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1 03:18:55

알프레트 폰 슐리펜


파일:독일 제국 전쟁기.svg 1900년~1913년의 독일 제국군의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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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66> 독일 제국군 육군 원수
알프레트 폰 슐리펜 백작
Alfred Graf von Schlieffen
파일:슐리펜.png
이름 Alfred Graf von Schlieffen
알프레트 폰 슐리펜 백작[1]
출생 1833년 2월 28일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사망 1913년 1월 4일
독일 제국 베를린
복무 프로이센 왕국군 (1853 ~ 1871년)
독일 제국군 (1871 ~ 1906년)
최종 계급 육군 원수(Generalfeldmarschall)
주요 참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주요 서훈 검은 독수리 훈장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군생활
3. 전략가로서의 슐리펜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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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프레트 폰 슐리펜 백작은 독일 제국군의 군인으로 최종계급은 원수이다. 독일 제국군의 참모총장을 역임하였으며, 슐리펜 계획으로 유명하다.

2. 생애

2.1. 초기

슐리펜은 독일의 귀족 가문이자 많은 군인들을 배출한 슐리펜 가문에서 육군 소령의 아들로 태어났다. 베를린에서 태어났지만, 슐레지엔에 있는 고향에서 살았으며 1842년에 학교로 인해 고향을 떠났다.

슐리펜은 베를린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였으며 처음에는 군대에 입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1853년 억지로 군에 입대하게 되자 사병 복무보다는 장교 복무를 선택하였다.

2.2. 군생활

1858년, 슐리펜은 프로이센 전쟁 대학에 입학하였고 높은 성적을 거두며 좋은 참모장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후 1861년 전쟁 대학을 졸업하였다.

1865년 슐리펜은 참모부에 속해 있었지만 딱히 큰 역할을 하지는 않았고,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당시에는 쾨니히그레츠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그 전투에서 포위전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도 종군하여 루아르 계곡에서 자신의 부대를 이끌었다. 이후 바덴 공작 프리드리히 1세에 의해 소령으로 진급하였으며 헬무트 폰 몰트케알프레트 폰 발더제와 몇년동안 함께 일했다.

1886년 12월 4일, 슐리펜은 소장이 되었다. 몰트케가 전역한 뒤 발더제가 참모총장이 되었고, 1888년 12월 4일 중장으로 진급한 슐리펜은 발더제가 참모총장이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참모본부 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893년 1월 27일에는 기병대장이 되었다.

이후 발더제가 참모총장 자리에서 내려오자 슐리펜은 그의 후임이 되었다.

슐리펜은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에서 헤레로족이 봉기를 일으켰을 때 트로타에게 헤레로족의 진압을 명령하였고, 독일인들에게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을 정당화하였다. 하지만 그 당시 총리였던 베른하르트 폰 뷜로는 독일이 더더욱 고립될 것을 우려해 슐리펜에게 명령의 철회를 권고하였고, 슐리펜도 이를 받아들였다. 결국 슐리펜은 이 일로 1906년 참모총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 전인 1913년 1월 4일, 베를린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언은 "오른쪽 날개를 강하게 유지하라"였는데, 자신이 짠 계획과 관련된 유언이었다. 그러나, 그의 후임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는 그의 권고를 무시하였고 제1차 세계 대전의 패배를 만들었다.[2]

3. 전략가로서의 슐리펜

슐리펜은 뛰어난 전략가였다. 슐리펜은 독일 제국군에게 징집제를 부활시켜 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더 잘 싸울 수 있게 대비하였다. 대체 부대라는 것을 만들어 야전부대를 지지할 수 있도록 하길 원했으나, 딱히 성과는 없었다.

게다가 슐리펜은 프랑스 침공 계획을 짜고 있었는데, 이를 통해 사실상 전 유럽을 상대로 하는 슐리펜 계획을 만들었다.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의 개전과 함께 시작되는데, 슐리펜의 후임 참모총장이었던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가 동부전선에 더 많은 사단들을 배치하며 망했다.

4. 기타

시계마냥 철저하게 시간표대로 생활하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새벽녘에 부관과 같이 바깥 순찰을 돌다가 부관이 아침 햇볕에 빛나는 프레겔 강을 보며 감탄하자, 흘끗 쳐다보고는 "사소한 장애물일 뿐!"이라 일갈하고는 제 갈 길을 갔다는 일화가 있다.

또한 영국 사학자 존 키건에 따르면, 슐리펜의 유일한 취미는 밤에 딸들에게 소설이나 동화책이 아니라 군사서적을 읽어주는 것이었다고.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슐리펜'으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 제2차 세계 대전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한스 폰 젝트가 소련과의 전쟁을 조심하라고 권고하였는데, 히틀러는 이를 무시하고 독소전쟁을 일으켜 결국 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