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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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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국 (1871 ~ 1943)
Deutsches Reich

대독일국 (1943 ~ 1945)
Großdeutsches Reich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파일:독일 국기(3:2 비율).svg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독일 제국
Deutsches Kaiserreich
바이마르 공화국
Weimarer Republik
나치 독일
NS-Staat
<colcolor=#000>
독일국
Deutsches Reich
독일 제국
Deutsches Kaiserreich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파일:독일 제국 국장(1889).svg
국기 국장
Gott mit uns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1]
상징
국가 그대에게 승리의 왕관을
Heil dir im Siegerkranz
지도
파일:독일 제국 위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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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합병 이전 제정 폐지 이후
북독일 연방
[[프로이센 왕국|
프로이센 왕국
]]
바이마르 공화국
역사
1871년 독일 통일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1916년 군부독재 체제로 전환
1918년 제정 폐지 및 바이마르 공화국 성립
지리
위치 <colbgcolor=#fff>중부유럽
수도 베를린
면적 540,857km²(본토)
2,658,161km²(식민지 포함)
인문환경
인구 41,058,792명[2] (1871년)
64,925,993명[3] (1913년)
언어 독일어
종교 개신교, 가톨릭
민족 독일인, 폴란드인, 소르브인, 덴마크인 및 기타
정치
정치 체제 준입헌군주제[4](1871 ~ 1916)
군사독재하 입헌군주제(1916 ~ 1918)
국가원수 황제(카이저)[5]
왕조 호엔촐레른 가문
정부수반 수상[6]
역대 황제 빌헬름 1세 (1871~1888)
프리드리히 3세 (1888)
빌헬름 2세 (1888~1918)
주요 실권자 오토 폰 비스마르크
알프레트 폰 발더제[7]
에리히 루덴도르프[8]
경제
통화 굴덴, 마르크[9]

1. 개요2. 상징
2.1. 국호2.2. 국기
2.2.1. 황제기
2.3. 국가2.4. 국장
3. 역사4. 헌법5. 정치
5.1. 황제5.2. 수상5.3. 입법부
5.3.1. 연방참사원(상원)5.3.2. 제국의회(하원)
6. 군사
6.1. 육군6.2. 해군
6.2.1. 빌헬름 1세 시대6.2.2. 빌헬름 2세 시대6.2.3. 티르피츠 시대6.2.4. 연이은 해군 증강
7. 외교
7.1. 프랑스7.2. 영국7.3. 오스트리아-헝가리7.4. 러시아7.5. 기타
8. 사회9. 인구10. 민족11. 경제
11.1. 산업의 발전
12. 종교
12.1. 독일 제국 내 유대인
13. 구성 제후국14. 독일 제국의 식민지15. 몰락의 배경과 전후16. 평가의 변화
16.1. 독일 제국 신화16.2. 평가와 재평가16.3. 대독일주의의 관점에서
17. 역대 황제18. 역대 제국 수상19. 참고 문헌20.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독일 제국(, Deutsches Kaiserreich)은 1871년부터 1918년까지 중부유럽에 존속한 독일인을 주축으로 세워진 연방 준입헌군주제 국가이다.

당시 국호는 독일국(, Deutsches Reich)이었으나, 바이마르 공화국 수립 이후에 제정 시대를 구분하기 위해 독일 제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2. 상징

2.1. 국호

공식 국호는 독일국(Deutsches Reich).

독일 제국(Deutsches Kaiserreich)이라는 명칭은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수립된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와 구분하기 위해 사후에 붙여진 편의상의 명칭이다. 흔히 '독일 제국' 하면 1871년부터 1918년까지 존재했던 중부 유럽의 국가 정치체 'Deutsches Kaiserreich'[10]을 의미하지만, 'Deutsches Reich'(독일 라이히)라고 하면 이 나라 외의 다른 것들도 지칭한다. 가령 '제1제국'으로 여겨지는 신성 로마 제국, 제3제국 나치 독일이 그것이다. 그리고 독일 제국 멸망 후 탄생한 바이마르 공화국도 국호는 여전히 'Deutsches Reich'이었다.[11]

이는 'Reich'(라이히)의 단어의 의미 때문이다. 'Deutsches Reich'에는 곧 "독일 민족 국가"라는 함축적 의미가 있었다. 따라서 독일인과 큰 연관성을 지녔다고 볼 수 없었던 '신성 로마 제국'은 관념상 독일인에게 귀속되었다. 불발된 1848년 혁명에서도 자유주의민족주의자들이 주창했던 민족 국가의 이름도 'Deutsches Reich'이었다. 혁명은 실패했지만, 1871년의 본 국가도 이러한 신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관념 속에서 신성 로마 제국은 '첫 번째 라이히(제1제국)'로 간주되었고,[12] 독일 제국은 '두 번째 라이히(제2제국)'로 불리곤 한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을 이은 나치 독일은 자신들을 '세 번째 라이히'(Drittes Reich)라고 했다.[13] 그러나 나치 독일 이후 '라이히'라는 단어 자체가 부정적으로 인식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세워진 독일 국가는 '네 번째 라이히' 식으로 칭하지도 않고, '라이히'라는 단어를 쓰지도 않게 되었다. 창작물이나 유럽 연합을 풍자할 때나 사용하는 정도로, 제4제국 참고.

2.2. 국기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Schwarz Weiß Rot Flagge[14]
북독일 연방이 수립되면서 국기로 채택되어 독일 제국 패망 시까지 쓰였다. 1848년 혁명바이마르 공화국을 거처 현재 독일에서 쓰이는 흑적금 배색자유주의민주주의를 상징한다면 이 흑백적 배색은 제국주의, 군주주의의 상징으로서 전통적으로 프로이센 왕국 내의 보수주의자들이 애용하던 깃발 배색이었다. 물론 독일 제국 시기에 흑적금기가 아예 안 쓰였던 것은 아니었지만 특정한 영방(발데크피르몬트, 로이스-그라이츠)들의 지역기로 쓰였다.

북독일 연방이 수립되자 연방의 국기로 어떤 국기를 채택해야 하는지 논의가 있었는데 이 논의를 처음 시작한 곳이 바로 무역선에 게양할 상선기를 두고 논의를 연 해운업계였다. 이 당시 북독일 연방의 해운업계는 맹주인 프로이센과 한자 동맹 시절부터 무역으로 이름을 날린 함부르크, 브레멘, 뤼베크의 3개 자유도시가 꽉 쥐고 있었는데 이것을 근거로 함부르크 상공회의소 소장이던 아돌프 조에트베어(Adolf Soetbeer)가 연방의 국기는 프로이센의 상징색(검은색과 흰색)과 한자 동맹의 상징색(흰색과 붉은색)을 조합하여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1867년 북독일 연방 헌법이 채택되면서 흑백적 삼색기가 국기로 채택되었다. 프로이센 국왕이자 북독일 연방 의장인 빌헬름 1세 역시 새로운 국기를 보고 만족했다.[15]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인 1918년1919년에도 국기로 사용되었으며 1922년부터 1933년까지 외무용으로 사용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동안 흑적금 배색이 쓰이다가 1933년 히틀러가 총리로 취임하고 나서 다시 흑백적 배색이 부활하여 하켄크로이츠 깃발과 1935년경까지 혼용되었다.[16][17] 이러한 역사적 경위 때문인지 지금도 네오나치를 비롯한 극우주의자들이 하켄크로이츠대체물로 애용하는 상징들 중 하나가 되었고, 비록 법으로는 금지되지 않았으나 이념적 문제 탓에 터부시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리고 몇몇 극우들은 독일 제국의 국기와 더불어 프로이센 왕국 국기를 들고 나온다. 벨기에 학살을 겪은 벨기에의 일부 지역에선 이 국기를 아예 불법으로 여긴다.

여담으로 아프리카의 국가인 부르키나파소1984년까지 오트볼타 시절에 사용했던 국기와 색깔 순서가 정확히 똑같지만 양자는 전혀 관계 없다.[18]
독일 제국의 깃발들
파일:독일 제국 전쟁기.sv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Reichskolonialflagge.svg.png 파일:Flag_of_North_German_Confederation_(jack).svg.png
<rowcolor=#000> 전쟁기 식민기 선수기
그 외에 수많은 깃발들이 독일 제국 내에서 사용되었으나 대부분은 적색과 백색, 붉은색 바탕이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전쟁기로 1871년 이래 디자인이 2번 바뀌었다. 위의 전쟁기는 1903년부터 1918년까지 사용한 3번째 버전이다. 전쟁기였으나 1882년부터는 독일의 왕공들, 황실 구성원들, 그리고 한자 동맹 주요 도시의 시장들도 전쟁기를 개인적으로 게양하는 것이 허용됐다. 하얀 바탕에 검은 십자가가 그려졌고 왼쪽 모서리에는 흑백적 삼색기와 철십자가가, 한가운데에는 프러시아 독수리가 있는 모습. 1892년부터는 군대가 쓰는 것이 허가됐고 그 이래로 '제국 전쟁기'라고 불렸다. 두 번째 깃발은 독일 제국의 식민지 기로 독일 제국의 해외 식민지들에서 휘날렸으며 외교용 깃발로도 쓰였다. 세 번째 깃발은 군함 선수에 걸던 선수기. 특별한 행사나 시찰, 축제 등이 열릴 때 게양했다.

2.2.1. 황제기

독일 황제기
파일:독일 황제기(1871).png 파일:독일 황제기(1871~1888).png 파일:독일 황제기.png
<rowcolor=#000> 1871 1871~1888 1888~1918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이 막 선포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독일 황제의 깃발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빌헬름 1세의 아들 프리드리히는 제국 선포 전날에 문장가 그라프 하라흐에게 황제가 쓸 새 깃발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고, 당대 프로이센 최고 문장가였던 그라프 스틸프리트 역시 황제기에 관심을 가지면서 서서히 새 황제기의 윤곽이 드러나게 된다. 그라프 스틸프리트는 노란 바탕 위에 철십자가, 십자가 안에 검독수리와 은빛 방패문이 올라간 새 황제기를 고안해냈다. 검독수리의 가슴에는 호엔촐레른 가문의 문장이 박혔고 기의 각 모서리마다 프로이센 독수리가 3마리씩 장식된 모습이었다. 또한 은색 방패문은 남독일의 왕관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빌헬름 1세가 새 황제기 제정에 별 관심이 없어서 일단 묻혔다.

그렇게 황제기 제정은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1871년 8월 3일에야 빌헬름 1세가 아들 프리드리히의 요청을 수용해 첫 황제기를 도입하게 된다. 그러나 첫 황제기는 바탕이 붉은색이었다. 당대 프로이센 국왕의 깃발이 붉은 바탕이었기에 프리드리히가 독일 황제기 역시 붉은 바탕이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서 관철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으로 선보인 독일 황제기는 그려진 왕관이 프로이센 왕관에서 독일 제국관으로 바뀐 것만 빼면 사실상 프로이센 국왕기와 거의 모습이 비슷했다. 1871년 8월 3일부터 10월 15일까지 사용된 이 황제기는 Gott Mit Uns라는 표어와 함께 철십자가, 은방패문과 검독수리로 구성됐다. 은방패문은 독일 최고의 영예였던 검독수리 훈장의 사슬로 둘러싸였고 깃발 네 모서리에는 프로이센 독수리 2마리와 황제관 2개씩이 각각 그려졌다.

그러나 곧 이 디자인에 항의가 들어왔다. 제국의 문장학 최고 권위자였던 그라프 스틸프리트는 붉은색 문장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다. 독일 황제의 색은 금빛이어야지 붉은색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 스틸프리트는 자고로 황제라면 색 중에서 최고로 고귀한 금빛을 써야한다고 주장했고, 빌헬름 1세가 이를 수용하며 1871년 10월 15일 새로운 2번째 디자인이 발표됐다. 바탕의 색 뿐만 아니라 방패문의 색깔도 금빛으로 바뀌었다. 모서리에도 가슴에 문장이 없는 3개의 제국독수리와 황제관 1개씩을 박아넣는 것으로 디자인이 변경됐다.

그렇게 황제기는 프리드리히 3세 시절까지 17년 동안 잘 쓰이다가 빌헬름 2세가 즉위하면서 또다시 바뀐다. 빌헬름 2세는 황제기에 관심이 대단히 많았고 1888년 12월 6일 황제기의 디자인을 '현대화'하기로 결정했다. 제국독수리의 모양이 바뀌었고 황제관의 디자인도 조금 변형됐다. 이 세 번째이자 마지막 디자인은 1918년 제국이 붕괴할 때까지 30년 간 쭉 사용됐다. 이 황제기는 황제가 있는 곳이라면 모든 곳에 사용됐다. 건물에 게양하거나 자동차에 부착하거나 배에도 게양했다.[19] 황제기가 마지막으로 사용된 것은 1918년 11월 10일, 황제가 네덜란드로 망명할 때였다. 자동차 펜더에 황제기를 장착한 채 달리던 황제는 독일 국경을 떠날 때 국경수비대에게 황제기를 넘겨달라고 요구받았다고 한다.[20]

2.3.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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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국장

독일 제국의 국장
파일:독일 황제 문장.png 파일:Wappen_Deutsches_Reich_-_Reichswappen_(Mittleres).svg.png 파일:독일 제국 국장(1889).svg
<rowcolor=#000> 대형 국장 중형 국장 소형 국장
국장에서 보이는, 풀로 엮은 관과 로인클로스를 입은 채 나무몽둥이를 들고 있는 반라의 두 남성은 '야생인(Wild man)'이다. 프로이센 왕국 문장에도 등장하는 나름 유서깊은 캐릭터들로 게르만켈트 신화에서 자연, 짐승들의 군주, 숲에서 오염되지 않은 채 태곳적 모습 그 자체로 살아가는 고귀한 인간을 상징한다. 옛 그리스 신화의 사티로스나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숲의 신 실바누스와도 연결된다. 문명을 접하지 않아 털이 몸 전체에 부숭부숭 나있는 야만적인 동시에 고귀한, 신비로운 캐릭터다. 1701년 프리드리히 1세포메라니아 혹은 덴마크의 문장에서 따오면서 프로이센 국장에 처음 등장했고,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한 이후에도 그대로 독일 제국의 국장에 사용됐다.

대형 국장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다음과 같다. 검독수리와 제국관이 작게 그려진 황금빛 맨틀이 문장 전체를 감싸고 있으며 맨틀 맨 꼭대기에는 독일 제국관과 흑백적기를 세로로 세워놓았다. 맨틀에는 'Gott Mit Uns', 독일 제국의 표어를 새긴 띠가 둘러졌다. 풀관과 풀 로인클로스를 입은 채 깃대를 짚은 야생인 2명이 방패잡이로 양 옆에서 서있다. 야생인들이 쥔 깃대에 달려있는 깃발들은 왼쪽은 프로이센 왕국의 검독수리 깃발, 오른쪽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붉은 독수리 깃발이다. 그 중앙에는 제국관을 쓴 황금빛 방패문이 있다. 방패문 안에는 제국 검독수리가, 검독수리의 가슴에 박힌 자그마한 백색 방패문 안에는 프로이센 검독수리와 호엔촐레른 가문의 문장이 그려져있다. [21] 황금빛 방패문을 둘러싸고 있는 사슬은 제국 최고의 영예였던 검독수리 훈장의 사슬이다.

중형 국장은 대형 국장에서 맨틀 및 외부 요소들을 모두 빼버리고 야생인 2명과 황금빛 방패문, 방패문 안의 검독수리만을 남겨놓은 모습이다. 야생인들이 들고 있던 깃대도 나무 몽둥이로 바뀌었다. 문장 맨 아래의 훈장은 여전히 검독수리 훈장이다. 소형 국장이 가장 유명하고 흔하게 쓰였던 국장으로, 그냥 제국관을 쓴 제국검독수리를 묘사하고 있다. 기념주화나 마르크화에 찍혔던 문장도 바로 이 것. 제국검독수리가 검독수리 훈장 사슬을 목에 두른 모습으로, 가슴팍에 박힌 하얀 방패문에는 프로이센 검독수리와 호엔촐레른 가문의 흑백 문장이 작게 그려졌다.

3.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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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헌법

파일:Bundesarchiv_Bild_102-11019,_Verfassungsurkunde_des_Deutschen_Reiches.jpg
<rowcolor=#fff> 비스마르크 헌법의 첫 번째 장과 마지막 장[22]
비스마르크가 설계한 독일 제국의 헌법은 기본적으로 많은 부분을 개방적으로 남겨 두었고, 특히 각 기관 간 갈등을 조정하는 데 있어서 그러했다. 이에 따라 독일 제국의 헌정은 군주, 총리, 연방참사원(상원), 제국의회(하원)과 같은 각 권력 기관 간의 의사 결정 권한을 둘러싼 투쟁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매우 역동적인 변화를 겪었다. 이러한 개방적인 헌법은 한편으로 유연성을, 다른 한편으로 예측 불가능성을 특징으로 하는 정치 문화의 형성을 의미했다.

독일 제국의 헌법은 전통적인 군주 주권 이념과 새롭게 떠오르는 자유주의 시민 계급을 중심으로 한 인민 주권 및 입헌주의 간 타협의 산물이었다. 19세기 중반 프로이센의 법학자 프리드리히 율리우스 슈탈(Friedrich Julius Stahl, 1802-1861)은 전통적인 군주 주권과 인민 주권의 양립을 모색하면서 인민 주권과 대의제 원칙을 수용하면서도 주권의 통일적 대표로서 군주를 규정하는 군주제 원칙(Monarchisches Prinzip) 이론을 제시하여 입헌 군주제의 이론적 기반을 마련했다. 자유주의적 참정권 요구와 민족주의적 통일 요구를 동시에 실현해야 했던 독일의 정치 상황 속에서 독일의 자유주의자들은 통일을 위해 대의제 원칙을 한발짝 양보하고 군주제 원칙을 수용했고, 이러한 타협으로 탄생한 독일 제국의 정치 체제는 기본적으로 군주제 원칙에 입각한 입헌주의(Konstitutionalismus)라고 할 수 있다.

독일 제국의 입헌주의는 의회가 내각에 대한 통제권을 지니는 영국식 의회주의(Parlamentarismus) 및 의회 주권과 대비하여 군주의 통치권을 인정하면서도 입헌주의와 대의제 원칙에 입각하여 헌법과 의회가 군주 권력의 견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오토 힌체는 이러한 독일식 입헌군주제를 프로이센-독일적 체제로 규정하면서도 그 독자적인 헌법-정치적 형태를 강조했다. 반면 법학자 에른스트-볼프강 뵈켄푀르데(Ernst-Wolfgang Böckenförde, 1930-2019)는 독일 제국의 입헌주의를 군주제와 의회 민주주의 사이의 과도적 체제로 평가하면서도, 혁명과 같은 급격한 단절 없이 지속적인 변화를 이룰 수 있었다는 것에서 그 의의를 찾았다.[23]

한편으로 독일 제국 수립의 또다른 과제는 연방주의 및 분권적 전통 및 중앙 집권적 통일 국가의 수립 간의 긴장을 조정하는 것이었다. 비스마르크는 기본적으로 독일 제국을 프로이센의 헤게모니를 유지한 제후연합(Fürstenbund)을 염두에 두고 구상했다. 그는 그러한 의도를 관철하기 위한 핵심 기관으로 상원인 연방참사원(Bundesrat)을 설계했다. 연방참사원은 독일 제국의 연방주의적 질서를 반영하여 구성국의 대표단에 의해 대표되었는데, 전체 58석(1911년 이후 알자스-로렌이 추가되어 61석) 중 17석만이 프로이센에 안배되어 있었다. 이는 독일 제국 영토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인구 역시 60% 이상을 점유하고 있던 프로이센의 비중을 고려했을 때 다른 구성국에 대한 배려가 어느 정도 반영된 것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거부권을 행사하는 데 있어서는 14표만이 필요했기에, 프로이센의 헤게모니 역시 반영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연방참사원은 점차 제국정부의 부차적 존재로 중요성을 상실했고, 하원인 제국의회(Reichstag)가 중요한 플레이어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제국의회는 급격한 산업화와 그로부터 비롯되는 다양한 사회 문제에 직면한 신생 국가의 입법 기관으로서 빌헬름 시대를 지나며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아울러 여기에는 비스마르크 자신이 도입했던 제국의회의 25세 이상 남성 보통 선거제가 촉발한 대중의 정치화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제국의회 선거의 투표율은 1871년 51%에서 마지막 선거였던 1912년에는 85%를 넘어섰다. 비스마르크가 남성 보통 선거제를 도입한 본래 의도는 농민의 지지를 받는 보수 정당을 지원하고 자유주의 정당을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의회주의 도입 이전에 민주주의적 원칙이 확대된 것[24]은 세계사적으로도 이례적이었다.[25] 하지만 비스마르크의 문화투쟁, 사회주의자법과 같은 소수자 집단 탄압 정책은 가톨릭 교도와 노동자 집단을 정치적으로 결집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중앙당과 사회 민주당은 제국의회의 주요 정당으로 부상했다. 이러한 구도는 명백히 비스마르크의 원래 의도와는 상반되는 결과였다.

제국의회의 부상하는 중요성과는 별개로, 제국의회는 황제 및 총리를 중심으로 한 제국정부에 대한 통제력을 가지지 못했다. 총리는 황제에 대해서만 책임을 졌으며, 독일 제국은 영국식의 '행정에 대한 입법부의 통제'를 이루지 못했다. 빌헬름 2세 시대 후반기 오일렌부르크 스캔들, 데일리 텔레그래프 사건, 차베른 위기와 같은 일련의 스캔들은 황제의 통치력에 대한 의문을 유발했고, 의회의 행정 권력 통제 문제는 프로이센 하원에서 유지되고 있던 불평등한 3계급 선거제(Dreiklassenwahlrecht)와 함께 독일 제국 최말기의 중요한 정치 개혁 논의로 부상했다.

독일 제국의 헌정이 의회주의로 발전할 수 있었느냐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팽팽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독일 제국 당대에 이미 게오르크 옐리네크막스 베버 등의 좌파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영국식 의회화를 요구하고 있었고, 1차 세계 대전 당시 사회 갈등이 심화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의회제 개혁이 이루어지긴 했다. 이에 대해 서독 시기 역사가 만프레트 라우(Manfred Rauh, 1942-)[26]는 1977년 저작 독일 제국의 의회화(Die Parlamentarisierung des Deutschen Reiches)에서 독일 제국 헌정의 '조용한 의회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2000년에는 미국 역사가 마거릿 라비니아 앤더슨(Margaret Lavinia Anderson, 1941-)이 독일 제국의 선거를 분석한 기념비적인 저작 민주주의의 연습(Practicing Democracy)에서 남성 보통 선거제의 파급력을 강조하면서 1차 세계 대전이 없었다면 빌헬름 2세가 사망하는 1941년 즈음 독일 제국이 프랑코 사후 에스파냐와 비슷한 의회주의로의 전환을 이룩했을 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반론 역시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으며, 앤더슨의 저작 발표 이후 사회사 계열의 역사가 폴커 베르크한(Volker R. Berghahn, 1938-)이 이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며 논쟁이 이어졌다. 가장 최근에는 2021년 독일 제국 건국 150주년을 앞두고 그 전해인 2020년에 독일 제국 관련 저작이 쏟아져 나오면서 불거졌는데, 그 중심에는 독일 제국의 민주주의를 매우 낙관적으로 평가한 역사가 헤트비히 리히터(Hedwig Richter, 1973-)의 저작 민주주의: 독일의 사례(Demokratie: Eine deutsche Affäre)가 있었다. 리히터의 저작은 학술적으로 엇갈린 평가를 받았는데, 특히 마르부르크 대학의 역사가 에카르트 콘체(Eckart Conze, 1963-)는 리히터의 주장을 맹렬하게 비판하면서 독일 제국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한 독일 제국의 그림자(Schatten des Kaiserreichs)를 출간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같은 시기 나온 독일 제국 헌법사를 다룬 뛰어난 저작으로 평가받는 올리버 하르트(Oliver F.R. Haardt, 1988-)[27]의 비스마르크의 영원한 동맹(Bismarcks ewiger Bund) 역시 독일 제국 헌정 변화의 특징 중 하나로 '제국권력의 의회화'를 제시하고 있는 만큼, 이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논란이 지속 중이다.

독일 제국(프로이센)의 헌법은 동아시아 법체계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일본 제국이 독일제국의 헌법을 참고해 대일본제국 헌법을 제정하고[28], 이 대일본제국 헌법을 다시 청나라흠정헌법대강을, 대한제국대한국 국제를 만드는 데 참고하게 된다.

5. 정치

파일:독일 제국의 정치 구조.png

5.1. 황제

독일 제국의 황제는 1871년 만들어져 1917년 폐지될 때까지 독일 제국의 국가원수이자 최고권력자로서, 프로이센 왕국의 국왕이 당연 겸임했다. 제국과 황제의 칭호는 옛 신성 로마 제국을 바탕으로 신생 제국에게 화려한 권위를 덧씌우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었으나,[29] 신생 독일 황제의 권력은 옛 신성 로마 제국의 허약한 황권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러나 빌헬름 2세 등은 그렇게 생각했을지 몰라도 황제는 독재자가 아니었다. 황제는 기본적으로 입헌군주제 내에서 역할을 수행했고, 실질적인 행정은 황제가 임명한 수상의 영역이었다. 황제의 명령 대부분은 수상의 부가 서명, 즉 부서가 있어야 효력을 발휘했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1806년 황제가 무너진 이후, 프랑스는 강력한 하나의 지도자 아래에 통합되어 있는데 어째서 독일은 이합집산 분열된 채 머물러야 하는지에 대한 비판이 커졌다. 사람들은 옛 강력했던 호엔슈타우펜 왕조프리드리히 1세가 다시 강림해 다시 독일을 하나로 통일할 것이라는 낭만적인 설화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원정에서 나폴레옹의 기세가 꺾이자 더이상 독일인들의 제국을 부활시키는 것도 어렵지 않아 보였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하르덴베르크 수상은 나폴레옹 전쟁 도중 중립을 유지하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을 끌어들이기 위해 새로 창설할 독일 제국의 황제위를 제안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프로이센도 다시 오스트리아의 간섭 아래 놓일 생각이 전혀 없었고, 오스트리아 역시 온갖 쓸데없는 군사적, 외교적 마찰에 휘말리기만 하는 독일 황제위를 다시 떠맡을 생각이 없었기에 이 제안은 유야무야 사라지고야 만다.

그러다가 1848년의 혁명으로 다시 한번 독일 황제에 대한 논의가 등장했다. 하지만 이는 국민들에 의해 선출된 의회가 당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를 황제로 '추대'한 것으로, 국민이 나라의 주권자로서 그 대표인 황제를 추대했다는 점에 강조가 되어있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이런 '혁명적'인 사상을 용납할 수 없다는 이유로 황제 추대를 거부했다. 황제로 추대가 된다면 어디까지나 같은 제후나 국왕들에게 추대가 될 일이지, 아랫것들인 국민들에게 추대받아 황제가 될 생각은 없다는 뜻이었다.[30] 황제 추대 시도는 무산되었지만 이는 독일이 프로이센 중심의 소독일주의와 오스트리아 중심의 대독일주의로 통일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쥐벨-파커 논쟁을 불러일으켰고,독일 통일과 황제 옹립에 대한 논의는 점차 무르익어갔다.

독일은 1870년에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남독일 지방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몰아내고서 제국을 선포할 수 있었다. 당시 총리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1세를 황제로 추대하려 들었다. 독일을 통일한 프로이센 국왕이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작센 국왕과 똑같은 직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역사적으로 황제라는 직함에 익숙하던 남독일의 제후들은 프로이센 국왕보다 독일 황제를 더 잘 인정할 것이었다. 비스마르크는 약간의 양보와 함께 남독일 제후들에게서 빌헬름 1세의 황제 옹립을 찬성한다는 동의를 받아냈고, 1870년 11월 독일의 2인자격인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가 빌헬름 1세에게 황제위를 받아달라는 서한을 공표하며 새로운 독일 제국의 황제 옹립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당시 빌헬름 1세는 북독일 연방의 의장직을 겸하고 있었는데 국민들은 이것이 1866년에 해체된 독일 연방과 그 분열상을 연상케 한다고 해서 싫어했다. 그랬기에 이제 빌헬름 1세는 황제로 승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정작 빌헬름 본인은 황제 즉위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는 독일 제후 모두의 동의가 없다면 황제 자리에 오르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고, 새 제국이 옛 신성 로마 제국이 아닌, 오스트리아 제국이나 프랑스 제2제국처럼 '근본없는' 제국이 될까봐 황제 즉위를 망설였다. 그는 그가 받아들 독일 제위가 '지난 천년간 지속되어 왔고 1806년 이후 잠시 공석일 뿐'인 독일 황제 자리라는 프리드리히 3세의 설득 끝에야 겨우 즉위를 찬성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nton_von_Werner_-_Kaiserproklamation_in_Versailles_1871.jpg
<rowcolor=#fff>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을 선포하는 빌헬름 1세
독일 의회는 1870년 12월 10일 그동안 사용된 '연방 명령권(presedium)'이라는 애매모호한 명칭을 폐지하고 '독일 황제'로 교체했으며 동시에 북독일 연방을 '독일 제국'으로 바꾸었다. 헌법은 1871년 1월 1일부터 발효되었기에 빌헬름 1세는 1월 1일부터 독일 황제위를 획득했다. 그리고 그해 18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대관식을 치르며[31][32] 빌헬름은 독일 황제 즉위를 만방에 공표하게 된다. 그러나 여러 개의 제후국들이 하나로 모인 제국인 탓에 황제의 권한은 옛 앙시앵 레짐 시대만큼 절대적이지는 않았다. 황제는 어디까지나 연방 내의 정치기관들 중 하나이자 모든 구성국의 군주들 중 '동등한 가운데 첫 번째(Primus inter pares)'에 불과했다. 황제는 명시적으로는 제국의 수장이 아닌 공동 주권자로 이해됐다. 황제는 헌법상으로 미묘한 지위에 놓여있었다. 공동 주권자이기 때문에 공화국의 대통령과는 거리가 멀었고 단독 주권자가 아니기에 아예 전제군주라고 할 수도 없었다.

독일의 황제는 공식적으로 입헌군주이자 제국의 국가원수였다. 그러나 독보적인 존재가 아닌, 연방참사원(상원)과 제국의회(하원), 그리고 수상과 함께 연방을 이루는 여러 축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또한 황제 직위는 헌법 제11조에 따라 프로이센 국왕이 당연히 겸직했는데, 이로써 프로이센은 제국의 연방 원칙과는 모순적이지만 제국 내에서의 우위를 보장받았다. 황제는 광범위한 행정권을 가졌다. 헌법 제53조와 제63조에 따르면 황제는 육해군의 최고 지휘권자였다. 제15조에 따라 제국 수상을 마음대로 임명하고 해임할 수 있었으며 제11조에 따라 의회와 함께 전쟁 선포와 평화협정 체결을 할 권한이 있었다. 게다가 12조에 따라 연방참사원과 제국의회를 소집, 해산할 권리까지 있었다. 다만 절대적이지는 않았다. 제17조에 따라 황제의 명령은 수상의 부서가 있어야했다. 그리고 제24조에 따라 제국의회를 해산하기 위해서는 연방참사원의 동의를 받아야만 했다.

황제는 법을 공포하고 이를 실행할 책임이 있었다. 제68조에 따라서 지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할 권한도 있었다. 황제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기 전 누구와 협의해야한다는 규정은 헌법에 없었다. 빌헬름 1세는 주로 비스마르크와 협의했으나 빌헬름 2세는 개인 참모들에 더 의존했다. 황위 계승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섭정이나 퇴위 시 어떤 일이 일어날 지는 불분명했다. 그랬기에 제국 헌법 대신 프로이센 왕가의 왕위세습원칙을 담은 프로이센 헌법을 대신 적용했다. 프로이센 헌법에는 제43조에 대놓고 국왕이 '불가침'의 존재라고 적혀있었기에 이를 적용받는 황제 역시 형사 법정에 회부될 수 없었다. 제국의 육해군은 평시나 전시나 항상 황제의 지휘를 받았으나 독일 통일 당시 군사 특혜를 적용받은 바이에른은 예외였다. 형사 불가침의 황제가 직접 총사령관으로 행동했기에 의회는 황제가 임명한 장관, 장군의 책임을 묻거나 절차의 의무를 따질 수 없었다.

프로이센 국왕이 독일 황제라는 새로운 직함을 받았음에도 빌헬름 1세의 궁정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전통적인 프로이센 의례는 1888년까지 대부분 남아있었으며 제국 궁정은 전적으로 프로이센 예산에 의존했다. 빌헬름 1세는 지역 대리인을 강화하고 일부 궁정들을 신설한 것을 제외하면 기존의 엄격하고 까다로운 프로이센 궁정을 그대로 유지했다. 오히려 제국이 건국된 이후 의례는 더욱 까다로워졌는데, 1878년 궁정 서열 목록에는 무려 62개의 서열계급이 매겨졌으며[33] 귀족이 아닌 기업가와 은행가들은 황제와 대면할 수는 있어도 궁정의 일원이 되지는 못했다. 황제의 정궁은 여전히 베를린 궁전이었으며 궁전 내의 화이트홀에서 제국의회와 무도회를 개최했다.
파일:Berlin-BerlinerSchloss-2-Asio_(cropped).jpg
파일:Schloß Berlin Weißer Saal.jpg
<rowcolor=#fff> 베를린 궁전 베를린 궁전의 중심인 화이트홀
독일 황제의 정궁은 베를린 궁전이었으나, 베를린 정궁 외에도 다양한 궁궐을 사용했다. 예를 들어 빌헬름 1세는 가을과 봄 사이에는 베를린의 고궁에서 살았고, 봄과 여름은 바벨스부르크 궁전에서 거주했으며 바트엠스, 바트가슈타인, 바덴바덴 등의 유명한 온천을 찾아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빌헬름 2세는 주로 베를린 궁전에서 거주했으나 본인과 황실 가족들을 위해 수많은 행궁들을 지었다. 포츠담 근처의 노이에스 팔레나 바트홈부르크 궁전, 카셀 근처의 빌헬름회헤 궁전 등이 대표적이다.

황제는 제국의회 개회식을 위해 의원들을 베를린 궁전으로 초대했다. 국왕이 국회의사당인 웨스트민스터 궁전으로 갔던 영국과는 정반대로, 황제가 국민들의 대표들보다 위에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알려주는 행위였다. 의회 군주였던 영국 국왕과 달리 황제권에 대한 헌법적 제한을 마지못해 받아들인 독일로서는 황제가 의원들을 보러 직접 이동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행위였다. 또한 모든 의례는 엄격한 의식과 딱딱한 제복 차림의 프로이센식으로 치러졌다. 이는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사회민주당과 좌파 자유주의 진영 의원들은 물론, 문화 투쟁 당시에는 중앙당 의원들마저 이에 반발해 개회식에 불참했다. 뿐만 아니라 개회식에 오직 프로이센의 휘장과 레갈리아만이 등장한다는 비판이 남독일 중심으로 나오자, 황제는 이들을 달래기 위해 고슬라르의 중세 왕좌[34]를 베를린으로 옮겨 사용했으며 캐노피도 특별히 제국 황관을 새겨넣은 것으로 교체하라고 지시했다.

제국 헌법은 1918년까지 거의 변동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독일 황제의 권력은 크게 바뀌곤 했다. 제국 수상은 의회가 정부에 협조하지 않을 시 황제에 의존해야만 했고 그 비스마르크조차 1880년대 황제의 신임을 받지 못해 쩔쩔매야했다. 반면 의회가 수상과 한 편을 먹었다면 딱히 황제에게 크게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며 독일 제국의 전반적인 중앙집권화는 황제의 권한을 강화했다. 예를 들어 조례와 법령 반포는 상원의 역할이었다. 만일 어떤 기관이 해당 법 분야를 관장하는지 확실치 않았다면 이는 자동으로 상원의 몫이었다. 그러나 1870년대와 80년대에 법이 개정되어 상원 대신 황제에게 그 권한이 옮겨갔다. 황제 개인에게 권력을 몰아줘 법적으로 불분명한 상황이 닥칠 경우 빠르게 문제를 해결하도록 한다는 명분이었다. 결과적으로 황제의 권한은 초기 헌법에서 명시한 것보다 훨씬 강대해졌다. 황제권의 강화와 함께 구성국들에 대한 제국 중앙정부의 권한 역시 함께 강화되었다.

5.2.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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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베를린의 수상 관저[35]
제국수상은 그 기원을 프랑크 왕국 시절로 거슬러올라가야 할만큼 오래된 작위다. 카롤링거 왕조 시절 팔츠의 성직자 수장에게 궁정의 행정 실무를 도맡기기 위하여 '재상'이라는 직함을 주어 불렀고, 이는 황제의 증서와 대장을 발행하는 업무를 보았다. 루트비히 2세부터는 마인츠 대주교가 제국의 '대법관', 즉 실질적인 재상을 겸임하기 시작해 나폴레옹 전쟁 시기까지 약 900년간 이를 유지했다.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의 붕괴와 함께 제국 재상은 함께 소멸했으나, 여전히 오스트리아[36]프로이센에는 각기 총리직이 있었다. 이중 프로이센의 총리가 북독일 연방 수상을 거쳐 마침내 독일 제국의 수상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37]

1867년 7월 1일에 창설된 북독일 연방에는 '연방수상(Bundeskanzler)'이라는 직이 있었는데, 이 직을 맡은 유일한 사람이 바로 오토 폰 비스마르크였다. 그는 프로이센 총리로서 연방 수상직을 겸임했다. 불과 3년 뒤인 1871년 1월 1일 북독일 연방이 독일 제국으로 승격했으나 제국 헌법에는 여전히 연방수상이라고 명기되어 있었고 비스마르크 역시 그대로 수상직을 유지했다. 3개월 뒤인 1871년 4월 16일 개헌을 거쳐 연방수상을 제국수상(Reichskanzler)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명패만 바뀌었을 뿐 사실상 똑같은 직위였기에 비스마르크는 다시 재임명받을 필요조차 없었다.

제국수상은 황제의 최선임 장관이자 상원의장을 겸직했다. 수상은 하원, 즉 제국의회에서 임명되지도 않았고 따라서 의회에 정치적 책임을 지지도 않았다. 수상은 황제가 임명했고 따라서 법적으로는 오직 황제에게만 책임을 졌다. 명목상 독일 제국은 여러 구성국들이 모여만들어진 연방 국가로, 때문에 엄격하게 따지자면 구성국의 제후들을 대리해 파견된 상원의원들이 심지어 수상보다도 서열이 높았다.[38] 비스마르크가 수상으로 재직하는 내내 프로이센 총리직을 끝까지 붙들고 놓지 않은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름만 거창한 제국수상 대신 실권을 가진 프로이센 총리 자격으로 상원을 조종하려 들었던 것이다. 프로이센은 상원에서 무려 17표를 가지고 있었고, 아예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군소 제후국들을 잘 구슬리면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상원을 이끌어나갈 수 있었다.

애초에 '수상(kanzler)'은 '총리(Ministerpräsident)'보다 은연중에 격이 낮은 자리였다. 구성 제후국들의 정부수반들은 프로이센 총리, 바이에른 총리처럼 총리라는 직함을 썼지만 정작 제국은 수상을 사용했다. 이는 본질적으로 연방국가였던 독일 제국에서, 구성국 제후들이 '제국 총리'라는 본격적이고 완전한 중앙집권적 자리가 생겨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었다. 결국 수상이라는 직함은 기본적으로 독일 제국이 매우 군주적, 관료적이며 반의회적인 국가라는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제국 중앙정부는 구성국들의 눈치를 보느라 '부'나 '부처' 대신 격이 낮은 '청'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했다.[39] 똑같은 이유로 제국정부에서 오직 수상만이 유일한 장관급 인사였고 나머지는 모두 차관급이었다.[40] 이러한 모순은 1918년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선 이후에야 청이 부로 승격하고 차관도 장관으로 승격하면서 해소된다.

수상의 권한과 역할은 시대마다 달라졌다. 다만 수상은 1867년부터 1918년까지 제국 차원의 유일한 장관급 인사로서 언제나 정국의 핵심이었고, 제국의회와 끊임없이 충돌하며 독일 제국을 이끌어나가는 정부의 수장이었다. 헌법에 명시된 수상의 권한은 오직 하나, 상원을 주재한다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영향력은 별개로 훨씬 커서 제국정부의 각료들, 즉 청장(Staatssekretäre)들을 황제에 제청해 임명, 해임할 수 있었다. 수상의 권력은 수상 그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겸임직인 프로이센 총리직에서 나왔다. 프로이센 총리직이야말로 수상 권위의 원천이자 실질적인 권력이라 레오 폰 카프리비 수상의 경우 황제와의 충돌로 프로이센 총리직을 빼앗기자 맥을 못추다가 2년 후에 수상직을 잃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나라가 망할 판이 되자 10월 29일에 개헌을 하여 상원과 하원에게 수상을 해임할 권한이 주어졌다. 그러나 이는 이미 곧 며칠 뒤에 일어난 독일 11월 혁명을 막기에는 역부족인 땜질식 미봉책에 불과했다. 혁명이 일어나자 11월 9일 막시밀리안 폰 바덴 수상은 수상직을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에게 넘겼다. 에베르트는 1918년 11월부터 약 3개월 동안 제국 최후의 수상으로 재직했다. 그는 빌헬름 2세의 퇴위, 제국의 붕괴와 11월 11일 휴전 협상 시작, 1919년 2월 새 국민의회의 개최로 바이마르 공화국이 설립될 때까지 사실상의 정부수반 노릇을 했지만 재직 중에 '수상'이라는 단어를 쓰지는 않았다. 이후 독일 제국의 수상직은 바이마르 공화국나치 독일을 거쳐 현재의 독일 총리로 이어진다. 명칭(Kanzler)만 같을 뿐 타 의원내각제의 총리와 다를 바 없는 직위가 되었다.

5.3. 입법부

5.3.1. 연방참사원(상원)

파일:Reichstag-1870_crop.jpg
파일:800px-Bundesrat-1894.jpg
<rowcolor=#fff> 제국의사당과 상원 회의 모습
연방참사원(Bundesrat)은 제국의 상원이자 독일 제국을 모여 이루는 제후국들의 대표단으로 구성된 일종의 의회였다. 여러 구성국들이 모인 독일 제국의 정치 체제상, 이 구성국들의 대표가 모인 상원은 적어도 헌법상으로는 제국의 최고 기관이었다. 제국법이 발효되려면 상원과 하원의 승인이 필요했으며 상원은 황제와 하원의 행위에 발언권이 있었다. 또한 일종의 헌법재판소 역할도 맡았다.

헌법상으로는 제국의 최고 기관이었으나 실질적인 정치적 권한은 훨씬 약했다. 상원의장은 제국수상이 맡았는데, 수상은 회의를 주재하고 상원이 내린 결정을 수행하는 역할만을 맡았다. 수상은 정부수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원의원도 아니었고 투표권, 법률 입안건도 없었다. 그러나 관례적으로 제국수상은 자동으로 프로이센 총리를 겸임했고, 때문에 수상은 프로이센 대표의 직위로 상원에 참석해 법안을 발의하거나 투표할 수 있었다. 상원은 전체 58석이었는데 개중 17석이 프로이센 차지였다. 물론 가장 많은 의석을 배분받기는 했지만, 제국 전체 면적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프로이센의 입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적은 비율이었다. 따라서 수상이 상원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프로이센 단독으로는 불가능했고 다른 구성국들의 지지를 받아야만 했다.[41]

상원은 단순한 입법부가 아니어서 헌법에 의해 입법권과 행정권까지도 부여받은 기관이었다. 상원은 하원과 함께 제국의 법률을 제정하고 재정 및 예산안을 심의 및 통과시킬 권한이 있었다. 국제 조약 체결, 전쟁 선포에도 관여했으며 황제가 하원을 해산하고자 할때 상원의 찬성을 먼저 얻어야 했다. 법적 규정과 조례 제정, 행정법들을 제정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고 제국의 공무원 임면에도 상원의 동의를 거쳐야 했다. 제국의 구성국들이 그 의무를 이행하도록 강제하기 위한, 즉 무력 행사 역시 상원의 동의를 거쳐야하는 항목이었다. 1877년 이래로 엘자스로트링겐 제국영토는 자치법으로 다스렸지만, 이 자치법도 결국 황제가 반포하는 것이었고 이에는 상원의 동의가 필요했다. 제국에는 헌법재판소가 없었기에 비스마르크는 헌법재판소의 역할도 상원에 떠맡겼다. 구성국들 간 비사법 분쟁에 대한 결정, 구성국들 내 헌법 분쟁에 대한 결정, 구성국 내에서 재판이 거부되는 경우 사법 지원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구성국들 사이의 분쟁이 날 경우 그 대표들이 모인 상원에 맡기는 것이 명분상으로 적절했고, 때문에 상원은 제한적이지만 사법부의 역할도 동시에 맡았다.

각각의 제후국은 상원에서 최소 1표씩을 받았다. 1표 이상을 받았을 경우, 각 제후국 내에서 반란표는 허용되지 않아 한 나라의 대표단은 모두 동일한 입장으로 투표해야 했다. 재적 의원의 과반수가 찬성하면 안건이 통과됐고 만에 하나 찬성 반대가 반반일 경우 프로이센이 안건을 결정했다. 보통 대표단은 제후국의 총리가 맡았으나 꼭 그래야할 필요는 없었다. 비스마르크는 구성국들이 각국 국무장관들을 보내 상원의 권위를 강화해주기를 바랐으나 각지 국가들은 대신 베를린에 주재하던 관리나 특사를 보냈다.[42] 또한 상원의원은 하원의원을 겸직할 수 없었다. 수상과 국무장관들이 상원의원인 경우는 많지 않았지만, 이는 의원내각제처럼 행정부가 의회와 융화되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를 냈다.[43] 1918년 10월 개혁에서도 이 조항은 계속 유지되었지만 국무장관들은 상원의원이 아니어도 상원에서의 발언권을 부여받았다.

원래 제국 상원은 북독일 연방 상원을 그대로 계승한 것으로 1871년 이전까지는 총 43석이었다. 그러나 1871년 제국이 선포되고 구성국들이 속속 상원에 대표단을 보내면서 상원의석은 총 58석까지 확대됐다. 프로이센 왕국 17석, 바이에른 왕국 6석, 작센 왕국 4석, 뷔르템베르크 왕국 4석, 바덴 대공국 3석, 헤센 대공국 3석,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 2석,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2석, 이외 나머지 17개 구성국에서 1석씩 총 17석, 이렇게 총 58석을 배분했다. 그러다가 1911년에 엘자스로트링겐 제국영토도 무려 3표를 얻으면서 제국이 붕괴할 때까지 늘어난 61석으로 계속 유지됐다. 의외로 종주국인 프로이센의 투표 수가 그렇게 높지 않았다. 프로이센의 의석 배분율은 갈수록 떨어져 1867년에는 무려 의석 40%를 독차지하고 있었던 것에 비해 1871년에는 30%, 1911년에는 28%로 떨어졌다. 독일 제국 전체 인구와 영토 3분의 2를 프로이센이 독차지하고 있었던 것에 비하면 그 비율이 확연히 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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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1889년 독일의 제후국들이 선출한 상원 특명전권대사들의 사진[44]
상원에는 여러 개의 소위원회가 있어서 중요 안건들은 본회의에서, 관련 안건들은 해당 위원회에서 심사했다. 일부 위원회들은 설치 근거가 조례가 아닌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기관일 정도로 중요도가 높았다. 바이에른 왕국은 1870년 제국에 가입하면서 그 조건으로 외교위원회 위원장직을 스스로 가져갔으나, 그렇다고 해서 독일 외교에 큰 영향력을 끼치지는 전혀 못했다. 프로이센이 나머지 모든 위원회들의 위원장직을 겸했다. 당시 상원의 위원회 목록은 다음과 같다. 육군 및 요새 위원회, 해군 위원회, 관세 및 조세 위원회, 무역 및 운송 위원회, 철도, 우편 및 전신 위원회, 사법 위원회, 회계 위원회, 외교 위원회, 엘자스로트링겐 위원회, 헌법 위원회, 철도화물 관세 위원회 등이 있었다.

본디 비스마르크는 상원을 구상할 때 국가 최고기관으로 만들려 했다. 헌법상으로 독일 제국은 여러 군주들이 모인 귀족군주정이었고, 이 군주들의 대표가 모인 연방참사원이 최고 기관이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 상원은 사실상의 행정부 역할을 할 것이었고 실현되었다면 옛 독일 연방의 의회와 훨씬 유사했을 것이다. 비스마르크는 초창기 상원의장과 수상은 실권이 없고 프로이센 대표가 시키는 대로 하는 꼭두각시로 구상했다. 자신이 프로이센 총리 자격으로 상원의원이 되어 수상과 상원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그림을 그렸던 것. 실제로 옛 북독일 연방의 프로이센 특사였던 카를 프리드리히 폰 사비니를 수상으로 추천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의회는 이런 정치구조는 의회가 정부의 책임을 묻기 어려울 것이라 우려했고[45] 비스마르크와의 협상을 통해 수상이 의회에게 책임을 지는 실질적인 직위로 만들었다.

애초에 수상직의 시작이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었으니 제국 수상직 자체로는 실질적인 권한이 많지 않았다. 제국 수상은 상원에서 발언할 권리, 의회에 법률 원안을 제출할 권리도 없었고 법률에 대한 거부권, 의회 해산권조차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제국 수상은 곧 프로이센 총리였다는 것. 제국 수상은 프로이센 대표 자격으로 상원의원직을 겸직했고 상원 발언권과 법안 제출권을 얻어냈으며 상원에서 17표를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 이러한 애매모호한 눈가림으로 제국 수상은 상원에 막대한 영향력을 휘둘렀다. 수상은 외부에 단합된 독일을 보여주기 위해 상원을 항상 정중히 대했고 의원들은 소수 의견을 발언록에 남기지 않았다.[46]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진 직후인 1914년 8월 4일 하원은 상원에게 '전시와 같은 상황에 한정해 경제적 조치를 취하고 환어음 및 수표 기한 연장에 관한 권한' 즉 상원과 하원이 공동으로 나누어 가지던 입법권 모두를 상원에 이양하겠다는 일종의 수권법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수권법이 언급하는 '경제적 조치'의 범위가 워낙 애매모호해서 상원은 상당한 권한을 이양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나 그 권한을 남용하지는 않았다. 상원이 하원에 비상조례를 제출하면 보통 반대 없이 통과됐다. 상하원은 전시 같은 민감한 시기에 서로 부딪히는 것을 꺼렸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918년 11월 10일 수상관저에서 열린 '인민대표평의회'[47]가 페렌바흐 하원의장을 불러 하원 해산을 명령했다. 하원을 해산하기 위해서는 상원의 동의가 필요했는데, 상원은 이미 혁명 도중 실권을 잃어버린 상태였고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역시 쓸데없이 적을 만들고 싶지 않아 상원을 해산하기까지 싶어하지는 않았다. 인민대표평의회는 11월 14일 상원이 계속 행정권을 행사한다는 조례를 발표했고, 이는 곧 상원이 행정권을 제외한 수권법으로 위임받은 다른 권한들을 빼앗겼다는 의미였다. 제국상원은 이렇게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가상원으로 이어진다.

5.3.2. 제국의회(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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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제국의회
제국의회(Reichstag)는 독일 제국의 하원이었다. 각 구성국들 간의 모임으로 연방적인 성격이 강했던 상원과 달리 하원은 황제처럼 하나의 통일된 국가조직이라는 느낌이 훨씬 강했다. 상원과 함께 제국의 입법권을 행사하고 예산을 심의해 상원과 공동으로 통과 여부를 결정할 권리가 있었다. 의외로 당대 유럽에서도 가장 진보적인 방법으로 의원들을 선출했다. 처음에는 3년마다 총선을 치르다가 1888년부터는 5년마다 총선을 치러 의원들을 뽑았다. 25세 이상의 건강한 모든 남성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다. 제국의회는 제1차 세계 대전 도중에도 개회했으나 1918년 11월의 혁명 때 인민대표회의가 의회 개회를 중단, 후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하원으로 부활해 계승됐다.

제국의회는 북독일 연방의 의회를 그대로 계승한 조직으로 북독일 연방의 선거법을 그대로 따랐다.[48] 의원들은 보통, 평등, 비밀투표로 선출되었고 25세 이상의 모든 신체건강한 남성들이 투표할 수 있었다. 이는 국제적으로, 심지어 독일 내 구성국들의 선거법에도 비추어봤을 때조차도 대단히 투표권이 광범위하게 모두에게 주어진 편이었다. 다만 군대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현역 군인은 피선거권은 있어도 선거권은 없었다. 파산했거나 지급불능, 법원이 무능력하다고 판단하거나 시민권을 박탈당한 이들도 선거권이 없었다. 독일 인구의 22.2%, 남성 1,444만 2천여 명이 투표권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높은 비율이었다.[49]

선거는 모두 소선거구제, 과반수 득표로 치러졌다. 1차 선거에서 과반 이상의 표를 얻은 후보만이 당선됐다. 그 어떠한 후보도 과반을 차지하지 못했을 경우 가장 많은 표를 얻은 후보 1, 2위를 뽑아 결선투표를 실시해 당선자를 뽑았다. 결선투표가 일어나는 선거구는 시간이 흐를 수록 많아졌다. 1874년 총선에서는 397개 선거구 중 고작 11.6%에 불과한 46개 선거구에서만 결선투표를 치렀지만, 1890년 총선에서는 37%에 달하는 147개 선거구, 1912년 총선에서는 무려 47.9%에 달하는 190개 선거구에서 결선투표를 치렀다. 이 결선투표제 때문에 당대 독일에 새바람을 불고온 사회민주당은 큰 손해를 입었다. 세가 불어나던 사회민주당은 점점 결선투표를 치르는 횟수가 많아졌지만 결선 때마다 상대 부르주아 진영이 대연정으로 똘똘 뭉치는 바람에 매번 결선에서 탈락했다. 사회민주당은 1912년 총선에서 190개의 결선 투표 중 무려 120개에 참여했으나 고작 45개의 선거에서만 승리했다. 특히 중도주의 정당이나 자유주의 정당들이 결선투표제의 수혜를 입었다. 1912년 총선에서 국민자유당은 68번의 결선투표 중 41번을 승리했다.[50] 독일 진보당은 55번의 결선투표 중 42번이나 승리를 거두었다.[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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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1907년 독일 제국의 선거구[52]
1871년 제국의회는 총 382석이었으나 3년 뒤에 엘자스로트링겐 제국영토에서 15석을 추가해 총 397석으로 늘어났다. 이 의석 수는 제국이 끝날 때까지 유지됐다. 선거구를 획정할 때에는 약 10만 명 단위로 나누었다.[53] 선거구의 경계는 제국의 구성국 국경을 기준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1개의 선거구마저도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구역으로 구성된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의 제1선거구는 브라운슈바이크 시 뿐만 아니라 브레멘 인근의 테딩하우젠, 블랑켄부르크 근처의 브라운슈바이크 공국령 영토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올덴부르크 공국의 제1선거구도 올덴부르크뤼베크 일대, 나헤 강 상류의 비르켄펠트 공국령을 모두 합쳐서 만들어진 선거구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공장이나 도시 일대로 사람이 몰리며 선거구 내에서도 인구 차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1912년 기준 독일 전역에 인구가 75,000명 미만의 선거구가 12개나 있었으나 40만 명 이상인 선거구도 12개나 있었다. 가장 큰 선거구는 포츠담 제10선거구로 무려 주민 수가 1,282,000명에 달했다. 그러나 선거구들은 1864년 이후로 변화하지 않았고 때문에 독일 선거제도는 인구가 급격히 증가한 도시를 기반으로 하는 정당들에게 불리한 형태였다. 의회는 이를 선거구를 재획정하려 노력했으나 정부와 상원이 비협조적으로 나오면서 실패했다.[54]

제국의회 의원들은 헌법에 따라 법적 면책 특권이 있었다. 정부가 의원들에게 정치적으로 보복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책이었다. 정부와 의회 분리가 강조되어 제국정부나 지방정부에 소속된 인사는 의원직을 겸임할 수 없었다. 전문 정치꾼의 등장을 막기 위해 의원은 봉급을 받지 않았다. 즉 정치 활동을 할만한 막대한 시간과 자금이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실제로 부유한 부르주아, 지주나 귀족들만이 의원 활동을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대부분의 사업가들도 본인 사업에 치이느라 의원직을 맡기란 힘들었다. 일반 노동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대신 의원들은 정당이나 이익 단체들의 지원을 받았다. 예를 들어 사회민주당은 1876년부터 의원들에게 급여를 지급했고 수많은 의원들이 당 기관지의 간부나 논설위원으로 고용됐다. 1898년 사회민주당 의원들의 40%가 당에 고용되었고 추가로 15~20%가 노조에서 일했다. 보수당의 경우 지주들이 의원들에게 지원해주는 대신 정치적으로 보상을 받았다. 산업계와 가톨릭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1906년부터 생활비가 지급되었으나 고작 연간 3천 마르크 밖에 되지 않아 실질적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의회의 진행과정은 헌법 제22조에 따라 모두에게 공개되었고 언론이 의사록을 모조리 보도했다. 국회의 임기는 처음에는 3년이었으나 1888년부터 5년으로 늘렸다. 의회는 4~5번의 회기를 가졌고 각각 약 1~4개월 동안 지속됐다. 법안, 청원, 기타 의회 업무가 한 회기에 완료되지 않은 경우 종료된 것으로 간주되어 다음 회기에 다시 제출해야 했다. 의회는 자체적으로 소집할 권리가 없어 형식적이지만 황제가 직접 회기마다 매년 의회 소집을 선포해야 했다. 상원은 황제의 동의를 받아 하원을 해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산 후 60일 안에 새 선거를 치러야 했고 새로 선출된 의회는 늦어도 90일 안에 소집되어야 했다. 실제로 제국의회가 해산된 것은 1878년, 1887년, 1893년, 1906년 4번에 불과했다. 의회가 해산되는 경우는 보통 수상이 의회를 자신에게 친화적인 정당으로 채우기 위해서였지만, 딱히 성공적인 경우는 많지 않았다. 고작 4번밖에 해산이 실시되지 않았다는 것이 그 증거다.

제국의회와 관련된 규정은 모조리 프로이센 하원 규정에서 따왔다. 의사규칙에 따르면 발언은 오직 발언대와 의원석에서만 이뤄져야 했다. 다만 투표함 근처에 많은 의원들이 몰려 있었기 때문에 투표함 근처에서도 발언, 연설을 하거나 연사에 대해 논평하는 경우도 많았다. 원칙적으로는 하면 안됐지만 의장이 이를 제지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하원에도 산하 위원회들이 있었으나 위원회들의 확장은 더뎠다. 위원회의 위원들 수는 정치 역학에 따라 계속 바뀌었고 원로원에서 위원장들을 지명했다. 바이마르 공화국과는 달리 위원회의 정수나 업무에 관해 구체적으로 정해놓지는 않았다. 의원들은 제국의장, 즉 하원의장을 선출했다. 하원의장은 외부적으로는 하원을 대표하고 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업무를 맡았다. 의장은 의제를 정하고[55] 발언권을 부여할 권한이 있었다.[56] 또한 발언자를 제지, 발언을 금지하거나 불응 시 회기에서 제외할 권한까지 있었다.[57] 예를 들어 황제의 인격에 대해 논하는 것은 절대 금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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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국민자유당 파벌 사회민주당 파벌
의회 내에서는 당파와 파벌들이 서로 다투는 정치싸움이 매일같이 벌어졌다. 의회 내 파벌은 법으로 규정된 존재는 아니었으나 실질적인 의회의 가장 중요한 세력 축이자 핵심이었다. 의원들에게 정치를 자유위임하겠다는 자유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한 독일 의회에서 파벌을 결성하거나 떠나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 어떤 파벌에도 속하지 않은 무소속 의원들도 많았다. 그러나 파벌은 곧 의회의 핵심 세력들로 부상해 의사규칙 결정, 상임위원회 지명, 발언자 및 위원회 구성 결정 등을 좌지우지했다. 보통 같은 당 의원들이 모여 파벌을 이루었고, 당 지도부가 파벌의 대표를 맡았다.[58] 파벌은 회원들의 기부로 자금을 조달했고 정기 회의도 열었다. 당파들은 공식적으로 강제력이 없었으나 당파에서 추방하겠다는 위협으로 실질적인 규율이 있었다. 물론 따르지 않는 의원들도 있었는데 가장 개인주의 성향이 심했던 중산층 정당들은 개인 투표가 드물지 않았다.

파벌들의 지도자는 따로 모여 원로원을 구성했는데 만장일치로 의제, 위원회 임명, 절차적 문제 등에 의견을 나누었다. 파벌들의 힘에 따라서 원로원 내 발언력이 달라졌다. 이렇게 원로원에서 내린 결정들은 의장에게 전달됐다.[59] 의장단과 원로원은 공식적인 연관이 없엇으나 1884년부터는 부의장이 원로원 의장을 겸임했고 1899년에는 아예 하원의장이 원로원 의장을 맡게 됐다.

하원의 가장 큰 권한은 당연히 법률 제정이었다. 의회는 헌법 제23조에 따라 법안을 입안할 수 있고 그 법률은 의회를 통과해야만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 권한들은 모두 상원과 함께 공유했다. 만약 제후국 정부들이 하원의 법안을 거부한다면 제후국들의 모임인 상원을 통해서 이를 막아세울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원이 하원에 딴지를 거는 경우는 줄어들었다. 법안을 처음 심의할 때는 오직 법안의 목적과 대의원칙에 관해서만 토론이 가능했다. 그러다가 2번째 심의할 때 세부조항과 자잘한 것들에 대해 토론이 들어갔고, 법안을 원만히 개정조율하는 것도 이 즈음이었다. 법안을 발의하기 위해서는 최소 의원 30명의 동의를 얻어야했다. 이렇게 심의가 끝나면 그때서야 하원에 투표로 부쳐졌고 재적 의원 과반수가 찬성해야 통과되었다.

하원의 최고 권력은 예산안 심의에서 나왔다. 비스마르크는 3년마다 예산안을 심의하자고 주장한 반면 의회는 매년마다 새로 정부 예산안을 심의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기존 예산안에 포함되지 않은 새 비용이 발생하면 추경을 통과시켜야 했다. 비스마르크의 의도와 달리 의회는 예산안의 총액이 아닌, 의회 뜻대로 예산안의 세부 하위 항목들까지 모조리 꼼꼼히 심사할 권한을 가져갔다. 이는 곧 의회가 정부의 예산안과 지출 전체에 대해 딴지를 걸고 통제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다만 군사 예산에는 의회도 함부로 뭐라 못해서, 처음에는 7년마다 국방예산을 심의하다가 나중에는 5년마다 국방예산을 심의했다. 게다가 의회가 군비를 줄이는 것은 불가능했고 개별 군수품목에도 영향을 거의 끼칠 수 없었다. 의회는 군예산을 한 번 통과시키고 나면 5년간 군비에 그 딱히 발언권이 없었다.[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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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제국의회에서 연설하는 비스마르크
의회는 세입 분야에서도 개입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간접세와 관세 심의는 군비 예산 심의보다도 더 심의 간격이 길어서 의회의 실질적인 간섭이 힘들었고 제후국들이 정부에 올려보내는 세금은 아예 의회의 관할 밖이었다. 의회는 새 세금을 거부할 수는 있어도 새로 도입할 수는 없었다. 특히 외교 분야에서는 더더욱 의회의 영향이 제한되어 국제조약에 대한 의회의 동의는 관세, 무역, 운송 및 비슷한 부가 분야에서만 필요했다. 외교의 핵심인 동맹 정치와 관련된 협의는 아예 정부가 의회에 알릴 필요조차 없었다. 전쟁과 종전을 선포하는 것은 황제의 전유물이지 의회의 것이 아니었다. 이에 상원의 동의는 필요했을지 몰라도 하원의 동의는 전혀 필요치 않았다.

하원은 정부의 모든 정책에 대해 질의, 청원할 권리가 있었다. 30명의 의원들을 모아 수상에게 정부활동에 대해 따져물을 수 있었는데 정작 수상은 하원 출석이 의무가 아니라 출석을 안하면 끝이었다.[61] 행정부 통제력은 갈수록 확대되어 1912년 법 개정으로 모든 의원들이 수상에게 소질의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그러나 수상의 답변에 이어 토론으로까지 할 수는 없었다. 또한 질문권을 투표로 부쳐서 해당 질문에 대해 하원에서 투표가 가능하도록 바뀌었는데, 예를 들어 1913년 자베른 사건[62] 당시 하원이 과반수로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 수상을 비난한 사건이 대표적이다.[63] 의회는 법적으로 수상을 임명, 해임할 수 없었지만, 법률과 예산을 통과시켜줄 의회 없이 국정을 운영하는 건 불가능했기에 수상도 의회의 눈치를 봐야만 했다. 의회가 불신임 투표를 해봤자 수상이 꼭 사임할 필요는 없었지만 수상은 현실적으로 의회에 대해 정치적 책임을 져야만 했다.

정부가 의회에 엄청난 책임을 지고 있지는 않았으나 수상은 여전히 의회에 의존하고 눈치를 봐야했다. 제국에는 수많은 법률이 필요했고 의회를 무시하고 통치하기란 불가능했다. 의회는 상당히 권한이 강력했고 정부와 황제가 모두 지지한 전복법, 감옥법 등을 거부시켜버리기도 했다. 그래서 수상은 의회에서 과반을 차지하는 것이 좋았다. 그러나 하원이 여러 정당이 난립하는 구조였던 탓에 안정적인 다수당을 구성하기가 어려웠다. 비스마르크의 경우는 천재적인 정치질로 정당들을 조종해 정국을 이끌었지만, 1879년 이후 의회가 급격히 보수화되며 정당 간 싸움이 난립하고 대정부 대응에 소극적이 되자 훨씬 의회를 다루기 쉬워졌다. 필요하다면 정부는 의회를 해산할 수도 있었다. 이어진 총선에는 정부가 대놓고 언론과 막대한 자금을 동원해 선거에 개입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64]

6.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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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의미 없는 프랑스의 이상주의: 자유, 평등, 그리고 우애에 대하여,
우리는 세 개의 독일적인 현실주의: 보병대, 기병대, 그리고 포병대로 대응한다.
베른하르트 폰 뷜로
이 시대의 가장 위험한 병은 군국주의다. 전 국민으로 하여금 무장을 준비하게 하고, 국가를 거대한 전쟁 기계(Kriegsmachine)로 되게끔 하며, 모든 건강한 시민을 군인으로 만들고, 세금과 비용을 극도로 올리고, 상존하는 전쟁 위험을 야기하며, 사회적인 상황을 파괴하고 재앙을 불러와 걱정 없이는 생각할 수조차 없게 만든다.
19세기 독일 제국의 가톨릭 신학자 게오르크 미하엘 파흐틀러(Georg Michael Pachtler)[65]. 볼프람 베테의 저서 <독일의 군국주의(Militarismus in Deutschland)> 에서 발췌.
헬무트 폰 몰트케(대(大) 몰트케) 원수가 이끌던 군 창립 당시부터 독일 제국군은 단일 군사집단으로는 유럽 최강의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다. 육군은 유럽 최강이었고 해군은 영국 다음 가는 2위였다. 독일 제국이 이렇게 강력한 군사력을 건설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독일이 유럽에서 손에 꼽히는 인구와 으뜸 가는 산업력을 지니고 있었고[66] 거기다 강력한 군국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독일 제국의 경제력은 대영제국에 버금갔고, 내수 시장과 공업력은 해상무역 국가였던 대영제국을 실질적으로는 능가했다. 게다가 독일 제국의 모체였던 프로이센의 체제를 이어받아 독일 제국 역시 군국주의 성향을 지닌 나라였다. 그래서 독일 제국의 막대한 경제 성장은 곧 적극적인 군비 증강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독일 제국이 유럽의 군사적 패권국이었던 것은 아니다. 독일 제국은 당대의 경쟁국이었던 프랑스, 영국, 러시아를 1:1로는 능가했지만, 이들이 합종연횡을 해도 독일이 우세할 정도는 아니었다.-불행히도 이건 현실로 일어난다- 즉, 압도적인 패권국이라기보다는 아슬아슬한 1위 국가이거나 '잠재적 패권국'[67]이었다. 그래도 분명히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라고 볼 수 있었던 만큼 1차 대전에서는 상기한 세 나라를 한 국가도 빠짐없이 모두 적으로 돌려버리는 뻘짓을 하고도 미국 참전 전까지 나름 대등하게 싸웠다.

독일 제국군은 단순히 국방만 담당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영향력도 막강했다. 이는 문화적으로는 프로이센에서 기원한 군국주의를 독일 제국이 그대로 계승했고, 정치적으로는 독일이 입헌 공화정, 군주정, 군부통치가 혼합된 기묘한 체제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독일은 정치적으로 행정부나 의회가 군대를 통제할 방법이 없었다. 독일 통일 이전에 비스마르크가 국방 예산을 놓고 의회와 사사건건 대립했던 바에서 보이듯이, 독일 제국군은 민간에 재정을 의존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군대를 통제할 수단을 명시한 법이 독일에는 없었고, 군대의 통수권은 왕권신수설에 기반하여 황제가 독점했다. 그래서 독일 제국군은 분명 국가의 재정에 의존하지만 국가의 통제는 받지 않는 초법적 지위를 손에 넣었다. 게다가 황제의 통수권에 대한 규정도 명확히 성문화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딱히 황제라고 군대를 확실하게 휘어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1차 대전 즈음에는 군대가 황제를 쥐고 흔드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러한 구체제적이고 반동적인 군부의 모습을 견제하려는 시민 사회의 노력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독일 제국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3차례의 전쟁을 승리하는 과정에서, 독일 제국군은 애국심의 상징으로 그 이미지를 크게 탈바꿈하게 된다. 군대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는 (그 묘사가 얼마나 사소한 것일지라도) 비애국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짙게 형성되었고, 의회 내 자유주의 세력의 훼방에도 불구하고 1900년대에 이르면 독일 제국군의 상비 인력은 (평시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50만 명에 근접했다.[68] 게다가 1차대전의 전야였던 1910년대에 이르면 삼국 협상의 등장으로 인하여 독일은 양면전쟁을 강요받는 상황에 이르렀고,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독일 군부는 규모 확장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이처럼 방대한 규모의 군대는 독일 사회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2년의 복무 기간을 통하여서 정부는 상당수의 남성들에게 (특히 독일인이라는 의식이 약했던 남/서부의 가톨릭 교도들과 노동자들에게) 국민 의식을 심어줄 수 있었다. 또한 상술했듯 고급장교의 상당수가 귀족 계층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되어 군대 자체를 선망하는 사회적인 분위기 역시 짙어졌고, 많은 부르주아 남성들에게 예비역 장교는 바람직한 사회적 지위이자 쟁취해야 할 목표물로 자리매김했다.

6.1. 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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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제국군을 사열하는 빌헬름 2세 독일 제국의 군복
Deutsches Heer. 1871년부터 1918년까지 존재한 독일 제국의 육군.[69] 제국군의 총사령관은 당연히 황제로 구성 제후국들의 군대는 프로이센의 지휘를 받거나 아예 프로이센군에 편입됐다. 평시에도 황제는 주둔군의 규모를 결정하고 수비대의 위치 및 규모 결정, 요새 건설, 군사 조직 유지, 병졸과 장교 양성 등 군의 모든 업무를 총괄하는 군의 최고 통수권자였다. 군예산은 구성국 대표들이 모인 상원에서 결정했다. 육군 외에 해군, 해군에 딸린 3개 해상대대, 해외 식민지에 주둔하는 식민지 방위군은 아예 황제와 제국정부의 직접 지휘를 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과 이어진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은 평시 병력 10만 명까지 제한당했고, 이후 제국군의 잔재는 국가방위군자유군단으로 계승된다.

다만 바이에른, 작센, 뷔르템베르크 왕국군은 예외로 이들은 평시에 자국 군주와 자국 군부의 지휘를 따로 받았다.[70] 작센군과 뷔르템베르크군은 육군 내에 하나의 독립된 군단을 이루었고, 바이에른은 무려 3개 군단을 운용했다. 이들은 중앙정부에서 군단과 부대의 수를 계산할 때에도 제외되는 등 따로 놀았다.[71] 뷔르템베르크는 장교 양성을 위해 프로이센군에 장교를 파견하기도 했으나, 바이에른에는 아예 자체 전쟁 아카데미를 두어 프로이센의 전쟁 아카데미와 독립적으로 장교를 양성하기까지 했다.[72] 출신 국가에 따른 구분은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면서 상황이 급해지자 완화되었으나 결코 없어지지는 않았다. 이 3개 국가를 제외한 나머지 소국들의 군대는 파견부대 형식으로 프로이센군 내부에서 폐쇄적인 부대를 형성해 프로이센 장교들의 지휘를 받았다.

육군은 해군과 함께 황제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군예산은 제국의회의 승인을 거쳐야만 했으나 군대의 영향력은 끝이 없었고 의회는 군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했다. 최고 통수권자인 황제 아래에는 군사내각, 전쟁성, 총참모부 이렇게 3개의 기관이 있어서 서로 권한을 두고 으르렁거리며 때로는 다투기까지 했다. 특히 이중에서 총참모부가 군대의 범위를 벗어나 정치에 개입하려 시도를 많이했다. 헬무트 폰 몰트케 시절부터 권력에 개입했던 역사가 있었고 알프레트 폰 발더제 등이 여러 차례 정계에 개입했던 것이다. 육군에 몰트케와 발더제가 있었다면 해군에도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가 정치에 대놓고 개입했다.

1848년부터 1860년까지 국민들은 군대를 불순하다고 의심하곤 했으나, 1870년대 독일 통일 이후 육군을 바라보는 시선이 확 달라졌다. 육군은 독일 통일을 이룩한 최대 공로자로서 신흥 제국주의적 애국심의 중심이 되었다. 군대에 대한 비판은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군대를 견제하던 정당들은 군대 증강 속도를 늦추었고 독일은 1890년이 되어서야 평시 병력 49만 명을 달성, 군대의 규모를 헌법에 명시된 인구의 1%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73] 육군은 1890년대 내내 증강을 거듭했지만 1898년부터 1911년까지는 황제의 관심사인 대양해군 양성 때문에 육군에 갈 자금이 부족해지며 증강이 다시 늦춰졌다.[74] 이때부터 이미 독일은 영국이 개입하기 전에 프랑스러시아를 동시에 처리하겠다는 슐리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는데, 이를 위해선 막대한 병력이 필수였기에 1911년 이후부터 육군에 모든 자금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예산 부족으로 개전 직전까지도 슐리펜 계획에 필요한 병력 규모 달성에는 실패했다.

육군은 강력한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장교단은 '나라의 첫 번째 자산'으로 간주되어 최고 엘리트층으로 대우받았다. 군대는 군주정에 대한 충성과 왕권 수호가 특징이었고 보수적이고 비근대적이며 본질적으로는 '반의회적'이었다. 프로이센의 기풍을 이어받은 군대식 원칙과 행동강령은 독일 사회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시민들은 예비군 장교의 타이틀을 따고 싶어했고 장교는 대단히 귀족적이고 명예로운 자리로 여겨졌다.[75] 게다가 공동으로 복무하는 과정에서 가톨릭계, 노동자 계층이 제국에 동화되도록 만들었고, 2~3년이라는 의무복무 기간 동안 군대는 독일인들에게 '한 나라'라는 민족의식을 심어줄 수 있었다. 제대군인들이 모여만든 재향군인회는 290만 명이라는 막대한 회원 수를 자랑했고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군국주의적, 민족적, 군주주의적 충심을 기르고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적대감을 심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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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독일 제국의 군단 배치
독일 제국군의 편제는 대단히 복잡했다. 평시 독일 제국 육군의 편제는 육군사찰단(Armee-Inspektion) - 군단(Armeekorps) - 사단(Division) - 연대(Brigade) 순서였다.[76] 가장 먼저 가장 큰 단위인 육군사찰단은 각각 3~4개의 군단으로 이뤄져 있었다. 1871년 건국 당시 5개의 육군사찰단이 있었고 1907년과 1913년 사이에 3개 육군사찰단을 더 추가해 총 8개의 군이 존재했다. 육군사찰단은 로마 숫자를 붙여서 불렀는데,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명칭을 '육군사찰단'에서 '군'으로 바꾸어 재편성했다. 단치히의 I 육군사찰단은 제8군, 베를린의 II 육군사찰단은 제3군, 하노버의 III 육군사찰단은 제2군, 뮌헨의 IV 육군사찰단은 제6군, 카를스루에의 V 육군사찰단은 제7군, 슈투트가르트의 VI 육군사찰단은 제4군, 베를린의 VII 육군사찰단은 제5군, 자르브뤼켄의 VII 육군사찰단은 제1군으로 바뀌었다.

독일의 가장 기본적인 군대 구성은 바로 군단이었다. 보통 군단은 2개 이상의 사단과 잡다한 지원 부대들로 이루어져 관할 지역을 방비했다. 또한 지방의 예비군과 란트베어, 즉 향토방위군을 관리할 책임도 있었다. 1914년까지 프로이센이 관할하는 총 21개의 군단이 있었고 바이에른이 독자적인 3개 군단을 가지고 있었다. 지역을 지키는 군단 외에도 황제의 친위대수도군단에 해당하는, 프로이센 정예 근위부대로 구성된 근위군단도 있었다. 보통 경보병 대대, 중포병 대대, 공병대대, 전신대대, 기차대대 등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일부 군단은 요새를 지킬 수비군까지 가지고 있었다. 근위군단까지 합쳐 총 25개의 군단들은 모두 조그마한 육군항공대를 가지고 있어서 각각 비무장한 6대의 2인용 관측용 비행기를 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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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컬러 복원 모습 이탈리아 전선의 독일 제국군
전시에는 군단이 가장 기본적인 조직 구성 단위가 되었다. 군단에는 소수지만 기병도 있었다. 전시에는 각각 2개의 사단으로 구성된 4개의 기병군단을 만들어 운용하기까지 했다. 군단이 주둔하는 지역을 기준으로 지역을 군관구(Wehrkreis)로 나누었다. 군단은 할당된 군관구에서 신병을 충원하고 훈련을 시켜 병사로 육성했다. 군관구 하나당 군단 하나씩이 배정되었다. 예를 들어 I 군관구의 신병 지원자들은 모조리 I 군관으로 보내는 식이었다. 예비군도 마찬가지였다. 10 군관구의 예비군들은 모조리 10 예비군단으로 편성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도중에도 예비군단이 16개 정도 편성될 때까지는 이 원칙이 충실하게 지켜졌으나, 시간이 흐르고 인력소모가 심해지자 더이상 이런 원칙을 유지하기 어려워지면서 그냥 독일 전역에서 충원한 인력을 필요한 군단에 그때그때 배정하는 식으로 바꾸어버렸다.

가장 기본적인 전술 단위는 사단이었다. 표준적인 독일 제국 사단은 보통 사단본부, 각기 2개 보병연대로 구성된 2개의 보병여단이 모인 보병여단 사령부, 사령부와 2개 연대로 구성된 기병여단, 사령부와 2개 연대로 구성된 포병여단, 사단본부의 후방지원연대 등으로 이루어졌다. 1914년 기준으로 근위군단(근위사단 2개와 근위기병사단 1개)를 제외하더라도 프로이센에는 정규 사단 42개[77]와 바이에른에 정규 사단 6개가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이 사단들이 죄다 동원됐다. 이들은 대대적인 개편을 거쳐 공병중대와 기타 지원부대들을 공급받았다. 대신 국가 차원에서 기병사단을 따로 모아 만들기 위해 기존에 갖고 있던 기병들은 대부분 포기해야만 했다. 란트베어를 사단으로 편성하고 예비군을 징집해 또 꾸역꾸역 사단을 채웠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독일은 무려 251개의 사단을 편성했다.

가장 아래 단위인 연대는 기본 전투 부대이자 신병을 모집하는 단위이기도 했다. 신병이 입대할 시 대개 훈련 대대를 통해 연대에 입소해 기본 훈련을 받았다. 연대에는 기병, 보병, 포병의 3가지 군종이 있었다.[78] 특히 연대 단위로 심지어 1600년대부터 내려오는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전통은 바이마르 공화국나치 독일 때까지 이어졌지만 1945년 서독동독 모두가 기존 군전통을 철폐하며 더이상은 계승되지 않는다. 독일 제국의 보병 연대는 보통 연대 본부, 3개의 대대, 1개의 훈련 대대로 이뤄졌다. 기병연대, 야전연대, 기마연대, 포병연대도 구성은 비슷했다.

6.2. 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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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1. 빌헬름 1세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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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독일 제국 해군
Kaiserliche Marine. 1871년부터 1917년까지 존재했던 독일 제국의 해군. 주로 연안 방어에 그쳤던 프로이센 해군[79]을 모태로 빌헬름 2세 시절에 크게 증강을 거쳤다. 주요 해군사령관으로는 해군의 규모와 질을 크게 늘린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제독이 유명하다. 함대 증강에 뜻이 맞았던 빌헬름 2세와 티르피츠는 알프레드 세이어 머핸의 해군력 이론을 따라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어가며 영국 해군건함 경쟁을 펼쳤다. 그결과 독일 해군은 세계 최대의 해군들 중 하나로 급성장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때 큰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유일한 주요 교전인 유틀란트 해전은 무승부였고 나머지 전쟁 기간 동안 함대는 항구에 박혀있었다. 잠수함 함대가 크게 확장되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펼쳐 영국의 보급줄을 옥죄었지만 결국 미국의 참전이라는 초대형 악재를 불러왔을 뿐이었다.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협상국은 모든 함선을 넘기라고 요구했지만 선원들이 스스로 자침시키면서 수장됐다. 제국해군은 바이마르 공화국국가해군으로 계승된다.

독일 제국해군은 1871년 빌헬름 1세가 독일을 통일하면서 만들어졌다. 초기의 해군은 북독일 연방해군을 그대로 이은 것에 불과해[80] 해안가 보호가 주 임무였다. 주요 적대국은 당연히 프랑스와 러시아. 침략군의 상륙을 저지하고 해안도시들을 포격으로부터 저지하는 것이 목표였다. 제국헌법 제53조는 해군을 육군으로부터 독립된 조직으로 인정했으나 1888년까지는 육군 장교가 지휘했으며 프로이센 육군과 동일한 규정을 쓸 정도였다. 1872년 2월 1일 기존의 프로이센 해군부를 제국제독부(Kaiserliche Admiralität)로 개칭한 뒤 슈토슈[81]를 1875년 공식 제독으로 임명했다. 이렇게 창설된 독일 해군은 발트해의 킬 항구와 북해빌헬름스하펜을 주요 군항으로 삼았다. 1872년 3월에는 킬에 해군사관학교를, 5월에는 기계공병대, 1873년 2월에 의무대, 1879년 4월에는 어뢰공병대가 차례차례 설치되면서 제대로 된 해군의 모습을 갖추었다.

1872년 5월 해군력 증강을 위한 10년 계획을 발표했는데, 이걸 보면 8척의 장갑호위함, 20척의 경초계함, 7척의 모니터함, 2척의 수상포대, 6척의 식민지통보함,[82] 18척의 건보트, 28척의 어뢰정을 배치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해당 전력 증강 금액의 4분의 1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전한 프랑스가 지불한 배상금에서 충당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10년이 흐른 1883년에는 슈토슈가 레오 폰 카프리비 백작으로 대체되었는데 이즈음 독일은 7척의 장갑호위함, 4척의 장갑초계함과 장교 400명, 수병 5,000명이 전부였다. 여전히 독일 해군의 주 목표는 해안 방비였고 이를 위해 어뢰 개발에 힘을 쏟았다.[83] 1887년에 빌헬름스하펜과 킬에 각각 어뢰정 사단을 편성하기도 했다. 거기다가 1887년 킬 운하가 개통되자 독일은 무려 1억 5천만 마르크를 들여 북해함대와 발트함대를 하나로 통합했고[84] 1880년대 독일이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는 데도 해군이 한몫 기여했다.

6.2.2. 빌헬름 2세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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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빌헬름 2세 카이저급 전함
빌헬름 1세 이후 1888년 프리드리히 3세를 거쳐 빌헬름 2세가 즉위하자 해군에도 변곡점이 생겨났다. 해군에 관심이 많던 빌헬름 2세는 독일 해군을 영국, 프랑스에 뒤지지 않는 거대한 대양해군으로 키우려들었다.[85] 하지만 해군 확장은 필연적으로 육군에 들어갈 예산이 줄어든다는 의미였기에, 소 몰트케, 슐리펜, 발더제 등 군수뇌부의 강한 반발에 부닥쳤고 결국 해군 증강을 점진적으로 추진하겠다는 타협안으로 반발을 무마할 수 있었다. 1888년 7월에는 알렉산데르 폰 몬츠를 제국제독부 사령관으로 임명, 1,600만 마르크를 들여 1894년까지 1만톤 짜리 브란덴부르크급 전함 4척을 건조하도록 했다.

1889년에는 군사내각으로부터 격이 똑같은 해군내각을 떼내어 신설할 정도로 해군에 공을 들였다.[86] 기존의 제국제독부는 폐지되어 대신 제국해군최고사령부와 제국해군청이 새로 생겼다. 제국해군최고사령부는 군함의 배치, 전략 및 전술을 담당하는 부서로 육군최고사령부와 동등했다.[87] 제국해군청은 함선의 건조와 유지, 물자 공급 업무를 맡아 수상과 해군 문제를 상의하고 제국의회를 상대해 예산을 따오는 역할을 맡았다.[88] 그래서 해군은 해군내각, 제국해군최고사령부, 제국해군청 이렇게 3개로 나누어졌으며, 이들은 빌헬름 2세에게도 각기 따로 보고했다.[89]

독일 해군의 증강은 계속됐다. 1895년 카이저 프리드리히 3세급 전함 5척을 1905년까지 10년간 건조하기 위한 예산이 통과됐다. 이 전함들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기술로, 복잡한 방수 격실 시스템을 도입했으며 폭발을 흡수하기 위해 선체 측면을 따라 석탄을 선적했다. 당대 군함들은 점점 더 주포가 커지고 있었는데, 카이저 프리드리히 3세급 전함은 이 추세에 반해 브란덴부르크급보다도 더 구경이 작은 포를 달았다. 대신 재장전이 훨씬 빨랐고 보조 무장이 몇 배는 더 강력했다. 선진기술을 도입한 탓에 비용은 무려 2,100만 마르크로 껑충 뛰어올랐고 배수량은 무려 11,500톤에 달했다. 1892년에는 3축 프로펠러를 장착한 최초의 방호순양함 SMS 카이제린 아우구스타가 취역했고, 이어서 빅토리아 루이제급 방호순양함 5척이 전력화됐다.[90] 이후 독일은 장갑순양함 건조에 착수해 1900년 독일 최초의 장갑순양함 SMS 퓌르스트 비스마르크호를 진수했다.

6.2.3. 티르피츠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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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샤른호르스트급 장갑순양함 티르피츠
그렇게 빌헬름 2세 아래에서 착실히 성장하던 독일 해군은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가 등장하며 또다른 변곡점을 맞았다. 1897년 6월 18일 티르피츠 해군 소장은 해군청장으로 임명된 직후부터 해외 영토를 지키기 위해 해군을 증강해야한다고 주장했고, 의회를 설득해 함대 확장을 골자로 하는 해군법을 연달아 통과시키는데 성공했다.[91] 티르피츠는 해군을 대중화하기 위해 홍보 잡지를 만들고 해군력의 중요성을 주장한 알프레드 세이어 머핸의 논문을 독일어로 번역해 언론에 연재했으며, 해군 지지 집회를 주최하는가 하면 정치인, 경제인들을 해군 협회에 초대하며 전방위적인 해군 홍보 캠페인을 벌였다. 해군은 여러 이익단체들을 만들어 정계에 막대한 로비를 퍼부었고, 함대 협회는 회원이 100만 명이 넘어갔다. 정당들은 해군에 예산을 지원해주는 대신 수입곡물 관세 문제 등에서 양보를 받아냈다.

최초의 해군법이 1898년 4월 10일 의회를 통과했다. 이 법의 핵심은 19척의 전함, 8척의 장갑순양함, 12척의 대형 순양함, 30척의 경순양함으로 구성된 함대 규모를 영구히 유지하는 것이었다. 기존 함선도 총 함선 수에 포함되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무기한으로 해당 배들을 25년마다 교체할 수 있도록 정한 것이었다. 해군에 매년 500만 마르크가 투입됐고 신형 함선 건조에 4억 800만 마르크라는 거액이 요구됐다.[92] 2년 뒤 2번째 해군법이 의회를 통과했다. 할당된 함선이 2배로 늘어나 함대의 필수 유지 규모가 전함 38척, 장갑순양함 20척, 경순양함 38척으로 확대됐다.[93] 티르피츠는 이에도 만족하지 않고 1899년 전함을 45척으로 늘릴 계획을 짜고 있었고 1909년까지 48척으로 또 늘어났다.

티르피츠의 최종 목표는 독일 해군을 세계 최강 해군이던 영국 해군과 맞먹는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당연히 해양패권을 쥐고 있던 영국은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했다. 존 피셔는 1904년, 1908년에 2번이나 영국이 킬과 빌헬름스하펜에 선제타격을 해야한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티르피츠는 독일이 영국 기함 3분의 2 규모의 함대만 가져도 충분히 맞서 싸워볼만 하다고 봤다. 영국은 세계 곳곳에 함대를 배치해야하는 반면 독일은 독일 앞바다만 지키면 됐기 때문. 독일도 영국과의 긴장을 늦추어보려고 시도는 했지만 계속되는 함대 확장과 건함 경쟁은 도저히 영국과의 충돌을 안불러오래야 안불러올 수가 없었다. 영국은 독일의 추격을 극도로 경계했고 1889년의 해상방위법으로 영국의 해군력을 최대 경쟁국 2개국의 해군력을 더한 것보다도 더 우월한 수준으로 유지하기로 결의했다.[94][95]

독일 제국은 티르피츠 아래에서도 계속 건함 경쟁을 거듭했다. 1889년부터 5년간 비텔스바흐급 전함 5척을 척당 2,200만 마르크를 들여 건조했다. 거기다가 브라운슈바이크급 전함 5척을 1901년부터 5년 동안 척당 2,400만 마르크를 들여 새로 도입했다. 기술의 발전으로 속사포를 더 크게 만드는 것이 가능해져서 브라운슈바이크급은 28cm 함포를 주무장으로 삼았다. 또한 어뢰 기술이 날로 발전하고 있던 탓에 어뢰로부터 선체를 보호하기 위해 더 작은 함포와 보조무장에 중점을 두었다고. 1903년부터 5년 동안 건조된 도이칠란트급 전함은 브라운슈바이크급과 비슷했지만 장갑이 더 두꺼웠고 약간 더 비싼 척당 2,450만 마르크가 들어갔다.

장갑순양함 개발도 지속됐다. 최초의 장갑순양함 퓌르스트 비스마르크는 1902년 후속작 프린츠 하인리히급 장갑순양함에서 더 발전된 모습을 선보였다. 프린츠 아달베르트급 장갑순양함 2척이 1904년 취역했고 이어서 1906년과 1907년에 각각 약 1,700만 마르크를 들여 론급 장갑순양함 2척을 추가했다. 1904년부터 4년 동안은 샤른호르스트급 장갑순양함 2척을 척당 2,030만 마르크를 들여서 진수했다. 샤른호르스트급은 21cm 짜리 함포 8문을 주포로 했고 15cm 짜리 함포 6문과 8.8cm 짜리 함포 18문을 보조무장으로 삼았다. 1902년부터 5년간 가젤급 경순양함을 개조한 브레멘급 경순양함 8척을 건조했다. 브레멘급은 10.5cm 짜리 함포 10문을 주포로 삼았다. 브레멘급 전함들은 모두 독일 도시들의 이름을 땄는데 개중 SMS 뤼베크는 처음으로 터빈엔진을 장착했다.[96] 당시 최신기술인 터빈의 효용이 입증되며[97] 독일 해군에도 터빈엔진을 도입한 것이다. 다만 1903년까지는 독일에 터빈 기술이 없어서 영국 파슨스 사의 엔진을 사왔다.

6.2.4. 연이은 해군 증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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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독일 최초의 드레드노트나사우급 전함
1906년 12월 3일에 영국 해군이 최초의 드레드노트를 도입하며 또다른 혁신이 시작됐다. 드레드노트란 주포를 단일 구경으로 통일한 최초의 전함으로, 최첨단 증기터빈을 사용해 더 적은 부피로 더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동일한 탄도를 가진 화포 다수를 동시에 같은 사격제원으로 발포해 전면은 3배, 측면으로 2배나 더 많은 화격을 쏟아부을 수 있었다. 영국이 첫 드레드노트를 도입한 이래로 전세계에서 드레드노트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그 위력에 경악한 독일 해군 역시 함선 설계를 전면 뒤엎었고, 이로써 더 가벼운 장갑과 빠른 속도를 특징으로 하는 순양전함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독일도 드레드노트를 도입하기 시작해 9억 4천만 마르크를 투입,[98] 매년 드레드노트 2척과 순양전함 1척을 찍어낼 야심찬 계획을 채웠다.

그렇게 독일 최초의 드레드노트 전함인 나사우급 전함 4척이 1907년 극비리에 건조되기 시작되어[99] 1910년까지 무려 척당 3,740만 마르크를 들여서 완성됐다. 1908년 3월에 폰 데어 탄급 순양전함이 취역했으며[100] 이어 드레스덴급 경순양함으로 경순양함 개발에 열을 올렸다.[101] 1907년과 1911년 사이에는 콜베르크급 경순양함 4척이 새로 등장하기도 했다.[102] 독일 해군은 의외로 1904년까지 잠수함 설계 연구를 미루다가 1906년 12월에야 킬 군항의 게르마니아 조선소에서 최초의 독일 잠수함인 SM U-1을 진수시켰다.[103] 초기 잠수함 엔진은 시끄럽고 연기가 많이 났기 때문에 너무나도 적이 탐지하기 쉬워서 잘 쓰이지 않았지만, 1910년에 훨씬 조용하고 깨끗해 적군이 감지하기 어려운 디젤 엔진이 도입되며 훨씬 유용하게 써먹히기 시작했다.

독일의 해군 지출은 꾸준하게 증가했다. 1907년 해군에 무려 2억 9천만 마르크가 지출됐고 1908년에는 3억 4,700만 마르크, 국가예산의 24%를 혼자서 독차지했다. 이 돈먹는 하마를 떠받치느라 5억 마르크의 예산 적자가 났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무렵까지 해군 지출 때문에 독일은 10억 마르크에 달하는 빚을 추가로 떠안는 상황이었다. 그와중에 경쟁국인 영국은 상대적으로 전함 건조 비용을 낮춰가는 중이었다. 벨레로폰급 전함세인트 빈센트급 전함 등 후속세대 전함의 건조비용은 독일의 동세대 전함보다 한참 저렴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독일 군함은 영국 군함보다 30%나 더 비쌌다. 엄청난 예산 때문에 점점 독일 의회 내에서 해군의 추가 증강 반대 목소리가 커져갔다. 어차피 영국을 앞지르지도 못할 거 왜 그렇게 많은 돈을 퍼붓냐는 비판이었다. 그러자 해군 내에서는 1908년 새 함선을 만들 자금과 승무원 부족에 대한 불만이 제기되기 시작됐고, 답이 없다고 느낀 재무장관 헤르만 폰 슈텐겔은 아예 사퇴해버릴 정도였다.

그렇게 의회와 군 사이의 갈등은 의회가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의 봉기를 진압할 추가 예산을 거부해버리면서 최고치를 찍다가 1907년 총선으로 의원들이 대거 교체되며 의회가 더 군에 호의적으로 변했다. 티르피츠는 1908년 3월 의회가 추가 예산을 통과시키도록 설득에 성공, 함선 교체 주기를 25년에서 20년으로 단축했으며 건조 속도를 연간 주력함 4개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티르피츠의 목표는 1914년까지 전함 16척과 순양전함 5척, 1920년까지 전함 38척과 순양전함 20척으로 구성된 대함대를 만드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경순양함 38척과 어뢰정 144척은 덤이었다. 1912년에는 재정 건전성을 위해 건조 속도를 연간 2척으로 줄일 계획이었으나 티르피츠는 그때가면 언제든 바꿀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특히 조선업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독일 산업계가 해군을 도와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

1909년에는 헬골란트급 전함 4척이 진수되었으며[104] 연달아 카이저급 전함에서 마침내 증기 터빈을 도입하고 모든 포탑의 화력을 일제집중해 쏟아붓기 어려웠다는 기존의 결함을 보완하는 데에 성공했다.[105] 이후 1908년 몰트케급 순양전함 2척을,[106] 모든 순양함에는 1908년부터 터빈 엔진이 장착되기 시작했고 1910년에는 척당 740만 마르크를 들여 4,600톤짜리 마그데부르크급 경순양함을 건조했다. 그 뒤를 이어 유사하나 더 크기를 키운 카를스루에급 경순양함그라우덴츠급 순양함이 추가로 전력에 추가됐다. 1911년에는 쾨니히스베르크급 경순양함 4척이 새로 건조됐다.[107] 1910년부터는 최초의 트윈디젤엔진으로 구동되는 잠수함 연구가 시작되었는데, 새로 만들어진 U-19는 U-1의 2배 크기였고 8노트[108]로 무려 7,600해리 이동이 가능해 항속거리도 5배로 크게 증가했다. 어뢰관이 고작 하나 밖에 없던 초창기와 달리 선수와 선미에 어뢰관이 2개씩 총 4개나 있었고, 탑재된 어뢰도 6개로 증가했다. 보통 50m 깊이에서 작전하도록 설계됐지만 80m까지도 잠수가 가능했다.

매년마다 새로운 함선들을 찍어대니 해군 지출은 해마다 미친 듯이 뛰어올랐다. 뷜로 수상이 적자를 줄이기 위해 세금을 인상하려 시도했으나 사회민주당은 물품세를 반대했고 보수당은 상속세 인상을 반대했다. 결국 의회가 해산됐고 이어 치러진 총선에서 뷜로 내각이 패배하며 사임했고, 그 뒤를 이어 베트만홀베크가 새 수상이 되었다. 베트만홀베크는 영국과 건함 경쟁을 완화하는 내용의 협상을 진행했으나 곧 터진 모로코 위기로 영국 - 독일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영국은 프랑스와 결착하며 독일을 견제했고, 티르피츠는 이를 해군 확장의 기회로 보고선 연간 4척씩 해군 증강속도를 늘려야한다고 주장했다.[109] 그러나 1912년 1월 선거에서 군비 증강에 반대하는 사회민주당이 원내 1당을 장악하면서 충돌은 격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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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대양함대의 모습
당시 제1해군경이던 윈스턴 처칠이 독일의 해군 증강이 사치라고 조롱하자 독일의 여론은 급속도로 불타올랐다. 영국과의 군축협상은 아무 소득없이 끝났고 서로에 대한 비난만 남았다. 베트만홀베크는 국가예산 중 일정 비중을 군에 투자하겠다고 보장했으나 군부는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 티르피츠는 새 주력함 6척을 주장했으나 1912년 4월에 주력함 3척, 선원 15,000명을 얻어갔다. 새 주력함들은 기존의 예비 기함들과 4척의 예비 전함과 함께 대양함대의 새 전대를 이루었다. 대양함대는 8척의 전함, 12척의 대형 순양함, 30척의 소형 순양함이 있는 5개 전대로 구성됐고 해외 임무를 위한 추가 순양함도 딸려있었다. 티르피츠는 함선을 계속 교체하면서 노후 함선만으로 해안을 방어할 6번째 전대를 만들고 싶어했다. 거기다 기존 전투 순양함 8척에 현재 해외 전대에 있는 대형 순양함을 대체할 8척을 추가로 요구, 1920년까지 10만 병력, 전함 49척, 전투순양함 28척으로 구성된 초대형 함대를 구상했다.

티르피츠가 더 많은 함선을 확보하는 데에 성공했을지는 몰라도 군 지출 중 해군이 차지하는 비중은 1912년 이후 갈수록 감소해 1911년 35%에서 1912년 33%, 1913년 25%로 줄었다. 점점 유럽의 대전쟁이 목전으로 닥쳐왔고 땜누에 해군을 이용한 장대한 세계정책 구상이 후순위로 밀려왔기 때문. 황제의 동생인 하인리히 왕자는 해군에 쏟아부어지는 비용이 지나치다고 생각했고 소 몰트케도 육군에 집중하기를 바랐다. 영국은 독일의 주력함 1척 당 영국은 2척을 만들겠다고 떠벌리고 다녔고 프랑스와 공조해 함대를 지중해에서 영국해협으로 옮겼다.[110] 게다가 32,000톤짜리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5척을 도입하기까지 했다.[111] 독일은 데어플링어급 순양전함,[112] 바이에른급 전함[113]을 도입해 이에 대응했다. 그 외에도 여러 순양전함들[114]과 어뢰정들[115]을 발전시켰고 1912년에는 SMS 괴벤과 SMS 브레슬라우로 지중해 전대를 창설하기까지 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질 무렵, 독일 제국 해군은 전드레드노트급 22척, 드레드노트급 14척, 전투순양함 4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독일 해군은 대양함대U보트를 중심으로 운용됐다. 해군이 참여한 주요 전투는 헬리골란트-바이트 해전, 코로넬 해전, 포클랜드 해전, 도거 뱅크 해전, 리가 만 해전, 유틀란트 해전, 알비온 작전과 문 사운드 해전,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전투는 유틀란트 해전과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독일은 유틀란트 해전에서 여러 영국 군함들을 침몰시켰으나 영국의 대륙 봉쇄를 푸는 데에는 실패했고 무제한 잠수함 작전은 알다시피 미국의 참전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불러오고야 말았다. 유틀란트 해전 이후 해군 주력함들은 대부분 킬 군항에 머물렀는데, 프란츠 폰 히퍼가 1918년 10월 해군에 자살돌격이나 다름없는 명령을 내리자 수병들이 킬 군항의 반란을 일으켜 제정을 무너뜨렸다. 전쟁에서 승리한 협상국이 독일 함대를 가져가려 들자 스스로 대양함대를 통째로 수장시켜버리면서 독일 제국함대의 역사도 허무하게 끝난다. 제국해군은 바이마르 공화국국가해군으로 이어졌다.

7. 외교

7.1.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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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비스마르크 체제로 구축한 대프랑스 포위망
독일 외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프랑스를 포위하는 것이었다. 프랑스를 성공적으로 외교적으로 고립시켰을 때에 독일 통일이 가능했고, 반대로 프랑스를 고립시키는 데에 실패했을 때에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를 모두 적으로 돌리면서 양면전쟁 끝에 결국 제국이 망했다. 즉 독일 제국 외교의 방점은 바로 프랑스를 어떻게 고립시키느냐에 달려있었다.

애초에 프랑스신성 로마 제국 때부터 독일의 최대 경쟁국이자 라이벌이었다. 중세 이래로 프랑스는 서유럽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보유한 대국이었고 독일에 강력한 통일 국가가 나오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견제해왔다. 1800년대 초중반기 들어 독일에서 프로이센 왕국을 중심으로 통일의 목소리가 분출되면서 독일이 프랑스를 제치고 유럽 최강대국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터져나왔다. 인구가 정체된 프랑스와는 달리 독일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결국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승리를 거두면서 프랑스는 알자스-로렌을 빼앗기고[116] 50만 프랑의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프랑스는 결코 이 굴욕을 잊지 않았으며 향후 몇 십년간 프랑스가 독일의 적이라는 것은 국제사회의 상수였다. 비스마르크는 인근 국가들이 프랑스의 공화정을 비웃도록 만들었고, 오스트리아, 러시아, 영국 같은 주요 강대국과 복잡한 동맹을 맺어 프랑스를 고립시키는 데에 온 힘을 쏟았다. 비스마르크 체제의 핵심은 프랑스의 고립이었다.

1870년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직후 70년대 프랑스의 대독일 외교는 '보복주의'라 한다. 프랑스인들은 위대한 프랑스를 패배시킨 독일에 대한 뿌리깊은 증오와 분노, 그리고 알자스-로렌을 잃은 상실감과 복수심에 불타올랐다. 그러나 1880년대부터 현실 정치 문제가 대두되면서 정치인들은 알자스-로렌 문제를 의도적으로 축소시키기 시작했으며 이 문제를 강조하던 구 나폴레옹 3세의 지지자들은 세력을 잃어갔다. 그 영향으로 1880년대부터 프랑스와 독일 관계는 생각만큼 나쁘지 않았다.

그러다가 1880년대 이후, 독일의 인구와 경제가 급성장하며 프랑스가 점점 뒤처지자 독일에 영원히 밀릴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다시 프랑스 내에서 싹텄다. 그나마 1890년대 프랑스가 아프리카 식민지를 두고 영국과 경쟁할 때 독일이 프랑스 편을 들며 잠시 화해 분위기가 연출됐지만 그마저도 1904년 모로코 위기로 끝장났다. 프랑스는 이제는 반대로 독일을 고립시키기 위해 영국러시아 제국과 손을 잡았다.

의외로 프랑스 국민 대부분은 외교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으며 특히 지식인들은 더 강력한 독일과의 전쟁을 반대했다. 프랑스의 대독강경 이익단체 식민지당(Parti Colonial)이 창설되었을 때 총 회원수는 고작 5,000여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고위 정치인과 군부 사이에서는 도저히 독일의 성장을 묵과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고, 프랑스는 독일과의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890년 비스마르크가 축출되고 빌헬름 2세가 온갖 외교실책을 저지르고 다니자, 프랑스는 독일 고립에 착수했다. 프랑스 - 영국 - 러시아가 뭉친 삼국 협상이 결성되며 독일은 본격적인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들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뭉친 삼국 동맹에 맞서 전쟁을 벌였으며 독일이 패전하자 가장 가혹한 휴전 조건을 들이밀었던 것도 바로 프랑스였다.[117]

7.2. 영국

원래 영국과의 관계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118] 애초에 영국은 프랑스와 러시아라는 두 강국을 견제하겠다고 프로이센의 독일 통일을 지지했다. 물론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총리와 일각에서는 권위주의, 국가주의적인 프로이센의 등장이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인근 약소국들을 집어삼킬 것이라는 우려가 이미 슬슬 나오고 있었다. 비스마르크 재임기 동안인 1890년까지도 양국 사이는 괜찮은 편이었다. 비스마르크는 영국과의 충돌을 우려해 해외확장을 꺼렸고 여론에 떠밀려 아프리카 식민지를 만들 때에도 최대한 영국의 편의를 보면서 움직였다.

그러나 비스마르크가 실각하고 빌헬름 2세가 등장, 독일을 최고 강대국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대놓고 드러내며 세계 정책건함 경쟁을 추진하며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빌헬름 2세는 영국이 절대 러시아와는 손을 잡지 못할 것이며, 러시아와 프랑스의 밀월도 곧 붕괴할 것이라 믿고선 막나갔다. 그러나 그의 분석은 완전히 오답이었고 독일은 대신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이탈리아에 의존해야만 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다민족 문제, 그리고 이탈리아와의 영토 갈등 때문에 이 둘은 썩 신뢰할만한 동맹이 되지 못했다. 특히 모로코 위기를 계기로 영국과의 관계는 완전히 비틀어졌고, 1914년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은 독일의 반대편에 서서 독일 제국을 파멸시키는 데에 앞장서게 된다.[119]

7.3.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는 초창기에는 관계가 좋지 않았으나 서서히 개선됐다. 애초에 프로이센의 독일 통일 자체가 기존의 독일 내 패권국인 오스트리아를 쫒아내고 세운 것이었으니 초반에는 관계가 좋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오스트리아는 관심을 독일이 아닌 발칸 반도로 돌렸다. 독일 역시 같은 뿌리나 다름없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감정이 나쁘지 않아서 갈수록 감정이 우호적인 편으로 변했다. 1882년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이탈리아까지 끼워서 삼국 동맹을 창설했다. 독일 제국의 베트만홀베크 수상은 1914년 9월 프로그램을 제안,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등 여러 중부 유럽국가들로 구성된 중부유럽 경제연합체 창설을 건의하기도 했다.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되자 독일은 오스트리아의 편을 들어 세계 대전에 참전했고, 함께 사이좋게 망하면서[120] 최후까지 운명을 같이하게 된다.[121]

7.4. 러시아

독일과 러시아 제국은 처음에는 괜찮은 동맹이 될 것 같아보였다. 비스마르크는 러시아에 접근해 1872년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를 하나로 묶는 3제 동맹을 만들었고 함께 사회주의와 공화주의를 견제, 외교 전반을 함께 상의하기로 합의하기까지 했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러시아와 좋은 관계를 맺고자 했다.[122] 하지만 오스만 제국 문제에서 충돌이 빚어졌다. 러시아가 보스포루스 해협을 가지려들자 당연히 열강들이 반발했고 이에 비스마르크가 중재자로 나섰는데, 그렇게 이뤄진 1878년 베를린 회의의 결과가 러시아의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123] 1887년 재보장조약이 체결되었으나 둘 사이의 관계는 물밑에서 갈수록 악화됐다. 독일은 러시아의 잠재력을 두려워했고 러시아는 독일의 막강한 군사력을 우려했다. 결국 러시아는 1907년 삼국 협상을 맺어 독일의 반대편에 섰고, 제1차 세계 대전 때도 독일에 맞서싸웠다.

7.5. 기타

독일은 다른 국가들과도 활발히 외교전을 펼쳤다. 이탈리아 왕국과는 동맹을 맺은 관계였지만 이탈리아 왕국이 같은 동맹인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트렌토이스트리아 반도 등 이탈리아계가 거주하는 지역들을 호시탐탐 노리면서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탈리아는 자꾸 삼국 동맹에서 오스트리아와 충돌하며 삐끗거리며 골칫거리를 안겼다. 게다가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처음에 중립을 지키다가 1915년에는 아예 독일 반대편으로 참전해 오스트리아를 뜯어먹으려 들었다.

미국과는 좋은 관계로 시작했으나[124] 미국산 돼지고기 보이콧,[125] 사모아에서의 외교적 갈등, 독일이 카리브해베네수엘라 등에 진출하며 먼로 독트린을 어기며 충돌하는 등 꾸준히 갈등이 생겨났다. 비스마르크가 물러나고 군국주의적이고 변덕스러운 빌헬름 2세가 전권을 잡자 미국 내에서는 점차 호전적인 독일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생겨났고, 전쟁 때도 처음에는 중립을 지켰으나 루시타니아호 침몰 사건치머만 전보 등이 연달아 겹치며 결국 독일을 응징하러 참전한다.

8.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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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1878년 독일 제국의 무도회
공업화로 인해 기존의 사회 계층에도 큰 변화가 있었고, 이는 독일 제국의 정치 지형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제4계급(Der vierte Stand)[126]이라고 지칭하던 노동자들이 사회적으로 대거 양성된 것이다. 비록 숙련/비숙련공, 남성/여성, 출신계층 등에 따라 이해관계가 엇갈리면서 단일한 계급의식을 갖추는 데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지만, 노동 계급은 사회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규모로 성장했고 이들 중 다수의 지지를 바탕으로 창설된 SPD는 당국의 모진 탄압에도 불구하고 1890년 총선에서 득표율 1위를 확보했고 독일 내 가장 유력한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는데 성공해 지속적으로 주요 정당의 지위를 차지했다. 이와 동시에 노동 시간 규제와 사회복지 정책의 확충이 이어져 노동자들의 권익도 점진적으로 개선되었다.

또한 구체제 특권층들과 노동자 계층 사이에 끼여서 정치적인 영향력은 제한적이었지만, 부르주아 계층 역시 그들 나름대로 문화적인 측면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했고, 부르주아적인 생활, 도덕 양식이 당대 사회에서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하는데 성공했다.[127] 결과적으로 제국에는 귀족과 부르주아, 노동자 이렇게 3개 계급이 존재했다.

1895년 독일에는 총 1,200만 가구가 있었는데 개중 25만 가구만이 귀족, 대지주와 사업가, 고위 관료, 의사나 임차인 등등 소위 말하는 '상류층'이었다. 상류층은 아니지만 그래도 굶을 걱정은 안하고 넉넉히 살아가는 중상류층도 있었다. 주로 중소 지주와 중소기업가, 대부분의 상급 공무원, 대부분의 전문직이 여기 속했으며 대략 275만 가구 정도 됐다. 약 375만 가구의 소농, 수공업자, 소상공인, 중급 공무원, 숙련 노동자 등 중하류층이 있었다. 하류층에는 주로 달마다 봉급을 받아 생활하는 임금근로자, 철도 및 우편 공무원 등 하급 공무원, 가난한 수공업자들과 농민들이 있어서 약 525만 가구였다. 사회적 이동성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한 번에 인생역전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몇 세대에 걸쳐서 부를 쌓아 계급 역전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독일의 산업화와 자본주의화에도 불구하고 1900년대까지도 독일 계급 피라미드의 꼭대기에는 여전히 귀족들이 군림하고 있었다. 귀족들은 사회적 명예와 지위, 막대한 부를 여전히 소유한 채 신생 부르주아 자본가들과 분명히 선을 그으며 스스로를 차별화했다. 귀족들의 토지 위주 경제기반은 날로 취약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족은 국가, 행정, 군대에서 강력한 위치를 차지했다. 공직에 있는 귀족 수는 갈수록 감소했지만, 고위급으로 올라갈수록 귀족들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아지는 것은 변치 않았다. 그 다음 계급인 부르주아들은 단일한 계층이 아니었다. 경제 발전과 더불어 사업가들과 은행가들이 등장했고, 이들은 귀족보다는 못해도 사회 최상류층 자리를 차지했다. 건축가, 엔지니어 등 수많은 직업들의 등장으로 중산층의 규모는 크게 늘어났다. 수공예인들과 소규모 무역가들 같은 기존의 중산층에 고소득 근로자들과 중급 공무원들로 구성된 새 중산층들이 추가됐다. 이들은 직종으로나 이념적으로나 모두 달랐지만, 하류층 길거리 근로자들과 자신들을 다르다고 생각했다는 것만큼은 공통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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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1886년 독일 노동자들의 파업
가장 밑바닥에는 당연히 노동자들이 있었다. 1882년부터 1907년까지 무역과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 수가 2배로 늘어나 860만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산업노동자 집단은 하나의 단일한 집단이 아니었다. 여성과 고령 노동자들의 임금은 젊은 남성 노동자에 비해 확연히 낮았다. 대도시에 거주하는 노동자들의 수가 증가했지만 대다수는 여전히 중소 도시에 거주했다. 고향인 농촌 마을과 끈을 유지하는 노동자들이 많아서 상당수는 여전히 농촌적 가치관을 갖고 있었다. 한 곳에 머무르는 노동자와 이리저리 떠도는 노동자들도 차이가 컸다. 전문화된 자격증이나 기술을 갖고 있느냐없느냐 여부도 중요한 기준이었다. 숙련된 기술 훈련을 받은 노동자들은 갈수록 감소하는 반면에 비숙련 노동자들은 그 비율이 날로 증가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내부적으로 어디 출신이든, 숙련되든 되지 않았든, 그들에게는 긴 노동시간을 버텨내야 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1914년 독일 노동자들의 주당 노동시간은 55시간으로 줄어들었으나 작업 자체는 더욱 강도높고 엄격해졌다. 대부분이 수작업이었고 건강에 위험한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의 노동은 육체적으로도 매우 고되었다. 특히 대기업을 중심으로 엄격한 사내 문화와 규정들이 발달했고, 이는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관계를 확실한 수직상하관계로 만들었다. 독일의 실질임금은 제국 시대 동안 크게 증가했고 생활 여건도 개선되었지만 이게 안전한 생활과 직결되지는 않았다. 도시 노동자들은 점점 자기들끼리 뭉쳐서 하류층 문화를 형성하며 일체 계층으로 조직되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산업재해 방지와 봉급 인상을 두고 노동조합이 탄생했다. 농업 역시 점점 도시로의 이주와[128] 농업 방식의 변화로 농촌 노동자의 수는 점점 감소했다.

8.1. 노동조합복지국가의 탄생

이 시대의 또다른 특징은 바로 이익단체들의 출현과 확산이다. 농민협회는 비록 엘베강 동쪽의 지주, 즉 융커들이 꽉 잡고 있기는 했지만 전국의 농민들을 성공적으로 조직하고 규합했다. 지도부가 융커인 탓에 국가주의적, 반유대주의적 성향이 매우 강하긴 했어도 농민협회는 전국 농촌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비슷한 이익단체들이 우후죽순 생겨나 정치권에 엄청난 로비를 퍼부었고, 이에 빚을 진 정치인들은 의회나 정부에서 이들에게 이권을 베풀었다. 독일산업가중앙협회 같은 산업가 협회는 로비에 딱히 성공적이지는 못했으나 여전히 보호관세 같은 핵심 분야에서는 정치권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대규모 자본가, 산업가들이 모여 결성한 '산업가연맹'이나 '경영자협회'는 사내 노동조합을 반대했다. 수많은 조직들이 생겨나 1907년에는 산업, 공예, 무역, 상업 분야에만 무려 500개의 협회와 2,000개의 산하 조직이 있었다.

노동조합은 단순히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과 봉급 인상을 요구하는 사내 조직에서 벗어나 정당과 협력해 정치 세력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노조와 협력한 주요 정당들은 독일 사회민주당, 독일 중앙당, 좌파 자유주의 진영이었다. 특히 사회민주당과 협력한 소위 '자유노조'는 사회주의 탄압법이 종결되었을 때 기준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노조원을 거느리고 있었다. 다만 루르 같은 산업지대 한정으로는 기독교 연합노조가 더 강력할 때도 있었다. 1900년대 들어서는 폴란드 지방에 폴란드어를 사용하는 비사회주의 노조들도 등장해 폴란드 독립세력과 협력했다.

사회민주당은 노조를 성공적인 지지기반으로 통합한 반면, 가톨릭 중앙당과 좌파 자유주의 진영은 사회민주당보다 노조를 다루는 데에 애를 먹었다. 좌파 자유주의자들은 1860년대 이래로 사회주의 노조, 기독교 노조와는 차별화되는 자유주의 노조들을 결성해 한 세력의 축을 형성하려 시도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 가톨릭 중앙당은 산하 노조의 규모는 컸지만 어디까지나 이질적인 팽창이었다. 중앙당은 여전히 저명 인사 몇 명들로 구성된 정당으로 남아있었으며 근대적인 정당으로 발전하는 데에 실패했다. 산업 지대나 대도시에서는 가톨릭독일인민협회나 기독교노동조합처럼 수 백만 명의 회원들을 거느린 노조들이 등장해 가톨릭을 믿는 노동자들을 규합하려 애썼다. 그러나 중앙당의 주 지지세력은 여전히 남독일 가톨릭 농촌 지대의 신부, 성당, 전통적인 농민 공동체들이었다.

독일에서 복지국가에 대한 담론이 떠오른 것은 급격한 산업화와 근대화의 반동이었다. 19세기 전반기 독일은 자유주의의 바람 아래 경제와 사회에 대한 개입을 대폭 줄였지만 제국 시기에 들어서 다시 바뀌었다. 사회갈등이 고도화, 정치화되며 정치적으로 해결되어야할 현안으로 급부상했고 공공 서비스가 지방자치단체 중심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비스마르크는 국가 복지를 노동자들이 사회주의로부터 멀어지게 만들 수단으로 활용했다. 국가의 재분배, 복지 정책은 노동자들을 국가에 귀속시키려는 의도였다. 억압적인 사회주의 탄압법과 함께 노동자들에 대한 당근책이었던 것이다. 1883년 건강보험이 시행됐고 1884년에는 상해보험이 도입되었으며 마침내 장애 및 노령보험까지 들여왔다. 독일의 사회보장제도는 사회갈등을 어느 정도 완화하기는 했으나 그 혜택이 크지 않아서 근본적인 해결에는 실패했다. 실업급여는 존재하지조차 않았다. 결국 국가 복지를 이용해 노동자들을 사회주의에게서 멀어지게 하겠다는 비스마르크의 본 의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9. 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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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독일 제국의 인구 증가
독일 제국이 수립되던 1871년에 약 4,100만 명 규모였던 독일 제국의 인구는 이 시기 폭발적으로 성장하여서 1917년에는 6,200만 정도로 불과 40년 사이에 1.5배 이상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성장의 원동력으로는 크게 2가지를 들 수 있는데, 첫 번째로는 다른 국가와 비교해서 상당히 높았던 출산율[129], 그리고 2번째로는 지배하고 있던 폴란드 일대에서 경제적 풍요를 찾아 상당한 이민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날로 발전하는 의학 기술과 훨씬 개선된 위생 수준, 영양섭취량 증가로 유아 사망률과 산모 사망률이 동시에 급감했던 것 역시 독일의 인구 급증에 한몫했다.

그러나 인구 증가는 지역별로 편차가 매우 심했다. 산업화된 서부와 중부 독일은 일자리를 찾는 노동자들이 몰려와 인구가 치솟았던 반면, 농업 위주였던 독일 동부와 프로이센, 폴란드 일대는 오히려 인구가 빠져나가는 역효과를 맞았다. 베를린, 함부르크, 브레멘 등 대도시와 라인란트, 루르베스트팔렌의 산업지대, 실레지아 상부와 독일 중부에서 인구 증가가 두드러졌다. 인구가 급증해 주거조건이 악화되자 독일인들은 해외이민으로 눈을 돌렸고, 1870년대 이래로 쭉 증가하더니 1880년대와 90년대에 정점을 맞았다. 그러다가 90년대부터는 국외이민보다는 국내 이주가 더 늘어났다. 1907년 기준 독일인 48%가 고향 아닌 타지에 살고 있었다.[130] 사람들은 처음에는 대도시 인근에서, 나중에는 농촌에서까지 이주해왔다. 가장 대표적인 산업지대 루르의 경우 미친듯이 사람을 빨아들인 덕에 인근 자우어란트나 뮌스터란트 일대는 이미 1870년대에 인력이 고갈나버렸다.

1880년대 후반과 1890년대부터 점점 국내 장거리 이주가 늘어났다. 사람들은 내부 제후국들의 국경을 넘어 온갖 곳으로 이주했다. 특히 동쪽의 프로이센 동부에서 서쪽의 베를린과 라인-베스트팔렌 산업지대로 옮겨오는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 1907년까지 무려 194만 명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동프로이센과 서프로이센, 포젠 지방을 떠났다. 인구 조사 당시 이 지방들에서 태어난 인구의 24%가 다른 곳에서 살고 있었을 정도였다. 이들 중 40만 명은 루르로, 베를린으로 36만 명이 이주했다. 1914년까지 프로이센 시민들 중 45만 명이 루르 일대로 이주했고 개중 대부분은 폴란드어를 사용하는,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등진 폴란드인들이었다. 이렇게 새로 루르로 이주해온 이주민들은 기존 루르 사람들에 비해서 문화적으로, 언어적으로 확연히 구분됐다.

장거리 이주자들 절대다수는 독신의 젊은 남자들이었다. 단거리 이주자들은 대부분이 여성들이었는데, 다만 이 통계는 계약직 메이드로 고용되어 타지에서 잠시 일하는 여자들도 함께 잡혔기에 여자들이 과대표집되어 믿을 것은 못된다. 사람들이 이주할 때는 아예 가족들을 다 데리고 집을 옮기는 경우도 많았다. 노년기나 경제 불황기에 일자리가 없어지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도 흔했다. 특히 루르처럼 수요가 엄청난 지역은 필요할 때만 쓰는 계절 계약직도 많았는데, 매년 사우어란트의 건설 노동자 수 백명이 몇개월 임시계약직으로 루르에서 일하곤 했으며 겨울에는 다시 돌아왔다. 특히 철도의 도입으로 이동비가 저렴해지며 통근도 크게 늘어났다. 이렇게 임시계약직과 철도의 등장으로 영구적인 이주가 불필요해졌으며, 특히 농부들이 더이상 소규모의 수익성 적은 자기 밭을 버리고 도시로 떠나는 일이 줄어들었다.

한편 경제 발전과 더불어서 도시화 역시 두드러진다. 인구의 이동 증가로 인해 도시의 성장과 도시화가 결정적으로 탄력을 받은 것이다. 예를 들어 베를린 일대는 1890년부터 10년 동안 323,000명이 이주해왔다. 1900년부터 1910년까지는 이민자 수가 60만 명이 넘어갔다. 라인-베스트팔렌 산업지대에서는 1850년부터 1900년 사이에 이민으로 인구가 7배 증가했다. 이 무렵 인구의 절반 이상이 이민자였고 도르트문트, 뒤스부르크, 에센 등 대도시는 인구의 절반 미만만이 도시 토박이 출신이었다. 게다가 노동자들이 한 곳에 오래 정착하지도 않았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1년 후에 바로 다른 일자리를 찾아 다른 도시로 떠났다. 뒤스부르크는 1850년부터 50년 간 인구가 9만 명 이상 증가했지만, 그동안 71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도시에 거주등록과 취소를 거듭했다. 켐니츠는 1900년부터 10년 동안 인구가 73,000명 증가했지만 42만 명 넘는 사람들이 이주해오는 등안 385,000명이 떠났다. 이민해서 들어오고 나가는 유동인구량이 인구 순증가량의 10배에 달하는 도시들도 드물지 않았다.

이미 180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독일의 도시화는 이민으로 크게 가속화됐다. 1871년 기준 인구 2만명~10만명 사이의 중형급 규모 도시는 75개에다가 인구 10만명 이상의 대도시는 8개에 불과했지만, 1910년이 되자 중형급 도시는 223개, 대도시는 48개로 증가했다. 이 기간 동안 베를린의 인구는 826,000명에서 2,071,000명으로, 함부르크 인구는 290,000명에서 931,000명으로 늘어났다. 1914년 뮌헨라이프치히는 인구가 60만명에 달했고 드레스덴은 55만명, 쾰른브레슬라우는 51만명이 넘어가는 대도시로 성장했다. 가장 극적인 예는 산업도시였던 겔젠키르헨. 1871년부터 1910년까지 인구가 17만 명이나 늘어났다. 뒤스부르크, 도르트문트, 에센, 뒤셀도르프는 물론이고 도 군항 덕분에 크게 규모가 불었다. 플라우엔은 여전히 높은 성장세를 보이는 유일한 직물 산업 도시로, 엘베르펠트나 바르멘은 약간 뒤처지는 감이 있었다. 자르브뤼켄은 자르 지방과 뉘른베르크와 함께 다양한 산업구조를 가진 대도시로 성장했다.

1871년 인구의 64%가 주민 2,000명 미만인 소규모 지역사회에 살았고 10만 명 이상의 대도시에 사는 인구는 5%에 불과했다. 그러나 1890년에는 이미 농촌과 도시에 거주하는 인구가 똑같아졌고 1910년이 되자 주민 2,000명 미만 지역사회에 사는 인구는 40%로 감소, 대도시는 21.3%, 중소도시에는 27.4%에 달하는 인구가 거주했다.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지방은 라인 지방과 루르의 베스트팔렌 일대였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 라인-베스트팔렌 산업지대 인구의 75%가 도시에 살았다. 원래부터 산업화율이 높았던 작센 일대도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고, 인구 밀도는 동프로이센, 서프로이센과 비슷했다.

도시로 사람들이 몰려 인구가 급증하자 도시의 구조 자체가 요동쳤다. 특히 루르의 넓게 뻗어있는 신도시들에서 이런 경우가 많았는데 정부가 개입하기도 전에 사람들이 건물들을 세워대는 통에 난개발이 뒤죽박죽 이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도심지역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고 주거 및 상업지역이 뚜렷히 구분됐다. 중산층 주거지, 노동자 숙소, 공업지대, 기타 도시기능지역 등이 등장했다. 그러나 도시들은 죄다 저소득층의 주택의 만성 부족에 시달려야만 했고 산업지대의 노동자들이 숙박할 곳이 없어 하루하루 싼값에 잠만 자는 여관들이 늘어갔다. 베를린은 아예 도시 구역이 통째로 공동 주택인 경우도 있었다.[131] 정부는 나름 주택 부족을 해결하려 시도했으나 늘어난 인구를 감당하기에는 태부족이었다. 결국 도시 내에서도 사회적으로 분리가 일어나 상류층, 중산층은 공장의 악취에서 멀리 떨어진 도심지에 세워진 반면, 하류층들은 공장에 가까운 도시 우범지대에 모여 살았다.

10. 민족

파일:Sprachen_Deutsches_Reich_1900.png
<rowcolor=#fff> 독일 제국의 민족 분포

독일 제국의 민족 구성 [펼치기ㆍ접기]
||<-3><#000><tablebordercolor=#dd0000><rowcolor=#fff> 독일 제국의 민족 구성 ||
독일어[132] 52,136,049 92.50
폴란드어[133] 3,228,538 5.73
프랑스어 211,679 0.38
덴마크어 141,061 0.25
체코어[134] 107,398 0.19
리투아니아어 106,305 0..19
카슈브어 100,213 0.18
소르브어 93,032 0.16
네덜란드어 80,361 0.14
프리지아어 20,677 0.04
영어 20,217 0.04
러시아어 9,617 0.02
스웨덴어 8,998 0.02
헝가리어 8,158 0.01
스페인어 2,059 0.00
포르투갈어 479 0.00
기타 언어 14,535 0.03
전체 인구 56,367,187 100.00


독일인이 주류 민족이었으나 폴란드인, 프랑스인, 체코인, 리투아니아인, 카슈브인, 소르브인, 네덜란드인 등 일부 소수민족들이 존재했다. 1900년 시행된 인구 조사에서 제 1언어로 사용하는 언어를 조사한 자료가 현재 남아 있는데, 해당 자료에 따르면 조사 대상자의 92%가 독일어를 제 1언어로 사용한다고 응답했고, 폴란드어를 제 1언어로 사용한다는 응답이 5.48%, 프랑스어 0.38%, 마주리아어[135]덴마크어가 0.25% 리투아니아어 0.19%, 카슈브어 0.18% 등으로 집계되었다. 폴란드인이 주된 소수 민족이었으나 그조차 비중이 5%에 그쳤고, 기타 소수민족이 훨씬 적은 비율로 분포했다. 독일 제국은 독일인이 전체 인구의 92%를 차지할 정도로 독일인의 비율이 높았다.

독일은 통일 직후부터 프랑스영국처럼 단일국가로 발전해나가기 시작했다. 1880년경 독일에는 무려 4,200만 명의 독일어 원어민들이 존재했고 비독일어 사용자는 고작 325만 명에 불과했다. 325만 명의 비독일인들 가운데 250만 명은 폴란드인이나 체코인이었고, 14만 명이 소르브인, 20만 명이 카슈브인, 15만 명이 리투아니아인, 14만 명이 덴마크인, 28만 명이 프랑스인이었다. 보통 비독일어 사용자들이 분포하는 쪽은 타국과 접한 국경 지대였다. 예를 들어 프랑스인들은 대부분 알자스-로렌에 살았고, 폴란드인들은 대부분 동부의 옛 폴란드 영토에 살았으며 덴마크인들은 대부분이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 거주했다.

황제와 수상, 정부 수상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성향의 부르주아 중산층들도 독일의 언어적, 문화적 동화정책을 지지했다. 학교는 독일어를 국어로 삼아 중심으로 교육하며 독일화 정책의 핵심이 되었다. 기존 프로이센 지방에서는 폴란드인 목사들이 폴란드어를 사용해 교육을 했지만 곧 세속적인 독일인 교사들로 대체됐다.[136] 독일어는 유일한 국어이자 법정 공용어로 지정됐다. 동부에 상당한 영토를 걸치고 있던 프로이센 왕국은 제국 이전부터 소수민족에 관용적인 편이었고 모국어 교육을 명목상으로나마 지지했지만, 제국 선포 후부터는 대놓고 동화정책으로 바뀌었다. 폴란드어는 학교에서 사용이 금지됐고[137] 폴란드 교사들이 항의하자 프로이센 당국은 징계로 대응했다. 독일인들을 폴란드로 정착시키기 위해 폴란드인의 대규모 소유 금지 조치가 이뤄졌다. 폴란드인 35,000명이 독일인들을 위한 땅을 만들기 위해 외지로 추방됐다.

독일 당국은 독일인들을 위한 땅을 만들기 위해 폴란드인들을 쫒아내고자 온갖 술수를 다 썼지만, 이는 오히려 프로이센의 관용 아래에서 잘 살아가던 폴란드를 독일에 저항하게 만들었기에 반쪽짜리 성공만을 거두었다. 독일 정부는 집요하게 폴란드를 탄압했지만 되려 포즈난 지방에서 폴란드어 사용 인구가 증가하고 독일인들은 비율이 감소했다. 폴란드인들을 비롯한 소수민족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보존하려 노력했고 자체적인 농민협회, 신용기관, 구호단체를 설립하는 데에 성공했다. 모든 소수민족들은 독일 의회에서 안정적으로 대표되었고 심지어 일부 과대대표되기까지 했다. 폴란드인들의 정체성은 전혀 사라지지 않아[138] 오히려 전후 독일-폴란드 관계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쳤다. 1차 대전 이후 탄생한 폴란드 제2공화국은 옛 포젠과 서프로이센 대부분을 차지했는데, 폴란드는 이제 반대로 독일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11. 경제

파일:BASF_Werk_Ludwigshafen_1881.jpg
<rowcolor=#fff> 루트비히스하펜BASF 공장
독일이 전근대적 농업국가에서 오늘날과 같은 산업화된 세계적인 경제대국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한 것도 독일 제국 시기의 일이다. 초기에는 철도 부설 사업, 제철업 등이 경제 분야에서 두드러졌으며, 1890년대 이후로는 제2차 산업 혁명의 물결에 힘입어 독일 내에서도 각종 석유화학 산업 등이 차지하는 파이가 커지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GDP 상으로도 확인가능한데, 독일 제국 수립 극초창기인 1873년을 기준으로 독일 내에서 농업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0% 가량이고, 중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30% 가량이었다. 하지만 20년 후인 1895년이 되면 농업의 GDP 내 비중은 32%로 감소하며, 중공업이 36% 가량으로 농업을 제치고 독일 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산업군으로 올라섰다. 이러한 경제 발달에 힘입어서 노동자 계층의 규모가 크게 성장했으며, 관리자와 노동자 사이를 연결해 줄 화이트 칼라직 역시 대거 등장하게 된다. 이들 화이트 칼라 종사자들은 노동자들을 경멸하면서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실 경제적인 상황만 비교하자면 노동자들보다 못할 때도 많았다. 특히 숙련공 노동자들과 비교해서는 경제적인 여건이 열악했다.

독일은 이 시기 제1차 경제의 기적이라고 불릴 정도로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 독일은 특히 산업혁명의 선구자였던 영국을 눈에 띄게 뒤따라잡는 데에 성공했다. 1860년대 초 영국이 세계 산업 생산량의 20%를 독차지하고 있던 반면 독일 연방은 고작 4.9%에 불과했다. 그러나 독일 통일 이후, 독일은 미친듯한 속도로 성장해 1880년과 1900년 사이에 이미 열강들 중 경제규모 3위로 발전했다.[139] 1913년 독일은 세계 산업 생산량의 14.8%를 생산해내며 13.6%의 영국을 추월하기까지 한다.[140] 무역량으로 봐도 이미 미국보다 앞섰고 영국보다 근소하게 뒤처질 뿐이었다. 1인당 GDP 역시 독일 제국 기간을 거치며 크게 증가했다.

1871년 제국 건국부터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까지 독일은 역동적인 경제 성장을 거쳐왔다. 물론 순조롭게 성장한 것만은 아니었다. 일정 주기로 불황과 경제 위기가 닥쳐왔고 이는 독일의 경제 자체를 주저앉히지는 못했으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1867년부터 1873년까지의 건국 호황이 끝나고 '건국 위기'가 닥쳐왔다. 1879년까지 지속된 불황 때문에 독일과 타 유럽국가들의 경제 성장률이 반토막났고 생산량이 감소했다. 독일의 철강 수요가 절반으로 감소했고 광부들의 임금은 절반으로 감소했다. 1879년 잠시 불황에서 벗어나 1882년까지 일시적인 회복세가 왔다가 다시 4년간의 불황이 찾아와 1886년까지 지속됐다.[141] 1890년까지 4년간 강력한 호황이 불어닥쳤고, 잠시 성장이 둔화되다가 1895년에 다시 호황기가 왔다. 1900년에서 1902년, 1907년에서 1908년 사이에 짧은 불황이 왔지만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1895년과 1913년 사이의 호황기에 순투자액은 매년 평균 15% 증가했으며 전쟁 발발 직전 불황의 조짐이 막 보이던 참이었다.[142]

11.1. 산업의 발전

파일:KruppWerkstatt1900.jpg
파일:Industrieruine_Zeitz.jpg
<rowcolor=#fff> 1900년 크루프의 공장 독일중앙직물산업협회 건물
제국 초창기 가장 주된 산업은 농업이었다. 1873년 국내총생산에서 1차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37,9%, 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31.7%였다. 그러나 제국의 산업화가 이뤄지며 점점 공업의 비율이 높아졌고, 1889년에는 동률이 되더니 갈수록 격차가 벌어졌다. 1895년 농업의 비중은 32%에 불과했고 2차 산업은 무려 36%를 차지해 이미 역전됐다. 공업, 운송업, 서비스업 종사자 대 농업 종사자의 비율은 1871년 530만 명 대 850만 명이었지만 1880년에는 750만 명 대 960만 명, 1890년에는 1,000만 명에서 960만 명으로 역전됐다. 1910년에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1,050만 명이었고 산업, 운송업, 서비스업 종사자는 1,300만 명이었다. 농업 종사자의 수는 소폭 증가했지만 다른 산업에 비하면 크게 증가속도가 뒤처졌다.[143] 농업 내에서도 구조적 변화가 일어났다. 귀족들의 토지는 갈수록 줄어들었고 포메라니아에서 귀족들에게서 땅을 사들인 부르주아 지주들이 등장했다. 소규모 자영농들은 제 땅을 포기하고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갔기에 토지 거래가 활발해졌다.[144] 그 결과 20세기부터 농지 가격이 크게 올랐고,[145] 독일 당국도 1902년부터는 가족 단위 자영농들을 보호하는 정책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주요 산업 분야는 크게 요동쳤다. 지금까지 독일의 주 산업이 섬유 산업, 철강 산업, 광업, 철도 건설이었는데, 섬유 산업 전체가 그 중요성이 떨어졌고 그 안에서도 리넨 직조 등은 빠르게 몰락했다. 게다가 철도 건설업도 그 중요도가 하락했다. 1879년 전체 투자의 25%가 철도 건설에 관련된 사업에 투입됐으나 1889년에는 그 비율이 6% 미만으로 추락했다. 반면 광산업은 산업 혁명 와중에도 가장 크게 성장했다. 1907년부터 1913년까지 무연탄 생산량은 1억 4,300만 톤에서 1억 9,100만 톤으로 늘어났다. 루르의 생산량은 1875년부터 1913년 사이에 10배 증가했다. 루르의 직원 수는 1870년부터 1913년까지 5만 명이 조금 넘는 수준에서 44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동시에 광산당 평균 노동자 수도 약 400명에서 2,500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이같은 엄청난 노동력 증가 덕에 루르는 독일 내에서 상부 실레시아와 자를란트에게 산업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허나 광산업의 미친 듯한 성장에도 이 분야의 기술 혁신은 상대적으로 더딘 편이었다. 광부의 생산성은 1880년대 초와 1913년이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 광산 채굴은 질을 높이기보다는 폴란드에서 온 노동력을 때려박는 식으로 양을 늘려서 규모를 높였다. 곡괭이만 들 줄 알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작업이라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비숙련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종사하는 직종이기도 했다. 채굴 즉시 가공이 한 회사 내에서 전부 이뤄졌고 티센크루프 같은 대규모 광산회사들이 등장해 광산업의 산업사슬을 통째로 장악한 채 성장했다.
파일:800px-Adolph_Menzel_-_Eisenwalzwerk_-_Google_Art_Project.jpg
<rowcolor=#fff> 1870년대 초반 독일의 철강 공장
반면 철강업은 질적으로도 크게 성장했다. 염기성 제강법과 평로제강법의 도입으로 산업의 생산성이 10배나 훌쩍 뛰었고 특히 철강업은 25배나 생산성이 좋아졌다. 금속 생산에 종사하는 직원의 수는 1849년 43,000명에서 1913년 443,000명으로 증가했다. 철강업은 기업들의 독점도와 지역 밀집도가 가장 높은 산업 분야였다. 50대 기업이 독일 철강업 종사자의 45%를 고용하고 있었다. 철강 생산의 중요도가 크게 높아졌고 압연, 주물 생산도 더욱 빠르게 성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압연 공정이 철강 전체 생산량의 45%를 홀로 차지했다. 1890년대 이후부터는 전기공학, 기계공학, 대규모 화학산업이 새로 등장했다. 특히 기계공학은 기관차 및 증기기관의 등장으로 산업혁명 초기부터 두각을 드러내는 산업분야였는데 고도 산업화가 진행되며 더욱 성장했다. 베를린, 켐니츠, 아우크스부르크뉘른베르크, 라이프치히, 하노버, 만하임, 쾰른 등지가 기계공학의 중심지였다. 특히 이 분야는 대기업이 독점하지 못하고 여러 중견기업들이 난립하는 구조였다. 내연기관과 자동차 생산도 중요해져서 1912년 독일의 자동차 생산량은 16,000대를 넘어갔다.[146]

화학 산업의 성공은 대학 교육을 받은 고급 화학인력들에 기반했다. 1914년 레버쿠젠의 바이엘에서만 600명이 넘는 화학자들을 고용했고, 이를 바탕으로 혁신적인 제품들이 쏟아져나왔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독일은 스위스와 함께 화학 분야의 최고 선두주자였다. 1913년 독일은 세계 화학산업 수출의 28%를 차지해 16%의 영국을 넉넉한 격차로 따돌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독일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던 산업은 단연 전기산업이었다. 1847년 세워진 지멘스는 에밀 라테나우가 '일반전자회사'를 창립하기 전까지 독일의 독보적인 전기기업이었고 몇 년 후인 1883년에는 아에게가 등장했다. 1903년 지멘스와 아에게는 무선전신 투자를 위해 합작투자회사인 텔레풍켄을 설립하기도 했다. 1913년 지멘스는 독일에서만 57,000명, 해외에서는 24,000명의 직원들을 거느렸고 곧 아에게와 함께 세계 전기 시장에 막강한 영향력을 휘둘렀다. 전기산업은 전 직원들의 60%가 베를린에 집중되어 있을 정도로 베를린에 그 기반을 두고 있었다.[147]

1911/13년에 2차 산업에 일하는 모든 종사자들 중 15.7%가 금속 가공에 종사했다. 이는 1875년의 11.1%에 비해 소폭 증가한 수치였다. 광업은 7.4%로 1875년의 5.3%보다 증가했고, 금속 생산은 2.7%에서 3.7%로 증가, 화학 산업에 1.2%에서 증가한 2.3%로 올라뛰었다. 의류생산은 19.8%에서 13.3%로 크게 감소했지만 여전히 종사자 수는 굉장히 많은 편이었다. 식료품 생산업 역시 12.4%에서 11.8%로 약간 줄어들었지만 견고한 성장세를 보였다. 직물업은 17.1%에서 9.5%로 반토막나며 급격하게 종사자 수가 줄어 쇠퇴하는 모습을 보였다.

고도의 산업화 때문에 거대한 공장과 대기업들이 속속 탄생했다. 집중화된 대형 공장들이 독일의 지배적인 운영형태가 되었다. 1873년에는 공장 노동자들의 3분의 1만이 이런 형태의 대형공장에서 일했지만 1900년에는 비율이 무려 66%로 2배 뛰었다. 동시에 기업들의 형태도 크게 바뀌었다. 1875년 전체 근로자의 64%가 직원 5명 미만인 회사에서 근무했으나 1907년에는 불과 32%에 불과했다. 1907년 26%의 노동자들은 직원수 5~50명의 중형 규모의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37%는 직원수 50~1,000명의 '대기업'에서 일했다. 다만 직원수 1,000명 이상의 초대형 기업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은 5% 정도 밖에 안됐다. 아직 1,000명 이상의 직원들을 고용할 정도로 거대한 회사가 많지 않았기 때문. 그러나 일부 대기업들은, 예를 들어 크루프는 1887년에 이미 21,000명의 직원들을 고용했을 정도로 거대했다.[148] 대기업과 대형 공장들은 광업, 철강업 분야를 꽉 쥐고 있었고, 기계공학, 전기 및 화학 산업, 섬유 생산 순서로 대기업화된 비율이 높았다. 가죽, 목재, 의류 등에서는 대기업의 비중이 낮았다. 또한 독일 100대 회사 중 80%는 주식회사였다.

또다른 특징은 경제 고도화와 함께 기업의 집중도가 크게 높아졌다는 점이다. 비슷한 회사들끼리 서로 합병하거나, 기업이 업스트림이나 다운스트림 생산공장들을 세우거나 구매하면서 집중도가 크게 높아졌다. 예를 들어 제철소가 탄광을 인수하거나, 연탄 혹은 압연 공장을 인수하는 식으로 밸류체인의 한 뭉텅이를 통째로 차지하는 방법이었다.[149] 게다가 가격 담합, 생산량 설정 또는 계약을 통해 시장을 조작하는 카르텔이 등장했다. 라인-베스트팔렌 석탄 카르텔, 라인-베스트팔렌 선철 카르텔, 제철소 협회 등이 나타났다. 화학 분야에서는 바스프, 바이엘, 아그파 게바트가 카르텔을, 그에 맞서 훽스트, 카셀라, 칼 회사가 또 하나의 카르텔을 형성했다. 심지어 이들 6개 기업들이 또 합쳐져 복합회사인 이게파르벤을 나중에 형성했을 정도. 그러나 의외로 카르텔의 효과는 제한적이었고, 기업들은 경쟁을 완전히 없애고 시장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얻어내는 데에 실패했다.

민간 부문 외에도 공공 서비스 역시 큰 발전을 이룩했다. 1870년대 이후 독일, 특히 프로이센의 철도는 대부분 국유화됐다. 철도 네트워크가 이미 다 포화되어버린 탓에 지난 수십 년만큼 빠르게 성장하지는 않았지만 운송업은 크게 증가했다. 특히 전신, 우편, 전화 서비스 같은 공공부문이 크게 성장했다. 이에 따라 당연히 공공 고용 부문도 증가했다. 행정공무원의 수는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우편노동자, 철도노동자 등 국영기업에서 일하거나 준공무원 신분인 사람들의 수는 수백만 명에 달했다. 도시화로 소매업의 중요도가 커지자 일종의 편의점과 전문점이 등장했다.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잡화점들이 우후죽순 들어서 경쟁이 심화됐다. 은행업 분야에서는 부동산 자금 조달을 위한 모기지가 등장했으며 지방저축은행과 신용협동조합의 등장으로 개인 뿐만 아니라 중소기업들도 이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점점 산업화의 자금 조달에 필수적인 대규모 은행들이 나타났고, 주로 베를린라인란트 중심의 지역은행들이 서로 합병, 주식회사 형태의 대규모 은행그룹들을 형성해나갔다. 도이체방크가 가장 대표적.

12. 종교

파일:Verbreitung_der_Konfessionen_im_deutschen_Reich.jpg
<rowcolor=#fff> 독일 제국의 종교 분포[150]
독일 제국의 종교 분포는 근대 초기와 거의 변화가 없었다. 프로이센 왕국을 중심으로 한 슐레스비히홀슈타인, 포메른, 작센, 튀링겐, 브란덴부르크 일대 등 북독일은 개신교가 우세했고 바이에른 왕국을 중심으로 한 바이에른, 베스트팔렌, 바덴뷔르템베르크, 상부 실레시아 등 남독일은 가톨릭이 우세했다. 북부와 남부를 기점으로 종교 분리가 심각했기에 교파 간 결혼이 터부시됐으나 결혼, 이주 등으로 조금씩조금씩 종교가 섞여가고 있던 추세였다.[151] 다만 동부 일대에서는 '개신교 = 독일인, 가톨릭 = 폴란드인'이라는 민족적인 구분도 가능했기에 더더욱 종교적 차별이 심했다. 가톨릭 우세 지역들은 가톨릭 정당 독일 중앙당의 표밭이었고 반면 사회민주당은 그나마 루르 지방에서나 간신히 표를 확보하는 수준이었다. 물론 갈수록 제국이 세속화되며 이런 정치적 선호도 약간씩 변하기는 했지만.
<rowcolor=#fff> 독일 제국의 종교 분포
국가 개신교 가톨릭 기타 기독교 계열 유대교 기타
숫자 % 숫자 % 숫자 % 숫자 % 숫자 %
프로이센 왕국 17,633,279 64.64 9,206,283 33.75 52,225 0.19 363,790 1.33 23,534 0.09
바이에른 왕국 1,477,952 27.97 3,748,253 70.93 5,017 0.09 53,526 1.01 30 0.00
작센 왕국 2,886,806 97.11 74,333 2.50 4,809 0.16 6,518 0.22 339 0.01
뷔르템베르크 왕국 1,364,580 69.23 590,290 29.95 2,817 0.14 13,331 0.68 100 0.01
바덴 대공국 547,461 34.86 993,109 63.25 2,280 0.15 27,278 1.74 126 0.01
엘자스로트링겐 제국영토 305,315 19.49 1,218,513 77.78 3,053 0.19 39,278 2.51 511 0.03
총합 28,331,152 62.63 16,232,651 35.89 78,031 0.17 561,612 1.24 30,615 0.07

12.1. 독일 제국 내 유대인

1871년 기준 독일 제국 인구의 1%가 조금 넘는 비중이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낮은 출산율과, 유대인과 기독교도가 결혼하면 보통 자녀들을 기독교로 개종했기 때문에 유대인의 비율은 계속 줄어들었다. 유대인들이 대부분 대도시에 몰려살았다. 1910년 경 전체 유대인의 3분의 1이 베를린 시내와 인근에 거주했으며 베를린 일대 인구의 5%가 유대인이었다. 베를린 외에도 프랑크푸르트암마인(전체 도시 인구의 10%), 브레슬라우(전체 도시 인구의 5.5%), 쾨니히스베르크, 함부르크(전체 도시 인구의 3.2%)에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다. 물론 모든 유대계들이 도시에 사는 것은 아니라서 농촌에도 일부 살긴 했는데, 주로 포젠 지방, 서프로이센 및 상부 실레시아, 헤센 대공국 일대, 하부 프랑코니아, 팔츠알자스가 주요 농촌 거주지였다.

독일 내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독일인이라고 여겼다. 이같은 경향은 특히 폴란드인과 혼합된 사회였던 동부에서 두드러졌다. 동부 이디시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조차 스스로를 독일인이라 여겨 독일과 동화되려 노력했고, 스스로를 폴란드인들과 구분하려는 풍조가 강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에 다시 유대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시온주의는 독일계 유대인들 사이에서 딱히 지지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독일 내 반유대주의는 심각한 수준이라 1873년에 이미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수도 슈투트가르트에서 대규모 반유대 폭동이 일어나 3일간 유대인 집단학살이 일어나기까지 했다.

유대인들도 독일 내에서 배척당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뼈저리게 알고 있었기에 1893년 '독일유대인신앙시민중앙협회'를 설립했다. 독일에 동화된, 혹은 동화되고자 하는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유대인들의 모임으로 반유대주의와 맞서 싸우는 것이 주 목표였다. 이들은 유대인을 별도의 민족이나 별도의 인종으로 보는 시각을 거부하고 대신 독일 내 여러 부족들 중 하나로 치부했다. 독일계 유대인들은 사업, 문화, 과학, 학술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10년 독일계 유대인의 인구는 615,000명으로 전체 인구의 0.9%에 불과했지만 검사판사의 4.28%, 의사의 6.01%, 변호사와 공증인의 14.67%가 유대인이었다. 문화적으로도 유대인은 저명한 음악가나 예술인들 중 무시못할 비율을 차지했다. 유대인들의 주요 거주지이자 제국의 중심이었던 베를린에서 이같은 사회적 집중도가 더욱 심했고, 유대인은 세계 문화와 과학에까지 상당한 공헌을 했을 정도로 독일 사회 내에서 탁월한 성취를 자랑했다.

그러나 1,000년 넘게 뿌리깊은 반유대주의를 극복하기란 어려웠다. 특히 빌헬름 2세 후기로 갈수록 더욱 심해졌는데, 유대인들은 장교가 될 수 없었고[152] 유대인 대학 교수는 유대인 강사에 비해 확연히 수가 적었다. 유대인들은 독일어, 독일 문학, 고전학 분야의 학과장으로 임명되지 못했고 그나마 신생 분야인 수학, 과학, 의학 분야에서나 상대적으로 진출이 자유로웠다. 유대인 변호사들의 비율은 상당했으나 법조계 상위 직종에는 제한이 걸렸다. 특히 '판사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해칠 수 있다는 이유로 유대인 판사는 임명이 제한됐다. 유대인들이 고위공직자가 되기란 불가능했다. 개종했지만 어쨌든 유대 출신이던 벤저민 디즈레일리영국 총리까지 진출했던 반면 독일에는 유대인 수상이 나오지 못했다.[153] 유대인들은 관광지, 휴양지에서조차 차별받았고 반유대주의는 제국의 전 계층에 폭넓게 퍼져있었다.

그나마 사회민주당이 유대인들에게 호의적인 편이었다. 부유한 유대인 자본가들이 독일을 빨아먹고 있다는 고정관념이 심지어 사회민주당에도 뿌리박혀 있었기 때문. 그러나 당수 아우구스트 베벨은 기조연설에서 반유대주의를 반동적이라고 비난했으며 당 공식적으로는 반유대주의를 배격했다. 반대로 보수당은 대놓고 반유대주의를 설파했다. 보수당은 1892년 티볼리 강령에서 '독일인들의 생활을 침해하는 유대인의 영향력에서 등을 돌려야한다'고 주장, 기독교의 권위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보수주의자들을 중심으로 1880년대 일어난 반유대주의 청원은 유대인들을 동등한 독일 국민으로 인정해주지조차 말아야한다는 내용을 담았다.[154] 그러나 산발적인 반유대 폭동은 계속되어 1900년에는 코니츠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물론 반유대주의자들이 단일 정당을 세우는 데에는 실패했지만,[155] 반유대계는 보수당, 기독교계, 전문학계, 학생운동 쪽으로 흘러들어갔고 독일 제국은 전반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상당히 적대적이었다.

13. 구성 제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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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 왕국
파일:바이에른 주기.svg 파일:작센 왕국 국기.svg 파일:뷔르템베르크 왕국 국기.svg
바이에른 왕국 작센 왕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파일:바덴 대공국 국기.svg 파일:헤센 대공국 국기.svg 파일:올덴부르크 대공국 국기.svg
바덴 대공국 헤센 대공국 올덴부르크 대공국
파일: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 국기.svg 파일: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국 국기.svg 파일: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 국기.svg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국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
파일: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 국기.svg 파일:작센마이닝겐 공국 국기.svg 파일:작센알텐부르크 공국 국기.svg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 작센마이닝겐 공국 작센알텐부르크 공국
파일:안할트 공국 국기.svg 파일:브라운슈바이크 공국 국기.svg 파일:리페 후국 국기.svg
안할트 공국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리페 후국
파일:샤움부르크리페 후국 국기.svg 파일:슈바르츠부르크루돌슈타트 후국 국기.svg 파일:슈바르츠부르크존더샤우젠 후국 국기.svg
샤움부르크리페 후국 슈바르츠부르크루돌슈타트 후국 슈바르츠부르크존더샤우젠 후국
파일:독일 국기(3:2 비율).svg 파일:로이스게라 후국 국기.svg 파일:로이스그라이츠 후국 국기.svg
발데크피르몬트 후국 로이스게라 후국 로이스그라이츠 후국
파일:함부르크 주기.svg 파일:브레멘 자유도시 국기.png 파일:뤼베크 자유도시 국기.png
함부르크 제국도시 브레멘 제국도시 뤼베크 제국도시
파일:엘자스로트링겐 제국영토 국기.png
엘자스로트링겐 제국영토 }}}}}}}}}

파일:German_Empire_states_map.png

독일 제국은 총 25개의 국가로 이뤄졌고 제국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종주국은 프로이센 왕국이었다. 그리고 독일 연방 시기의 4개 자유시 중 독일 제국 성립 때까지 존속한 함부르크, 브레멘, 뤼베크는 제국도시로 개편되어 다른 구성국에 속하지 않는 별도의 독립시로 존재했다.[156] 프랑스에서 병합한 엘자스로트링겐 제국영토는 중앙정부의 직할 통치를 받았다. 당시 독일 제국은 현재 독일보다 50% 가량 더 컸다. 1차와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덴마크, 폴란드, 러시아, 프랑스, 벨기에, 리투아니아, 체코, 룩셈부르크에게 땅을 뺏기면서 지금의 영토로 축소됐던 것이다. 제국의 당시 영토는 약 540,858km2 가량으로 전통적인 유럽의 대국이던 프랑스보다도 약간 더 컸다.
독일 제국의 구성 제후국
국기 국가 수도 면적 인구
1871년 1900년 1910년
왕국
파일:프로이센 왕국 국기.svg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348,780 2,691,085 34,472,509 40,165,219
파일:바이에른 주기.svg 바이에른 왕국 뮌헨 75,870 4,863,450 6,524,372 6,887,291
파일:뷔르템베르크 왕국 국기.svg 뷔르템베르크 왕국 슈투트가르트 19,507 1,818,539 2,169,480 2,437,574
파일:작센 왕국 국기.svg 작센 왕국 드레스덴 14,993 2,556,244 4,202,216 4,806,661
대공국
파일:바덴 대공국 국기.svg 바덴 대공국 카를스루에 15,070 1,461,562 1,867,944 2,142,833
파일: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 국기.svg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 슈베린 13,127 557,707 607,770 639,958
파일:헤센 대공국 국기.svg 헤센 대공국 다름슈타트 7,688 852,894 1,119,893 1,282,051
파일:올덴부르크 대공국 국기.svg 올덴부르크 대공국 올덴부르크 6,429 314,591 399,180 483,042
파일: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 국기.svg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 바이마르 3,610 286,183 362,873 417,149
파일: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국 국기.svg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국 노이슈트렐리츠 2,929 96,982 102,602 106,442
공국
파일:브라운슈바이크 공국 국기.svg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브라운슈바이크 3,672 312,170 464,333 494,339
파일:작센마이닝겐 공국 국기.svg 작센마이닝겐 공국 마이닝겐 2,468 187,957 250,731 278,762
파일:안할트 공국 국기.svg 안할트 공국 데사우 2,299 203,437 316,085 331,128
파일: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 국기.svg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 코부르크/고타 1,977 174,339 229,550 257,177
파일:작센알텐부르크 공국 국기.svg 작센알텐부르크 공국 알텐부르크 1,324 142,122 194,914 216,128
후국
파일:리페 후국 국기.svg 리페 후국 데트몰트 1,215 111,135 138,952 150,937
파일:독일 국기(3:2 비율).svg 발데크피르몬트 후국 아롤센 1,121 56,224 57,918 61,707
파일:슈바르츠부르크루돌슈타트 후국 국기.svg 슈바르츠부르크루돌슈타트 후국 루돌슈타트 941 75,523 93,059 100,702
파일:슈바르츠부르크존더샤우젠 후국 국기.svg 슈바르츠부르크존더샤우젠 후국 존더샤우젠 862 67,191 80,898 89,917
파일:로이스게라 후국 국기.svg 로이스게라 후국 게라 827 89,032 139,210 152,752
파일:샤움부르크리페 후국 국기.svg 샤움부르크리페 후국 뷔케부르크 340 32,059 43,132 46,652
파일:로이스그라이츠 후국 국기.svg 로이스그라이츠 후국 그라이츠 316 45,094 68,396 72,769
제국도시
파일:함부르크 주기.svg 함부르크 제국도시 함부르크 414 338,974 768,349 1,014.664
파일:뤼베크 자유도시 국기.png 뤼베크 제국도시 뤼베크 298 52,158 96,775 116,599
파일:브레멘 자유도시 국기.png 브레멘 제국도시 브레멘 256 122,402 224,882 299,526
제국영토
파일:엘자스로트링겐 제국영토 국기.png 엘자스로트링겐 제국영토 스트라스부르 14,522 1,549,738 1,719,470 1,874,014
총합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독일 제국 베를린 540,858 41,058.792 56,367,178 64,925,993

14. 독일 제국의 식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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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몰락의 배경과 전후

  • 너무 비대했던 군부집단
    독일제국의 전신인 프로이센 왕국은 나라가 군대를 보유한게 아니라 군대(기사단)가 나라를 보유한 형태로 움직였다. 그래서 볼테르는 "다른 나라들이 군대를 가진 국가라면, 프로이센은 국가를 가진 군대다."는 평을 내렸다. 근대적 참모제의 시작은 대(大) 몰트케라 불리는 헬무트 폰 몰트케 독일 제국군 원수로 부터 비롯된다. 대 몰트케 원수는 체계적인 분권 지휘를 통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승전으로 이끌었다. 그 공을 인정받아 대 몰트케 원수는 귀족백작이자 프로이센의 종신 의회 상원의원이 되었다. 이러한 공적을 밑거름으로 하여 군부는 제국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몰트케 원수가 참모총장 직을 30년간 하고 1888년에 은퇴한 후에도 독일 군부는 여전히 작전 수립과 전쟁 지휘 등 군사에 대한 전적인 권한을 가졌다. "전쟁부"는 그저 전쟁 개시의 가부만을 1차적으로 결의해 황제에게 상정할 뿐이었다. 앞서 말했듯 이미 군부는 1871년의 전쟁을 토대로 크게 성장해 있었다. 이러한 군부를 통제해야 할 사람은 제국의 최고 통수권자인 황제다.[157] 그러나 빌헬름 2세는 너무나도 우유부단하고 무능하면서도 현실 감각이 결여되어 있었다.
  • 무리한 팽창주의
    신세대와 군부의 요구에 부합하기 위해 빌헬름 2세는 팽창을 추진했다. 그러나 오토 폰 비스마르크 시대에 자국 회사의 보호를 명분으로 회사령을 국령으로 삼은 몇몇 식민지들을 제외하면 새로 개척할 식민지는 없었다. 카이저는 새로운 제국주의적 정책을 위해 대양함대를 양성하고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를 제독으로 임명했다. 이는 영국의 견제 및 모로코 위기의 씨앗이 된다. 프랑스가 페즈를 점령한 후 빌헬름 2세는 모로코를 요구하는데, 이 때 다수의 국가들, 특히 영국이 프랑스를 편들면서 독일은 모로코를 얻지 못한다.
  • 경제력 고갈
    막강했던 제국의 경제력이 전쟁 4년만에 고갈된 이유는 대전쟁 당시 독일의 전시 경제 체제와 관련이 있다.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자신의 의지와 말로 제국 전체의 경제력을 좌지우지했다. 총동원 체제에 나서면서 제국의 모든 경제적 역량이 전쟁을 위한 군수공장 가동 및 잠수함 건조, 전시 철도 개량 등에만 치중되었다. 다시 말해서 균형잡힌 예산 분배가 아니라 군비 100%나 다름없었다. 전쟁 경비는 당시 독일 제국 1년 예산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는 영국과 프랑스도 마찬가지여서, 유럽의 교전국들은 미합중국에게서 차관을 얻어 전쟁 경비를 대었다.[158] 차관을 얻어오던 미국이 독일의 적이 되자(1917) 경제난은 더욱 심각해졌다. 루덴도르프는 이를 타개하고자 총력전(Der totale Krieg)을 전개한 것이다. 그러나 춘계 공세의 패전 이후 독일 제국은 경제적 과부하가 걸리게 되었고, 이로 인해 패전을 맞게 된다.
  • 전후의 여파
    루덴도르프는 전후에 배후중상설을 제기했다. 다시 말해서 대전쟁에서의 경제력 파탄은 좌파 공산주의 세력과 유대인의 책임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경제적 파탄의 원인은, 독일 제국이 군비에 너무 많은 예산을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예산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하부 조직들이 차례로 무너지는 마당에 군부가 군사를 지휘해 협상국의 군대를 뚫고 프랑스의 항복을 받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제국 전체의 적인 유대-볼셰비즘을 타도하기 위해 비밀리에 군사 증강을 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 중반에는 협상국과의 여러 조약으로 경제력이 잠시나마 살아나는 듯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불안정했고 프란츠 폰 파펜은 슐라이허 내각을 무너뜨리기 위해 히틀러를 이용하기로 한다. 그러나 파펜은 총리가 된 히틀러에 의해 완전히 무력화되었고 히틀러는 제3제국을 개창했으며, 독일을 다시 파멸로 몰아넣게 되어 패권의 확장은 커녕 영토만 더 잃게 되었다.[159]

16. 평가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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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독일 제국 신화

파일:독일 제국 신화.jpg
파일:Veggmaleri_i_kirka.jpg
<rowcolor=#fff> 빌헬름 1세와 독일 황제를 신격화하는 작품들
앞서 설명했듯이 독일국은 독일인민족국가를 뜻했다. 독일 제국 시기 내셔널리즘 의식이 고취하던 독일인들에게 그들의 나라는 그런 꿈이 실현된 나라였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승리에 뒤이은 베르사유 궁전에서의 독일 제국 선포는 그런 밝은 미래가 약속된 것처럼 보였다. 반면 독일, 특히 프로이센 왕국 출신의 귀족들에게는 유쾌한 일만은 아니었다. 독일 민족의 신화는 귀족들의 것이라기보다는 독일 민중, 정확히는 독일의 중소상공인들의 것이었다. 이 자유주의와 내셔널리즘의 결합은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다.

독일 민족주의자들이 보기에, 그간 귀족들은 그들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것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신성 로마 제국이 연방국가의 집합체로 판결났을 때 정해진 것이었다. 제국은 어디까지나 '민중(신흥계급)의 신화'였고, '독일 제국'이 건설되었다는 사실은 귀족들이 내셔널리즘 세력에게 항복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무리 1848년 혁명에서 귀족들이 정치적으로는 승리했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그들의 꿈을 배신하긴 했지만, 결국 독일 제국은 이루어졌고, 부분적으로나마 입헌군주정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제국이 주는 확고한 신념하에 보수주의는 내셔널리즘과 차차 결합하는 길로 나아갔고, 중소 부르주아들은 관료, 군부, 기존 귀족과 결탁했다.

이렇게 안정된 체제를 오래 누리다 보니, 제1차 세계 대전의 결과는 그런 사람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렇기에 오랜 전제 관료 정치에 익숙해져 있던 독일 중산층들에게 민주주의란,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의 전승국들이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강요한 것, 독일의 민족 정체성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그런 사람들에겐 독일 제국 시대야말로 돌아가야 할 이상향으로 여겨졌다. 애초에 바이마르 공화국은 문서에서 보듯 황제 및 군부와 중산층 이하 독일 국민들이 아직 힘을 가지지 못한 권력의 공백 속에서 공화국에 대한 희망을 품은 독일 사회민주당이 세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일부 극단주의자들에게 민주주의는 침략의 상징이 되었고, 따라서 이것에 기반을 둔 바이마르 공화국도 부정되었다. 이런 독일인들은 민주주의와 같은 '서구의 특성'들을 이용하지 않고 근대를 일구어낸 독일 제국의 민족 정체성을 들먹이며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것은 독일인들만이 지니고 있는 '존더베크(Sonderweg)'로 여겨졌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런 극단주의자들에게 철혈로 독일 제국을 탄생시킨 비스마르크는 독일 국민의 영웅으로 우상화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나치 독일, 이른바 '제3제국'에서 더욱 심해졌다.

나치 독일이 패망한 직후에도 당분간 독일 제국 신화는 계속되었다. 독일인들에게 부정해야 할 대상은 어디까지나 히틀러의 체제였지 '독일 제국' 자체가 아니었다. 나치 독일은 어디까지나 잠시 존재한 이탈이었다. 여전히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했다. 나치가 집권하는 데 필요한 대중 동원력이 바로 그 민주주의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여겨졌다. 그러면서 독일 제국이 지니고 있었다는 민족적 정체성-복종과 충성과 같은 특성에 대한 숭배가 이루어졌다.

16.2. 평가와 재평가

독일 제국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는 68혁명기와 맞물린 1960년대1970년대였다. '역사적 사회과학'을 주창하면서 독일의 과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던 사회사가들은 '독일 제국'의 신화를 깨뜨리려고 했다. 한스울리히 벨러와 볼프강 몸젠, 위르겐 코카로 대표되는 소위 빌레펠트 학파 역사학자들은 ‘존더베크’가 지니고 있던 긍정적인 의미를 부정적으로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나라들은 정상 궤도상의 근대 국가로 여겨졌고, 독일 근대 국가는 거기서 이탈한 것으로 여겨졌다. 혁명이 없이 탄생해버린 독일 제국의 체제는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것으로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아울러 나치 독일의 가능성은 이미 독일 제국 때부터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고 두 체제의 동질성을 강조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다시 독일 제국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역사가로는 독일에서는 토마스 니퍼다이가 대표적이었고, 1980년 영국 소장파 역사가들인 제프 일리와 데이비드 블랙번이 출간한 「독일 역사서술의 신화들」(Mythen deutscher Geschichtsschreibung)[160]은 <특수한 길>을 둘러싼 논쟁이 국제적으로 비화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일리와 블랙번은 사회사학자들의 독일 제국 비판 자체가 신화라고 보았다. 그들에게는 영국도 완전한 근대 국가가 아니었다. 그들의 연구 결과로서 영국은 여전히 전통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였고, 억압성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영국이나 프랑스가 이상적인 국가 롤 모델이고 '정상적'이라는 관점이 탈피되었다.

또한 독일 역사학계의 전통적 역사주의를 계승하면서도 사회사와 일상사의 방법론을 수용한 니퍼다이는 1983년에서 1992년까지 그의 역작인 「독일사」(Deutsche Geschichte) 3부작을 출간하면서 전통적인 독일의 역사서술과 사회사가들의 비판적 관점의 절충적으로 종합하고자 했고, 아울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및 일상생활을 아우르는 전체적이고 복합적인 역사상을 제시하고자 했다. 니퍼다이는 독일 제국이 나치즘과의 연속성도 가지지만 바이마르 공화국 및 서독과의 연속성 역시 가진다고 파악했고, 이러한 모습을 '근대성' 자체가 가지는 양면성으로부터 기원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즉 독일 제국 시기 발전한 의회주의와 사회 보장 정책들은 바이마르 민주주의와 서독 복지 국가로 이어진 반면, 독일의 군국주의 전통과 반유대주의적 정서는 나치즘으로 발현되었다는 것이며, 이러한 것 자체가 근대성이 갖는 야누스적 측면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들을 통해 단방향적인 역사 발전 모델은 부정되고, 복수의 근대 모델이 제시되었다. 독일 제국도 서구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역동적으로 발전을 이루어나가면서 사회 모순을 점진적으로 해소하려는 나라로 그려지는 등의 역사상의 수정이 이루어졌다. 비판에 직면한 사회사가들의 역시 입장의 수정이 이루어졌고, 존더베크 테제 역시 점차 폐기 처분되었다. 사회사의 선봉장인 벨러 역시 1987년부터 2008년까지 니퍼다이에 비견되는 또다른 역작인 「독일 사회사」(Deutsche Gesellschaftsgeschichte) 5부작을 출간하면서, 19세기 독일사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 관점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도 그간의 논쟁의 성과를 수용하여 상당 부분 수정된 입장을 보여주었다. 이렇듯 동서독 통일 이후의 경향은 근대성의 양면적 성격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이분법적 평가를 벗어나 독일 제국 및 19세기 독일의 입체적인 면모를 이해하자는 입장이 지배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독일 제국에 대한 역사서술의 변화상을 정리한 저서로는 Mattew Jefferies의 <Contesting the German Empire」가 대표적이다. 그 외에 위르겐 오스터하멜과 제바스티안 콘라트를 중심으로 한 지구사(Global History) 경향의 대두와 함께 트랜스내셔널한 관점 역시 현재의 주류 경향 중 하나이다. 관련 내용은 오스터하멜과 콘라트가 편저한 <Das Kaiserreich Transnational>을 참조할 수 있다.

16.3. 대독일주의의 관점에서

파일:Kolbe_der_Jüngere-Ungarnschlacht_auf_dem_Lechfeld-WUS02846.jpg
<rowcolor=#fff> 헝가리인을 무찌르는 오토 1세[161]
한편 독일 민족주의 관점에서 볼 경우 의외로 치명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독일의 가장 핵심이 되어야 할 오스트리아를 빼놓고 통일한 점이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오스트리아는 서유럽을 대표하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본향으로서 독일계 국가들의 수장이었고, 비스마르크 시절에도 독일계 가톨릭 국가들의 맹주로 대접받던 나라였다. 또한 오스트리아를 빼먹은 바람에 최후의 신성 로마 제국합스부르크 왕조와의 연결점도 사라졌다. 때문에 대독일주의를 표방하던 민족주의자 입장에서 보자면 독일 제국은 '독일도 아니고, 제국도 아닌 나라'였다. 물론 비스마르크도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독일 제국이 출범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오스트리아가 헝가리-크로아티아 등 비독일계 통치 지역을 포기해야 했는데, 오스트리아는 비독일계 지역을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결국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지 않았기 때문에 오스트리아는 최종적으로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가 패망하면서 생제르맹 조약으로 비독일계 지역을 잃은 결과 다시금 대독일주의가 불거졌다. 히틀러 역시 독일계 국가의 대표격이자 본인의 고향이기도 한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여(안슐루스) 대독일주의를 실현하였다. 그러나 나치 독일은 다른 여러 가지 행적들과 함께 독일의 거대한 흑역사로 전락했고 그 결과 대독일주의 역시 정치적 금기가 되었다.

17. 역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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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엔촐레른 왕조
빌헬름 1세 프리드리히 3세 빌헬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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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 이름 즉위년일 퇴위년일
초대 빌헬름 1세 1871.1.18 1888.3.9
2대 프리드리히 3세 1888.3.9 1888.6.15
3대 빌헬름 2세 1888.6.15 1918.11.9

18. 역대 제국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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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오토 폰 비스마르크 레오 폰 카프리비 클로트비히 추 호엔로헤실링스퓌르스트
제4대 제5대 제6대
베른하르트 폰 뷜로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 게오르크 미하엘리스
제7대 제8대 제9대
게오르크 폰 헤르틀링 막시밀리안 폰 바덴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관련 직위: 독일 황제
북독일 연방 수상 · 바이마르 총리 · 나치 독일 총리 · 동독 각료평의회 의장 · 독일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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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 이름 임기시작 임기종료 정당
초대 오토 폰 비스마르크 1871.3.21 1890.3.20 무소속
2대 레오 폰 카프리비 1890.3.21 1894.10.26 무소속
3대 클로트비히 추 호엔로헤실링스퓌르스트 1894.10.29 1900.10.17 무소속
4대 베른하르트 폰 뷜로 1900.10.17 1909.7.14 무소속
5대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 1909.7.14 1917.7.13 무소속
6대 게오르크 미하엘리스 1917.7.14 1917.11.1 무소속
7대 게오르크 폰 헤르틀링 1917.11.1 1918.9.30 중앙당
8대 막시밀리안 폰 바덴 1918.10.3 1918.11.9 무소속
9대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1918.11.9 1919.2.11 사회민주당

19. 참고 문헌

  • Thomas Nipperdey, Deutsche Geschichte
    • Deutsche Geschichte 1800–1866. Bürgerwelt und starker Staat(1983)
    • Deutsche Geschichte 1866–1918. [Band I:] Arbeitswelt und Bürgergeist(1990)
    • Deutsche Geschichte 1866–1918. [Band II:] Machtstaat vor der Demokratie(1992)
  • Geoff Eley & David Blackbourn(1984), The Peculiarities of German History
  • Stefen Berger(1997), Search for Normality: National Identity and Historical Consciousness in Germany Since 1800
  • Volker Ullrich(1997), Die nervöse Großmacht 1871-1918: Aufstieg und Untergang des deutschen Kaiserreichs
  • Joachim Radkau(1998), Das Zeitalter der Nervosität: Deutschland zwischen Bismarck und Hitler
  • Margaret Lavinia Anderson(2000), Practicing Democracy: Elections and Political Culture in Imperial Germany
  • Matthew Jefferies(2008), Contesting the German Empire
  • Ulrich Herbert(2014), Geschichte Deutschlands im 20. Jahrhundert
  • Christoph Nonn(2017), Das deutsche Kaiserreich
  • Christoph Nonn(2020), 12 Tage und ein halbe Jahrhundert: Eine Geschichte des deutschen Kaiserreichs 1871-1918
  • Oliver F.R. Haardt(2020), Bismarcks ewiger Bund: Eine neue Geschichte des Deutschen Kaiserreichs
  • Hedwig Richter(2020), Demokratie: Eine deutsche Affäre
  • Hedwig Richter(2021), Aufbruch in die Moderne: Reform und Massenpolitisierung im Kaiserreich
  • Sven Oliver Müller & Cornelius Torp(ed.)(2011), Imperial Germany Revisited: Continuing Debates and New Perspectives
  • Helmut Walser Smith(ed.)(2011), Oxford Handbook of Modern German History
  • Matthew Jefferies(ed.)(2015), Ashgate Research Companion to Imperial Germany
  • Jürgen Kocka(1988), "German History before Hitler: The Debate about the German Sonderweg",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 Chris Lorenz(1995), "Beyond good and evil? The German empire of 1871 and modern German historiography",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 Stefan Berger(1995), "Historians and Nation-Building in Germany after Reunification", Past and Present
  • Jürgen Kocka(2018), "Looking back on the Sonderweg", Central European History
  • 한스-울리히 벨러, 이대헌 역, 독일제2제국
  • 안병직(2000), "독일 제국(Kaiserreich:1871~1918),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화사학연구
  • 김기봉(2002), "토마스 니퍼다이와 한스 울리히 벨러, 서양사론

20. 대중매체에서

히틀러그 똘마니들처럼 최악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여기도 대부분 좋은 꼴은 못 본다. 이는 나치처럼 조직적인 학살을 저지르지는 않았어도 상당한 군국주의 국가였던 데다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온 유럽을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대영제국이나 프랑스 식민제국은 독일 제국보다 더 많은 식민지를 건설했음에도 빅토리아 시대벨 에포크의 상징적인 나라로서 긍정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제법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독일 제국의 취급은 좋지 않은 편이다.
  • 다이스가 제작한 게임이자 제1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FPS 게임배틀필드 1에서 동맹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과 함께 등장 세력으로 나온다.
  • 원더우먼(영화)에서 주요 적 세력으로 등장한다. 4년간의 전쟁으로 물적, 인적 자원이 바닥나[162] 연합군의 휴전 조약을 받아들지 말지로 내부 분열이 일어나는 상황으로 결국...[스포일러]
  • 리얼리티 FPS 게임 시리즈인 베르됭(게임)[164], 탄넨베르크(게임)[165]에서도 등장한다.
  • 아이언 하베스트 1920+의 세계관에서는 독일 제국을 모티브로 한 작센 제국이 존재한다.[166]
  • 북경의 55일이라는 영화에서 8개국 연합군의 일원으로 등장한다. 작중에서 등장인물이 카이저[167]를 언급하기도 한다. 독일 제국을 긍정적으로 묘사한 몇 안 되는 작품.
  •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 2/좀비 모드에서는 멋모르고 프랑스의 유적[168]을 파헤치다가 십자군 좀비를 깨우는 바람에 좀비 아포칼립스 사태를 일으켜 버렸다!
  • 히스토리 채널에서 우주전쟁 시리즈의 설정을 가져와서 만든 페이크 다큐인 'The Great Martrion War'에서는 하필 화성인들의 첫 타깃이 되어서 전쟁 초기에 증발당한다. 물론 진짜로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고, 작중 그런 표현을 쓸 정도로 작살났다. 빌헬름 2세가 우리가 이 세계의 것이 아닌 존재에게 공격 받고 있으니 제발 도와달라고 호소할 정도[169]. 이후 그대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나 싶었으나, 잔당 독일군과 난민들이 파울 폰 힌덴부르크의 지휘로 벨기에를 넘어서 프랑스에서[170] 연합군과 합류해서 싸운다. 이후 마지막 장면에서 노획한 화성인들의 트라이포드를 배경으로 걸어오는 연합군들 중 슈탈헬름을 쓴 병사가 있는 것 보니 결국 승전국이 되어 재건될 듯 하다.[171]
  • Victoria II에서는 독일 국가로 통일을 완료했을 때 볼 수 있다. 대부분 프로이센이 통일의 주인공이 되고 시대의 특성상 무시무시한 파워를 자랑한다.
  • Hearts of Iron IV에서는 Walking the Tiger DLC를 구입했다면 라인란트를 점령하는 대신에 나치 정권을 없앤 뒤, 네덜란드로 망명한 빌헬름 2세를 복위시켜 재건할 수 있다. 만약 2세의 귀국을 네덜란드에서 막거나, 비동맹주의가 아닌 민주주의 입헌군주국으로 독일을 재건하면 2세의 아들이 빌헬름 3세로 즉위한다. 빌헬름 2세가 복위하면 중부 유럽의 중립국들을 동맹으로 끌어들이고 폴란드에게서 단치히와 포젠을 양도받는 조건으로 소련으로부터의 안전보장을 대가로 동맹으로 삼으며, 서방에 대해서는 영불에게 모두 복수하거나 영국과 타협해서 프랑스를 정벌하게 된다. 2세를 건너뛴 3세 즉위[172]+민주주의 독일이라면 중부유럽 동맹을 결성해 소련을 주적으로 삼는다.
  • Hearts of Iron 시리즈의 거대모드인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을 포함한 동맹국이 승리한 탓에 멸망하지 않고 게임 시작점인 1936년까지 건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럽 곳곳에 괴뢰국을 세우고 패배한 협상국의 식민지를 빼앗는 등 세계 곳곳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초강대국으로 군림하고 있다. 하지만 유저나 컴퓨터의 개입에 따라 계속 번창하거나 멸망할지 여부가 갈린다.
  • 교토 애니메이션에서 만든 바이올렛 에버가든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속한 가상의 국가 라이덴샤프트리히는 독일 제국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강력하게 추정이 된다. 착용하는 군복은 제1차 세계 대전 후반기 독일군의 제복과 매우 흡사하고 견장은 독일군 특유의 꽈배기 견장을 채용하며 게급도 독일군의 방식처럼 마름모꼴의 핀을 꽂아서 나타낸다.[173] 착용하는 철모 역시 슈탈헬름이다. 제식 소총도 게베어 1898 계열로 보이고 장교가 루거 P08권총을 사용하는 모습도 여러번 나온다. 사실 나라 이름부터가 독일스럽다.


[1] 예수의 탄생을 예지하는 마태오 복음 1장 23절에서 유래한 문구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Siehe, eine Jungfrau wird schwanger sein und einen Sohn gebären, und sie werden seinen Namen Immanuel heißen”, das ist verdolmetscht: Gott mit uns.)[2] 이 해를 기점으로 독일이 영국, 프랑스 인구를 완전히 추월해서 현재에 이르게 된다.[3] 1억 7,500만명의 러시아 제국에 이어서 유럽 국가 중 인구 2위다. 3위는 5200만명의 인구를 가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4] 제국 의회가 존재하기는 했으나, 황제의 권한이 강하여 사실상 전제군주제적 준입헌군주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의 태국과 비슷하다. 다만 마지막 황제 빌헬름 2세는 막대한 권력을 가졌음에도 군사 부문에는 무지했다. 그래서 1916년 이후 전시경제체제로 전환되면서 황제는 실권을 잃었고, 실권자로써 권력을 장악한 에리히 루덴도르프에 의해 군부독재가 시작된다. 베르됭 전투 이후 팔켄하인은 해임되었고, 루덴도르프의 상관 힌덴부르크는 이미 고령이었다. 이에 육군 최고사령부의 참모였던 루덴도르프가 실질적인 정부 수반이 된다. 참모의 권한이 강했던 점 역시 근대적 참모제를 최초로 도입한 독일 제국의 특징이다.[5] 프로이센 왕국 국왕이 독일 제국 황제 직위를 겸직함.[6] 프로이센 왕국 수상이 독일 제국 수상 겸임.[7] 카이저의 반(反) 비스마르크 정책 및 세계 정책을 앞장서 지지한 거물급 인사이며, 의화단의 난 진압에도 개입한 인물이다.[8] 베르됭 전투 이후 팔켄하인이 해임되자, 제국군 병참감으로서 사실상의 지도자가 되어 독일 제국을 군사독재 국가로 재편한다.[9] 골트마르크, 파피어마르크.[10] deutsch('독일인의, 독일의')라는 형용사와 Kaiser('황제'), Reich('제국ㆍ국가')가 합쳐진 단어이다. 영어에선 형용사와 명사를 쓸 때, 형용사에 변화가 없지만, 독일어에선 강변화ㆍ약변화ㆍ복수변화 등이 따로 존재한다. 위의 deutsches Kaiserreich에서 Kaiserreich는 중성명사이고, 형용사인 deutsch의 앞에 정관사가 없으므로 형용사는 강변화1격으로 변형해 뒤에 -es가 붙는다.[11] 흔히 'Reich'(라이히)가 '제국'으로 옮겨지기에 오해하는 것이지만, 'Reich'라는 단어는 군주정을 전제하기 않기 때문에 공화국인 상태에도 'Reich'라고 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이러한 문제는 영역에서도 제기된다. 영어에서도 Empire보단 Realm(연합왕국 혹은 연방왕국)이나 commonwealth가 적절하다는 견해가 있다. (라이히 문서 참조.)[12] '도이체스 라이히'로 간주된 것이 이후 시대라는 것이지, 그 때도 국호가 Heiliges Römisches Reich인 만큼 Reichskammergericht(제국대법원) 등 '라이히'라는 말은 일상적으로 썼다.[13] 나치 독일과는 달리 앞의 두 국가는 당대에 'Reich'라는 말은 썼어도 '첫 번째', '두 번째'과 같은 순서를 매기지는 않았다. 애당초 '첫 번째 라이히', '두 번째 라이히'라는 개념 자체가 자신들 '세 번째 라이히'를 위한 프로파간다 차원에서 자주 쓰였던 용어이기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사용을 삼가려는 경향이 있다.# 일단 그렇게 순서를 붙이기 시작한 것 자체는 나치 독일 이전인 1923년 아르투어 묄러 판 덴 브루크(Arthur Moeller van den Bruck)라는 작가가 시작한 것이다.[14] 발음은 '슈바르츠 바이스 로트 플라게'. 흑백적기(黒白赤旗)라고 부른다.[15] 프로이센의 상징색인 검은색과 흰색이 들어간 것은 물론 국기에 들어간 흰색과 붉은색이 바로 프로이센 왕국의 전신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상징색이었기 때문이다. 또 새로운 독일의 국기에서 금색을 배제한 것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상징색인 검은색과 금색을 채택한 오스트리아가 배제된 통일 독일의 상황과 매우 유사했다.[16] 파일:나치 독일 국기(1933-1935).svg 다만 독일 제국의 국기와는 비율이 조금 다르다.[17]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반대해 소련으로 망명한 독일 공산당원 중심의 '자유독일국민위원회' 역시 흑백적 기를 상징으로 사용했다. 이들은 연약한 바이마르 공화국에 반대한다는 의미로 옛 독일 제국의 흑백적기를 꺼내들었던 것이다. 또한 자유독일국민위원회가 공산당의 꼭두각시가 아니라는 사실을 선전하려는 의도도 있었다.[18] 오트볼타 시절 국기의 흑백적 삼색은 각각 흑볼타강, 백볼타강, 적볼타강을 상징했다.[19] 배에 게양하는 경우는 좀 절차가 복잡했다. 황제기를 단 배가 지나갈 때면 선원들은 33발의 총을 쏴야했고 3번씩 만세를 부르는 동시에 황제 찬가를 불렀다. 황제기 200m 안쪽으로 들어오면 절차는 더 복잡해졌다. 빌헬름 2세도 이 의례절차가 지나치게 복잡하다 느꼈던지 황제기 대신 다른 깃발을 사용하며 일부 의례를 하지않아도 되도록 만들었다. 황제가 배 안에 있지만 방문객을 맞지 않을 때 쓰는 깃발, 배에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깃발까지도 온갖 종류의 깃발들이 다 있었다.[20] 훗날 이렇게 펜더에서 떼내어진 최후의 황제기는 1998년 경매에서 약 13,000유로에 판매됐다.[21] 자세히 보면 백색 방패문 안의 프로이센 검독수리가 프로이센 왕국의 왕관을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22] 1871년 공포된 헌법으로 독일 황제이자 프로이센 국왕인 빌헬름 1세 황제의 서명이 보인다.[23] 근대 독일에서 개혁(Reform)은 혁명(Revolution)의 반대 개념으로 사용되었으며, 독일인들은 프랑스와 다르게 혁명과 같은 급진적 변동, 단절을 겪지 않고 지속적인 개혁을 이룬 자신들의 역사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라인하르트 코젤레크토마스 니퍼다이와 같은 역사가들 또한 이러한 전통의 연속선상에서 19세기 독일의 온건한 개혁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24] 이를 하인리히 아우구스트 빙클러는 '비동시적 민주화(ungleichzeitiger Demokratisierung)로, 마르틴 키르쉬(Martin Kirsch, 1965-)는 '의회주의 없는 불완전한 민주주의'라고 표현한다.[25] 단적으로 영국은 1884년에 이르러서야 농촌의 선거권이 인정되었고, 남성 보통 선거제는 1918년에 이르러서야 도입되었다. 이는 '민주주의 없는 의회주의'라고 할 수 있다.[26] 토마스 니퍼다이의 제자이다.[27] 크리스토퍼 클라크의 제자이다.[28] 원래 일본 정부의 고위 인사들은 당시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영국의 헌법을 참고하려 했으나, 영국이 입헌군주국인 관계로 천황 절대주의를 추구하던 자신들의 목표와 맞지 않는다고 여겨서 독일 제국의 헌법을 참조했다.[29] 나폴레옹 전쟁 이래로 독일인들은 황제의 복원을 그리워했다. 옛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설화나 전설을 그리워하며, 황제를 분란에 빠진 독일을 외세로부터 구할 영웅적인 존재로 동경했던 것이다.[30]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또한 신성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가였던 합스부르크의 인정 없이는 독일 황제를 자칭해봤자 정통성도 실익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합스부르크가 황제위를 맡는 중세 후기식의 새 독일 제국을 꿈꾸었다. 물론 프로이센이 그 제국에서 높은 총독직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말이다.[31] 이는 옛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독일의 신성 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것에 대한 복수였다. 그리고 훗날 프랑스는 똑같은 방에서 독일에게 똑같이 되갚아주며 그 복수를 치른다.[32] 또한 빌헬름 1세는 '독일국의 황제'라는 칭호를 받고 싶었지만, 그렇게 될 경우 기존 제후국들은 얄짤없이 신하 취급을 받게 될 것이 분명했기에 제후들의 반발을 우려한 비스마르크가 '독일인 황제'로 설득해 타협했다. 바덴 대공 역시 베르사유에서 황제위를 바칠 때 '빌헬름 황제'라는 애매모호한 명칭을 사용해 칭호 문제를 교묘히 비껴갔다. 빌헬름 1세는 프로이센이 신생 독일 제국에게 가려질까봐 우려했고 언젠가 자신의 왕국이 제국에 흡수되어 일개 지방으로 전락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는 프로이센 국왕 칭호를 황제 칭호보다 앞에 놓고 싶어했으나 제후들의 반발을 고려해 시도하지 않았다.[33] 이와 비견될 정도로 빽빽한 궁정 의례를 유지한 나라는 동쪽의 러시아 제국 밖에 없었다.[34] 1060년~1080년 사이에 만들어진 청동제 왕좌로 옛 독일 왕들과 황제들의 것이었다. 아헨에 있는 카롤루스 1세의 왕좌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남아있는 독일 황제의 왕좌다.[35] Reichskanzlei. 1738년경 지어졌고 1869년 비스마르크가 수상 관저 목적으로 사들였다. 이후 독일 제국, 바이마르 공화국 수상의 관저로 쓰이다가, 나치 독일 시대에 아돌프 히틀러가 거대한 '신 제국궁전'으로 확장했다. 허나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심각하게 파괴됐고 현재는 찾아볼 수 없다.[36] 1559년 페르디난트 1세는 빈의 호프부르크 궁전에 대재상, 즉 마인츠 대주교의 이름으로 제국재상부를 설치했다. 그러나 실무는 사실상 황제가 임명한 부재상이 맡아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페르디난트 2세가 1620년 오스트리아 총리직을 신설하면서 제국 재상의 위치는 날로 좁아졌고, 마리아 테레지아요제프 2세 시기를 거치면서 서류상으로나 존재하는 처지로 전락했다.[37] 1815년부터 1866년까지 존속한 독일 연방에는 수상직이 없었고 오직 구성국들이 모인 연방의회만이 존재했다.[38] 굳이 말하자면 상원의원단 전체가 아닌, 제후들을 대리할 권한을 가진 특명전권대사들, 즉 각 구성국의 외무부장관들이 제국수상보다 서열이 높았다.[39] 국가철도청, 국가체신청, 국가법무청, 국가대장청 등이 그 예시다.[40] 정작 프로이센이나 바이에른, 작센 등에서는 장관이라는 단어를 잘만 썼다.[41] 하지만 프로이센은 군사 및 해군, 특정 공공세나 관세 분야에서 거부권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프로이센이 가진 17표는 개헌을 방지하는 데에 필요한 14표보다도 많았다.[42] 회원국들은 상당한 자치가 허용됐다. 심지어 개별 독자 해외 사절단도 가질 수 있었다.[43] 하원의 정치인들이 1917년에 국무장관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하원의원직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 조항 때문에 상원에 진출이 불가능했고, 즉 실질적인 권력에서 한참 떨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44] 이들은 상원에서 전권을 가지고 해당 구성국들을 대표했다. 가운데에 제국 수상이자 프로이센 총리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보인다.[45] 의회가 정부에게 묻는 책임은 현대처럼 의회가 요구하면 정부 내각이 사퇴해야한다는 수준은 절대 아니었다. 대신 형사불가침이자 신성한 영역인 황제와 정부를 분리해, 정부에게 황제의 법령에 부가 서명을 한 책임을 묻겠다는 뜻이었다.[46]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상원이었으나 대중들은 별 관심이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회의를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 연방주의를 주장하던 비스마르크는 연방국가들의 결집체인 상원을 부각시키기 위해 회의 공개까지 고려했으나 실제로 했더라도 통일국가에 더 관심많던 독일인들은 황제나 하원에 더 스포트라이트가 쏠렸지 상원에 주의를 돌리지는 않았을 것이다.[47] 1918년 독일 혁명으로 수립된 혁명 내각. 독일 제국과 바이마르 공화국 사이의 과도내각이다.[48] 또한 북독일 연방의 선거법 자체는 1848년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선거법에 그 바탕을 두고 있었다.[49] 참고로 동시대 미국은 전체 인구의 28%가 투표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영국은 전체 인구의 16%만이 투표할 수 있었다. 심지어 같은 제국 내의 바이에른 왕국이나 작센 왕국조차도 이것보다 더 투표권 제한이 까다로웠다.[50] 1차 투표에서 국민자유당이 한 번에 과반을 얻어 승리한 지역구는 고작 3석 밖에 없었다.[51] 1차 투표에서 진보당은 단 한 석도 한 번에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52] 전체 397석. 프로이센 왕국 236석, 바이에른 왕국 48석, 작센 왕국 23석, 뷔르템베르크 왕국 17석, 바덴 대공국 14석, 튀링겐 일대 공국들 12석, 헤센 대공국 9석,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 6석, 한자 도시 5석, 올덴부르크 공국 3석,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3석, 기타 소국들 6석, 엘자스로트링겐 제국영토 15석이었다.[53] 10만 명보다 인구가 작아도 자체적인 선거구 1개를 할당받은 8개의 독일 제국 구성국들은 예외였다.[54] 정부는 제국의 선거구는 그대로 방치한 반면 프로이센 내부의 선거구는 정기적으로 획정했기에 하원의 불신은 상당했다.[55] 하원은 과반수로 하원의장이 선정한 의제를 거부할 수 있었다.[56] 실제로는 연사 명단이 회의 시작전부터 이미 원로원 내 계파 협의로 미리 정해져있었다.[57] 상원의원들은 이에 예외여서 의장이 발언을 제지할 수 없었다. 수상도 원래라면 하원에서 발언을 할 권리가 없었으나, 거의 자동으로 상원의원을 겸직하고 있었기에 하원에서 발언이 가능했다.[58] 정회원 외에도 아직 정당에 속하진 않았지만 파벌에는 한발 걸치고 있는 소위 '인턴' 의원들도 존재했다.[59] 의장이 강한 파벌 출신이라면 무시할 수도 있었으나 약한 파벌 출신이라면 얄짤없이 원로원의 눈치를 봐야만 했다.[60] 물론 이는 독일만의 특징은 아니었다. 당대 독일의 군부 목소리가 큰 편이긴 했지만 웬만한 다른 국가들도 의회가 군비 예산에 이래라저래라 마음껏 할 수 있는 나라는 드물었다.[61] 실제로 대부분의 수상들이 굳이 난처한 상황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이 방법을 자주 써먹었다.[62] 프로이센 제99 포병연대가 엘자스로트링겐 일대에서 주민들을 모욕하자 큰 시위가 일어났던 사건. 정부와 군부는 이를 덮는 데에 급급했다.[63] 그러나 이는 헌법이 아닌 조례규칙에 의거한 것이라 실질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64] 하지만 비스마르크 시대 이후로 정부의 선거 개입은 날로 의미가 없어졌다. 이미 탄탄한 유권자층이 형성되어 더이상 정부가 동원가능한 추가 유권자들이 없었다. 유권자 투표율은 1871년 51%에서 1912년 85%로 증가해 이미 증가할 대로 증가한 상태였다. 1907년 선거를 제외하면 정부측에 유리하게 나온 총선은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다만 정당들 간의 정치적 골은 날로 깊어져 의회가 정부를 효과적으로 견제하는 것은 갈수록 어려워졌다.[65] 아누아리우스 오세크(Annuarius Osseg)란 필명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66] 실제로 1차 세계 대전 직전 무렵, 독일의 각종 경제 지표는 영국을 거의 따라잡거나 심지어 능가하기까지 했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옆의 링크를 참조. #[67] 국제정치에서 패권국이 아니지만 전쟁을 통해 패권국에 도달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국가, 내지는 현재의 패권국에 대한 가장 유력한 도전자를 의미한다.[68] 재밌는 사실은 정작 군부 최상층은 이러한 인력 보강을 마뜩찮아했다는 것이다. 융커를 중심으로 한 구체제 귀족층의 수는 한정될 수 밖에 없으므로, 군대의 규모를 늘리면 늘릴수록 부르주아 출신들이 군대에 들어와서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훔쳐갈 것을 우려했기 때문.[69]독일 연방의 연방군과 구분하기 위해 제국군(Reichsheer)이라는 단어도 헌법에 혼용했다.[70] 이건 이미 독일 통일 당시 이 3개 왕국이 북독일 연방에 가입할 때부터 합의된 사안이었다.[71] 이 국가들은 전쟁성을 따로 뮌헨, 슈트트가르트, 드레스덴에 두기까지 했다.[72] 바이에른은 프로이센을 이은 제국내 2인자라 특별 대우를 받았다. 전시에는 작센과 뷔르템베르크 왕국군은 제국군으로 합쳐지는 반면, 바이에른 군대는 전쟁이 터져도 독자적인 지휘를 받았다.[73] 1%라고 하면 많아보일 수도 있겠지만, 독일 재통일 이전 서독의 병력이 전체 인구의 0.9%였고 동독의 병력이 전체 인구의 1.5%였다. 물론 현대 독일에서는 군대의 비율이 전체 인구의 0.3%에 불과하지만, 당시가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시대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적은 숫자였다.[74] 총참모부가 육군 규모가 끝없이 늘어나며 중산층 부르주아들의 입대가 증가, 비귀족 출신 장교들의 수가 늘어나자 장교단이 귀족들이 아닌 비귀족들로 채워질 것을 우려해 육군 증강에 속도조절론을 제기했다는 점도 눈여겨볼만하다.[75] 실제로 초창기 장교들은 대부분이 귀족 출신으로 매우 혈족적이고 귀족적인 계층이었다. 군의 확장과 함께 비귀족 장교들이 약간씩 늘어나긴 하지만 이들도 역시 동화되어 귀족적인 사고방식으로 물들었다.[76] 전시에는 군의 지도부가 야전군 사령부를 구성했고, 제1차 세계 대전 때에는 여러 야전군을 모아 몇 십만명 단위의 거대한 집단군을 꾸려 운용했다.[77] 작센 사단 4개와 뷔르템베르크 사단 2개를 포함한 수치다.[78] 전투공병이나 통신부대 같은 전문 지식이 필요한 특수병종은 소규모의 지원 부대로 조직됐다.[79] 1867년부터는 북독일 연방 해군이었다.[80] 이 연방해군은 1867년에 프로이센 해군을 거의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었다.[81] 독일 제국해군의 첫 사령관. 알프레히트 폰 슈토슈는 육군 보병대 출신 장군이다.[82] 본국과 식민지간 연락 및 경비 임무 등에 종사하는 함정을 일컫는다.[83] 다른 국가들에 비해 해군력이 빈약했던 독일 입장에서 작은 군함으로 더 큰 군함을 격침시킬 수 있는 가장 유용한 무기가 바로 어뢰였다.[84] 킬 운하로 인해 독일 선박이 북해와 발트해를 타국 간섭없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되면서 2개로 갈라져있던 독일의 해군력이 하나로 합쳐질 수 있었다.[85] 실제로 빌헬름 2세는 즉위 직후 해군 대제독을 겸임했고 영국, 러시아,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오스트리아-헝가리, 그리스 해군의 명예 제독직을 수여받았다. 영국 사절을 맞을 때 영국 제독의 복장차림으로 맞이한 적도 있을 정도다.[86] 원래는 군사내각이 육군과 해군을 모두 총괄했다. 그만큼 빌헬름 2세의 해군에 대한 열정을 알 수있는 부분. 해군내각은 장교의 임명과 승진, 행정과 해군에 대한 명령을 책임졌다. 구스타프 폰 센덴-비브란이 첫 내각 책임자로 임명되어 1906년에 게오르크 알렉산데르 폰 뮐러에게 직을 내줄 때까지 해군내각의 수뇌직을 유지했다.[87] 막스 폰 데어 골츠 중장이 첫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1889년부터 1895년까지 직을 역임했다.[88] 카를 에두아르트 호이스너 소장이 첫 청장으로 부임한 이래 프리드리히 폰 홀만 소장이 1890년부터 1897년까지 청장을 역임했다.[89] 개중 제국해군최고사령부는 1899년 해군참모본부로 개편됐다. 참모본부는 전시에는 전반적인 해군 지휘를 맡았지만 평시에는 자문 역할만 했다. 이로 인해 기존의 통합지휘체계가 조금 꼬여버렸지만 해군을 직접 통제하고 싶었던 빌헬름 2세는 이 개편을 반겼다. 게다가 티르피츠 역시 참모본부가 떨어져나가면서 전함 건조에 대한 간섭이 줄어들었기에 기편을 환영했다. 은연중에 전시에는 티르피츠가 해군을 통째로 장악해 본인 중심으로 운용하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물론 빌헬름 2세는 허락해주지 않았겠지만.[90] 빅토리아 루이제급은 독일이 진수한 마지막 방호순양함으로 1898년과 1900년 사이에 만들어졌다. 이 군함들에는 갑판 장갑은 있었으나 측면 장갑은 없었다. 예산이 부족해 전 구간을 비싼 장갑으로 둘러대기 힘들었기 때문.[91] 비스마르크는 통일된 독일을 안정화시키고 뒤에서 군사력을 강화하는 동안 해외 열강들의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면 티르피츠부터는 슬슬 열강들과 본격적인 경쟁을 시작했다.[92] 이 계획에 따르면 독일 함대는 프랑스나 러시아와는 충분히 겨뤄볼만한 수준으로 성장할 것이었으나 여전히 영국 함대에 비하면 약간 떨어질 것이었다.[93] 당연히 이 지출을 세금으로 떼우기란 불가능했다. 법안에도 이 지출에 대한 예산 한도를 정해놓지 않았고, 의회는 구성 제후국들과 협상하지 않고선 증세할 권한이 없었다. 따라서 이 막대한 예산은 죄다 막대한 차관으로 메웠다.[94] 영국은 이미 1906년 경이면 독일이 세계 2위 해군대국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예측했다.[95] 영국은 존 피셔의 주도로 대대적인 해군력 증강을 꾀했다. 17척의 전함을 포함해 154척의 오래된 구형 함선들을 스크랩 처리했으며 훈련과정과 함선의 결함을 보완했다. 영국 본토에 기함을 더 많이 배치했고 1902년 영일동맹으로 동아시아에서 전함을 빼와 유럽에 배치할 수 있었다. 게다가 1904년 영불협상으로 지중해마저 프랑스에게 맡기는데에 성공하면서, 영국은 영국 해협을 사이에 두고 독일만 견제하면 됐다. 1906년 기준 영국의 주요 적국은 바로 독일이었다.[96] 어뢰정에도 터빈엔진을 장착해 시험해보기는 했다.[97] 터빈엔진을 사용하면 더 빠르고, 조용하고, 무게도 훨씬 가벼웠다. 영국도 1901년 HMS 벨록스에 처음 도입한 최신 중의 최신 기술이었다.[98] 사실 독일은 그렇게 여유로운 상태가 아니었다. 영국 해군의 체질개선으로 더이상 독일이 쉽게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사라졌고, 1906년 기준 이미 나라 예산의 60%를 군비로 지출하고 있는 상태였다. 단순히 선박 뿐만 아니라 항구와 수문, 킬 군항 등 인프라까지도 새 드레드노트급 군함의 규모에 맞추어 확장해야 했다. 독일이 만들 드레드노트는 배수량 19,000톤, 척당 3,650만 마르크, 순양전함은 척당 2,750만 마르크인데다가 운하 확장에 6천만 마르크가 들어갔다. 그야말로 돈먹는 하마 그자체였다.[99] 측면장갑 두께가 대포의 구경과 같아야한다는 원칙이 도입됐고, 침수에 더 잘 견디도록 방수구획이 여러 개로 나뉘었으며 아직 증기터빈이 완전치 못해 3단 팽창 증기엔진을 사용했다. 포탑을 함선 중앙에 배치할 수 없어 측면에 배치해야했는데 때문에 측면 사격시 6개 포탑 중 2개는 항상 반대편에 있어 효율이 떨어졌다. 주요 무장은 28cm 짜리 함포 12문이었다.[100] 파슨스 터빈 4개를 사용해 속도가 27노트로 향상된데다가 무게도 줄였다. 4개의 쌍포탑에 28cm 함포가 장착됐고 중앙 포탑을 양측으로 발사할 수 있도록 개조하는 방식으로 이전 나사우급 전함의 결함을 보완해 성공작으로 평가받았다. 다만 1906년 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3,550만 마르크를 투입해야했다는 점은 단점.[101] 태평양에서 활약한 것으로 유명하다. 3,300톤 짜리 경순양함은 10개의 10.5mm 속사포에 속도는 24노트였다. SMS 드레스덴은 750만 마르크, SMS 엠덴은 600만 마르크가 들었다.[102] 각각 4,400톤 짜리로 비용은 척당 800만 마르크였다. 증기터빈을 달았고 주포로 10.5cm 함포 12개를 장착, 100개의 기뢰를 부설할 수 있는 장비까지 갖추었다.[103] 수면 배수량 238톤, 수중 배수량 283톤이었다. 등유로 작동하는 엔진은 수면에서 10노트의 속도로 움직였고 항속거리는 1500해리였다. 수중에서는 전기 배터리로 추진해 5노트로 50해리를 움직일 수 있었다. 이중 선체와 주요 격실 외부에 부유 탱크를 갖추고 있었으나, 아직 초기형이라 어뢰 발사관은 앞쪽에 1개에 불과했고 수송 가능한 어뢰도 고작 3개였다.[104] 배수량은 22,800톤, 6개의 포탑에 30.5cm 짜리 함포 12문, 최대 속도 21노트를 자랑했고 50cm 짜리 어뢰가 장착됐다. 비용은 척당 4,600만 마르크였다.[105] 특히 이 카이저급 전함은 모든 함포를 양쪽에서 일제 사격할 수 있는 설계라 총 포탑 1개를 줄였음에도 불구하고 화력은 더욱 강력해졌다. 배수량은 24,700톤, 가격은 4,500만 마르크로 저렴했기에 평소의 4척 대신 5척의 함선이 건조됐다. 이들은 대양함대의 제3전단을 이루었다. 개중 SMS 프린츠레겐트 루이트폴트 함은 순항을 위한 추가 디젤엔진 장착을 위해 증기터빈을 3개가 아닌 2개를 장착했는데, 이 엔진이 제때 개발되지 못하면서 최고 속도가 20노트로 줄었다. 다른 카이저급 자매함들은 22노트였다.[106] 선미 중앙에 추가 포탑을 추가했고, 이 역시 선미 포탑과 마찬가지인 28cm 짜리 함포였다. SMS 몰트케는 대양함대에 편입되었으나 SMS 괴벤은 지중해 함대로 갔다가 제1차 세계 대전 도중 오스만 해군으로 넘어갔다. 각각 4,260만 마르크와 4,160만 마르크에다가 최대 속도는 28노트다. 이후 몰트케급을 약간 개량한 자이틀리츠급 순양전함도 등장한다. 최대 속도는 29노트.[107] 1914년 4,500만 마르크를 들여 대양함대 제3전단에 취역했다. 28,500톤이었고 3개의 3단 터빈을 사용해 최대 속도는 21노트였다. 주무장은 30.5cm 포 2문을 탑재한 5개의 이중 포탑, 앞뒤에 2개씩, 중앙에 1개를 배치했다. 양쪽 끝의 2번째 포탑은 1번째 포탑보다 더 높게 올려져 있어 위에서 충돌하지 않고 발사할 수 있었다. 선체에는 어뢰를 막기 위해 어뢰망이 붙어있었지만 이로 인해 속도가 8노트까지 낮아졌고 결국 나중에 제거된다.[108] 최대 15노트[109] 그와중에 육군마저도 해군을 견제하며 육군 역시 프랑스 대육군의 규모에 뒤지지 않게 136,000명을 더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110] 프랑스는 대신 대서양 함대를 브레스트에서 툴롱으로 옮겨 영국 대신 지중해를 방어했다.[111] 퀸엘리자베스급은 15인치 함포를 장착했고 오직 석유로만 작동해 25노트의 속도를 냈다.[112] 독일은 전투순양함에 집중해 27,000톤, 최대 속도 27노트의 데어플링어급 3척을 건조했다. 각각 가격이 5,600만~5,900만 마르크였다. 30.5cm 함포 2개가 장착된 포탑 4개가 양쪽 끝에 2개씩 배치되었다. SMS 데어플링어는 대공포를 장착한 최초의 독일 군함이기도 했다.[113] 독일이 1913년 도입한 바이에른급 2척은 유틀란트 해전 이후에야 실전에 투입되어 제대로 써먹지는 못했다. 배수량은 28,600톤, 승무원은 1,100명, 속도는 22노트에 비용은 5,000만 마르크였다. 화포는 이전 순양전함들처럼 배치되었으나 구경이 38cm로 늘어났다. 8.8cm 대공포 4문과 15cm 경포 16문을 더 갖추고 석탄을 연료로 썼다. 바이에른급 2척이 전쟁 도중 추가발주되었으나 완성하진 못했다.[114] 1912년에는 900만 마르크에 러시아 제국이 발주한 경순양함 3척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전쟁이 터지자 바로 압류해 써먹었다. 전쟁 도중에 2척의 전함 SMS 비스바덴과 SMS 프랑크푸르트를 만들어 취역시키기도 했다.[115] 어뢰정들은 날로 크기가 커져서 1914년 건조한 V-25부터 V-30은 배수량이 800톤에 달했다.[116] 수상 비스마르크는 처음에 프랑스 내 여론을 고려해 알자스-로렌을 빼앗을 필요가 없다고 여겼지만 민족주의자들의 요구를 못이기고 결국 알자스-로렌을 강탈해왔다.[117] 전쟁이 프랑스 땅에서 벌어졌기에 프랑스는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국가들 중 하나였다. 프랑스 여론은 마치 나폴레옹 시기의 라인 동맹과 유사하게 라인강 동부를 독일에서 독립국가로 분리시켜버리고 싶어했고 베르사유 조약에서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물려 독일을 영구히 찢어버리고자 했다.[118] 영국 왕실은 독일에서 왔다. 하노버 왕조조지 1세는 독일 출신인데다가 아예 영어를 제대로 하지도 못할 정도였다. 영국 국왕은 하노버 선제후를 겸임하기도 했다. 1837년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며 여자는 하노버 왕위를 물려받을 수 없다는 살리카법 때문에 더이상 겸임은 하지 않았지만, 빅토리아의 어머니는 독일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였고 그의 남편 앨버트 공조차 독일 출신이었다. 영국 왕실은 독일과 아주 진하게 얽혀있었다.[119] 영국은 독일이 제2의 나폴레옹이 되려한다고 주장하며 독일을 견제했다. 독일이 벨기에를 침공하자 영국은 이 것이 훗날 영국 해협을 건너 영국을 침공하려는 단초라고 보아 참전했다.[120] 여기에 더해 적이기는 하지만 러시아 제국러시아 혁명으로 멸망해 19세기 동유럽을 주름잡던 3개의 제국은 20세기 초입에 모두 멸망했다. 그밖에 수많은 왕국이 소멸하는 등 제1차 세계대전 자체가 군주국의 처형대에 가까웠다.[121]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망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내의 독일인들은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을 세워 바이마르 공화국과 통일하려 들었지만 강력한 통일 독일의 출현을 경계한 열강들이 대번에 막아서며 실패했다.[122] 그리고 이 순간이 오늘날까지 독러관계가 가장 좋았던 지점이었다. 이후 양차 대전에서 독일은 항상 러시아와 적국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냉전으로 이념 대결이 이어졌다. 중간중간에 바이마르 시기, 탈냉전 시기 등 독러관계가 제법 나쁘지 않은 시기가 있긴 했으나 동맹에 준하는 사이라고 보기는 어려웠으며, 그나마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로는 사이가 좋아질래야 좋아질 수 없는 냉랭한 사이가 되었다.[123] 보스포루스 해협은 영국의 역린이나 다름없었고, 독일의 또다른 동맹국 오스트리아-헝가리도 러시아의 발칸 진출을 견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비스마르크라도 러시아 편을 들어주기 어려웠다.[124] 독일 통일 당시 미국은 중립을 지켰지만 여론은 독일을 지지했다.[125] 연간 1억 달러 상당의 값싼 미국산 돼지고기 13억 파운드가 무차별적으로 쏟아들어오자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등이 함께 추진한 보이콧. 미국이 독일산 사탕무 수입을 금지하겠다고 협박하자 결국 해제됐다.[126] 프랑스 내에서 쓰이던 제3계급을 비튼 표현이다.프랑스에서 제1계급은 성직자, 제2계급은 귀족, 제3계급은 시민으로, 앙시앙 레짐을 상징했다.[127] 토마스 니퍼다이는 이미 19세기 초반 독일 사회에서 부르주아 헤게모니가 관철되었다고 파악한다.[128] 도시와 가까운 농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공장에 출퇴근하는 식으로 제 밭을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도시와 멀리 떨어진 대부분의 농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가문 대대로 물려받아온 땅을 팔고 도시로 영구적으로 떠날 수 밖에 없었다.[129] 특히 독일의 제1적국이었던 프랑스와 비교하면 출산율 차이가 도드라진다.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 시기만 하더라도 러시아를 제외하면 유럽 최고의 인구 대국이었던 프랑스는, 근대화를 거치면서 19세기 내내 심각한 출산율 저하를 겪으며 인구가 거의 늘지 않아서, 이로 인해 제3공화국 당국이 머리를 싸매고 대책 마련에 고심하게 만들었다. 이후 20세기 내내 한때 머릿수로 압도했던 독일과 영국에 인구 수가 밀렸으나 1970년대 이후 이민자 수용과 출산율의 상승으로 인해 2022년 현재에는 영국과 인구 수가 비슷해졌다.[130] 이정도 규모의 이주는 유럽 내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었다.[131] 다만 광산업 도시들에서는 이야기가 약간 달랐는데, 이 곳에서는 숙련된 장기 노동자들이 필요했기에 이들이 장기적으로 정착할 거주지를 만들어줘야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광산 노동자들이 살 거주지나 공장 아파트들이 따로 제공됐다.[132] 개중 독일어와 외국어를 동시에 모국어로 구사하는 인구가 252,918명, 전체 인구의 0.45%가 포함된다.[133] 개중 폴란드어의 방언인 마수리아어가 142,049명으로 전체 인구의 0.25%다.[134] 개중 모라비아에서 쓰는 체코어 방언인 모라비아어 64,482명으로 전체 인구의 0.11%였다.[135] 폴란드와 구 동독지역의 슬라브계 소수민족들이 사용하는 슬라브파의 언어로, 폴란드어 방언으로 분류되기도 한다.[136] 다만 알자스로렌의 프랑스어 교사들은 여전히 프랑스어를 사용할 수 있었다.[137] 오직 가톨릭 종교교육만 폴란드어로 가르칠 수 있었다.[138] 심지어 루르 일대로 이주해간 폴란드인들마저도 폴란드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139] 청나라인도 제국이 그 거대한 덩치 덕분에 경제규모가 압도적이기는 했으나 청나라는 이미 망해가는 판에 시름시름하고 있던 판이라 덩치만 큰 종이호랑이에 불과했고 인도 제국은 영국의 식민지였다.[140] 1위는 32%의 거대한 비율을 자랑하던 미국이었다.[141] 특히 이 1886년의 불황으로 독일 사회는 상당한 타격을 입었고, 산업 발전과 근대화에 대한 회의론이 커져갔다.[142] 특히 농업은 건국 이래로 쭉 내리막세를 타고 있었다. 독일은 통일 전까지는 곡물 순수출국이었지만 1876년 이후부터는 쭉 곡물을 수입해야만 했다. 세계 곡물시장이 하나로 통일되며 미국러시아의 미친 듯이 저렴한 곡물이 쏟아져들어오며 독일의 농업 경쟁력이 큰 타격을 입었다.[143] 주목할 만한 점은 이 기간 실업자 및 퇴직자, 연금 수급자의 규모가 2배로 늘어났다는 것. 비스마르크 이후의 사회복지제도와 기대 수명 증가가 그 원인이었다.[144] 게다가 공장 밀집지대나 대도시 인근에는 소규모로 2차 농업을 하거나 정원 등 다양한 수요가 있었기에 땅 거래가 더 활발했다.[145] 인공 비료로 인해 수확량이 증가했고 시장접근 및 관세법 제정으로 토지의 가치가 올라간 덕이었다.[146] 가장 큰 자동차 회사는 3,000대의 자동차를 생산한 뤼셀스하임오펠 사였다.[147] 이 외에도 산업계와 민간의 전기 수요 급증으로 RWE나 EW 같은 에너지 기업들이 등장했다. 일반적으로 국가 및 지방정부와의 공급계약을 맺어 자기들끼리 공급 구역을 갈라먹는 방식으로 시장을 나누었다.[148] 이렇게 직원들의 수가 크게 증가하면서 기업의 경영권이 창업자에서 전문 고용인 CEO에게 넘어가는 회사들이 생겨났다. 특히 사내에서 노동자들을 사회민주주의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려는 사내 정책들이 발표되어 꽤나 성공적으로 적용됐다. 크루프 사에 일하는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크루피안'이라 불릴 정도로 애사심이 높았다. 당연히 노동조합의 영향력도 약했다.[149] 그렇다고 전통적인 형태의 기업들이 아예 사라졌다는 것은 아니다. 가내수공업은 여전히 일부 지방이긴 했지만 유지되었으며 시가 산업, 세탁과 의류 산업 분야에서는 오히려 가내수공업이 확대됐다. 공예도 마찬가지였다. 제화공이나 재단사는 호황을 누렸다. 건설이나 식품 생산 같은 오래된 산업들은 수요 증가 덕분에 오히려 가내수공업이 이득을 본 면도 있다.[150] 주황색은 개신교 절대다수, 푸른색은 가톨릭 절대다수, 짙은 보라색은 개신교 우세, 옅은 보라색은 가톨릭 우세 지역이다.[151] 특히 루르베스트팔렌 등 원래 가톨릭 대도시였으나 동부에서 몰려온 개신교도 이민자들 때문에 종교구성이 극적으로 변화한 지역들도 있다.[152] 특히 장교는 제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직업이었기에 장교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제한이었다. 프로이센 전쟁장관 카를 폰 아이넴은 1907년 대놓고 현역 장교단에 유대인이 침입하는 것은 나라에 해롭다고 비난했을 정도였다.[153] 물론 외무부 식민부 국장 베른하르트 데른부르크 같은 일부 예외가 있긴 했으나 당연히 극소수였다.[154] 물론 프로이센 정부와 의회의 자유주의 정당들이 거부하기는 했다.[155] 반유대 정당이 가장 많이 득표했을 때조차 고작 5% 정도를 넘지 못했다.[156] 독일 제국 성립 때까지 자유시로 존속하지 못한 한 곳은 프랑크푸르트인데, 보오전쟁프로이센 왕국에 병합되어 폐지되었다. 독일 제국 시기의 세 제국도시는 바이마르 공화국 수립 후 자유한자시로 일괄 개칭되었다가, 뤼베크는 1937년에 그 지위를 박탈당했고 나머지 둘은 현재도 존속하고 있다.[157] 군부는 신과 왕에게만 책임을 진다는 기조를 가지고 있었다.[158] 이로 말미암아 미국은 유럽 강대국에 대한 채무를 모두 청산하고 반대로 채권국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159] 이것은 단지 독일의 손해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배후중상설을 밀어붙인 독일의 기득권층에게도 재앙으로 다가왔는데 이들의 거점인 독일 동부 지역은 동독, 폴란드, 소련 세 나라가 나눠가지게 되었는데, 셋 다 당시 공산주의 정권이었던지라 지주인 이들로서는 버틸 수 없었다.[160] 1984년에 내용이 더욱 확장되어 The Peculiarities of German History라는 제목의 영어판으로 출간되었다.[161] 독일의 전신 신성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인 오토 1세가 제국을 침략한 헝가리인들을 몰아내는 그림. 1832년 작으로 은연중에 '하나된 제국'을 독일이 지향해야할 이상향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은근히 오토 1세를 나폴레옹을 무찌르는 데 앞장선 프로이센 육군원수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와 닮게 그렸다.[162] 작중 힌덴부르크가 음식도, 사람도, 탄약조차 없는데 어떻게 전쟁을 이기냐 말하는 장면이 있다.[스포일러] 루덴도르프닥터 포이즌을 필두로 한 휴전 반대파가 힌덴부르크를 비롯한 휴전 찬성파를 숙청해버리고 전선에 대규모 독가스 공격을 감행하려다가 원더우먼에게 저지된다.[164] 서부전선 배경[165] 동부전선 배경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불가리아 왕국과 함께 참전.[166] 전체적인 특징만 독일 제국에서 가져왔고, 세세한 부분은 바이마르 공화국과 초기 나치 독일에서 따온 것도 있다.[167] 시대상 빌헬름 2세다.[168] 근데 생긴 것은 영국의 스톤헨지와 비슷하다.[169] 원래 역사에서 독일 국민에게 전쟁의 당위성을 알릴 때 쓴 연설문을 비튼 것이다.[170] 슐리펜 계획의 패러디다.[171] 다만 2차 대전이 우스울 정도로 초토화된 본토와 후반부에 퍼진 전염병 때문에 전쟁 전 2제국의 형태로는....[172] 비동맹주의 독일제국을 만들고 1941년이 되면 복위한 빌헬름 2세가 죽고 아들이 3세로 즉위한다.[173] 가령 대령은 핀 3개가 꽂혀있는 식이라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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