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4 16:58:22

쾨니히그레츠 전투

쾨니히그레츠 전투
Battle of Königgrätz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의 일부
날짜
1866년 7월 3일
장소
오스트리아 제국 보헤미아 왕국 쾨니히그레츠(Königgrätz)
교전국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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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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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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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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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카를 니콜라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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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베른하르트 폰 보이츠레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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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왕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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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3세(독일 제국)
프리드리히 왕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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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하르트 폰 블루멘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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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하르트 헤르바르트 폰 비틴펠트
]]엘베강 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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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명
]] 루트비히 폰 베네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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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왕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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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왕세자
]][[알베르트(작센)|
파일:작센 왕국 국기.svg
알베르트(작센)
알베르트 왕세자
]]
결과 및 영향
프로이센 왕국의 승리, 오스트리아 단일 제국 해체 및 이중제국 성립
병력 220,984명 238,000명
피해규모 사망자 1,935명 사망자 5,793명

1. 개요2. 배경3. 편제4. 경과5.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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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당시 프로이센 왕국오스트리아 제국의 전투이며 프로이센군의 승리로 끝났다. 사도바 근방에서 발생하였기 때문에 사도바 전투라고도 불린다.

2. 배경

보오전쟁이 발발하고, 프로이센 왕국군은 프로이센 국경 근처에 배치되어 있었다. 프로이센 왕자 프리드리히 카를의 제1군은 젠프텐베르크와 괴를리츠사이에 있었으며, 프리드리히 왕세자의 제2군은 슐레지엔에 있었다. 이에 오스트리아 제국군의 사령관, 베네덱은 올뮈츠에 있는 주둔지로 오스트리아군을 움직였고, 프로이센군의 참모총장이었던 헬무트 폰 몰트케는 오스트리아군의 주둔지 근처에 있는 지친(Jitschin)으로 진격시켰다. 우유부단했던 오스트리아군의 베네덱은 프로이센 제2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실패하였고, 프로이센은 더 나아가 쾨니히그레츠까지 진격하였다.

3. 편제

3.1. 프로이센 왕국군

총사령관: 빌헬름 1세
참모총장: 헬무트 폰 몰트케

제1군
총사령관: 프리드리히 카를 니콜라우스
참모총장: 콘스탄틴 베른하르트 폰 보이츠레츠
  • 5사단 (빌헬름 폰 튀플링)
  • 6사단 (알브레히트 구스타프 폰 만슈타인)
  • 7사단 (에두아르트 폰 프란체키)
  • 8사단 (하인리히 프리드리히 폰 호른)
  • AT
  • 2 군단 (슈테판 폰 슈미트)
  • 3사단 (아우구스트 폰 베르더)
  • 4사단 (프리드리히 헤르바르트 폰 비텐펠트)
  • CT
  • 기병 군단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알브레히트)
  • 1 기병 사단 (헤르만 폰 알벤슬레벤)
  • 2 기병 사단 (베노 한 폰 바이헤른)
  • CT
제2군
총사령관: 프리드리히 왕세자
참모총장: 레온하르트 폰 블루멘탈
  • 예비 기병 군단 (율리우스 폰 하트만)
  • 근위 군단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에버하르트)
  • 1 근위 사단 (빌헬름 힐러 폰 게르트링겐)
  • 2 근위 사단 (하인리히 폰 플론스키)
  • CT
  • 1군단 (아돌프 폰 보닌)
  • 1사단 (폰 그로스만)
  • 2사단 (카를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클라우제비츠)
  • CT
  • 5군단 (카를 폰 슈타인메츠)[1]
  • 9사단 (율리어스 루트비히 폰 뢰벤펠트)
  • 10사단 (휴고 폰 키르히바흐)
  • CT
  • 6군단 (루이 폰 무티우스)
  • 11사단 (하인리히 폰 자스트로)
  • 12사단 (페르디난드 폰 프론진스키)
  • CT
엘베강군
총사령관: 에버하르트 헤르바르트 폰 비틴펠트
참모총장: 루트비히 폰 슐로하임
  • 14사단 (휴고 에버하르트 추 뮌스터마인회벨)
  • 15사단 (필리프 카를 폰 칸슈타인)
  • 16사단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에첼)
  • AT
  • 1 예비 군단(구스타프 폰 데어 뮐베)

4. 경과

프로이센군과의 접촉 이후 큰 손실을 본 베네덱은 황제에게 평화를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했다. 이로 인해 베네덱은 오스트리아 군을 이끌고 프로이센군과의 전투를 준비하였다. 프로이센군은 7월 2일, 사도바 근처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발견하였고, 그렇게 전투는 시작되었다. 7월 3일 약 238,000명의 오스트리아 군은 에버하르트 헤르바르트 폰 비틴펠트 휘하의 엘베강 군과, 프리드리히 카를 니콜라우스의 제1군을 발견하였다. 오전 8시, 오스트리아 군은 프로이센군을 향해 포를 쏘며, 전투는 시작되었다. 그러면서 오스트리아 제국군과 작센군은 순조롭게 후퇴할 수 있었다. 그때, 에두아르트 폰 프란체키 휘하의 제7사단이 오스트리아군을 발견하였다. 7사단은 제2군이 도와주기를 원했으나, 빌헬름 1세는 제1군의 도움을 받기를 원했다. 사도바는 점령했으나, 인근 숲에서 전투는 계속되었다. 프로이센군은 강을 건너기 힘들어했다. 왜냐하면, 포병은 사실상 강을 못 건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군은 프로이센군의 작은 공세를 저지하였으나, 기병을 이용한 확인사살은 하지 못하였다.[2] 정오에 후방부대가 도착하지만, 별 소용이 없었고, 제 1군을 기다릴 뿐이었다. 이때까지만해도 오스트리아군이 우위를 갖고 있었다. 무기도 프로이센군보다 좋았고, 프로이센군은 동원한 3개 군단중 2개만 제시간에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숲에서의 근접전과 습한 날씨는 프로이센군에게 우위를 가져다 주고 있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군은 11시, 숲에서 근접전을 버리고 있던 프로이센의 7사단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카를 폰 포크 대령의 대대는 몰아내는데 성공을 하였지만, 프로이센군에 의해 포크 대령은 전사했다. 이후에도 계속된 전투가 있었으나, 어느 한쪽에 우위를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오후 2시 30분, 마침내 프리드리히 왕태자의 군대가 도착했다. 결국 베네덱은 오스트리아군의 후퇴를 명령하였으나, 일부는 남아서 반격을 했다. 프로이센의 제1군 입장에서 오른쪽에는 프리드리히 왕태자의 2군이, 왼쪽에는 에버하르트 헤르바르트 폰 비틴펠트의 엘베강 주둔군이 있었다. 즉, 일부 반격하는 오스트리아군을 세개의 군이 공격한 것이다. 당연하게도, 프로이센군을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그렇게 오스트리아군은 크나큰 손실을 입었다. 그리고 베네덱은 엘베강을 건너서 황제에게 자신이 우려하던 상황이 발생하였다고 말했다. 베네덱은 이 일로 사임당했다.

5. 이후

쾨니히그레츠 전투는 보오전쟁의 승패를 사실상 결정한 전쟁이었다. 그리고 프로이센에서는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쾨니히그레츠 행진곡을 썼다. 오스트리아는 이 전투 이후 패배를 직감했다.
[1] 오스트리아군을 쾨니히그레츠까지 후퇴시키기는 하였지만, 정작 이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했다.[2] 이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전투에서 졌다고 분석한다.