랑 싸우는 이제마를 말리다가 총에 맞았다.[43] 거기다 프로이센이 조선에 정보 전달 및 물자 보급, 군사 고문단 파견과 같은 지원을 해주고 있었다.[44] 작중 묘사에 따르면 초지진은 격렬한 포격전으로 포대 2개를 제외하면 다 파괴되었고, 광성보는 조선군의 모든 포대가 미영프 함대의 포격으로 다 폭파되었으며 광성보 외부 방어선부터 내부 본진까지 격렬한 전투 와중에 처참하게 파괴되었다.[45] 광성보 전투 하나에서만 무려 수백 명의 사상자가 나왔고, 강화부성에선 정기원의 야습으로 피아 구분할 수 없는 난전을 유도하는 바람에 미 해병대가 전방에서 조선군과 육박전을 벌이고 있을 때 패닉에 빠진 미 해병대 포병대가 개틀링 기관총을 난사해 조선군과 난전을 벌이던 해병대 1개 중대가 갈려나가 버렸다. 아군에게도 갈겨버린 무차별 사격에 단단히 빡친 해병대가 포병대와 내분을 벌이게 된 것은 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